최근 글 목록
-
- 오래된 반복...!!
- 우중산책
- 2015
-
- 10월 17일 오후 2시.
- 우중산책
- 2012
-
- 2012년 10월 17일새벽2..
- 우중산책
- 2012
-
- 2012년 10월 16일 밤.
- 우중산책
- 2012
-
- 2012년 새로운 일상....
- 우중산책
- 2012
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간만에
정말 간만에
거의 잊고 지내다가 간만에
김수영 시집을 샀다.
원래는 다른 책들을 구경갔다가
거의 충동적인 구매욕이 들어서
집에 분명 김수영 시집이 한 권 있는데도
참을 수가 없어서 샀다.
역시 좋았다.
눈물나게 좋았다.....큭큭
그 방을 생각하며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사지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슨 펜과 뼈와 광기 ------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잔재 대신에
다시 쓰디쓴 담뱃진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풍성하다
아 ! 넘 좋지 않나 ?
마치 나의 이야기인것처럼
시는 그렇게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는 것 같다.
시가 사람을 바꾼다면 아마도 이성이 아니라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감성일 것이다.
아니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심성이 아닐까 .......^^;;
김수영을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때이다.
뭐 처음 읽은 것은 중학교 3학년때
도서부장 하면서
도서관의 책이란 책은 다 읽기 시작했을땐데
그때는 뭔 소린지 몰라도 그냥 아 ! 좋군...뭐 이따위 생각으로 읽었었는데
고등학교시절
한창 까뮈를 읽고 있을때 시 한편이 아 ! 난 어떻게 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막막한 느낌을 주었을때 그 이후로 시집을 사서 읽고 읽고 또 읽고 ...........
그렇게하면서 좋아졌다.
그때 시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다.
한없이 소심하고 한없이 쪼잔하기만 했던
그 쪼잔함에 그 소심함에 기가죽어 자취방에 틀어박혀 지낼때
아 ! 뭔가 울컥하는 것이 느껴진 시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情緖로
가로놓여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있다 絶頂 위에는 서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十원 때문에 一원 때문에우습지 않느냐 一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1965. 11. 4>
항상 자신의 조그마한 이익에 분노하면서
항상 중요한 일들에 비껴서서 묻어 가기만 하는 삶
두렵기도 하고 뭔가 용기도 안난다는 이유로
괜히 주변의 사소한 것들에 화내고
사소한 것들을 무시하면서 가는
어쩌면 내가 증오해 마지않는 자본주의의 전형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눈이 마음이 시큰하지 않는가 ?
그때 그렇게 결심했던 것 같다.
용기있게 살자고
조금만
단지 한 발자국 정도 라도
남의 아품에, 시대의 아품에,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앞서지는 못하더라도 단지 한 발자국이라도 용기있게 다가가는 삶을 살자고........
지금 생각하고 반성하고...골똘이 골똘이 챙겨보아도
과연 이 나이되도록
그렇게 살아 오기는 했는지....한숨만 나온다.
절 망
風景이 風景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速度가 速度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拙劣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救援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絶望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1965. 8. 28>
솔직히 요즘 그동안 해오던 시민사회단체일들을 정리하고
하루벌어 하루먹는
돈벌어야 사는 삶을 살고 있는 요즘은
왠지 스스로 의기소침하고 누구말대로
너 ! 절망했냐 ? 라는 식의 말을 듣는 지금
어쩌면 나 스스로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이나 그동안 해왔던 활동들에 대한 정리들 없이
너무나 성급히
너무나 생각없이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퍼득 들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
우리가 꿈꾸던 사회
자본과 재벌과 모든 독점과 차별을 철폐하는
진정한 자유와 인간다움과 연대와 활력이 있는 사회
그런 사회에 대한 꿈과 필요성...살고싶은 욕구가 줄어들기는 커녕
한국사회에서 나날이 이런 사회로의 발전가능성이 줄어들고
사람들은 극단으로 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나란 인간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싸워야 할까 ?
아 ....그림자가 없다
우리들의 敵은 늠름하지 않다
우리들의 敵은 카크 다글라스나 리챠드 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惡漢이 아니다
그들은 善良하기까지도 하다
그들은 民主主義者를 假裝하고
자기들이 良民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選良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會社員이라고도 하고
電車를 타고 自動車를 타고
料理집엘 들어가고
술을 마시고 雜談하고
同精하고 眞摯한 얼굴을 하고
바쁘다고 서두르면서 일도 하고
原稿도 쓰고 치부도 하고
시골에도 있고 海邊가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散步도 하고
映畵館에도 가고
愛嬌도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우리들의 戰線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우리들의 戰線은 당게르크도 놀만디도 延禧高地도 아니다
우리들의 戰線은 地圖冊 속에는 없다
그것은 우리들의 집안 안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職場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洞里인 경우도 있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의 모습은 焦土作戰이나
[건 힐의 昊齒모양으로 활발하지도 않고 보기좋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언제나 싸우고 있다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밥을 먹을 때에도
거리를 걸을 때도 歡談을 할 때도
장사를 할 때도 土木工事를 할 때도
여행을 할 때도 울 때도 웃을 때도
풋나물을 먹을 때도
市場에 가서 비린 생선냄새를 맡을 때도
배가 부를 때도 목이 마를 때도
戀愛를 할 때도 졸음이 올 때도 꿈속에서도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
授業을 할 때도 退勤時에도
싸일렌소리에 時計를 맞출 때도 구두를 닦을 때도 ...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차있다
民主主義의 싸움이니까 싸우는 방법도 民主主義式으로 싸워야 한다
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民主主義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
하…… 그림자가 없다
하…… 그렇다……
하…… 그렇다……
아암 그렇구 말구…… 그렇지 그래 ……
응응…… 응 …… 뭐?
아 그래 …… 그래 그래.
<1960. 4. 3>
그럴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라는 것이 이젠 도입이 아니라 삶이 되어버린 한국에서
어딘들
내 가정 나의 인간관계속에서든
신자유주의적인 냄새가 나지 않는 곳이 있으랴
어디든 그런 버려야 할 것들이 넘쳐나지 않는 곳이 있으랴.................
적은 언제나
보이지 않지만
강력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동지라고 생각했던
민주노동당 혹은 민주노총 혹은 시민사회단체에도
결국은 우리의 신자유주의자인 적들이 있을 것이다.
그냥 시집을 읽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내 자신의 한심함과 내 자신의 소심함을 보며......................
오늘도 술한잔을 할 것 같다.
그래도 김수영 시를 읽었는데
이런 날 맘편이 술한잔 안하면 넘 슬프지 않겠나........!!
죽어서
너무나 갑작스럽게 죽어서
더욱더 시인이 되어버린 김수영의 마지막 시란다.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1968. 5. 29>
술먹고
그냥 누워서 자야 겠다.....오늘은......^^

내친 김에 들렀다.
아산방조제가 보이는 곳의 작은 동산위에 우뚝(?) 서있는 성당이다.
누군가가 이 곳에 피정을 온 적이 있다는 아사미사한 이야기를 듣고
아 ! 피정...음....뭐 이런 적이 있었던 그 성당이다.
이 곳 근처에 무수하게 많은 순교 성지중의 한 곳이고
따라서 나 같은 어줍잖은 사람들보단 신자들이 찾으면 더욱더 감회가 새로울 그런 성당이다.

이 근처 혹은 아마 충청도 에선 제일 먼저 건축된 고딕양식의 건축이다.
워낙 어디 사진에서나 보아오던 고딕양식이니 하는 단어가 생뚱맞아서
건물에 대한 자세한 것을 알아보기 보단
그냥 아 ! 좋구나 하는 생각으로 바라보는 맛이 좋은 그런 성당이다.

아직 쌀쌀한 바람 탓인지
하늘이 파란만큼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날씨였는데도
왠지 답답한 마음이 확 열리는 그런 기분으로 멍하니 첨탑 끝을 쳐다보았다.

아 ! 높군......크크크.....^^
원래 이 곳은
공세곶지로
일명 공세조세창이었던 곳이다.
일명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조세미를 보관하고 있다가 바로옆의 뱃길을 이용하여
한양으로 싣고 가던 그런 곳이다.
지금이나 그때나
세금은 매우 중요했음으로
이곳에는 창고를 중심으로 성벽이 둘러싸고 있고
포구쪽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곳이다.
나중에는 박해받던 천주고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런 곳에 숨어 들어 왔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았는지 나중에 잡혀가 결국 순교했단다.
나중에는 청일전쟁의 시발점이 이 곳 공세에서 시작되어
결국 청나라가 쫓겨나고
일본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를 집어삼킨게 된
시발점이 된 곳이기도 하고...............................!!
사람 통행이 많다보니
이런 저런 아픈 기억들, 사연들이 많은 곳이다.

성당 건물은 1922년(?) 정도에 건립된 것으로
성당과 교육관이 있다.

작은 동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산 주위를 따라 산책코스도 있고
그 산책코스를 따라서 예수가 본디오 빌라드의 재판부터 못박혀 죽기까지의 일생이 동상으로 재현되어 있다.
성당 내부는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엄숙함과 고요함.....그리고 뭔지 모를 이끌림이 있다고 할까 ?

부는 바람만큼이나 왠지 조용하게 만드는 곳이다.
물론 성당에는 당시 순교한 박씨 3형제의 묘와 비석이 남아 있고
언덕 아래로 오즘사람들의 피정을 위한 신축 건물이 있다.
성당 앞 마당 지하에 성체조배실이 있는데 그곳을 따라
옛 성채의 일부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성당 자체가 성벽위에 올라타고 있는 것 같이 조성되어 있는데
아직도 옛 성백이 무너지지 않고 쓸쓸히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언제나 고즈넉함을 넘어선 뭔가 애잔함을 느끼게 하는 풍경이다.

난 이런 풍경을 볼때마다
세월이랄가 하는 뭐 그런 무게감을 느낀다.
그 영화롭던 세월은 다가고
이렇게 성벽은 어떤 빈가의 담이 되고
어떤 성당의 담이 되고
온갖 잡목들에 둘러싸여진 음침한 곳으로 물러나 앉아 있는가 하는 생각들이 든다.

이집 뒤로 보이는 나무들이 성벽위에 자라고 있는 나무들이다.
지금은 이 집마저 폐가가되어
마치 성벽이 폐가를 감싸고 있으면서
같이 폐가가 되어버린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드러낸다.
그 길을 다라 조금 더 내려오면 보이는 것이 일부만 남아있는 성벽과 비석들이다.

지금은 어떤 집의 담장으로 쓰이는데 담장 높이가 거의 그 집의 지붕만큼 올라가 있다.

공세 조세창이 있었다는 설명문과
해운판관비석들이 찾는이 없는 어느 담장 넘어에 외로이 서있는 것이
이젠 어느 조그마한 시골동네로 전락해 있는 공세라는 동네 만큼이나
안스럽고 서글픈 표정들이다.

둔덕처럼 변한 성벽위에서
바닷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저 대나무 처럼
사철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사람들의 인생도, 마을의 풍경도
어느 누구하나 기억못할 정도로
문득 잠에서 깨면 바뀌어 있는 것일까 ?
바다나 보러 가야 겠다.........................^^

바다에 한 발적시고 있는 저 끈처럼
역시 공세에서 봤던
서글픔은 바다를 닮았던 것 같다.
보면볼수록
공세라는 마을이 안고 있는 세월의 풍상을
누구보다도 자세히 알고 있다는 듯
세월의 때가 느껴지는 바다다.

근 두 달째 놀고있다.
좋은 표현으론 기다리는 것이요,
활동을 위한 충전의 시간이요,
쉼과 회복의 시간이라고 할까 ?
뭐 이런 저런 거 다 치우면 할일없어 놀고 있는 것이다.
놀다 보면
그래도 백수 체면을 생각해서
좀 바쁘게 지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여기저기 돈 안드는 답사들을 다니는 중이고( 물론 누군가의 희생을 발판 삼아서.....)
이것저것 배워볼 요량으로 기웃기웃 손을 놀리는 중이다.
한 한 달전부터 디카라는 것을 구해서
잠시 돌아다니는 답사여행 사진도 찍고
이런 저런 귀동냥으로 사진이라는 것에 관심을 가져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달리는 차안에서 무지하게 달리는 사진을 수십방 찍었더니
마치 내가 무슨 폭주족처럼 그 속의 속도에 현기증이 느껴진다.

백수라는 것이 원래 한량이요, 한량이라는 것이 원래 건달이니
건들건들 몇달을 지내다가
난데없이 이런 분주한 속도전에 가세하면
당연히 속이 메스껍고 현기증이 나게 마련이라지만
좀 찍어논 사진을 보고 있노라니
점차 애달픈 심정이랄까...묘한 향수에 젖어든다.

아마도
잠시 쉰 것이 탈이났던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가 꼬여 있든지.........

솔직히
매일 먹는 술에 쩔어서
변변한
운전면허증하나 없어서
폭주족이니 뭐 그런 속도를 즐기는 스포츠(?)를 해본 적은 없으니
이런 속도감에 향수병걸릴리 없고..........
워낙 인간이 못나서
사람많은 곳은 체질적으로 맞질 않으니
뭐 도시환경이 부러워 향수에 젖을리도 만무하고......!
난 오히려 이런 적막한 시골길 가는 것을 좋아하는 부류다보니........!!

한참을 달려서 이런 시골길 나오면
잠시내려 담배한대 피워물고
지나가는 찬바람을 마셔본다......

사람사는 동네에 사람 흔적없이
조용히 바람 흔적만 느껴질때쯤
다시 차에 올라타 도시로 돌아오다보면..........

멀리서 불야성 이룬 도시의 불빛이
무서우리만치 빠르게 나에게 다가온다.
이러니 이런 속도감에서 현기증이야 당연히 따라붙는 진드기라하더라도
왠 난데없는 향수란 말이냐...............

다시 달리는 차속에서
물끄러미 밖을 쳐다보며
이런 저런 궁리들을 하고 또하고.....
에이..씨벌 하는 욕지기가 목구멍가지 올라 올 때 쯤이면.............

도시 변두리의 집에 도착한다.
..............
뭐 백수가 달려봤자
얼마나 달리겠는가.....
그래도 돈안드는 집구석에 돌아와
대자로 누워
이런 저런 마저 다하지 못한 생각들을 이어서 하다보면
다시 술 한잔 생각이 나고
술한잔하면
그때서야 또렷해진 정신에 퍼득 떠오르는 것이다............!!
아 ! 내가 너무 쉬었구나......!
이러다가
살아가는 속도마저 잃어버릴가 싶어
안달이 났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곧 봄도 오는데
할일을 찾아야 겠다..............!!
아산시에서 두번째로 들른 곳이 둔포면 신항리다.
보통 이 곳 아산시는 청주에서 1시간에서 2시간 내의 가가운 곳이라서
자주 답사 내지 바람 쐬러 오는 곳이다.
특히, 이번 답사에서는 빠졌지만
외암리 민속마을이나 맹씨행단은 1년에 2-3번씩은 오는 곳이다.
그런에도 아산시 북쪽에 있는 이 곳은
계속 오려고 눈여겨 보긴 했지만
왠지 멀게느껴지는 심리적 거리감으로 인해 한번도 와보지 못했던 곳이다.
막상 차로 달려보니 맹씨 행단에서 20여분 정도의 시간밖에 안걸리는데도
왠지 멀게만 느꼈던 것으로 보아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참 요상하긴 한가보다.
아산시에서 잘닦여진 45번 국도를 따라 둔포방면으로 가다보면
신항리 입구라는 이정표가 나오고 이정표를 따라 한 5분이 안되게 들어가면
해평 윤시들의 한옥을 볼 수 있다.
보통 길가의 이정표를 신항리보다 윤보선대통령 생가라는 표지가 훨씬 크게 나와 있다.
이 표지판을 보고 오면 윤보선 전대통령의 생가이자 해평윤씨들이 지은
약 100년이 좀 넘어보이는 한옥집들이 나온다.
마을길을 따라 마을을 들어가다보면 중간쯤에 솟을대문이 나온다.
다른 어떤 마을에서도 본적없는 독특한 솟을대문이
이 마을의 해평윤씨 한옥집들의 특징을 말해준다.

이 솟을 대문과 그에딸린 행랑채가 끝나는 왼족에 원래는 담이 있어야 할 곳에
지금은 길이나 있다. 그리고 물론 대문도 잠겨져 있다.

그 잠겨진 대문 안쪽으로는 지금은 풀만 무성하게 자라 있는데
그 너머에 당연히 나와야 할 사랑채 혹은 안채 뭐 이런
한옥의 일반적인 집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잡들이 서너채가 나온다.
마치 이 솟을 대문이 이 마을 전체의 대문 역할을 하듯이
덩그란이 독립된 형태로 서 있고 그 안쪽으로 한옥집들이 별개의 대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마치 서원 입구에 서 있는 홍살문처럼
이 문이 해평윤시 일가들이 모여 사는 이 한옥들의 전체 대문 역할들을 하고
안에 있는 한옥들은 일면 평범해 보이는 기능성이 강조된 작은 대문들을 가지고 있다.
처음 나오는 집은 대문을 통과하여 계속 진행되는 길을 중심으로 옆으로 늘어서 있다.

방향이 거의 서향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납쪽 혹은 동남쪽을 향하지 않고
그저 대문을 통과한 동선에 맞추어 길옆에 요즘의 무슨 가게처럼 늘어서 있는 형국이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아 퇴락한채 쓸쓸히 망가져 가는 듯한 인상이다.
형식은 민도리집으로 조선말 혹은 일제초기의 전형적인 한옥집의 양식이다.

그 건축의 시대적인 특징인지는 모르지만
집안 곳곳에 이 문처럼 서양양식이 가미된듯한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건축년대가 100년정도 즉, 조선 개항후임을 알수가 있다.

길을따라 늘어섰다는 단점을 커버하기 위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시원한 마당의 느낌 뭐 이런 것보다는 왠지 답답한 느낌이 주로 들 정도로
전통 흙담이나 붉은 벽돌로 막아 놓아서 공간공간들이 독립적이긴해도
막힌 느낌이 많이나는 편이다.

다음 집도 비슷하게 길을 따라 서향으로 배치되어 있었지만
다행스럽게 사람이 현재도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아는 하고 잘 정돈된 느낌을 준다.


현재 살고 있는 집들은 거의 대다수가 문을 잠가두고 집주인이 외출한 관계로
들어가 보지 못해 많은 아쉬움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누구에게나 개방되어져 있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생가로 걸어갔다.
윤보선 대통령의 생가는 솟을대문에서 시작되는 길을 따라가지 않고
솟을대문을 들어서서 왼쪽으로 바로 보인다.
높은 담에 둘러싸여 있고 유일하게 별도의 솟을대문을 가지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아 ! 저기가 거기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어 주는 곳이다.
솟을 대문 자체가 이빚이 처음생길때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전체적인 이 동네의 집들을 보아서는 윤보선대통령이 이후 정치적인 출세를 거듭하면서
개축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솟을 대문 옆으로 담장이 이어져 있지 않고 차가 들어갈수 있도록 담의 일부를 헐어버려서
누구나 대문을 통과하지 않고도 집구경을 할 수 있는 집이다.
한옥집이 아무도 살지 않아도 집이 금방 퇴락하지만
사람이 살면 그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이정도의 개축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냥 대문밖에 주차해도 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시골동네임에도 꼭 차를 대문안까지 끌고 들어가기 위해 담을 헐어야 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실제 그 집에서 살지않고
그냥 이렇게 구경만 다니는 관광객의 입장이기에 생기는 감정이리라 자위했다.
여기서 참고로 윤보선대통령에 대해 이야기하면
워낙 최근가지 생존했던 사람이니
알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노파심에서 이야기하면
우리나가 제 4대 대통령이다.
대통령으로만 보면 이승만 다음이고 선거로 보면 4대 대통령이고
헌법의 개정으로 보면 제 2공화국 대통령이다.
그리고 실제로는 내각책임제로 인하여
그 실권을 갖지 못해 사람들이 대통령인 것은 알지만 언제인가 잘 모르는
참으로 애매모호한 사람이다.
4.19 혁명이후 들어선 정권 자체가 단명한 이유도 있지만
내각제 실시로 인해 총리 이름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그 정권을 장면정권 혹은 장면내각이라 부르니
당시 대통령인 윤보선은 상대적으로 덜 부각되는 경향인 것이다.
여하튼
박정희의 군사구데타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나고도
1990년까지 생존했으니 그 뼈져린 감흥이야 어떠했으랴.......
실제 장면 내각이 집권했을 당시 민주당의 신,구파의 분열과 사회적으로 많은 혼란스러움이
있었다고는 해도 실제 그렇게 크게 잘못한 부분이 없음에도
당시 박정희에 의해 이루어진 정권탈취는 이후 군사정권에 의해
장면과 윤보선 등에게 무능과 무절제, 부패의 이미지를 온통 뒤짚어 씌웠고
이로인해 제대로된 평가를 받지 못한 불우한 사람들이다.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을 지낸 사람들중
솔직히 윤보선이나 장면보다 비리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대통령이 누가 있겠는가 ?
실제 박정희는 자신이 집권한 후에도 이들 윤보선과 장면에게 정치활동을 못하게 했을망정
어떠한 비리나 잘못을 처벌하지 못했던것처럼
사실은 이들은 아직 채 자신들의 어떤 정책들을 펴보지도 못한 채로 박정희의 권력욕에
자신들의 모든 것들을 잃어야 했던 것 같다.
솔직히 아직 4.19 이후의 상황에 대한 명확한 검증들이 없고
아직도 박정희 망령이 한국사회를 옥죄는 상황에서
그 잘난 노태우니, 전두환이니, 김영삼이니 하는 정치범죄형에 가가운 대통령들의 생가도
복원하고 관광지로 만드는 판에 문화재적 가치가지 있는
또 한명의 전임대통령의 생가는 퇴락한 채로 방치되는 현실이 못내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윤보선이나 장면은
국민들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려는 정책으로 인해 욕을 먹었지만
노태우나 전두환이나 김영삼은
최대한 개인적 이익을 극대화한 공로 이외에 무엇이 더 있겠는가 ?
당시 박정희의 집권을 바라본 김수영시인이
" 이제 한국은 다시는 자유를 만끽하지도
만끽한 자유에 대한 책임의식을 배울기회도
진정한 민주주의를 배울 기회도 잃어버렸다 " 고 울면서 이야기 했단다.
자유가 지나쳐 다소 방종하기로서니,
민주주의를 실행하면서 다소 혼란스럽다고해서
반만년만에 처음으로 만끽하는 자유, 민주주의를
훼손할 만큼 죄를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꼭 이렇게 군대처럼 국민들을 일렬로 줄세우고 무책임하게 강요하고
개패듯이 몰아부쳐야 하는 것인지를 물었던
김수영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어쩌면 제대로 자유니 인권이니 민주주의니
그리고 사회적 책임의식이니 하는 것들을 배워보지도 못하고 빼앗긴 것이다.
그러니 요즘에도
어느 한 정치인도 국민에 대한 책임의식이 없고
어느 한 개인들도 공동체적인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이 없는 것이다.
한국의 국민성이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배우려 했는데
총칼로 위협해 배우지 못하게 한 박정희와 그 떨거지들이
이제와서 국민들에게 책임의식좀 가져라 소리치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 가 중요한 것이다.
자유란 책임이므로.....
갑자기 오바를 했다.
뭐 여하튼
이런 것이 답사의 재미 아니겠나 싶다.
잊혀진 것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되짚어보게하는 힘.....!

새로 지은 솟을대문만이 위로 덩그라니 솟아 있고
왠지 사람들이 사는 집임에도 퇴락해 보이는 윤보선 생가를 보면서
언듯 박정희생가가 떠올랐다.
자신의 정치적 출세를 위해 자신의 친척까지도 밀고했던 박정희가
자신의 출세를 위해 민족까지도 팔아먹었던 박정희를
뭐 기억할게 있다고 생가를 복원하는지 말이다.
그곳에 가서 구경하면서
아 ! 나도 친척 팔아먹고
민족 팔아먹고
자유 짓밟아서 권력만 잡으면 된다...뭐 이런 생각하려고 기념하는 것인지....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