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당 건설의 역사와 ‘비판의 자유’에 대한 교훈
- 이탈리아 공산당과 그람시의 교훈
-사노위 강령실무위원 이형로
‘신질서’와 ‘공장평의회운동’으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의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PCI(이탈리아 공산당)에서 스탈린의 정책을 이식하는 핵심인물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게다가 그 핵심 조치가 바로 트로츠키에 우호적이었던 보르디가 경향의 글을 삭제시키고, 결국 당의 공식 매체에서 출판 금지시키는‘언론통제’였다는 무거운 사실을 그 후예들이 알지 못하거나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아 이글을 시작한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건과 혁명분파 구성에 머뭇거린 ‘신질서’그룹
1892년Genoa에 의해 창건된 PSI(이탈리아사회당)는 개량주의 세력의 지배아래 1917년 전까지는 맑스주의 혁명적 원칙을 고수하는 진정한 좌파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1917년로마대회 이후‘비타협적 혁명분파’가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전쟁 후 평화적인 삶”이라는 당내 개량주의 다수파의 주장에 대항하여 아직 소수였지만 혁명분파는 “노동자계급 스스로의 독재를 세우기 위하여 모든 나라에 프롤레타리아의 권리를...”, “정치적 영역뿐 아니라, 자본가에 대한 사회주의적 몰수를 통하여 모든 부르주아 기구에 대한 투쟁을...”이라는 강령을 방어했다. 당시 보르디가가 주도했던 혁명분파는 당의 분리를 원하지 않았는데, 위와 같은 혁명적 강령으로 당의 다수를 획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1920년 3월 토리노에서 열흘 동안 총파업이 일어났을 때, 주류 법적노조의 지원을 받는 PSI(이탈리아사회당)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노동자계급을 배신했다.
1919년 5월1일 그람시, 톨리아티, 타스카는 신질서(L'Ordine Nuovo)의 창간호를 발간하였고, 당시 파업이 일어난 지역인 PSI의 토리노그룹은 보르디가가 이끌고 있었다. 그런데 그람시는 레닌과 De Leon의 혁명적 쌩디칼리즘을 묘하게 섞어 “노조주의가 공장평의회와 소비에트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보르디가는 핵심문제를 혁명당의 부재라고 보았다. 보르디가도 물론 평의회를 지지했지만, 평의회가 “공산주의당 지역단위”의 기반 위에 형성될 때 비로소 혁명적 내용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신질서와 논쟁했다. 그런데 정작 보르디가가 신질서와 논쟁한 이유는 이론적 문제를 떠나 신질서 그룹이 개량주의 극대주의자, 중앙파와 선을 긋고 스스로 혁명분파로 구성하는 것을 주저했기 때문이었다. 당의 다수파인 개량주의 세력이 노동자계급의 투쟁에서 배신을 하거나 당의 구조가 혁명적 강령을 실천할 구조가 갖춰져 있지 않을 경우, 혁명적 원칙을 방어하고 개량주의 세력에 넘어간 노동자계급을 혁명 강령으로 비틀어 빼내오기 위해서는, 당내 기반과 일부 건강한 인자들을 포기하더라도 그들과 분명하게 선을 긋고 단절하는 것은 혁명조직의 원칙이자 노동자 계급에 대한 신뢰를 지키는 일이다. 당시의 신질서 그룹은 혁명당의 역할과 혁명 강령의 실천적 의미를 소홀히 인식한 결과 개량주자들과의 단절을 주저했던 것이다.
결국 1920년대 말신질서 그룹은 보르디가 분파로 움직이게 된다. 9월의 공장점거투쟁 실패가 “경제관리”와 “노동자 통제”이론에 대한 심각한 타격을 입혔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정적으로 보르디가가 강조했던 “공장점거 투쟁이라는 혁명적 사건이 그 운동을 지지하고 지도할 공산당이 부재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었다. 그래서 11월 밀라노에서 “통일공산주의분파”가 형성되었고, 1921년 1월21일 드디어 Imola대회에서 코민테른의 지부인 PCI(이탈리아공산당)이 창건된다. 분파들은 해소하여 신당에 결합했고, 당 대회의 안건에는 “혁명 중에 일어난 평의회는 그의 다수가 공산당에 의해 획득되었을 때 혁명적일 수 있고, 그렇지 않을 경우 혁명투쟁에 대한 심각한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중의 직접행동의 자발성과 혁명 강령에 입각한 의식성을 혁명적으로 이해 한 위의 테제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스탈린정책’을 이식한 그람시와 ‘비판의 자유’를 방어하지 못한 혁명 좌파
그람시는 혁명분파 구성에 주저하긴 했지만 PCI를 창당하는 데 일정정도 기여했고, 1922년부터 1924년까지는 모스크바와 빈에서 코민테른을 위해 활동했다. 당시 소련에서는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정책이 수립되어야 하는가와, 서유럽에서 사회주의자와 새로운 공산당 사이의 관계에 관해 논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1924년이탈리아 의회에 선출되어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당의 지도권을 확보하고, PCI를 창당 초기의 분파주의 경향으로부터 대중운동에 뿌리박은 대중정당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투쟁을 전개했는데, 이러한 당 노선을 두고 보르디가 경향과 심각한 갈등을 빚게 된다. 왜냐하면 당시 이탈리아는 이미 파시스트운동의 발전이 당 운동의 행동적 제약을 가져왔고, 모든 투쟁은 방어적 수준에 머물렀고, 대중들의 경제투쟁조차 광범위하게 줄어든 상태였기 때문에, 대중정당 노선은 보르디가 에게는 혁명적 원칙을 포기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당시 코민테른과 그람시는 이탈리아에서 PSI(이탈리아사회당)와 PCI(이탈리아공산당)가 통합하여 대중정당을 만들기를 원했지만, 보르디가는 무솔리니와“평화협정”을 맺는 “중립주의”정책을 채택한 PSI와는 동맹을 맺을 수 없었고, 강령적으로도 프롤레타리아의 무장을 통한 혁명투쟁 노선을 갖고 있지 않거나 사실상 폐기해버린 정치세력들과의 “통일전선”을 거부하는 노선을 강력히 밀고 나갔다. 결국 통일전선 문제는 보르디가 지도부와 코민테른 사이의 대립을 가져온다. 당시의 코민테른 3차 대회는 모든 나라에 통일전선 전술의 적용을 명령했는데, PCI는 4차 대회에서 오히려 이것에 반대하는 선언을 한다. 1924년 5월 Como에서의 PCI대회에서 보르디가 등이 제안한 테제인 프롤레타리아 독재, 무장투쟁 노선(프롤레타리아독재냐 부르주아지독재냐)을 절대다수로 수용한 것이다.
그래서 다음해인 1925년은 본격적으로 보르디가 경향과 코민테른의 러시아 지도부의 전쟁이 일어난 중요한 해이다. 또한 1925년은 트로츠키의 좌익반대파와 러시아공산당 및 코민테른이 대립한 시기였다. 1925년 3월-4월 코민테른 확대집행위원회는 PCI 3차 대회의 의제에 대한 보르디가 경향을 강제로 삭제·제거했고, 트로츠키에 우호적인 보르디가의 글(“트로츠키 문제”)의 출판을 금지시켰다. 결국 코민테른의 스탈린 정책을 PCI에 이식시키기 위해 그람시는 혁명적 좌파들의 입을 막음으로써 다수의 당원들과 분리시키려 했고, 코민테른 안에 이미 뿌리내리고 있던 강압적 관료주의(스탈린주의)를 이용하여 혁명분파들을 차례로 축출하는 변절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또한 그것이 참혹한 스탈린주의의 잉태였던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혁명적 좌파들은, 그해 4월 보르디가의 동료이자 훗날 보르디가 경향을 극복하고 혁명분파의 다수파를 차지한 데이먼 등을 통해 조정을 위한 위원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조차도 그람시는 “조직화된 분파”라고 위원회를 비난하면서 격렬하게 공격했고, 그를 추종하는 다수의 맹목적 조직보존주의자들의 축출의 위협 아래 “위원회”는 결국 해산해야 했다. 그것은 다수파로서의 이탈리아 좌파의 종말의 시작이었다. 그 후 당을 장악한 그람시의 지도력(대중정당 노선) 아래 당은 12.000명에서 30.000명의 전투파로 증가했다. 그런데 당시의 신규 당원들은 젊은 노동자와 농민이 다수였고, 낮은 수준의 강령의 승인은 정치의식의 하락을 가져왔고, 정치적 미숙함과 무능력은 당을 급속도로 변질시켰다. 정치의식이 균질화되지 않은 미성숙한 다수에게 조직보존주의, 양적 팽창주의 노선을 강제하는 것과 사상투쟁의 자유마저 제한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사상투쟁과 혁명적 실천을 통해 다수를 획득해나가고자 하는 혁명적 좌파들에게는 치명적인 상황을 초래했다. 혁명조직의 기본 운영원리이자 혁명가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사상투쟁의 자유’를 방어하고 그것의 박탈에 대해 끝까지 저항하고 투쟁했어야 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생존원칙이 안타깝게도 무겁게 인식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움트고 있던 스탈린주의에 대한 거부원칙이 이탈리아 좌파에게는 아직 정립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1926년 리옹대회에서 보르디가 경향은 완전히 제거되었고, 소수파로 전락한 좌파는 유명한 “리옹테제”를 제출한다. 이는 망명중의 혁명적공산주의자들의 지향점이 되어, 2차 대전 중에도 활동의 지침이 되었고, 결정적으로 68혁명이후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혁명적 좌파들의 부활을 돕는다. 이 테제는 그람시의 정치를 크로체와 베르그송의 사이비-맑스주의의 혼합이라 규정하고 강력하게 비난한다. 그리고 반파시스트 당과의 동맹과 “노동자연방공화국”을 맑스주의의 포기라고 하면서 비판한다. 또한, 권위에 복종하는 자발성을 대체하는 어떠한 규율도 거부한다. 이것은 인터내셔널의 당들이 스탈린의 코민테른에 복종하는 퇴행의 위험성을 미리 경고했던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경고는 머지않아 현실이 되었고, 코민테른의 결정적 타락과 세계적으로 혁명적 공산주의 세력에게 기나긴 죽음의 시대를 가져다주었다.
혁명적 분파운동과 당 건설 운동의 역사적 교훈
PCI에서 축출당한 보르디가는 1926년 2월-3월 6차 코민테른 확대집행위원회에 마지막으로 참여했는데 트로츠키와 장시간 토론할 기회를 가졌다. 위원회의 참여는 “일국사회주의”에 대한 트로츠키의 투쟁에 이탈리아 좌파의 연대를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보르디가는 극단적 개입의 형태로 가장 맹렬하게 스탈린을 공격했다. 그는 당시를“분파의 역사는 레닌의 역사이다”라고 회상했다. 이것이 코민테른 내에서의 이태리 좌파의 마지막 투쟁이었고, 그 이후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저항, 그리고 스탈린의 이탈리아에서 있었던 것보다 더 잔혹한 숙청과 살해의 역사였다. 1927년 12월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를 선언한 러시아 공산당 15차 대회에서 트로츠키를 축출했다. 또한 혁명과 관계된 모든 사진과 기록들에서 트로츠키의 흔적을 지워나갔고, 수많은 공산주의자들과 혁명적노동자계급을 추방하고 살해했다.
이탈리아에서는1926년파시스트 정부의 정당금지령에 따라 PCI는 해산 당했고, 그해 11월 그람시는 체포되어 20년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혁명적 좌파와 결별한 당은 이미 혁명성과 전투성을 모두 잃은 채 파시스트의 탄압 하에 조직적 활동이 끊어지게 된다. 그리고 2차 대전 이후 모스크바로 망명했다 귀국한 톨리아티의 대중정당형 의회주의 노선을 채택하면서, 스탈린주의에서 사민주의까지 혼재된 다원주의의 길로 접어든다. 또한 톨리아티의 사후에는 러시아파와 이탈리아파로 양분, 유로코뮤니즘과 민족 공산주의 노선 등으로 혼란을 겪다가 결국 소련 붕괴 후 완전한 사민주의좌파 정당으로 몰락하고 만다. 이것이 바로 파시즘과 통일전선의 반혁명적 성격을 명확히 하지 못해 파시스트에게 길을 열어주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혁명노선을 굳건히 하지 못해 전투력을 잃은 변절된 PCI의 비극이었고, 그람시가 주도한 스탈린주의 공산당의 실패였다.
보르디가 또한 1926년 말 파시스트에 의해 체포되어 3년간 추방되었다. 당시 해외로 망명한 이탈리아 좌파는 유럽에서 투쟁을 계속했지만, 보르디가는 점점 정치적 삶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혁명운동에서 멀어져 간다. 하지만 보르디가를 극복한 그의 동지 데이먼과 후배 혁명가들은 파시즘 하에서도 전쟁 중에도 수백 명이 분명하게 살아남아 여러 공장과 거리에서 목숨을 건 선전활동을 해나갔으며, 혁명적 분파활동의 원칙과 실천적 경험들로 인해 전쟁이 끝나기 전 독자적인 국제공산주의당(PcInt)을 건설하기에 이른다. 수백으로 시작한 당원들이 수천으로 증가하는 데에는 채 몇 년이 걸리지 않았고, 이것은 대중적 노선이 아닌 혁명적 원칙과 혁명 강령을 전투적 노동자계급에게 굳건히 뿌리내린 결과였다.
그리고 1920년대 타락해가는 코민테른과 스탈린에 대항해 이탈리아 좌파와 트로츠키가 함께 싸웠던 혁명적 전통은, 80년이 넘게 흐른 오늘날 새로운 혁명적 인터내셔널 창출을 향한 중요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 또한, 2011년 한국의 사회주의자 재판에 항의해 뉴욕에서 벌어진 국제주의자들의 항의시위도 이들의 후예들이며, 이러한 국제주의는 우리에게 원칙만이 아니라 즉시 실천해야 할 지침으로 인식해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람시나 보르디가 중 어느 누구도 전폭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 하지만 공산주의 당 운동의 역사적 순간에 이들이 각자 서있었던 정치적 위치와 역할에 대해 명확한 원칙을 갖고 평가하면서 역사적 교훈을 계승할 뿐이다. 첫째, 혁명적 분파 활동 없이 혁명당 건설과 혁명적 원칙의 방어는 불가능하며, 모든 분파활동은 끊임없이 외부의 노동자계급을 향해야 한다. 둘째, 혁명 강령 없이 혁명당 건설은 불가능하며, 혁명 강령은 실천적으로 승인할 때 혁명성을 보장한다. 스탈린도 그람시도 강령을 승인했지만,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원칙을 저버리고 강령의 수준을 낮춤으로써 비극의 시작을 알렸다. 셋째, 혁명 강령은 계급투쟁과 공산주의 운동의 발전과 함께 살아 움직이며 끊임없이 발전해나가는 것이지 절대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그래서 혁명적이지 않은 낡은 강령을 단호하게 배격하는 것이야말로 혁명조직과 혁명운동의 시작이다. 넷째, 혁명가들의 가장 큰 사상적 실천적 무기인 혁명 강령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제한 없는 사상투쟁의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 그 어떠한 명분으로도 조직적 이해관계로도 사상투쟁의 자유가 침해당해서는 안 된다. 사상투쟁은 살아 움직이며 상호 침투하는 과정이며, 혁명적 행동을 강제하는 의식적 행위이며,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버리고 혁명의식을 체득하는데 있어 필수요소이기 때문에 자본가들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공개적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탈리아 당 운동의 역사를 보면서 한국의 당 건설 운동의 주체들에게 묻고 싶다. 동지들이 서 있는 역사적 정치적 위치는 어디이며, 단지 먼저 시작했을 뿐인 아무런 특권이 없는 동지들이 대체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당 건설을 하려는 것이며, 무엇을 움켜쥐고 달려가고 있는가?
그리고 당 추진위를 향한 강령투쟁에 사활을 걸어야 할 사노위에 요청한다. 사노위는 남은 기간 한국의 노동자계급과 우리 스스로에게 약속한 당 추진위를 향한 강령투쟁에 전념해야 한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첫째, 강령초안제출과 강령토론이 공개적으로 진행되는 4월30일 이후에는, 강령채택을 위한 과도적 조직체계로 즉각 전환해야 한다. 과도적 조직체계란 강령채택 조건 창출을 위한 중립적인 조직 관리체계를 의미한다. 이것은 내용적으로는 모든 강령초안이 동일한 조건 속에서 조직내외로 확장해 나갈 수 있는 체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중집, 중앙위, 지역위 ,분회, 언론 등 모든 기구와 조직의 근간은 강령채택을 위한 과도적(임시)체계로 전환하며, 총회를 통해 위임받은 관리기구(대리인)는 철저한 중립성을 유지해야 한다. 이것은 조직이 당 추진위로 상승하기 위한 이행체제이며, 아래로부터 강령을 결의하고 조직 활동의 질적인 상승을 강제하는 체제이다.
둘째, 강령투쟁을 통해 혁명적 강령이 채택되고 당 추진위로의 이행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사노위는 즉각 종료하고, 당 추진위(준비모임)로 전환해야 한다. 만일 강령투쟁에서 사노위 전체를 견인하지 못한다 해도, 당건설 경로와 사노위 이후 진로(연장포함)는 위와 같은 강령채택 체계를 충실히 수행한 후, 조직이행과정의 결과물을 바탕으로 새롭게 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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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적 조직체계란 강령채택 조건 창출을 위한 중립적인 조직 관리체계를 의미한다. 이것은 내용적으로는 모든 강령초안이 동일한 조건 속에서 조직내외로 확장해 나갈 수 있는 체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중집, 중앙위, 지역위 ,분회, 언론 등 모든 기구와 조직의 근간은 강령채택을 위한 과도적(임시)체계로 전환하며, 총회를 통해 위임받은 관리기구(대리인)는 철저한 중립성을 유지해야 한다. 이것은 조직이 당 추진위로 상승하기 위한 이행체제이며, 아래로부터 강령을 결의하고 조직 활동의 질적인 상승을 강제하는 체제이다"이런 체제라면 총회 결정사항 수준에 문제인데,,, 총회를 다시 소집하자고 주장하시는 건지...?? 그럼 총회 소집요청을 회원 연서명을 받아서 하실 것인지??
지난 번 강령공개토론에는 15명이 왔다는데 그 중에 회원이 아닌 사람은 몇 명이나 되는지... ?? 그토록 중요한, 조직의 사활을 걸어강령토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15명만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15명밖에 안온 것인지... 이것도 문제가 있는 것인지...
4월 3일 의견그룹 해소할 때 속기록을 보니 비판의 자유를 옹호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그룹 내에서도 많은 문제제기와 비판이 있었던데,, 그것은 왜 그렇다고 보시는 건지?
답변해주시면 좋겠고,,
자유로운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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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차토론회는 과거 의견그룹 중심으로 강령일치를 위한 기조설명을 하는 첫 토론회이었고, 별도로 조직은 안한걸로 아는데요. 의견그룹에도 별도의 조직화는 안된걸로 알고 있습니다...외부에는 전날 오후 웹자보를 통해 공개했을뿐, 사실상 공개토론회의 성격은 아니었는데 먼가의 오해가 있으신듯하군요.왜냐하면 예전에도 의견그룹에서 강령토론할때 외부에서 몇명은 참가했었거든요..
암튼 2차 토론회부터 본격적인 내용토론과 지지자들을 조직할 모양이니 2차 토론이후 판단하시죠.
2.두가지 편향입니다. 하나는 운동의 미성숙으로 인한 일부 스탈린주의 허용 흐름이었고, 하나는 오로지 사노위 1년 연장을 위해 조직내 분란을 방지해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특정지역의 현재 상황을 전국으로 확대시켜 현 체제의 1년 연장만이 사노위내 다수파를 획득해 당건설을 할수있다는 주장인데, 이를 위해 나머지가 사장된 격이죠. 그래서 강령토론을 장기적으로 해나가고, 조직내에서 가장 열심히 모범적인 활동을 통해 다수파를 획득해야 한다는 논리인데, 저희는 당건설이 사노위 다수파 획득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직을 깨자는게 아니라, 최소한 우리자신과 계급에게 약속한 5월까지는 강령투쟁-강령통일에 전념해야 하고, 5월이후의 문제는 강령투쟁이 완료된후 결과물을 가지고 다시 판단해야된다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외부확장 또한 사노위로의 확장이 아닌 이후 당 추진위를 상정한 강령을 통해 외부로 확장해나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는데, 이를 두고 우리를 조직깨려는자, 조직의 분란을 외부에 알리려는자 등으로 낙인찍어 소책자문제에서 부터 공격을 해오기 시작한거죠.
암튼 뉘신지는 모르나 블로그상 깊은 토론은 불가능할 것 같네요. 글은 그냥 글의 주된 주제를 중심으로 읽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