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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개혁에 반대한다.
자본주의 철폐를 위하여!
이 글을 온라인에 게시할 준비를 마치자마자 완전히 드러내놓고 벌어진 또 하나의 미국 흑인 시민에 대한 경찰의 노골적인 총격 사건이 위스콘신주 커노샤에서 분노에 찬 투쟁을 촉발했다. 제이콥 블레이크는 하반신이 마비된 채 남겨졌다. 야간 통행금지의 재시행과 함께, 시위자들을 제지하기 위해 한 줄에 선 무장 경찰과 주 방위군은 “블루리브스매터(역 : 경관의 생명은 소중하다.)” 의 추종자가 되었다. : 17세의 카일 리튼하우스가 장전한 소총을 들고 즉시 세 명에게 발사했으며, 그들 중 두 명이 사망했다. 아니라면 최소한 목격자 상황 진술에 따른 것이다. 그의 변호사는 무장한, 흥분한 경관으로부터 도망치는 한 젊은 청년의 또 다른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모두가 도널드 트럼프의 기세등등한 선거 운동을 위해 천국에서 온 만나와 같은 것이라는 점이다. 그에게 있어서 백악관으로 복귀하도록 할 최고의 방책이란 ‘법과 질서’라는 명분의 깃발을 휘두르는 것이고, 경찰이 만행을 저지르도록 한 바로 그 법이 문제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간과해버리는 것이다. 한편, 진정한 근본적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 그 자체이며, 가진 자들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대다수의 빈자-그들의 피부색이 어떻든-를 억압하는 법적, 정치적 근간 전체를 제거할 필요를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보게 된다. 이 글에서 우리는 ‘법과 질서’의 대안은 경찰 개혁이 아니라 모순덩어리인 체제 전체를 개혁하는 것임을 주장한다. 계속...
조지 플로이드 시위
맑스는 몇 주 같은 몇십 년, 몇십 년 같은 며칠이 있다고 했다. 5월 26일 이후의 하루하루는 마치 맑스가 묘사한 문구 뒷부분과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미국 내의 노동자들 및 이주 노동자들이 느낀 응어리진 분노와 불만이 수십 년 동안의 좌절이 응축되어 전 세계적으로 표출되었다. 오바마 행정부 후반기 동안 2014년 퍼거슨, 2015년 볼티모어, 2016년 달라스와 같은 각 도시에서 발생한 소요 사태와 과격 시위를 연상시키는 장면들은 6월 중순을 정점으로 거의 모든 주요 도시를 거쳐 온 나라로 확산하였다. 미국의 소규모 도시들 뿐 아니라 해외의 도시들에서도 시위가 촉발됐다. 투쟁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여름 동안 대부분 지역으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미국의 IWG, 영국의 CWO, 캐나다의 클라스바탈로를 포함하여 ICT의 지지자들과 동지들이 뉴욕, 필라델피아, 런던, 몬트리올, 토론토, 로스엔젤레스, 트렌턴, 리치몬드, 그리고 애들레이드와 같은 도시 전체의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다.
이들 시위는 미네아폴리스의 인종차별주의 경관이 조지 플로이드를 무자비하게 사살한 사건으로 인해 촉발되었다. 그의 죽음은 투쟁의 촉매제였으나, 곧 그 투쟁은 더욱 심오한 쟁점을 언급한 것이었음이 분명해졌다. 말하자면, 조지 플로이드는 최근 몇 해 동안 경관에 의해 사망한 수천 명의 흑인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 전통은 훨씬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에 대하여 수십 년 동안 경찰의 야만성과 국가적으로 성역화된 폭력에 대항하여 투쟁하기 위해 모든 인종의 노동자 계급이 흑인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들고일어섰다.
투쟁이 다인종적이라는 것과 그렇게 강렬한 노동자 계급의 반응을 끌어낸 것은 흑인에 대한 경찰 폭력 그 이상의 문제로 파고들어 가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점차로 수많은 백인 노동자 계급 한 부분에 대한 공격이 계급 전체에 대한 공격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찰이 맡은 역할이라는 점을 이해한다. 즉, 경찰은 시민을 보호하거나 공공의 안전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 계급에 속한 무장 폭력배라는 매우 분명한 사회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과제는 재산을 지키고, 그리고 자본의 이해관계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이해관계와 충돌을 일으키는 이들을 협박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 점은 투쟁과 시위에 대해 경찰이 전 국가적으로 어떻게 반응해 왔는지를 보면 아주 분명한 일이지만, 코뮤니스트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데 있어 경찰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경찰 폐지와 개혁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이후, “경찰을 폐지하라!”라는 반 경찰 투쟁에 점차 전국적인 유행 문구가 되었다. 자칭 반(反)자본주의 좌파들은 경찰 폐지를 지지하는 대신 경찰 개혁을 반대한다. (좌파란 자본주의의 좌익 진영을 언급하는 말이기에, 코뮤니스트로서 우리는 자신을 좌파와 구분 짓는다.) 필수적인 암묵적 편향 교육, 단계적 축소 및 위기 훈련, 그리고 바디캠(역 추가 : 주로 법 집행 기관 혹은 범죄 현장에서 동영상 증거를 수집하는 데 사용하는 녹화 시스템)을 요구하는 것이 개혁의 몇 가지 보기들이다. - 경찰의 폭력적 행동을 완화하거나 비폭력적 방어를 이유로 경관에 의해 살해되는 비무장 흑인의 수를 줄이는데 이러한 개혁은 실패했다. 개혁의 한계를 깨닫고 나자, 활동가들은 경찰을 해체하여 공동체적 치안 유지라는 대안 형식으로 대체함으로써 경찰 권력을 폐지할 것을 요구해왔다. ‘폐지’와 ‘개혁’이라는 단어를 그 개념을 상호 교환하여 사용할 정도로 남용한 것이다. 개혁의 방안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정책 변화를 언급한다. 한편 경찰을 해체하여 다른 이름으로 하는 다른 기관으로 대체하는 것은 ‘급진적’인 어떤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것은 근본적 개혁이 아니라 폐지와 다를 바 없다.
경찰 폐지 운동이 지닌 문제점은 폐지에 대한 관념이 아닌, 그러한 구조가 자본주의 내에서 폐지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는 경찰이 그것의 자본주의적 본질과 분리될 수 있으며, 자본주의 내에서 파괴될 수 있는 조직이라는 가정을 필요로 한다. 경찰은 단지 부르주아지의 도구로서 존재할 뿐이며, 자본의 이해관계를 변호하기 위함이라는 점을 코뮤니스트는 알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그 기능을 필요로 하는 한 경찰은 존속해 나갈 것이다. 경찰 폐지론은 별개의 목표가 될 수 없으며, 혹은 코뮤니즘의 ‘점진적 발전’으로 나아가는 어떤 것이 될 수 없다. 자본주의가 붕괴하여야만 비로소 경찰이 폐지되는 것이다.
경찰의 역사
경찰은 19세기 초 영국에서 조직된 이후, 미국에서는 범죄가 아닌 군중 일반에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경찰 권력은 본래 1825년에서 1855년 당시, 다수의 격렬한 군중을 통제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 구체적으로는 영국에서의 노동자 파업, 북미 지역에서의 격렬한 시위들, 그리고 남부의 노예 봉기의 위협을 일컫는다. 경찰의 역사는 그것이 결코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 아닌 오히려 노동자계급의 저항과 조직적 행동을 억압하기 위해 언제나 폭력 및 협박 전술에 의존해 왔음을 보여준다.
영국의 산업 혁명은 계급투쟁의 기폭제였다. - 산업화는 그 자체로 프로레타리아트 탄생으로 향하는 필수적 단계였으며, 임금 상승,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해 더 많은 노동자가 투쟁할수록, 그들은 자본가계급에 더욱 위협이 되어갔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으로 노동조합은 불법화되었고, 영국에선 50인의 회담이 열렸다. - 이는 영국 노동자들이 프랑스로부터 영향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영국 지배 계급의 우려 때문이었다. 1792년부터 1820년, 영국의 노동자들은 무장 군인의 억압에 직면했을 때조차 계속해서 대규모 시위를 조직해 나갔다. 1819년 맨체스터에서 벌어진 피터루 대학살(Peterloo Massacre)에서, 모집된 병사들은 8만 명의 평화 시위대로 돌진하였으며, 11명이 죽음에 이르렀으며, 수백 명이 부상했다. 비록 이 사건이 군중 통제 및 시위 진압의 목적이 있었음에도, 파업과 투쟁은 계속되었다. 노동자들이 처형당하는 위기에 처하자 더욱 조직화한 행동으로 불길이 번졌고, 군 측은 시위 확산에 따른 파업 지도자들을 계속해서 처형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1829년 런던 경찰이 창설되었고, 이는 비무장 폭력을 통해 군중을 해체하려는 의도였다. - 경찰의 만행 행태는 그들을 위협적으로 만들었고, 집합적 행동에 대한 사전 경고 없이 노동자들을 탄압하도록 했다. 경찰은 런던 전체로 확대되었으며, 이웃의 감시를 통해 노동자 계급의 일상생활을 철저히 사찰했다. 현대의 경찰 권력이 바로 이 형식을 이어받은 것이다.
비록 경찰 권력의 발달에 있어서 뉴욕과 찰스턴 같은 곳의 그 역사적 맥락이 런던의 것과는 다르다 하더라도, 이들 기관이 군중 통제를 강화할 목적으로 창설되었다는 점, 그리고 노동자들을 위협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같은 문제로 남는다. ‘법적 강화’라는 폭력적 행동을 통해 개개인을 감시하는 것은 인종차별 이상의 문제이며, 그저 사유 재산 방어 이상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일상이든, 개인에 대한 경찰의 만행이 특정 지역에 국한한 것이든, 그게 아니라면 평화시위대에게 최루탄을 투척하고 권총을 난사하며 폭력을 촉진하는 대규모의 경찰 폭력배이든, 그 모두가 노동자 계급을 억압하여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를 옹호하기 위해 이용된 수단이다. 경찰 권력은 오직 그 목적을 충족할 때에만 존재하므로, ‘경찰 폐지’에 대한 어떠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그것은 한 가지 혹은 또 다른 형태로 존속할 것이다.
부르주아 정치인과 개혁
샌드위치를 생산하는데 최저임금 이하로 노동자를 고용하는 기업이 상점에서는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 문구를 내걸 때, 나이키가 중국의 죄수 노동자들에게 이윤을 착취하는 동시에 인종차별주의자가 되지 말고 억압을 반대하지 말라고 설득하는 진부한 광고를 집행할 때, 대부분 사람은 와와 같은 기업들의 염세적이고 초비판적인 노력 통해서 볼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경찰 폭행과 제도적 인종차별을 거부하는 목소리를 내는 그들 상당수조차, 부르주아 정치인이 구사하는 친절한 형태로 표현하는 선전에 빠지기 쉽다. 비록 경찰 폐지는 자본주의를 철폐함으로써만 일어날 수 있으며, 그 이전에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코뮤니스트로서 우리는 알고 있지만, 진보와 보수 정치인 모두는 경찰 폐지론이 자본주의에 위협이 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자본가계급은 그들의 착취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경찰 존속을 요구한다. 경찰국가와 자본주의 체제를 거부하는 매우 많은 사람이 미국의 주요 모든 도시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지배 계급과 그들의 정치적 하수인들에게 그들이 빠르게 행동할 필요가 있었음이 분명해진다. 물론 많은 이들이 분명히 자행되고 있던 억압을 무시하고, 전통적인 법과 질서에 사로잡혀 있었다. 더 많은 못된 정치인들이 실제로는 포퓰리즘적 구호를 외치고, 점진적 변화를 변호하는 한편, 동시에 그들이 지지하고 대표한다고 외쳤던 사람들을 착취하는데 몸담고 있었다는 점은 논란거리다.
심지어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T)를 트윗하며, 초크홀드(조지 플로이드가 살해될 당시 경찰이 사용한 체포 방법)를 그것을 무엇으로든 변화시킬 것인 양, 국가적으로 금지할 것을 요구한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이 이들이다. - 조 바이든, 카말라 해리스, 앤드류 쿠오모스, 일한 오마르스. 이들은 퍼거슨 시위 때는 ‘색맹’으로 남으려 했으면서, 입에 침이 채 마르기도 전에 인종차별을 비난했다. 더 많이, 더 온건한 청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양쪽 모두를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일단 어떤 움직임이 관심을 끌어 그들의 권력에 잠재적 위협이 되면, 결국 자기 무덤을 파기 위해 그 운동에 편승한다. 자신들의 편이 되기를 요청하는 자본가들의 허울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일상생활을 착취하는 현실과 본질을 본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경찰 개혁안은: 양보를 위한 조치들은 과장된 것이며, 너무도 많은 노동자가 느끼는 분노를 잠재우려하고, 그들에게 안전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심어주려 했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임금 노예의 삶으로 돌아가 지배계급이 그토록 필사적으로 보호하려고 애쓰는 바로 그 제도에 의문의 여지없이 노동력을 계속 팔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조 바이든은 형식적 경찰 개혁안에 3억 달러(한화 약 3400억)의 예산을 추가로 편성할 것을 계획한 한편, 「민주당」 정치인들이 관할하는 도시와 주에서도 비슷한 안건이 제시되고 시행되었다. 보기를 들면 뉴욕의 시 의회는 어떤 매체에서 일컬은 일련의 ‘근본적 경찰 개혁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이 안에 경찰관을 징계 조치하는 범칙제도,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 공무원을 교육하는 중재제도, 그리고 경찰관의 행동을 기록(녹화)할 권리를 법으로 제정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런 개혁안들이 경찰의 지속적 위협과 폭력에 노출된 흑인 노동자들의 삶에 어떤 긍정적 영향을 가져다줄지는 여전히 상당한 의문으로 남는다. 경찰은 그들이 위협을 받을 때마다, 서로를 방어할 이들로 구성된 조직 폭력배에 지나지 않음을 스스로 입증해왔다. 특히 그들이 무고한 시민들에게 가한 폭행을 공개 조사할 경우, 더욱더 그러하다. 공무원이 문제가 있다고 가정하는 범칙제도를 대체 누가 시행한단 말인가? 경찰관을 녹화할 권리를 누가 보장하겠는가? 경찰은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할 것이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는 데 실패해왔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개혁을 시행하도록 방관한 이들이 경찰이 아니라면, 그것은 수감 중인 수백 명의 흑인, 황인, 백인 노동자를 유지하는 부르주아 정치인들일 것이며, 다를 바 없는 인종차별주의적 형사사법제도일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기업을 위해 값싼 상품을 생산하는 임금 노예가 되라고 강제하는 것이다. 경찰의 만행을 감시하고 처벌하기 위해 창설된 어떤 기관이든지,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경찰에 의존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또 하나의 다를 바 없는 기구에 불과할 것이란 점은 자명하다. 설상가상으로 앤드류 쿠오모 뉴욕 주지사는 뉴욕의 시위대에게 “시위할 필요 없잖아, 이겼는데.”라고 아예 노골적으로 말했다. 전국적인 주와 시에서 통과된 소규모의 점진적 개혁 조치의 목적은, 이제는 평범한 노동자들이 알 수 있을 정도로 완전히 드러난 경찰 폭력, 그리고 자본주의 착취 구조에 저항하는 분노한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한 수단임이 분명하다. 이들 정책 변화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우려가 마침내 해결되고 있다는 것을 확신시키고, 그들을 안주하게 하는 수단으로, 이는 물론 자본가들과 그들의 하수인 정치인들이 유행병으로 악화하여온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를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계속하기 위함이다.
한편, 어떤 부르주아 정치인과 정치단체들은 심각한 경찰의 폭력 사건이 뉴스가 될 때마다 역사적으로 통과된 전통적인 개혁조치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기를 자처해왔다. 조지 플로이드의 사살을 둘러싼 첫 시위가 있은 지 2주 후, 미니애폴리스 시의회는 경찰력을 해산, 그 자리에 ‘새로운 형태의 공공 안전 모델’을 설치하기로 의결했다고 발표했다. 제이콥 프레이 시장은 직접 이 개혁안에 지지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미니애폴리스 경찰력을 해체하는데 이바지한 것도 아니지만, 미니애폴리스 시의회 계획은 분명 진보진영에서 점차 확대되고 있는, 경찰 ‘폐지’를 요구하는 급진적 문구로 장식한 움직임에 영합하도록, 자유주의 정치인 자신에게 책임을 덮어씌우는 것이다.
이런 사안이 십여 년 전 미국의 정치적 담론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많은 좌파 정치인들이 그 과정에 해온 것과 마찬가지로 만족하거나 기념할 만한 어떤 것이 아니다. 바로 그것이 존재하도록 하는 조건을 유지하기 위해 경찰과 자본주의 체제는 서로 의지하는 공생관계 일부라는 점이 이미 명백해졌다. 현재의 미니애폴리스 경찰서는 해체될 수도 있겠지만, 그 자리에 어떤 새로운 구조를 끼워 넣든, 근본적으로 경찰이 해온 역할은 변함없을 것이다.
지역사회 치안 유지와 관련된 문제
경찰을 반대하는 많은 활동가는 기금을 재편성하고, 경찰서를 시민의 안전과 권리를 보호할 지역공동체 기반 시설로 대체하길 바란다. 이런 제안에는 경찰관을 특정 911 신고에 대응할 사회복지사와 전문정신건강관리사로 대체하는 안도 있다. 정신건강관리노동자들이 응급구조요원으로서 무장경찰보다 더 효율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미 사회복지사와 피해보호자들과 협력하는 미국 전역의 경찰서들은 매우 유연하지 못하다. 전문정신건강관리사는 경찰력과 법체계와 협력하면서 관료적 한계에 종종 부딪히는데, 이것은 심각한 곤경에 처한 희생자들을 돕는 데 있어서 방해요인이다. 광범위한 정신건강지원기관이 이론상으로는 그럴듯한 생각처럼 보이지만, 자본주의 아래 존재하게 될 기관은 잠재적으로 더 큰 해악을 낳을 것이다.
자본주의 아래 존재하는 심리학은 교육과 마찬가지로, 어릴 때부터 학생들에게 주입하여 부르주아 선전을 강화하는 부르주아 제도다. 심리치료가 무익하다거나 모든 치료사가 부르주아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부르주아의 이해에 따라 자본주의 아래 정신건강관리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보기를 들면 ADHD, 우울증과 같은 질환 치료는 종종 생산력 증대를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이 사회에 얼마나 많은 헌신을 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가치를 정의하도록 교육받는다.
심지어 계급의식이 있는 심리치료사조차도 그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정신들이 그들의 활동에 계속해서 스며들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는지도 모르겠다. DSM-V형 행동장애(일반적으로 성인기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진단하는 기준이다.)의 주요 범주에 권위에 반하는 것과 법률을 무시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 그 보기이다. 여기에는 가게서 물건을 훔친다거나 경찰에게 거짓말을 하는 사소한 상황도 포함되는데, 두 경우 모두 한 개인의 정신 상태를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다. 가난한 가정에서 성장한 아이는 살기 위해 물건을 훔치며, 자신의 부정적 경험으로 인하여 경찰력을 점점 불신하게 되는데, 이는 단순히 자신의 현실에 대한 물질적 조건을 반영하는 행동이다. 자본주의로 인해 나타나는 그러한 행동들을 병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자본주의 트라우마적 영향을 무시하는 것이며, 개인 단독의 책임으로 그 짐을 떠넘기는 것이다. 경찰력을 정신건강노동자 기관으로 대체하는 것은 ‘범죄 행동’의 병리화를 가중하는 것일 수 있다. 더욱이 이것은 치안 유지의 해결책이 될 수 없는데, 이미 의료 시스템을 불신하고 있는 사회적 약자를 더욱 소외시키고 치료사들이 완전한 치료를 제공하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경찰력을 지역공동체 기반의 정신건강관리 체계로 대체하는 것은 단지 치료사들에게 경찰복을 입히는 것이며, 그들이 정부에 협조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미네아폴리스 시의회에서 경찰청을 해체할 계획을 처음 발표했을 때, 여전히 대응할 필요가 있는 강력 범죄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스스로 언급했다. 그들이란 단지 경찰을 일컫는 것이 아닐 것이다. 경찰관은 단순히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고 해서 경찰관이 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심지어 미네아폴리스의 시장 제이콥 프레이는 정부의 계획은 폐지가 아닌 개혁에 중심을 둔다는 점을 분명히 해왔다. 경찰을 해체하고 그것을 ‘덜 부패한’ 기관으로 교체하는 것이 폐지는 아니다. 그것은 통제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개혁은 코뮤니즘을 위한 부분적 ‘점진적 변화’일 수 없다. 자본주의는 노동자계급 자신의 조직과 (국제주의) 세계혁명당을 통해서만 무너뜨릴 수 있을 뿐이다. 인종차별주의 경찰관을 지역사회 지도자로 교체하는 것은 경찰의 야만성이나 노동자계급에 대한 국가 폭력을 종식하기에 충분치 않다. ‘덜 악의적인’ 정치인을 권력의 자리에 앉힌다고 정부가 기능하는 방식을 바꿀 수 없듯이, 경찰을 해체하고 그것에 새로운 명칭을 붙인다고 해서, 모두가 자본의 이해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일 뿐이라는 사실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뉴저지주, 캠던
경찰 폐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뉴저지주 캠던의 사례는 여러 좌파가 사회에 대한 그들의 실험적 전망이 어떻게 실질적으로 시행될 수 있는가에 대한 증거로서 표류해왔다. 소셜미디어 게시글의 제목은 2012년 캠던시가 경찰 부서를 해체한 경위를 분명히 하는데, 이후 수년 동안은 범죄율이 내려갔다. 소셜미디어의 게시글과 제목이 상당한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캠던시가 폐지 운동을 선도하는 모델이 되기를 바라는 주류언론의 배출구를 통해 떠돌고 있다.
캠던의 경찰 개혁 시행 이후 범죄율은 내려갔다. 2013년 이 시에서 보고한 강력 범죄는 1,950건이었다. 5년 후인 2018년에는 1,197건으로 수치가 감소했다. 이는 약 38%로 상당히 감소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했던 것처럼 이들 수치가 줄어든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경찰 폐지론자들은 왜 일반인들이 범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지를 떠올려야만 할 것이다. 범죄는 가난과 실직, 열악한 교육과 어린이들을 위한 시설 부족의 주요 결과물이다. 이 모든 것들은 자본주의의 부산물이다. 캠던은 노동자계급 환경을 개선하고 빈곤의 근원을 제거하는 데 목적이 있어야 할 일련의 사회 계획을 통과시키지 못했다. 대신 계획대로 캠던 경찰서를 해체한 후, 그에 따라 도시의 치안은 변화하여 정반대로 통제되었다.
사실 캠던 경찰서는 일련의 국가적 긴축 정책으로 해체되었고, 기타 사회 정책과 도시 서비스도 이와 함께 중단되었다. 그렇다면 기존 경찰의 부재로 생긴 공백을 ‘캠던 카운티 경찰’과 함께, 범죄 발생을 사전에 저지하기 위해 철저한 감시 체계로 메꾼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이 새로운 체제를 공동체적 치안 유지의 본보기로 지목하겠지만, 도보 순찰에 나선 경찰관들이 그들이 담당하고 있는 마을의 시민과 상호작용 함으로써, 이 이야기 – 보안 카메라, 감청 장비, 번호판독기, 이동감시초소, 경찰정보시스템 설치를 극대화하는 것 –는 개혁이 가진 전체주의적 본질을 위장한다.
이처럼 극단적 수준의 감시로 경찰은 경범죄를 저지른 민간인을 색출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2013년에서 2014년 동안 9만 7천 명으로 상승했다. ‘카운티 경찰’은 2014년 7월부터 10월 사이, 벨 없는 자전거 운행을 위해 99장의 티켓을 발행했다. 그리고 이 중 딱 한 장만이 전년도와 같은 수준의 범죄를 위해 작성되었을 뿐이다. 또한 이러한 치안 유지 체제는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르는 채, 권력 남용을 초래했다. 그리고 그것은 흑인에게 불균형하게 집중되어있다. 캠던의 흑인이 백인과 비교하여 체포 도중 경찰로부터 무력과 폭력을 당할 확률이 4.5배 높은 경향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자유주의자들이 이 마을을 경찰 개혁이 추구하는 이상향으로 삼는다는 점은 모순적이다. 캠던과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지역에도 그와 같은 치안 유지 제도가 존재한다. 비록 그것이 자본주의와 ‘제국’이 우호적인 용어로 은폐하기를 좋아하는 도시의 자유주의자들의 기민함에 좀 더 적합하며 현대화되었을지라도.
요컨대, 캠던에 존재하는 치안 유지 모델을, 정치인 및 자유주의 정치 권위자들이 거기에 내재한 인종차별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내세웠지만, 전국에 존재하는 똑같은 억압적 감시국가의 강화일 뿐, 분명 경찰 폐지와 비슷한 것만도 못하다.
결론
본래 미네아폴리스 시의회가 6월 경찰청을 해체하기로 발표한 당시, 미국의 많은 자유주의자는 이것을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했다. 즉, 이것을 ‘사회주의로의’ 필수적 단계로 인식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노동자들과 코뮤니스트의 계획에는 해악이었다. 그들의 발표는 폐지와 개혁을 완전히 왜곡한 것일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코뮤니즘으로의 점진적 접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도록 확신시킨 것이다. 게다가 당초 발표 이후 항의 시위가 줄어든 것은 정부가 의도한 목표를 달성했음을 보여준다. 즉, 노동자들 걱정이 해결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을 달랬으며, 그들이 ‘진정한’ 변화를 보기를 원한다면 11월에 투표만 하면 될 것이라고 촉구한 것이다. 비록 뉴욕과 포틀랜드 같은 도시에서 여전히 시위가 발생하고 있지만, 전국적 선전은 잠잠해졌고, 정부의 목소리를 듣기를 원한다면 투표하라고 대중을 선동할 뿐이다.
지난 두 달 여간 이들 일련의 사건은 놀라운 것도 아니다. 민주당의 개입으로 BLT운동(흑인생명은 소중하다.)이 힘을 얻은 것인데, 폭력에 대한 저항을 유권자영합주의로 몰아가는 것은 그 연장선에 불과하다. 선거공약을 이용하여 노동자계급의 불만을 해결하는 것은 수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수법이다. 이는 정책의 변화와 투표로 노동자 계급에 가하는 문제의 본질을 해결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권력을 쥔 정치인이 누구이든, 미네아폴리스의 경찰 권력을 ‘대신하는’ 공동체 제도가 어떤 것이든, 경찰은 무고한 흑인과 홈리스 생명을 계속해서 위협할 것이다.
자본주의가 철폐되어야만 경찰이 폐지될 수 있다. 노동자계급이 스스로 조직하고, 세계혁명당을 창설함으로써만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다. 점진적 개혁이라든지 투표를 통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코뮤니스트로서 경찰 폭력으로부터 투쟁하는 이들을 지지한다. 그러나 조직화한 노동자계급투쟁이 없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지금은 중요하다. 시위에서 계급투쟁의 요소가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언제나 긍정이지만, 단결하지 않으면 물거품이 되고, 해방을 위한 어떤 장기적인 목표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계급적 노선을 따라 조직되어야만 한다. 경찰 폭력을 계급 문제라기보다 인종 문제로만 다루는 것은 본질적으로 계급협조를 수반한다. 이는 흑인을 계급 지위와 상관없이 같은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거대한 덩어리로 간주하는 것이다. 주류 언론에서 신분 정치를 점차 수용하고, 이와 결합한 비조직화한 운동이 소부르주아에 필연적으로 영합하고 만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가 얼마나 우리의 삶 곳곳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지를 드러낼 뿐이다. 무기를 소지하지 않은 흑인을 사살한 사건에 대한 투쟁은 자연스럽게 흑인 소유의 사업과 ‘진보적’ 기업의 증진으로 이끌었다. 흑인이 운영하는 식당을 돕는 것이 어떻게 경찰 권력으로부터 폭행당한 흑인 노동자를 돕는 것이겠는가? 그뿐만 아니다. 소부르주아에 결속한 흑인 사업주들은 흑인 노동자계급과 그 이해관계를 공유하지 않는다. 업주들이 그들이 고용한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은 그들의 인종적 정체성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지역공동체를 돕는다고 광고하는 가족 운영 영세 업체 역시 마찬가지다. 흑인 부르주아는 흑인 노동자계급과 경험하는 것이 다르기에, 그들의 계급적 지위에서 오는 경찰과의 관계 또한 판이할 것으로 본다. 미국의 경찰 만행이 심각하게 인종차별적이며, 불평등하게 흑인에게 집중된 한편, 계급 내에 그들의 억압 또한 뿌리박혀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
경찰 폭력을 계급적 문제로 인식하는 것은 인종 문제의 결과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노동자계급과 기타 소수 민중의 이해를 노동자 전체의 문제로 바라봐야만 한다. 미네아폴리스, 뉴욕, 시카고에서 시위에 참여했던 이들을 구치소로 이송하기를 거부했던 버스 운전기사들의 사례는 훌륭한 계급적 단결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처럼 노동자들의 단결을 강화하도록 해야 한다. 이는 진짜 위협으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고, 서로를 적대시하도록 만들어 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키도록 역사적으로 사용된 부르주아 전술로부터의 저항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경찰 폭력에 대응하는 계급적 행위는 모든 노동자가 원하는 것이다. 노동자계급 한 영역에 대한 공격이 우리 모두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이다.
2020년 9월 1일
국제주의노동자그룹
옮긴이 |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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