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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노동자
시와 노래
(2012~2021)
"어떤 이들은 말한다. 현실은 확장되고 변하는 것이라고. 또 어떤 이들은 우려한다.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깃발 아래 예술가들이 똘똘 뭉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고! 그렇다. 우리는 보고 있다. 세상이 변해 가는 것을. 하지만 그 속에서 지향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중대한 도전이 가로놓여 있고 노동예술의 내용은 그 예술적 미학이나 형상화가 늘 낡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날로 버텨내기 힘겨운 강퍅한 삶 속에서, 부르주아들이 만들어놓은 공고한 질서의 전복을 꿈꾸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밤은 별빛처럼 찬란하다. 사라지려야 사라질 수 없는 노래는 뜨겁다. 인류 문명과 문화예술이 낳은 생명이 노동이라면, 문학도 그 생명의 유기체로서 노동의 구성물질이다.
비정규직과 정규직, 1%와 99%, 부자와 가난뱅이들로 전 세계 민중과 노동자들의 삶이 철저하게 분할된 오늘의 시대를 살면서, 다시 한번 선연한 프롤레타리아계급 문학의 복원을 꿈꾸며...
해고당한 노동자들이 스무 명이 넘게 죽어 나가도 세상은 노동자를 외면하고 있다. 문학의 눈이 분명하게 바라보아야 할 것은 바로 이 서글픈 역사이며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노동의 현실이다. 자본은 세계화되었고 자본의 지배는 총체적이다. 노동자들은 꼼짝달싹 없이 자본에 포위되었다. 지구촌 전체가 그들의 식민지다. 중세 이후, 너무나 잔학한 형벌이라고 해서 금지되었던 화형(火刑)을 이명박이 남일당에서 자행하지 않았던가? 기억하라, 우리도 똑같이 너희를 산 채로 불에 태우리라!"
('문학, 그것은 짓눌린 삶으로부터', 임성용, 「코뮤니스트」 창간호, 2012년)
「코뮤니스트」 창간호, 2012년
「코뮤니스트」 창간호, 2012년
가슴이 저미도록
잊지 마라
사랑은 빗방울 같은 것
내가 이 땅 위에 한 방울 빗물로 떨어져
코뮤니스트의 이름으로 스며들기 위하여
오로지 그 하나의 신념을
사상과 실천으로 펄펄 담금질하기 위하여
나는 내 몸을 거침없이 달구는 풀무가 되고자 했나니
나는 이미 부박한 삶을 떠난 내 영혼이
가장 가까운 지척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안다
사무치게 안타깝지만 조금은 빨리 돌아가
회호리바람 같은 청춘을 여기, 내려놓고
붉은 가슴 붉은 글씨에 새겨진 혁명의 씨앗을
내 육신의 마지막 핏줄 속으로 흘려보내고 간다
저주받은 노동의 대지에 뿌려진 피와 땀들이
세상의 모든 선과 악으로 부딪쳐 싸울 때
나는 가슴이 저미도록 못다한 내 노래를 부르리라
오늘, 내가 고요하게 잠든 노을빛으로 사라져도
내가 맞선 적들은 여전히 나를 밟고
욕창처럼 욱쑤시는 뼈마디에 투쟁의 노래 그치지 않고
나는 사랑하는 계급과 동지와 혁명의 숨통을 끌어안고
환한 웃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씩 되돌아오리라
날마다 나는 다시 태어나 내 앞의 일생을 마저 살고자
나를 찾아 내가 내일, 낯선 사람처럼 걸어온다면
아! 나는 얼마나 가슴이 저미도록 기쁠까
어머니시여, 아내와 아들과 누이들이여
벗들이여, 눈물겹게 보고픈 사람들이여
내 끈질기게 빛나던 눈동자와 열렬한 음성을 기억해다오
살다 살다 언젠가 나는
덧없이 잊혀지는 내가 못견디게 그리워지면
나는 터벅터벅 나를 찾아와
가슴이 저미도록 내 이름을 부리리라
마음이 애달픈 친구여
차마 나에게 작별을 고하려거든
너는 끝까지, 가슴이 저미도록 살다 죽어라!
詩 ┃ 임성용
「코뮤니스트」 2호, 2013년
코뮤니스트의 운명
고 남궁원 동지의 3주기를 기억함
이름 없이
한 명의 코뮤니스트가 사라지는 것이
유독 슬픈 것만은 아니다
그의 생이 온통 프롤레타리아트의 곁이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도록 눅진한 날이었으나
그는 좀처럼 비 개인 맑은 하늘을 포기 하지 않았다
곁을 내어주고 난 그의 빈 몸에
비 개인 맑은 하늘처럼 채워지는 코뮤니즘의 길
남궁원 동지의 몸은 이미 저승으로 저물었으나
그가 남긴 웃음은
혁명정당 강령의 첫 번째 문장 같았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곁이 되고 그 웃음에 베어드는 일,
낮은 곳에서 솟구치는 외침은 죄다 그의 문장이었다
조용조용 들어주는 그의 문장, 문장들
토닥토닥 토닥여 주는 그의 문장, 문장들을 거치면
아물지 않는 것이 없고
견디지 못할 것이 없고
해내지 못할 일이 없다
이름 없이 계급투쟁을 살고
이름 없이 혁명을 살고
이름 없이 사멸하는 국가와 함께 사라지는 것은
코뮤니스트의 운명,
가장 빛나는 전망이다
가장 빛나는 전망
남궁원 동지여!
더 할 수 없는 명예여!
詩 ┃ 조성웅
「코뮤니스트」 5호, 2017년
미루나무
미루나무는
비바람에 쓰러진 게 아니었다
가슴이 저미도록 사무친 것이 있다
어떤 통곡이 있다
어떤 기억이 있다
달그림자 드리워진 올가미가 있다
울며 울며 땅을 치더라는
울지도 못하고 하늘을 보더라는
목 놓아 부여잡던 손톱자국이 있다
검은 구멍 속으로
깊숙이 햇볕이 든다
시구통으로 질질 끌려나오는 사람이 있다
미루나무 혼자서 붉은 담벼락 언덕을 본다
피맺힌 것이 있다
잊혀진 것이 있다
무덤의 유골로도 남아 있지 않은 것
사라진 뼈에 사무친 것이 있다
외로운 목숨이 질 때
미루나무가 쓰러질 때
인간의 땅에 태어나 푸르른 미루나무가 있다
인간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마지막 숨결이 있다
詩 ┃ 임성용
「코뮤니스트」 7호, 2018년
동태
동태는 강자였다 콘크리트 바닥에 메다꽂아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동태를 다루려면 도끼 같은 칼이어야만 했다
아름드리나무 밑둥을 통째로 자른 도마여야 했다
실패하면 손가락 하나정도는 각오해야 했다
얼음 배긴 것들은 힘이 세다
물렁물렁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한때 명태였을지라도,
몰려다니지 않으면 살지 못하던 겁쟁이였더래도
뜬 눈 감지 못하는 동태가 된 지금은
다르다
길바닥에 놓여진 어머니의 삶을
단속반원이 걷어차는 순간
그 놈 머리통을 시원하게 후려갈긴 건
단연 동태였다.
詩 ┃ 박상화
「코뮤니스트」 9호, 2019년
마트 계산대에서
무겁고 긴 발을 끌고 들어와
시간의 목을 쥐고 걷듯이 가게를 한 바퀴 돌고
마침내 천 원짜리 아이스티를 한개 갖다 놓고
꼭 다문 지갑을 열어
보풀이 인 고지서들을 주섬주섬 꺼내놓다가
지갑의 바닥엔 바닥뿐임을 확인하고는
다시 주워 담는 동안
여기저기 삐져나온 살들 숨쉬며
오래 묵은 번뇌를 흘리고
퉁퉁한 큰 손이 작은 호주머니를 몇 번 파더니
우물 밑처럼 깊은 곳에서 건져 올린 건
먼지, 단추, 돌멩이, 그리고 수많은 주름을 가진
지전 한 장!
다시 먼지들을 주머니 깊이 묻어두고
두 손을 받쳐 아이스티를 가슴에 품고
느릿느릿 무겁고 긴 발을 끌고 환한 세상으로
나가시는 기나 긴 그림자
詩 ┃ 박상화
「코뮤니스트」 9호, 2019년
슬픈 대문짝
대문짝에 폐업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써 붙인 가게
그의 슬픔도 대문짝만했을 것이다
절을 한번 할 때마다 시를 한편씩 쓰는 마음으로
백팔 배를 하고,
천팔십 배를 하고,
삼천 배를 하며 하루하루를 살았을 것이다
참새처럼 종종 뛰며
똥 싸고 해탈할 시간도 없이
뱃속이 사리로 가득 찰 때까지
친구도 끊고
술도 끊고
죽기 살기로 매달렸을 것이다
희망과 놀람을 거쳐 오기와 끈기,
다음은 겸허와 근면이었으나,
허무에 와서 무릎이 꺾인 그는
열망이 그를 다치게 했다는 걸 깨달았다.
폐업을 써 붙이면서
누군가 다시 이 문을 열고
똥 싸고 해탈할 시간도 없이 살지 않기를
잠시 기도했지만
절 한 번에 시를 한편씩 쓰는 마음으로
매일 삼천 배를 하는 정성 가지고는
이 문짝 안에서 성공할 수 없으리라고
대문짝은
폐업을 덧바르면서
자꾸 얼굴이 두꺼워져 갔다.
詩 ┃ 박상화
「코뮤니스트」 9호, 2019년
새벽 여명은
이 소박한 권리조차 엄두가 나지 않는 사람들은
빨간 날 새벽 여명 속으로 출근하고 있었다
; 정규직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새벽 출정처럼 한 무리였으나
새벽 여명은
그들이 서로 다른 업체에 소속된 비정규직 노동자란 걸
하청의 재하청인 사내들이 뼈마디 성한 곳 없이 서로 경쟁하고 있다는 걸
물량을 달성하기 위해 서로 짜증내고 윽박지르고 화내고 있다는 걸
명령에 익숙하고 명령이 당연하며 명령에서 벗어 날 생각이 조금도 없다는 걸
매일 매일이 위험한 작업, 다행히 죽지 않았음으로 용접사가 되고 배관사가 되었다는 걸
좀처럼 친절할 수 없었다는 걸
살피지 않는다
새벽 여명은
더 이상 붉지 않았다
詩 ┃ 조성웅
「코뮤니스트」 10호, 2019년
개량주의자들에 대한 첫 번째 포고
-2012년 민주노총 전국노동자대회에 부쳐
더 이상 날 동지라 부르지 마라
민주노총 소속 같은 조합원이라고 하더라도
투쟁 현장에서 몇 번 구호를 함께 외쳤다고 하더라도
나는 너와 뜻을 함께하는 동지가 아니다
1998년, 민주노총 합법화를 위해
정리해고제, 변형근로제, 파견법을 합의해 준 너는
2004년, 국회의원 선거 한다고 날 찾아 와
박일수 열사 투쟁을 접으라고 한 너는
민주노총 깨려고 아예 작정한 거냐
박일수 열사 투쟁을 접지 않으면 철수하겠다고 날 협박했던 너는
2005년, 비정규직 악법 폐기를 위한 민주노총 총파업 투쟁을 기꺼이 폐기한 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항의를 양아치라 조롱하며
사회적 합의주의로 게걸음질 친 너는
2005년 류기혁 열사를 열사가 아니다라고 규정했던 너는
열사투쟁을 조직하라는 항의를 종파주의자들의 분열책동이라고 매도했던 너는
2007년, 민주노조 깃발을 위로금 몇 푼으로 맞바꿔치기 한 합의서에 직권조인 한 너는
하청노동자들의 생사여탈권을 움켜쥐고
사람 목숨을 매매했던
대공장 정규직노동조합 간부였던 너는
노동자는 하나다란 슬로건(1사1노조 방침)을 외치며
기아비정규직노조 공장점거파업을 파괴했던 너는
2010년, 모든 사내하청의 정규직화는 지금 당장 불가능하니
현안문제부터 풀자며 CTS점거파업 해제를 중재했던 너는
CTS점거파업 해제를 위해 금속노조 총파업을 유예시킨 너는
배고픔과 추위에 떠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김밥 가지고 장난친 너는
2012년 11월 11일, 자본가들을 만나고 악수하고 반갑게 협력하는 것이
확고한 정치적 신념인 너는
2012년 11월 11일, 밥 처먹고 허구한 날 교섭하고 중재하고 타협하고
굴종을 강요하는 것이 하는 일의 전부인 너는
2012년 11월 11일, 고작 부르주아 야당이 돼 보겠다고
저요 … 저요 부르주아 선거제도에 목매달고 있는 너는
노동자계급이 아니다
자본가계급이 노동운동 내부로 파견한 자들,
자본가계급의 마름이다
내게 다가와 반갑게 웃으며 악수하려 하지 마라
난 너의 적이다
난 나의 권리를 대의하겠다고 나선 자들을 믿지 않는다
난 너와 바리케이드를 앞에 두고 마주 설 것이다
詩 ┃ 조성웅
「코뮤니스트」 10호, 2019년
백만 촛불 마이너
- 2017년, 노동악법 철폐, 노동3권 쟁취, 광화문 고공삭발단식농성을 기억하며
사람만이 결정적인 봄이다, 라고 안간힘으로 외쳐보지만 사람 추린다는 소리에 휴무도 없이 출근한 공장 담벼락 안엔 어떤 꽃소식도 없었다 툭하면 ‘영구퇴출’ 입에 달고 사는 하청업체 안전팀장 새끼 아가리를 박살내지도 못했다
하청업체 안전팀장 새끼도 촛불을 들었고 박근혜 탄핵을 고대했지만 그는 여전히 내게 명령을 하고 나를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어떤 것도 결정할 수 없는 하청의 재하청인 내게 촛불은 봉기로 다가오지 않았다 어떤 것도 계획할 수 없는 하청의 재하청인 내게 촛불은 혁명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하청의 재하청인 내 삶은 하루하루가 폭력적이었다 자본주의가 요약되어 있었다
; 나는 외친다
차별은 폭력이다
위계는 폭력이다
억압은 폭력이다
명령은 폭력이다
조합주의는 폭력이다
가부장제는 폭력이다
민족주의는 폭력이다
개량주의는 폭력이다
관료주의는 폭력이다
군대는 폭력이다
의회제는 폭력이다
촛불은 흐르고 흘러서 흐름 자체가 되는 것, 머물러 무대만을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난 촛불의 흐름이 느려지기 시작하는 것이 위험해 보였다 촛불이 멈춘 곳, 화려한 조명의 대형스크린과 크레인으로 들어 올린 대형스피커로 꾸며진 무대가 내 눈엔 마치 명박산성 같았다 무대 앞에서 내 관심사였던 그대 표정을 결정적으로 잃어 버렸고 유독 주목하고 싶었던 그대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난 목소리를 잃고 그대를 데울 국도 밥도 나오지 않는 무대를 오래도록 바라봐야 했다 고착 당했다
물론 촛불은 하나의 구호가 아니고 여럿의 삶이었다 노빠도, 문빠도, 어용도, 노사협조주의자도, 조합주의자도, 민족주의자도, 김일성주의자도, 가부장주의자도, 개량주의자도, 관료주의자도, 중도주의자도, 여성주의자도, 생태주의자도, 자율주의자도, 코뮤니스트도 함께 참여하고 함께 행진했다 촛불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 계급투쟁의 소용돌이었다 이질적이고 심지어 적대적인 정치적 경향들이 함께 지배질서를 잠시 정지시키는 압도적인 다수의 힘을 이뤄냈지만 국가 앞에서 갑자기 온순해졌다 국가에 대한 분노가 이토록 순종적 일 수도 있다니, 내겐 참 기형적으로 보였다
촛불의 흐름이 무대 앞에서 멈춰 섰을 때 나는 어떤 계획도, 어떤 결정도 할 수 없는 하청의 재하청인 사내로 죽도록 일만 하다 죽어갈 것이다 촛불의 흐름이 무대 앞에서 멈춰 섰을 때 노사협조주의자는 죽어라고 자본가계급에게 협력만을 할 것이고 조합주의자는 지 밥그릇을 챙기기 위해 계급을 배반할 것이다 촛불의 흐름이 무대 앞에서 멈춰 섰을 때 성폭력 가해자들은 반성하지 않을 것이고 개량주의자들은 오늘도 투쟁 현장에 나타나서 선거가 다가오니 투쟁을 접자고 압력을 넣고 민주노총 깰 거냐고 협박하면서 계급화해의 정책들을 생산해낼 것이다 촛불의 흐름이 무대 앞에서 멈춰 섰을 때 민족주의자들은 계급투쟁을 파괴하며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사냥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관료주의자들은 모든 비판을 진압하며 자신의 명령을 완성할 것이다 또한 촛불이 무대 앞에서 멈춰 섰을 때 나와 그대는 표정을 잃고 목소리도 잃게 될 것이며 나를 대신 해 내 운명을 결정하는 자들의 목소리만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될 것이다
거리로 내쫒긴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촛불이 됐고 가장 먼저 박근혜 퇴진투쟁을 외쳤지만 백만 촛불 내내 발언권조차 얻지 못했다 촛불, 그 한 뼘의 빛조차 서러웠지만 죽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모든 투쟁을 조직했던 투명한 맨몸들은 자립적이었다 촛불은 민주주의를 위해 한사코 계급투쟁을 배제하려 했지만 자립적인 몸짓들은 “선거를 넘어 (계급) 투쟁으로” 나아갔다 투명한 맨몸의 사람들은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무대를 우선적으로 폐지했다 밀착되어 서로를 느끼고 그 몸의 언어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을 비우면서 그 곳에 배제하지 않는 힘, 평평하고 너른 마당을 키워내기 시작했다 스스로 결정하고 직접행동으로 비상했다 의회 없이도 운영되는 노동자민주주의였다 부재함으로 증명되는 삶은 끝났다 나와 그대의 이야기로 가득 채워지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방법이 내가 생각하는 정치였다 모든 폭력에 맞선 가장 뛰어난 무장이었다
詩 ┃ 조성웅
「코뮤니스트」 10호, 2019년
「코뮤니스트」 11호, 2020년
「코뮤니스트」 12호, 2020년
비극을 위하여
그는 나무라고 생각하며 서 있다
그는 가스라고 생각하며 숨 쉰다
그는 박스라고 생각하며 잘린다
그는 기어라고 생각하며 끼인다
그는 포장지라고 생각하며 불탄다
그는 모터라고 생각하며 돌아간다
그는 망치라고 생각하며 떨어진다
그는 남편이고 그녀는 아내다
그는 아들이고 그녀는 딸이다
그는 아버지고 그녀는 어머니다
그는 죽고 그가 아니면 동료들이 죽는다
이런저런 말을 하고 생각할 겨를이 없다
이것저것 요구하고 기다릴 필요가 없다
피 묻은 손이 피 묻은 기계를 붙잡는다
목숨은 멈출 수 있어도 공장은 멈출 수 없다
매일 반복되는 비극은 증거를 지우지 않는다
살아있는 눈에 마지막 노동의 흔적이 그어진다
나도 언젠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날이 있으리라
詩 ┃ 임성용
「코뮤니스트」 12호, 2020년
비정규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
잠잘 때 조금만 움직이면
아버지 살에 닿았다
나는 벽에 붙어 잤다
아버지가 출근하니 물으시면
늘 오늘도 늦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골목을 쏘다니는 내내
뒤를 돌아봤다
아버지는 가양동 현장에서 일하셨다
오함마로 벽을 부수는 일 따위를 하셨다
세상에는 벽이 많았고
아버지는 쉴 틈이 없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귀가 시간을 여쭤본 이유는
날이 추워진 탓이었다 골목은
언젠가 막다른 길로 이어졌고
나는 아버지보다 늦어야 했으니까
아버지는 내가 얼마나 버는지 궁금해하셨다
배를 곯다 집에 들어가면
현관문을 보며 밥을 먹었다
어쩐 일이니 라고 물으시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외근이라고 말씀드리면 믿으실까
거짓말은 아니니까 나는 체하지 않도록
누런 밥알을 씻었다
그리고 저녁이 될 때까지 계속 걸었다
詩 ┃ 최지인
「코뮤니스트」 12호, 2020년
나에게 돈은 목숨이다
- 고 김용균 노동자 추모시
컨베이어벨트 위 석탄으로 실려 가 본 적 있는가
분진을 나르며 굉음을 내는 컨베이어벨트는 죽음을 운반하지 낙탄이 됐다가 삽이 됐다가 나는 찰리채플린처럼 시커매져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지
가까이 왔다가 멀어지는 별처럼 아득해지는 눈
스물네 살의 눈빛은 영롱하지 아니 참혹하지 누가 날 멈추지 않는 기계 속으로 떠밀었나 나에게 감성팔이를 하지 말라 하청과 비정규직이란 말은 나도 안다
열심히 일한 것이 죄인가
부릅뜬 눈으로 벨트와 함께 돌다가 속도에 휘말려보라 숨통을 틀어막다가 숨이 헐떡거리다가 먼지의 뽀얀 사막 속에서 길을 잃어 보았는가
컵라면 하나가 나의 유일한 위안거리다
나의 일터는 목숨을 거는 전쟁터다 엄마가 말했지 용균아 오늘도 무사히 일하고 와야 해 컨베이어벨트는 엄마 말을 집어 삼켰지
컨베이어벨트는 키득키득 지금도 누군가의 목숨을 돌리고 있을 것이다
詩 ┃ 봉윤숙
「코뮤니스트」 12호, 2020년
30년
30년 전에 야간고 실습생 영국이는 나사를 깎았다.
아침까지 일을 해야 되는 건 영국이뿐이었다.
영국이는 태핑기에 장갑이 끼였다.
손가락이 잘린 채 그대로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30년 후에 특성화고 민호는 기계에 끼여 죽었다.
민호와 영국이는 혼자 작업을 했다.
30년이 가고 다시 30년이 와도 영국이는 엎드려 있다.
30년 후에 민호가 죽어서 엄마의 통곡 앞에 누워 있다.
詩 ┃ 임성용
「코뮤니스트」 13호, 2021년
백종원 김밥
편의점 김밥을 고르는데 백종원김밥이 눈에 띄었다.
조리 모자에 위생복을 입고 내 김밥 드시라고 엄지척한다.
음식장사로 성공한 백종원은 유명 요리사다.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 골목 식당 주인들에게 호통을 친다.
이래 가지고 장사가 되겠어?
나는 그 말이 이래 가지고 나처럼 성공하겠어,라는 말로 들렸다.
새벽, 치킨집 오토바이 한 대가 교차로에 들어섰다,
직진 신호가 바뀌면서 승용차 한 대가 달려왔다.
오토바이를 탄 청년이 날아올랐다.
통닭이 죽고 오토바이가 죽었다.
누구도 백종원이 될 수 없다.
詩 ┃ 임성용
「코뮤니스트」 13호, 2021년
저녁이 있는 삶
얼마 전에 과로로 사망한 서른두 살의 택배 노동자는 하루에 14시간을 일하면서 1만 건의 배달 물품을 처리했다고 한다. 일요일만 쉰다 치고, 25일이면 1일 400건이다. 1시간에 28.5건이다. 그러니까 2분에 1개씩은 배달해야 되는 중노동이었다. 두 아이의 가장인 그는 그렇게 일하다 쓰러졌다. 다시는 일어나 눈을 뜨지 못했다.
詩 ┃ 임성용
「코뮤니스트」 13호, 2021년
나의 노동으로
1899년, 런던에선 자동차 두 대가 등장했다고 한다.
그 자동차는 쌍두마차만큼이나 훌륭하게 영국 여왕의 편지를 배달했다.
그로부터 120년이 지났다.
나의 노동으로 나무가 베어지고 있다.
나의 노동으로 땅이 파헤쳐지고 있다.
아름다운 나무의 꽃과 순결한 땅의 벌레들이
나의 노동으로 목숨을 잃고 있다.
나의 노동으로 숲이 사라지고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나의 노동으로 강물은 막혀 댐이 완공되고 있다.
나의 노동으로 수백만 대의 자동차가 쏟아져 나오고
나의 노동으로 수천만 대의 냉장고가 넘쳐난다.
나의 노동으로 총탄과 포탄이 만들어지고
나의 노동으로 탱크와 전폭기가 사람들을 살육하고 있다.
나의 노동으로 나무와 석탄과 석유를
마지막 한 그루까지 마지막 한 삽까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없애고 있다.
나의 노동은 고향으로 영원히 돌아갈 수 없다.
노동과 생산은 너무 위험해졌다는 말이다.
노동의 권리는 발전의 가치와 다르다는 말이다.
나는 노동력을 판매하면서 노동을 소진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윤에 지배당한 생산은 파괴적 종말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쌍두마차가 지나가고 자동차가 지나가고
영국 여왕이 보낸 편지는 스마트폰으로 전송된다.
다시 120년 후에 나의 노동은 무엇으로 남아 찬란한 고통이 될까.
詩 ┃ 임성용
「코뮤니스트」 13호,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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