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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05/29 13:32

40년대에 태어난, 이제는 장년층의 작가들.

그들 3명이 함께 한 이번 전시는 현대미술의 지나간 시간을 돌아가보는 계기로 기획되었단다.

 

첫번째 보게 된 작가 [손장섭]은

4.19혁명, 광주항쟁 등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꽤 극명하게 드러난 작품이 [6월의 춤](1988)인 듯 싶다.

전경의 방패앞에,

그 유명한 사진인 강경대 열사 모습 앞에,

마치 죽은 자의 조상인 양 액자틀에 갇힌 얼굴들앞에,

바닥에 웅크려 얼굴 들지 못하고 있는 민중들 앞에,

한 여인이 춤을 추고 있다.

그의 춤사위 표현은 몸의 움직임에 따라 파도가 치듯 밖으로 퍼져나가도록 그려져 무척 인상적.

 

삶의 애환을 담은 듯한 작품들도 있는데

[삶](1986)은 부서진 포장마차와 그걸 바라보는 그늘지고 눈코입없는 얼굴의 사람 모습에서 '삶이란 이리 고된 것인가?'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달동네](2006)는

집인지 잿더미인지 쓰레기더미인지 알 수 없는 무더기가

하늘의 구름을 찌르듯 쌓여올려진, 지금도 올려지고 있는 느낌이다.

 

 

역시 90년대 들어서는 자연을 많이 그린 것 같던데

[이천백송](1995)이나 [영주안정 느티나무](2005), [완도정좌리 느티나무](2006) 등의 작품은 작가가 마치 나무의 기운을 느낀 듯. 나무 중심으로부터 자연의 氣가 하늘로 퍼져나가는 느낌이다. 그러고보니 나뭇잎도 사방으로 퍼지는 느낌.

 

 

[변산기행](1991)은 2/5와 3/5의 재미있는 면 분할을 가지고 있다.

왼쪽엔 깍아지를 듯 절벽 아래 뭔가 해산물 줍는 사람들이,

오른쪽엔 폭포수 아래 아래 거대한 백송 아니면 느티나무가 보인다.

희한하게도 그 아래 철조망 비슷한게 쳐져있어 우리는 '그 곳에 못간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T.T

 

 

 



두번째 보게 된 작가 [김경인]은

소나무를 많이 그린 작가라는 데, 현대인의 모습에도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은둔](1989)의 경우, 침대 위 또와리를 튼 듯 눈감고 누운 모습이 그야말로 누가 뭐라하지도 않았는데 자기 혼자 자기 침대에 갇힌 현대인의 자화상같다.

 

[절규](198)는 마치 거대한 하얀 세상이 거인의 상반신을 지우고 이제 하반신만 남아있는 상태로 보인다. 거인과 더불어 세상도 흔적이 슬슬 사라질 듯 보이는데, 좀 있으면 사라질 그 곳에 넓게 펼쳐있는 붉은 천은 무슨 의미일지 궁금 O.O?

 

 

[老와少 그리고 주검](1984)은 매트릭스의 관같은 통은 아니지만 칸칸이 쳐진 벽마다에 갇힌 개인들을 보여준다. 그 중 나이들어보이는 자는 무릎에 해골이 얹어져있지만 노인이든 청년이든 느낌이나 자세가 비슷하다. 결국 老와 少는 한끝 차이일 뿐?

 

[공포](1990)는 거대한 진흙무더기가 흘러가는 사이로 빼꼼이 내민 공포에 일그러진 얼굴이 보인다. 그러나 그가 서있는 현실 역시 칠흙같은 어둠뿐.

내가 보기엔 오히려 보이는 것-눈앞에 흘러가는 무더기들-이 훨씬 공포가 덜해보인다.

 

소나무의 작가이다보니 다양한 소나무 그림들도 많이 있다.

[순흥 소낭구](2006)의 경우, 자연스러운 하늘색 소나무와 아이보리 하늘을 표현하여 마치 소나무 안에 들어가면 하늘안에 들어온 느낌일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석송령의 지평](1995)은 나무가 워낙 거대하다보니 군데군데 철구조물로 기둥을 세운 모습을 표현했는데, 그 모습이 왠지 나무에서 떨어지는 물줄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드넓게 퍼져도 불안해보이기보다는 포용력 있어보인다.

 

[소낭구이야기](2003)는 엄청나게 큰 작품이다.

크게 둘로 분할되어 있는데,

왼쪽은 마치 겨울의 일본 신사문 앞의 눈 속 소나무,

오른쪽은 앵무새와 나시티입은 사람, 꽃뱀이 있는 여름의 아이스같은 소나무가 있다.

특히 오른쪽은 껍질 표현이 마치 얼음조각들 같다. 음... 맘에 들어^^

 

세번째 보게 된 작가 [윤석구]는

나무를 소재로 다양한 작품을 보이고 있다.

 

작품들 중에서 [Rainbow ***] 시리즈가 많았는데 나무 자체를 소재로 사용한 작품들이다. 

그런데 왠지 기분이 나쁘다.

써있는 바로는 작가가 순수자연으로 돌아가고픈 심정도 어느정도 있긴 한 것 같은데,

Rainbow 시리즈만 봐서는 왠지 자신의 내재된 상태로 자연이 변형되어주길 바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이다.

 

[Rainbow 05-01](2006)은 양쪽 다섯갈래씩 퍼진 나뭇가지가 있고 순이 나올 자리에 오색이 칠해져 있다.

 

[Rainbow 05-02](2005)은 자연스레 퍼지는 나뭇가지 끝에 다양한 색이 칠해져있다.

 

 

포스트에 올린 그림들은 사실 전시 전반의 느낌과 약간 동떨어진 그림들이다.

전반적으로 '나무'가 많은 전시회였다.

자연은 확실히 마음의 안식처인 듯, 전반적으로 그림만 봐도 살짝 평온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들의 계곡은 나름 푸르렀다'..ㅋㅋㅋ

 

40년생이면 이제 60대던가? 노년이라 불리우기엔 좀 젊은 그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고 과거형으로 불리기엔 살짝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도 확실히 과거의 향기가 나는 것은 맞다.

동일 연대의 작품들이라 그런지 이상하게 연도를 무시하고 뭉뚱그려봐도 전반적으로 비슷한 느낌, 뭔가 진중한 것 같으면서도 무게는 가벼운 느낌이다. 윤석구 작가 빼고...^^

 

한편 60~80년대 그림에 사회상과 관련된 내용이 등장하는 걸 보면서 사람이 사회와 부딪혀 가장 치열하게 살만한 나이를 굳이 꼽자면 20~40대 사이인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르게는 그들의 그 시기가 사회의 격변 그 자체였을 것 같기도 하다.

 

 

*그림 출처 : 일민미술관( http://www.ilmi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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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9 13:32 2006/05/29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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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05/10 22:44

울산 조합원 3명이 부당해고당해 화요일부터 남쪽에 내려와있는데, 담주정도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 지 가닥 잡힐 듯 싶어요.

이 와중에 위원장 있는 부산에서 엘레~강스하게 노동코미디 뮤지컬 한판~! 땡겼슴다.(^^);;

어찌나 재미있던지~!

 

노동문화예술단 일터가 요즘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사무실 지하 소극장에서 [팔칠전]을 상영하고 있어요.

 

87년 대투쟁의 영웅인 '팔칠이(^^)'가 갑작스레 의식불명상태로 20년을 병원에 누워있다가 2006년 다시 깨어나 활약하는 내용임다.

깨어나면서 팔칠이는 "진실의 눈!"을 외치면 사람들이 진실을 말하게 되는 초능력(?)을 갖게 되지여. -.-

 




팔칠이가 의식불명되었을 때 함께 하던 노동동지 늦동이는 비문의 죽음을...(나중에 밝혀지죠. 그놈의 '진실의 눈!' 땜시) 

그 위로금으로 늦동이 엄마가 팔칠이를 20년동안 간호하고 있었다는데, 이 몽빼 할머니, 왕코믹하삼.

 

깨어나자 잠시 기억 상실한 팔칠이에게로 각종 정파에서 불나방 날아들 듯 명함 들고 찾아오는 모습.ㅋㅋ

참여하는, 함께하는, 앞서가는, 실천하는 노동 모임들에서 예전의 영웅 팔칠이를 가입시키려는 치열한 경쟁 한판을~!


 

 

20년이 지난 이후 우리의 자식들은 하청노조 조합원이 되어 결국 타워크레인에 올라가고, 다른 노동 동지들은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되었지요.

그런데 팔칠이가 이 모든 상황을 "진실의 눈!"으로 해결(?)하게 되죠.

 

 

그런데 마지막엔 좀 아쉬웠어여.

팔칠이를 제거하려는 사용자와 공권력들이 팔칠이의 예전 애인 앞에 놓고

사랑이냐 투쟁이냐 선택하게 하는 거 있죠?

 

이러다보면 결국 '자식이냐 투쟁이냐?', '돈이냐 투쟁이냐?', '부모냐 투쟁이냐?', '명예냐 투쟁이냐?' 이런 식으로 계속 선택지를 만들어버리는 거 아닐까요?

그냥 선택이 아닌 삶으로써의 투쟁은 안될까나?

(게다가 진부 그자체인 영화 볼때 나오는 여자 인질을 여기서도... 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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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10 22:44 2006/05/10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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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05/08 10:32

7일 광화문가기 전에 잠시 들러봤습니다, 평화박물관(아직 건설추진위원회).

작고 아담하고 순백의 공간이더군요.





 

 

사진이 많지는 않았지만 아주 좋았습니다.

내전과 군부 독재에 시달린 버마정글과 난민마을 속 사람들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다들 어찌나 입가에 미소가 가득한지...

래퍼허마을, 매써리마을... 여러 난민 마을 이름이 나왔는데, 그닥 주의깊게 새기질 못해서리...^^;;

 

아래 사진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모습..

 

 

얼핏보면 낙원같아 보이지만, 항상 굶주린 그곳.


 

 


 

 

버마 아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는 공간...

입구에는 버마사람들이 손수 짠 가방도 팔고 있습니다.


 

 

버마아이들에게 장래에 되고 싶은 것에 대해 물었나봐요.

군인, 경찰, 비행기 조종사 등이 많이 나옵니다.

아래 그림은 경찰이 되고싶다는 그림인데, 적나라하죠?

이 아이는 정말 총에 맞는 사람을 본 걸까요?

 

 


 

이 사진은 그냥 7일 서울 하늘입니다.

내전과 군부독재에 시달린 버마 사람들을 보고

광주항쟁을 떠올리게 하는 평택의 촛불문화제를 참석하면서

너무나 갑갑해지는 마음으로 보기엔

너무나 청명 찬란한 하늘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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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08 10:32 2006/05/08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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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04/30 11:32

정석화님의 [얼굴/안창홍 회화展]

원미동[얼굴 - 안창홍 개인전]

임산[얼굴 - 안창홍 개인전]에 관련된 글.

 

예전 광주비엔날레에서 독립군들의 단체 사진에 파리를 잔뜩 그려넣은,

엄청나게 공들였다싶지만 엄청나게 보기 껄끄러운 그림을 본 적이 있었다.

 

아마도 이번 전시에서 작가와의 대화에 참가하지 못했다면

그 때의 그 그림과 이번 전시 그림이 

같은 화가 작품이란 걸 전혀 몰랐을거다. 난 참 둔감하니까..ㅋㅋ 그렇게 엮고 보니 그림의 느낌이 한사람거다.

 

현재 안국역에 있는 사비나 미술관에서는  [얼굴]이라는 제목의 안창홍 개인전이 개최중이다.

 

이번 전시는 크게

1. 시간의 무상함

2. 기계

3. 죽음

을 상징하는 3가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간의 무상함

 

이 부분에서는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 존재와 소멸이 독특하게 섞여있는 작품들을 살펴볼 수 있다.

 

[49인의 명상]이라는 작품은 작가가 문득 옛 사진을 발견하고, 그 당시에 존재했으나 소멸된 모습들을 독특하게 재창조한 것이다.

작가는 그들을 - 사진 속의 그 모습들을 - 과거와 현재의 틀 사이에 놓아두기로 했단다.

그 방법으로 영혼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눈을 감기고,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입술을 붉게하고,

사진 위에 투명하고 두터운 막과 테두리에 틀을 튼튼히 해서 박제된 시간 속에 사진을 가두어놓았다.

 

사진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커서 마치 사진 속 거인들이 바로 눈을 뜨고 걸어나올 것 같으면서도, 사진 위의 두터운 투명막 때문에 평면인데도 확실히 '박제'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차라리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할 것을, 입술에 불어넣은 생기가 오히려 안타까워보인다.

 

 

기계 - 사이보그, 그리고 눈물

 

이 부분에서 작가는 기계문명의 발달과 그로 인해 발생하게 되는 기계와 인간의 관계 역전을 지적해보고 싶었단다.

 

[사이보그]라는 작품은 다양한 사람 모양의 사이보그 모습을 초상화처럼 걸어놓았다.

그림 중에는 진짜 기계처럼 큰 눈과 젊은 모습을 한 것도 있지만,

독특하게도 사람 크기의 눈이나 늙은이의 모습을 한 것도 있다.

사이보그는 인공지능과 달리 전혀 인간다운 면이 없는 기계일 뿐인데,

사람 모습이라는 것만으로도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느낌을 주는 듯 하다.

 

 


2층에 가면 [부서진 얼굴들]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사진만을 이용하여 찢어 붙이기를 통해 꼴라쥬로 표현된 작품들이다. 아래 그림은 사진만으로 표현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눈이 기계 눈처럼 보인다.

 

아래 작품은 바코드를 보면서 착안한 방식이라는 데, 여자 얼굴 안에 남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어째 실제 작품보다 그림 파일이 더 무서워...O.O;

 

 

 

죽음

 

이번 전시의 마지막 부분은 죽음이라는 주제로 끝을 맺고 있는데 작가가 6번째 인도에 갔을 때 그린 그림들을 전시하고 있다. 대체로 색감은 화려하지만 매우 잔잔해보이는 그림이 많은데, 물감을 붓의 터치에서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둔 것 같다.

 

 

한편 작가는 자화상을 참 많이 그린다고 한다.

인도 편에서도 역시 자화상이 있었는데, 어찌나 귀여운지...ㅋㅋㅋ

 

 

작가와의 대화 시간엔 작가가 고1부터 30년넘게 그려온 엄청나게 많은 작품들을 봤다.

설명이 곁들여져서 그런지 

초기작부터 최근까지의 작품들이 서로 얼기설기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다. 

얼마 안되는 시간이었지만

작가의 인생을 은근슬쩍 훑어본 것 같은 묘한 만족,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한 묘한 감동,

그가 일구어낸 한우물에 대한 묘한 경외가 느껴진다.

 

80년대는 시대가 엄혹해서 확실히 사회로 눈을 돌린 작품들이 눈에 띤다. 부마사태, 광주사태 등... 그 안에서는 권력의 핵심과  무력한 지식인, 그러나 저항할 것을 촉구하는 메시지들이 담겨져있다.

 

그런데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작가는 '격변하는 시대' 모습을 담기 시작한다. 물질만능주의, 애정없는 섹스, 동성애, 과거 권위에 대한 희화 등등...

80년대의 저항보다는 다양한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중년의 작가를 통해 사회의 다변화를 느끼게 해준다.

흥분될만한 저항의 기운이 사라진 것 같은 안타까움에,

나도 모르게 작가에게 질문했다. 90년대 이후 저항의 대상은 무엇이냐고?

작가는 대답한다. 80년대의 치열한 사회 문제가 90년대 이후 사회 속으로 '흩어졌다'고...

 

의제가 흩어졌다. 집중이 아니라 분산되었다.

집중되었을 때 극명히 드러날 대중의 저항은 의제가 흩어짐으로 인해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 마음 속 뜨거운 피는 의제의 집중을 통해서만, 눈에 보이는 혹독한 사회현실 속에서만 가능한 것일까?

무엇이 사람들 마음 속 세상의 모순과 저항의 발걸음을 함께 할 수 있게 하는걸까?

 

* 그림 출처 : http://www.ahnchangh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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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30 11:32 2006/04/30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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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04/17 11:35

2004년, 만 47세의 나이에 작업실에서 좋아했다던 포도주와 재즈음반을 들으며 숨진 작가,

작가이자 해박한 이론가이면서 주류를 거부하는 활동가라 불리던 작가.

이름도 (태어날 때) 박철호 -> (미국에선) 박모 -> (한국에 돌아와) 박이소

라고 스스로 바꿔 불렀는데,

이름으로 통칭되는 자신의 명예 등을 이름을 지움으로써 완전히 버리는 일종의 상징적 행위였나 보다.

 

그는 미국 체류 당시 마이너 인저리(Minor Injury) 갤러리라는 비영리 대안 공간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마이너 인저리의 설명문에는 '1. 인종적, 문화적,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소수에 속하거나 이에 관심있는자', '2. 분쟁 또는 개도국에서 이민한 작가'를 환영한다고 적고 있다.

사진에 보이는 마이너 인저리의 입구는 개성 강한 창고 주인의 작품 같다. 빨간 스프레이로 대충 적은 것 같은 간판과 네모 모양의 다양한 색상 무늬, 그 위에 검정 스프레이로 칠한 입구는 그들의 마이너 지향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듯 하다.

 

 




전시관 입구에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모뉴멘타 미(monumenta me)]라는 이 작품은 내 키높이를 훌쩍 넘긴 성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면서도 위의 뾰족 탑들이 동화 속 그것을 연상하게 한다.

 

 

간단한 스케치들 속에 포스터 하나가 눈에 띄는데,

[MinJoong Art]라고 적혀 있고

부제로 'New Movement of Political Art From Korea'라고 적혀 있다.

 

 

박이소의 작품 중에는 그림 일기같은 작품도 있다.

1986년에 만든 [무제]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나는 그림 그릴때마다 이 그림이 딴 사람들 맘에 들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요즘 세상에 가만히 벽에 붙은 그림이 뭘 할 수 있을까하며 자주 한심해 한다.'

이 글을 읽다보니 당시 작가의 운동(movement)에 대한 열망과 좌절이 살짝 배어나오는 느낌이다.

 

 

박이소는 이름을 지울 때 동시에 단식이라는 행위 역시 상징적으로 병행했던 것 같다.

리플렛 표지에 단식을 하면서 밥솥을 메고 어느 다리를 건너고 있는 작가의 퍼포먼스를 볼 수 있다.

 

 

[오각형의 자백]이라는 작품은 그가 단식을 할 때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번 단식에 대해 어떻게 기술했는 지를 몇가지 분류로 나누어 적고 있다. 이는 같은 행위에 매번 다른 답변을 한 것 같아 거짓이면서도 답변 자체는 모두 사실이다.

단식의 오각형

단식일을 적고 있는데 1995.7.21 ~ 8.4 까지...  꽤 오래했네.-_-

저항적 자기 해체

'나의 몸을 소재로 삼은 상태에서 시간과 공간의 속박(혹은 축복)에 잠시 반기를 들어본, 저항적이나 결국은 소극적인 자학'

자살 충동

'먹지 않기'에 대한 선택은 오히려 자신에게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자살 충동에 대한 예방 백신으로 간주하고 있다.

정신력의 승리

뭔가 자신에겐 예술가적 창조성 등등 보다는 정신력과 인내력이 다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를 강화하고 싶었다고...

건강론

건강하고자 하는 사치스러운 욕망

분노와 짜증

보스니아 사태와 같은 인간의 잔혹성이 아니라 '자신의 무능함, 나약함, 생존의 위태함, 가소로움에 대한 실존적 노여움'이며, 자기개혁의 의지가 뒤엉킨 것이란다.

 

 

그의 작품 중에는 1998년도에 제작되었다지만 7,80년대 분위기가 물신나는 작품도 있다.

[포럼 A의 뉴스레터 표지 디자인]은

맨위에 벽돌마다 '성실1','성실2' 라고 붙인 벽돌 더미가 있고,

중간에 벽돌이 쌓인 벽과 '열심히 노력하여'라는 글이,

맨 아래 꽃 모양과 '재능을 꽃피우자'라는 글이 적혀있다.

어찌나 구호적이고 계몽적인지 보면서 실실 웃음이 나왔다.

 

 

[오늘]이라는 작품은 전시장 밖에 비디오 2대를 하늘을 향해 설치하여 태양의 움직임을 찍고,

전시장 안에서는 벽 한쪽을 잘라 눕히고 프로젝터를 통해 하늘의 모습을 보게 한다.

그야말로 실시간 하늘 이미지를 볼 수 있는데, 참고로 실내는 조명이 있어 구름이나 하늘 색 등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는다.

 

 

[오공계(五空界)]는 스테인레스에 동그라미 5개를 뚫고 나무합판으로 메꾼 작품인데,

작품 앞쪽보다 오히려 작품 뒷벽의 그림자가 더 재미있다.

 

 

[팔라야바다(Fallayavada)]는 작가가 설계해놓은 도면을 보고 그대로 재현한 작품인데, '하나의 선이 만들어내는 천개의 낭떠러지이며, 외부 세계와 연결된 틈, 우주로 통하는 작은 우물'이란다.

콜로세움 가운데 하늘에서 땅을 찍은 영상이 보이는데, 2006년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작품의 경우엔 제부도 상공에서 찍은 땅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신의 밝은 미래]라는 작품은 10개의 조명이 출구쪽 벽에 집중 투사되면서 내가 나가는 길을 밝혀준다.

그리고 그 길의 끄트머리에는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너무 평범한 말을 해서 충격받지 않으셨나요?'라고 적혀있다.

 

 

전시를 둘러보며 작가가 뭔가 확고부동한 세계를 표현한다기 보다는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고 채찍질하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작품들은 재미있고 재치있어보이면서도 무게감이 느껴진다.

 

이러한 무게감의 느낌은 이번 전시의 이름이 단테의 '신곡'을 풀어 쓴 탈속의 코미디라는 점에서 더욱 강화되었는 지 모르겠다.

작가를 생각할 때 잠시 피카소의 서글픈 광대 그림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단식 등으로 스스로를 옥죄는 것에 대한 피로감을 느껴서인 것 같다.

그러나 언제나 예술에 대한 정체성을 고민하기 위한 행위였다는 측면에서 삶의 고단함과 인간의 위대함을 동시에 나타내는 듯한 피카소 그림과는 좀 다른 뉘앙스를 풍기는 건 사실이다.

 

확실히 작가는 예술 추구에 대한 괴로움, 진정성에 대한 의문에 휩싸여 있던 것 같지만,

안식을 구하는, 정체성을 추구하는, 희망을 갈구하는 자였기에

포스트모던을 추구하거나 즐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작품, 전혀 다른 활동이 가능했으리라 본다.

 

* 사진출처 : 로댕갤러리(http://www.rodingaller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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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17 11:35 2006/04/17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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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03/27 21:06
요즘 광화문 흥국생명 3층에 가면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에서 개최하는
[우키요에 황금기 - 미인화와 풍경화의 세계]를 관람할 수 있다.
우키요에는 '이 세상'을 뜻하는 우키요와 '그림'을 뜻하는 '에'의 합성어로 17세기 일본 에도시대 서민들이 즐긴 풍속화를 의미한다.
이번 전시는 복각화라고 해서 당시의 목판화를 기술까지 그대로 재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에도에는 새로운 도시에 무사들이 넘쳐나 남녀비율이 8:2였다고 하는데,
그러니 여성의 직업이라는 게, 1.게이샤, 2. 처, 3. 첩 정도 아니었을까 싶다.
불현듯 만화 [오오쿠]의 설정이 현실에 기반했다는 사실에 충격..O.O

이 포스터에 보이는 그림은 케이사이 에이센의 [백분 비엔센죠코 - 아침안개]라는 작품인데 사카모토야라는 데서 출시한 백분의 광고시리즈였단다.ㅋㅋ
원래 뒷배경에 바다가 있는데 지금 막 눈을 뜬 모습. 이마 옆으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이 그림의 현실감을 더해준다. 당시에 아랫입술을 여러가지 연지로 덧발라 빛의 방향에 따라 다른 색으로 보이게 하는 게 유행이었다는데 그러니 저 초록 입술은 뭐 묻은 게 아니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 중 하나가 이치라쿠데이 에이스이라는 작가의 [기루 츠루야의 기녀, 무츠]라는 작품인데, 이 작품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눈매가 술에 풀린 듯 너무 해학적인 것이 과연 이 그림이 '미인도가 맞나?'싶을 정도로 재미있어서였다.
간혹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여우나 너구리 들의 유머스러운 표정이 어디서 유래한 것인 지 가늠하게 한다. 일본 애니의 힘!

아래 작품은 기타가와 우타마로의 [청루 니와카의 여자게이샤부, 오오만도 오기에오이요 타케지]. 우타마로는 당시에 가장 유명한 작가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리자마자 마구마구 팔리는...
이 그림을 보는 순간 어디까지 옷이고 어디까지 끈 인지 알 수 없는 엄청난 섬세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에도시대에는 도쿠가와 막부가 매년 교토에 있는 천황에게 말을 진상했다고 하는데,
우타가와 히로시케라는 사람이 1832년, 이 행렬을 쫓아다니며 [도카이도 53역]이라는 풍경화 시리즈를 그렸다. 아래 그림은 그중 [누마즈]라고 해질녘을 그린 것.


도카이도 53역중에는 [하라]라는 그림이 있는데 하라는 후지산이 가장 가까이 보이는 곳이란다. 그래서 그런지 후지산이 화면 전체를 꽉 채우다 못해 후지산 꼭대기는 네모난 화면틀을 뚫고 나와있다. 어떻게 화면틀 무시할 생각을 했을까? 놀라워.


가츠시카 호쿠사이라는 사람은 [후가쿠 36경]시리즈를 남겼는데, 여기서 후가쿠란 후지산의 별칭이란다. 아래 그림은 그중 [쿠로후지]라는 그림인데 간결하면서도 역동적인 느낌이다.


호쿠사이의 후가쿠 시리즈는 인기가 너무 좋아 나중에 10작품이 추가되었는데 이중에 [미노부가와 우라후지]라는 그림이 있었다. 그림을 보는데 마치 웅장한 산이 걸어서 앞으로 나오는 바람에 아래쪽의 강물이 요동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그림은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명소에도백경 - 아사쿠사킨류산 카미나리문]인데, 하얀 눈과 문과 절의 붉은 색이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그리고 가만 보면 사람들이 밟고 있는 경내 바닥 부분은 종이 자체를 올록볼록하게 나오게 해서 마치 눈송이가 내린 형상을 표현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우키요에의 황금기였던 19세기 전중반의 미인화, 풍경화들이라 그런지 무척 화려해보인다.
서민화라고 하는데 김홍도처럼 서민을 그렸다기 보다는
서민이 꿈꿀만한 걸, 즐길 만한 걸 그린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인지 즐길 거리가 미인과 풍경이라는 대상이란 건 역으로 그 서민이 남성임을 뜻하는 것이다.
심지어 인구비율이 8:2였으니 19세기 에도에서 여자로 산다는 건
예쁜 도자기처럼, 어떻게 살지 고민할 여지가 없는, 세상이 답답하다 여기는 자는 녹녹치 않은 삶이었을 것 같다.

풍경을 즐길 땐 정취에 취하지만,
인물을 즐길 땐 문득 해학을 찾는(일종의 도피행위인가?ㅋㅋ) 관람.
그런데 여성은 어느새 여자를 감상하는데 무척 익숙해졌다!

* 사족 : 이치라쿠데이 에이스이의 [기루 츠루야의 기녀, 무츠]를 잊지 마시오.(^o^)b
* 사진출처 :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 팜플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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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27 21:06 2006/03/27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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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03/21 22:01

스위스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활동한다는 작가 알폰소 휘피(Alfonso Hüppi).

이번 전시회에서의 다양한 사진과 드로잉들은 교수시설 학생들과 함께 여행했던 경험들이 녹아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인지 전시회 이름도 '감상적인 여행(Sentimental Journey)'.

들어가자마자 2층에 올라가면

북아프리카, 시리아, 터키 이란, 아르메니아, 한국 등지에서 찍은

대문과 문들의 사진이 작은 액자들에 빼곡히 담겨있다.

솔직히 한국 말고는 어느 나라의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문들을 보면서 대략 추론해보건대

사진에 담긴 문들은 꽤 지방도시나 시골로 들어가야 나올 법한 서민들의 그것이었다.

시골 한 가운데 버려진 공장과 같은 문, 1층짜리 앉은뱅이 주택의 문, 빨강파랑 돌아가는 이발소 표시 옆에 있을 것 같은 문...

도시 문의 모양새이지만 더이상 도시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그래서 사뭇 정겨운 문들이다.

안타깝게도 그 와중에 우리나라 문이 제일 재미없어보이긴 한다. 여기 살아서 그런가?

다른 나라 문은 문에 꽤 아름다운 문양도 넣고 그러던데...



사진들을 열심히 보다보면 한쪽 벽에 서있는 거대한 문을 발견하게 된다.

[막스빌을 위한 대문]

이 문은 10개의 액자틀을 가지고 마치 문에 들어가는 느낌이 들도록 세워 만든 작품이다. 뭔가 현대적이면서도 깔끔하다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문이 주는 정적 느낌을 벽에 세운 액자로 표현함으로써 마치 만화나 동화의 한 장면처럼 움직일 것 같은 느낌으로 변화시킨 것 같다.

 

[나무카페트]라는 작품들은 16개의 조각퍼즐같은 나무판 위에 파란색과 하얀색이 다양한 곡선으로 나뉘어 색칠되어 있는데, 희한하게도 어떠한 조합도 유연한 곡선이 끊기지 않고 이어져 있다. 마치 어른들을 위한 거대한 놀이 퍼즐을 만든 것 같은 느낌이다.

 

[6개의 엿보는 구멍]이라는 작품은 내 키보다 훨씬 긴 6개의 액자가 벽에 기대어 서있다. 각 액자 안에는 다양한 모양들이 있는데, 진짜 액자 속으로 마치 타 공간을 엿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블라인드]라는 작품들은 아주 큰 커튼 대용 블라인드들에 그려진 그림들이다.

아래의 작품처럼 대체로 사람이나 새, 코끼리 등등 동물들을 그리면서 서로간에 뭔가 연결되어지도록 표현한다.

굉장히 담백하고 언뜻 보면 동양의 가벼운 채색화를 보는 느낌도 많이 든다.

 

[마지막 여행]이라는 작품들은 뭔가 살짝 무너진 옛 성당터같은 곳을 초점이 완전 나간 사진으로 찍은 후 그 위에 굵은 펜으로 그린 것들이다.

사실 위의 작품 말고 더 인상적이었던 그림은

머리에 붙은 머리카락들과 손의 손가락들이 사방으로 뻗어 벽과 천장에 붙는 그림이었는데, 뭔가 목소리 대신 외치는 듯, 움츠리지 않고 확장되고 싶은 욕구가 느껴졌다.

또 하나는 천장의 둥근 돔을 배로, 기둥과 돔 사이의 둥그런 부분을 팔로 그리면서

세로로 가는 창문에 육중한 몸이 올라간 모양을 나타낸 그림이었는데, 참 해학적이었다.

 

[삼각형]이라는 작품은 2가지가 있었는데, 액자 자체를 역삼각형으로 만든 것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 안의 얼굴들이 마치 이쪽 세상을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다.

 

2층과 3층의 전시실을 거쳐 다시 1층으로 내려오면 로비에 거대한 [대문]이라는 작품이 2가지 종류가 있다.

이 작품들 역시 거대한 액자 3개를 가지고 벽에 기대어 세워 만든 건데

벽에 세웠다는 것 자체가 문이 갖고 있는 무게감에 동적 변화를 주는 데, 거기다 더해서 액자중 하나를 비스듬히 세움으로써 더욱 역동성을 부여하였다.

 

처음 본 문과 대문들에 대한 사진이 소박하고 따사로운 느낌인 반면

나머지 작품들은 현대적이고 재치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문이나 구멍 같은 공간을 표현하는 작품들은 하나같이 다른 세계로의, 또는 다른 세계와의 소통을 갈구하고, 미지의 세계에 가슴 뛰어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리하여 마치 그 문을 살짝 열어보면, 그 구멍을 살짝 엿보면, 그 액자 속을 살짝 들여다보면,

꽤나 재미있고 서로 관계를 맺을 만한 일이 생길 것 같다.

 

한편 블라인드와 같은 드로잉 작품들에서도 사람과 동물들이 서로 얼기설기 엮여있는 표현을 많이 보게 된다.

그 모습은 서로 먹고 먹힌 느낌이었다기보다

원래 그러했었던 것처럼, 마치 사람과 동물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게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모던하고 차분해지지만 은근히 마음 따사롭게 만들어준 전시.

 

* 사진출처 : 대림미술관(http://www.daelimmuseum.org)

* 읽어볼 만한 글 : http://blog.empas.com/wopark/12975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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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21 22:01 2006/03/21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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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03/11 23:16

요시나가 후미의 신작이 나왔다!

(근데 일본에선 후미 요시나가라고 부르는 것 같던데 왜 바꿔부르지?)

기이하게도 배경은 일본 막부시대 한 1700년대쯤 되는 것 같은데

'오오쿠'라는 것도 원래 작가가 굉장히 좋아하는 시대극 제목이란다.

 

다만 내용은 나오는 쇼군이 여자이고,

쇼군이 거느리는 삼천 궁남이 있다는 점이 약~~간 다를 뿐.




처음엔 곰에, 전염병에 사람들을 왕창왕창 죽이길래

당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시츄에이션인지 갈피를 못잡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남자 인구를 여자의 1/4로 확 줄이려는 설정.

 

이 설정이 끝나고나서부터의 세상을 묘사하는데,

읽으면서 내내 "쿡쿡"거리는 폭소 한마당이었다.

 

남자들이 얼마 안남았으니

농사도, 전쟁도 모든 집안밖의 일을 여자가 맡게 되었고,

가업도 여자가 이어받고,

혼인제도는 완전 붕괴되어 돈 있는 여자나 혼인, 없는 여자는 유곽에서 남자를 샀다.

 

그 와중에 막부라는 무가(武家)사회 시스템 역시 남녀 역할 교체. 워낙 관료화되어 있어서 교체가 비교적 용이했댄다. ㅋㅋ

 

워낙 일상 속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착착 달라붙는 구어체 묘사에 능한 작가이고,

인생 역전을 맛보는 상상의 나래가 겹쳐 흥미진진.

 

이를 테면, 들어온 혼담에 버티는 아들을 보고 어머니가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냉큼 장가를 가야지!"라고 외치거나,

혼인이 싫어 차라리 쇼군이 삼천궁남 거느리는 오오쿠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한 남자에게 여자 소꿉친구가

"좋은 옷을 입고 호사스런 생활을 하고 싶은 거?"라고 말하는 등의 장면은

역할이 바뀌었다면 충분히 예상되는 대화이다.

특히 오오쿠에 들어간 오노부가 검술이 꽤 훌륭하다는 선배를 이겼을 때,

그 선배가 하는 말,

"하! 너 따위보다 이 몸이 훨씬 훨씬 아름답다구!!"라고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외치는 장면에선 삼천명 중 살아남기 위한 나름의 몸부림이 진하게 느껴졌다.

 

요시나가 후미는 이러한 설정을 코믹으로 점철시키지 않는다.

그 시대는 마치 현실인 양 진지하고,

오오쿠는 아름다운 이들의 꿈같은 이상향이 아니라 쇼군의 애정에 목매야 하는 불신과 긴장의 세계이다.

동료와의 대화에서는 힘겨운 남자로써의 삶을 얼핏 이야기한다.

부모가 시켜 몸 팔았던 이야기, 장가들었는데 아이가 생기지 않자 밥도 않주고 결국 쫓겨난 이야기 등.

 

여자들이 이렇게 왠지 유쾌, 상쾌, 통쾌할 것 같은 인생역전 시대극을 마련해줘도

단지 쇼군에게만 감정이입하지 못하는 것은

매 장면마다 묘사되는 힘겨운 남자들의 삶이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요시나가 후미가 바라보는 소소한 삶에 대한 통찰은 매우 놀랍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도록 해주면서도 

마지막 장이 끝나면 항상 가슴 한켠에 무언가를 남기는 결코 가볍다 볼 수 없는 깊이가 느껴진다.

 

수많은 여아가 태중에서 살해당하고 여자의 수가 심각하게 줄어드는 현상을 보고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래. 여자들 수가 적으면 상대적으로 대우받으며 살지 않을까?'

그런데 이 만화 보니 꽤 긴장된다.

어차피 일부일처제야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 중 하나일 뿐인데

그것으로 세상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제도야 변할 것이 자명한 일.

보호한답시고 집안으로, 유곽으로 꼭꼭 숨기고, 권력에 따라붙는 물건으로 전락하는 건 역시 인간의 삶이 아니다.

노조에 온지 1년 좀 넘는 지금의 교훈, 세상은 쪽수로 승부를~! ㅋㅋ

 

벌써 1권밖에 안되었는데 작가가 어찌나 캐릭터들을 확확 없애는지...

남자들 싸그리 죽인 것도 모자라

검소한 쇼군은 막부에 돈 없다고 오오쿠의 남자들 50명 정도 해고시키고,

꽤 주인공 급일 것 같던 오노부는 벌써 역할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보통 캐릭터 만들면 애착이 장난 아닐 것 같은데 과감히 없앨 수 있는 것도 바로 작가의 힘?

 

아직 혼인하지 않은 쇼군과 잠자리하는 오오쿠 안의 남자는 죽임을 당하기 때문에

일부러 오오쿠의 남자들을 건드리지 않고 마당 쓸거나 방바닥 닦고 있는 하인 건드리는 쪽으로 우회하는 쇼군의 모습을 보는 것도 즐거움.

 

 

*참고로 혹시나 모르는 분들을 위해

쇼군(将軍, しょうぐん)은

일본의 특수한 최고위권력기관인 막부의 수장을 말한다. 세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 せいいたいしょうぐん)의 약자이다. 쇼군은 명목상으로는 천황의 신하로 최고위직 신하에 불과하나, 실제에 있어서는 천황의 의견과는 관계없이 정치, 행정, 경제를 실질적으로 이끌었고, 쇼군직을 세습했기때문에 군주와 같은 위치에 있던 자이다. 당시에는 왕이 두명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나, 실제로는 막부체제가 오랫동안 유지되므로써 천황이 유명무실해졌기 때문에 일반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쇼군이 왕대접을 받았고, 천황이 있는지 조차 모르는 백성들도 많았다고 한다.

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C%87%BC%EA%B5%B0

 

* 그림출처 : http://www.alad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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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11 23:16 2006/03/11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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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03/09 01:04

지난 2월 23일에 읽혀졌다는 부산 김진숙 지도위원의

부산지하철 매표소 비정규 해고노동자 고용승계 쟁취 결의대회 연설문을 읽었다.

 

'평등해야 강해진다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비정규직과 정규직에게 보내는 말이다.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벌써 2주나 전에 씨네21에서 읽은 [별의임무 - 그저 빛나기] 이라는 글이 생각났다.

 

주요내용이라면 이런건데..

조폭 내부의 엄청난 빈부 격차 - 즉 형님은 외제차에, 뻑쩍지근 저택에, 수많은 이들의 경호를 받는 반면, 아우들은 합숙에, 패스트푸드 끼니에, 생명의 위협까지 받는 - 상황이 유지되는 이유를 스티븐 레빗의 괴짜경제학 논리를 빌어 설명하고 있다.

형님은 바로 아우들의 이상향이고, 그것이 바로 현실의 상황을 견디게 하는 인센티브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 내용인데,

그래서 신인배우에게 주어질 수 있는 인센티브라는 것이 바로 화려하게 빛나는 스타배우의 모습이라는 건데, '스타의 가장 큰 임무는, 비록 대중의 욕을 바가지로 먹는 한이 있어도 저 하늘의 별처럼 환히 빛나며 화려한 삶을 살아주는 것'이라 할 수 있댄다.

최고의 스타가 국민주택과 지하철 이용하는 날이 온다면 '영화계의 종말일거라는 생각이 든다'는 다소 과격한 표현까지 써가면서...



처음 든 생각은 씨네21 읽다가 뒤통수 맞았다싶어

이제 매체에 대한 더이상의 편견은 버려야 겠다는 점이었다.

예술은 사라지고 엔터테인먼트만 남았다더니 체감 백배의 순간.

 

다음 떠오른 생각은 '돈이란 게, 자본주의란 게 이런거구나' 싶었다.

당췌 인생이 빛나고 싶어도 돈을 통해서만이 빛날 수 있는 세상,

도대체 빛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미를 소거시키는 세상,

사람들과 신인배우들이 영화와 영화배우를 통해 얻는 꿈에 대해서 완전 왜곡시키는 세상.

 

어찌나 당당히 '스타는 돈으로 빛나야 한다'고 외치는 지 강호의 도는 애저녁에 땅바닥이라지만, 이젠 심지어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것을 믿고 실천하는 세상이 되어간다.

마치 감정노동을 많이 하면서 자신의 진짜 감정을 구분할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자아를 훼손시키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자본의 불평등 전략은 인간의 본성인양 점점 세련된 가면을 쓰고 다가오고,

그 안에서 부지불식간에 진행되는 것은

-아주 다양한 의미로- 평등할수록 얻을 수 있는 것, 강해질 수 있는 것에 대한 외면과 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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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09 01:04 2006/03/09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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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02/22 23:55

요즘 열나 바쁜데... 그런데... 그래서그런가?

보고싶은 영화가 많다.

 

어제 본 영화 [Time to leave].

죽음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날, 과연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움직이고, 누군가들과 어떠한 관계를 정리해나갈까?


 

 



젊은 나이에 꽤 잘 나가는 사진작가, 로맹은 암이 퍼져 시한부 3개월을 선고받는다.

의사는 그에게 항암치료를 권하지만 그는 좀 다른 일을 해나간다.

 

끊는 시간

부모와 여동생에겐 알려야 할 것 같아서 거울을 보며 열심히 연습한다. "저 곧 죽는데요."

하지만 그는 가족과의 저녁식사에서 여동생에게 "그러니까 남편이 널 떠나지"라며 독설을 퍼붓는다.

그리고는 동거중인 애인 사샤에게 애정이 식었다며 나가라고 한다.

할머니를 만나러가던 길에 있던 식당의 불임부부가 제안한 정자 기증, 아기는 딱 질색이라며 단번에 거절한다.

 

이렇게 주변의 모든 관계를 끊음으로써 죽음을 준비하는 듯한 로맹.

그러던 로맹이 유일하게 자신의 죽음을 알린 존재는 바로 할머니다.

할머니가 묻는다. 왜 나에게는 알렸냐고?

로맹이 답한다. 당신은 나와 똑같으니까.

 

다시 맺는 시간

몸이 조금씩 안좋아지고 구토와 약이 반복되는 어느날, 동생에게서 화해의 편지가 도착한다.

로맹은 핸드폰으로 동생에게 사과하고 동생은 이내 오빠를 용서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만나자는 제안을 일이 바쁘다며 회피한다.

 

오랜만에 연락해서 다시 만난 사샤. 격했던 감정은 이내 차분해졌다.

그날 로맹은 마지막으로 섹스를 부탁했지만 사샤는 거부했다.

로맹은 사샤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갖다대고 잠시 누웠다. 그렇게 자신이 (아직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물론 사샤는 그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겠지만.

 

다음엔 바로 불임부부를 찾아가 3명이 아기를 갖기 위해 함께 섹스를 한다.

 

그리고 드디어, 떠날 시간

로맹은 유언장을 작성하고 유산 상속자를 곧 태어날 아기로 하였다.

그리곤 이불 한장, 물안경 하나를 들고 해변가로 찾아간다.

열심히 수영을 하는 그. 왠지 숨을 쉰다는 것이 굉장히 고귀한 행위처럼 보이는 장면이었다.

모래사장으로 나와 이불 위에 누운 그는, 그러나 모두가 해변을 떠나고 노을이 지고 해가 지도록 더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혼자 가는 시간, 혼자 죽는 장면.

이런 장면은 왠지 고독하고 서글픈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Time to leave]가 보여준 죽음은 뭔가 색달라 보인다.

 

로맹의 애인 사샤는 이런 말을 했다. "애인이 생긴거지? 너는 혼자서 못살잖아."

그러나 혼자서 살지 못했던 로맹은 오로지 혼자서 죽음을 준비해나간다.

그는 처음에 고독과 서글픔이 배어나는 방식으로 주변의 관계를 끊어갔으나,

이내 끊은 관계들을 아주 조금 회복해나갔다.

마치 그들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충분히 확인시켜주면서도, 결코 자신의 죽음에 몰입하지 않도록 배려하듯.

 

죽음을 준비하면서 점점 더 혼자가 되어가는 로맹.

그러나 희한하게도 그의 죽음은 외로워보이지 않는다.

죽음의 마지막 순간, 지는 해를 뒤로 한 그의 모습조차 오히려 편안해보이기까지 한다.

그리하여 그가 떠난 시간, 떠남을 준비했던 시간은 꽤 행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이 두렵고,

- 인간이란 워낙 혼자 사는 존재라지만 - 특히 혼자 맞이하는 죽음에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로맹을 보면서 어쩌면 혼자 맞이하는 죽음이라는 것에 편견이 있었던 건 아닌 지,

과연 나는 죽음을 잘 준비할 자세가 되어 있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 사족

음... 그런데 로맹은 왜 아기를 남겨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을까나?

요즘 저출산 얘기를 하도 많이 듣다보니 잠시 '홍보영화?'가 아닐까하는 생각이...ㅋㅋㅋ

 

* 사진 출처 : 씨네21(http://www.cine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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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22 23:55 2006/02/22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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