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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09/07 12:49

* 민중언론 참세상[팔레스타인의 양심, 나지 알 알리 展] 에 관련된 글.

 

사는 사람들에겐 팔레스타인이라 불리지만,

먼나라 사람들일수록 이스라엘이라 알고 있는 곳.

 

9미터의 돌벽에 둘러쌓여 도망도 못치고,

옆마을과 물건 사고파는 것도 안되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히브리어로 40일이내에 나가라는 통보 편지 받으면 아무 말 못하고 나가야 하고,

하루 아침에 살던 집을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열받는 마음에 닿지 않을 곳에서 돌이라도 던질라치면 반드시 닿을 총알로 보답하고,

매일 수시 검문과 이유없는 폭행, 구속이 이루어지는 곳.


 

 



그 곳의 풍경을 뒷짐 진 한 아이가 무력하듯, 또는 관조하듯 바라보고 있다.

'한달라'(맛이 쓴 열매의 이름,'쓰라림'을 뜻함)라 불리는 이 아이는

살던 땅에서 이스라엘에 의해 쫓겨났던 11살의 작가 자신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 아이는 때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는 데 지쳤는지,

살던 땅 그대로 두고 9미터 높이의 돌벽을 쌓고 외부와의 무역도 차단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바라보기도 하고,

 

UN이 이스라엘에게 '점령지에서 철수하라'는 결의안 242호를 채택할 때조차

미국의 단단한 비호 속에 무너지지 않았던 이스라엘의 돌벽을 바라보기도 한다.

 

 

어느날 그 아이는

82년 레바논 침공 당시 사브라, 샤틸라 난민촌에서 자행된 대학살을 접하게 된다.

그러면서 영원한 관찰자일 것 같은 그의 뒷짐은 약간의 변화를 맞이한다.

 

때론

 

예수와 함께 돌을 던지기도 하고

 

이스라엘에게 저항하는 팔레스타인의 행동에 동참하기도 한다.


 

 

 

팔레스타인 민중의 생존, 정치의 문제 이외에도 민족 이데올로기, 문화적 배타성, 종교의 문제점까지도 신랄한 비판의 잣대를 들이댄 나지 알 알리는

이스라엘 뿐만아니라 극단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의 표적이기도 했단다.

처음 그림을 봤을 때는 뭔가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것들의 배치 정도로만 인식했었는데,

운 좋게 평화운동가 미니의 팔레스타인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의 만화에 표현된 표상들이 얼마나 현실적인지 깨닫게 되었다.

 

오랜동안 살아오던 땅에서 유럽제국주의의 거짓 약속과 이스라엘의 폭압적 정책으로 쫓겨나면서도,

전세계로부터 - 내지는 몇몇 언론에 의해 - 이름 대신 '테러리스트'라는 영원히 벗겨지지 않을 것 같은 명칭을 부여받은 자들.

가감 없이 지켜보는 한달라를 역시 지켜보면서 가슴이 먹먹해짐을 금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지 알 알리가 본질적으로 놓칠 수 없었던 '희망'은 그의 그림 속 꽃을 통해, 서서히 뒷짐을 풀기 시작한 한달라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특히 인상깊었던 작품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돌을 던지는 모습.

종교에 대해서 정말 무식한 내가 몇개월 전 터키에 갔을 때

이슬람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상당히 놀랐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알라였고, 예수는 무함마드와 같은 예언자였다.

그러니 예수가 못박힌 손으로 돌을 던지는 모습은 지극히 당연한 모습이었겠지만, 이슬람교에 대해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면 엄청난 패러디쯤으로 치부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그림은 지금의 팔레스타인 상황을

단순히 종교 문제로, 정치 문제로, 외교 문제로, 내지는 그저 서로 싫은 사람들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게 만드는 거대한 역사적 맥락을 느끼게 한다.

 

그저 모두들 사람답게 살 생각만 하면 안될까?

* 사진출처 : 평화박물관(http://www.peacemuseu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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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07 12:49 2007/09/07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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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07/22 12:51

 

세상의 눈과 귀가 된 미디어 자극적인 소재만을 쫓아가는 사이,
우리들의 사는 세상엔 전쟁, 살인, 강간, 빈곤 등
인간 내부의 잔인함만을 확인할 수 있는 각종 인간성 상실의 현실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과연 '인간답게' 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자연스러운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오랜만에 들고 나온 그의 소설 [파피용]에서 주인공들이 선택한 인류 희망의 쟁취 방식은 바로 '탈출'이다.

 



과학자 이브가 발명한 빛으로 가는 우주선 모형, 그가 발견한 20조 킬로미터 너머 인간이 살만한 환경의 행성으로 이 모든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에게 인류의 마지막 희망은 이 몰락해가는 지구를 떠나는 것이다.
뜻을 함께 하는 재벌 맥 나마라, 항해사 엘리자베트, 기획및 관리자 사틴, 환경 및 심리 전문가 아드리앵 등은
20조 킬로미터 떨어진 행성까지 14만4천여명을 태우고 1000년에 걸쳐 항해할 우주선을 만들어 마지막 희망의 전달을 시작한다.
우주선 안엔 중력과 인공태양을 만들어지고 노아의 방주마냥 동물, 식물 등 모든 필요한 생물체와 냉동 수정란이 담겨졌다.

 

처음엔 좋았다.
그들은 이미 각종 폭력을 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있다고 판단한 정치가, 공권력, 종교인, 군인 등을 배제시켰고
농부, 요리사, 대장장이, 건축가, 장인, 예술가 등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전문가들을 선발한 상태였다.
그들은 자연 친화적 소재로 원하는 곳에 집을 지었고, 협동노동을 하였고 그렇게 행복한 듯 했다. 사람이 죽으면 흙에 묻히고 그 위에 나무를 심어졌다.
그러나 불현듯 발생한 첫 살인 사건을 시작으로 파피용호는 인류가 몇천, 몇만년을 걸쳐 겪었던
공권력과 왕으로 상징되는 권력의 창출, 비노동, 환경의 생존을 위한 반란, 전쟁 등을 겪게 된다.

 

그리고 결국 1000년이 조금 넘어 행성에 도착할 즈음엔 단 6명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중 행성에 착륙할 수 있었던 건 단 2명.
또 수정란으로 부화시킨 뱀에 물려 1명 사망.

 

혼자 남은 아드리앵은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잇지 못했다는 좌절과 외로움의 세월을 보내다가 문득 수정란 중 인간도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수정 시 필요한 골수를 얻기 위해 자신의 갈비뼈를 부러뜨리고 수정란을 부화시킨다.
그렇게 태어난 에야에게 아드리앵은 자신도 잘 모르는 선대의 역사를 끊임없이 이야기해준다.
그러나 에야는 난청 끼가 있는 지라
아드리앵을 '아담'이라 부르고,
우주선 만들었던 '이브'라는 이름을 자신에게 부여한다.
그리고 오래전 소형 우주선으로 탈출했던 사틴을 '사탄'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것이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생각해낸 인류 생존에 대한 단 한가지 놀라운 추측이다.

 

이것은 우주의 의지일지는 모르나

이대로라면 인간은 영원히 진보를 모르고 쳇바퀴만 돌리고 있는 다람쥐일 뿐이다.

 

그야말로 인류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인간에게 내재된 폭력성과 권력욕, 소유욕에 대해 거대한 두려움을 품게 된다.

우리는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 지도 모른다.

모든 인류가 함께 행복하게 살기 위한 비결은 개미와 같은 공동체 사회의 구현일 것이라고...

그러나 행복의 기준같은 거, 사람마다 다른 게 당연하지 않을까?

쥐와 같이 각개격파의 이기주의만이 행복이라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지 모른다.

희한한 건 쥐나 개미 양쪽 집단 모두 같은 비율의 높은 생존률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베르베르는 질문하고 있다.

개미처럼 살건지 쥐처럼 살건지...

물론 개미처럼 살거라고 말하길 바라면서...

 

그러면서 살포시 마지막 주문과 같은 말을 내뱉는다.
'영원히 탈출을 계속할 수는 없다'
물론 이것이 베르베르의 마지막 외침이기는 하나
과연 가능한 것인지는 우리의 가슴 속에 대고 물어야 할 일이다.

 

* 사족 - 이번 소설은 베르베르의 이전 작품에 비해 극히 소품적 성격의 글이다.

그래서 실망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나 역시도 살짝 실망이다.

1000년의 역사를 [개미]만큼 풀었어도 좋았을 법 한데,

더이상 글 쓰기 싫었는지 몇 페이지로 순식간에 정리를 해버렸다.

담긴 아이디어는 참신하나 상당히 아쉬운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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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2 12:51 2007/07/22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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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07/09 14:57

사람은 누구에게나 추억이 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곧 만들어질 추억에서조차
차곡차곡 쌓인 추억을 소급하여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때론 곧 만들어질 추억이 이미 쌓여있던 추억 때문에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고..

그런 추억들은 가지고 있는 개인에게 빛바랜 사진마냥 아련하고 간직하고픈 그 무엇이다.
그런 의미에서 추억은 기억과 다르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아니다. 그중에서 돌이켜 생각할만한 무엇이다.

 

그렇기에 이 애니 속 주인공들이 가지고 있는 추억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난감하다.


 



그들이 사는 도시 타카라마치에서는,
동네 양아치가 자경대마냥 마을을 지킨답시고 설치고,
열 세네살밖에 안되었을 법한 옆 동네 싸움꾼들은 이 도시를 접수하기 위해 들르고,
그런 아이들을 쇠파이프로 작살내는 쿠로 역시 10대이면서 거리에서 살고 있고,
야쿠자는 마약을 파는,
도시 전체가 조잡한 캐릭터시장처럼 생긴 곳,

사는 이들이 스스로 시궁창같다고 칭하는 곳이다.

 

 

온통 좁은 통로와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낙서, 양아치와 야쿠자가 폼잡고 다니는 이곳에도 재개발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해외 자본까지 들여와 마을을 싹 정리하고 거대한 놀이동산이 만들어질 계획.

 

누군가는 그저 빠져나갈 궁리만 할 것 같은 도시지만 그래도 '어린이의 꿈'이 될 놀이동산이 되버린다면,

야쿠자인 생쥐는 동네 남자 아이들이 '남자가 되기 위해(진짜 남자가 되나?)' 들르는 포르노 극장이 그리워질 것 같고,

피보는 걸 좋아하는 쿠로는 11살짜리 시로와의 생활이 온통 깨져버릴 것만 같다.

 

 

쿠로는 '내 마을을 지키겠다'고 단언도 해보지만,

그동안 상대하던 동네 양아치도, 몇동네 접수해왔던 야쿠자도 아닌,

해외에서 공수되어온 '프로'를 상대하면서 실질적인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시로를 지키는 것'만이 인생의 의미의 전부였던 쿠로는 시로의 안전을 위해 시로를 어른의 세계 - 여기서는 경찰서-로 보낸다.

 

인물들의 결말은 생각외로 식상한 면이 없지 않다.

그나마 심하게 튀지 못하도록 하는 마음의 나사같은 존재인 시로를 잃은 쿠로는 폭주의 폭주를 거듭,

해외에서 날라온 프로는 커녕 마을 통째를 피바다로 만들어도 별 무리 없을 정도로 끝없는 어둠의 구원의 속삭임에 빠져들어간다.

그러나 11살에 숫자도 잘 못 세고 쿠로가 없었으면 그 도시에서 하루도 못되어 시체가 되었을 시로는 다시 한번 쿠로의 마음 속에 들어가 나사를 조인다.

쿠로의 마음 속 어둠은 언젠가 너를 구원하겠다며 잠시 사라진다.

그리고 둘은 도시를 벗어난다.

 

결국 쿠로는 도시를 지키지도, 이기지도 못했다.

동네 거지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울 때가 아냐. 풀이 죽을 새도 없어.

그런 짓을 했다가는 이 마을에게 죽임 당하고 말아."

 

도시가 변한 것을 모른 건 쿠로 뿐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도시는 지켜져야 할 무엇이 아니며

오히려 사람이야말로 도시로부터 지켜야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 같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도시에 대한 추억 역시

혹여 도시로부터 주어진 상처는 아닌지 고민해보게 되는 영화.

 

"함무라비가 세운 바빌로니아 시대때부터 도시란 건 차가웠다고요."

"바빌로니아를 세운 건 네부카드네자르 2세야"

 

냉혹할 정도로 차가운 도시의 추억....

 

 

* 사진출처 : 네이버무비(http://www.naver.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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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09 14:57 2007/07/09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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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07/07 13:41

이 책엔 단편소설이 있지만 소설책이라 부르기엔 무리가 있다.

산문도 있지만 산문집이라 규정할 순 없다.

사진도 있고, 콘탁스 G1 카메라 리뷰도 있고, 여행 기록도 있고, 심지어 음악 14곡이 수록된 음악CD도 붙어있지만,

사진집이라 하기엔, 카메라 설명집이라 하기엔, 여행책이라 하기엔 빈 구석이 너무 많다.

그런 책, 김영하가 쓴 [여행자]는 그런 책이다.

서점 어느 구석에 쳐박아야 할지 알 수 없는, 아마도 비소설 부분에 꽂혀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장르 구분 불가능의 책.




어느날 라디오를 듣다가 작가 김영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름지기 글쟁이는 글로 말하는 법.

그러나 그는 동료들도 인정하는 대단한 수다쟁이같다.

실제로 라디오 속 그는 나이 40이 넘었지만

마치 10대의 감성을 가진 50대 아줌마처럼 떠들고 있었다.

언젠가 미니 콘서트장에서 본 김수철이 생각났다.

이런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이 세상이 원하는 대로 점잖빼고 살고 있어 속의 끓는 피를 어찌 다스려야 할지 골머리 썩히는 겉만 어른된 자들의 특권이다.

언제나 구름위를 걷는 듯한 그들이야말로 '차분'의 진정한 깊이를 알고 있을 지도...

 

김영하의 [여행자]는 모두 8편이 나올 예정이라는 데, 그 첫번째 여행지는 바로 하이델베르크다.

위에서 적은 바와 같이 이 책은 단편소설에 여행기, 사진, 카메라 리뷰 등이 모두 들어있다.

그러나 그는 글쟁이이다. 그것도 책을 아주 많이 읽은 글쟁이.

그가 흡수한 글만큼이나 이 책은 그 모든 것이 나름의 감성의 지도를 따로 질서정연하게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다.

무언가 쓸데없는 복합과 모순에 빠질 틈조차 주지 않게 만든 깔끔한 책이다.

사실 이 점은 가장 좋은 점이긴 하지만 다소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

왠지 '소설을 읽는 듯 했는데, 어느새 자기 여행기가 되더니 짧은 사진집이 되었다가 소설로 돌아왔다가...' 뭐 이런 보기좋은 환타지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사진에 중점이 가있는듯한데 소설이 더 궁금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떻든 재미있고 좋고 쉬운 책이다.

음악을 들으며 읽다보면, 누구나 쉽게 '차분', '관조', '평온'이 일관되게 느껴진다.

나도 어딘가 여행을 다녀오면 이렇게 테마를 가지고 한권씩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죽음'을 생각한 것 같다.

'죽음을 생각하기 좋은 도시', 그가 본 하이델베르크다.

그 죽음은 따사로운 햇빛이 비치는 야외 카페에 조용히 앉아 책 한권을 읽고 있는 것만큼 차분하고 고요해보인다.

죽음을 생각하기에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착각할지도 모를 만큼.

 

* 사진출처 : 알라딘(http://www.alad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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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07 13:41 2007/07/07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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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06/30 19:32



 

이 애니는 프랑스 작품. 왠지 '프랑스는 '헐리웃을 좋아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착한 놈 나쁜 놈 확실하고, 권선징악이고, 다소 희생이 따르더라도(그것이 어떤 종족의 멸망이라 할 지라도) 정의(내지는 힘)는 이긴다는 기본 속설을 그대로 내포하고 있다.

3D로 무장한 화면의 매력과 달리 스토리는 헐리웃 블록버스터 한판과 같다고나 할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심한 건지도 모른다.

이 애니가 악인에게 내린 징벌은 내가 그동안 봐온 많은 이야기들 중 단연 최악이 아닐까 싶다.

 

 



선수 소개

이 애니에선 세가지 종족이 등장한다.

종족A : 유일하게 이름을 알 수 있는 종족은 바카노이인.

어느날 기계문명이 발달한 바카노이인의 거대 함선이 폭파하면서 한 행성에 떨어졌다.

생존자라곤 그들의 모든 지혜가 담긴 파란 공 모양의 엑시스와 아기 1명.

 

 

종족B : 두번째 종족은 편의상 수액종족이라 불러본다.

물 또는 수액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행성에는 수액종족이 있는데, 그들은 물기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공간 이동이 가능하고 몸체도 물처럼 변형이 가능하다.

그러나 함선이 행성에 떨어진 후 600여년이 지나면서 행성의 수액은 거의 남지 않은 수준으로 메말라간다.

이 종족은 마치 벌의 체계처럼 여왕이 다스리는데, 여왕은 바카노이의 함선으로부터 떨어진 엑시스 때문에 수액이 사라진다고 생각하고 시시때때로 공격할 틈만 노리고 있다.

 

 

종족C : 마지막 종족은 주인공인 카에나가 속한 종족.

이 종족은 탄생한 지 길어봤자 600년 미만.

그도 그럴 것이 엑시스를 중심으로 행성에서 바로 근접한 다른 행성을 향해 거대한 나무 넝쿨 비스무리한게 생겨난 곳에서 발생하여 살고 있다.

이들은 수액종족을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들의 노예가 되어 수액을 체취한다.

 

 

 

흑백 나누기

여기서 종족C가 착한 놈으로 - 착하다기 보다 차세대 떠오르는 종족이라고나 할까? -,

맨 마지막에 카에나의 인도를 받아 건너편 행성, 일종의 신대륙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종족B는 나쁜 놈으로, 종족C를 노예로 부려먹은 데다가 종족A의 엑시스에 대한 분노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종족A의 엑시스가 떨어진 이후로 목숨같은 수액이 점점 말라가는데, 여왕 입장에선 일종의 생존권 투쟁 아니었나 싶다.

엑시스 때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이 사는 행성은 이미 종족B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척박한 상태가 되었고 결국 종족B는 버림받는 운명의 생명체가 된거다.

 

종족A는 달랑 1명 살아남았던 자가 600여년을 살아오지만 행성의 어떠한 일에도 참견하지 않고 자신의 기술력만으로 삶의 유지하고 있다. 그러다가 우연히 만난 카에나를 통해 엑시스의 생존을 알게 되고 자신의 행성으로 가지고 가려했으나 엑시스에게서 버림받는다. 엑시스는 종족C와 함께 존재하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결국 이 종족도 -이 행성 안에서는 - 멸망.

 

더이상 미래를 이끌지 못하는 종족은 과감히 멸망. 결국 이 한 애니에서만 두개의 종족이 사라져버렸다.

왜 이 애니는 공존의 희망을 털끝만큼도 남기지 않는 걸까?

사고체계를 갖춘 유기체는 과연 '다르다'는 것만으로도 공존의 희망을 품을 수 없는 것일까?

 

잔혹한 악인 징벌

종족B의 여왕. 악의 화두다. 비참한 결말은 예상 범위 내다.

그러나 그녀의 결말은 꽤나 가슴 아프다.

가장 예상하기 쉬운 결말은 카에나가 내리치는 한방에 죽는 거다. 그러나 여왕이 오히려 제압했다.

그럼 여왕은 어떻게 죽었는가?

일단 종족 중 유일하게 남은 수컷이 다른 암컷들을 꼬신다.

'여왕은 종족 보존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거다', '저 엑시스만 공격하다가 우리 종족은 멸망할거다', '그 공격을 위해 너희들도 하나둘씩 죽어가고 있다'...

그래서 결국 여왕은 엑시스를 공격하는 도중 같은 종족의 암컷들을 앞세운 수컷에게 그대로 덮쳐진다. 우린 아마도 이런 상황을 '강간'이라 부르지 않나?

 

물론 여왕은 이 한방에 죽지 않았다. 이건 종족 보존을 위한 만행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그 때 죽었으면 더 나았으려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계속해서 공격을 멈추지 않던 여왕은 결정적 순간 

단 한순간도 참을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탐욕스럽게 먹을 것을 찾는 굶주린 아기주머니 속 아이들에게 함락되어 먹히고 만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과연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을까? 이미 수액은 바닥이 났다.

 

여왕의 종족A와 C에 대한 공격은 부질없는 짓이었을 지도 모른다.

엑시스가 수액을 마르게 한다는 그녀의 판단은 완전한 오판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차피 종족B의 운명은 정해져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내 눈엔 생존을 위한 투쟁 정도로밖에 안 비추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이 죽음은 가슴을 후벼파는 서러움마저 느껴진다.

죽음이란 것에 경중이 어디 있으랴만..

마치 여성에게는

전쟁 속 총포라는 공적 상황이 주는 위협이외에도

강간과 근친살해로 얼룩진 사적 - 그러나 사회적 - 상황이 주는 위협이 더해진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꼭 공적 책임을 사적 징벌로 푸는 것 같은 느낌, '일상이 모두 공포'라는 느낌, 소수에게 더욱 확장된 위험과 위협에의 잠재라는 공포...

그래서 이 애니는 무섭고 기분 나쁘다.

 

* 사진출처 : 씨네21(http://www.cine21.co.kr) +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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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30 19:32 2007/06/30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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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06/27 18:14

 

때는 2075년.

지구는 결국 자원이 고갈되었고

달로, 화성으로 자원을 찾아 생활의 영역을 넓혀갔다.

특히 달에서 발견된 자원은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각광받으며 지구 유지에 유효하게 쓰이게 된다.

그러면서 우주는 폐기된 위성, 위성에 부딪혀 폭파한 우주선의 잔해, 쓸모없어진 기지 등 각종 우주 쓰레기로 넘쳐나게 된다.

 

주인공은 이러한 우주 쓰레기를 처리하는 테크노라라는 회사의 데브리과 직원.

 

'우주'하면 항상 전쟁이야기, 로봇이야기로 일관되기 마련인 애니 세계에서,

우주 청소부이자, 민간기업의 회사원이며, 사회기여팀 수준으로 사고되는 돈 안되는 실적 최하의 별볼일 없는 부서의 구성원인 주인공의 이야기는 신선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은 때론 우주 장례를 치른 관이 우연히 태양권에 돌아와 자손에게 인계하기도 하고,

군사 위성 지나가는 길에 걸리적 거리는 평화 상징 위성을 수거해야 하기도 한다.

 

이런 잔잔하고 있을법한 일상적 얘기들 속에 슬쩍슬쩍,

겉으로는 평화를 지향하는 척하지만 실제 선진국에 붙어 돈이 되는 일이라면 약소국에서 전쟁 일으키는 것도 불사하는 우주연합의 작태가 노출되기도 하고,

미국과 일본같은 선진국 출신의 집안 좋은 사람들이 꽉 메운 사무실에서 아프리카나 아라비아 반도의 어디쯤 외부에서 조장된 내란이 끊이지 않는 나라 출신의 사람이 힘겹게 꿰찬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 쓰는 모습이 보일 때도 있다.

달의 최대 도시에는 여행 비자로 들어가 일하다가 업자에게 인건비 뜯기고 지구로 돌아갈 돈조차 없어 실업자로 전전긍긍하는 군상들도 눈에 띈다.

 

이렇게 지구와 달을 오고가며 다양한 군상들의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고 가슴 저리고 즐거웠을 터.

그러나 애니는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주인공의 고뇌를 더욱 심연으로 밀어넣고,

일어나는 사건 사고를 보다 확장시킨다.

 

주인공인 하치마키는 어느날 우주에서의 작업 중 약간의 사고로 장시간 방치되면서 어둡고 소리 없는 공간에 놓이면 3차원 공간감각을 잃게 되는 공간상실증이라는 질병을 앓게 된다.

이 병은 곧 해소되지만 보다 심각한 고뇌의 상태로 이전된다.

그가 데브리과를 그만두고 목성탐사선 선원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을 때 독자는 '할 일을 찾았군', '이야기 스케일이 커지겠군'하고 마음 편히 지켜봤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상 우주는 어둡고 외로운 곳.

그는 이미 '보다 빠르게 보다 멀리'에 중독되었고, '우주에 미친 놈'이 되기 위해 냉혹하고 고독한 혼자가 되어간다.

비록 총알이 없었으나 우주선을 지키기 위해 사람의 얼굴에 총구멍을 겨누고 쏘았었던 주인공은 진짜 '미친 놈'이 되어 목성탐사선의 선원으로 발탁되었으나 이제 더이상 '어디로?' 가야하는 지 자아의 방향을 잃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닫게 된 사실.

그는 이미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모두 이어져있고,

우주란 굳이 보다 멀리, 빠르게 나아가야 있는 무엇이 아닌

바로 자신과 주변 역시 우주이고 우주의 일부임을 깨닫게 된다.

 

 

뭐 이거까진 괜찮다 치고...

사이사이 일어나는 사건들 중 가장 큰 건 우주방위전선이라는 테러집단의 활동.

이제 석유조차 고갈된 상태에서 선,후진국간 빈부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40%를 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개척되는 우주는 자본이 집중된 선진국들의 부만을 더욱 늘려주고 있으며,

아무리 능력이 되어도 후진국에선 우주에 한발자국조차 디디기 힘들다.

그래서 우주방위전선은 새로 건조되고 있는 목성탐사선을 달의 최대 도시인 고요의바다에 떨어뜨리는 작전을 세운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더 냉혹한 법.

작전은 향후 목성탐사선을 통해 시추된 에너지원의 수입을 각국의 인구대비로 나누기로 타협하고, 투입된 테러리스트는 몽땅 내버린 우주방위전선의 우두머리와 우주연합에 의해 실패로 돌아간다.

테크노라사의 관제과라는 최고 엘리트 코스를 가고 있던 아프리카 출신 크레아는 끝없는 사회 차별에 치를 떨며 테러리스트가 되지만, 감옥에서 10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면서 앞으로 본국으로 돌아가 선진국의 책을 번역하여 읽히는 교육사업에 전념하기로 선회하였다.

궤도 보안청의 잘 나가는 경찰요원으로 위장하여 활동해온 중동지역 출신의 하킴은 테러 실패 이후 혼자서 달의 도시 폭파를 완수하고자 폭탄 설치를 하려고 하지만,

문득 달에서 태어나 자라고 있는 12살 루나리안의 '아저씨는 어느 나라에 살아요? 여기서 보여요? 나는 루나리안이라 나라라는 걸 잘 몰라요. 달에는 나라가 없어서 모두 하나인데' 비스끄므리한 말들 속에 맥을 놓게 된다.

 

테러를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저

테스트를 위해 340여명의 연구원의 목숨을 한순간 날려버린 목성탐사선의 총책임자나

서로에게 남은 거라곤 이용가치 밖에 없는 우주연합 의장과 그의 아들이나

선진국과 다국적기업의 호주머니를 착실하게 늘려주기 위한 우주연합이나

'We are the World'가 결코 될 수 없는 선진국들의 머리 속에는 전혀 내려지지 않는 인도주의적 깨달음이

약소국의 테러리스트에게만 테러 방지 차원에서 내려지는 건

그냥 현실론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설상가상, 주인공의 애인이자 같은 데브리과 직원인 타나베는

목성탐사선 폭파 작전 당시 목성탐사선에서 탈출하여 달표면 어딘가에 있다가 산소 부족으로 신경 손상을 입었다.

이 의도된 것 같은 신체 손상으로 인해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여주었거나 향후 예측되는 모습이란 건

1) 재활하면 일단 정상인으로 당연 회복되는 데 어떻든 1,2년 정도는 걸린다,

2) 목성 탐사선은 갔다오는 데 7년 걸리는 데 그동안 주인공과 결혼하고 일단 임신한다,

3) 마지막 장면에 시어머니가 빨래 널고 자신은 빨래 개고 있는 바로 그 집에서 아마도 남편이 돌아올 7년 동안 애 낳고 살림을 하게 될 것 같다,

4) 혹여 회복되어 중간에 테크노라에 복직해도 애는 시어머니가 키워줄 것 같다

이다.

 

살 떨리는 자본주의의 승리에 건배!

 

지구와 달 사이 쓰레기 줍는 일상의 잔잔함을 넘어

무려 7년이나 소요될 목성 자원 탈취 프로젝트로 확장되면서 간을 수천, 수만배 확장시켜놨으면서,

막판에 이 애니가 준 거라곤 현실에 대한 무력감 뿐이다.

 

차라리 카우보이비밥처럼

일상의 선을 뛰어넘지 않고 주인공에 대한 생사마저 언제나 생존으로 맞추면서 매 회 내용의 다양과 확장에만 초점을 맞췄다면

영악한 애니라도 되었을 터다.

실제 카우보이비밥은 막판 한두회만을 이용하여 오래된 진지함이 필요해진 때, 고민이 확장된 때에 맞춰,

더이상 서로의 일상이 유지될 수 없을 정도의 캐릭터 배치 - 즉, 죽이거나, 목표가 확실해서 왠만해선 못 돌아오게 떠나보내거나 -로 마무리한다.

 

그러나 이 바보같은 애니는

벌써 중반부터 화자들의 기대치를 있는대로 키워놓고

막판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흥분하며 보게 만들었으나

결국 흔해빠진 이 세계의 수습 논리와 뻔한 봉합으로 마무리해버렸다.

 

마지막 26화면 없었어도 약간의 용서가 가능했을 지 모르겠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마지막 5분 동안 '눈 감고 있을 걸'하고 속으로 외치게 만든 것과 같은 종류의 실망감이 밀려온다.

 

이건 폭력이라고 외치고 싶다, 정말...

 

한편

공간,자원의 확장과 포섭은 자본주의 유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게 사실이겠지?

역시 사람들의 사고와 체제부터 바꿔놓고 우주에 나가는 게 맞는 건가?

 

* 사진출처 : http://bestanime.co.kr +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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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7 18:14 2007/06/27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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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06/26 12:51


 

1. 이 책은 여성 성기에 대한 의학, 해부학 뿐 아니라 문학, 인류학, 사회학 등 다양한 내용 사이를 오고가는 일종의 백과사전 같다.

하지만 백과사전이라 단정하기엔 30% 이상 모자라다.

 

'성기에 대해 궁금해'라는 생각만으로 덥석 집었다면

'버자이너'에 집중한 나머지 '문화사'임을 잠시 잊은 꼴이 된다.

수많은 정보를 주지만 정답을 주는 건 아니다.

(인류학적 접근 시도가 있다는 점을 5% 정도 상기하시길...)

 

물론 작자의 성과학자로서의 자기 입장이라는 게 언뜻 언뜻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입장을 굳이 표명하지 않아도 될만한,

여성 성기에 대한 세상의 황당한 취급이 워낙 많아서 기술만으로도 충분히 화자에게 입장을 표명할 수 있는 내용이 상당하다.

실제로 한참 읽다보면 '정말?'이라는 놀라움, '그렇구나'라는 인정과 신뢰, '뷁!'이라는 황당과 불신 사이를 분단위로 오고가게 된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과 관심에도 불구하고

왜곡된 시선과 가치의 각하 또는 외면을 통해

21세기가 된 지금에도 '이거다'싶은 연구가 절대 부족하다는 점은 참 놀라운 일이다.

 

인간 취급받지 못하는 여성들이 여신에서 창녀라는 극과 극을 오가는 동안,

그녀들의 성기 역시 그 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성기는 이놈의 사회에서 여성을 창녀에 가까이 가게 하였므로

뭔가 적당한 조치를 취해야 하는 신체기관으로써 그 고초는 더욱 심했다할 수 있겠다.



2. 사회가 개인에게 보여주는 도덕적 강압의 힘은 놀랍다.

아마도 그 모든 강압엔 여성을 도구로 사고하다보니 초래된 것이 태반일 것이다.

 

여성은 문란하면 안된다. 여성은 해주는 대로 받는 존재이다.

<- 물론 이런 생각은 남성에게 속한 자손 생산을 위한 자산으로써, 직계 혈통이라는 확증을 위해 역으로 한 남성의 손만 닿는 조건을 마련하려다보니 이러저러한 가학적 행위가 용인된다는 기분이다.

 

 -> 여성의 성기는 더러운 것이다 : 이로 인해 겪게 되는 여성의 가장 큰 수난 중 하나는 클리토리스 절제일 것이다.

절제받다가 저세상으로 보내진 여자자매들이 수두룩한데도

하지 않은 아이는 집단사회에서 불결한 아이로 취급받고 왕따당한다.

그것도 음부봉쇄라는 형태로 이루어지기도 하는 데, 클리토리스를 몽땅 드러낸 후 외음부의 살을 끌어당겨 꿰매버린다. 윽~~

이 봉쇄조치는 첫날밤 남편의 성기에 의해 뚫리는데, 그날의 유혈낭자는 병원행을 수반할 수 밖에 없다. 윽윽~~~

 

여성이 먼저 원하는 경우도 있다.

질 삽입 성교야말로 정상 상태이기 때문에 클리토리스로 인해 오르가슴을 느끼거나 하는 건 반칙, 이런 사회에서 자신의 비상식적인 성욕을 없애기 위해 클리토리스 절제 수술을 받는 사람도 있었다. 프로이트 아저씨가 여러 여자 잡았다!

일반적으로 클리토리스가 가장 자극적인 곳이라는 데 이견이 없는데도,

그 수많은 세월동안 여성이 속고 서로 속이게끔 만드는 거대한 사회 시스템이 존재한 셈이다.

 

-> 정절을 지켜라 : 이말은 주로 '처녀막을 지켜라'의 의미가 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도 처녀막 파열에 대한 공포는 상당히 많은 여성들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 남자들이 '첫남자'이길 바라니까..

뭐 요즘은 연애 한두번 안하면 백치같으니까 '네가 두번째야'까지는 용납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처녀막 사수하고자 하는 여성에게 미국 소녀들의 샛길 하나 알려주자면...

의외로 유럽보다 미국은 정절에 대한 보수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네덜란드는 사회적 분위기상 처음 성경험을 16세 전후로 바라보는 반면 미국은 19세 전후로 바라보다보니,

그 이전에 성경험을 원하는 미국의 여자아이들은 항문성교를 주로 이용하게 된다(고 연구결과가 나왔다). 

어떻든 처녀막만 사수하면 되니까..

섹스 = 질 삽입성교, 첫 섹스 = 처녀막 파열로 대치시켜버린 사회의 통념이 빚어낸 결과다.

성교를 성교로 바라보지 못하고

왜 항문성교를 샛길로 만들고 왜곡된 길인양, 우회로를 찾은 양 행동하게 만드는 지 알 수 가 없지만,

어쩌면... 어쩌면... 다른 씨만 안뿌리면 되니 항문성교 정도는 얘기되어지는 '첫경험' 전에 꽤나 널리 함묵적으로 용인받을 수 있을 지도..ㅋㅋ

 

3. 이 책엔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법한 이야기도 몇가지 눈에 띈다.

이를 테면 질이 짧아 결과적으로 질 입구가 막혀있는 관계로 주로 구강성교를 하던 한 여성이 새로운 애인과 섹스 중 들이닥친 기존 애인의 칼에 맞아 쓰러진다.

곧장 병원에 가보니 그녀는 임신 상태였다고 한다.

실제 논리적으로 정자는 인간의 간이든 위든 허파든 뇌든 어디든 갈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굳이 위의 사례가 아니더라도 질을 통해 들어온 정자가 자궁까지 찾아가 나팔관 근처에서 착상하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인체의 항해술로 여겨진다고 한다.

 

호르몬의 다양한 작동 속에 생각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몸에 양성을 가지고 있거나, 시기에 따라서 성이 변할 수도 있다거나 하는 사례들은 이미 심심찮게 알려지는 사실이다.

그러고보니 자궁속 태아의 성기가 초기엔 모두 여성의 성기 모양이다가 점차 남성은 남성의 성기 모양으로 변한다는 것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된 사실이다.

어쩌면 여성과 남성의 신체적 구분은 대체로 가능할 지 모르지만 확정할 수는 없을지도... 사실 과학이란 건, 특히 의학, 생물학은 일종의 확률같은 것이니까...

 

4. 모르던 유래들도 몇가지 건질 지 모른다.

간혹 월경 중엔 일을 하지 않고 집안에만 갇혀지내거나

심지어 금식에 산속에서 사람을 만나지 말고 지내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월경중 여성이 있으면 우유가 쉬고 마요네즈가 굳고 절인 고기도 상하고 식초로 절여도 뭐든 상한단다. 월경의 파괴력은 이다지도 엄청났단 말인가?

 

뭐 현재 내가 사는 사회에서 월경 내내 일 안할 수 있도록 허용된다면 '땡 잡았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실제 바빌론에선 달의 여신의 월경일엔 안식일을 가졌고,

매달 1번이던 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매주 1번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매주 월경을 하는 달의 여신 덕분으로

기독교식 안식일 즉 일요일엔 쉬게 되었는 지도 모른다.

 

5. 한때 히스테리가 있는 여성들의 처방으로 난소 제거수술이 적극 권장되기도 하고,

음모를 똥 무더기에 놓고 햇빛을 쬐면 뱀이 된다고 믿었던 시절도 있었고,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느끼지도 않은 오르가슴을 꾸미고 살지만,

 

인생의 한두번쯤은 자기가 직접 자신의 성기를 살펴보기도 하고,

집단 상담치료에 참가하기도 하고,

남성이 아닌 여성이 바이브레이터의 소비 주체가 되면서 이전에 없었던 질문과 환불요구로 인해 기능의 향상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무책임한 외과적 칼부림의 정체에 대해 인식하거나,

지뢰밭같은 이 사회 성 담론의 세상에서 여성으로서, 또는 그저 한 인간으로서 답답함을 뚫고 행복감을 만끽할 수 있도록 고민도 한다.

 

* 사진출처 : 알라딘(http://www.alad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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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6 12:51 2007/06/26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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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06/24 19:36

난지도 내 유휴시설인 침출수처리장을 활용한 미술창작스튜디오가 생긴 이래 1기 입주작가들의 작품 전시가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미 다른 전시에서 눈에 띄었던 작가들의 작품도 상당수.

보통 미술관 구경 가면 자그마한 노트에 빼곡히 뭔가를 적어오곤 하지만

이번엔 과정 생략.

왠지 이번 전시는 그저 바라만 봐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관계로 작품 설명 생략. 사용재료나 설치형태만 간단히...ㅋㅋㅋ

 


 



'悅樂'의 일부. 천에 그려진 것 같은데 천장에 엄청 크게 걸려있다.

 

5명을 위한 안경. 비디오 설치 작품.

 

 


 

 


 

 


 

 

뭔가 '거'한 작업의 흔적이..

 

그 결과는 ...

 


 

조형물과 천장에서 쏘여진 -하늘에서 촬영된 - 도시 모습

 

이거, 수묵화라네... 허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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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4 19:36 2007/06/24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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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05/24 15:48

잊을 수 없는 기억, 그래 잊을 수 없는 기억이지.

동독 출신 작가인 게오르그 바젤리츠는 그림을 거꾸로, 또는 옆으로 눕혀놓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림이 반드시 올곧게 걸려 있을 필요는 없겠지.

가장 확실한 사실은 눕혀놓은 그림이 사람의 집중도를 월등히 향상시킨다는 점이다. 오랜 시간 들여 하나하나 보게 된다.

 

이번 전시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러시아 사회주의 리얼리즘 회화나 사진 등의 이미지를 작가가 다시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시킨 것이다.

 

예를 들어 본래의 [연단 위의 레닌]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으나,


 

작가가 재해석한 그림은 이런 것.

새로이 작성된 그림은 다양한 의미를 뜻할 수 있는데,

(특히 작가가 동독 태생이라는 점에 주목한다면)

땅으로 쳐박힐 듯 한 얼굴과 이마의 주름으로 인해 원판보다 훨씬 피로하고 늙어보이는 레닌의 모습이 찬란한 혁명의 좌절을 나타내주는 듯 하다.

 

 





토카네프의 [카자흐 여인]을 다시 그린 그림에서,

물동이를 운반하는 억세보이는 여인은 콘크리트같은 회색으로 표현되어 오래된 추억과 같은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 위, 즉 캔버스의 바닥에 깔린 붉은 별은 지금도 사그라들지 않는 혁명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듯 하다.

 

 

아래 그림의 원본인 코르제프의 [전쟁의 나날들]은 매우 인상적인 그림이었는데

[전쟁의 나날들 I]에선 그림 속 화가가 붓을 든 채 캔버스 하나 가득 스탈린의 당당한 모습이 차있었다.

반면 [전쟁의 나날들 II]에서는 그림 속 캔버스가 텅 빈 상태에서 화가 역시 붓조차 들고 있지 않은 망연자실한 모양새였다.

 

바젤리츠는 이 두개의 그림을 합쳐 화가가 붓을 들고는 있으나 무엇을 그려야 할 지 알 수 없을 만큼 텅빈 캔버스를 표현하였다.

마치 혁명이라는 커다란 백지에 더이상 무엇을 그려야 할지 알 수 없다는 느낌으로...


 

 

전시공간 한켠에는 바젤리츠를 인터뷰한 영상이 상영되고 있는데,

솔직히 그림보다 그 영상이 더 재미있다.

작가가 무슨 생각을 품었는 지 어떤 원본에 대한 추억 더듬기인지 직접 들을 수 있다.

 

작가는 혁명에 대한 좌절을 가슴 절절 공감하기엔 너무 당사자였다.

그는 이미 꽤 유명하고 성공한 신표현주의 화가이다.

 

그의 그림이 품은 러시아 혁명에 대한 추억에서는 건조함이 묻어난다.

좀 웃긴 비유일지도 모르는데 하버드대는 멀리 있는 곳에서 더욱 유명하다고,

그 도가니 속 한 존재에겐 실패에 대한 낭패감이 좌절까지 갈 필요가 전혀 없는 그 무엇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민중을 표현할 때는 사뭇 다르다.

스탈린이니 레닌이니 하는 소위 알려진 인물에 대한 작품은 다소 명백한 패러디적 성향이 강한 반면,

(인터뷰를 들으니 레닌을 독재자로 부르더만)

공장 직공이나 물동이 들고 가는 여인, 이사하며 기뻐하는 여인 등의 모습은 좀 낡고 오래된 사진첩같이 아련하기도 하고, 여전히 내재된 힘을 느끼게 해주는 강인함을 풍기기도 한다.


 

* 사진출처 : 국립현대미술관(http://www.moca.go.kr) 팜플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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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4 15:48 2007/05/24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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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05/10 17:17

예술가 부부. 서로가 서로에게 삶과 예술의 동반자이자 경쟁자인 사람들.

각별한 주문이었을까? 아니면 큐레이터의 마술일까?

각 쌍들은 예술이라는 큰 카테고리 안에서도

유독 비슷한 분야에서 함께 활동하는 이가 많은 것 같다.

 

원성원+이배경의 10년지기 개와 고양이

 

사진이 너무 작아 아쉬운데,

아래 그림들은 이배경의 [100개의 꿈 드로잉]이라는 작품으로,

100개의 -주로 다양한 사람 군상의- 스케치가 들어있다.

이 그림을 가지고 원성원은 [IT answers us]라는 상호작용적 영상 설치 작품을 만들었는데,

관람객이 정신을 집중하고 콩을 상자안에 던지면 앞의 스크린에 100개의 드로잉들이 마구 움직이다가 점괘를 내준다.

마치 타로카드를 볼 때 자신의 정신을 집중하여,

실상 타로점을 누군가 봐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 의지를 그대로 반영하게 만드는 원리와 비슷하다.

내 점괘는 '서로 화합하다'래네..ㅋㅋ

역시 상호작용적 작품이 정말 재미있다.

 



강미선+문봉선의 동상이몽

 

이 커플은 한지에 먹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서로 닮아있다.

 

전시된 작품만으로 본다면

강미선 - 작은 작품 -    채색

문봉선 -    큰 작품 - 무채색

같이 분류할 수 있으려나?

 

 

문봉선의 [관조]는 무채색의 수묵이지만 오래 보고 있으면 햇빛이 강물에 닿는 반짝거림으로 눈을 잠시 감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이 작품과 더불어 [임진강]이라는 722cm 길이의 수묵화가 걸려있는데,

첩첩산중을 배경으로 유유히 흐르는 강줄기가 진정 임진강이라면 그 시간대를 물어 꼭 가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민정+신치현의 무한 이중주

 

이 두사람의 작품은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김민정의 [숨쉬는 벽]은

마치 거울이 공간을 두배로 만들어주는 시각적 효과를 만들듯,

벽에 영상을 통해 벽 뒤의 공간을 창조하였다.

그런데 비단 공간을 창조하는 데서 멈춘 것뿐만 아니라 점점 더 커졌다가 한쪽으로 기울기도 하고 거대한 숨소리를 내기도 한다.

 

아래 작품은 실제 각진 벽 모서리에 비추던 [모서리]라는 설치 영상작품으로,

[숨쉬는 벽]과 마찬가지로 공간의 창조와 능동적 변조가 독특한 작품이다.

 

한편 신치현의 작품은 기존의 입체조형물을 컴퓨터로 스캐닝한 후 아크릴 판을 마치 픽셀을 상징하듯 사각으로 잘라 3D로 재창조한다.

 

 

 이소영+김건주의 we are sailing

 

이 둘의 공통점은 꽤나 현대적 소재로 만든 조형물이다.

전시된 작품 중에 가장 눈에 띄었던 건

빨간 선반과 그안의 일기 같은 기록들이었다.

그냥 멍하니 보고있자니

마치 보내고 싶었으나 보내지 못했던 글과,

우체통 역할을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빨간 선반의

암울한 기운이 그대로 몸 속에 들어오는 느낌이다.

 

 

박소영+김지원의 still life 시리즈 중에

김지원의 다양한 회화와 사진이 어우러진 작품군을 봤는데,

그 중 부부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2장 있었다.

하나는 88년도 청첩장에 활짝 웃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최근에 찍은 데 각자 팔짱 끼고 벽에 기대어 카메라를 바라보는 모습의 사진.

그때나 최근이나 부부는 왠지 닮았다.

그런데 젊은 시절의 모습이 더욱 편안하고 넉넉해보인다.

최근 사진은 뭔가 프로페셔널해졌으나 비집고 들어갈 구석이 없을 정도로 무장된 것 같은 표정이다.

 

마치 인간이 가진 관용과 즐거움을 더욱 풍부히하는 영원한 '유머'를 잊고

돌아가는 정세를 읽고 항상 날카로움을 지닌 상황에서 나오는 '위트'를 선택한 것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그들의 예술 세계는, 그들이 걸어온 세월의 예술은

한 시대를 잠시 풍미한 언어적 유희가 아닌

인간적이고 마르지 않을 것 같은, 위트가 아닌 유머같은 것이길 빈다.

 

 

* 사진출처 : 금호미술관(http://www.kumhomuseu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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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0 17:17 2007/05/10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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