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만화영화책 - 2007/02/19 19:46

유난히 머리 속이 복잡하던 어느 날.

꽤나 오래 영향을 미칠 일에 대해 꽤나 단시일 내에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상황,

누군가와의 대화가, 누군가의 상담이 필요했다.

그러나 하필 재수없게 걸려든 그날의 그 '누군가'는 미술관 관람을 제안했고,

쏟아내야할 말이 많아 썩 내키지 않았던 나는 거절의 미덕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관계로 - 게다가 미술관 못 간지도 상당 기간 된 관계로 - 일단 가기로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속에 나타난 단순함에 구원받았다고나 할까?

'뭐 그리 조급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면서 자신이 좀 우스워보이기까지 했다.

어떻든 머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초현실주의 르네 마그리트.

그가 표현하는 초현실은 우리가 늘상 봐왔으나 낯설게 배치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감촉이나 느낌과 전혀 다르게 표현된 사물 등을 통해

우리를 현실 너머의 세계로 인도한다.

 

[보이지 않는 선수](1927)는 운동 중인 인물의 배치에서 느낄만한 역동성보다는 육중하면서도 정적인, 우울함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아마도 나무의 기둥인양 두터운 체스 모양 기둥의 빼곡함이 화면 전체를 바닥에 가라앉히는 기분이다. 나무 기둥 형상이었다면 훨씬 가볍게 태양을 향해 하늘로 뻗는 기분이 들었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상자에 갇힌 boxing helena 같은 저 여성. 그림을 가까이에서보면 저 락카같은 상자안에 하반신이 없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헉-_-;;; 입과 하반신이 소거된 그녀, 그녀야말로 진정 안보이는 선수일까?





[중세의 공항](1921)은 원근감을 무너뜨림으로써 르네 마그리트의 또다른 초현실주의 기법을 선보인다. 머리없는 삐에로나 귀족들. 붉은 벽, 창문으로 추락할 것 같은 사람.

갑자기 1920년대의 시대상이 궁금해지네.

 

[꿈의 산물](1927)이라는 작품은 보고만 있어도 정말 암울했다.

뭔가를 떠올릴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어두움을 느꼈는데, 이는 칠흑같은 어두움이 아니라 오히려 적당한 배치와 완전 검정이 아니라서 더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어둠이었다.

 

[벨기에 섬유노동자센터를 위한 포스터] 시리즈는 멀리서 볼때부터 노동조합 내지 노동자 냄새가 확~ 났다.

붉은 깃발, 마주잡은 손과 손. 너무 전형적이다보니 할 말을 잃을 정도..^^;;

 

 

[보물섬](1942). 붉은 홍토에서 돋아난 잎, 그리고 그 잎은 새이기도 한 그런 풀이 자라는 섬. 제목만큼이나 소중한 것을 품고 있는 따스함이 느껴진다.

 

 

[위대한 유산](1940)

작가는 도시에서 주로 살았다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화면에 자연을 품고 있는 듯하면서도 한편 탁 트인 자연은 없어보인다.

위의 [보물섬]도 그렇고 [위대한 유산]도 그렇게 생각된다. 어두운 밤에 보이는 거대한 나무들, 그러나 숲은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 어둡지만 매우 안심되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야수파를 패러디해서 '바슈'('암소'를 뜻함)시기를 만들었다는 르네 마그리트.

뭣 모르는 분석일 지 모르지만 [지성](1946)을 보면 작가가 왠지 패러디를 즐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미녀 3총사 촛대, 뭔가 사상 무장용 모자를 썼으나 가면으로 은근슬쩍 가린 얼굴의 남자들, 왠지 그림의 제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조합이다. 동시에 지성의 본래 모습이란 게 '결국 이런 것'이라는 느낌도 들게 하고...

 

[대화의 기술](1950).

거대한 돌무덤 아래 선 개미만큼 작은 두사람, 왠지 대화의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기억](1948)

석고 두상 눈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선명한 붉은 자국. 왠지 기억은 기억이되 '상처'의 기억을 나타내는 듯 하다.

 

[신뢰]l(1964~65)는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중절모와 파이프 담배대같은 아이템이 그대로 나타나있다.

하지만 중절모를 쓴 말끔한 신사 얼굴 위에 파이프 담배대라, 신뢰보다는 답답함이 느껴진다.

 

[광활한 바다](1951)는 자연이되 자연답지 못한 느낌의 극치라고 생각되는데,

액자 속에 갇힌 하늘과 구름에는 심지어 구 모양의 장식까지 되어 있다.

 

 

[여행의 추억](1952)은 그 화석화된 정물로 인해 마치 그 여행이 전쟁이었거나 지진의 흔적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그림이라는 게 다 그렇겠지만 찍힌 파일그림보다 실물이 훨씬 색의 깊이가 더한 것 같다.

 

[심금](1960)에서 보이는 거대한 투명 와인전에 산뜻한 구름은 왠지 심금을 울리기엔 너무나 가벼울 것 같은 거대함을 선사해준다.

 

[백지]는 내 상상력의 부족으로 제목과 이미지의 상관관계가 유추되진 않지만 꽤나 깊이가 느껴지는 좋은 그림이었다. 어두운 밤 속에 불편하게 떠있는 잎들과 달이지만 어쩐지 거부감 없고 자연스러운게 더욱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이번 전시에서 느낀 건데 화가란 건 생각보다 단순한 존재인 것 같다.

작품이 모두 이해가 되었고 수준이 낮았고 ... 뭐 이런 얘기가 아니다.

별볼일없는 상상력 때문인지 처음부터 제목에 얽매여있다가 곧 포기하고 작가의 의도와 아~무 상관없이 내 맘대로 감상해버리기로 했다.

다만 작가 스스로 밝힌 '자신의 과거도, 남의 과거도 규칙도 싫고 싱그러운 뛰어다니는 어린 소녀가 좋다'는 어록의 느낌이 내게도 전해지는 기분,

그러니 초현실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나의 회화에는 상징이 존재하지 않는다'

 

* 사진출처 : http://www.renemagritt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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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9 19:46 2007/02/19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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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풍경관람기 - 2007/02/16 17:55

까치님의 [숨은그림 찾기] 에 관련된 글.

 

몇년만 더 지나면 새로 지은 집들도 적당히 때가 묻으면서 정취가 제법 될 듯하다.

머리 복잡할 때 마침 운좋게 가게 된 평온함의 그곳, 머리 비우고 싶을 때 들르고 싶어질 것 같은 곳.





 


 


 


 

 




 

 


이 길을 따라 걸어가면 맛있는 묵밥집이 나오지요.

 

따뜻할 때 먹으면 너무나 맛있는 묵밥(두끼를 여기서 먹었는데 아침에 좀 식은 거 먹었더니 별로더라구여)에 동동주 한잔 캬~~~!


 

 

 

또 하나의 이 집 별미는 대추, 오미자, 계피 등 온갖 재료 넣고 팔팔 끓여주는 수정과. 죽음이오(-.-)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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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6 17:55 2007/02/16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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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 | 노조 | 이야기 - 2007/02/14 23:44

까치님의 [술통에 빠진 수련회] 에 관련된 글.

 

기차 타고 훠이훠이 도착해선 묵밥과 장국집에 들어가 먹기 시작한 게 오후 2시.

6시까지의 자유시간을 다들 못채우고 한두명씩 숙소에 들어와 모두 모인 게 오후 4시.

모이자마자 '와인 한잔+치즈 한쪽'으로 시작한 술판은 해물파전과 김치전, 빵, 토마토, 쥐포, 라면으로 이어지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7시 넘게 도착한 사람에게 소시지, 샐러드, 커피, 소주 + @ 등을 공수받은 것도 모자라,

8시인가 9시 넘어 도착한 이에게선 맥주 + @까지 공수 완료!

 

점심에 마신 동동주 한 잔이 얹힌 이후 술을 못 먹고 있던 나는

 - 물론 빵의 유혹에 굴복하여 안주류로 완전 끝장보긴 했으나 -

 

술을 안먹었던 탓인지 엄청난 피로감의 탓인지

비 떨어지는 영화스크린처럼,

'지지지' 소리가 날 것 같은 고물TV처럼,

오래된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나 혼자 상황에서 분리되어 꼴라쥬된 것처럼

이 풍경에 무척 낯설어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마지막 노조의 중앙운영위원회.

모두 속이 허했던 탓일까?

엄청난 폭음과 폭식의 날, 정말 묘한 수련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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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4 23:44 2007/02/14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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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02/03 03:28

오토코요님의 유희, 숨바꼭질.

'참가한 아이들은 도시에서 사라진다.'

 

높이가 아닌 깊이를 알 수 없는 도시의 밑바닥으로 카메라가 내려가는 동안,

아이들은 입에서 입으로 즐겁기만 해야할 비밀의 숨바꼭질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7명이 모이면 시작하는 숨바꼭질.

그러나 어느새 모인 8명의 여우 가면 아이들의 숨바꼭질은 결코 즐길 만하지 못하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도 일말의 기대라할 해피엔딩은 결코 보여주지 않는다.

절대 변하지 않은 결론, 아이들은 사라진다. 아니 소모된다, 그것도 비참하게.

그저 잠시동안 도시의 어둠을 밝히기 위한 에너지원이 되기 위해...

7명이어야할 숨바꼭질 멤버가 8명인 이유조차도 서글프기 그지없다.

남은 한명을 통해 끊임없이 이어질 수 밖에 없는, 깨질 수 없는 숨바꼭질의 고리.


 

 




 

25분의 단편. 짧지만 꽤 강렬하다.

캐릭터도 아이들, 소재도 숨바꼭질.

언뜻 보기엔 가볍기만해야 할 구성과 스토리는

적절한 속도와 완성도 높은 영상 속에서 한층 긴장감과 비장미를 높힌다.

비록 아이들의 에너지로 도시를 밝히는 건 매트릭스의 아이디어를 차용한 듯 보여도...

 

2005년도 SICAF 때 상영되었다던데 그럼 2004년 아니면 2005년작인가? 앞으로 SICAF 잘 챙겨 봐야겠는걸?

2005년에 나온 [Karas]도 그렇고, 엄청난 2D의 토대를 기반으로 한 일본 애니메이션이 3D를 만났을 때 보여줄 수 있는 환상의 세계에 제대로(!) 본 기분이다.

 

* 그림 출처 : 씨네21(http://www.cine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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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3 03:28 2007/02/03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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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생각_펌 - 2007/01/23 15:11

오늘의 뉴스 키워드

 

'악성댓글' 뉴스는 1시간정도 나오다가 사라지고,

'인혁당 사건 선고결과', '경보 울려도 강도 든지 몰랐던 경비업체', '트랜스지방', '6자회담 땜에 남북대표 회동 중', '노통의 10시 연설', '요코이야기', '이동국' -> 반복, 반복, 반복~~

'이계안 탈당'은 2번 정도 나온 상태

 

7시간동안 YTN을 틀어놓은 결과 내 귓속을 맴도는 키워드들.

 

생각보다 뉴스가 적다. 종일 다른 거 나올 줄 알았는데 ...

 

* 사족

- 목록 분류가 녹녹치 않아 '잡다한 생각' 카테고리에 넣긴 하지만 실은 아무 생각없이 포스트중.

 

 

* 10시 반에 붙이는 사족 2

- 돌겠다! 노통의 '나 다~ 잘했다'란 말을 계속 듣고 있다니...

   뭘 잘 했는지는 시간이 없어서 다 말 못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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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3 15:11 2007/01/23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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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 | 노조 | 이야기 - 2007/01/22 21:12

노조 만든지 2년만에 정리작업, 2년 활동백서 편집중이다.

(보육노조 -> 전국공공서비스노조로 산별 전환)

 

산별 가기 전

조합원들의 노조 소속감을 만빵 키운다는 내부 목표하에

2006년 7,8월 대정부투쟁을 5월 달에 있던 임시대의원대회에서 결의했었는데.

 

그때의 대의원대회에 대한 부산지부의 평가라는 것이...

 

'위원장님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 꼭 하게 만든다. 사무처장 만만찮다.

위원장님 농성하면 하루 단체로 올라가자'

 

보육노조는 진정 위원장의 영성(靈性)으로 영도(領導)된 사이비 종교단체였던건가?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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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2 21:12 2007/01/22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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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 | 노조 | 이야기 - 2007/01/18 15:50

우리은행이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했다.
담보는 정규직의 임금 동결.

 

'빈곤화'라는 말이 '양극화'로 대체된 그 시점부터,
노동자의 적 또는 노동자에게 정의로운 분배를 실현해야 할 대상은
더 이상 자본가가 아닌 '정규직'이라는 이름의 노동자가 되버렸다.

 

심지어 이젠 비정규직 사이에서도 각종 직책명으로 나뉘어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예전 한 지방의 지역노조 조합원에게서 들은 얘기에 의하면,
사용자가 똑같은 비정규직 청소노동자들을 경력에 따라 이분하고 한쪽에게 임금 더 줄테니 나머지 내보내자고 꾜셨다고 한다.
더 기가 막힌 건 이 꼬임에 넘어가다 못해 집단으로 노조 탈퇴도 했다는 사실.

 

정규직과 비정규직, 파견, 특수고용.
내부에서조차 분열을 획책하는 각종 구분들의 난립.
민중과 자본가와의 갈등관계를 민중 사이의 갈등관계로 환원시켜버린
양극화란 이름의 분리와 분열은 과연 어디쯤 가야 그 '끝'을 보일 셈인가?

 


나는 최근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에 대한 정부의 태도에서,
이젠 '정규직노동자 vs 비정규직노동자' 구도보다 더욱 앞서(?)나가는
'노동자 vs 빈민', '노동자 vs 민중'의 양극화 구도를 발견한다.

 



사회서비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회가 제공해야하는 서비스.
대충 분야만 꼽아봐도 사회복지, 의료, 교육, 환경, 문화, 행정 등등.

 

노동부는 올해만 해도 '11만명의 일자리를 사회서비스 분야에서 조성하겠다' 메일을 날리는데,

월 77만원, 최저임금을 간신히 넘기는 일자리들이다.

 

빈민대회 포스터에도 자주 언급되는 '공공의료/교육 서비스 제공하라'.
그러나 빈곤 해소를 위해 서비스받아야 할 주체들이
해당 서비스에 대해 열악한 노동조건과 최저임금을 감수하고, 질(質) 타령에 경쟁하며, 직접 제공해야하는 주체로 탈바꿈되는 순간이다.

 

이미 유사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새로 진입하는 노동자들의 값싼 임금체계 때문에 임금 인상은 커녕 임금 인하와 해고의 압박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보육교사만 하더라도 그나마 업종 내에서 괜찮은 임금을 받고 있던 국공립 보육교사(16년을 일해도 월 200만이 안되지만)에 대한 정부의 인건비 지원은 '사회서비스 일자리 확충 전략'의 일환으로 제공되는 예산이 되었다.
유사업종에 비해 인건비 지원이 많다며 예산이 깎일 지,
일자리 창출 효과가 없다며 예산이 통째로 날아갈지 모를 일이다.
예산 지원도 없는 국공립이라니, 껍데기뿐인 복지정책의 단면을 보는 듯 하다.

 

심지어 빈곤층의 자활을 돕기 위한 자활후견기관에 참여하여 일하는 민중들 중에서는
노동을 하는데도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해 산재보험 가입대상에서 제외된 경우도 있다.
자활근로에 참가하는 차상위층 민중에 대해 보건복지부는 '노동자다', '노동자 아니다'라는 극단적인 판단의 발언을 수시로 바꾸어가며 내뱉는다.

 

조만간 이 사회의 대립각, 양극화 구도는 노동자 vs 빈민,실업자로 나뉠지 모른다.

이미 정부와 자본은 노동자를 정규직 vs 비정규직으로 나눔으로써,

전체 노동자들 사이에 비정규직의 삶을 보편화하고 노동자 생계의 수준을 전반적으로 낮추었다.
정부가 본격적으로 제단하기 시작한 노동자 vs 빈곤층의 대립각은 결과적으로 전체 민중들 사이에 민중의 기초 생계 수치를 모두 빈곤의 수준으로 낮추려는 음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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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8 15:50 2007/01/18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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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생각_펌 - 2007/01/08 22:35

최근 미국 국적의 작은 고모가 쓸데없이(-_-;;;) 한국에 자주 나오면서
전화 통화하면 40분 이상, 한번 만나면 3시간 이상 나를 붙들고
내 가족들을 차례로 성토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

 

이야기속에서 가장 테러당하는 인물은 나의 여동생인데,
신학대학원을 다니며 박사과정을 꿈꾸는 그 녀석이
작은 고모의 입을 빌리면
집안을 혼란케 만드는 성격 파탄, 광신도 식충으로 변모하게 된다.

고이고이 듣다가 구체적으로 '문제가 뭐냐'가 물었더니, 제사 때(=집안 어른 뵐 때) 얼굴도 안 비춘다한다.

 

기독교인이니 제사 회피는 당연지사.
내가 보기에 그녀는 파탄 정도의 성격도 아니고 하고픈 일에 열성 매진하는 멀쩡한 녀석이지만,
돈으로 평가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 한푼 안 벌고 있는 사지 멀쩡한 그녀에 대한 나름 적당한(?) 평가일지도 모르겠다.

 

돈을 가치롭게 여길 줄 모르기 때문에 집안을 혼란케 하는 존재이고,
돈을 벌 줄 모르기 때문에 식충이며,
돈을 벌 생각이 없어보이니 성격 이상 광신도가 된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서 느껴지는 자본의 향기.
삶 자체가 어찌나 자본주의스러운지, 문득 섬뜩하게 놀랄 때가 많다.


 



우리 집안에서는 '돈이야말로 최고의 가치구나'라고 처음 깨닫게 된 건 몇해 전 남동생이 가출했을 때.

 

이 사태의 해결에 주도적으로 나설 수 밖에 없었던 가부장의 우두머리, 우리 아빠.

 

집안에는 키우는 개도 알아먹는 나름 서열이 있는 법.
한번도 가출해본 적 없는 애가 나갔으니 꽤 중대사안이므로 꽤 영향력있는 인물을 보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이 직접 갔다가 애가 안온다고 하면 더 이상 손쓸 방법도 없을 듯 싶고...
그래서 아빠가 선택한 조치는 자신의 바로 아래 레벨에 있는 것들에게 남동생을 잡아오라고 급파(!)시킨 것이었다.
그 바로 '아래 레벨로 선택된 것'들이 우리 엄마와 나였다.

 

생각해보니 나는 이 사태에 대해 그닥 심각하게 생각하질 않았다.
짜증나고 복잡하고, 딴 일하고 있는 게 훨씬 생산적이다 싶었다.
한참 바쁠 때이고 속으로는 '돈 떨어지면 돌아올 놈을 왜 잡으러 가야하나?' 싶었지만,
이래뵈도 가부장집안에서 잘 자란 첫째 딸인지라 호출에 응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라도 안 가면 앞으로의 가족 관계가 평탄치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한편 하면서...

 

이렇게 '가출한 남동생 컴백홈'이라는 본래의 목적보다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는 가족주의의 틀 유지를 위해 나섰던 길이니,
진정성이 없고 속에선 왠지 모를 분노만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 밖에 없었다.

여차저차해서 부산 가보니 은행 경호원 노릇하면서 월세집에 TV, 컴퓨터까지 들여놓을 건 다 들여놓고 살고 있더라.


열받은 우리 엄마는 고래고래 소리지르면서 없는 기력에 남동생 팔을 치기 시작했고,
남동생은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있다가 큰 소리로 "시끄러워", "안들어간다구", "빨리 가", 뭐 이따위 말들을 내뱉었던 것 같다.

 

(나에게 있어선) 오기 싫었던 공간에 억지로 배치된 상황, 온갖 감정으로 호소하는 엄마와 전혀 듣을 리 만무한 남동생의 소통없는 커뮤니케이션.


이 모든 상황이 짜증났던 나는,
뭐라 큰 소리 한판 치고 나서 컴퓨터 아래 있던 프린터(기억으론 그러한데)를 두손으로 들고 바닥에 던지려고 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엄마와 남동생 둘다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손으로는 이미 나의 팔을 부여잡기 시작했다.
이런 순간에 그 둘이 연대하고 있다는 사실에 황당해하면서,
한편으론 일단 프린터를 들어올렸기에 '내리친다'는 완결적 행동을 위해 힘을 쓰긴 했는데
일단 저지당하고
프린터는 남동생에 의해 제자리에 놓여졌다.

 

그리고는... 음...
이상하게도... 엄마와 남동생의 대화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졌다.
일단 둘다 자리에 앉았고, 톤을 낮추어 조근조근 말하기 시작했고, 결국 조만간 집에 들어가겠다는 남동생의 말을 마침표로 듣고나서 부산 일정이 끝났다.

남동생은 며칠 후 부산을 다 정리하고 다시 컴백홈했다.
(내가 보기엔 돈이 다 떨어진거다.)

 

그 이후로도 내가 가족을 위해 하는 일이라고는
평상 시 나태한 자세로 관망하기 + 약간의 큰딸 노릇 + 가끔 동떠서 식구들 술 먹이기,
위급 시 값비싼 물건 던지기 뿐이다.(부산 이후로 한번도 안써봤다만..)

 

그러나 그 이후로 나는 우리 집에서
'평소 고요하나 한번 화나면 진짜 무서운' 사람으로,
기분 나쁘게도(-_-) 가족들과 관계 형성에서 -비교우위를 점함으로써- 훨씬 수월해졌다.
아빠 다음으로 확고부동의 서열 2위쯤 된 결과인 셈이다.
그놈의 프린터, 결국 가져와 쓸 것도 아니면서 어찌나 파괴시키는 건 절대 안되는 일이었던지...
프린터 던져 이 정도니, 평면TV 던지면 조만간 아빠도 제압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ㅋㅋ

 

절대절명의 순간에 프린터 정도 집어던질 수 있는 용기만으로도 통제가 되다니 정말 자본 반응적 가족들이다.


동시에 그냥 '세상에 산다'는 행위만으로도
이렇듯 완벽하게 '자본 기반으로 세팅'할 수 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위력은 정말 가공할 만하다.

그러니까 이런 가족 집단들이 전세계적으로 모래알처럼 쫙 깔린 게 이 세상인거지? 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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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8 22:35 2007/01/08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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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생각_펌 - 2007/01/08 16:22

미성년인 장애인 딸에게 불임수술, 성장억제수술을 시킨 부모.

 

뇌손상에 의한 생후 3개월 정신 발달 수준의 그 아이는,

영원히 키1.3m에 몸무게 34kg의 피터팬으로 살아갈 것이다.

 

부모의 권한이라는 건 어디까지 인정될 수 있는 것일까?

 

아동, 장애, 여성, 부모 친권...

이 이야기는 왠지 총체적으로 서글프다.

 



오늘의 핫 이슈

2007/01/05 11:43

美서 전신마비 딸 성장억제 수술 '친권·윤리' 논란
미국의 한 부부가 전신마비 장애를 지닌 딸에게 성장억제 수술을 받도록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부모의 권한과 의학 윤리 등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4 일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애슐리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뇌손상으로 전신마비 장애를 앓고 있는 아홉살 소녀다. 말할 수도, 걸을 수도 없고 음식을 씹어 삼킬 수 없어 튜브로 공급 받는다. 똑바로 앉을 수 없는 탓에 침대에 누워 하루를 보낸다. 정신 발달은 생후 3개월 수준에 멈춰있다.

애슐리가 성장 억제 수술을 받은 것은 여섯살이던 2004년이다. 신체에 사춘기 증상이 나타나면서 키가 크고 체중이 늘었다. 갑자기 자란 애슐리를 안아서 옮기기 힘들어진 부모는 시애틀 어린이 병원과 상담한 끝에 수술을 결심했다.

병 원은 자체 윤리위원회의 승인을 받은 뒤 애슐리의 자궁을 들어내고 유선을 포함한 가슴 부위를 제거했다. 성장을 방해하는 에스트로겐 호르몬도 과다 투여했다. 병원측은 이 수술로 성장이 키 1.3m, 체중 34㎏에서 멈출 것으로 보고 있다. 불임 수술을 받고 영원히 어린이로 남게 된 것이다.

애슐리의 부모는 이같은 사실이 논란이 되자 “작은 체구를 유지하는 게 애슐리에겐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최선의 방법”이라며 부모의 편의를 위해 자식을 망쳤다는 비판에 반박했다. 익명을 요구한 이들은 “체구가 작을 수록 더 쉽게 이동하고 여행할 수 있다”며 “애슐리는 침대에 누워 하루종일 TV를 보는 대신에 사회적 활동에 더 많이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불임 수술도 애슐리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서라는 주장이다. 자궁암과 유방암에 걸릴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했다는 것이다. 부모들은 또 애슐리가 성인으로 자라도록 내버려 뒀을 경우 성폭력의 위험에 노출될까봐 두려웠다고 덧붙였다.

그 러나 장애인 단체와 의학계 일부에서는 이 수술이 인간의 존엄성을 심각하게 침해했다며 반발하고 있다. 아무리 부모라고 해도 딸아이의 운명을 함부로 할 수 있느냐며 ‘참담한 부모’에 대한 비난도 적지 않다. 장애인 잡지 편집장인 매리 존슨은 “수술 결정을 내린 배경은 이해하지만 애슐리 치료법이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며 “다른 장애 아동들에게도 이런 수술법이 확산될까봐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자칫 우생학(優生學)의 이름으로 장애인을 제거하려 했던 지난날의 잘못이 되풀이될 수도 있다는 우려이다.

마이애미대 소아과 전문의 제프리 브로스코 박사는 “수술이 적절한 조사 없이 실험 성격으로 진행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장애 아동 문제는 국가의 양육·치료 지원으로 해결해야 할 사회적 과제”라며 정부가 장애아 가족을 보조하기 위한 연방 기금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희진기자 daisy@kyunghyang.com〉- 대한민국 희망언론! 경향신문, 구독신청(http://smile.khan.co.kr) -ⓒ 경향신문 & 미디어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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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8 16:22 2007/01/08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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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01/05 23:48

꿈에서 본 것 같은, 꿈에서 있을 것 같은...

꿈이란 건 정말 양가적이다.

진짜 자면서 꾸는 꿈은 우연으로 주어진 것 같고,

내가 희망하는 꿈은 필연으로 조성된 것 같다.

하지만 자면서 꾸는 꿈 역시 무의식이 필연으로 조성해놓은 것의 발현 뿐 일지도...

 

 

한지선의 [길]은 게임 속 한 컷같다.

인공지능인 것 같기도하고,

고성의 끝없는 계단 같기도 하고,

환타지 애니의 한 배경같기도 하다.

적절한 2찬원과 3차원의 조화가 입체미를 더한다.

 

 

 



영상은 확실히 꿈에 대한 자유로운 표현을 가능하게 해준다.

김민정의 [유연한 정물]은 그야말로 '그대로 멈춰진 한 순간'의 기억인 정물을 영상화함으로써 움직임의 부여를 시도하고 있다.

 

김민정의 [숨쉬는 문] 역시 그러한데, 영상으로 만들어진 벽면의 문이 숨을 쉬 듯 팽창했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반복한다. (심지어 숨 쉬는 소리까지 들린다!)

 

김시연의 [Barricade]는 거대한 합판위에 소금으로 만든 그물망이 보인다.

이런 작품을 보면 화가들은 모두 편집증 환자라는 걸 알 수 있다..^^;;

철망 칠 때 사용하는 벌집 문양인데, 철망은 강한 반면 소금은 그냥 불면 날아갈 듯하다.

허상의 바리케이트.

 

이 작품 옆 벽면엔 디지털로 뽑은 프린트 작품 두점이 있는데 방 안에 소금으로 바리케이트 친 모습이다.

희한하게 설치물은 조금만 흩트러뜨리면 날라갈 것 같더니, 

프린트 작품은 사진이라 그런지 일상을 가두는 -평소에는 안보일 것 같은- 희한한 망과 같은 느낌이다. 일종의 심령사진 느낌이라고나 할까?

 

 

권종환의 [뿌리깊이 인식된 장소의 기억]은 꽤나 진부하거나 꽤나 사실적이다.

옛 시골학교 모습. 책상과 난로, 오르간, 액자가 모두 솜으로 이루어져있다. 구성된 내용물만 보면 나이가 좀 있는 작가같다.

한편, 꿈을 꿀 때는 현상의 뚜렷함보다는 뭉실뭉실함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지.

솜으로 표현한 건 꿈에 대한 '그야말로' 사실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을 지도..

 

 

남경민의 [5개의 병이 있는 실내 풍경]은 2,3차원을 살짝 넘어서는 세계를 2차원 캔버스에 나타내주고 있다.

캔버스 안에는 식탁 위 5개의 투명한 유리병이 마치 사람인양, 주빈인양 놓여있다.

병 안에는 붓, 수첩, 거울 등이 들어있는데 왠지 작가의 일이나 일상, 지향 등을 상징하는 것 같다.

식탁 위로 흰 나비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데, 걸려있는 액자를 통과하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2차원 세계에서 2,3차원을 넘어서는 공간을 창조하고 있다.

 

남경민의 [두개의 새장]도 비슷한다.

거울에 비추는 새나 창문의 열린 정도, 의자의 모습 등이 거울 안과 밖에서 매우 미묘한 차이를 나타냄으로써 동일한 듯 하지만 서로 다른 세상임을 알려주고 있다.

 

남경민의 [창과 캔버스 틀] 역시 그러하다.

벽에 난 창 사이로 보이는 바다풍경, 그러나 같은 벽면에 난 문 안의 풍경은 일상적 방일 뿐이다. 그리고 그 방 안 캔버스의 풍경화는 바다가 아닌 숲이 그려져있다.

 

 

박소영의 [창문 안에는 하늘이 있다]는 그야말로 창문안에 하늘, 밖에는 일반적인 도로 풍경이 있다.

의자 사이로 흘러가는 구름이 내 방안에 하늘을 품고 있다는 느낌을 더해준다.

 

이 작품과 대구를 이루는 박소영의 [창문은 하늘을 담는다]는 [창문 안에는 하늘이 있다]의 야외 버전과 같다.

칠흙같이 어두운 건물의 밖에서 보는 건물의 안은 창문마다 투명한 하늘과 깨끗한 구름 풍경을 가득 담고 있다.

 

김산영의 [엄마, 나 놀이터 갔는데]

'엄마, 나 놀이터 갔는데', 서커스단이 와있더라? 상당히 오래된 동심이다-_-;;;

 

김산영의 [숨바꼭질]이라는 작품은 가장 오른쪽에 술래가 있는 매우 긴 작품인데, 누가누가 숨어 있나 찾아보기하면 재미있을 듯.

 

작품들의 내용이 내가 꿈꾸는 세계라기보다 내가 꾸는 꿈의 세계에 가까운 것 같다.

그래서 꽤 단편적으로 끊어지는 느낌도 많아서 그다지 풍성한 기분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한두번 정도 저런 꿈을 꾸지 않을까?

마치 이 나라가 지겨워 해외로 나가고 싶어지듯,

이 차원이 지겨워 4차원 이상의 세계를 가보고 싶은 꿈.

 

* 사진 출처 :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 [꿈속을 걷다] 리플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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