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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손을 내밀어 우리

56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7/11
    요가 연습(2)
    손을 내밀어 우리
  2. 2005/07/11
    어떤 동지(8)
    손을 내밀어 우리
  3. 2005/07/09
    두번째 목포행(7)
    손을 내밀어 우리
  4. 2005/07/08
    신경림의 <홍수>(2)
    손을 내밀어 우리
  5. 2005/07/06
    새벽 2시...(4)
    손을 내밀어 우리
  6. 2005/07/05
    이 사람 참 좋다(4)
    손을 내밀어 우리
  7. 2005/07/05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2)
    손을 내밀어 우리
  8. 2005/07/01
    사무실을 지켜야 하는데-(2)
    손을 내밀어 우리
  9. 2005/06/30
    노숙투쟁 풍경들(2)
    손을 내밀어 우리
  10. 2005/06/29
    상처
    손을 내밀어 우리

요가 연습

토요일 밤에 모처럼 네 식구가 장보러 갔는데

(요즘은 아내나 가문비 중에서 한 사람은 잘 빠지는 편)

가문비가 난데없이 요가강습 테이프 하나 사야겠다고 해서

알아서 하라고 했는데 세 여자가 우르르 몰려가서

DVD 하나를 골라 왔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곧장 컴퓨터 앞에 와 앉고,

거실에서는 연신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무슨 일인가 해서 나가 봤더니

아래와 같은 풍경이 이어지고 있더라.

 

아내가 한마디 하기를,

"어이, 배나온 아저씨, 여기 술 빨리 깨는 호흡법이 나오는데 같이 하시는 게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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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동지

그 분을 처음 만난 것은 아마 10년전 쯤이었을 것이다.

내일신문 주주독자 모임에서 주선자의 요청으로

나는 자의반 타의반 진행을 맡았고,

이런저런 율동과 놀이로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서로 말문을 트고 

친밀감을 느낄 수 있도록 안간힘을 썼다.

거기에 나이 칠순이 가까운(정확히는 모르겠다)

그 분이 밝게 웃으면서 우리와 함께 하려고 애쓰고 계셨다.

 

그 후로도 우리는 가끔 만났다.

대전역 집회나 통일행사에서, 장기수 선생님의 장례식에서

심지어 지역의 작은 청년회 창립기념행사까지

그 분은 늘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먼저 아는 체를 하셨다.

그 분이 어떤 단체의 회원으로 활동하기는 하는 것 같은데,

익히 알려진 대표자들이나 소개하는 각종의 집회나 행사에서

그 분이 소개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 분은 드러나지 않게 어디에나 계셨고

내가 가까이 지나칠 때면 꼭 먼저 손을 잡아 주셨다.

 

오늘,

평택 팽성읍의 5년 전에 폐교된 대추초등학교에서 열린

<평택미군기지 확장저지, 한반도 전쟁 반대 7.10 평화대행진>에서

질척거리는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인파에 파묻혀 있던 나에게

누군가 불쑥 손을 잡으며 아는 체를 했다.

 

-여기도 오셨구만.

=아이고, 장선생님,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셨어요?

-(손을 꼬옥 잡은 채로) 건강하죠?

=예, 선생님, 여전히 건강하시죠?

-예, 아직도 과학기술에서 일하고 계시지요?

=아니, 지금은 서울에 있는 상급단체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아하, 나는 지금은 천안에 가서 살고 있어요.

=언제 그리로 가셨습니까?

-3년쯤 되었지, 아마.

=예, 그래도 이렇게 늘 열심히 다니시니 고맙습니다.

-하하... 예전에 연세대에 통일행사 한다고 학생들이 들어갔다가 경찰에 마구 두들겨맞고 나왔잖아요? 그 때 같이 했던 설동호라는 사람이 천안에 있어요. 그 사람들하고 같이 왔어요.

=(설동호, 들은 적이 있다. 어딘가 총학생회장을 했던 것 같은데...) 예, 그러시구나.

-자, 또 봅시다.

=예, 선생님,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명함을 한 장 드리고는 연락처도 챙기지 못했다.

천안에 살고 계시고, 설동호라는 동지를 찾으면 알 수 있을 듯하다.

다행히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그 이름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니.

장석정 선생님...

 

내가 저 나이가 되면,

저렇게 열심히 나다니며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을까-

헤어지려는 찰나, 잠깐만요, 해서는 사진을 한장 찍었다.

에이, 주변의 누구에게라도 청해서 같이 찍는건데...



5년전에 폐교되었음을 알리는 표지석,

학생들의 몸짓 공연,

그리고 마을 주민들의 소개, 연설과 노가바 두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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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목포행

2002년 7월 8일에 목포에 간 적이 있다.

한국화학노동조합 창립 4주년 기념식과 집행부 이취임식에

연맹 대전충남지역본부장의 자격으로 위원장을 대신해서 달려갔었다.

 

그리고 꼭 3년이 되는 어제(7월 8일),

이번에는 연맹 사무처장으로 다시 목포에 갔다.

(그 때 나는 정말 연맹에 와서 일할 날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옛 기억이 떠올라서

그 때의 기록을 찾아 보았다.

 

[잡담] 목포에 가다

 

낮 12시 40분 대전 출발, 호남고속도로로 정읍까지, 정읍에서 22번 국도타고
흥덕(선운산)까지 가서 서해안고속도로, 목포까지 내리 달려서 목포 시내를
오른 편에다 두고 영암군 소재 대불산업단지로, 낮 3시 40분 도착, 2시간여
거기 머물다가 다시 대전으로 돌아옴.

난생 처음 간 목포에는
장맛비 혹은 또다른 태풍을 예고하는 가는 비 내리고
목포항도
유달산도
세발낙지도
모두 표지판이나 간판으로만 내걸렸네.
눈내리던 겨울날의 당진이 그러했는데
오늘도 혼자서 가는 길 그대로 밟아 돌아왔으니
당진 밤바다를 가리던 방파제
목포 앞바다를 가리운 영산강 하구둑
그렇게 다녀오고도 기억에 남는 것이 신기할 따름.
그래도
123명 조합원을 가진 노조에서
극단 "갯돌"이라고 액맥이 한번 건드러지게 해불고
학생노래패 "울림소리"까지 열띠게 축가를 불러제끼는데
구조조정 민영화 싸움 한다고 넉달을 목포역에서 버틴
야근조 뺀 절반의 조합원들 목소리가 힘차고 굳세고 신명넘쳐서
언제나 그렇듯이 내가 도리어 힘을 얻어 왔지.
안그러면
어떻게 혼자서 6시간씩 마구 운전할 수 있겠어, 아암, 못하지.
거기다가
노조 행사의 뒷풀이에 허영게 삭힌 홍어회와 묵은 김치 나오는 거 봤남?
그렇게
목포 한 번 다녀왔네그려.
언제 또 갈런지 기약없는.
(2002년 07월 09일 01시 14분 54초)

 

언제 또 갈런지 기약없다고 했는데,

오후 4시 행사가 오전 11시로 바뀐 것 빼고는

3년만에 다시 가고 오는 길도 똑같았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도 크게 변함이 없었고

(위원장, 사무국장 연임, 조합원 123명 -> 조합원 112명)

오는 길에 약간의 비를 만난 것,

한국화학 말고는 다른 아무데도 들리지 않았다는 것까지

그대로 되풀이했다.

 

어디 목포 뿐이랴,

혼자서 가는 출장길에서

일탈의 충동을 가끔 느끼기는 해도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주저앉은(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떠는구나')

쳇바퀴같은 일상은 10년째 변함없다.

(가령, 이전에 서울역에서 새마을호를 타면

대전을 지나쳐 부산까지 그냥 가고 싶은 마음이 자주 들었는데,

술에 취해서도 대전역을 지나쳐 가지는 못했다-.-)

 

참,

한 가지 깨달은 것,

이즈음의 노조 행사가

대체로 관성적으로 대충대충 지나가는데 비해

조합원 112명의 그리 크지 않은 노동조합이

남들과 같은 통상적인 식순을 갖고도

참 성의있게 준비하고 진지하게 진행하는 것을 보면서

다시 한번 '기본'에 충실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늘 처음과 같은 마음으로 

 모든 일에 치열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더냐.

 




누가 썼을까...

 


미남이지, 박창윤 위원장...



연맹 하태성 국장(가스공사노조 전 수석부위원장)이 보낸 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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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의 <홍수>

한심한 스머프...님의 [어젯밤..] 에 관련된 글.

 

 

혁명은 있어야겠다

 

아무래도 혁명은 있어야겠다

 

썩고 병든 것들을 뿌리째 뽑고


너절한 쓰레기며 누더기 따위 한파람에 몰아다가

 

서해바다에 갖다 처박는

 

보아라, 저 엄청난 힘을.

 

온갖 자질구레한 싸움질과 야비한 음모로 얼룩져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벌판을

 

검붉은 빛깔 하나로 뒤덮는

 

들어보아라, 저 크고 높은 통곡을.

 

혁명은 있어야겠다

 

아무래도 혁명은 있어야겠다

 

더러 꼿꼿하게 잘 자란 나무가 잘못 꺾이고

 

생글거리며 웃는 예쁜 꽃목이

 

어이없이 부러지는 일이 있더라도,

 

때로 연약한 벌레들이 휩쓸려 떠내려가며

 

애타게 울부짖는 안타까움이 있더라도,

 

그것들을 지켜보는 허망한 눈길이 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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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시...

김지하가 그랬던가,

새벽 2시는

참 어중간한 시간이라고.

 

잠들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고

일어나 서성거리기에도 겸연쩍고

무엇을 먹기에도 미안하고

중얼거리기에는 너무 부끄러운 그런 시간,

새벽 2시는, 이 시대다.

 

뭐, 그랬던 것 같다.

그런 시간에

갈 곳이 없어 사무실에 돌아왔다.

 

7시부터 새벽 1시까지 회의가 하나 있었는데,

처음엔 10:30 막 기차는 타겠지 했고

9시가 지나서는

12:00 마지막 고속버스는 타리라고 맘먹었고

11시가 지나서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택시를 타고 사무실에 돌아오고 나서야

아, 하이텍알시디 농성장에나 갈 걸 그랬나,

오늘이 우리 연맹 차례인데,

아까 노동안전보건국장에게 말만 해놓고서

그 사이에 내가 잊었구나.

 

지금 영등포로 가기에는 너무 늦고

너무 어중간하다.

미안하고 겸연쩍다.

 

이 시대,

새벽 2시 같은 이 시대,

내가 할 일을 제대로 찾아야지.

 

우선,

동지들의 인터뷰도 다시 들어보고

파업에 돌입하는 현장의 목소리도 전화속으로 듣는다.

 

이름모를 동지들이

블로그에 올린 사연들에도 가슴 저민다.

 



= 회의하다가 말고 화장실 가는 길에

  같은 방향을 향해 몇 번 셔터를 눌렀다

  위는 저녁 7시 직전이었고, 아래는 밤 10시가 좀 지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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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참 좋다

지난 주 목요일이었나 보다.

노동방송국(radio.nodong.org)에서 전화가 왔다.

"김현선의 지금은 노동자시대" 진행자라고 했다.

민주노동당 소속으로 서울시 의원으로 맹활약하고 있는 심재옥 동지가

<이 사람 참 좋다>는 코너에 나와서 나를 추천했다고 하면서

다음날 전화 인터뷰를 하자고 한다.

 

금요일,

대전도시개발공사노조 창립기념식에 갔다가

서울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인터뷰를 했다.

여태껏 전화인터뷰라는 것은 휴대폰이 아닌 유선전화로 했으니까

당연히 유선전화가 되는 곳에 가서 대기해야 하는 줄로만 알고

일부러 죽암휴게소 안내소에 가서 전화번호까지 알아놓고 기다렸는데

그냥 휴대폰으로 해버리더군.

하긴 청취자 수백명 수준에서

생방송 도중에 전화가 끊기더라도 무슨 대수겠어.

 

누구를 추천하고 싶으냐고 묻길래

서슴없이 산오리(일산갑지구당 부위원장으로 있는 곽장영 동지요!)라고 했다.

 

당근 이유를 묻겠지.

 

-멀리서 보면 참 괜찮다가도 가까이서 함께 일하면 단점이 더 크게 보이는 사람도 많은데, 멀리서 보나 가까이서 보나 한결같이 괜찮은 사람이 곽장영 동지요,

-무엇보다도 기본에 충실하고요, 말보다는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구요,

-직장 생활하면서도 당 활동이나 노조활동이나 워낙 열심이라서, 엊그제 최저임금쟁취 노숙투쟁할때도 일산에서 강남까지 뛰어왔더라구요,

 

등등, 생각나는 그대로 떠들어댔다. 실제로 산오리는 그러하니까!^.^;;

(자세한 내용은 내 인터뷰 내용을 다시 들어봐야 알겠다, 그 사이 까먹었네-.-)

 

오늘,

오전에 노동방송국 사이트에 가보았다.

산오리의 인터뷰 내용도 <다시듣기>로 들어보고(시작하고 15분쯤 지나면 나옴)

어떤 동지들이 이 코너에 등장했는지 이전 기록들을 들춰봤다.

 

햐, 내가 아는 동지들 참 많기도 하다.

 

심재옥 동지(6/30)를 비롯해서, 김용주(6/21, 대한이연지회), 박갑준(6/20, 조폐공사노조),

최진영(6/17, 기아자동차노조, 자칭 민주노총 수석조합원), 김원범(6/15, 호텔리베라노조), 양선배(6/14, 대한이연지회), 손동신(6/8, 연맹 광전본부), 정애란(6/3, 대구시립예술단 해고자), 장창원(4/28, 다솜교회 목사) 등등...

 

칭찬릴레이, 옛부터 여기저기서 많이들 써먹던 메뉴이기는 하지만,

자주 만나기 힘든 동지들의 근황과 목소리를 이런 식으로 만나는 것도 나쁘지는 않군.

 

블로거들 중에도 "이 사람 참 좋다' 하고 소개하라면,

ㅁㅁ, ㅇㅇ, ㄱㄱ, ㄴㄴ, ㅂㅂ, ㅋㅋ...

참 많구나 많아.

 

허억, 생각해 보니, 언젠가 여러 블로거들이 내게 건넸던

음악 이어받기 트랙백조차 챙기지 못했는데...죄송해라~~

 

데이콤의 신입조합원 교육 갔다가 아시아나 파업전야제에 가야 하는 일정인데,

전야제에는 못가고 위원장 대신에 경기도 모처로 가야 한다네. 저,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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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월간 네트워커 컬럼으로 쓴 글이다.

처음에는 황우석 교수의 배아복제 줄기세포 연구에 대해

문제점을 하나하나 짚어보고 싶었다.

 

원고지 8매 이내의 길이로는

배아복제에 관한 논란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만한 실력이

불행히도 내게는 없었다.-.-

 

배아복제를 명시적으로 허용한 나라는 영국과 우리나라이고,

독일, 이탈리아, 미국 등은 시험관 수정과정에서 남은 잔여배아를

이용한 연구에도 제약을 가하고 있다든지,

 

황교수는 인터뷰할 때마다 '인간(개체)복제는 막아야 하고,

자신들의 연구는 그것과 무관하다'고 강변하는데,

기실 1996년 복제양 돌리가 태어난 이래로

복제된 소, 돼지, 고양이, 토끼, 노새 들이 줄줄이 탄생한 현실로 보면,

인간 배아복제에 성공한 황교수가 인간복제는 막아야 된다고

떠드는 것이 속임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든지,

 

배아복제를 제한하고 있는 이유는 단지 윤리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이 잉태하고 있는 위험성에 대해

충분한 대비가 되어있지 못하다는 기술적 측면에도 주목해야 한다든지,

 

줄기세포 연구의 주목적은 난치병 치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인간 생명 탄생의 비밀과 질병 발생의 원인을 알아내는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으므로,

서구의 연구자들이 황교수에게 보내는 찬사는 이 측면에서

기대하는 바가 크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지만,

그 못지 않게 배아 줄기세포에 대한 강한 규제를 돌파하려는

정치적 노림수로 봐 줘야 된다든지,

 

등등의 얘기들을 잘 버무려 얘기를 풀어갈 시간도 없었다.

그래서 쓰다가 모두 지워버리고 삼천포로 줄행랑친 것이

아래의 짧은 글이다.

 

그건 그렇고 블로그에서 참고자료를 갈무리하려면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을까?



 황우석 교수가 난치병 환자들에게서 배아줄기세포를 얻었다고 발표한지도 달포가 훨씬 지났다. 이제 좀 조용해졌나 싶어서 인터넷 공간을 거닐어 보았더니, 여전히 황 교수는 대단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작년에는 난자 242개에서 단 한건만 성공했는데, 올해는 난자 185개에서 11건이나 성공했으니, 엄청난 기술진보 아니냐, 하며 처음 너스레를 떨던 것을 생각하니 피식 헛웃음이 나온다. 황우석이라는 과학자는 지금 스타가 되었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한 때는 잘나가는 과학자 꿈을 지녔던 처지라서 내가 그를 시샘하는 것일까.


대학에서 선생 노릇을 하고 있는 선배한테 전화를 걸어 보았다. 황 교수가 방방 뜨고 나서 학교 분위기는 어떠냐고 물었다. 선배가 말했다. 줄기세포 연구는 돈도 무척 많이 들고 단순노동을 끝없이 되풀이해야 하니까 돈을 몰아주는 것은 이해하겠어. 그렇지만 왜 엉뚱한 곳에서 피해입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만드는지 몰라. 배아복제나 줄기세포 연구하는 사람들이 황우석 말고도 꽤 많은데, 그들은 지금 모두 찬밥이 되었지. 그래, 나의 시샘 비슷한 감정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9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정책은 국가경쟁력을 빌미로 연구비의 부익부빈익빈 지원구조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 당장에 돈 되는 연구를 하라는 것이 공공 연구기관에 빗발치는 요구였다. 그래서 말로는 기초, 기초, 하고 외쳐댔지만 기초과학분야는 늘 찬밥이었다. 지금 줄기세포 연구도 마찬가지이다. 황 교수가 하고 있는 배아 줄기세포 확립과 배양에 관해서는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고, 성체 줄기세포 연구나 임상 적용 연구, 줄기세포 분화 연구와 자가 증식에 관한 연구는 선진국의 50-75% 기술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나, 줄기세포 연구의 기초에 해당하는 성체 줄기세포의 유연성 기전에 관한 연구는 선진국들과 큰 수준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이런 마당에 황 교수는 첫 번째 최고과학자상 수상자가 되어 연간 30억원 안팎의 연구비를 최고 5년까지 지원받게 되었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만으로 난치병 환자들은 조만간 자신들의 병이 낫게 될 것이라고 믿어도 될까? 천만에! 좋은 논문이 수천, 수만편 이상 모여서 하나의 질환 치료를 위한 기초가 형성되는 법이거늘, 겨우 몇 편의 연구결과를 갖고 질병 치료에 대한 섣부른 기대와 판단은 금물이다. 그것이 자칫 대중의 그릇된 환상을 부추기고 또 환자들이 무작정 그 임상 실험의 대상이 되고자 덤빈다면 황 교수가 책임질 수 있을까, 아니면 언론을 포함한 그의 신봉자들이 일말의 책임이나 지려 할까.


그러므로 내 시샘을 탓하기 전에 황 교수는 이쯤에서 한번 진지하게 돌아다보기를 바란다.  그에게로 향하는 조명등의 빛줄기가 강할수록 그 주변에 드리운 그림자는 깊고 어둡다는 것을. 때론 비정규직 연구원으로, 때론 한 번에 열 개의 난자를 바쳐야 하는 비련의 여성으로, 심지어는 맹목적인 미래지향의 냉동인간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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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을 지켜야 하는데-

사무처장은 안살림을 주로 맡는다.

오고 가는 공문서에 대한 결재부터 시작해서

각종 재정 지출에 대한 판단,

일상적인 선전물과 투쟁사업장에 대한 특별전단 제작,

회의자료 최종 확인 등등, 온갖 일들에 대한 실무적 판단은

일단 사무처장에게까지 보고된다.

 

위원장은 뭐하냐고?

임원 출장서류에 대한 결재말고는 보고받는 게 없다고

가끔 푸념을 하지만,

위원장은 정말 바쁘고,

일상업무 중에서 중요한 것들은 

사무처장이나 실무책임자를 통해 집적 보고받고 지시도 하지만

대부분은 각종 회의를 통해서 점검하게 된다.

 

암튼, 언젠가 임원회를 하는데

사무처장은 사무실을 좀 지켜라, 다른 임원들이 바쁘다고 해서

맘 약하게 대신 현장에 나가지 말고 말이지,

하길래, 바라던 바요, 라고 했었다.

 

근데 그게 뜻대로 되나-

사무처장으로서 꼭 가야 할 회의도 있고,

최저임금투쟁이나 노동자대회 등을 빼먹을 수는 없고

이런 이유 저런 핑계를 들이대다가 보면

도로아미타불, 결재서류만 쌓이고 사무실 일은 밀리기만 한다.

 

이번 주는 그래서 최악이었다고 할까^.^

주초부터 최저임금 노숙투쟁으로 이틀이 날아가고,

어제 또 전국노동자대회를 비롯해 집회 셋이나 챙기고,

오늘은 대전도시개발공사노조 창립기념식인데

위원장과 수석부위원장의 일정상 또 대타로 가야 할 판이다.

 

오전에 하겠다고 했던 실장단 회의도 오후로 미루고 말이지-.-

 

이 사람아, 사무실 좀 지키라니까!



아무래도 사진 공부를 좀 해야겠다.

그래도 기억을 돕기 위해, 기록삼아 올려둔다.

 

하루에 집회가 네개 있었고, 나는 그 중 세 군데 집회를 참석했다.

 

10:50, 죽암휴게소노조 집회, 2001년에 지역본부장으로 함께 싸웠던 동지들이라서 일일이 달려와 손잡으며 반겨 주시는데, 나는 영동난계국악단 집회로 발길을 재촉해야 했다-



충북영동난계국악단집회
너무 덥다 정말 찜통같다..
금속엔텍지회장, 고무신~

대금으로 듣는 임을 위한 행진곡, 참 좋았고, 지부장과 사무국장의 결의도 굳셌다.


시골전경이라 그런가, 키도 작고 애띤 얼굴들, 방패도 낡아빠졌네- 몸싸움이 있었고




곧바로 영동에서 청주로 달렸는데, 민중의례를 하고 있었다. 정광훈 민중연대 의장의 연설은 늘 위트, 풍자, 유머가 넘친다. 어제는 더욱 힘이 넘쳤고 더위를 잠시 잊게 했다. 리베라 몸짓패들, 1년이 넘도록 위장폐업분쇄 투쟁을 하다보니, 거의 전문 몸짓패가 될 지경-


닭장차에 포스터가...
가로등에도 포스터가...

 



골목마다 차단하고 들어오고, 뒤에서 포위하고 들어오는, 노동자를 작전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전투경찰, 그리고 물대포의 위력-



서울대병원지부노조 동지들이 공공연맹 깃발로 함께 했고, 다른 골목에서는 7.10평택지킴이대회 선전전이 벌어지고 있더라.

 

죽암휴게소노조와 예술노조 영동난계국악단지부가 왜 싸우는지, 다시 쓸 기회가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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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투쟁 풍경들

산오리님의 [최저임금 인상 노숙투쟁] 에 관련된 글.


밤 10시쯤, 깃발들...


고 김태환 동지의 삶이 스크린 위에 소개되고 있다, 밤 12시.



촛불을 켠 동지들...






새벽 3시와 4시 사이, 모르는 동지들과 인사, 얘기, 잠, 혹은 술...


새벽 4시 반쯤, 아스팔트에 누워 보도 경계석을 베개 삼아 하늘을 올려다 보다





새벽 6시부터였나, 경찰이 밀려오고, 이수호 위원장은 충돌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포기하고, 일진일퇴 공방전이 벌어지고, 그 와중에 가을에 장가든다는 우리 연맹의 김승현 동지는 머리를 10바늘 꿰맸다.



최저임금위원회 안에는 경찰 1천여명이 가득 메우고 있었고, 경찰의 침탈과 최저임금위원회의 무성의한 진행에 항의하여, 이석행 사무총장, 이찬배 여성연맹 위원장, 고종환 서울본부장이 삭발을 한다.


11시쯤 일단 노숙투쟁은 끝나고, 과기노조 산업기술평가원지부 집회에 갔다. 여전히 꿋꿋한, 안형수 지부장.


점심먹고 사무실 가는 차안에서, 조수석에 앉은 동지가 양말을 차 앞에 올려놓고 잠들었다. 그 왼쪽에는 방향제가... 차주인이 나중에 이 동지에게 그랬다, 앞으로 이 차 타지 마세요!


오후 5시에 우리는 다시 최저임금위원회 앞으로 모이기로 했다. 열심히 동지들 불러모아 갔더니, 간밤에 다들 지쳤나 아니면 모두들 너무 바쁜 탓인가, 오전부터 자리를 뜨지 않고 농성을 계속했던 여성연맹의 누님같고 어머님같은 동지들만 그대로 있었다. 대표자들이 거의 도착하지 않아, 할 수 없이 나까지 투쟁연설에 동원되었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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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prometheus님의 [상처. 아물지 않는.] 에 관련된 글.

비, 무섭게도 온다.

 

아침에 억수같은 폭우가 내려 아파트 일부가 정전이 되었다.

1-2시간 지켜보다가 집을 나서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습관처럼 블로그에 들어왔다가 상처에 관한 글을 보았다.

 

상처, 살아오는 내내

예기치 않은 상처를 입히고 또 상처를 입으면서

내 삶에서 상처가 갖는 의미를 생각하고

그것을 치유하거나 잊는 방법을 고민했었다.

그러나 언제나 상처는 아팠다.

 

누군가, 저 폭우로부터 상처받는 아침일 수도 있겠다.

옛날에 써 둔 낙서를 찾아본다.

 

1. (상처)

 

상처는

언젠가 치유되고 잊혀지고

이윽고 흔적도 남지 않지만

상처 하나하나에 대하여

100조개의 세포들이 뜻과 힘 모아

처절하게 맞선 투쟁의 기록이

곧 한 사람의 인생이요

인간으로 세상을 견디는 힘의 근원이다.

 

무시로 되풀이되는

이 가슴앓이.

(2004. 7. 8. 15:07)

 

 

2. (푸념)

 

나는

내가 준 상처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나?

글쎄...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처절하고 철저하게 반성한 적 있나?

있기야 하지...

아니야 아니야, 하고 도리질한 적은 없나?

물론 있지...

 

살면서

나에게 뜻하지 않은 상처를 준 사람들은

나중에라도

그의 말과 행동이

나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

알게 되었을까?

더러는 알고 더러는 모르고...

 

그러나

그 상처의 기록들을

하루하루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며

내가 오늘 그들에게 감사하고 있음을

알아나 주었으면!

(2004. 7. 8.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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