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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핑계로 쓴다

마알간 아침 하늘,

한 귀퉁이부터 캄캄하게 어둠이 밀려오더니

이내 비가 퍼붓고

우르르 쾅쾅 천둥이 칩니다.

 

천둥이 하늘의 심장인 듯

박동소리가 다부지고 야무진데

내 심장의 미세한 울림과 떨림은

어느 한 사람에게라도 가닿을 수 있을까요?

 

비가 올 때마다

본능처럼 몰아치는 가슴앓이,

우산 버리고

하늘이 뚝뚝 떨어지는 나무 아래 서서

온 세상 넘치는 그리움으로 무장하고 싶습니다.

(2009.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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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창곡에 어린 추억들

지난 주에는 써야 할 것이 얼마나 많았던지 정신을 차릴 사이가 없었다.

그 중에 하나, 노동자 역사 <한내>(http://www.hannae.org)에 보낸 것을 여기 올려둔다.

실은 시간에 쫓겨서 오래 전에 썼던 것에 살을 좀 붙였다. 암튼...

 

 

[내가 살아온 길]

 

 애창곡에 어린 추억들


대학교에 꼭 가야 하나, 하는 사치스런 생각에 빠져 살던 사춘기 시절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 시절에 나는 대학생활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전혀 없었다. 지방 도시에까지 대학생 시위대가 거리를 휩쓸던 시기, 우리 고등학생들 사이에도 독재정권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대화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평생 하는 줄 알았던 대통령이 총 맞아 죽었고,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나의 20대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음악시간에 가창력 시험 칠 때 말고는 남들 노래할 때 입만 벙긋거렸던 나에게 노래가 일상의 한 부분으로 다가왔다. 운동가, 민중가요, 노동가요, 그런 이름으로. 그리고 그것들은 실제로 나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지난 30여년간 내가 불렀던 애창곡(?)들을 되새기면서 내 살아온 내력을 슬쩍 훑어본다.


내가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자연스럽게 듣고 불렀던 운동가는 「아침이슬」, 「흔들리지 않게」, 「정의가」정도였고, 개사곡이 몇 개인가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노래실력은 그야말로 음치 수준이기는 했지만, 나는 집회에서나 술집에서나 어깨를 걸고 함께 부르는 「아침이슬」같은 노래들의 맛에 흠뻑 빠져들었고, 술 마시고 돌아가는 길에서 혼자서도 목청껏 불러젖히곤 했다. "정의와 용기는 젊음의 생명 승리의 깃발은 높이 솟았다...", 이렇게 시작하던 「정의가」는 그 시절에 내가 열린 공간에서 주먹을 내지르며 곧잘 부르던 노래였다. 그렇지만 동아리에서 수련회를 가거나 조용한 모임에서는 뒤늦게 김민기, 양희은, 한대수의 노래들을 하나씩 알게 되었다. 「금관의 예수」, 「가뭄」, 「강변에서」, 「기지촌」, 「친구」, 「작은 연못」, 「바다」와 같은 김민기의 노래들은 아직도 가사를 대부분 기억하고, 운전을 하다가 졸릴 때 이따금씩 부르는 노래들이다.


무리들 속에 파묻혀 조용히 지내던 내가 공식적으로 사람들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농민가」를 통해서였다.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 배달의 농사형제 울부짖던 날..."을 부르면서 나는 연극반에서 배운 사박자 춤을 단과대학 체육대회에서 선보였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 이후 자주 사람들 앞에 나서게 되었다. 나를 아는 동지들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지만, 판소리에서 유래한 「농부가」를 다른 단과대의 신입생들에게까지 가르치기도 했고, 일주일에 한 번씩 수업 후에 동급생들을 불러 모아 민요를 부르는 시간을 마련하기도 했다. 내가 아무리 노래를 못해도 제자(^^)들은 훌륭하게 잘 소화했기에, 나중에는 장단만 쳐주는 것으로 내 역할을 정리할 수 있었다. 「농민가」와 「농부가」는 나를 사람들과 호흡하게 해준 노래들이었고, 요즘도 거나한 술자리에서는 한 번씩 부르기도 한다. 농촌활동을 가서도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는 무기 중의 하나가 내 막걸리 실력이요, 그 다음이 이들 두 노래였다.


내 기억으로는 82-84년 사이에 학교에서 부르는 노래들이 무척 다양해졌다. 광주항쟁에서 비롯된「임을 위한 행진곡」이 바로 이 시기에 집회에 등장했고, 「광야에서」, 「불나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단결하세」, 「선봉에 서서」를 기억한다. 그리고 샹송의 곡에 가사를 붙인「오월의 노래」도 해마다 5월이면 불끈불끈 불렀던 노래들이었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는 젊은 내 가슴을 분노로 들끓게 하기에 충분했다. 도서관 난관에 밧줄을 타고 올라가 시위를 이끌다가 떨어져 죽기도 하고, 날마다 수천의 학생들이 도서관 앞 광장에 모여서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하던 때, 학교측은 도서관 창밖에는 쇠창살을 치고 잔디광장에는 수백 포기 가시 돋힌 장미나무를 심음으로써 집회를 효과적으로 막으려 했다. 어느 봄이었던가, 독재 타도와 졸업정원제 폐지를 외치던 집회 대오들은 한순간에 잔디광장을 채우고 있던 장미나무들을 모두 뽑아버렸는데, 그 사건 이후 내가 이따금 불렀던 노래가 있다. "장미꽃 만발한 아크로폴리스, 쇠창살 둘러친 면학의 도서관, 붉은 넋 쓰러져간 그 때 그 자리, 피 흘리던 그 목소리 벌써 잊었나, 학우여 들리는가......".


이른바 아크로폴리스는 어떤 대학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조합원으로서 활동을 막 시작했던 90년대 초반에도 가끔씩 옛 생각에 젖어 술자리에서 그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러다가 한 번 호된 질책을 겸한 조언을 들었다. “동지에게서는 아직도 그 대학의 냄새가 나, 노동자 냄새가 안 나고 말이야!” 술이 확 깨는 듯했다. 노동자로 살겠다고 발버둥치는데 아직도 출신 대학의 냄새나 풍기고 다니다니, 그 날 이후 아무리 취했어도 다시는 그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그 대신에 진짜 노동자들의 투쟁을 얘기하는 노래를 불렀다. 80년대 중반까지는 학생들이 자신들이 부르던 노래를 노동자에게 배급했다면, 87년 이후에는 노동자들의 노래가 학내로 마구 유입되기 시작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하여 바야흐로 노동자들이 우리 사회 변혁운동의 중심에 서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89년에 직장에 들어와서 조합원이 되자마자 잘 불렀던 노래가 「파업가」와 「전노협진군가」이다. 전노협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알기도 전에 「전노협진군가」를 통해서 나는 노동해방의 길로 달려가는 노동자 군대의 위용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사랑한다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동지들이여 우리들의 결사투쟁은 이다지도 끝이 없구나"로 시작하던 「골리앗의 그림자」가 내 30대 초반에 가장 열심히 불렀던 노래였다. 집 어귀에 들어서면 아내뿐만 아니라 온 동네 사람들이 노래 소리만 듣고 내가 오는 것을 알아챘을 정도로, 엉망으로 취한 날이면 꼭 이 노래를 불렀다. 그만큼 노동조합에 대한 열정과 연대에 대한 갈망이 아직 젊었던 내 가슴을 채우고 있었고, 나는 평생을 투쟁하며 살리라 생각했다. 90년대 들어서서 영화 <파업전야>의 감동은 「철의 노동자」를 급속히 전파했고, 그 후로도 참 많은 노래들이 쏟아져나왔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후 어디서나 부르던 우리들의 투쟁노래들은 노래방과 단란주점으로 포위되고 급기야 투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부터였나, 우리는 노래를 부르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부르던 노래들이 휘황한 조명을 받으며 무대에서 공연되면 박수치며 감상하기 시작했다. TV에는 나오지 않아도 투쟁현장에는 어디나 온다는 노래활동가 동지들이 투쟁사업장에 왔을 때 노래를 따라 부르기보다는 박수치고 환호하기에 바쁘다. 투쟁가 한 가락이라도 가사를 보지 않고 부르는 동지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반면에 술자리에서나 수련회 뒷풀이에서 개인적인 푸념이나 세상에 대한 원망들이 투쟁의 노래를 대신하여 여과없이 술술 흘러나온다.


좀 과장스럽기는 해도 20대 이후의 내 삶은 노래와 함께 흘러왔고, 그것은 곧 노동자 민중의 투쟁의 한 역사이기도 했다. 우리가 부르는 투쟁의 노래들도 다채롭고 풍성해지고 또 분화하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내 삶에서 노래가 차지하는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은, 어쩌면 노동운동의 역동성이 퇴화되고 있다는 한 증거가 아닐까 생각한다. 세상을 단번에 바꾸는 혁명의 노래라고 해도 우리가 함께 부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다시금 내 삶이 동지들과 함께 부르는 노래로 채워지기를 고대한다.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 바쳐라 사랑은 그럴 때 아름다워라..."고 밤하늘의 정적을 깼던 그 옛날의 술판 하나가 불현듯 감동으로 되살아난다. (2009.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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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다가...

성공회대 이광일 교수가 참세상에 올린 글을 바빠서 대강 읽고 지나갔는데

오늘 다시 생각이 나서 찾아가 꼼꼼히 정독했다.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renewal_col&nid=53151

 

제목에서부터 '대당'이라고 하는 논리학의 용어를 들이대어서 좀 당혹스러웠고,

글이 꽤 길어서 차근차근 읽지 않으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단번에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더라.

(나만의 문제인가~~?^.~)

 

그래도 정치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민주주의의 의미와 실현방안,

이른바 추모 정국이라는 것에서 현혹되지 말아야 할 것들,

그리고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것들에 대해서 잘 짚어준 것 같다.

 

또 찾아서 읽게 될 것 같아서 일단 링크를 걸고

눈에 띄는 몇 문장들을 그대로 옮겨다 놓는다.

 

특히, '살아있는 권력'과 '죽은 권력'의 문제를 지적한 첫번째 인용문은

나를 뜨금하게 만들었다.

지난 번 글에서 나도 편리하게 그런 표현을 차용했으니 말이다.

 

어디 볼까...

 

요즘 많은 저널리스트들, 학자들이 ‘살아 있는 권력’과 ‘죽은 권력’의 관계에 대해 자주 언급합니다. ‘살아 있는 권력’인 이명박정권이 ‘죽은 권력’을 상징하는 노무현정권을 탄압, 조롱하였고 노무현전대통령은 그 상징적 희생양이라는 평가도 들립니다. 물론 이런 대당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것은 주권자를 대상화, 수동화시킨다는 점에서 그 이데올로기의 혐의를 벗어날 없습니다. 왜냐구요? 어떤 사회이건 민주주의를 표명하는 한 ‘살아 있는 권력’은 오직 ‘자기지배를 실현하고자 하는 주권자’에게만 붙일 수 있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정치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결국 나의 삶과 죽음뿐만 아니라 타자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정치인 노무현’을, ‘민주주의자 노무현’을 살리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요. 그것은 과거에 그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여기에 가로 놓여 있는 그 어떤 부당한 장벽들, 경계들을 비판하고 그것에 저항하면서 그것을 허물고 새로운 삶의 관계들을 만들어나가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해집니다. 민주주의는 과거의 경력을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살아 움직이는 지금 이 순간의 부당한 관계들을 문제시하고 그것을 넘고자 하는 실천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죽은 노무현을 잡고 그를 기억하는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 고통 받는 용산을, 특수고용노동자들을, 이주노동자들을, 소수자를, 수탈 받는 환경과 생태의 아픔을 안고 함께 싸우는 것이 진정 그를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민주주의, 즉 자기지배의 실현은 그 어떤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꿈을 투사하여 이룰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들만이 “이제 저를 버리라.”고 한 ‘대통령 노무현’의 말을 제대로 독해하는 사람이고 그를 넘어섬으로써 그를 살리는 참다운 지지자가 될 것입니다.


개혁자유주의자들이 꿈꾸는 ‘아름다운 세계’는 오직 그것을 넘어 나아가고자 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자들에 의해 실현되어져 왔다는 역사를 부정하거나 잊지 마십시오. ‘노무현의 꿈’은 열성지지자들인 당신들이 진정한 민주주의자, 진보주의자로 거듭날 때만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정말 잊지 말길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바보 노무현’을 추모하는 저 촛불이 지금 그의 죽음을 함께 슬퍼하는 용산의 착한 이들과 가난한 자들의 삶 속으로 자연히 이어질 때만이, 진정 ‘이 시대의 또 다른 바보들’과 어깨를 할 수 있을 때만이 그 또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요. 이제 당신들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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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

손을 내밀어 우리님의 [유서] 에 관련된 글.

 

=미디어충청(http://cmedia.or.kr)에 오늘 기고한 것.....

 

 

민주노총 지도부 조문 유감

다시 두 통의 유서를 아프게 읽으며

“죽음은 그가 앗아간 사람의 육체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서 그의 육체를 제거하여, 그것을 다시는 못 보게 하는 행위이다.”

40대의 후반에 작고한 어느 문학평론가의 말은 죽음이 갖는 생물학적 의미를 넘어서서 죽음을 애도하는 정치, 사회적인 근원을 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하나의 소중한 생명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슬퍼하는 것이며, 그의 육체가 완전히 지상에서 사라지기 전에 그에 대한 기억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래서 추모의 열기는 그에 대한 기억을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뜨겁고, 또한 그의 죽음이 그 시대의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그것은 더욱 커지거나 줄어든다. 젊은 연예인의 자살이나 전직 대통령의 죽음이나, 그런 의미에서는 대동소이하다.

그러니까 지금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한 국민적 추모의 열기는 자연스럽고 이해할 만한 것이다. 그의 급작스런 죽음은 그에게 열광하고 그에게 표를 던졌던 사람들에게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나 큰 충격이고 슬픔일 수 있으며, 누구라도 진심어린 마음으로 애도할 수 있다. 비록 모양새는 자살이지만 많은 국민들은 ‘살아있는 권력이 죽은 권력을 괴롭혀서 살해’했다고 믿고 있으며 서슴없이 그렇게 말하고들 있다. 더 부패한 정권이 전직 대통령의 ‘옥에 티’를 압박하여 못 견디게 하고 급기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대중적인 공분은 이명박 정부 아래 자신들이 15개월여 동안 겪은 핍박과 굴종의 경험과 맞물리면서 엄청난 폭발력을 응축하고 있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죽은 대통령의 유령이 현실 정치를 움직이는 전무후무한 사건을 목도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2004년 탄핵사건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사회를 심각하고 강력하게 양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른바 인물 중심의 ‘3김 정치’ 시대를 종식하고 탈권위주의의 시대를 열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 내부의 공고한 시스템으로 구축되지 못한 상황에서, 이명박 정부는 민심을 거스르면서까지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고 있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은 여기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다. ‘노무현’이냐 ‘이명박’이냐를 놓고 선택을 강요하는 상황이 봉하 마을을 비롯하여 전국 방방곡곡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엄연한 현실 아닌가. 양 극단의 사이를 채우고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정치적 대안은 유감스럽게도 아직 없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진영, 특히 노동운동진영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급변하는 흐름에 동요하거나 휩쓸리지 말고 중심을 제대로 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최근 수년간 민주노조진영은 상층부의 잇따른 비리와 성폭력 사건 등으로 말미암아 혁신해야 할 대상으로 부각되었고, 정부와 언론의 민주노조 죽이기 공세는 끝이 가늠되지 않을 정도로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그 집요한 공격이 일정하게 성공한 것일까, 현 시점에서 민주노총과 민주노조운동은 안타깝게도 노동자 민중의 희망이 아니며, 미래의 대안도 아니다. 이러한 때, 범국민적인 추도의 열기가 아무리 뜨겁더라도 노동운동진영이 그것에 편승하여 섣불리 부드러운 화해의 손길을 내밀다가는 악수와 공감을 얻기는커녕 내부의 상처를 헤집고 억울함에 사무치는 통곡소리를 더욱 크게 할 뿐이다.

“한 소중한 생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거늘, 그것도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를 크게 진척시킨 전직 대통령인데, 애도 성명도 내지 말고 조문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혹여 이렇게 따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말이 아니다! 다시 한 번 분명히 말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범국민적인 추모의 열기는 자연스러운 일이고 어떤 누구라도 자발적으로 참여하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민중운동진영이나 민주노조진영이 조직의 이름을 걸고 죽음에 대한 예의를 빌미로 자기 조직의 정체성을 해치는 행위를 합리화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표방했던 역대 정권에서 죽어간 수많은 혼백들을 일일이 불러대지는 않더라도, 용산참사로 숨진 시민들 5명의 비통한 외침과 정권의 탄압에 자결로 맞선 노동자 박종태의 처절한 절규가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다. 온 국민의 애도에 둘러싸인 전직 대통령의 영전에 국화꽃 한 송이 더 바치는 것보다 지금 더 중요한 것은 외롭게 떠돌고 있는 노동자 민중의 영혼을 달래고 그 뜻을 기리고 이 땅 위에서 구현하는 일이다.

나는 민주노조운동의 간부들에게 ‘특별한 사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와 ‘특별하지 않은 사람’ 박종태가 남긴 유서를 다시 읽어 보라고 감히 권한다. 온 국민이 애도하는 ‘특별한 사람’의 유서에는 한 개인의 상처와 고통만이 크게 차지하고 있지만, '특별하지 않은 사람'의 유서에는 이 땅을 힘겹게 살아가는 노동자 민중의 상처와 고통이 오롯이 배어있다. ‘특별한 사람’은 국익을 내걸고 이라크 파병을 감행하고, 비정규악법을 강제하고, 한미FTA를 밀어붙였지만, 정작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결단이 국익과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하겠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의 유서는 국익의 근본이 노동자 민중의 행복한 삶에 있음을 강조하고 그것을 죽음으로 실천했다. 나는 감히 주장한다. 유서를 통해서 나타난, 죽음을 앞둔 두 사람의 자세로 견주어 보면, ‘특별하지 않은 사람’은 한 개인이 아니라 우리 모두였지만 ‘특별한 사람’은 그저 평범한 개인에 불과했다. 그래서 난 이 땅 소수의 ‘특별한 사람’보다 다수의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 역사를 이끌고 가는 것이라고 또다시 확인한다.

노파심에 한마디 더 하겠다. 혹시라도 민주노조의 이름으로 봉하 마을에 가거들랑, ‘특별한 사람’에 대해 남몰래 보냈던 경외심은 버리고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존경과 그들과 함께 하는 새로운 투쟁에 대한 다짐과 각오를 단단히 벼리고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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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

1.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 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2009. 5. 23. 05:21)

 

2.

사랑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적들이 투쟁의 제단에 재물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동지들을 희생시킬 수 없었습니다. 동지들을 잃을 수 없었습니다.
저의 육신이 비록 여러분과 함께 있진 않지만, 저의 죽음이 얼마만큼의 영향을 줄 지 가늠하기 힘들지만 악착같이 싸워서 사람 대접 받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큰 나라를 반토막내서 배부르고 등 따신 놈들 미국과 극우보수 꼴통들이 이번 참에 아예 지네들 세상으로 바꿔 버릴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민주는 실종된 지 오래됐고, 반대하는 모든 이들에게 죽음을 강요하거나 고분고분 노예로 살라고 합니다.

그 속에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개인의 안락만을 위해서 투쟁할 것이 아니라 통큰 목적을 가지고 한발 한발 전진하기 위해 손을 잡고 힘을 모으는 적극적이고 꾸준한 노력과 투자가 있어야 합니다.
노동자의 생존권, 민중의 피폐한 삶은 사상과 정견을 떠나서 무조건 지켜져야 하고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기득권을 버리고, 함께 힘을 모아야 합니다.

우리 민중은 이론가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의 죽음이 세상을 바꿀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최소한 화물연대 조직이 깨져서는 안 된다는 것, 힘 없는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린 지 43일이 되도록 아무 힘도 써보지 못해서는 안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호소하기 위해 선택한 것입니다.

눈을 감으면 깜깜할 겁니다. 어떻게 승리하는지 저는 보지 못할겁니다. 그것이 아쉽고 억울합니다.
꼭 이렇게 해야, 이런 식의 선택을 해야 되는지, 그래야 한 발짝이라도 전진과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속상하고 분합니다.
이름을 거론하자니 너무나 많은 동지들이 떠오릅니다.
저를 이만큼 건강한 간부로 활동가로 있게 해 준 소중한 분들. 저를 믿고 따라 준 형님, 동생, 친구들. 이 의미있는 투쟁, 힘겨운 투쟁에 끝까지 남아 준 동지들 모두가 저에겐 희망이었습니다.

광주라는 곳도 사랑합니다.
날고 싶어도 날 수 없고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가 행복하고 서로 기대며 부대끼며 살아가길 빕니다.
복잡합니다. 동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면서 그 속에 저도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 박종태 올림.

(2009. 5. 3. 자결 확인된 이후 발견됨)


3.

'특별한 사람'의 유서가

'특별하지 않은 사람'의 유서를 뒤덮고 있다.

 

'특별한 사람'의 유서에는 개인의 상처와 고통이 크게 드러나고

'특별하지 않은 사람'의 유서에는 조직(공동체)의 상처와 고통이 오롯이 배어있다.

 

'특별한 사람'은 

언제나 국익을 외쳤지만 국익을 위해 목숨을 저버린 것 같지는 않고

'특별하지 않은 사람'은

국익의 근본이 노동자 민중의 삶에 있음을 외쳤고 죽음으로 실천했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이 전복의 역사 앞에서

나는 모든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이 관과 무덤에서 되살아와서

산 사람들과 어울려

전복되지 않는 오늘의 역사를 위해서 함께 싸우는 것을 꿈꾼다.

 

'특별한 사람'의 죽음이 미구에 태풍처럼 세상을 휩쓸고 가더라도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의 죽음을 보듬고 지키며 우리는 그저 싸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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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성평가연구소 민영화 추진 비판

미디어충청(cmedia.or.kr)에 기고한 글...

민영화가 만사형통이라고? 이명박 정부의 고질병!

안전성평가연구소 민영화 추진 비판

2009-05-20 16시05분 이성우


조장(助長): 급하게 서두르다가 일을 망친다
조장(助長)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으로는 힘을 도와서 더 자라게 한다는 의미이지만,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쓴다. 원래 발묘조장(拔苗助長)이라는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중국 송(宋)나라에 어리석은 농부가 있었다. 모내기를 하고 나서 벼가 잘 자라고 있는지 궁금해서 논에 나갔다. 다른 사람의 벼보다 덜 자란 것 같았다. 농부는 궁리 끝에 벼의 순을 잡아 빼올렸다. 집에 와서 식구들에게 벼의 순을 빼서 더 자라게 했노라고 얘기했다. 식구들이 기겁하여 논에 달려가 보니 벼는 이미 하얗게 말라 죽었다. 《맹자(孟子)》의 <공손추(公孫丑)〉상(上)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급하게 서두르다가 오히려 일을 망친다’는 뜻이다.

GLP시험기관: 안전성평가연구소의 기능과 역할
안전성평가연구소(Korea Institute of Toxicology, KIT)는 지식경제부 산하 산업기술연구회에 속한 정부출연연구기관으로서, ‘안전성평가 기술에 대한 연구개발을 주도하고 관련 분야 전문 시험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국민보건향상과 인류복지 증대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2002년 1월 한국화학연구원 안전성평가센터를 모태로 하여 설립되었다. ‘안전성평가연구’라는 것은 ‘신약이나 화학물질 등이 인간의 건강이나 자연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비임상적인 방법으로 시험 또는 연구하는 분야’로 풀어쓸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일반인들은 안전성평가연구소가 하는 일을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좀 더 쉽게 안전성평가연구소에서 하는 일을 간추려 보자. 신약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우선 신약으로서 가능성이 있는 후보물질을 찾아내고 그 약효와 독성 등을 검증해야 한다. 미생물, 세포, 동물(쥐, 개, 원숭이 등)을 이용해서 신약 후보물질에 대한 약효와 독성을 평가하는 시험을 비임상시험이라고 한다. 비임상시험은 실제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임상시험을 하기 전에 약효와 독성을 파악하기 때문에 신약개발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안전성평가연구소는 바로 비임상시험을 전문으로 하는 유일한 정부출연연구기관이다. 또 신약 후보물질은 아니지만 새로운 농약이나 화학물질에 대한 독성시험 등 안전성평가를 수행하는 기관이다. 한 가지 더 알아둘 것이 있다. 안전성평가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GLP(Good Laboratory Practices, 우수실험실운영기준)를 준수해야 한다. GLP는 의약품, 농약, 화학물질 등의 안전성평가를 위하여 실시하는 각종 시험에서 준수해야 할 사항(운영체계, 인원, 장비 및 시설)을 규정함으로써 전반적인 시험과정 및 결과에 대한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를 말한다. GLP기준을 충족하는 시험기관이 되려면 상당한 시설투자와 전문인력 양성과 운영프로그램이 필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안전성평가연구소의 현실
정부가 2001년 12월 안전성평가연구소를 설립한 것은 비록 늦었지만 GLP 시험기관의 중요성을 인정한 것이다. 지난 7년간 정부는 안전성평가연구소에 1천여억원의 연구자금을 지원해 왔다.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안전성평가연구소는 일본의 공인 GLP 적격시험기관, OECD 회원국 간 안전성 시험자료 인정기관, AAALAC Intl(국제실험동물관리인증협회)의 아시아 최초 적격시험기관 인증 등을 잇달아 받으며 국제적 안전성시험연구기관으로 성장해 왔다.

그러나 안전성평가연구소의 기술 수준은 선진국에 비해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 2006년 현재 국내에서 개발하고 있는 신약 후보물질에 대한 안전성평가시험의 82.5%가 해외 시험기관에 위탁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안전성평가연구소는 2005년 미국 FDA의 사찰을 받았으나 아직 보류 중이다(PENDING). 국제적인 GLP수탁기관만 보더라도 미국 80여개, 일본 40여개, 유럽 20여개 등이 존재하지만 국내에는 단 한 곳도 없는 실정이다. 전문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국내 전체 인력을 다 합쳐도 기껏 700여명으로, 미국의 코반스(9,000명)나 찰스리버(8,500명)의 7-8% 수준이다.

반면에 국내 연구개발비가 늘어나고 신약 등 신물질의 개발이 증가하고 있어서 국내 GLP 시험기관의 발전 가능성은 매우 높은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국제적으로 GLP시험의 시장 규모는 2007년 기준으로 3조원에 달하고 연평균 12.6%의 성장세를 나타내고 있으며, 국내 시장 규모는 1700억원에 달하고 연평균 34%의 고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정부의 무지와 비전문성: 갑작스런 민영화 논란
이러한 상황에서 지식경제부가 갑작스럽게 안전성평가연구소에 대한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어서 정부출연연구기관이 크게 충격을 받고 있다. 2008년에 한국생명공학연구원과 KAIST의 강제통합을 추진하다가 중단한 이후 전체 출연연구기관에 대한 지배구조를 개편하는 것은 2010년까지의 중장기과제로 연구하기로 했는데 안전성평가연구소의 민영화는 그러한 정부의 기존 방침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지식경제부는 안전성평가연구소가 설립 당시부터 민간 GLP시험기관으로 발전한다는 전제를 갖고 출범했기 때문에 민영화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부출연연구기관의 민영화 문제는 특정한 기관의 입장보다 앞서서 그것과 관련한 정부의 정책에 부합하는지 우선 검토해야 한다. 보건복지가족부는 차세대 동력산업으로서의 보건산업의 핵심으로 GLP시험기관을 주목하고 있는 반면 지식경제부는 국제적 수준의 유일한 GLP시험기관인 안전성평가연구소를 민영화하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정부 부처끼리 엇박자를 내고 있다. 아직까지 GLP시험기관에 대한 범정부 차원의 마스터플랜조차 발표된 적이 없다. 지식경제부가 안전성평가연구소의 중장기 발전전망을 세우는 것을 갖고 고민하지 않고 민영화를 전제로 한 연구용역을 의뢰한 것 자체가 자신들의 GLP시험기관에 대한 무지와 비전문성을 실토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안전성평가연구소가 당장 민영화된다면 이미 국내 시장에서 지점을 운영하고 있는 세계적인 GLP수탁기관과 최근 중국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세계시장에 공격적으로 진출하고 있는 중국 GLP기관에 의한 국내 시장의 잠식은 막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곧 정부가 지난 7년간 지원하여 성장해온 비임상시험분야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고 이는 국제 경쟁에서의 탈락과 아울러 수천억대 외화유출의 가속화로 나타날 것이다.

과학기술노동자들, 투쟁을 시작하다
그러나 안전성평가연구소의 사용자들은 단계적이고 점진적 민영화를 주장하면서 사실상 정부의 민영화 추진을 방조하고 있다. 위기를 느낀 안전성평가연구소 종사자들이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안전성평가연구소 민영화 저지와 공공성 강화를 위한 투쟁위원회(투쟁위원회, 위원장 김광한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한국화학연구원지부장)>를 구성하여 투쟁으로 나서기로 한 것은 때늦은 감은 있지만 정부와 사용자의 무능과 무책임한 행태가 촉발한 셈이다.

투쟁위원회는 5월 11일부터 출근투쟁을 시작했고, 5월 19일에는 한국화학연구원에서 기자회견과 겸하여 ‘안전성평가연구소 민영화 저지와 공공성 강화를 위한 투쟁위원회 출정식’을 개최하였다. 투쟁위원회는 지식경제부와 산업기술연구회가 GLP시험분야에 대한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안전성평가연구소의 독립법인화 추진 방향이 민영화가 아니라 공공성 강화로 전환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신약개발 인프라 강화와 GLP시험 기술 수준을 선진국 수준으로 향상시키고, 국내 관련 산업에 대한 기술지원 역할이 강화될 수 있도록 정부의 지원을 확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신약개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GLP시험기관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라면, 지극히 당연한 요구를 현장의 과학기술노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고 있다. 그것을 외면하고 이미 결정된 방침이라는 이유만으로 안전성평가연구소의 민영화를 끝내 밀어붙인다면, 지식경제부는 글머리에 인용했던 발묘조장(拔苗助長)이라는 고사를 낳은 송나라 농부와 무엇이 다르랴. 한번 망친 농사는 내년 봄에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한번 망친 과학기술정책은 10년, 20년을 노력해도 만회할 길이 없다는 사실이 더욱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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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들, 경찰서 담장을 넘다

일요일 낮 12시 10분쯤,

연행된 동지들 면회하러 대덕경찰서에 갔는데

경찰들이 정문을 틀어막고 먼저 온 동지들과 실갱이를 벌이고 있더라.

 

어차피 경찰서 안에 주차하기는 글렀구나 싶어서

경찰서 담벼락을 따라서 스르르르 굴러가고 있는데

어랍쇼, 전경들이 우르르 담장을 넘어서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그 광경....

 

 

그 당시 대덕경찰서 정문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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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주일...

지난 주일(5/9-10)엔

식구들끼리 예정되었던 1박 2일 여행을 갔었다.

 

꽃이 지고 난 섬진강을  따라서

순천, 광양까지 갔다가

다시 하동, 화개장터, 구례로 거슬러왔고

다음 날에는 곡성을 거쳐서 성삼재를 넘어서 돌아왔다.

 

오자마자 곧바로 대전역 촛불집회에 갔고

밤에는 투쟁하는 동지들과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월요일(5/11)엔 모임이 있었고

아주 특별한 일들이 이어지면서 밤을 새고 말았다.

 

화요일(5/12)에는 서울에서 집회와 회의(중집위)가 있었고

뒷풀이에 더해서 한잔의 술을 마시고 대전으로 돌아왔다.

 

수요일(5/13)에는 오전에는 지역본부 회의,

오후에는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퇴근하고 촛불집회에 갔다.

서울가는 연맹의 간부들을 대전역까지 태워다주고

가볍게 시작한 저녁밥먹는 자리가

조용한 술자리로 길게 이어져 자정을 많이 넘겼고...

 

목요일(5/14)에는 안전성평가연구소 민영화 저지 출근투쟁,

지부에 잠시 들러서 설문조사 얘기 마무리짓고,

오후 4시 회의가 있을 때까지 일하느라 좀 바빴고,

저녁 7시에 서울 회의는 30분쯤 지각했다.

뒷풀이가 유쾌하게 이어졌고

4년만에 택시를 타고 대전으로 돌아오는 사태가 발생했다.

 

금요일(5/15), 오전 10시 회의에 지각했고

좀 일찍 퇴근해서 안양에 갔다.

스승의 날을 전후해서 모이는 초등학교 친구들과

그 때의 담임선생님, 올해 초에 정년퇴임하셨지만

우리랑 여전히 젊고 활기차게 어울리신다.

 

토요일(5/16), 아침부터 마음이 바쁜 날이었고

비는 왔고, 전국노동자대회가 처음으로 대전에서 있었고,

행진이 시작되었을 때 사정상 빠져있었고

밤에 다시 여기저기 돌아다녔고

다급한 전화를 여러통 주고 받았고 멀리까지 차로 다녀왔다.

 

일요일(5/17), 오늘이구나...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서울로 가는 도중에

어제 연행된 동지들이 너무 많아서(457명?)

면회투쟁을 같이 해달라는 연맹의 전화를 받고

다시 급히 대전으로 돌아왔다.

둔산경찰서, 대덕경찰서, 다시 둔산경찰서, 왔다갔다 하다가

오후 3시에 점심을 먹고 오후 5시에 회의(민영화저지정책팀)에 갔다.

 

회의 마치고

저녁 같이 먹고

집에 들렀다가

사무실에 왔다.

 

12시 지나면 집에 가겠다고 했는데

일은 끝이 보이지 않고

지난 일주일 생각나는대로 줏어섬기고 있다.

돌이켜 보면

하나하나의 일들이 모두 정리가 필요한 것들이지만

언제 다 정리하고 살겠나.

 

10분 후면, 다시 일주일이 새롭게 시작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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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게깍두기와 멍게무침

어제, <꼼꼼>에 보낸 글.....

맛있게 살자 <9>

밥상에 차려내는 향긋한 바다내음, 멍게깍두기


요즘 수산시장에 가면 싱싱한 멍게들을 만나게 됩니다. 멍게는 수온이 높아지는 늦봄부터 여름까지 제철입니다. 멍게의 특유한 맛은 불포화알코올인 신티올(cynthiol) 때문이며, 근육 속에는 글리코겐의 함량(약 11.6%)이 다른 동물에 비해 많습니다. 멍게에는 또 인체에 필수불가결한 미량 금속성분인 바나듐이 들어 있어서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합니다.


술안주로는 곧잘 멍게를 찾으면서도 반찬으로 먹을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해던가 장모께서 깍두기를 보내 주셨는데 멍게 특유의 향이 은은하게 후각을 자극했습니다. 바로 멍게깍두기였습니다. 그런 우연한 계기로 멍게를 밥상 위에 올리는 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멍게를 아예 먹을 줄 모르던 우리 딸도 멍게깍두기에는 쉽사리 손이 가곤 합니다.


멍게깍두기가 익숙해지자 숙성시키지 않고 곧바로 반찬으로 먹을 수 있는 멍게무침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멍게무침은 반찬으로도 손색이 없지만, 따끈한 밥에 구운 김과 참기름이랑 얹어 비비면 맛있는 멍게비빔밥으로 먹을 수 있습니다.


<멍게 손질하기>

-멍게는 2개의 큰 돌기 부분을 먼저 잘라내고 속살을 빼냅니다.

-내장을 깨끗이 훑어서 제거하고 3-4등분으로 칼질합니다.

 

※멍게를 손질할 때는 멍게 자체의 물이 워낙 많이 나오므로 이것을 모아서 멍게속살을 씻으면 향도 손실되지 않고 맛이 훨씬 좋습니다.

※멍게는 손질하여 껍질을 제거하면 원래 무게의 1/3쯤으로 줄어듭니다.

※멍게의 표준어는 우렁쉥이인데, 멍게를 흔히 쓰다 보니 복수표준어가 되었습니다.


<멍게깍두기>

재료: 무 1.2kg, 멍게 600g, 쪽파 50g, 미나리 50g

양념: 고춧가루 6T, 멸치액젓(까나리액젓) 6T, 마늘 1T, 생강 1/2T, 설탕 1T, 소금 약간

 

-깍둑썰기를 한 무에 설탕 1큰술과 소금 약간을 뿌려 놓고, 무에서 물기가 생기면 고춧가루 1큰술을 넣어 버무려서 가볍게 고춧물을 들입니다.

-남은 고춧가루에 액젓, 마늘, 생강을 넣어 갠 다음 고춧물 들인 무에 넣어서 버무립니다.

-여기에 멍게 손질한 것과 3센티미터 길이로 자른 쪽파와 미나리를 넣어 가볍게 버무린 다음 실온에서 하루쯤 익힌 뒤 냉장고에 두고 먹습니다.


<멍게무침>

재료: 멍게 1kg, 무 100g, 쪽파 30g, 미나리 30g, 홍고추 1개

양념: 액젓 1T, 간장 1T, 고춧가루 1T, 설탕 1t, 마늘 1t, 파 1t, 깨소금 1T

 

-양념을 모두 섞어 멍게와 버무리고, 얇게 저며 썬 무와 손질한 쪽파와 미나리, 홍고추를 넣어서 한번 더 버무린 다음에 바로 먹습니다. (2009. 5. 12)

아래는 멍게 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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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을 넘기다가

오전에 지역 회의 하나 끝내고 돌아와

오랜만에 느긋한 자세로 책상 앞에 앉았는데

컴퓨터 위에 놓인 달력이 아직도 4월이다.

 

한 장을 넘겨 오늘 날짜를 확인한다.

5월 하고도 13일....

5월이 2주일 지나는 사이에 나는 뭘하고 있었나?

 

오늘 끝내지 못한 일은 내일로 이어지고

그것이 그 다음날로 이어져 기어이 끝을 보고 말아야 할텐데

오늘과 내일과 모레와 그 다음날 또 그 다음날,

날마다 다른 일정과 다른 일들이 첩첩이 쌓여있고

무어 하나 말끔하게 끝나는 일이 없구나.

 

어디 오라고 해도 가지 말고

사무실에 붙어 있으려고 애 좀 써야 하나.

누구 말마따나

술이라도 끊고 밤낮 일중독자로 전환해야 하나.

 

달력 한장 넘겼는데

한달의 절반쯤을 그냥 잃어버린 것 같아서

투덜투덜 푸념 한번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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