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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되기와 계급투쟁.

아래의 글은 논문 중의 일부(첫머리)입니다.

혹시 관심 있어서 읽어보고 싶으신 분이 계시면

이메일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잘 쓴 논문은 아니지만 열심히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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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되기와 계급투쟁 #


1. 오늘날 맑스주의에서 왜 ‘여성 되기’가 핵심적으로 중요한 문제인가.


오늘날 맑스주의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곤혹스럽게 다가온다. 특히나 역사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노동자계급 중심성은 한마디로 뜨거운 감자처럼 보인다. 이런 노동자계급의 중심성은 크게 두 가지의 문제를 낳는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노동자계급(운동)의 보편성’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이 계급운동의 보편성에 대한 다른 모든 반자본 운동과의 연관성 문제이다. 이 문제들은 사실상 맑스주의 사적 유물론의 존폐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노동자계급(운동)의 보편성을 살펴보자. 노동자계급(운동)의 보편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노동자계급(운동)은 정말 보편적인가? 자본-임노동과의 관계에 있는 임노동자는 보편적 존재가 아니라 개별적 존재이다. 임노동자는 개별적으로 자신의 노동력을 가지고 시장에서 자본과 상품관계를 맺는다. 그렇기 때문에 상품관계에서 상대적 가치형태에 서 있는 임노동자는 개별적 존재이지 보편적 존재가 아니다.(주1-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맑스주의에서 노동자 계급의 보편성을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는 것’에서 찾는다. 그런데 이러한 ‘보편성’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에서의 생산수단 유무의 구조에 의해 사회공학적으로 단순하게 주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자본의 보편성을 통해서만 자신의 보편성을 드러낼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알튀세는 이러한 보편성을 지닌 주체를 ‘호명된 주체’로 불렀다. 이 보편성은 대단히 불완전하며 일면적이고, 알튀세에 따르면 허구적이다. 왜냐하면 알튀세에게 보편적 존재로서의 계급은 없기 때문이다. 추상적(분석적) 수준에서 보편적 존재로서의 노동자 계급은 가능할 수 있지만(그것도 불완전한 추상으로서 말이다), 현실적 수준에서 이 추상적 수중에 상응하는 보편적 존재로서의 노동자 계급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 또는 노동조합 이기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사회적으로 먹혀들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이에 관해서 마이클 리보위츠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노동자들이 이질적인 인간들로 존재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그들 각각의 생산에 고유한 조건들이 지닌 차이점(자본 자체가 만들어 내는 분열뿐만 아니라)들을 감안한다면, 노동자들을 분열된 존재로, 즉 서로 경쟁하는 임노동자들로 - 자본에 대항하는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 - 파악할 수 있는 구체적인 물질적 근거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요컨대 분석상 노동자 계급을 단일한 존재로 파악한다는 것은, 실제로 노동자 계급이 자신을 단일한 존재로 인식하거나, 또는 단일한 존재로 행동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또한 노동자 계급이 그렇게 행동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도 아니다).” 마이클 리보위츠, 『자본론을 넘어서』, 홍기빈 옮김, 백의, 1999, 255쪽. 이 문제는 다음에 자세하게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그런데도 맑스주의에서는 노동자계급(운동)의 보편성을 이야기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다.

맑스는 노동을 통해 사회적 관계로서의 인간이 생산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노동은 자본을 위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노동을 수행하는 임노동자로서의 노동자는 여전히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순수한 개별적인 개인으로서의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노동은 노동자 계급이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노동이 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자본)의 실체로서의 추상노동은 항상 노동자의 살아 있는 구체노동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이 추상노동은 노동자의 임노동이다. 그리고 이 임노동을 뒷받침하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노동은 여성의 가사노동이다.(주2-여기서 가사노동을 본래부터 여성의 담당이냐고 이의제기할 수 있다. 정당한 이의제기이다. 그런데 여기서 ‘여성’의 가사노동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성별 분업이 일반적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해체되어야 할 것은 바로 자본주의 하에서의 이러한 성별 분업이다. 다른 한편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가치=상품=화폐=자본>. 이것의 최고의 법률적 형태는 국가이다. 그런데 이 국가는 가부장적이며 남성 지배적인 국가이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임노동의 물적 토대는 바로 여성의 가사노동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에서 여성의 노동, 특히 가사노동은 남성의 화폐(임금)라는 사물의 형태로 소외된다.) 가사노동은 노동자 계급의 기존의 노동력 재생산뿐만 아니라 새로운 노동력 생산의 기초이다. 새로운 노동력의 생산은 질적으로 새로운 “생산력”으로서의 새로운 “인간”(주3- 맑스가 말하는 생산력은 인간 자신이다. K. Marx, Grundrisse, MEW 42, S. 599)의 생산이다. 그러므로 가사노동은 대자적 노동자 계급 또는 주체로서의 노동자 계급을 생산해 내는 물질적 기초이다. 그리고 이러한 계급의 계급투쟁의 발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성별 분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리고 가사노동이 개별적인 여성의 몫으로 남게 될 때, 노동자의 자기 생산은 가사노동의 착취 구조를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이렇게 생산된 노동자의 노동력은 다시금 자본의 착취 구조 속으로 편입된다. 이러한 것은 <가사노동(개별) = 노동자의 임금(사용가치)(보편) = 자본(보편)>의 등식으로 성립될 수 있으며, <가사노동(개별) --> 노동자의 임금(사용가치)(보편) --> 자본(보편)>이라는 일종의 먹이사슬 구조로 바뀌어 나타난다. 이런 구조 속에서 노동자 계급의 계급투쟁은 그 자체로 비민주적인 착취 구조를 자기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비민주적인 착취 구조를 깨나가는 것이 바로 여성-되기라고 할 수 있다. 여성-되기의 출발점으로서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필요하다. 가사노동의 사회화는 가사노동을 새롭게 재조직하여 여성을 가사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성 자신이 개별화, 원자화된 존재로부터 보편적 존재로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끊임없이 형성시켜 나가면서 새로운 노동관계, 생산관계를 만듦으로써 성별 분업 체계를 깨는 것이다.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여성들의 자유로운 발전이 바로 생산력 발전의 토대이고, 이 생산력 발전이 ‘여성 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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