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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번역문은 미카엘 하인리히가 쓴 <가치에 관한 과학>(Die Wissenschaft vom Wert)이라는 책 중에서 1부 1장 6절에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앞으로 <가치>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장, 절 들을 번역해서 올려 볼 생각입니다. 왜 이걸 번역해 보냐 하면 여성노동의 가치와 연관된 논문을 써 볼까 하는데, 제가 생각하고 있는 맑스의 가치론과 저자가 보는 맑스의 가치론이 어떤 점에서 같고 다른지를 살펴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다음 번엔 2부 3장 3절 <정치학 비판 : 인간해방과 혁명>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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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e Wissenschaft vom Wert #
- Michael Heinrich -
<1부 : 긍정적인 것으로서의 인간학 - 정치경제학의 이론적 영역>
@ 1장 : 고전 정치경제학 @
** 6절 : 자본주의 비판으로서의 가치론 - “리카르도주의 사회주의자들” **
자본주의 발달과 더불어 노동운동도 발달하였다. 19세기 초 무렵 영국에서 노동운동은 부르주아 개혁운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지만, 2~30여 년이 넘게 이 둘 사이의 대립은 아주 강했다. 이러한 발전은 상호 대립해 있으면서도 정치경제학을 둘러싸고서는 결코 대립되지 않았다. 1820년과 1840년 사이에 고전 노동가치론으로부터 나타난 서로 다른 저자들은 전체 부가 오로지 노동에 의해서만 생산될 수 있고 따라서 노동자가 전체 노동생산물에 대한 권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로벤탈 학파(로벤탈 1911년) 이후에 통상적으로 이러한 저자들을 “리카르도주의 사회주의자들”로 불렀다. 정치경제학이 우선 과거에 토지소유자와 봉건 지배구조에 대항하는 무기였다면, 이제 정치경제학은 노동계급에 대립하여 자본의 합법적 과학으로 비판 받고 있다. 물론 이러한 비판이 지속되고 있고, 또한 이러한 것이 정치경제학의 전제들 속에서 출발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와 연관된 중요한 지점이다.(주41-반자본주의 이론과 노동운동의 연관성은 부르크아트(Burkart, 1980)에 의해 토마스 호지스킨(Thomas Hodgskin)의 예에서 고찰된다.)
이미 1821년에 익명의 저작은 자본가의 이윤이 노동자의 잉여노동으로 환원됨을 보여 주었다. 그 저자는 자신 스스로가 잘 알고 있듯이 일반적으로 승인된 명제, 즉 노동은 모든 부와 수입의 원천일 것이다(익명 1821, 2쪽)라는 명제와 더불어 (논의를) 시작한다. 그런 후에 그는 잉여노동의 개념을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을 넘어서 생산하는 인간의 노동으로 정의한다(같은 책, 3쪽). 이러한 개념을 통해서 그는 자본소유자의 수입을 설명한다 :
“더 이상 자신의 노동을 사회의 노동과 통일시킬 수 없는 자본소유자는, 자신의 자본이 지대로부터 나오건 또는 화폐이익으로부터 나오건 간에, 자신의 자본의 사용을 위해 지불되는 타인의 잉여노동 또는 이익 위에서 자신의 삶을 유지해 나간다.”(익명 1821, 8쪽)(주42-그 다음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 “…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넘어서는 매 시간의 노동생산물을 노동자들로부터 뽑아내고자 한다.”(익명 1821, 23f))
맑스는 그 저자가 이윤을 잉여노동으로 해체하여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 리카도나 스미스에 비해서 본질적으로 하나의 진보임을 인정하였다.(주43-) 사실상 여기서 이윤은 잉여노동에 대해 단순히 다른 이름으로서 이익, 지대와 통합된다. 물론 여기서 이윤이 잉여노동으로 해소되는 것이 결코 가치론에 근거하지 않고(주44-), 따라서 부르주아 경제학을 대상으로 삼는 어떠한 이론에도 근거하지 않고, 오히려 단순하고 모든 사회에 타당한 사실들에, 다시 말하자면 자신의 노동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노동을 통해 삶을 유지한다는 사실, 하나의 계급이 전유하고 있는 사회적 잉여생산물이 다른 계급의 잉여노동을 통해 생산된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 저자는 착취의 물적 내용을 인식하고 있지만, 부르주아 사회에서 착취가 매개되는 특수한 형태를 인식하고 있지는 못하다.
이른바 “리카도주의 사회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대표자는 토마스 허드그스킨(Thomas Hodsgkin)이다. 그에 관해서 통상적으로 이야기되는 바는, 그가 리카도의 노동가치론을 넘겨받아서 착취이론으로 폭넓게 발전시켰다는 것이다(예를 들면, Blaug 1958, 143쪽을 참조하라). 사실상 허드그스킨은 명백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공식적인 것으로 인정되고 있는 이론, 즉 자본의 권리가 노동자계급이 빈곤해지는 원인이라는 이론을 끌어오고 있다(Hodgskin, 1825, 80쪽을 참조하라). 물론 무엇보다도 먼저 허드그스킨은 리카도에 대해서 비판적 관점을 취하고 있고 리카도의 이론을 자본주의적 (인간)관계를 옹호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주45-) 허드그스킨 자신의 고유한 이론적 싹은 리카도의 가치론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 것으로 파악되기보다는 스미스의 가치론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 허드그스킨은 “자연적” 가격과 “사회적” 가격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은 것에 기초해서 말하고 있다 :
“자연 가격 또는 필요 가격은,……자연이 인간으로부터 요구하는 노동의 총량은 인간이 어떤 상품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은 과거에 최초의 화폐였고, 현재와 미래에는 자연과의 거래에서 구매 화폐가 되고 또 그렇게 될 것이다. 내가 사회적 가격이라고 부를 가격의 또 다른 종류가 있는데, 그것은 사회적 규칙에 의해 높아진 자연적 자격이다. 어떤 상품을 생산하는 데 요구될 수 있는 노동량이 얼마이든지간에, 노동자는 항상 사회의 현재 상태에서 자연으로부터 상품을 사는 데 요구되는 노동보다 더 많은 노동을 그 상품을 획득해서 소유하는 데 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에 대해서 증대된 자연가격(Naturel Price)이 사회가격(Social Price)이다.”(Hodgskin, 1827, 219쪽)
허드그스킨이 자연 가격을 “자연”을 요구하는 가격으로서 나타내고 있는 과장된 정식들은 말 그대로 확고하게 스미스가 노동을 가치의 척도로서 제시하는 것으로부터 유래한다(Smith 1776, 47쪽 이하와 비교해 보라). 뿐만 아니라 자연 가격을 높인 것으로서 사회 가격의 구성 역시도 스미스가 자본주의적 관계라고 간주하였던 가치 규정과 연결되어 있다 : 상품가치가 덩 이상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윤이나 지대에 대한 몫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가 상품 생산에 대해 요구되는 노동시간보다 더 많은 노동시간을 그 상품에 대해 지불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다.
노동자가 “자연” 가격과 “사회” 가격 사의의 차이를 지불하고, 이러한 차이가 이윤과 지대를 형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스미스와 리카도에게서보다는 허드그스킨에게서 그가 잉여가치를 “사물과 관련해서(der Sache nach)" 파악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허드그스킨은, 그 자신이 위에서 논의한 익명의 저자와 비슷하게 상품의 가치량과 평균 이윤의 규정과 같은 세부 항목에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입장을 취하였다.(주46-)
맑스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모순”, 다시 말해서 “그 경제학자들의 전제들로부터 형성되는 모순”(Ⅱ.3.4/1370; 26.3/234)이 좌파 리카도주의자들에게 문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 경제학자들은 부르주아 경제학의 이론적 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허드그스킨은 이미 스미스와 리카도가 만들었던 독특한 인간주의의 틀 내에서 정치경제학의 대상을 규정하고 있다. 허드그스킨은 그의 저서 『대중 정치경제학』(Popular Political Economy)에서 스미스가 이미 보여 주었던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노동분업이 인간 본능의 결과일 수 있으며, 계속해서
“정치경제학이 근본적으로 취급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연적인 이해관계들, 열정들, 본능들, 그리고 성정들(affections), 더 나아가 이러한 것들의 결과들이다. 이 책은 거의 오로지 이러한 것들에 한정돼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과 이런 것들의 영속성 위에서…… 국부에 대한 자연과학이 발견된다.”(Hodgsikin 1827, 25쪽)
는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게다가 허드그스킨에게서는 자연과학이 정치경제학으로부터 시작한다. 스미스와 리카도에게서처럼 허드그스킨에게서도 상품 생산은 바로 자연적이며 인간에게 적합한 생산방식으로 나타난다. 허드그스킨에게서 등가교환은 자연적인 공정함의 표현이다. 그리고 자본과 노동의 교환에서는 분명히 노동자가 생산하는 모든 것이 노동자에게 속하지 않는 어떠한 등가물도 교환될 수 없기 때문에, 이 교환은 불공정한 것이다.(주47-) 부르주아 사회 스스로 만들어 내는 이러한 관념은 현실적인 (인간)관계들과 충돌하며 비판의 척도가 된다. 리카도주의 사회주의자들이 행하고 있는 이러한 비판은 비판행위의 전제들 안에서 변함없이 출발한다.
맑스의 비판방식은 이러한 도덕적 비판 방식과 일치하지 않을 뿐더러(이에 대해서는 4장과 비교해 보라), 종종 주장되고 있는 것처럼, 맑스는 리카도주의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자신의 가치이론과 잉여가치이론을 넘겨받지도 않았다.(주48-) 물론 이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적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긴 했다. 맑스는 1844년 처음으로 스미스와 리카도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였다.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맑스는 노동자의 비참한 상황에 직면하여서도 모든 부의 원천으로서의 노동을 이야기하고 세이의 논점들이 리카도의 노동가치설과 연결되는 스미스와 리카도의 “냉소주의”를 비판하였다(Ⅰ.2/258; EB 1/531). 맑스는 1847년에 『철학의 빈곤』에 나타나 있는 프루동과의 논쟁 과정에 노동가치설을 비로소 긍정적으로 적용시킨다. 1844년과 1847년 사이에 리카도와 리카도주의 사회주의자들의 심오한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맑스는 1845년 맨체스터에 머물고 있을 때 이들의 저작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노동가치론을 자본주의 비판에 적용시킴으로써 리카도와의 새로운 논쟁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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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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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마침 제가 관심있는 책을 번역해 주셔서 읽고 갑니다. (아니.. 간다기보단 앞으로 계속 신세를 좀 질 작정입니다. ^^;;;) 암튼 정말이지 혼자만 보시지 않고 공유해주셔서 고맙습니다.하지만 그냥 가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고... 몇 가지 읽으면서 걸리는 것들을 말씀드려도 되겠지요? ^^;; (앞으로도 능력 닿는 대로...;;)
먼저... 곰탱이님 취향이실 수도 있고.. 또 원래 독일책이니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허드그스킨"보다는, 원래 영어발음인 "호지스킨"이라고 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자본론>이나 <정치경제학비판요강> 등 국내에 번역된 맑스저작들에서도 그렇게 쓰고 있기도 하고요.
둘째로... 중간쯤에서... 바로 그 "호지스킨"을 인용한 대목이 있죠. 그 중 첫부분 즉 "자연 가격 또는 필요 가격은,……자연이 인간으로부터 요구하는 노동의 총량은 인간이 어떤 상품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하신 부분은 다음과 같이 하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러울 것같습니다: "자연가격 또는 필요가격은...자연이 인간으로부터 요구하는 노동의 총량을 의미하며, 그는 이를 (어떤) 상품으로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끝에서 두번째 단락..."게다가 허드그스킨에게서는 자연과학이 정치경제학으로부터 시작한다"라고 하셨는데... 여기엔 오해의 소지가 좀 있네요. 다음과 같이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호지스킨에게서는 정치경제학으로부터 하나의 자연과학이 형성된다." (의미의 차이는 명확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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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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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 지적 감사 드립니다. 앞으로도 많은 지적 부탁 드릴게요^^...부가 정보
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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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사실은 괜히 끼어드는 것이 아닌가 걱정도 됐는데... 제딴에는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또 그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한 거였슴다 ^^;;저도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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