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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의 혁명 과정을 그리는 역사소설 <<허균, 최후의 19일>>(김탁환 지음, 민음사, 2009) 중 상권의 내용 중에서 발췌함(268~2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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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자 박치의도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한 가지만 묻겠네."
"뭔가?"
"자네가 세상을 바꾸려는 진짜 이유가 뭔가?"
교산(허균의 호)! 그 이유를 몰라서 던진 질문이 아니라네. 자넨 너무 멀리, 너무 깊게, 너무 오랫동안 생각하는 나쁜 버릇이 있어. 최초의 마음만 생각하게. 무륜당의 봄과 변산의 낙조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허허허, 오 년 전에 이미 다 보여 주었는데, 새삼스럽게 뭘 그런 걸 묻나?"
허균은 잠시 말을 끊고 오른손을 들어 도성의 불빛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저 소박한 백성들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었네. 그들을 불행에 빠뜨린 왕실과 조정에 분노했지. 잠깐이지만 금상이 왕위에 올랐을 때 기대를 했던 것도 사실이네. 전쟁의 상처를 씻어 내고 새 살이 돋는 공경을 상상하곤 했으니까. 허나 아무리 군왕이 훌륭해도 그 아래가 온통 썩고 병들었다면 어떻게 상처를 치유할 수 있겠는가. 왜 세상을 바꾸려느냐고 물었나? 이대로 대충 당상관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금강산이나 변산에서 말년을 보내고 싶지는 않은가 이 말이지? 솔직히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네. 허나 나는 이 세상을 바꾸고 싶어. 더 이상 인간에게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
"인간에게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그래! 오십 평생 나는 인간이라는 족속에게 실망만 하며 살아왔네. 왜란을 겪은 이십 대, 이리저리 외직을 떠돈 삼십 대, 그리고 다시 도성으로 돌아와 관송의 개로 지낸 사십 대까지, 모조리 실망뿐이었네. 나는 마지막으로 인간이라는 족속을, 그리하여 나 자신을 믿어 보고 싶어. 서로가 서로를 괴롭히고 욕하고 죽이기 위하여 존재하는 인간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이 되고 아름다움이 되는 인간을 보고 싶으이. 그날을 향한 갈망이 있는 한 나는 언제나 자네와 함께 할 걸세."
박치의가 허균의 손을 굳게 마주 잡았다.
허균의 혁명 과정을 그리는 역사소설 <<허균, 최후의 19일>>(김탁환 지음, 민음사, 2009) 중 하권의 내용 중에서 발췌함(370~3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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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과 여인 이재영의 대화 중에서..>
"백성들을 위해서 세상을 바뀨겠다고?" (여인)
"...... 꼭 그것만은 아니지. 자넨 가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나? 나는 있다. 그러나 나는 나를 갖지 못했다......" (허균)
"그게 무슨 말인가?"
"배고픔과도 같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걸세. 젊었을 때에는 세상에 반대하는 것으로 희망의 근거를 찾았지만, 이제는 누구를 반대하거나 누구를 도와주기 위해서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니라네. 나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싶어서라면 이해하겠나? 서른을 넘기면서부터, 배불리 먹고도 허기가 지는 것처럼, 쭉 그렇게 지내 왔네.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나의 이 지독한 배고픔이 모두 해결되는 순간을 보고 싶네."
여인!
자네도 그렇지 않나? 깊은 밤 홀로 깨어 나의 몸과 마음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면, 늙고 병든 한 사내가 오들오들 떨며 엎드려 있다네. 세상의 온갖 불행이란 불행이 사내의 두 어깨에 얹혔고, 사내에게는 그 무게를 지탱할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이네.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삶이라고나 할까? 그럴 때 자넨 그 사내에게 무슨 이야길 하겠는가? 어떤 시가 그 사내를 위로할 수 있을까? 그 밤, 나는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네. 세 치 혀가 만들어 내는 넋두리조차 사내에겐 또 다른 짐일 테니까. 다만 나는 사내에게 두꺼운 이불과 따뜻한 국 한 그릇을 내밀고 싶었을 뿐이야. 하룻밤이라도 사내에게, 이 순간 살아 숨쉬는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선물하고 싶었거든. 여인! 우린 그 사내보다도 훨씬 가여운 족속이라네. 배가 고픈데도 허기를 느끼지 못하고 사지가 바들바들 떨리는데도 추위를 염려하지 않는 족속이지. 나는 그들에게, 하여 나 자신에게 삶의 냉혹함을 가르쳐 주고 싶다네. 눈부시게 행복한 순간으로부터 처참한 지난 날을 돌이키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테니까.
"그런 순간이 올까?"
"올 걸세. 점점 그 순간을 향해 가고 있어."
"도대체 자네가 만들고픈 세상은 어떤 건가?"
허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나의 풍경이 떠오르는군. 서당에서 함께 서책을 읽고, 그 서책에 적힌 대로 이 세상이 살아 볼 만한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는 아이들! 동틀 무렵 들판으로 나가 황혼이 찾아들 때까지 땀 흘려 일하는 어른들! 죄수를 가두는 감옥은 텅 비었으되 곡식을 쌓아 두는 곳간은 차고 넘치는 나라! 누구나 창고로 들어가서 원하는 만큼의 곡식을 꺼내 올 수 있으며, 태어난 곳이 북삼도나 전라도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고, 첩의 자식이라고 손가락질당하지 않는 나라! 중국을 섬기지 아니하고 외침을 받기 전에 군법을 철저히 시행하는 나라! 밤에는 들일에 지친 몸을 편히 누이고 휘영청 둥근 달을 바라보거나, 청주 한잔을 곁들인 노랫가락에 시간을 빼앗기는 것도 좋겠지."
"참담한 현재를 견디려는 기만책은 아닌가?"
"기만책이라고? 지평선을 바라보며 한 걸음씩 차근차근 옮기자는 게 어떻게 기만책이겠는가? 이보다 더 나은 삶이 있다면 일러 주게. 자넬 따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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