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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5/11
    야구 심판 일지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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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2/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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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2/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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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 물자체(Thing Itself)

역사소설 <<혁명>> 제2권 내용 중에서 눈에 띄는 대목들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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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사랑에 관한 시가 왜 그리 많을까.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사랑이라고 가두는 순간, 다른 사랑의 풍광들이 메뚜기처럼 달려든다. 모순, 극단의 단어들이 모두 사랑을 설명하며 쏠린다. 가장 따뜻한데 차갑고 가장 부드러운데 날카롭다. 가장 기쁜데 슬프고 가장 은밀한데 또 누구나 안다. 다르게 시작하고 다르게 끝난다. 그러나 또한 되새기면 그 다름에는 비슷함이 어려 있다. 국경도 넘고 종교도 넘고 예의범절도 넘고 생사도 넘는다. 모든 것이 사랑 탓이다. 사랑보다 더 근사한 핑계는 없다.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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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동자의 대화

역사소설 <<혁명>> 제1권 내용 중 또 한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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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봄에 영주로 왔을 땐 봄비가 닷새 동안 연이어 내렸다. 첫날엔 찬바람까지 불어, 밤이 들면서 봄비가 봄눈으로 바뀌었다. 나는 <<맹자>>를 펼쳐 놓고 첫머리를 읽는 둥 마는 둥 했다. 아이 둘이 마루에 붙어 앉아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바라보았다. 통통한 녀석은 앞으로 시중을 들 동자였고, 또 한 녀석은 동자의 종갑내기 사촌이었다. 둘은 한동네 친구로 실과 바늘처럼 붙어 다녔다. 내 이사를 도우려는 동자가 혹처럼 사촌을 달고 온 것이다. 이삿짐이라고 해야 지게 한 짐이 고작이었고 비까지 내려 두 녀석은 할 일이 없었다. 대낮부터 나란히 앉아 낄낄대다가 졸고 또 히죽거리던 녀석들이 티격태격 싸우기 시작했다. 내 눈은 서책에 머물렀으나 내 귀는 재잘대는 말다툼에 쏠렸다. 동자가 어깨에 날아와 앉은 눈송이를 손등으로 털며 물었다.

 

"비가 눈이 되는 게 힘들까, 눈이 비가 되는 게 힘들까?"

 

"눈이 비가 되는 게 백배는 힘들지, 당연히!"

 

두 달 먼저 태어난 사촌이 아는 체했다. 세상에서 그가 답하지 못하는 문제는 없다.

 

"왜"

 

"넌 달리다가 걷는 게 힘들어, 거다가 달리는 게 힘들어?"

 

"걷다가 달리는 거."

 

"눈은 천천히 내리잖아? 그러다가 녹아서 비가 되면 주루룩 빨리 떨어지니까 무척 힘들지. 비로 떨어지다가 눈으로 바뀌는 건, 느려지니까 하나도 힘들지 않아."

 

동자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도 비가 눈으로 바뀔 때가 더 힘들지 않을까?" 

 

"억지 부리지 마. 가을에 이르면 잎이 떨어지고 봄이 오면 얼음이 사라지는 것과 똑같아." 

 

"비는 땅이 가까워지면 어디로 떨어질지 대충 알아. 지붕이면 지붕, 마당이면 마당! 하지만 눈은 흩날려. 지붕으로 내려오다가 실바람에 밀려 우물에 빠지고, 밭에 거의 닿았다가 강풍에 쓸려 언덕을 넘지. 회오리바람이라도 만나면 다시 하늘로 올라갈 때도 있어. 비일 때는 전혀 몰랐던 움직임이야.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를 다 받아들여야 하니 얼마나 힘들겠어?"

 

사촌은 턱을 들어 하늘을 살폈다. 어둠이 찾아들자 허공의 눈들도 차츰 희미해져 갔다. 나는 서책을 펼쳐 놓았으나 등잔을 밝히진 않았다. 지금은 두 녀석의 대화가 내겐 서책이었다. 이윽고 사촌이 답했다.

 

"눈이 비보다 떨어질 곳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말은 맞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내 생각엔 더욱더 눈이 비로 바뀔 때가 힘들겠어."

 

"왜?"

 

"떨어질 곳을 마지막까지도 모른 채 자유롭게 눈으로 떠돌다가, 갑자기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앞으로도 뒤로도 못 가고 오직 애래로만, 딱 한곳으로만 떨어지는 비를 상상해 봐. 얼마나 갑갑할까? 계속 비로만 내리던 녀석이랑 눈에서 비로 바뀐 녀석이랑 무척 다를 거야. 안 그래?"

 

동자가 잠시 생각한 후 사촌의 생각을 받아들였다.

 

"맞아. 눈에서 비로 내리는 게 비에서 눈으로 내리는 것보다 훨씬 힘들겠네. 근데 나 배고파, 형!"

 

동자는 배가 고플 때만 사촌을 형이라고 불렀다. 사촌을 따라 저녁을 얻어먹으러 갔다. 비에서 눈으로 바뀐 오늘의 화두는 계속 내리고 있었으나 어둠이 짙어 보이지 않았다. 등불 없이 화두를 붙든 채 화두 곁에서 영주의 첫밤을 보냈다. 내 인생은 눈에서 비로 내릴까, 비에서 눈으로 내릴까.

 

(242~245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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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宰)

역사소설 <<혁명>> 제1권에 나오는 또 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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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宰)란 무엇인가. 재제(宰制)함이다. 백관의 상이한 직책과 만민의 상이한 직업을 두루 관장하며 공평하게 처결하는 것이다. 상(相)이란 무엇인가. 보상(輔相)함이다. 왕의 명령을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명령에는 순종하고 추한 명령은 바로잡는다. 옳은 일은 하고 그른 일은 막는다. 이를 통해 왕을 대중(大中)에 들게 만드는 것이다.

 

송나라의 대학자로 <<대학연의>>를 지은 진덕수가 강조하지 않았던가. 재상은 자신을 바르게 한 다음 왕을 바르게 하며, 인재를 뽑고 업무를 훌륭하게 처결해야 한다.

 

신하가 명군(明君)을 만나는 것도 어렵지만 왕이 양신(良臣)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 대장군은 패자(覇者) 시대의 왕들처럼, 충분히 보상(輔相)의 의미를 이해하고 전권을 재상에게 맡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옳다고 여러 번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방원은 권세가 왕에게 집중되지 않는 나라는 혼란에 빠져 사라지고 만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재상의 훌륭함과는 상관없이 하늘엔 두 개의 해가 빛날 수 없다는 논리다.

 

왕도 사람이다. 어진 이도 있고 각박한 이도 있으며 똑똑한 이도 있고 멍청한 이도 있으며 유악한 이도 있고 강건한 이도 있다. 왕이 전권을 휘두른다면 혼군(昏君) 혹은 폭군(暴君)의 도래는 시간 문제다. 왕은 신하를 두려워해야 하고 신하는 백성을 두려워해야 한다. 두려움은 힘에서 나오고 그 힘은 법과 제도를 통해 뒷받침된다. 내 구상의 핵심은 왕을 예외로 두지 않는 것이다. 왕은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이지만 전체를 뒤바꾸지는 못하는 체계 속 일원이다. 이렇게 짜 둬야 왕이 설령 삼강과 오륜을 무시하더라도 체계 속에서 고쳐 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재상은 백관과 만민뿐만 아니라 왕의 삶 전체를 세세히 살피고 알아야 한다. 왕의 패악함과 우유부단함이 구중궁궐 바깥까지 알려지기 전에 단속하고 고치고 바꿔야 하는 것이다. 빈첩(嬪妾)은 물론이고 내시나 궁녀, 수레와 말 그리고 의복과 음식까지 재상은 하나하나 챙겨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도록 조처해야 한다. 재상은 왕의 부끄러운 비밀조차도 알아야 한다.

 

재상은 어떻게 왕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지식을 자랑해서도 아니 되고 말재주를 뽐내서도 아니 된다. 재상의 진심을 헤아리고 그 정성에 감동할 때에만 왕은 스스로를 돌아볼 것이다.

 

재상에게 너무 많은 권세가 얹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 나올 법도 하다. 누군가가 권세를 쥐어야 한다면, 그것은 정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천지만물의 움직임과 국방의 엄중함에 무관심한 왕이 아니라 풍부한 지식과 탁월한 식견을 지닌 재상이다. 권세만큼 업무도 막중하니 재상은 단 한순간도 사사로움을 추구할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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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無知)와 이심전심(以心傳心)

역사소설 <<혁명>> 제1권 중에서 눈에 띄는 대목이 서너 개 있는데, 그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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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립문 밖에서부터 누렁이 한 마리가 쫓아왔다. 송아지만 하다. 돌아보면 무심한 척 딴청을 부렸지만, 이 길에 저와 나 둘뿐이니 바라는 것도 없이 따르진 않으리라. 내가 더디 걸으면 저도 더디 걸었고 내가 바삐 걸으면 저도 네 다리를 분주히 놀렸다. 멈추면 멈췄다. 50보보다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았고 100보보다 멀리 떨어지지도 않았다.

 

마을에서 멀어질수록 녀석이 혹시 내 엉덩이 살점이라도 물어뜯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완만한 언덕을 올랐다. 언덕바지에서 돌멩이를 하나 집어 들었다. 녀석을 눈을 끔뻑거리며 던질 테면 던져 보란 식으로 길 가운데 서 있있다. 졸졸 따라왔다는 이유만으로 개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지나치다. 녀석이 사람이라고 해도 돌팔매질을 할 것인가. 돌멩이를 내려놓고 언덕을 넘었다.

 

불그스름하던 기운이 점점 검어졌다. 산책을 접고 돌아갈까. 흘끔흘끔 고개를 돌려 누렁이를 곁눈질했다. 어둠에 젖은 누렁이는 황소보다도 크고 늑대보다도 사나워 보였다. 누런 빛깔에 담긴 착함, 둔함, 게으름은 사라졌다. 내리막길의 끝에서 누렁이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녀석이 뛰면 나도 달리리라 결심했지만 호랑이를 만난 하룻강아지처럼 꼼짝달싹 못했다. 타닥타닥 흙을 차는 경쾌한 소리가 가까워졌고 밀려드는 후회도 그만큼 커졌다. 다섯 걸음 앞에서 누렁이는 뒷발을 밀며 뛰어올랐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

 

누렁이는 내 어깨를 훌쩍 뛰어넘더니 도깨비처럼 나타난 동자에게 안겼다. 긴 혀로 동자의 뺨을 핥으며 꼬리를 흔들어 댔다. 비슷한 또래 아이가 둘 더 있었다. 바지를 무릎까지 접고 웃옷은 아예 벗어 어깨에 돌돌 말아 걸쳤다. 물놀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누렁이가 여기까지 마중을 나왔단 말인가.

 

"네 녀석이 키우는 개냐?"

 

동자가 누렁이의 머리를 저만치 밀치며 답했다.

 

"아닙니다. 동네를 떠도는 놈이에요."

 

누렁이가 거머리처럼 동자에게 들러붙었다. 침이 뚝뚝 동자의 벗은 목덜미에 떨어졌다. 다른 두 아이도 누렁이의 뒷다리와 꼬리를 붙잡고 흔들며 즐거워했다. 누가 개고 누가 사람인지 구분하기 힘들 만큼 뒤엉켜 놀았다. 50보 이상 거리를 두고 나를 따르던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주인도 아닌 너를 어찌 이렇듯 반기느냐?"

 

"찬 밥 반 덩이를 네댓 번 줬습니다요. 이래 봬도 기억력이 비상합니다. 한 번 거둬 준 사람에겐 꼬리를 치며 반깁지요. 나린 이 녀석에게 아무 것도 준 게 없나 봅니다요."

 

"무작정 쫓아만 오니, 왜 그런지 따질 틈도 없었고...."

 

변명 아닌 변명이 동자들의 비웃음에 묻혔다.

 

"무슨 일이든 꼭 그렇게 따져 봐야 압니까? 척 보면 불쌍하지 않습니까? 쫓아오는 이율 알았네 몰랐네 따질 일이 아닙지요. 누렁이는 걸음걸음 도움을 청했지만 나리가 듣질 않으신 겁니다."

 

"도움을 청했다고? 하면 너는 척 보고 알아차렸단 말이냐?"

 

"그럼요. 배를 곯아 본 이라면 어찌 모르겠어요. 똑같은 눈길로 날 쳐다보는데. 나린 간절히 도움을 청한 적이 없나 봅니다. 녀석의 눈에서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하셨다니. 오늘은 나리가 참 불쌍해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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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無常)의 상(常)

이번에는 조선 건국 과정을 그리는 역사소설 <<혁명>>(김탁환 지음,  민음사, 2014) 중 제1권에서 나온 내용 중에서 발췌했다(3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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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들이 바람벽으로 윙윙거린다. 천 길의 부끄러움, 만 길의 후회. 벼랑을 등지고 처절하게 싸우다가 떨어져 흔적 없길 바랐건만, 잡념 더미에 눌려 숨통이 막히는 것보다 한심한 최후가 또 있을까. 마주 잡았던 손을 토막토막 자르고 혀를 뽑고 눈을 파내는 이 초옥(草屋)에선 입은 옷도 옷이 아니요, 먹은 밥도 밥이 아니다. 망상이다.

 

불안을 달래는 나만의 처방은 간단하다. 물비린내 나는 문장을 골라 입에 털어 넣고 술안주로 씹기. 지금 가장 멀리 갔다가 가까이 다가온 녀석은 요놈이다. 인(仁)은 인(人)이다. 그 둘을 합하여 말하면 도(道)다.

 

도(道)! 그 길을 떡하니 막는 것도 문이요, 확 하니 여는 것도 문이다. 만남의 가(歌)와 이별의 곡(曲)이 문고리를 흔들고 이마를 비벼 대듯 잦다. 쓸데없다. 출렁이는 연(緣)을 미리 에둘러 피하고 건너뛰고 때론 부수며 여기까지 달려오지 않았는가. 지워지지 않는, 심장으로 뛰는, 뜻을 펴기에 합당하지 않은 날이면 되짚는 문들이 있긴 하다. 정말 문(門)은 문(問)으로 통할까! 누구나 외로움 밴 물음을 몇 개쯤은 품고 산다. 그러나 대부분은 모른다, 정녕 외로움에 풍덩 빠질 때란 스스로 답할 수밖에 없는데도 물음을 던지는 순간임을. 답을 해도 달라지는 것이 쥐뿔도 없는,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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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과 현실 그리고 인간...

지금은 <<압록강>>(김탁환 지음, 열음사, 2000)이라는 역사소설을 읽고 있다. 이 소설은 광해와 인조반정 사이의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그 중 또 눈에 띄는 대목들을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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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께서 바라시는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야승은 임경업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되받아쳤다.

무위이치(無爲而治)가 이루어지는 나라라네. 그 나라는 작고 백성은 많지 않아야만 하네. 온갖 기물이 있어도 쓰지 않게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삶을 아끼고 멀리 떠돌지 않게 해야 하네.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타는 일이 없으며 갑옷과 무기가 있어도 사용할 일이 없지. 백성들이 그 안에서 맛있게 먹고 멋있게 입고 편안하고 즐겁게 살도록 하는 걸세. 그런 나라라면 살 만하지 않겠는가?

스승님은 그런 나라가 정말 있다고 믿으십니까? 그건 노자가 만들어낸 헛된 공상이 아닐까요? 저는 제가 발 딛고 있는 이곳에 세울 수 있는 나라를 원합니다.

야승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허면 자네가 원하는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일찍이 <<예기>>에 적힌 대동사회는 어떻습니까? '대도가 행해지면 천하가 공평해진다. 똑똑한 사람을 뽑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며 신의를 논하고 화목을 닦게 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제 부모만을 부모로 대접하지 않고 제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아 늙은이는 여생을 마칠 수 있고 장년들은 일할 수 있고 어린이는 길러지며 과부, 홀아비, 병든 자들은 부양받게 된다. 남자는 짝이, 여자는 시집갈 곳이 마련된다. 재물이 땅에 버려지는 것을 그대로 두지 않지만 꼭 자기 것으로 하지도 않는다. 놀고 먹는 것을 싫어하지만 꼭 자기를 위해 일하는 것만은 아니다. 남을 해치려는 꾀가 날 리 없고 도적도 생기지 않는다. 그러니 바깥문을 닫을 필요가 없다. 이러한 세상을 대동이라 한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네. 자네는 <<태평경>>을 헛읽었구만. 아무리 공맹을 좇아서 훌륭한 일을 해도 그 사람의 몸을 평안하게 하고 또 만물을 변화시켜 제 역할을 하도록 만들지 못하면 소용없다네. 자네가 말한 대동사회에서도 여전히 자네의 몸은 불편하고 만물은 제 역할을 못할 걸세.

다시 한번 가르침을 주십시오. 스승님이 원하시는 나라는 구체적으로 어떤 나라입니까?

순임금의 후손이 사는 질민국을 아는가? 그곳에서는 길쌈이나 베를 짜지 않아도 옷을 입을 수 있고 파종이나 추수를 하지 않아도 밥을 먹을 수 있다네. 그 나라에는 춤추는 새가 있으니, 난새는 절로 노래부르고 봉새는 절로 춤을 춘다네. 온갖 짐승이 무리 지어 살며 온갖 곡식이 쌓여 있는 나라라네.

참으로 어렵고 모호합니다.

어렵지도 않고 모호하지도 않다네. 자네가 너무 서두르니 저 높고 우뚝한 산을 오르는 것이 그렇게 느껴질 뿐이야.

(<<압록강>> 2권, 173~4쪽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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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종류의 인간을 알지. 칼날 같고 바위 같고 폭포 같은 인간.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 인간. 돈과 재물과 이름보다 자기 자신의 완성에만 관심이 있는 인간.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인간. 타인에겐 한없이 관대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항상 외줄 위에 올리는 인간. 허위나 가식을 싫어하고 가슴과 가슴으로 만나 술 마시고 어깨동무하고 노래 부르기를 즐기는 인간. 바르게 사는 만큼이나 멋지게 죽는 법도 고민하는 인간. 그러면서도 호기심이 많아 낯선 인간과 상황 속으로 흔쾌히 뛰어들어 다치고 상처받고 또 무엇인가를 깨닫는 인간.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고쳐나가며, 어제의 나보다도 오늘의 나가 더 크고 오늘의 나보다도 내일의 나가 더 크리라고 믿는 인간. 모순을 지양하면서도 모순에 들면 그 모순을 섣불리 부정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인간. 지금은 비록 허점투성이지만 하루가 다르게 부쩍부쩍 자라는 인간.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백두보다도 높고 동해보다도 깊은 인간. 천하를 품을 인간.

(<<압록강>> 2권, 249쪽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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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병상련...

요즘 역사소설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제까지 읽은 것은 [허균, 최후의 19일](김탁환, 민음사)이다.

소설 내용 중에서 눈에 들어오는 대목들이 있어서 남겨본다.

 

- 허균이 호가 '여인'인 친구 이재영과의 독백 같은 이야기.

<<(여인) "백성들을 위해서 세상을 바꾸겠다고?"

(허균) "...... 꼭 그것만은 아니지. 자넨 가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나? 나는 있다. 그러나 나는 나를 갖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배고픔과도 같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걸세. 젊었을 때에는 세상에 반대하는 것으로 희망의 근거를 찾았지만, 이제는 누구를 반대하거나 누구를 도와주기 위해서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니라네. 나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싶어서라면 이해하겠나? 서른을 넘기면서부터, 배불리 먹고도 허기가 지는 것처럼. 쭉 그렇게 지내 왔네.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나의 이 지독한 배고픔이 모두 해결되는 순간을 보고 싶네."

여인!

자네도 그렇지 않나? 깊은 밤 홀로 깨어 나의 몸과 마음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면, 늙고 병든 사내가 오들오들 떨며 엎드려 있다네. 세상의 온갖 불행이란 불행이 사내의 두 어깨에 얹혔고, 사내에게는 그 무게를 지탱할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이네.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삶이라고나 할까? 그럴 때 자넨 그 사내에게 무슨 이야길 하겠는가? 어떤 시가 그 사내를 위로할 수 있을까? 그 밤, 나는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네. 세 치 혀가 만들어 내는 넋두리조차 사내에겐 또 다른 짐일 테니까. 다만 나는 사내에게 두꺼운 이불과 따뜻한 국 한 그릇을 내밀고 싶었을 뿐이야. 하룻밤이라도 사내에게, 이 순간 살아 숨쉬는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선물하고 싶었거든. 여인! 우린 그 사내보다도 훨씬 가여운 족속이라네. 배가 고픈데도 허기를 느끼지 못하고 사지가 바들바들 떨리는데도 추위를 염려하지 않는 족속이지. 나는 그들에게, 하여 나 자신에게 삶의 냉혹함을 가르쳐 주고 싶다네. 눈부시게 행복한 순간으로부터 처참한 지난날을 돌이키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테니까.>>

"그런 순간이 올까?"

"올 걸세. 점점 그 순간을 향해 가고 있어."

"도대체 자네가 만들고픈 세상은 어떤 건가?"

허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나의 풍경이 떠오르는군. 서당에서 함께 서책을 읽고, 그 서책에 적힌 대로 이 세상이 살아 볼 만한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는 아이들! 동틀 무렵 들판으로 나가 황혼이 찾아들 때까지 땀 흘려 일하는 어른들! 죄수를 가두는 감옥은 텅 비었으되 곡식을 쌓아 두는 곳간은 차고 넘치는 나라! 누구나 창고로 들어가서 원하는 만큼의 곡식을 꺼내 올 수 있으며, 태어난 곳이 북삼도나 전라도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고, 첩의 자식이라고 손가락질당하지 않는 나라! 중국을 섬기지 아니하고 외침을 받기 전에 군법을 철저히 시행하는 나라! 밤에는 들일에 지친 몸을 편리 누이고 휘영청 둥근 달을 바라보거나, 청주 한잔을 곁들인 노래가락에 시간을 빼앗기는 것도 좋겠지."

"참담한 현재를 견디려는 기만책은 아닌가?"

"기만책이라고? 지평선을 바라보며 한 걸음씩 차근차근 옮기자는 게 어떻게 기만책이겠는가? 이보다 더 나은 삶이 있다면 알려 주게. 자넬 따를 테니."

이재영은 허균의 확고한 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의 가슴 한 켠도 천천히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  [천하에 두려워할 바는 오직 백성뿐이다. 백성은 물, 불, 범, 표범보다 두렵기는 더 한데, 위에 있는 자가 한창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림은 무엇인가. 대저 이룩된 것만 함께 즐거워하면서, 항상 보는 것에 얽매이고, 그냥 따라서 법을 받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자는 항민(恒民)이다. 항민은 두렵지 않다. 모질게 빼앗겨서 살이 벗겨지고, 뼛골이 뽑혀지며, 집에 들어온 것과 당에서 나온 것을 다 내어서 한없는 요구에 제공하면서(응하면서), 시름하고 탄식하며 윗사람을 탓하는 자는 원민(怨民)이다. 그러나 원민은 반드시 두렵지 않다. 자취를 고깃간에 숨기고 남 모르게 딴마음을 쌓아서, 천지간을 곁눈질하다가 혹시 그때에 사고라도 있으면 그 소원을 부리고자 하는 자는 호민(豪民)이다. 대저 호민은 크게 두렵다. 호민은 나라의 사단을 엿보다가 탈 만한 사시(事機)를 노려서, 팔을 떨치며 밭두렁 위에서 한 번 호창(呼唱)하면 저 원민들이 소리만 듣고도 모이며, 모의하지 않아도 외치는 것은 같아진다. 항민들도 또한 살기를 구해서 호미와 고무래, 창자루를 가지고 따라사서 무도한 자를 죽이게 된다.] - 허균, <호민론(豪民論)>

 

- [왕융이 일곱 살 때 일찍이 여러 아이들과 함께 놀다가 길 옆 오얏나무를 보았는데, 열매가 많이 열려 가지가 꺾일 정도였다. 아이들이 다투어 달려가서 그것을 땄지만, 왕융만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왕융이 대답하기를, "나무가 길 옆에 있는데도 열매가 많이 달려 있으니 이는 틀림없이 쓴 오얏일 것입니다"라고 했다. 따서 맛을 보았더니 과연 그러했다.] - 유의경, <<세설신어(世說新語)>>, <아량편(雅量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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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11.

~** 메모 11 **

- “예를 들어 주자학은 천을 초월자로 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태극(공)으로 보지만, 이는 별로 모순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주자학에서 천이라는 개념이 사용되고 있다고 해도, 사실 그것은 태극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서로 변환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천이 인격적으로 표상된다고 해도, 그것은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태극이다. 이리하여 주자학에서 태극에 이르는 길, 즉 수양으로서 ‘명경지수(明鏡止水)’의 경지에 도달하는 일은, 동시에 ‘천명’을 인식하는 일인 것이다. 자기 내부의 ‘이’와 세계의 ‘이’는 이렇게 상호 변환 가능한 관계에 있다.” (같은 책, 242쪽)

- “진사이가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 초월=내재라는 사고이다. 초월=내재라는 것은 결국 내재적인 입장이다. 따라서 그것은 ‘마음’이나 의식에서 출발하게 된다. 사상가들은 진사이나 소라이가 ‘천’의 초월성을 강조했음을 중시하고 있다. 그러나 천의 초월성은 주자학에서도 이야기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초월=내재와 같은 ‘내부’에서 출발하는 일, 또는 ‘마음’으로부터 출발하는 것, 즉 고립된 개인의 ‘의식’에서 출발하는 것을 거절하는 일인 것이다.” (같은 책, 242쪽)

- “진사이가 공자만을 성인으로 본 것은, 공자가 초월적인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흔해빠진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어디에나 있는 인간의 초월성을, 또는 타자의 타자성을 발견했던 것이다. 또 그가 『논어』에서 발견한 것은 ‘심원’한 언어나 초월적인 의미가 아니라 ‘평명(平明)’한 언어의 심원함과 초월성(외재성)인 것이다.” (같은 책 243쪽)

- “하지만 그(진사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마음’을 감각이나 성리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만인에게 공통된 ‘마음’ 따위는 없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해 개개인이 서로 타자라는 것이다.” (같은 책, 244쪽)

- “주자학에서 각 개인은 이른바 초월론적 자기(훗설)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성(性)’이 다양하다고 할 때, 진사이는 그러한 초월론적 자기를 해체하는 것이다. [……] 이와 똑같이 진사이에게 주자학은 타자와의 관계(윤리적 영역)를 지적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비치고 있다. 그것이 아무리 도덕을 과시해도, 본질적으로는 ‘격물치지’, 즉 ‘지에 도달하는’ 일이 과제인 것이다. [……] 그리고 이 동정을 ‘타고난 것’이라고 말할 때, 진사이는 ‘성선설’이나 ‘생득설(生得說)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영역이 지에 의해 기초 부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같은 책 246~247쪽)

- “인간의 본래적인 동일성, 진리나 완전한 해방에 도달할 가능성이라는 이념은, 오히려 타자에 대한 ‘잔인 각박’으로 전화한다. 만인이 동일하므로, 진리에 도달한 자는 진리에 도달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 당연히 절대적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주자학만의 문제는 아니다. 진사이의 숙(塾)에 권력관계가 없는 것은, 진사이가 ‘가르치고-배우는’ 관계를 거부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반대이다. 이 관계 없이 인간의 보편적인 동일성 등이 있을 수 없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사이는 일반적인 타자에게 강의할 수 있는 교의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또 그의 주석에 완결 따위는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같은 책 250~1쪽)

- “그 어떤 언어도, 문화도, 종교도 형식적·구조론적으로 등가라고 보는 견해는 결코 서양 중심주의를 전복시키지 않는다. “이 민족중심주의는 역으로 자기는 반=민족중심주의라고 생각하는, 해방적 진보주의의 민족중심주의인 것이다.”” (같은 책 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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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10.

~** 메모 10 **


- 단독성은 개별성과 구분되는 것이다.
단독성은 어떤 특정한 공동체(경험론적인(즉 동의라는 행위를 통한) 사회계약론에 의해 구성된 일반적인 것)에 속할 수 없는, 이 공동체 내부에 있지만 외부에 있는 것, 즉 물 자체로서의 타자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 개별성은 어떤 특정한 공동체의 부분으로서 속해 있는 것, 또는 속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서의 타자(공동체에 단지 대립한다는 의미의 타자, 즉 공동체에 의해 지양되어야만 하는 타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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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9.

~** 메모 9 **


- “히코하치의 신분은, 역시 다른 조건과 결부되어 있기는 했지만, 눈앞의 봉건적 신분 질서 관계를 명백하게 초과하여 부정하는 곳까지 그를 ‘개(個)’로서 밀어붙였다.” “주어진 신분 질서 안에 매몰되어 있는 한, 거기에서 ‘개’는 나타나지 않는다. ‘개’는 이 질서와의 마찰, 충돌을 통해 나타난다.” (<<유머로서의 유물론>>, 202쪽)

- “나카노 시게하루가 ‘개’를 ‘신분 질서와의 마찰, 충돌’ 안에서 보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쿠라하라 코레히토처럼 ‘개’를 계급 안에 종속시키는 것도 아니며, 히라노 켄처럼 ‘개’를 집단과 마주 세우는 것도 아니다.” (같은 책, 202쪽)

- “요컨대 나카노가 말하는 ‘개’는 집단에 맞서는 ‘개’라든지, 자기의식으로서의 ‘개’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관계를 은폐하는 것일 뿐이다. ‘실재로서의 개’는 물론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갈등·알력·투쟁으로만 존재한다. ‘개’를 내세우는 것은 관계이지 ‘근대적 자기의식’이 아니다.” (같은 책 203쪽)

- “‘개’는 어딘가 일정한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네덜란드에 망명하고 있던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개’이지만, 프랑스에 받아들여진 그것은 이미 ‘근대적 자의식’일 뿐이다. 이러한 ‘차이’를 보지 않는다면, 근대의 비판이나 근대의 초극이라는 공소한 말을 가지고 놀게 된다. 맑스에 대해서도 똑같다. ‘집단과 개’, ‘지식인과 대중’, ‘서양과 일본’ 등의 대립 개념은 끊임없이 변용되는 다수적(多數的)인 여러 관계의 알력과 관계해서만 ‘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숨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사회적인 다수성을 이원적 대립으로 바꾸며, 역사적인 것을 비역사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것’을 내면화하고 소거해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관계를 지워버릴 수 없으며, 그 관계에서 탄생되는 ‘개’를 전혀 지울 수 없다.” (같은 책, 2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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