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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5/03
    2010년 5월 3일.. (2)
    곰탱이
  2. 2010/04/29
    2010년 4월 29일..
    곰탱이
  3. 2010/04/28
    2010년 4월 28일... (2)
    곰탱이
  4. 2010/04/27
    비정규직 교수 문제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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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0/03/29
    냥이를 드디어 살짝 스킨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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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0/03/19
    냥이가 날 보고 드디어 인사를 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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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0/03/16
    [간단메모] 임금 투쟁의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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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0/03/01
    돈성의 에어컨 광고...
    곰탱이
  9. 2010/02/09
    철학자만 철학하는 뎌러운 세상의 철학도의 철학 취향은..ㅋㅋ..
    곰탱이
  10. 2010/02/05
    10년2월5일.. (4)
    곰탱이

메모 8.

 

 

** 경험론에 대한 메모 **

경험론은 앎과 관련하여 항상 외부(객관)로부터의 감각 데이터의 수용을 우선시한다.

이를 정치적으로 볼 때, 개별자들은 항상 자기 외부를 지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즉 자신의 외부로부터의 외적인 욕망에 지배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계약을 맺을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때 개별자는 계약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이러한 경험론의 정치철학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결국 부르주아 독재가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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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7.

**** “그것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식인과 대중’이라는 이원적 대립 안에 있다. 그리고 이 대립은 동일성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식인이란 원래 대중이며, 대중으로부터의 소외이자 대중으로 귀착해야 하는 존재 운운하는 원환 속에 들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같은 책, 200쪽)

***** “‘다수’라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개인도 서로 다른 관계에 속해 있으며, 오직 그렇게만 ‘개(個)’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매끄럽고 한결같은 공간이 아니라 여러 관계가 다수의 결절점에서 ‘개’를 낳은 다양체(多樣體)이다.” (같은 책, 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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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6.

* 인간의 자유는 타자의 타자성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는 도덕(모럴)을 뛰어넘는 것이다. 왜냐하면 도덕(모럴)은 타자를 배제하기 때문이다. 이때 도덕(모럴)은 특정한 시·공간의 집단의 도덕(모럴)이다. 이 집단에 대립하여 이 집단을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 개인'이다. '사회성'은 '타자의 타자성'을 지향하며, 따라서 자유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은 '사회적'이며, 자유로운 존재일 수밖에 없으며, 나아가 '예술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 개인은 '물 자체'이다. 또한 '초월론적'이다(단독자로서의 코기토와 마찬가지로).

 

** "모럴이 없다는 것 자체가 모럴이라는 것과 똑같이, 구원이 없다는 것 자체가 구원이다." (<<유머로서의 유물론>>, <나카노 시게하루와 전향>에서, 198-9쪽)

 

*** "이렇게 사용된 '생활자', '서민', '대중', '국민' 등의 개념이야말로, 지식인의 자의식, 즉 자의식 그 자체를 부정하고자 하는 자의식이 낳은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그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맑스가 말하듯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 여러 조건과 여러 전제 안에 존재하는 여러 개인들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자의식 자체를 '떼어놓는' 것이다." (같은 책, 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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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5.

* "사회적 편성과 국가란 항상 특정한 여러 개인의 생활과정이 초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여러 개인이라는 것은, 자기나 타인 안에 등장하는 여러 개인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그대로의 모습, 즉 노동하여 물질적으로 생산하는 여러 개인, 따라서 일정한 물질적인 조건, 또 그들의 생각대로는 되지 않는 여러 제한, 여러 전제, 여러 조건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이는 여러 개인이다." (<<독일 이데올로기>>)

 

** "맑스가 이를 하나의 '환멸'과 함께, 다시 말해 자기의 사념이나 언어가 그 자체로 폐쇄되어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고통스러운 자기 인식과 함께 말하고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자체가 그저 흔한 이론이 되어 버린다. 맑스의 경우, 그것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 그 무엇, 달리 말해 초월할 수 없는 '타자'와의 만남 이외의 것이 아닌 것이다. 이데올로기란, 이를테면 그것을 소거하는 사고이다." (<<유머로서의 유물론>>, <나카노 시게하루와 전향>에서, 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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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니 마르크스(책소개)

 

얼마 전 나의 제자들이 번역한 책이 나왔다.

책 제목은 <레드 예니>이다.

예니 마르크스의 전기이다.

기쁘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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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4.

* "관계의 외면성이란 다른 것과의 관계의 외면성이며, 달리 말해 타자의 타자성이다. 즉 자기 안에 집어넣을 수 없는 타자성이다." (<<유머로서의 유물론>> 중 <라이프니츠 증후군>, 147쪽)

 

** "우리는 '차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 차이에 대해 말하고자 할 때, 우리는 대립의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유머로서의 유물론>> 중 <나카노 시게하루와 전향>, 173쪽)

 

*** 무엇인가 대중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항상 이원론적인 대립구조를 정식화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중은 늘 선-악의 이분법적 구도에 길들여져 있는 존재이며, 선은 권력이고 악은 비권력임을 이 구조 속에서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 "확실히 나카노는 '알기 어렵다.' 그것은 언제나 중요한 것이 '느낌'으로 파악되고, 그 느낌에서부터 이야기되기 때문이다. 히라노 켄은 그것을 '정치와 문학'뿐 아니라, '조직과 개인', '예술과 실생활', '표현자와 실천자'라는 식으로 정식화했다. 이는 알기 쉽다. 이 이원적 도식 안에서 나카노는 아주 애매하게 보인다. 히라노는 나카노를 파악하고자 필사적으로 시도했으나, 결국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나카노의 저항은 이 이원적 대립 그 자체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머로서의 유물론>> 중 <나카노 시게하루와 전향>, 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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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3

* 커뮤니케이션은 동시대의, 그리고 어떤 특정한 공동체 내에서의 성원들 속에서 '동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동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같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대화'는 '자기 독백'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공동체 구성원들은 '하나'의 '동일한' 공동체의 '외화태'(소외형태)이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은 반드시 동시대의, 특정한 동일한 공동체 외부에 존재하는 타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타자에 의해 '동일한 공동체'의 단순한 외화태(소외형태)를 벗어날 수 있는 '자유'가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커뮤니케이션은 '자유로운 개인'들 사이의 소통이며, 이를 추구하는 실천적 활동(Praxis)이 바로 '코뮤니즘'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커뮤니케이션은 '동의'를 넘어선 '초월론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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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2

노동의 가치는 아담 스미스의 고전경제학처럼 본래부터, 즉 선험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사후적으로, '동의'에 의해 결정된 '공통적인 것' 또는 '일반적인 것'이며,

이 '동의'된 것이 국가와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것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자본'에서이다.

이렇게 해서 '자본의 물신성'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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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1

맑스의 생산력의 증대는 '초월론적인 태도 없이는 불가능하다.

맑스에게서 생산은 곧 '인간 자신의 생산'인데,

다시 말하자면 초월론적 주체로서의 '코기토'의 생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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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천명..

50의 나이대를 <지천명>이라고 한다.

한자 풀이로는 하늘의 뜻을 안다는 것이리라..

그런데 하늘의 뜻이 무엇일까?!

글쎄..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이제 죽을 때가 다 돼가니 죽을 준비를 하라는 것이 아닐까?..

죽는다.. 죽을 준비라..

물론 생물학적 죽음일 수도 있겠고..

그리고 그 죽음을 준비하라는 말일 수도 있겠고..

죽음을 맞이하는 현명한 지혜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겠지...

조용히.. 혁명처럼 조용히 맞이하는 지혜..

^^

왜 죽느냐고 묻거든, 그냥 웃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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