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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5/11
    야구 심판 일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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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1/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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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구 심판 일지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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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1/03/07
    야구 심핀 일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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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1/03/02
    24장. 전통의 단절(18세기 말과 19세기 초 : 영국, 미국 및 프랑스)
    곰탱이

야구 심판 일지 39.

# 2012. 3. 16. 금요일 #

 

- 구의구장(총1게임 : 18:45~21:05, 대학동아리 게임)

  * 제1경기 (18:45~21:05) ( 루심: 본인)

 

- 경기 전부터 비가 오는 바람에 경기 운영이 좀 힘들었음.

- 별 특이사항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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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심판 일지 38.

# 2012. 3. 11. 일요일 #

 

- 광암 저수장 구장(총5게임 : 08:00~17:50, 1심경기)

(날씨 가끔 구름, 매서운 바람)

* 제1경기 (08:00~09:50)

* 제2경기 (10:00~11:50) (본인 1심)

* 제3경기 (12:00~13:50) (본인 1심)

* 제4경기 (14:00~15:50)

* 제5경기 (16:00~17:50) (주심: 본인)

 

- 1사 주자 1,2루 때 인필드 플라이 상황이 나왔다. 그런데 유격수가 인필드 플라이 공을 떨어뜨렸고, 1루 주자는 2루로 달려갔고, 2루 주자는 쨉싸게 3루로 달려갔다. 이때 유격수가 2루수에게 송구를 하였지만, 2루수가 미처 1루 주자를 태그하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어필이 들어왔다. 인필드 플라이 상황일 경우 타자주자는 자동으로 아웃되고, 2루로 갔던 1루 주자는 1루로, 3루로 갔던 2루 주자는 2루로 귀루시켜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어필이다. 인필드 플라이 상황에서 내야수가 공을 놓쳤을 경우 주자는 아웃될 위험을 무릅쓰고 다음 루로 진루할 수 있다. ([야구 규칙서] 2.40(인필드 플라이, Infield Fly) 참조)

** 야구 규칙 2.40 인필드 플라이

무사 또는 1사에 주자 1, 2루 또는 만루일 때, 타자가 친 것이 플라이 볼(직선 타구 또는 번트한 것이 떠올라 플라이 볼이 된 것은 제외)이 되어 내야수가 평범한 수비로 포구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투수, 포수는 물론 내야에 자리 잡은 외야수는 이 규칙의 취지에 따라 모두 내야수로 간주한다.

인필드 플라이가 선고되더라도 볼 인 플레이이다. 따라서 주자는 플라이 볼이 잡힐 위험을 무릅쓰고 진루할 수 있고, 보통의 플라이 볼과 마찬가지로 리터치한 후 다음 베이스를 향해 뛸 수도 있다.

 

- 1아웃 만루 상황 때 타자가 제3스트라이크 스윙을 하고 포수가 이를 잡지 못하였을 경우 타자 아웃 선언을 해야 하는데 제대로 하지 못했다. 1루에 주자가 비거나 2아웃일 경우에만 낫아웃(not out)이 적용되는데, 이를 잠시 깜빡했다.

- 유격수 쪽으로 직선 타구가 땅에 깔려 가는 것을 유격수가 잡았을 때 원바운드 캣치인지, 노바운드 캣치인지 가늠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왜냐하면 정면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때는 측면에서 보는 루심에게 판정을 의뢰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측면으로 보았을 때 원바운드인지 노바운드인지 훨씬 더 정확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구심(또는 루심)이 상황을 가장 잘 파악하고 판정을 내릴 수 있는 위치는 홈플레이트 앞이거나 홈플레이트에서 1루 쪽으로 약간 치우진 쪽에서 봐야 하는데, 가끔씩 3루 쪽으로 치우친 위치에서 판정을 하는 때가 있다. 3루 쪽 위치는 홈에서의 태그 상황을 잘 볼 수 없는 위치이다.

- 볼 카운트를 1번 깜빡 잘못 세었다. 정말 고쳐야 할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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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심판 일지 37.

# 2012. 3. 10. 토요일 #

 

- 배재고2구장(총5게임 : 07:30~17:30, 1심경기) (날씨 가끔 구름)

* 제1경기 (07:30~09:20)

* 제2경기 (09:30~11:20)

* 제3경기 (11:30~13:20)

* 제4경기 (13:30~15:20) (본인 1심)

* 제5경기 (15:30~17:20)

 

- 배재고1구장(총5게임 : 07:30~17:30) (날씨 가끔 구름)

* 제1경기 (07:30~09:20)

* 제2경기 (09:30~11:20)

* 제3경기 (11:30~13:20) (루심: 본인)

* 제4경기 (13:30~15:20)

* 제5경기 (15:30~17:20) (주심: 본인)

 

- 타자가 타구했을 때 공이 타자의 몸에 맞는 것을 보지 못했다. 타자의 몸에 맞았으면 파울인데, 1루 아웃 처리했다.

- 한 타자가 4번의 스트라이크를 당했을 때, 그 타자는 아웃이고 1개의 스트라이크는 다음 타자로 넘어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타자는 부정위 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정위 타자란 덕아웃이나 대기 타석에서 나온 타자를 말한다. 이런 경우 심판원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부정위 타자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 참고로 타격 순서 착오에 관한 규칙을 적어본다.

 

** 6.07 타격 순서 착오(batting out of turn)

(a) (1) 부정위 타자가 타격을 완료하기 전이면 정위타자(proper batter)는 부정위 타자의 볼카운트를 이어받아 타자석을 넘겨받을 수 있다.

 

- 볼 카운트를 두 번 정도 잘못 세었다.

- (1심제) 1루 주자가 2루로 도루할 때 아직 2루로 송구한 공이 2루수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2루수가 2루 베이스 바로 앞에 앉아 1루 주자의 2루 베이스 터치를 방해했다는, 그래서 주루방해라는 어필이 들어왔다. 그런데 타자의 스윙 콜을 하면서 2루 도루 상황을 정확하게 보지 못했다. 1심제의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술적으로 좀 더 보완한다면 좀 더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판정을 내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 구심(또는 주심)을 볼 때, 주자 없는 상황에서 투수가 투구를 하려다가 발을 잘못 디뎌서 투구를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때 무조전적으로 피처 보크를 선언했다. 주자가 없을 때는 피처 보크를 선언하지 말아야 함에도 경기에 집중하지 못해 보크를 선언했다. 망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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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심판 일지 36.

# 2012. 3. 4. 일요일 #

 

- 배재고2구장(총5게임 : 07:30~17:30, 1심경기)(날씨 가끔 비, 바람 많이 불음)

* 제1경기 (07:30~09:20) (본인 1심)

* 제2경기 (09:30~11:20)

* 제3경기 (11:30~13:20)

* 제4경기 (13:30~15:20)

* 제5경기 (15:30~17:20)

 

- 배재고1구장(총5게임 : 07:30~17:30)(날씨 가끔 비, 바람 많이 불음)

* 제1경기 (07:30~09:20)

* 제2경기 (09:30~11:20)

* 제3경기 (11:30~13:20) (루심:본인)

* 제4경기 (13:30~15:20)

* 제5경기 (15:30~17:20) (주심: 본인)

 

- 별 다른 특이사항이 없었다.

- 루심 보면서 주자의 촉루(주자가 루(베이스)를 잘 밟고 지나가는 것)를 좀 더 여유 있게 볼 수 있게 되었으며, 타구가 안타가 될지, 플라이로 잡힐지에 대한 감이 생겼고, 그 이루의 플레이 진행 상황에 대한 감이 생겼다. 그러다보니 심판 포메이션에 대한 이해력도 같이 늘었다. 그로 인해 자신감이 좀 더 생겼다.

- 주심과 관련해서도 주심의 포메이션에 대한 이해와 경기 전반을 좀 더 여유 있게 이끌어갈 줄 알게 되었다.

- 이러한 결과는 2011년 심판학교 전문가 과정을 수료하고 겨울 방학 동안 대학생들 연습 경기 심판을 보면서 나름 동계훈련을 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연습경기 심판을 보게 해 준 학생 여러분께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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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심판 일지 35.

# 2011. 12.10. 토요일 #

 

-  구의구장(총4게임) (날씨 맑고 화창)

* 제1경기(루심: 본인) )

* 제2경기

* 제3경기

* 제4경기(루심: 본인)  

 

- 별 다른 특이사항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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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심판 일지(번외 연습 경기)

이 경기에 관한 내용은 제가 심판을 본 내용이 아니라, 다른 심판 분이 심판 본 것을 모니터링해 본 것입니다. 같이 모여서 심판 포메이션을 공부해보고자 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 2012년 2월 18일 연습 경기 #

 

== 1초 (구심)

1. 파울 스트라이크로 콜.^^

2. 무사 만루일 때 평범한 내야 플라이 때 <인필드 플라이> 콜 안 함.^^

3. 파울 다음에 플레이 콜 안 함.^^

4. 스트라이크 콜 타임 약간 빠름. 그렇지만 콜 소리 원더풀!^^

 

(루심)

1. 무사 만루일 때 평범한 내야 플라이 때 <인필드 플라이> 콜 안 함.^^

 

== 1말 (구심)

1. 주자 3루 때 3루 외야 안타 나왔을 경우 타구 방향 쪽(3루 방향 쪽)으로 약간 움직여서 전체 경기 흐름을 파악해야 하고 3루 주자 홈 촉루 확인해야 함.^^

** 이때 구심 위치는 심판학교에서 나눠 준 [심판교본](이하 [심판교본]) 201쪽 ①, 205쪽 ① 그림 참조.^^

 

(루심)

1. 1사 주자 1루 상황에서 파울이 났을 때, 주자 1루 리터치 안 시킴.^^

2. 1사 주자 1루 상황에서 2루 쪽 땅볼이 났을 때, 투수판 쪽으로 움직이면서도 1루와 2루의 중간 지점으로 이동하면 좋았겠다.^^

** 이때 루심 위치는 [심판교본] 173쪽 ④ 그림 참조.^^

 

== 2초 (구심)

1. 스트라이크 콜 타임, 콜 소리 원더풀!^^

2. 무사 무주자 상황에서 투수 앞 땅볼이 났을 때, 투수 뒤쪽에 위치를 잡으면 타자주자 아웃, 세이프 상황을 잘 볼 수 없게 된다. 이때는 재빨리 파울 지역으로 나와야만 1루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정확하게 볼 수 있다.

** 이때 구심 위치는 [심판교본] 163쪽 ⑤ 그림 참조.^^

3. 무사 주자 1,2루 상황에서 유격수 땅볼이 났을 때, 타구 방향인 유격수 있는 쪽으로 달려 나가는 것이 아니라 3루 방향 쪽으로 약간 움직이면서 전체 경기 흐름을 파악하면서 2루 주자의 3루 촉루를 확인하면서 3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올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 이때 구심 위치는 [심판교본] 201쪽 ①, 205쪽 ① 그림 참조.^^

4. 파울을 자꾸 스트라이크로 콜 함.^^

5. 루심이 인필드 플라이 사인을 했는데도 그 사인에 호응하지 못함.^^

6. 2사 주자 만루 때 안타가 난 상황에서 루심이 보지 못한 2루 주자, 3루 주자의 촉루를 보지 않고 배트를 치움(그 배트는 홈으로 들어오는 주자가 치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됨).^^

 

(루심)

1. 투수의 투구 동작 자세히 안 봄(피처보크라도 나오면 큰일 남).^^ 그리고 자꾸 포수 쪽을 바라보고 있음.^^

2. 무사 주자 만루 때 타자주자 1루 촉루 보지 않음.^^

 

== 2말 (구심)

1. 1사 무주자인 상황에서 중견수 쪽 안타가 나왔는데, 루심이 내야 안쪽으로 들어왔을 경우 타구 방향과 플레이 전체 상황을 잘 보기 위해서 투수판과 3루 사이까지 뛰어나와야 한다.^^

** 이때 구심 위치는 [심판교본] 161쪽 ② 그림 참조.^^

2. 2사 무주자인 상황에서 좌익수 플라이 아웃 때 아웃 시그널을 안 함.^^

3. 시간이 지나면서 겟셑 자세가 아주 자연스럽고 좋아짐.^^

4. 타자 몸에 맞은 파울 타구 때, 확실하게 파울 콜 해주어야 함.^^

5. 루심이 촉루를 못 보면 구심이 전체 촉루를 봐 주어야 하는데 3루 촉루만 봄.^^

6. 주자 1루 상황에서 우익수 쪽 안타가 나왔을 때 타구를 쫓아서 내야 쪽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본래 구심이 있던 자리에서 3루 쪽으로 비스듬히 3~4미터 나와서 주자와 타자주자의 촉루를 보면서 전체 경기 흐름을 파악해야 함. 그리고 1루 주자가 3루로 갈 경우 3루 쪽에 가서 아웃, 세이프 판정 준비를 해야 함. 혹시 1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는 것도 대비해야 함.^^

** 이때 구심 위치는 [심판교본] 201쪽 ① 그림. 171쪽 ② 그림 참조.^^

 

(루심)

1. 1사 1,2루 상황에서 좌익수와 중견수 사이의 안타가 났을 때, 1루 주자, 타자주자의 촉루를 확인하지 않고 타구만 바라보고 있음.^^

2. 2사 만루 상황에서 좌익수 쪽 외야 안타가 났을 때, 2루 주자, 1루 주자, 타자주자의 촉루를 안 보고 타구만 바라보고 있음.^^

 

== 3초 (구심)

 

(루심)

2말 (루심) 1.과 동일.^^

 

== 3말 (구심)

1. 무주자인 상황에서 유격수 땅볼이 났을 경우 유격수 쪽 땅볼 타구 방향을 쫒아가는 것이 아니라 1루 쪽으로 중간쯤 가서 타자주자의 1루 촉루를 확인해야 함.^^

** 이때 구심 위치는 [심판교본] 163쪽 ⑤ 그림 참조.^^

2. 2사 주자 1루인 상황에서 2루 쪽 뜬 공을 2루수가 놓쳤을 때, 1루 주자의 2,3루 촉루 확인 안 함.^^

 

(루심)

2말 (루심) 1.과 동일.^^

 

== 4초 (구심)

1. 무사 무주자 상황에서 3루 쪽 땅볼이 나왔을 때, 홈 플레이트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음.^^

** 이때 구심 위치는 [심판교본] 163쪽 ⑤ 그림 참조.^^

 

(루심)

2말 (루심) 1.과 동일.^^

 

== 4말 (구심)

1. 무사 무주자 상황에서 투수 앞 땅볼이 나왔을 때, 그 땅볼을 쫒아가는 것이 아니라 1루 쪽으로 중간쯤 가서 타자주자의 1루 촉루를 확인해야 함.^^

** 이때 구심 위치는 [심판교본] 163쪽 ⑤ 그림 참조.^^

 

(루심)

없음.^^

 

== 5초 (구심)

1. 타자가 피하지 않고 맞은 것은 진루시키지 말아야 함. 이때 공이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경우라면 스트라이크를 선언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볼로 선언해야 함.^^

 

(루심)

없음.

== 5말 (구심)

없음.^^

 

(루심)

없음.^^

 

== 6초 (구심)

1. 4말 1.과 동일.^^

2. 방문 팀에게 상의를 하의 속에 집어넣으라고 권고하지 않음.^^

 

(루심)

1. 방문 팀에게 상의를 하의 속에 집어넣으라고 권고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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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자본주의 가부장제 관계들에 대한 몇 가지 노트 4.

가족 관계들

 

가족은 가족 안팎 모두에서 일어나는 여성의 행위들을 규정하는 일련의 관계들이다. 가족은 개인들을 경제와 관련시키는 관계망들의 한 구조이기 때문에, 가족은 한 사회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인 한 단위이다. 가족은 형성 과정상 역사적인 것이지, 단순히 생물학적 단위가 아니다. 여성의 역할과 마찬가지로, 가족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 가족은 사회의 특수한 관계들, 즉 충족되어야 할 특수한 욕구들을 반영한다.

 

가족을 규정하는 관계들에는 어떠한 것이 있을까? 첫째, 여성은 경제를 위한 노동자들 그리고 사회의 구성원들이 되는 아이들을 재생산하는 존재이다. 또한 여성은 노동 세계와 사회 전체 속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사회화시킨다. 여성은 이러한 아이들을, 그리고 그녀의 남편들을 먹이고, 입히고 돌보는 노동을 한다. 이러한 능력들을 펼치는 과정 속에서, 어머니는 경제의 측면에서 가사 노동자이며 또한 나아가 사회 전체를 양육하는 존재이다.

 

둘째, 여성은 가족에 대한 역할을 고려해 볼 때 소비자이다. 소비는 생산의 다른 측면이다. 여성은 가족이 원하고 경제가 팔아야만 하는 물건들을 산다. 여성은 새로운 옷을 세탁하거나 식사를 준비하는 하는 것과 같은 이러한 상품들을 선호한다. 소비자로서, 여성은 이러한 상품들을 고르고, 준비하고 유지시키는 데 힘을 쏟는다. 여성은 아주 중요하게 경제와 사회에 연결되어 있다. 여성은 경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 즉 소비를 담당하고 있다.

 

모성이 가사노동이라고 부르는 활동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모성은 이러한 활동들로 결코 환원될 수 없다. 모성은 자본 관계들 내에 있는 가사노동보다도 더 복잡한 실재,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떤 계급 실재로도 환원될 수 없는 가부장 제도로 이해되어야 한다. 가사노동과 가정(housewifery)은 모성을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특수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어머니의 초역사적인(pre-existing historical) 의미 (49쪽) 그리고 이 개념이 남성지배와 관련하여 반영하고 있는 모든 것을 연결시킬 수 있도록 주의해야 한다.

 

가족 내의 이러한 관계들은 여성들이 일자리를 구하려 할 때 시장에서 그녀들의 가치를 하락시킨다. 1970년 (미국 남성의 40%에 비해) 고작 미국 여성의 7%만이 1년에 10,000$ 이상을 벌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미국 여성의 93%가 1년에 10,000$ 미만을 벌었다는 것이다. 가정에서 여성의 노동은 가정 밖에서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찾는 데 대한 책임이 있다. 여성은 자신을 가족에 묶어두는 관계들 때문에 자신의 노동력에 대한 임금을 지불 받지 못한다. 여성의 노동은 공짜거나 값싼 것으로 규정된다.

 

우리는 여성이 자신의 노동력 안에서 고립되고(ghettoized) 거기서 그녀들의 노동이 남성 지배의 사회 조직에 저항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볼 수 있었다. 여성을 가장 낮은 단계의 노동력으로 유입시키는 것은 마음대로 사회를 남성이 지배하는 가부장적 위계질서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반영하는 것이다. 남성 지배는 계급 위계를 통해 유지된다. 이러한 불변성은 여성 삶의 모순인 이중 노동(the double day of work)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여성은 노동자이면서 어머니 둘 다이다.

 

첫째로 여성을 어머니로 규정하는 관계들은 무엇인가? 무엇이 가부장적 노동 조직을 규정하는가? 다른 말로, 여성은 왜 여성으로서 억압 받아야 하는가? 그 대답은 종종 여성의 생물학이 여성을 남성으로부터 구별시킨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여성의 재생산 관계가 남성보다는 오히려 여성을 교환 대상으로 규정했다고 할지라도, 남성 지배의 역사 그리고 자본주의와 이 역사의 특수한 관계는 지금 이러한 유일한 특성(여성의 생물학-옮긴이)으로 제한되지 않는 일련의 관계들을 반영하고 있다. 여성을 재생산자로 정의함으로써 나타난 전체 관계들이 있는데, 이러한 정의는 결코 그 관계들의 근원으로 “환원될” 수 없다. 문화적이고도 정치적인 관계 이 두 가지는 성적 관계들의 위계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규정되었고 또한 재규정되었다. 위계질서에 대한 초기 이유는 아마도 꼭 필요로 하는 생물학적 지식의 결여로 나타난 여성의 재생산 능력에 대한 공포일 텐데,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는 여전히 성적 위계질서를 필요로 하는데, 이는 그 관계들이 그 이후로 구조화되었던 방식 때문이었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생물학적 특성을 구별시키는 것이 (50쪽) 여성의 재생산 능력이라고 한다면, 이 능력이 왜 그리고 어떻게 남성지상주의 관계들(이 관계들은 초기 이유보다 훨씬 더 복잡한 불평등 체계로 구성되었다)의 부분으로 사용되었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재생산자로서 여성의 생물학적 자아(self)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이해가 정치적 관계들(이 관계들은 어떠한 경우라도 그러한 이해를 규정한다)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추상화된 의미가 아닌 생산과 재생산의 관계들은 여성이 자신과 사회에 대해 재생산자로서 가지게 되는 관계성(relationship)을 규정한다. 재생산자로서 여성이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나타나는 남성지상주의 보편적 특성이며 따라서 문제의 근원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문제를 부적절하게 정식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동일한 실재(reality,재생산으로 여성을 통제하는 것)를 바라보는 것으로는 재생산을 규정하는 사회관계들을 충분하게 밝혀낼 수 없다. 문제는 재생산 자체가 아니라 바로 재생산을 규정하고 강제하는 관계들이다.

 

가부장제는 성별 노동 분업 그리고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여성의 몸을 재생산의 그릇(vessel)으로 사용하는 데 기초를 두었던 사회를 통해 유지되었다. 여성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선물로 교환되었다. 불평등은 재생산자로서 여성의 지위를 늘 찬양하고/하거나 통제하였던 구조로부터 나타났다. 교환체계가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그 체계가 생산했던 관계들은 가부장제 역사의 구성 부분이 되었고 아직도 (재규정되었지만) 그 구성 부분으로 남아 있다. 여성은 관리되는 존재였지 관리하는 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둘러싼 제도를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환경에 처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집단 사회의 방식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여성은 교환체계를 결정과 목적론적 행동 그리고 통제권으로부터 자신을 배제시켰던 관계 체계로서 경험하였다. 이것은 어느 정도 다른 형태이긴 하지만 자본주의 가부장제적 사회에 존재한다. 여성은 결혼해서 자기의 이름을 상실해 버리고 남편의 일이 필요로 하는 새로운 공동체로 이주해가서 외로움을 느끼며, 또한 사람 만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경제적으로 하위 계층에 있는 대부분의 여성이 노동력 시장에 나온다고 하더라도, 남성이 우선적으로 다루어진다. 남성과 동일하게 다루어지지 않으며 (51쪽) 결혼, 가족 그리고 가정주부라는 이성애적인 형태들에 따라야 하는 레즈비언 그리고 다른 여성들은 심지어 점점 더 고립되며 배척 당한다. 이러한 관계들은 남성에게 우선성이 주어진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관계들은 여성의 삶에 대해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는 특징을 명확하게 나타낸다.

 

사람들이 재생산 관계에 주목하게 될 때, 실제로 초점을 맞추는 것은 모든 기존 사회가 필요로 했고 이용했던 위계질서의 통제와 명령 체계이다. 남성 우월주의로서의 가부장제는 사회의 경제 구성체(organizations)가 변화해도 이러한 질서를 뒷받침했다. 이러한 것은 가부장제적 통제 체계가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체계가 자신의 남성 우월주의 구조를 유지하고 남성 우월주의의 기본적인 영향력이 바뀌지 않고서도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봉건주의로부터 자본주의로의 변화 과정에서도 기본적인 경제 계급 구조와 그 통제 체계는 확실히 변화한다.

 

가부장제가 권력 체계이기 때문에 남성이 가부장제 관계를 구현시켰기 때문에 억압하는 자라는 설명 없이 남자가 억압자라고 말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권력 관계들의 반영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사람들”(things)로서 개별적인 남성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남성의 권력을 구체적인 형태가 아니라 추상적인 형태로 이해하는 것이다.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남자가 가부장제 관계들 밖에서 존재했다면, 그는 속빈 조개(a hollow shell)가 되었을 것이다. 가부장제 역사에서, 그와 권력관계들을 동일시하는 것이 바로 그의 생물학이다. 어떤 이들은 남성의 권력이 신체적인 힘을 통한 개인적 수준에서 나타나는 것이라 말하고 싶겠지만, 나는 이것이 가부장제 체계에서 남성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매우 제한된 의미에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남성이 자신의 권력을 나타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오히려 성적 위계 관계들이다. 남성들은 이 위계 관계들에 기초한 관계와 행위를 내면화시켰다. 남성의 성 권력(sexual power)은 그의 개별적인 존재에만 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가부장제 관계들을 해체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적 위계질서의 구조, 인종적 위계질서의 구조 그리고 특히 성별 노동 분업을 통해 유지되었던 계급적 위계질서의 구조를 해체해야만 한다. 우리가 사회의 권력 관계를 변화시킬 때 남성은 변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의 위계질서의 토대를 가질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가부장제에서 여성에 의해 경험된 가부장제의 어떤 특수한 억압도 사회관계들을 보여준다. 사람으로서(As things) 여성은 완전히 중립적(neutral)이다. 실재를 추상하게 되면, (52쪽) 피임, 임신, 낙태, 아이양육, 또는 여성의 애정 관계들에 대한 본질적으로(innately) 억압적인 어떠한 것도 없게 된다. 그러나, 이 애정 관계 모두는 이 사회에서 여성의 매우 특수한 억압도 나타낸다. 피임 방법들이 이윤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건강을 생각하면서 여성과 남성 모두를 위해 고안된 것이라면, 그리고 낙태가 가부장제적 가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가부장제적 가치를 짊어질 때보다 비용이 더 적게 든다면, 피임과 낙태는 서로 다른 경험들이 되었을 것이다. 여남 모두가 아이 양육이 여성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책임이라는 사실을 믿게 된다면, 어린 시절의 애정 행위가 친밀한 행위라기보다는 오히려 은밀한 행위라고 우리가 믿지 않게 된다면, 아이 양육의 “관계들”은 현저하게 달라졌을 것이다. 여성이 현재 임신을 해서 가부장제의 의료를 받지 않게 된다면, 여성이 이 임신으로 인해 개별적으로 건강을 회복해야 하는(defining private health care) 관계들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여성이 이 임신으로 인해 임금 손실을 당하지 않고 경제적 부담을 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사회주의 페미니즘 사회에서 아이를 낳게 된다면, 출산 행위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가부장제 내에서 가부장제의 경험을 강조하는 것은 사회의 어떤 특수한 계기 속에서도 권력 관계가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회 속에서 삶의 활동이 과정, 즉 권력 관계의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단절된 계기들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과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과정을 이해한다는 것은 과정이 변화할 수 있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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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뉴욕에 가다]를 읽고...

#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하워드 진, 윤길순 옮김, 당대, 2005) #

 

 1. 마르크스는 왜 돌아왔는가?!

“관료주의적인 당국의 실수로 마르크스가” 영국 “런던의 소호가 아니라 뉴욕에 있는 소호로 돌아왔다.”(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1시간뿐이다.) 마르크스는 왜 돌아왔을까? 돌아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을까? 그는 자신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왔다고 했다. 그의 명예는 다음과 같은 선언으로 표현된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20세기 말 소비에트 연방과 동구권 공산주의가 무너졌고, 자본주의가 승리했다. 현실 사회주의는 실패했다. 현실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한다면서 실제로는 경찰국가를 세워서 억압적인 통치 체제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이 사회주의는 스탈린주의로 대변되는 사이비 사회주의이며, 자신이 이론이 왜곡된 사회주의였다. 그런데 붕괴된 현실 사회주의의 이러한 모습에 대해 마르크스의 책임은 없는 것일까? 마르크스는 ‘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는 선언만으로 이러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마르크스는 이에 대해 반성하고 있다.

 

“고백하건대, 나는 자본주의가 용케 살아남는 재간이 있다는 것은 미처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이 병든 체제를 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는 마약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고요. 전쟁이 산업을 계속 유지시키고, 사람들을 애국심에 불타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비참한 상황을 잊게 하리라는 것도.”

 

그러나 마르크스가 반성을 한다고 해서 이런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시 저 하늘나라에 돌아가서도 항상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자본주의를 해체하고 그가 늘 원하던 ‘자유로운 개인의 연합체로서의 공산주의’를 건설해 나가지 않는다면 마르크스는 이러한 책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2. 자본주의의 해체

그렇다면 어떻게 자본주의를 해체할 수 있을까? 현재 우리에게도 뚜렷한 방법이 없듯이 마르크스 역시도 그러한 것 같다. 그는 우리가 떨쳐 일어서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엉덩이 털고 일어나야 합니다. 떨쳐 일어나야 합니다! 여러분 내 말이 너무 래디컬하게 들리세요? 그러나 명심하세요. 래디컬하다는 것은 바로 문제의 뿌리를 파악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뿌리가 바로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위대한 창조주로서의 노동자 계급임을, 현실을 변혁함으로써 역사를 진보시키는 주체임을 자각할 수 있게끔 할 수 있는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그런 가능성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점점 더 현실은 척박해지며, 우리의 생존을 점점 더 자본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다. 비빌 언덕이 하나도 없다. 비빌 언덕이 있어야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일어설 수 있을 텐데, 그 비빌 언덕이 없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바라던 공산주의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그래서 뉴욕에 온 마르크스는 답답하다. 떠날 시간이 다 됐다. 떨쳐 일어서야 한다는 선문답만을 남기고 떠날 수밖에 없다.

전통적으로 노동자 계급은 남성 노동자로 상징되어 왔다. 그런데 자본주의 하에서의 이러한 남성 노동자, 즉 노동자 계급은 정말로 역사 진보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될 수 있다면 어떻게 될 수 있을까? 현재의 자본주의 구조 하에서 여성은 자본과 임금 노동자인 남성 노동자에게 이중적인 착취와 억압을 당하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는 여성--> 노동계급--> 자본이라는 먹이사슬 체제처럼 구성되어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임금은 최소한의 신체적이고 기계적인 생활만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이지만, 자본은 이 노동자가 기계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돌아오길 바라며, 노동자 역시 인간다운 삶을 원하는데, 이렇게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인간 ‘생산’ 노동에 대해서는 단 한 푼의 임금도 지불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의 인간으로서의 자기 생산 내부에는 정치경제학적으로 부불노동(임금으로 지불되지 않은 노동)의 착취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착취를 안고서 노동자 계급은 절대로 역사 진보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여성이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될 때만이 노동자 계급은 역사 진보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시간이 더 주어졌더라면 마르크스가 노동자 계급 생산과정의 정치경제학을 짚고 넘어갔지 않았을까 생각해볼 수 있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부인인 예니의 엄청난 희생과 돌봄에 의해 자신이 생산되었음을, 그리고 예니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었음을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 아이와 함께 런던으로 옮겨와 살았는데, 런던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예니가 또 임신을 했어요. 이따금 나는 예니가 늘 누군가 아파 드러누워 있는 춥고 습기 찬 아파트에서 아이들을 길러야 하는 처지를 내 탓이라고 생각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다 예니는 천연두에 걸렸지요. …… 나는 여러분이 예니를 알았으면 해요. 예니가 나를 위해 한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지요.”

 

노동자 계급이 자신의 생산 과정 내에 내재해 있는 착취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대 자본 투쟁은 여성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할 수 있는 물적 조건 확보를 위한 투쟁이 되어야 한다.

 

3. 프롤레타리아 독재

여성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할 수 있는 물적 조건 확보를 위한 투쟁은 바로 다름 아닌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투쟁은 노동자 계급이 계급을 해체해 가는 투쟁인데, 이는 노동자 자신의 생산 과정 내에 자리잡고 있는 지배-피지배의 계급성을 해체해 나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 계급의 당파성, 보편성은 노동자 계급 자신 속에 감추어진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폭로하고 해체할 때만이 현실화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노동자 계급 내의 가부장적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토대>라고 할 수 있겠고, 자본-노동 사이의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상부구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토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노동-자본 간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 권력을 접수해야 한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은 마르크스의 말대로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공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또한 동시에 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현실적으로 억압적인 국가 권력 또는 1당 독재로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스탈린주의로 대변되는 ‘경찰국가’, ‘공포정치’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분노한다.

 

“이 얼간이들은 공산주의를 뭘로 알지요? 동료 혁명가를 살해하는 암살자가 통치하는 체제가 공산주의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바보 얼간이 같은 놈들!”

“그리고 저들이 공산주의의 목표를 알기나 할까요? 개인의 자유!”

“낡은 부르주아 사회 대신에, 그 사회의 계급과 계급 갈등 대신에, 우리는 각 개인의 발전이 모든 사람의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를 갖게 될 것이다. 알겠어요? 연합체!”

 

이러한 사태를 아마도 아나키즘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바쿠닌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부정하면서 “민중이 옛 질서를 무너뜨리고 바로 자유롭게 살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자유를 잃게 돼”라고 말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예니는 이와 관련하여 마르크스의 생각에 모순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 지적을 통해 마르크스는 반성한다.

 

“바쿠닌의 머리에는 무정부주의라는 쓰레기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낭만적이고 공상적인 어리석은 생각이지요. 나는 바쿠닌을 인터내셔널에서 쫓아내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예니는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왜 혁명가 집단은 여섯만 모이면 항상 누구를 제명하지 못해 안달이냐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론적으로는 여성해방론자이면서 실제로는 여성 문제를 등한시한다고 비난했지요. 그러면서 이러더군요. 당신과 엥겔스는 남녀평등에 관한 글을 쓰면서도 실제로는 남녀평등을 실천하지 않아.”

 

이러한 마르크스의 반성이 반성으로만 끝이 날까, 아니면 현실의 삶 속에서 현실화될 수 있을까?

 

4. 코뮤니즘(공산주의)의 가능성-코뮌의 가능성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코뮤니즘을 완성해 나가는 운동 과정이며, 동시에 코뮤니즘 그 자체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투쟁은 결국 그람시가 말하고 있는 진지전에 다름 아니며, 노동자 계급의 보편성이라는 진지를 확보해 나가는 투쟁이다.

칸트에 비유해서 말하자면, 이러한 투쟁은 인간이 자신의 선의지(이 의지는 인간의 자유의지로서 <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인 입법의 원리에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같은 정언명령으로 나타난다)를 현실화시켜 나가는 투쟁이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그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결국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것이며, 따라서 자유의지가 실현되는 투쟁이라 할 수 있다. 선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은 노동자 자신 내부에 있는 지배-피지배라는 계급성을 해체하는 투쟁이며, 동시에 노동자 계급의 보편성, 즉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인류애의 보편성을 실현하는 투쟁이다.

다른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투쟁은 가타리가 말하는 소수자-되기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수자이며, 따라서 소수자-되기 투쟁은 결국 노동자 계급의 보편성을 실현하는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가타리는 소수자-되기 투쟁의 기초에는 여성-되기 투쟁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노동자 계급은 자신의 생산과정 속에 가부장제에 기초한 여성 억압과 착취의 기제를 가지고 있다. 노동자 계급이 소수자이기 위해서는 이 가부장적 억압의 기제를 해체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노동자 계급의 보편성을 실현할 수 없다.

마르크스는 이제 다시 저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는 이세상에 내려와서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했다. 그는 돌아가면서 그저 박제화된 마르크스이길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실에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실의 마르크스이길 원했을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면서 돌아가지 않았을까?

 

“나는 여성주의-마르크스주의자이다!”

 

이것이 현실화될 때 그는 진실로 그가 사랑하는 예니의 동반자가 될 것이며, 그의 반성은 반성으로만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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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자본주의 가부장제 관계들에 대한 몇 가지 노트 3.

사회의 권력관계에 대한 초기 노트들

 

여성이 자본주의 가부장제 속에서 어떻게 그리고 왜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가 하는 물음으로부터 시작하자. 우리는 이러한 물음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여성의 억압을 위해서는 우리사회에 현존하는 권력 구조를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권력 구조는 자본주의 계급 구조이며, 가부장제 내에서의 남자와 여자 세계의 위계질서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수한 형태로 일어나고 있지만 전(前)자본주의 사회의 노예제에 뿌리를 두고 있는 노동의 인종 분업이다. 위계적이며, 억압적이고, 착취가 일어나는 시스템으로서의 자본주의 가부장제는 성과 계급 억압과 더불어 인정 억압을 필요로 한다. 여성들은 서로 억압을 공유한다; 그러나 (47쪽) 성적 억압으로서 여성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가부장제 역사가 계급과 인종에 따라 항상 인간을 구별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계급과 인종 출신에 따라 구별된다. 분명히, 아메리카 노예 사회의 흑인 여성은 가부장제의 억압을 경험하였지만, 이러한 경험은 이 여성을 속박하고 있는 다른 권력 구조에 의해서 복잡하게 뒤얽혀 있었다. 노동자로서 이 여성은 여자의 어떠한 “연약함”도 결코 인정받지 못하였고, 여성으로서 “강간당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며, 또한 노예로서 인간 이하의 지위를 견뎌냈다. 성이나 계급을 보는 대신에, 또는 인종이나 계급을 보는 대신에, 또는 성이나 인종을 보는 것 대신에, 우리는 권력이 형성되는 과정과 그 관계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권력이 형성되는 과정에 주목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왜 그리고 어떻게 억압당하는지를 비로소 배울 수 있는데, 그 과정은 우리의 억압을 변화시키는 과정의 첫 번째 단계이다.

 

여성이 관계하고 있는 어떠한 과정도 여성이 구현하고 있으며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되는 사회의 여러 관계들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결코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아이를 출산하는 행위는 비록 결혼과 가족 관계를 반영하고 있을지라도 오로지 모성의 행위로만 여겨진다. 다른 한편 이와 아주 유사한 행위가 간통과 같은 불륜으로 여겨질 때, 그 아이는 “서자” 또는 “사생아”가 된다. “어머니”라는 말은 여러 다른 관계들이 포함된 경우에 “미혼모”에서와 같은 아주 다른 의미를 지닐 수도 있다. 이 말은 행위 속에 어떠한 관계들이 구현되는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이와 유사하게, 일련의 관계들 속에서 성적 사랑과 부부관계의 기쁨으로 정의되는 것은 다른 관계들 속에서는 매춘행위, 또 다른 관계들 속에서는 강간이 된다. 한 여성이 다른 여성의 집에서 일하는 것, 또는 남성에 의해 고용되어 일하는 것은 가사노동으로 여겨져서 임금을 받게 되지만, 바로 그녀의 집에서 아내 또는 어머니로서 일하는 것은 사랑의 수고(a labor of love)로 여겨져 사회에 의해 임금을 받는 노동(work)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그리하여 직접 임금을 위한 일이 아니게 된다.

 

그러므로 사회의 여러 사회적 관계들은 여성이 어떤 상황 속에서 행하는 특별한 행위를 규정한다. 이러한 관계들 밖에서 “여성은” 하나의 추상(an abstraction)이 된다(도외시된다). 어떠한 상황을 형성하는 권력 관계들과 그 상황을 규정하고 지키며 유지하는 이데올로기 밖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결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들을 설명하는 가운데서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 왜냐하면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사회적 관계들이 (48쪽) 자유주의, 남성우월주의 그리고 인종주의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유지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본주의 가부장제를 유지시키기 위해 필요한 어떤 특수한 상황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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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심판 일지 34.

# 2011. 11.5. 토요일 #

 

- 염광고 구장(총2게임: 13:30~17:20, 1심 경기) (날씨 맑고 화창)

* 제1경기(07:30~09:20) (주심: 본인)

* 제2경기(09:30~11:20) (주심: 본인)

 

- 별 다른 특이사항이 없었다.

- 리그 운영자께서 정확하고 원활한 심판 판정을 했다고 선수들이 칭찬했다는 말씀을 하셨다. 선수들과 리그 운영자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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