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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에게

오늘은 우리가 함께 산 지 만 8년이 되는 날이다.

남편은 친구와 술을 마시다 11시에 들어와 12시가 다 된 시간에 통닭과 소주를 마시고 있다.

자고나면 자기가 그걸 먹었는지도 모를 거면서...

게다가 아이를 옆에 두고서....

편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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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사랑아빠

 

우리는 부모에게 충분히 사랑받지 못하고 살았어...

 

지금, 선배는 사랑이에게 치킨을 주고 있네. 나는 자다 깬 8개월 둘째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있다네. 그래서 이 시간은 폭풍전야의 시간이지.

우리가 돈을 물려줄까, 집을 물려줄까. 세살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이 얼마나 치명적인데 이밤에 술마시는 것도 부족해서 애한테 튀긴닭을 주면 그게 사랑일까.

 

선배는 내게 이 모든 상황을, 그로인한 고통을 돌리더군. 그래 내책임 전혀 없지 않아.

그런데 요즘 정말 힘드네. 내 내적불행을 만나는 것도 괴로운 일인데 말이야.

선배 탓을 하자는게 아니야.

선배도 그렇게 자라왔으니 그럴 수밖에.

 

내게 한 말, '기다려줘'라는 말...난 지금 기다릴 수 있어,

그런데 선배는 선배를 기다릴 시간이 아니라 돌아보고 살아온 날들, 아주 어릴적부터를 되돌아보고

그 속의 자신을 대면해야 할 시간인 것 같어.

 

어쨌든,

밤 12시에 이러는 상황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한편으로는 너무 화가 나고 한편으로는 내가 내 발등 찍었다는 생각에 절망적이기도 하고.

 

난 이런 생활 이런 부모모습 물려주고싶지않아...

 

 

내 아버지라는 사람, 나를 직접 때린 적은 없지만 언어폭력은 말할 수 없이 지독했어.

늘 욕하고 비난하고 자기비하하고 무서운 괴물같은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밥상을 엎고 제사상 앞의 접시를 발로 찍어눌러 깨고...

늘 술에 취해서 붉은 핏발 선 그 눈...

자기 인생이 우리 때문에 엄마와 우리 셋 딸들 때문에 펴보지도 못하고 그리 되었다고 원망만 했어.

아들도 아닌 것들이 자길 무시한다고, 남자인 자기를 무시한다고 그런 것만 같았지...

그래서 내게 남자 컴플렉스가 있는지도 모르겠군.

난 어릴때 아빠가 늦은 저녁과 술을 먹을때 옆에서 뭔가 얻어먹곤 했는데(군것질, 먹는것, 자위, 그게 날 안정되게 했나봐)그러다가도 불호령이 떨어지면 가슴조리고 숨을 죽여야 했어.

언니들도 엄마도 나도, 이유도 모른채 죄인이 되어야 했어.

 

아빠를 흘겨볼라치면 엄마는 슬쩍 나를 꾹꾹 찌르고..그러지 말라고..

그때는 정말 가슴이 답답해서 집을 나가고 싶거나 저사람들 말고 어디선가 돈많고 교양있는

친아빠와 친엄마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

그러고 나면 엄마는 다음날이나 그다음날쯤 어김없이 우리들과 아빠에게(물론 우리만 있을때) 욕을 하고

나나 언니들에게 분풀이를 했어.

 

다정하게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면,

날 한겨울에 냉방에 혼자 내버려두고 모두 어디론가 가버리지 않았다면,

내가 아파서 운다고 아빠가 욕하고 화낼때, 엄마가 한마디라도 애가 아파서 그러는걸 왜 화내냐고 한번이라도 말해줬다면,

모두가 화내고 욕할때 내가 얼마나 무섭고 가슴이 먹먹했는지 알아줬다면,

사는게 조금 덜 힘들수도 있었을텐데.

 

선배가 화내고 내 탓하며 내 존재를 깡그리 무시하는 듯한 말을 할때, 난 꼼짝없이

그런 아빠 앞에 다시 서있는 어린아이가 되어서 어쩔 줄을 모르겠고 가슴만 두근거리고 무서워.

술에 취해서 날 모욕하고 애 앞이라는 것도 잊은채 욕하는 걸 보면 나역시 엄마처럼 되겠구나,

그래서 내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하면 어쩌나, 중요한 일이 생겨 빨리 처리해야 하는데

발만 동동 구르는 내 언니들처럼 그렇게 살 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들면

그냥 내 생각과 감정과 이성의 모든 회로가 끊겨.

그건 마치 죽음과도 같은, 살았지만 죽은거나 마찬가지인 삶이야.

 

또 10월의 마지막날이네. 우리가 함께 살기 시작한...

만8년전... 그래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우린 우리 사이의, 우리 존재의 모든 문제를 그저 회피하며

봉합하며 살아왔네..

나는 당신을 사랑이란 이름의 의존으로 파먹고 당신은 스스로를 파먹고 나를 파먹고...

 

우리의 지금 삶이 뭐가 부족할까.

선배 문자대로 선배는 아무것도 가진게 없을까.

정말 그럴까.

나는 행복한데, 나는 태어나 처음 내가 여자고 엄마인게 다행인데,

나는 우리가 뭐가 부족할까 싶은데...

그것도 나의 착각일까. 선배 말대로 판단능력을 상실한 비정상의 미친년의 생각일까.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선배를 사랑하고(지나보니 그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인것같아)

함께 살자 하고, 결혼하고 애도 낳았는데...

행복이 그렇게도 힘든 건가.

그동안의 내 모든 것들이 선배에 의해 부정당한 느낌이야.

물론 아무리 선배가 나를 부정해도 내가 부정되지 않는게 그나마 다행인 사실이네.

 

그래, 시간이 필요하면 기다릴게.

나도 선배를 존중하고 올바르게 사랑하기 위해 노력할께.

우리가 사랑해야 행복해져야 우리 부모가 내게 물려준 불행의 유산을 내 대에서 끊지.

그래 목숨걸만한 싸움, 아니 목숨걸만한 사랑 아냐?

 

다시 해보자고.

내게 이런 시간, 이런 행복을 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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