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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여운 아이

내 꿈은 창녀였다.


내 나이 한 열살쯤, 한복을 입고 제사상 같은 차려진 상 앞에 앉아 혼잣말을 하며 술을 따른다.
그러다 누워 자위를 한다.
나는 술집작부 또는 창녀 흉내를 내고 있었다.
나는 창녀가 되고 싶었다. 나같은 건 창녀나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나이 다섯 또는 여섯살의 어떤 날, 나는 동네 언니들과 함께 난교파티놀이를 했다.
성행위하는 것을 흉내내는 것인데, 둘이 껴안고 이불로 돌돌 말아 방 이쪽에서 저쪽까지
굴려준다. 한번은 나보다 한살 많은 아이 정희와 아랫도리를 벗고 문지르며 성교하는 흉내를 냈다.
그 느낌이 얼마나 선명한지 모른다. 부드러운 살.
그 놀이를 했던 곳은 우리 옆집이었는데 우리 집 두칸 그집 두칸. 그 방이 기억난다.
우리집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린 것들이 그런 짓이나 하고...이제껏 나는 그 어린 날의 내게 그렇게 말해왔다.


그 즈음 나는 정희와 우리 집에서 놀이를 했다.
그 방에는 몸져누워 똥오줌을 받아내던, 말도 못하고 정신도 오락가락하던 할아버지가 있었다.
나는 우리가 하는 짓을 못보게 하려고 부엌에 있던 장작을 들고와 위협을 하고 나서
정희와 성교놀이를 했다.
더러운 년, 나쁜 년...지금껏 살면서 나는 다섯살의 내게 그렇게 말해왔다.
겨우 다섯살의 그 어린 아이에게...


수치심.
그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그 할아버지는 불과 몇달 혹은 몇일 전까지만 해도 내가 할아버지를 부축해드리며 다니고
재떨이도 씻어드리던, 그러니까 나는 아주 착한 손녀였다는 것이다.

이중인격. 죄책감.

그런 날들에 엄마나 아빠 언니들에 대한 기억은 없다.
내 대여섯살의 기억에는 성교흉내를 내는 교활한 어린애가 있을 뿐이다.

그 뒤로 일곱살에 옆동네로 이사온 뒤 할아버지는 죽었다.

나는 마당에서 동네 아이들과 놀다가도 방에 들어가 혼자 자위를 했다.
내가 이상한 병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여자의 알몸을 그리며 자위를 하고
티비에서 본 침대위의 남녀가 이불을 덮고 눕는 장면과 그 다음 예상되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자위를 했다.

나는 겨우 다섯살 일곱살의 아이였는데...왜 내 옆에는 아무도 없었는지.
그 때 난교놀이할때 둘째 언니도 있었는데.. 왜 그걸 말려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지.


저학년 어떤 날은 군복을 입은 남자가 내게 약수터가 어디냐고 묻고 같이 가자고 했다.
그러다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산속 약수터까지 가다가 "에이 그냥 가라"
그렇게 날 보내줬다. 그 얘길 엄마에게 했더니 다시는 따라가지 말라고 했다.
난 차라리 그때 무슨 일인가 있기를 바랬다. 나는 이미 더러운 몸이니까.


대학교에 가서 수치심에 쌓인 내 몸은 '걸레'가 되었다.
동아리와 과에서는 늘 진탕 술을 마시고 다음날 아침까지 술냄새를 풍기고 다녔다.
대학 1학년이 끝나기 전, 나는 선배 친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당했다'는 표나지 않게 쿨하게 가해자를 길에서 만나 먼저 아는체하기도 했다.
그 뒤로 별 부담 없이 여관을 다니며 문란하게 살았다. 내 의지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와서 보니 그게 내 내적불행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는 정말 창녀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날은 엄마가 교통사고로 받은 보상금이 좀 있었는데, 왜 난 한 푼도 안주냐며
엄마에게 화풀이를 하고 막말을 하니 엄마가 울면서 돈 30만원을 내놓았다.
집에서 나오면서 '짐승같은 년, 나같은 건 죽어야 돼'를 뇌까렸다.
죄책감은 나를 더 깊은 고통과 타락으로 이끌었다.
학교 근처에 와서 우연히 만난 선배와 그 선배의 친구와 셋이 맥주, 양주를 마셨다.
필름이 끊겼다.
여관에 셋이 갔고 내 옆에 자던 선배의 친구가 내 몸으로 올라왔다.
술을 먹어 찢어지는 아픔도 몰랐다.
잠이 깨고 나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되었다. 방바닥에 말라붙은 피범벅 피딱지..
모든게 다 끝났다고, 꿈도 희망도 이제는 나의 것이 아니라고, 난 정말 열살의
언젠가처럼 술이나 따라야 한다고, 그게 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나이 마흔에 날 낳은 엄마, 딸셋중의 막내인 나.
큰 언니는 스무살에 아이를 낳았다. 임신해서 남자의 집에 들어가 살았다.
둘째 언니는.. 글쎄 별 기억이 없다. 희미하다.
난 열심히 공부해서 엄마의 원수를 갚아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있는 사람이었다.
공부를 좀 해서 대학에는 어떻게 갔지만 돈버는 사람 하나 없는 집에서 등록금 대기도
내 몸 누일 방 한 칸 마련하기도 모두 불가능했다.
이 친구집 저 친구집을 날마다 오가며 살았다.
무능한 부모가 원망스러웠다.
나같은 더러운 년을 왜 낳아서 날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느냐고 속으로 얼마나 욕을 했던지.


나는 엄마에게 또다른 아빠였다.
나는 분노를 폭발하는 아빠를 그대로 닮아 아빠처럼 엄마를 무시하고 언어로 폭행하고 짓밟았다.
고등학교를 들어가면서 그랬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사춘기 즈음부터 거의 이십대중반까지 그렇게 살았다.
남들은 엄마가 그리워 집에 갔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마음 한편으로는 한없이 따뜻한 엄마를 그리워했지만 나의 엄마는 그런 엄마가 아니었다.
우리 집은 그저 분노와 먼지, 폭력과 엄마의 병, 불안과 우울이 가득한 곳이었다.
우리집 사람들은 모두 피해자고 가해자였다.

가난, 자위, 폭력, 수치심, 죄책감.
지금껏 내 삶은 이것들로 얼룩져있다.


지금도 나는 엄마의 목소리조차 듣기가 싫다.
굴욕적이고 나약한 자의 비명, 자식에게 목숨걸고 의존하는...
불과 몇시간전, "애들이 너무 보고 싶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오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고 하니 오지 말라는 소리냐며 화를 낸다.
빨리 죽어야지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려고 한다.
살면 얼마나 사느냐고 살아계실때 잘 하라는 남편을 보면 쥐뿔도 모르면서..싶다.
네가 뭘 알아, 네가 내 고통을 알아? 그래 난 이것밖에 안된다.
잘난 년하고 결혼해 살지, 뭣하러 나같이 쥐뿔도 없는 년하고 사냐...뇌까린다.


남편하고의 섹스는 나를 늘 굴욕감과 수치심에 휩싸이게 한다.
꼭 어느 사창가에 온 손님과 아가씨와 같은 그런 기분이다.
한번도 좋았던 적이 없었다.
아이를 만들기 전까지는. 희한하기도 하지.


내 음순은 비뚫어져있다. 하도 손으로 누르고 만져서 그랬나보다.
처녀들의 저녁식사를 보고 나도 거울로 비춰봤었다.
처음으로 내 몸이 안되었고 가여웠다.

난 여성운동을 영역운동 이름으로 접하면서 희미하게나마
꼭 내 잘못만이 아님을, 이제껏 내 삶의 얼룩들을 모두 내가 책임져야 하는게 아님을
알게 되었다.

기막힌 것은 단체활동을 하다가 기관에서 성추행을 당했고, 그것을 싸울 것인가 말 것인가로
큰 갈등을 했다.
싸운다면 그동안 나를 알던 혹은 나와 함께 섹스를 한 남자들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가슴 좀 만졌다고 그 난리를 치나? 라는 비난이 내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어차피 너는 그런 여잔데 이슈만들려고 별 짓을 다하는구나 그런 비난이
끊임없이 솟아났다.
결국 나는 이제껏 내가 그렇게 살아온게 사실이고 그게 내 잘못이 아니었고 이제는
그렇게 당하며 살지 않겠다는 내 의지로 계속해서 싸웠다.
질 것을 알면서, 어쩌면 더 큰 상처를 입을지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
그 일로 나는 무고와 명예훼손죄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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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내적불행.
한번도 알아주지 못한 어린 나.
그 어린 나이에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 어린 나이에 수치심과 죄책감을 먼저 배우고 그동안 얼마나 가슴조리며 살아왔니...
삼십년간 얼마나 아팠니..아가야 미숙아...
얼마나 외로웠는데..내가 얼마나 외로웠는데..
아무도 봐주지 않고 아무도 관심갖지 않고..
나도 엄마손 아빠손 잡고 나들이 가는 그런 아이이고 싶었는데...
내가 얼마나 사랑받고 싶었는데...나를 제외한 모든 식구들이 나를 주워왔다고 말하고
나만 특이하다고 이상하다고 성격 이상하다고....
난 정말 세상 어딘가에 내 친 아빠 친 엄마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른이 되면 친엄마 친아빠를 찾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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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나도 내 내적불행을 치유하려고 엄마에게 이런 저런 말을 하게 되었다.
엄마는 왜 날 맨날 혼자 두고 어딜 그렇게 돌아다녔어..미안하다...
엄마는 여전하다. 다 내가 멍청한 탓이다...

그러다 들은 또한가지 얘기.
일곱살땐가 여덟살땐가 엄마가 여수에 다녀와 보니
한 겨울 밤에 냉방에서 혼자 울고 있더란다...
세상에...불쌍한 것..불쌍한 것..


이젠 좀 자유롭고 싶다. 나도 좀 살고 싶다.
더이상 내 고통이 내 아이들에게 전가되는 게 싫다. 죽기보다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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