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년엔 미뤄뒀던 여행을 많이 가기로 했습니다. 춘천으로 이사와 4년을 지내며 여행다운 여행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좋아하는 걷기여행도 고작 하루, 이틀로 네댓 번 간 게 다고. 바람 쐬러 나간 건 영주 부석사를 둘러보고 온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니 말입니다. 해서 일단 동쪽 바닷길 있는 강릉 바우길을 시작으로 스페인 산티아고길, 군산 구불길, 남해 바래길과 작은 섬들까지. 적어도 육 개월은 무작정 걷기로 작정한 겁니다. 그렇게 걷다보면. 늘어난 뱃살 줄이는 건 부수입일터이고.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슬러 다시 시작하는데 큰 힘이 되겠거니 싶습니다.
2.
제주 올레길. 처음 올레길이 소개됐을 때부터 언제 걷나 오매불망이었습니다. 한때는 북적대는 사람들 틈을 걷는 게 싫어 ‘흥’ 하며 짐짓 모른 채 하기도 했고. 유행처럼 번진 걷기 열풍에 이건 또 뭔가 싶어 외면도 했지만. 이번 걷기 여행을 준비하면서 날이 풀리면 이곳부터 걸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말입니다. 올레길에서 ‘끊어진 길을 잇고, 잊혀진 길을 찾고, 사라진 길을 불러내어’, ‘제주 중산간의 숨은 비경과 작은 섬들’, ‘제주의 고유한 문화와 풍광’을 찾아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길’을 넘어 ‘제주를 세계와 이어주고’,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길’을 새삼스레 느끼고 싶어서였을까요.
3.
1946년
- 제주농업학교, 오현 중학원: 동맹휴학(일제 잔재, 독재적인 교육 반대)
1947년
- 관덕정 광장
- “조선의 식민지화를 양과자로부터 막아내자”(밀가루에 비료, 석유, 석탄분이 섞인 사건 계기(1946년)
- 제주시내 중학생(제주신보: 1천여 명)
- 제주도 양과자 수입반대: 제주도에서 일어난 최초의 반미시위
1947년 3월 1일
- 제주북초등학교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대회
- 2만 5천 - 3만여 명
- 애월읍, 조천면 등에서도 참가
- 6명의 주민 총상으로 사망
3월 10일
- 민.관 총파업
1948년 3월 6일
- 조천중학원 2학년 김용철 고문으로 유치장에서 사망
- 조천중학원 시위(이전에도 교사 연행에 항의 시위)
3월
- 조천면 신촌리: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신촌회의’
- 무장투쟁 결정
4월 3일 새벽 2시
- 무장봉기: 봉화(오름)
- 12개 지서, 우익단체 집과 사무실
* 모슬포: 미군정 경비대 제9연대 주둔-진압작전 참여 명령
4월 28일
- 서남부 대정명 구억초등학교: 9연대장 김익렬-무장대 총책 김달삼 담판
- 전투중지 합의
5월 1일(사흘 후)
- 제주읍 오라리: 무장대에 피살된 여인의 장례식 기점 무장대와 경찰 충돌
- 이후 미군이 경비대 총공격 명령으로 유혈사태 확대
- 4.3 기록필름 <제주도의 메이데이>
5월 10일
- 17개 읍.면 가운데 7개 읍.면에서 선거(단선) 반대 활동
- 중문, 표선, 조천 등 투표소 파괴, 무장대 21명, 경찰 1명, 우익인사 7명 사망
- 대흘, 와흘, 와산 등 중산간 마을 투표함 운반 면장 위협(미군정)
9월 초
- 진압작전 재개
- ‘삼진 작전’ 개시(불태워 없애고, 죽여 없애고, 굶겨 없애는)
* 삼진.삼광: 일본이 중국을 대상으로 저질렀던 작전으로 대량 살상 자행
- 해안선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 무허가 통행 금지
- 신문사 편집국장, 제주중학교 교장 등 총살, 법원장 연행
- 해안선 봉쇄
10월 19일
- 여순사건 발생: 제주도 출동 명령 거부: 14연대 1대대
10월 말
- 9연대 병사 17명 ‘공산주의자 세포’ 혐의로 체포, 이후 6명 처형
- 북제주군 애월면 고성리: 135명 사살
- 북제주군 조천면 교래리 부근: 130여명 사살
11월 초
- 제주 출신 9연대 장병 100여명 총살
- 납읍리: 무장대에 의한 주민 살해
- ‘빗개’(토벌대의 진입을 감시하는 보초) / ‘비께’(바다고기로 상어의 일종)
1948년 10월부터 1949년 3월까지 6개월간 중산간 마을 초토화
- 남제주군 구좌면 세화리
- 표선면 성읍리
- 남원면 남원리, 위미리
11월 13일
- 북제주군 애월면 소길리 원동마을, 조천면 교래리, 화흘리 2구, 신흥리
- 남제주군 안덕면 상천리, 상창리, 창천리
- 함덕초등학교 조천면 관내 20대 청년 200여명 가운데 150여명 총살
11월 17일
- 제주 계엄령 선포
11월
- 중문면 영남마을 50여명 희생
- 조천면 선흘리(21일): ‘선흘곶’, 도틀굴(반못굴), 목시물굴, 밴뱅이굴 등에서 주민 총살
- 21일부터 30일까지: 학살 615명(토벌대 총 12정, 칼 11자루 획득)
12월
- 표선 백사장: 토산리 주민 157명 총살
- 남제주군 안덕면 동광리: 130여 가구 / ‘무등이왓’ 100여명, ‘삼밭구석’ 50여명 사망, ‘큰넓이궤’ 120여명 60여 일 동안 숨어 삼
- 2-6일 / 12-20일: 도민 677명 사살, 162명 체포
1949년 1월 경
- 17일: 제주읍 조천면 북촌리 300여명 총살, 함덕으로 간 주민 100여명 희생, ‘무남촌’
1월 24일
- 북제주군 애월면 하귀리 개수동 63명 희생
- 4.19 후 국회차원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 때 제주도 학살 고발 제1호로 기록
2월 4일
- 제주읍 용강리 주민 105명 희생
4월 1일 미군 정보보고서
- 48년 한 해 동안 1만 5천여 명의 주민 희생, 이중 80% 토벌대에 의해 사살로 기록
5월 10일
- 제주 재선거 국회의원 선출
5월 15일
-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해체
6월 8일
- 관덕정 광장 이덕구 주검 내검
1953년 1월 말
- 유격전 특수부대 무지개부대 투입 한라산 토벌작전 전개
1954년 9월 21일
- 한라산 금족지역 해제, 전면 개방
4.
그래요. 올레길에는 없는. 제주의 역사와 현실을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겁니다. 중산간 마을, 아니 제주도 곳곳에 감춰진 상처를, 아픔을. 강정마을 구럼비가 토해내는 통곡을 직접 보고 아파하고 싶은 겁니다.
예전에 제주하면, 당연 ‘돌, 바람, 여자’였는데요. 그게 꼭 어느 가수가 불렀던 노래가 크게 유행을 했기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제주를 잘 상징해주는 것이었기에 스스럼없이 받아들여졌을 겁니다. 그리고 제주가 가진 아픈 역사를 오롯이 나타낸다는 점에서도 이 셋은 모두 훌륭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제주하면 무엇이 떠오를까요. 맞습니다. 요즘 제주는 ‘올레길’, ‘7대 자연경관’ 그리고 ‘해군기지’로 이름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 ‘돌’, ‘바람’, ‘여자’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이미지 때문인지. 제주를 나타내는 말로 그닥 좋지는 않습니다. 먼저 가장 먼저 이름이 나기 시작한 ‘올레길’만 하더라도. 결코 ‘올레길’을 폄하하고자 하는 건 아니지만. 처음 가졌던 취지나 정신만큼이나 제주가 가진 아픈 역사도 함께 껴안고 갔으면 하는 아쉬움이 늘 있었습니다. 게다가 4대강 사업에 껴있는 자전거 도로에서 보듯. 자연파괴에 일조하는 유행이 여기까지 퍼진 건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하구요. 그래도 ‘올레길’은 ‘7대 자연경관’보단 좀 낫습니다. 최소한 출처도 알 수 없는 단체에 전화비로 혈세 몇 십억 원을 갖다 바치진 않으니까요. 또 당장 국제전화 하라 윽박지르는 건 기본이고, 주관하는 단체에 대해 의문만 표시해도 매국노 취급을 받으니까요. 이토록 간절히 원하는 데 까짓, 7위 안에 못 들겠나, 되레 안심이 되긴 하지만요. ‘7대 자연경관’도 ‘해군기지’에 비하면 양반입니다. ‘평화의 섬’이라 지정하고 다양한 평화 관련 사업들을 추진할 것처럼 하더니만. 선언문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이를 강정마을에 대규모 해군 기지를 건설하겠다고 나섰으니. 아무리 전(前) 정권이 결정한 일이라고. 이제는 ‘국책사업’ 논리도 모자라 ‘안보’ 논리까지 들먹이면서 공사 강행을 서두르니. ‘평화의 섬’이란 말이 무색하게 됐습니다. 그래도 말입니다. 아무리 ‘올레길’을 잘 가꾸고 제주를 품어 내는 일이 어렵더라도 말입니다. 또 겉멋만 잔뜩 든 제주가 아니라 전통과 문화와 역사를 간직한 ‘자연경관’을 만드는 일이 어렵더라도 말입니다. 또 ‘빨갱이’ 소리까지 들어가며 싸우는 일이 아무리 아프고 시린 일이라도 말입니다. 마땅히 그것들을 해내야만 진정 제주를 ‘평화의 섬’으로 만드는 것일 겁니다.
각다분하다: 일을 해 나가는데 매우 힘이 들고 고되다.
‘평화의 섬’ 제주가 시끄럽습니다. ‘평화’라는 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해군기지 건설 문제 때문인데요. 국책사업이라면, 그것도 ‘안보’와 관련된 것이라면 당체 논리나 설득, 대화도 통하질 않는 게.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습니다. 쌍용자동차 파업 사태 이후 다시 ‘공안대책회의’까지 열리고. 보수 언론은 ‘안보논리’를 앞세워 연일 분탕질에. 법원은 명분 없는 가처분 결정까지 내리니. 입 막는 것도 모자라 손, 발까지 다 묶었습니다. 뭐하는 곳인지도 모르는 데서 주관하는 ‘7대 자연경관’ 투표에는 지랄 맞게 호들갑을 떨며 열심히 손가락으로 버튼 누르라 하면서도 말입니다. 어차피 해군기지가 처음부터 명분 없는 싸움에 우리 젊은이들을 내보내고. 그것도 모자로 한 청년이 먼 이국땅에서 생짜로 목이 달아나는데도 꿈쩍 않았던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것이니. 기지 건설 철회 투쟁이 어찌 각다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어쩝니까. 여서 힘이 부친다고 멈춘다면. 공권력이 무섭다고 물러선다면. 제주는 영영 ‘평화의 섬’이 될 수 없을 터이니. ‘평화의 비행기’도 띄우고, ‘평화의 배’도 띄워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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