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날, 뿌연 먼지 사이를 뚫고 주천으로(2017년 5월 1일)
 
전라도를 비롯해 충청도 지역 곳곳이 그렀듯이 남원 역시 동학혁명군이 남긴 발자취들이 많습니다. 특히 김개남이 이끌던 농민군과 유생들로부터 지원을 받은 박봉양이 이끈 민보군 간의 싸움이 벌여졌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곳곳이 그렀듯이 혁명군이 남긴 흔적들은 애써 찾지 않으면 보기가 힘듭니다.
 
그래도 최근에는 방아치 전투지 비석이며, 혁명군 주둔지였음을 알리는 깃대바위가 알려지고 있습니다. 또 춘향이와 몽룡이로만 알려진 광한루원에도 어엿한 안내석이 세워졌습니다. 이는 동학혁명 당시 지휘부에서 활동했던,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해방 직후엔 남원 건국준비위원장까지 맡았던 류태홍 선생 덕분입니다.
 
그러니 비록 둘레길하고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부러 시간 내 찾아볼 만합니다. 더구나 운봉이나 주천을 가기 위해서는 남원을 반드시 거쳐야 하니까요. 농민군이 주둔했을 교룡산성, 훈련장이었던 요천(蓼川)쌈지공원, 남원부 관아로 동학대도회소로 쓰였던 곳, 패한 농민군이 남원성을 떠나던 북문(옛 남원역 부지) 터는 둘러보기 좋습니다.
 
운봉 역시 방아치와 여원재, 까막재 등 동학혁명과 관련된 곳들이 있으나 농민군이 끝내 넘지 못한 곳이라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아립니다. 또 민보군 거점으로 쌀을 저장했다 해서 합미성(合米城)이라고도 하는 합민성(合民城), 후에 일부가 훼손된 것 같아 보이는 ‘박봉양(일몰)장군비’가 있는 서림공원도 있으니 꼭 두루두루 살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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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인월에 가느라 또 오늘은 운봉에서 와 내렸던 운봉우체국 앞은 크기도 하고 비, 바람, 햇빛을 모두 피할 수 있어 좋습니다. 그제는 2시간 반, 어제는 4시간. 그리고 오늘은 6시간 남짓 걸어야 하니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하는데요. 물도 준비하고 신발 끈도 다시 묶고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 정류장만큼 딱 좋은 곳이 또 있을까요.
 
미세먼지 소식에 마스크까지 챙겨들고 길을 나섭니다. 시계를 보니 12시. 어제마냥 제방길이 아니어서 다행이지 싶은 시간입니다. 양묘사업소까지 얼마 되지 않은 길이 어찌나 따갑던지요. 그래도 바로 양묘장이라 다행인가 싶었는데. 그늘은커녕 모심은 것 같은 소나무들만 빼곡. 게다가 뭔 도로 공사. 어찌나 어수선하던지요. 길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다행히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이 눈에 띄어 금방 제 길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어쩔까요. 눈앞에 어제마냥 제방길이 펼쳐져 있습니다. 아, 하, 한숨만 나옵니다. 그래도 어제보단 나무들 키가 조금은 큰지 그늘이 있네요. 나란히 걷진 못해도 줄지어 걸으면 해를 피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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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마을 입구 나무 아래 평상에서 잠시 숨을 고릅니다. 서어숲으로 이름난 곳이니 응당 그리로 가야겠는데 당장 힘드니 그렇게 됐는데요. 결국 이정표를 못 보고 마을을 가로질러 가 숲을 못 보고 갑니다. 아니요. 분명 되돌아와 마을길로 난 이정표를 찾았는데 아무리 길을 따라가도 숲이 나오질 않았던 겁니다. 대체 어디서 어긋난 걸까요.
 
덕산마을 앞 정류장까지는 평지 제방길이라 그리 힘들지는 않습니다. 다만 배꼽시계가 하도 요란하게 울리기에 김밥이라도 먹어야겠습니다. 남원과 함양 구간들에는 막걸리며 파전 등을 파는 쉼터가 여럿 있기에 무겁게 뭘 요기할 것까지 가져가야하나 싶어 잠깐 망설이긴 했지만요. 막상 시간 맞춰 먹으려니 그것도 쉽지가 않더라구요.
 
배도 채웠고 쉴 만큼 쉬었고 둘레꾼들과 얘기도 나눴고. 덕산저수지를 끼고 이어지는 숲길은 소나무가 지천입니다. 그러다 길은 드넓은 저수지를 빼꼼 보여주다 오롯이 보여주기를 반복하기도 하고. 어느새 임도로 이어졌다가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농부들만 다니는 농로로 안내합니다. 이렇게 아기자기한 길이 또 어디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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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덕산마을에서 만났던 이들인데 어째 저쪽 길에서 오는 걸까요. 아마 아까처럼 이정표를 놓쳤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도 얘길 들어보니 그쪽은 길이라도 찾았나 봅니다. 다른 이는 아예 오던 길로 되돌아가는 길로 갔나봅니다. 아무리 표시가 잘 돼 있고 한길이라고는 하지만 방심은 금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1구간만큼은 거꾸로 걷는다고 합니다. 안 그럼 1시간이 넘게 가파른 오르막길, 아니 산행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백두대간이 지나는 덕치마을을 지나니 바로 이 산길이 시작되는데요. 이처럼 검은색 화살표를 따라 걷는다 해도 오르막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물론 주천에서 오는 길에 비하면 새발에 피겠지만서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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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리지를 지나고 나니 분명 지도에는 구룡치라고 돼 있던데요. 아무 표시도 없고 이제 내려간다는 예고 같은 것도 없이 곧장 급경사, 내리막입니다. 시간이 늦은 탓에 아래서 올라오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가뜩이나 좁은 길에 꽤나 조마조마했을 뻔 했습니다. 그래도 조심 또 조심. 올라오는 것보다 배는 더 시간이 걸리는 것 같네요.
 
주천이 3.1km 남았다는 표지를 지나니 엔간히 내려왔나 봅니다. 계곡물도 들리고 뒤를 돌아보니 산꼭대기가 저 멀리 보이니요. 다시 주천 2.6km 표지 있는데서 남은 김밥도 먹고 힘을 내봅니다. 이제 넉넉잡아 한 시간이면 다 가겠지요. 다행히 여기서부터는 길도 좋습니다. 곧 펼쳐진 다랭이밭, 비료푸대 허수아비가 두 손 들어 반깁니다. 이제 다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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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둘레길 걷기 다섯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첫째 날은 지난 번 걸었던 <인월-금계> 구간 중 장항마을부터 인월까지 약 7km를 2시간 30여분, 둘째 날은 <운봉-인월> 구간(9.9km)을 4시간에 걸쳐, 셋째 날은 <주천-운봉> 구간(14.7km)을 5시간 반 동안, 여전히 반대 방향으로 걸었습니다.
 
* 가고, 오고
강릉에서 인월은 시외버스만 두 번, 다시 군내버스나 시외버스를 타야 겨우 올 수 있습니다. 시간을 잘 맞춘다고 해도 여섯 시간은 잡아야 하니 멀긴 정말 먼데요. 참고로 강릉 출발 8시 30분, 대전에서는 12시 20분에 갈아탔습니다. 함양에서는 1시 50분 군내버스를 타고서야 겨우 2시 넘어 인월에 도착했답니다.
 
* 잠잘 곳
인월에는 게스트하우스가 한 곳, 다리 하나만 건너면 만나게 되는 월평마을(달오름마을)에 민박이 한집 건너 한집입니다. 그밖에 운봉읍과 인근 행정마을, 백두대간이 지나는 신기마을, 주천에도 숙박할 만한 곳이 꽤 있으니 한창 때가 아니면 따로 예약은 하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인월은 운봉, 주천과 군내버스, 시외버스 한, 두 번으로 이어지는데다 밥집도 많고, 카페도 두 군데나 있으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에 딱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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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1 18:30 2021/03/11 18:30
소설 『동트는 산맥』은 충청도 지역에서 활동했던 동학군 이야기입니다. 7권이나 되는 긴 책인 만큼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을 합니다. 그 중에는 한양에서 문둥이네 한약방을 하며 조정과 왜, 청의 움직임을 살피는 한문현이란 이도 있는데요. 어느 날 한문현 처사에게 신정엽이라는 단양 보부상대 행수가 찾아옵니다. 청풍 성두한 접주로부터 총 일백 정을 구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상의하러 온 것인데요. 신행수는 몸에 병을 얻어 눌러 앉았던 터라 떠꺼머리의 등에 업혀 왔습니다. 일이 일인지라 한 밤중에 찾아와 대문을 두드리며 숨넘어가는 말로 계암선생이 왔다며 한문현을 찾는데. 한약방에서 일을 거드는 애녀석이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늑장입니다.
 
“의원님 계신가?”
“주무시니 잠시만 기다리시우.”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어도 애녀석은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남의 속이 터지도록 느릿느릿 말을 받았다.
“지금, 병자의 숨이 넘어가네. 싸게 좀 기별해 주게!”
“아따 말하는 사람의 숨이 먼저 넘어가겠소. 좀 기다려 보시래두요. 진맥을 하실는지나 모르겠소.”
“그러면, 계암 선생이 왔다는 말 좀 전하게.”
“우리 나리께서는 선생이 아니라 정승이라도 진맥 못 할 사람은 못 하오.”
아이가 흥글방망이같이 대꾸하고 서 있으니 사내는 애녀석이 어깃장을 놓는 줄을 알아서 더 말하지 아니하였다.
- 『동트는 산맥 6』, 채길순 지음, p.155
 
흥글방망이놀다 : 남의 잘 되어가는 일에 심술을 부리고 훼방을 하다.
 
겉으론 못마땅한 듯했지만 내심 자기네들이 하고 싶었던 말을 해줘서 겉으론 속 시원하다, 했을 사람들로서는 아쉬웠을 겁니다. 턱 하니 앉아서 꾸벅 인사하고 제 할 말만 늘어놓기만 해도 받아쓰는 데 도가 트고 왜곡하고 짜깁기 하는데 선수인 보수언론들이 열심히 퍼 나르며 옹호하고 나섰고. 보훈처는 확인도 안 된 것을 가지고 보도 자료까지 내 놓으며 흥글방망이같이 나섰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덕분에 고노담화 재검증도 묻어 넘어가는 모양새고. 공항철도는 소리 소문 없이 팔리게 생겼고, 전교조는 법외노조로 내몰렸고. 그렇게 ‘세월호’를 잊지 않겠다던 외침들도 어느새 잠잠해졌으니. 이미 제 할 일을 다 하고도 남을 만큼을 한 사람에게 그네들은 아마도 박수를 쳐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물러나면서까지 그렇게 뻔뻔할 수가 없고, 후안무치가 아닐 수 없는데도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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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4 17:01 2014/06/24 17:01
사용자 삽입 이미지1894년 고부에서 일어난 봉기를 시작으로 ‘척왜척양(斥倭斥洋)’, ‘보국안민(輔國安民)’ 기치를 든 일련의 사건들을 일컬어 보통은 ‘동학농민운동’ 혹은 ‘동학농민혁명’이라고 합니다. 교과서에도 그렇게 쓰여 있고 그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곳들도 대게는 이를 차용해 이름이 붙었으니 그렇습니다.
 
하지만 작가 박태원은 <갑오농민전쟁>이란 이름을 붙였더랬습니다. 눈이 멀고 몸이 굳어지는 와중에도 끝내 마무리를 한 동명(同名)의 장편역사소설에서 말입니다. 한편에선 이를 두고 사회주의에 토대를 둔 작가의 이념이 투영된 것이라고들 하지만. 지금은 많은 이들이 이 명칭을 쓰기도 하니 이런 얘기들은 흘려들어도 될 만합니다.
 
또 ‘동학농민운동’이나 ‘동학농민전쟁’이라고 한다면. 자칫 ‘동학(東學)’이라는 특정 종교와 이를 따르는 도인(道人)들이 일을 일으킨 것으로 한정되는 측면이 있으니. 갑오년(甲午年)이라는 특정 시간대를 두고 이름을 붙이는 게 좋을 듯싶기도 합니다. 또 당시 무장봉기를 일으켰던 이들을 두고 농민군(農民軍)이라 불렀으니 당연히 이 또한 이름에 넣어야 할 것이구요. 마지막으로 봉건 잔재를 일소하는 일대 사회변혁의 사상은 물론 일본 제국주의와의 피할 수 없는 싸움까지 내포하고 있었으니 ‘전쟁’이 아니 붙을 수 없으니. 어찌 보면 ‘갑오농민전쟁’이 맞을 듯싶습니다.
 
다만 이제껏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혁명’으로만 불렸던 이유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봉기를 주도했던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동학(東學)의 접주(接主)였고 또 도인(道人)들이 많이 참여를 했던 것은 틀림없지만. 그 후 극심한 탄압으로 동학(東學)은 그 세(勢)가 거의 없어져 명맥이 끊겼으니 굳이 이를 고수하려는 이들이 많지 않았을 터인데 말이지요.
 
아무튼 북으로 갔지만 남로당계열로 숙청된 데다 구술(口述)에 의존해 마무리 지었다는 <갑오농민전쟁>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까지 지낸 또 다른 월북작가 홍명희가 쓴 <임꺽정>과 더불어 최고 역사장편소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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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2 17:39 2013/02/22 17:39
옥천군 청산면에서 속리산 아래 서원계곡까지(2006년 8월 27일)
                                                                              
                                                                                <동학 집회가 열렸던 장내에는 장승만이 서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첫차를 탔는데도 청산에 도착하니 7시가 넘어도 훌쩍 넘었다. 아직은 구름 속으로 해가 숨어 있어 아직은 괜찮지만 언제부터 목 뒤로 따가운 햇빛이 내리쬘지 몰라 서둘러 길을 나선다. 하지만 청산 면소재지를 벗어나자마자 만나게 되는 505번 지방도로의 풍경이 자꾸만 발걸음을 늦추게 한다.
 
오른편으로 보성천이 있기는 한데 강물은 흐름을 멈춘 듯 하고, 바람은 한 점 없는 데다 사람은커녕 지나는 차 하나 없다. 길을 걷고 있는 우리 이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움직임도 없는 것이 마치 꿈속을 걷는 듯 나른하기만 하다. 큰 목소리로 노래도 부르며 힘을 내보지만 여전히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어제는 밖에 일이 있다며 사무실에서 땡땡이를 치고는 해지기 전 옥천에 당도했다. 꽉 짜여진 일상에서 탈출하기가 맘만 먹으면 이렇게도 쉬운 것을, 이리재고 저리재고 앞뒤 생각하니 어디 쉽게 놀러 갈 수나 있을까. 혹, ‘누가 요즘 같은 때에 간도 크게 사무실을 땡땡이 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한 번 해보시라. 맘먹을 땐 오만가지 생각이 들겠지만 일단 저지르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열차를 타기 전 일기예보를 확인하니 소나기가 한 두 차례 온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했는데, 어째 옥천역에 내리자마자 내리기 시작한 소나기가 좀체 그칠 줄을 모르더니 5시가 넘어서야 겨우 가늘어진다. 그 바람에 정지용 생가며, 문학관 구경을 놓치고 말았다. 게다가 비가 온 탓인지 날마저 금세 어둑어둑해져 옥천으로 다시 나가지 못하고 인근에서 하루 머물 곳을 정했다.
 
10여 년 전 홍수로 유실돼 이제는 그 자취를 볼 수 없는 한호팔경이 있었던 대성리라는 마을에서 한 숨 쉬고 나니 한결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다. 하루 종일 있어봐야 동네 사람 이외에는 누구 하나 올까말까한 동네 구멍가게에서 목도 축이고, 평상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눈다.
 
마로면 관기리에 도착하니 11시가 조금 넘었다. 이제는 목덜미가 따끈따끈하고, 귀 볼 아래로 땀도 주르르 흐리니 배가 고프지 않더라도 땀을 닦으며 쉬어가야겠다. 다행이 맛 좋은 시골 밥상을 차려주는 식당이 있어 뱃속을 든든히 채우고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는 시골 학교 운동장 한구석에 자리를 펴고 눕는다.
 
까까머리 소년들의 공차기에 쪽잠이 방해받기는 해도 정겨운 시골 풍경 때문인지 그리 시끄럽지만은 않다. 나무아래 시원한 가을바람 속에서 그렇게 아직은 한여름의 따가움을 지니고 있는 햇살이 사그라질 때까지 그렇게 쉬다 3시가 넘어서야 다시 길을 나선다.
 
속리산국립공원으로 이어지는 25번 국도는 길 양옆으로 은행나무 가로수가 줄지어 서있고 너른 논이 산 아래까지 펼쳐져 있어 마음이 한결 풍성해진다. 하지만 여느 국도와 다를 바 없이 통행하는 차도 많고, 멀리 보이는 공사 현장에서 쏟아내는 덤프트럭들이 쉴 새 없이 질주하느라 조심해서 걷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도 탄부 임한 솔밭 공원에서는 250년 이상 된 노송 사이에서 잠시 쉬기도 하고, 장내에서는 선병국 가옥에, 동학 장내 집회 장소에서 이것저것 눈요기를 하며 쉬기도 하고, 마른하늘에 때 아닌 소나기를 맞기도 하니 재밌기만 하다.
 
 
<서원계곡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선병국 가옥>
 
장내에서부터 ‘여기가 서원계곡이다’고 불리는 서원계곡은 여름철 계곡 물놀이 장소로 이름이 알려졌다기보다는 이런저런 고시들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한데 모인 곳으로 더 소문이 난 듯하다. 장내 입구에서 한 동안 우리의 발걸음을 잡았던 99칸 선병국 가옥이 그랬고, 서원리의 커다란 건물들이 모두 고시원 간판을 달고 있는 것이 그랬다. 그리고 보니 장내에서부터 유난히 선남선녀들이 눈에 띄었는데 아마 그 고시생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혹시나 해서 서울에서 서원계곡 내 민박집 여러 곳의 전화번호를 적어왔지만 마땅히 잘 만한 곳이 없어 보이는 게 이만저만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당초 일정은 숙박할 곳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법주사까지 걷는 것으로 잡았는데, 선병국 가옥과 동학 집회 장소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어쨌든 근방에서 하루 머무르지 않으면 안 될 텐데 말이다. 해서 잘 만한 곳 여기저기에 서둘러 전화를 돌려본다. 하지만 이를 어째. 쉽사리 통화가 되는 곳들은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한참을 더 계곡을 따라 올라가야 하고, 어렵사리 통화가 된 곳들에서는 터무니없는 방에, 터무니없는 방 값을 불러 기분만 상한다. 아무리 한철 장사라고 해도 좀 너무 한다 싶다.
 
서울로 갈 요량으로 고시촌 서원리로 다시 되돌아가는 가는데, 이름 모를 동네 어귀에서 버스편을 알아보니 이미 읍내로 나가는 버스가 이미 끊겨버렸다고 한다. 어찌할까 생각해봐야 답은 없고, 일단 국도와 이어지는 장내까지 내려가기로 한다. 다행히 고시촌 못 미쳐서 맘씨 좋은 고시생을 만나 보은 읍내까지 편히 나올 수 있었다. 3시간 30분이나 걸린다는 걸 차가 출발한 후에야 알게 된 남부터미널행 시외버스에 오르니 창밖으로 어둠이 짙다.
 
* 열두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 옥천군 청산면에서 보은군 외속리면 서원계곡까지 약 23km. 걸은 시간은 약 6시간.
 
* 가고, 오고
옥천까지는 영등포역에서 14시 33분에 출발하는 무궁화호 열차로 이동했으며, 청산면까지는 군내버스를 이용했다. 영등포에서 옥천까지 기차요금이 8,200원인데 옥천읍에서 청산면까지 버스요금이 3,250원이니 웬만하면 열차나 고속버스가 다니는 곳에서 시작과 끝을 맺는 게 좋다. 서원계곡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은 맘씨 좋은 고시생을 만나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하루 더 그곳에 머물러야 했다. 서원계곡에서 보은읍내로 나가는 버스는 몇 차례 운행하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지만 대략 저녁 6시 이전에 마지막 차가 지나는 것을 보았으니 하루 더 머물 요량이 아니라면 막차시간을 미리 확인해야 한다. 보은에서 청주를 거쳐 서울로 올라오는 시외버스는 시간도 많이 걸릴 뿐만 아니라 저녁 7시 30분이 마지막이다. 시간을 절약하려면 일찍 터미널에 도착해 대전이나 청주를 거쳐 고속버스 또는 열차를 이용하는 것이 낫다.
 
* 잠잘 곳
이번 여행은 1박 2일 일정이었지만 걷기는 둘째 날 하루만 했다. 첫째 날 우리가 머문 곳은 정지용 생가 인근의 춘추민속관이라는 곳이다. 가까운 옥천 읍내에는 여관과 모텔 등 숙박할 만한 곳이 여러 있으나 한옥체험을 할 수 있다 해서 그곳에서 머물렀다. 속리산 아래 서원계곡에는 황토방갈로를 운영하는 곳 한 군데를 제외하고는 숙박할 만한 곳이 없으니 보은읍이나 법주사 쪽으로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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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2 13:20 2009/08/22 1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