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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와 공부

요즘  주변에 '공부'를 하기 위해 그만 두는 기자들이 많다.

 

사실 기자질을 하다보면 공부에 대한 욕구를 강하게 느낀다. 지식사회의 제일 밑바닥에 위치하고 있는 '언론인'으로 공부에 대한 욕구를 느끼지 않는다면 게으른 기자일 게다.

 

인터넷의 발달 등으로 누구나 쉽게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면서 남들이 모르는 정보를 전달하기만 하는 언론의 단순 기능의 비중이 줄어들고 있다. 또 과거처럼 맞서 싸워야할 절대 권력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기록하는 자, 기자 정체성에 대한 많은 의문과 회의가 드는 시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공부하다(정확히 얘기하자면 학위 따다가) 때려치우고 기자질을 하는 나로서는

다시 학위 과정에 복귀한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건 그렇다치고...

 

젊은 기자들이여, 그것도 월급 조금 받고 일하는 마이너매체 기자들이여,

 

당신들은 왜 기자질을 하고 있는가?  

 

나는 왜 기자질을 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처음 기자질을 시작하던 때를 회고해볼 필요가 있었다.

 

실업과 반실업을 전전하던 그때 솔직히 '생존'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뭔가 내가 장기적으로 벌어먹고 살 수 있는 기반으로 기자질을 택한 게

어쩌면 제일 컸을 것이다.

(그나마 내가 좀 소질이 있고, 나를 받아주는 일 중에서 말이다.)

 

그렇게 초보 기자일 때 만난 이들이 주인집 할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것으로 의심되는 6세 여아와 그의 어머니였다.

애석하게도 그 어머니의 직업은 점쟁이였다.

 

내세울 것 없는 직업과 남편 없이 아이를 혼자 키운다는 사실은

그녀의 주장("딸이 집 주인으로부터 수차례 성폭행을 당했다")을

믿기 어려운 진술로 만들었다.

 

돈과 이웃으로부터 신망이 있는 가해자인 집주인은

"돈 때문에 딸 팔아 먹으려 한다"고 주장했고,

경찰도 부족한 물증과 엇갈리는 진술로 인해 가해자의 주장에 동조하는 듯 했다. 

 

우선 피해 아동의 어머니를 만났다.

그 어머니에 대한 인상은 솔직히 좋지 않았다.

숨기는 것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 아동을 처음 봤을 때

그 아이는 분명 성폭력 후유증인 '외상 후 증후군' 증상을 보였다.  

 

따라서 두 사람과 경찰을 인터뷰하고 기사를 작성했으나

데스크로부터 퇴짜를 맞았다.

 

가해자도 만나 보라는 것이었다.

 

가해자를 만나고

경찰을 재차 만나고

점점 그 아동과 어머니에게 불리한 얘기들을 듣게 되면서

난 솔직히 그 어머니를 붙잡고

"도대체 진실이 뭐냐"고 묻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기도 했다.

차마 그러지 못했다.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인데다

피해 아동과 어머니에게 불리한 증거로 할 수 있는 부분도 있어

"성폭력 피해 아동의 치료 등 사회적 보호가 절실하다"는 야마로 기사를 썼다.

취재하면서 아동성폭력은 저소득층 아동에게 집중된 '계층 문제'라는 걸 뼈져리게 느꼈다.

방치되다보니 성폭력을 당하게 되고

성폭력 이후 또다시 방치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었다.

 

그로부터 2년 후 결국 법원에서 가해자의 성폭력 혐의가 인정됐고 그제서야 아이의 어머니는 '누명'을 벗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는 내가 월급 조금 받고 많이 일하면서

좌파적 정체성을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상황을 왕왕 접하는 

마이너 매체 기자라는 사실이 뿌듯했다.

 

(진보적) '기자'와 '학자'가 결국엔 하나의 길을 가야할 운명이라고 믿고

학자가 될만한 지적 능력을 못 갖췄다는 한계를 인정하면서

또 한편으론 좀더 사람들의 삶을 직접 대면할 수 있다는 흥미진진함 때문에

난 햇수로 6년째 기자질을 하고 있다.   

 

좋은 기자의 자세는 아래와 같아야 한다고...늘 스스로에게 다짐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유혹에 약한지라 ㅡ..ㅡ;;;;)

 

"작가라면 늘 아픈 눈을 뜬 채로 있어야 한다. 날마다 창문 유리에 얼굴을 바짝 대고 있어야 하고, 날마다 추악한 모습의 목격자가 되어야 한다. "- 아룬다티 로이

 

"어줍잖은 말이지만 지식인이란 '내가 지향하는 바'와 '실제의 나' 사이에 숙명적인 거리를 갖고 사는 '삶의 코미디언'이다. 지식인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삶이란 그 숙명적인 거리를 어떻게든 줄이려 발악하는 것일 뿐. 그러나 나는 그런 삶을 선택했고 그런 삶의 발악이 더러는 (거의 가능하지 않지만) 세상에 진짜 유익을 주는 일도 있다는 희망을 품은 채, 내 삶을 전진한다." - 김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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