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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아내와 다퉜다

 

며칠 전 아내와 다퉜다. 이미 몇 달전부터 퇴직이 예상되었던 상황에다, 앞으로의 전망조차 불투명하다.

어찌되었던 난 나대로 살아왔던 것이었다.

 

내 아내는, 아주 전투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이다.

아마도 그녀에게 운동이란 것은 '상식' 너머의 것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난 아내의 그 상식을 존경한다.

 

그런데 며칠전엔 바로 상식의 문제 때문에 다퉜다.

이미 두 아이의 엄마인 아내는 내 재취업의 조건으로 적정한 생활비를 요구했다.

이제 태어난지 두달도 안된 아이와, 막 두돌이 지난 천둥벌거숭이를 키우고 있는 아내로선,

당연했다.

 

하지만 이런 조건은 잠정적으로 파산선고가 나버린 내 진로에선 불가능이었다.

 

그런 고민이 깊어가면 갈수록 삶이란 것이 팍팍해지고,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가정의 호사조차 거추장쓰러워 졌다고 느꼈다.

어찌된걸까. 여전히 아내와 두 아이는 내게 축복이고,

나의 이념은 흔들리지 않고 있음에도,

그것들이 저주와 파산으로 다가오다니.

 

초조해 할일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달렸으니, 걸을 때도 있고, 앉아서 잠시 쉴때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오해 쉬지는 못할 것이다. 은행 대출금 이자에, 각종 공과금에 .... .

게다가 첫째에가 어린이 집이라고 갈라치면,

 

정말 내가 절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둘째가 태어나고부터 나와 자고 있는 첫째의 얼굴을 본다.

밖에서 텔레비전이니 책이니 보고, 아이가 누워 있는 방안에 들어가

옆에 누우면 벽쪽을 보고 자던 아이가

내 쪽으로 돌아누우며 팔과 다리를 올려 놓는다.

 

그런 가족이란, 내가 더 떨어지지 않도록 받쳐주는 안전망같은 거다.

그렇게 다퉜는데도 다음날 변함없는 목소리로 '자갸 오늘은 일찍와~~'하고 주문하는

내 아내도 있다.

 

연초에 토정비결을 봤을 땐 이렇지 않았다.

 

그걸 믿지 않았으면 지금의 마음이 더 가벼워 졌을까?

또 다른 선택의 순간이, 아주 많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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