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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공녀 강주룡 뒤엔 ‘사회부 기자’ 오기영이 있었다

체공녀 강주룡 뒤엔 ‘사회부 기자’ 오기영이 있었다

등록 :2018-11-25 09:41

 

 

한국 최초 고공농성의 기록자 

일제 때 을밀대 지붕 위에서 농성한
평양 고무공장 노동자 강주룡
‘동광’ 잡지에 ‘무호정인’이 기사 써 

무호정인은 동아일보 기자 오기영
아무도 강주룡 목소리 듣지 않을 때
귀 기울인 그의 기자정신 돋보여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고공농성자인 고무공장 노동자 강주룡이 1931년 5월29일 임금을 깎지 말라는 49명 파업단의 대표로 평양 을밀대 지붕에 올라 농성을 벌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고공농성자인 고무공장 노동자 강주룡이 1931년 5월29일 임금을 깎지 말라는 49명 파업단의 대표로 평양 을밀대 지붕에 올라 농성을 벌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 역사는 기록에서 출발합니다. 최초의 고공농성자인 여성 노동자 강주룡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한 잡지에 실린 가명(‘무호정인’) 기사 덕분입니다. 그 기사가 있었기에 이후 강주룡의 삶이 잊히지 않고 오늘날까지 회자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안갯속에 있었던 무호정인은 일제 때 사회부 기자였던 오기영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오기영에 대한 글을 현대사를 전공하는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가 보내왔습니다.

 

 

 

올해 광복절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 사회가 기억해야 할 인물로 가부장제와 사회, 경제적 불평등으로 이중삼중의 차별을 당하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여섯 명의 여성 독립운동가를 꼽았다. 평양 평원고무공장의 노동자였던 강주룡이 가장 먼저 언급됐으며, 다른 다섯은 1932년 제주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던 해녀들이다.

 

1931년 강주룡을 비롯한 고무공장 노동자들은 평양고무공업조합의 공장주들이 임금 삭감(17%)을 일방적으로 통보한 데 항의해 단식투쟁을 하며 파업을 벌였다. 파업이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자, 강주룡은 같은 해 5월29일 을밀대(평양에 있는 정자) 지붕 위에 올라가 “끝까지 임금 감하(삭감)를 취소하지 않으면 나는 근로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 뿐”이라며 고공농성에 들어갔다. 경찰에 체포된 뒤에도 단식투쟁을 하던 강주룡은 건강이 악화되어 출감 두달 만에 서른둘의 나이로 숨졌다.

 

강주룡의 삶은 고공농성 한달여 뒤인 1931년 7월 <동광>이라는 잡지에 실린 ‘을밀대상의 체공녀: 여류투사 강주룡 회견기’를 통해 소개됐다. 이 회견기는 강주룡이 을밀대에 올라간 이유는 물론 그의 삶의 내력까지 소개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그 글은 ‘생애의 독백을 속기한’ 일종의 구술자료다. 필자는 ‘무호정인’(無號亭人)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한겨레>는 1991년 연재기사 ‘발굴 인물 한국현대사’를 통해 강주룡을 소개한 바 있다. 이 기사 역시 무호정인이 쓴 글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작성됐다. 이후 강주룡은 한국 사회에서 고공농성이 발생할 때 역사적 원조로 언론에 오르내렸고, 여성 노동운동가·여성 독립운동가의 전형으로도 소개됐다. 지난 7월에는 소설로도 출간됐다. 2018년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체공녀 강주룡>(박서련 지음)이 그것이다. 이 소설도 부록으로 무호정인의 회견기를 싣고 있다. 하지만 무호정인이 누구인지는 제대로 알려져있지 않다.

 

 

‘무호정인’ 필명으로 활약

 

무호정인은 동전 오기영(東田 吳基永)이다. 그가 ‘체공녀’라는 조어의 창시자다. 그 조어는 당시에도 꽤 화제를 불러일으켜서 그 후 계속 강주룡을 따라다녔고, 핍박받는 여성노동자를 상징하는 시대의 아이콘처럼 되었다. 필자는 최근 오기영 전집을 만들기 위해 그가 일제 식민지기와 해방 이후 집필한 글들을 모으는 과정에서 무호정인이 그의 필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기영은 1928년부터 평양, 신의주 등지에서 근무한 동아일보 기자였다. 식민지기와 해방 직후에 그의 호인 ‘동전’ 또는 ‘동전생’이라는 필명으로 문명을 떨쳤고, ‘무호정인’이라는 필명으로도 가끔 글을 썼다. 무호정은 황해도 배천온천 근처 명승지다. 오기영은 1909년 황해도 배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9년에 수양동우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는데 <동광>은 수양동우회에서 발간하던 잡지다. 그는 신문에 연재한 일련의 르포 기사를 가끔 잡지에도 기고했고, ‘을밀대상의 체공녀’처럼 신문에서 소화하기 힘든 내용도 잡지에 게재했다. 그 글이 <동광>에 실린 경위다. 원문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글 곳곳에 ‘중략’, ‘하략’ 표시가 있다. 아마 그 부분의 서술 내용은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동전 오기영이 해방 직후 독립운동과 관련된 가족사를 기록한 책 표지. <한겨레> 자료사진
동전 오기영이 해방 직후 독립운동과 관련된 가족사를 기록한 책 표지. <한겨레> 자료사진
동전 오기영은 어떤 사람인가? 오기영이 학계와 독서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그가 해방 직후 저술한 <사슬이 풀린 뒤>라는 책의 복간이었다. 그가 1946년 3월부터 잡지 <신천지>에 연재한 글들을 모아서 1948년에 출간한 이 책은 반일 혁명가로 평생을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헌신하다 옥살이 후유증으로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그의 형 오기만, 그리고 그와 고통을 함께 나누었던 가족들에 대한 기록이다. 그 책은 형과 형이 가는 길을 응원하며 보살폈던 그의 어머니와 아내에게 부치는 헌사이자 그들에 대한 필자 오기영의 회억의 산물이었다. 이어서 해방 직후의 정치·사회 상황에 대한 그의 평론들이 당대사 증언으로 다시 주목을 받았고, 그의 칼럼들이 보여준 예리한 통찰력으로 인해 그가 당대인들 사이에서 누렸던 명성을 후대인들 사이에서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성균관대 출판부는 2002년 <사슬이 풀린 뒤>와 함께 해방 직후 출간된 <민족의 비원> 등 그의 평론집들 역시 복간했다.

 

그가 강주룡을 인터뷰했을 때 스물셋이었으니 강주룡보다 여덟살이나 아래였다. 스물셋의 젊은 나이였지만 그 누구보다 평양 사회운동계 동향을 잘 알고 있다. 그가 열한살 때 일어난 3·1운동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3·1운동이 그의 고향인 배천을 휩쓸고 지나간 기미년 연말에 오기영과 급우들은 감옥에 갇힌 선생님을 뵈려면 자신들도 만세를 불러 감옥으로 잡혀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교내외에서 만세를 불렀다. 그들은 헌병대에 연행되어 그 어린 나이에도 아카시아나무 생가지로 볼기를 얻어맞는 고문을 당했고, 그 사건은 헌병 보조원의 협박과 강요로 또 다른 선생님을 애꿎게 징역살이 시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의 형 오기만 역시 그 후 만세시위를 조직하다가 발각되어 해주 감옥에 갇혔다. 배천읍 3·1운동의 주모자로 그의 부친 역시 옥살이 중이었는데 두 아들도 아버지를 따라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21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가세가 기울자 1924년 봄에 고향에 돌아와 아버지, 형과 함께 과수원을 일구면서 배천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의 소년회, 청년회 활동에 참여했다. 1928년 여름에는 신간회 지회 창립 모임에 참석해서 축사를 했다가 해주 감옥에서 잠시 옥고를 치렀다. 1926년 동아일보 배천지국 기자가 되었고, 1928년 3월에 정식으로 평양 주재 기자가 되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부산, 평양, 신의주에 특파 기자를 두었다. 그의 나이 불과 스무살 때이고, 변변한 학력도 없던 그가 정식 기자로 발령받은 것을 보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필력을 인정받았던 셈이다.

 

 

향토 평양을 사랑했던 사회부 기자

 

그는 기자정신이 투철한 사회부 기자였다. 자신을 낮추어 ‘3면 기자’(3면은 사회면)로 칭했으나 해방 이후 동료 기자들은 그를 ‘신문계의 일재(逸才)’ 또는 ‘한때 화려했던 외근기자’라고 평했고, 기자 사회가 모두 그의 남다른 필력을 인정했다. 그는 기자활동 내내 왕성한 필력을 과시했다. 특기할 것은 보도기사 외에 르포 형식의 많은 연재기사를 썼다는 것이다. 1929년에는 ‘전조선 모범농촌 조사’, ‘고해순례: 광부 생활조사’, ‘압록강상 이천리’ 등을, 1930년에는 ‘신문소고’, ‘강서대관’, ‘황해수리조합은 당연히 해산하라’ 등을 연재했으며, 이후에도 ‘평양 차지·차가 문제 좌담회’, ‘강동 대박산에 있는 단군릉 봉심기’, ‘회고의 유경(柳京) 팔년’, ‘전조선 철도 예정선 답사기: 동해선’ 등의 연재기사를 남겼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대부분 민중의 삶의 현장과 생활상에 대한 기록이거나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는 향토지 또는 기행기였고, 신문 비평도 빼놓지 않았다.

 

1947년 흥사단 제2차 국내대회에 참가한 동전 오기영(가운데 화살표). 일제 때 <동아일보> 평양 주재기자를 지낸 오기영은 ‘을밀대상의 체공녀’ 기사를 잡지 <동광>에 가명으로 쓰는 등 사회부 기자로 필명을 날렸다. <한겨레> 자료사진
1947년 흥사단 제2차 국내대회에 참가한 동전 오기영(가운데 화살표). 일제 때 <동아일보> 평양 주재기자를 지낸 오기영은 ‘을밀대상의 체공녀’ 기사를 잡지 <동광>에 가명으로 쓰는 등 사회부 기자로 필명을 날렸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는 평양에 대해 자신을 길러준 곳으로 남다른 애정을 표시했고, 평양의 역사와 문화뿐만 아니라 당대의 실정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그의 평양에 대한 애정은 그저 향토애 차원의 것은 아니었다. 일찍이 고향에서 사회운동가로 일했던 경험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특파 기자로 부임한 뒤 평양 지역의 사회운동과 일정한 연관을 맺었다. 부임 직후 중소 상공인들을 중심으로 평양상공협회를 조직하는 데 일조했다. ‘전조선 모범농촌 조사’는 주로 관서지방과 해서지방에서 이루어졌는데 그가 연재에 주도적 역할을 했을 테고, 그 나름대로 농촌문제 해결책을 모색해가는 과정에서 실시한 조사의 성격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30년에 잡지 <별건곤>에 ‘평양 사회단체 개관’과 ‘평양 고무공장 쟁의 전적(戰跡)’을 실었는데, 전자는 신간회 평양지회, 조선노동총동맹 평양연맹 등 사회단체의 현황과 진로에 대한 소개이자 분석이고, 후자는 강주룡의 고공농성이 있기 1년 전에 일어난 평양 고무직공 파업의 실패 원인을 분석한 글이다. 그는 평양 지역의 사회운동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참여관찰자의 눈으로 그 향배를 예의 주시했고, 나름의 분석을 곁들여 그것을 정리했다. 그는 1930년 고무직공 파업 실패의 원인 분석에서 피아 역량 관계나 경찰의 강압보다 정세 분석의 소홀함과 준비의 부족, 통일적이지 못한 지도, 노동자의 단결 부족 등 주체적인 요인에 더 무게를 두었는데 그의 예리한 안목과 풍부한 현장 경험을 보여준다. 고무직공 파업은 그에게 전혀 낯선 주제가 아니었고, 평양 지역 사회운동에 대한 나름의 안목 덕분에 강주룡 회견도 가능했다.

 

 

이 시대 오기영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강주룡에 주목하는 이유는 언로를 얻지 못해 옥상으로, 전광판으로, 타워크레인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이 여전히 양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뼈아픈 것은 기성 언론들 가운데 그들이 고공에 올라가 ‘체공녀’와 ‘굴뚝남’ 또는 ‘타워크레인녀’와 ‘전광판남’이 되기 이전에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언론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오기영과 강주룡의 만남에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고, 무호정인이 오기영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약 90년 전에 발표된 짧은 회견기 하나가 오늘을 사는 작가의 상상력을 개화시킴으로써 우리 사회는 또 하나의 귀중한 문학적 성취를 향유하게 되었고, 또 과거와 현재를 잇는 튼실한 매듭을 하나 더 가지게 되었다.

 

강주룡이 을밀대에서 농성을 했을 때 전국지인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그리고 평양의 지방지 모두 그의 농성을 취재했지만 어느 신문도 여성 노동자 강주룡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기영은 강주룡의 이야기를 기록했고, 그것을 신문에 기사로 싣는 것이 여의치 않자 자신이 간혹 글을 게재하던 잡지를 통해 강주룡이 하고 싶어 하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렸다. 언론이 저널리즘의 본령을 지키기보다 앞장서서 프로파간다의 도구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세태라 현장을 지키는 그의 기자정신이 더욱 그립다.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871627.html?_fr=mt1#csidxa79d603789a4b0f96e729d5c88bd55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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