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당신이 허리디스크 때문에 진통제를 먹어야 하는 직장인이라면, 사표 내고 건강 지키기 vs 참고 일해서 소득 지키기 중 무엇을 택할 것인가?
난이도 극악의 밸런스 게임 같지만, 이건 현실 선택지다. ‘아프면 쉰다’, 정부의 생활방역 제1 수칙을 지킬 수 있는 노동자는 극소수다. 병가제도가 없기 때문이다. 취업규칙에 유급 병가가 명시된 경우는 10명 중 1명도 안 된다. 무급 병가까지 포함해도 10명 중 4명뿐이다. 노동자 절반 이상이 아파도 참고 일한다. 지난해 9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결과다.
당장 생계 걱정에 건강과 소득 중 소득을 택하지만, 결국 건강도 잃게 된다. 코로나 시대에 선명해진 불평등이다. 구로 콜센터 집단감염은 확진자가 발열 증세에도 퇴근하지 못하면서 시작된 비극이다. 광주에서 확진되고 도주한 일용직 노동자는 영광에서 일하다가 발견됐다. 택배 노동자들은 백신 휴가가 없어 접종을 포기하거나 접종 후 일하다가 쓰러지고 있다.
코로나 시대, 아프면 쉬어라? 쉴 수 있는 제도는 없다!
병가제도는 아픈 노동자에 대한 해고를 막기 위한 제도다. 일하다가 다치거나 병을 얻으면 산업재해로 인정돼 보호받을 수 있다. 일과 상관없이 다치거나 병에 걸려도 보호받을 수 있게 한 제도가 병가다. 병가제도는 사용자에게 고용유지 의무만 지운 무급 병가와 소득보장 책임까지 부과한 유급 병가로 나뉜다.
병가제도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상병수당도 있다. 상병수당은 아파서 쉬는 경우 소득의 일부를 보전해주는 제도다. 건강보험을 운영하는 나라는 건강보험에서 상병수당을 지급한다. 많은 나라에서 유급 병가를 뒷받침하는 역할로 상병수당을 활용하고 있다. 병가 기간을 넘어 장기요양이 필요한 경우 상병수당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한국에는 현재 업무 외 이유로 아픈 노동자를 보호할 제도가 없다. 고용보험법에 따른 상병급여는 실직 후 아파서 구직하지 못할 때 받을 수 있다. 일하던 중 아프면 받을 수 없다. 남녀고용평등법으로 가족돌봄휴가는 보장하지만, 정작 자신을 돌보는 휴가제도는 없다. 메르스 사태 이후 감염병예방법에 유급휴가가 도입됐지만, 의무조항이 아니라서 유명무실하다.
건강보험에서도 소득을 보전해주지 않는다. 일부 의료비를 지원할 뿐이다. 그러나 소득보전이 안 되면 빈곤과 질병의 악순환에 빠진다. 아플 때 돈 걱정 없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하는 건강보험 가입 이유가 무너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건강보험의 빈자리를 민간보험으로 메꾸고 있다. 수많은 민간보험들이 질병에 걸리면 ‘무조건 얼마를 지급하겠다’고 광고하는 이유다. 공적 체계의 부재로 각자도생에 나선 것이다.
정형준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녹색병원 재활의학과장)은 “의료비만 지원하는 반쪽짜리 건강보험은 박정희 시절 빨리 치료해서 빨리 일터로 돌아오게 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유럽은 휴식이 먼저다. 감기나 근골격계 질환은 쉬면 낫는다. 그런데 우린 쉴 수 없어서 약을 많이 먹고 주사를 많이 맞는다. 의료서비스 공급구조도 기형적으로 변했다”고 지적했다.
유급병가와 상병수당이 코로나 확산을 막았다는 연구결과들
한국인만 아파도 출근한다. OECD 35개국 중 한국과 미국만 유급 병가와 상병수당이 없다. 그나마 미국은 법정 무급 병가를 두고 있고, 코로나 이후 주별로 유급 병가를 임시 도입했다. 세계 184개국 중 유급 병가와 상병수당 모두 없는 국가는 11개국뿐이다. 한국보다 1인당 GDP가 낮은 153개국도 시행 중이다.
특히 코로나 시대에 유급 병가와 상병수당은 확대되고 있다. OECD 38개국 중 16개국에서 유급 병가를 일시적으로 시행하거나 확대했다. 상병수당도 대기시간 폐지, 지급 대상·기간·금액 확대 등 방식으로 보장성이 강화되고 있다.
유급 병가가 코로나 확산을 막았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는 점에서 필요성은 더욱 강조된다. 미국은 코로나 이후 임시 조치로 ‘가족 우선 코로나 대응법’(FFCRA)을 통해 사업주에게 유급 병가와 가족 돌봄 휴가를 제공하도록 했다. 연구결과 이를 도입한 주에서 그렇지 않은 주에 비해 확진자가 약 절반에 불과했다. 전진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정책국장은 “꼭 필요할 때 거리두기가 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미국의 발 빠른 조처는 과거 경험에서 비롯됐다. 2009년 미국에서 HINI 인플루엔자 대유행 시기 재택근무가 어렵거나 유급 병가가 없는 경우 질병 위험이 약 50% 증가했다는 연구가 있었다. 당시 약 7백만 명이 감염된 원인으로 유급 병가가 없는 노동자의 무리한 출근이 지목되기도 했다. 오바마 정부는 이 시기 이후 상병수당 도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유급병가와 상병수당 도입의 조건
유급 병가는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제도화할 수 있다. 사용 대상, 휴가 기간, 급여보장 수준, 신청 요건, 진단서 제출 의무 등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다만 국가공무원 복무규정에서 연 최대 60일 유급 병가를 규정하는 만큼, 이를 기준 삼으면 논의가 수월해질 것으로 보인다.
가장 큰 쟁점은 불안정 노동자의 쉴 권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다. 공공분야 및 대기업 정규직 대다수는 지금도 아프면 쉬고 있다. 2018년 한국노동패널에 따르면 민간기업 중 1000인 이상 사업장 80.6%가, 300~1000인 미만 사업장 71.1%가 유급 병가를 도입했다. 반면 1~5인 미만은 12.3%, 5~10인 미만은 15.5%에 불과했다. 고용형태별로 보면 정규직은 59.5%, 비정규직은 18.7%였다.
사업장 규모가 작을수록 유급 병가가 형식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비용 부담뿐 아니라 대체인력도 문제다. 국민입법센터에서 활동하는 박현서 변호사(법무법인 율립)는 “병가제도가 도입돼도 연차부터 소진하라는 사업주 압박이 있을 수 있다. 현장에선 인력 부족으로 연차도 제대로 쓰지 못한다. 내가 안 나가면 동료가 힘들어지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정훈 민주노총 정책국장은 “기업이 가장 큰 부담을 느끼는 지점”이라며 “사용자가 대체인력을 못 구했다며 병가 신청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사업장 규모에 따라 병가 비용과 인력 지원에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특수고용직, 플랫폼 노동자, 자영업자 등은 근로기준법이 개정돼도 유급 병가를 쓸 수 없다. 법적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유급 병가를 쓸 수 있는 노동자보다 상병수당을 앞당겨 지급하는 방안이 대안으로 제시된다. 건강보험은 전 국민 의무가입인 만큼 사각지대가 최소화될 수 있다. 이때 상병수당 지급까지의 대기 기간은 3일을 초과하지 않도록 한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이 기준이 될 수 있다.
이 외에도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을 통한 상병수당 도입에 있어서 ILO 협약은 중요한 기준이다. 기존 임금의 최소 60% 이상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점, 최저 보장비가 최저임금 80% 수준이어야 한다는 점, 최대 보장비를 정해 격차가 커져선 안 된다는 점, 노동자 부담비율이 전체 재정의 50%를 넘겨선 안 된다는 점 등이다.
상병수당은 병가제도보다 비교적 도입이 수월해 보인다. 이미 국민건강보험법에 상병수당이 적시돼 법정 근거도 있는 상황에, 비용 부담을 외치는 경영계 반발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병수당 역시 최대 걸림돌은 재원이다.
전문가들은 재원 조달에 큰 문제가 없다고 강조했다. 건강보험정책연구원은 상병수당을 최대 1년간 이전 소득의 50%를 지급했을 때 연간 8천억에서 1조5천억 원 정도가 든다고 보고 있다. 전진한 국장은 “올해 건강보험 재정이 70조 원에 달하는 것과 비교하면 큰돈은 아니다”고 지적했다.
이어 “특히 정부가 매년 (법으로 정해진) 국고지원금을 수조 원 미납해 지금껏 28조 원을 안 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정부가 법만 제대로 지켜도 충분히 상병수당을 시행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형준 위원장 역시 “국고지원금으로 충분히 가능하다”며 “건강보험료 인상 반대 여론 때문에 상병수당 못 한다는 건 국민 탓하기 프레임일 뿐”이라고 꼬집었다.
병가제도와 상병수당 도입 과정에서 빠지지 않는 목소리는 노동자의 도덕적 해이다. 반면 오히려 기업의 도덕적 해이를 우려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정훈 국장은 “법제화 이후 기업들이 이미 높은 수준으로 보장하던 기준을 낮추려고 할 수 있다. 또 병가제도 없이 상병수당만 도입될 경우 기업의 고용유지 책임이 완화되는 건 아닌지 살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부 의지가 중요하다
국회에 관련 법안들이 발의돼 있다. 하지만 이 법안들은 미흡하다고 박현서 변호사는 지적했다. 유급 병가의 경우 평균임금의 60%만 지급하는 등 보장수준이 낮거나 해고 위험을 제거하지 않은 점 등이 문제로 지목됐다. 상병수당의 경우 구체적 사항을 대통령령으로 위임해버려 유의미한 법안이 나오지 않았다는 비판이다.
더 큰 문제는 정부의 논의 속도다. 복지부는 내년 7월부터 3년간 한국형 상병수당 시범 사업을 하겠다고 밝혔다. 전면 도입 시기는 미지수다. 지난 4월 출범한 전문가 자문위원회는 정책 결정보단 쟁점 논의 수준에 그치고 있다. 기본적인 제도 도입에 논의가 너무 더디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이정훈 정책국장은 “정부가 시범사업을 하면 보통 법제화가 미뤄진다. 논의를 서둘러야 한다”고 비판했다.
내용도 문제다. 시범사업을 통한 보장수준은 이전임금이 아닌 최저임금의 60%에 불과하다. 정형준 국장은 “일당 정액으로 지급하면 최소한의 장벽만 마련하는 셈”이라며 “자신이 낸 돈에 비례해 상병수당을 받을 수 있게 해야 소득을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 정액제는 실질 소득도 보전해주지 않고 건강보험료 수용성도 늘리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유급 병가와 상병수당 도입은 정부의 의지 문제라고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말했다. 전진한 국장은 유급 병가와 상병수당이 단계적 일상 회복, 즉 위드코로나 시기 방역과 경제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방역을 풀어 사람을 죽이거나 방역을 조여 경제를 어렵게 하는 두 가지 선택만 있는 게 아니다. 미국에서 확진자가 줄어들지 않았나. 정부가 재정을 써서 유급 병가와 상병수당을 도입해야 한다. 한국은 코로나 대응 정부지출로 지난 7월 기준 GDP의 4.5%만 썼다. OECD 평균 17.3%에 크게 못 미친다. 생계와 생명 사이 정부의 저울질이 아슬아슬하다.”
정형준 국장 역시 “유급 병가와 상병수당을 도입해 일시적으로 거리두기를 완화할 수 있다. 재난지원금 등 경제적 타격 이후 사후 보상뿐 아니라 예방적 보상도 필요하다”며 “유급 병가와 상병수당은 잘하냐 못하냐 문제가 아니라 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코로나시대의 노동
코로나19 펜데믹은 한국사회의 노동을 둘러싼 불평등을 선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아프면 쉬세요’ 캠페인이 진행됐지만 현행 법에 유급병가와 상병수당은 보장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유급병가를 쓰지 못하는 노동자는 가족을 돌보기 위해 일자리를 그만 둬야 했습니다. 그렇게 맞벌이 가정의 수입이 줄자, 물류센터로 투잡을 나서는 사람들이 늘었습니다. 심야노동에 대한 제한이 없는 물류센터는 죽음의 현장이었습니다. 펜데믹은 또 돌봄과 돌봄노동자를 둘러싼 불평등도 선명하게 드러냈습니다.
민중의소리는 코로나 시대 노동의 불평등 문제를 현장과 전문가들을 광범위하게 취재하고, 국민입법센터와 함께 법제도적 대안을 찾아봤습니다. 이번 시리즈 기사는 현장의 현실을 잘 드러내는 것과 함께 구체적인 ‘법 개정안’ ‘법 제정안’을 제시함으로써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해법’을 도출하는 데 나아갔습니다.
총 5분야, 10개의 기사로 구성된 이 시리즈는 4개 분야는 하나의 기사로 갈음하고, 코로나 펜데믹 상황에서 사회의 주요 문제로 떠오른 ‘돌봄’에 집중해 시리즈 내의 시리즈로 6개의 기사를 준비했습니다.
①병가제도와 상병수당:아프면 쉬어라? 아프면 쉬어라? 한국인만 아파도 출근한다
②정리해고자 재고용권:‘정리해고자’ 성기훈은 456억에 목숨 걸지 않을 수 있었다
③야간노동 제한:새벽배송 경쟁시대, 야간노동 ‘헬게이트’ 열고 있다
④돌봄국가책임제와 돌봄노동
④-1 이용자도 돌봄노동자도 우울한 돌봄 현장
④-2 요양시설 3년 운영하면 건물이 뚝딱 생긴다?
④-3 돌봄노동자의 현실 1:최저임금마저도 빼앗기는 돌봄노동자
④-4 돌봄노동자의 현실 2:휴게시간 보장으로 임금을 빼앗았다
④-5 돌봄노동자의 현실 3:폭력에 노출돼 있는 위험한 현장
④-6 돌봄기본법과 돌봄노동자기본법이 필요하다
⑤노동자성과 사용자의 확대, 새로운 교섭의 시대로
※ 이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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