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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힙쟁이] '나눔꽃' 대표 온빛, 안전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작은 도전
21.12.31 18:57l최종 업데이트 21.12.31 18:57l
귀농·귀촌 1번지 지리산권(구례, 남원, 하동, 함양, 산청)에 사는 청년들은 독특하다. 퀴어, 페미니즘, 동물권, 비혼·비출산, 탈성장 등 진보적 의제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풀어내고 작지만 놀라운 실험을 벌인다. 그들은 왜 지리산 시골을 무대로 택했을까. 이전 귀농·귀촌 세대와 무엇이 다를까. 남원시 산내면 등을 중심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편집자말] |
▲ 온빛은 4년 전 홀로 전북 남원으로 내려왔다. 그는 자원순환가게 '나눔꽃'을 운영하며 씩씩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 김혜리
'나눔꽃'은 전북 남원시 산내면에 있는 자원순환가게이자 지역 핫플레이스다. 주민들이 기부한 옷과 물건들을 최소한의 금액에 재판매해 생태·친환경 문화에 힘을 보탠다. 귀촌한 돌쟁이 아기 엄마 둘이 '우리 마을에도 아름다운가게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으로 2012년 2월 문을 열어 약 10년 가까이 운영된 역사 깊은 곳이다.
지금까지도 40대 기혼 여성들을 주축으로 돌아가는데, 딱 한 명 비혼 여성이 있다. 20대 청년이자 나눔꽃의 대표인 온빛(26)이다.
온빛은 '나 홀로 귀촌' 4년차다. 동네 어른들은 "이런 시골에서 뭐 먹고 살 거야", "여자 혼자 살면 위험해"라고 걱정 어린 잔소리를 건네지만, 정작 그는 친구도 사귀고 공부도 하고 일도 하고 대표도 맡으며 멋지게, 씩씩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지난 11월 24일 오후 나눔꽃 옆 살림꽃 공방에서 온빛을 만났다. 살림꽃은 나눔꽃에 들어온 옷 등을 리폼, 새활용(업사이클링)하는 협동조합이다. 그는 나눔꽃을 운영하며 살림꽃에서도 활동 중이다.
반짝거리지 않아도 괜찮아
▲ 온빛은 세월호 참사 3년을 맞아 진행한 4.16 순례길에서 산내 생명평화대학을 알게되면서 자연스레 남원에 정착했다. 그는 이곳에서 1년 동안 공동체 생활을 하며 대안적인 삶에 대해 배워나갔다. ⓒ 김혜리
처음부터 '귀촌해야지', '시골에 가야지' 결심하고 산내에 온 건 아니었다. 우연히 길 위에서 알게 된 대안대학 공동체를 찾아갔는데, 그곳이 마침 지리산 산골이었다.
경북 울진에서 나고 자라 경남 창원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그는 휴학 후 친구들과 2017년 세계여행을 떠났다가 사정이 생겨 일찍 돌아오게 됐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던 그에게 주변 어른이 '4.16 순례길'을 권했다. 세월호 참사 3년을 맞아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염원하며 인천항에서 팽목항까지 53일간 걷는 행사였다.
온빛은 군산에서부터 순례에 합류했다. 서해안 뱃길이 보이는 해안선을 따라 수백 킬로미터를 걸으며 다양한 결을 지닌 사람들을 만났고, 그동안 굳게 믿어온 성공의 정의가 달라지는 경험을 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오로지 대학 합격만을 목표로 공부만 했어요. 대학에 들어가서야 세상에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을 좀 뜨게 됐지만 여전히 성공 하면 반짝거리고, 돈 많이 벌고 유명해지는 건 줄 알았어요. 저 또한 그렇게 돼야 하는 줄 알았고요. 근데 길 위에서 참가자들과 걸으며 성찰을 하다 보니 그건 제가 원하는 성공이 아니더라고요.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지금을 살아가는 것, 그게 제가 바라는 삶이었어요. 가치관이 바뀐 거죠."
그는 순례길에서 대안대학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고, 그중 실상사 도법스님이 만든 산내 생명평화대학에 2018년 입학했다. 1년간 공동체 생활을 하며 자연 곁에서 스스로 살림을 꾸려가는 법을 배우며 대안적인 삶을 어렴풋이 알아갔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졸업 후엔 학교 기숙사를 나가야 했다. 다행히 실상사에서 100일간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줬지만 그는 막막했다. 행정주소만 산내일 뿐, 공동체에 있는 동안에는 마을 사람들과 만날 일이 없어 아는 사람 한 명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도시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당장 어디서,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 고민하던 중 운 좋게 일자리 제안이 들어왔고, 동네 또래친구들이 머무는 셰어하우스에 자리가 났다.
▲ 온빛은 졸업 후 기숙사를 나오게 되면서 부딪힌 장벽을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그는 '당장 어디서, 어떻게,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 부터 '언제 떠날 거냐'는 주민들의 냉대에 힘이 들었지만 지지해주고 연대해주는 사람들 덕분에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 김혜리
2019년 6월, 본격적으로 산내 마을살이가 시작됐지만 초반엔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감을 못 잡았다. 이전과 다른 삶을 원하지만 내가 원하는 '다름'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다. 대안적 삶이 나와 맞을까 망설였다.
기대와 다른 마을 현실도 또 하나의 장벽이었다. 일부 마을 주민들은 온빛을 만나면 "그래서 언제 떠날 건데?"라고 물었다. 가족 단위는 정착할 확률이 높지만 청년을 '언제든 떠날 사람'이라는 인식이 짙었다. 간혹 마주치는 냉대에도 피곤해졌다.
귀농·귀촌으로 유명한 산내 특성상 도시에서 온 사람이 많아 새로운 흐름에 열려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온빛이 알고 있는 페미니즘을 몇몇 어른들은 공감해주지 못했다. 아저씨들이 지나가며 건네는 '예쁘다'는 말이 듣기 싫었고, '남자친구 있냐'는 질문이 답답했다.
셰어하우스에서 나와 독립한 뒤엔 동네 어른이 '절대 여자 혼자 산다고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걱정해주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약한 존재로만 여기는 것 같아 불편했다.
힘들어하는 그를 보듬어준 것 역시 페미니즘, 그리고 이웃이다. 온빛은 마을 페미니즘 책 읽기 동아리에 들어가 같은 생각과 고민을 공유했고, 여성학자 박이은실이 산내에서 운영하는 '아주 작은 페미니즘학교 탱자'에 들어가 여성과 젠더 등을 공부했다.
"불편하고 이상하다 느낀 감정과 감각들이 언어화되면서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깨닫는 소중한 시간이었죠. '네 감정이 맞다'고 지지·연대해주고 '힘들면 언제든 불러'라고 말해주는 '언니'들 덕분에 산내에서 더 잘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모두에게 안전한 공간을 꿈꾸며
▲ 마을 여성들의 바느질 공간이었던 살림꽃은 온빛과 구성원들에 의해 새활용 마을공방으로 재탄생했다. 온빛과 동료들의 노력을 아는 마을 주민들 덕분에 "더 잘하고 싶어진다"며 고마움을 표현했다. ⓒ 김혜리
나눔꽃에서 활동한 건 2020년부터다. 생태주의와 비거니즘(동물권을 옹호하며 종 차별에 반대하는 사상)을 알아가면서 자원순환에도 관심을 뒀는데, 나눔꽃 멤버가 와서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자연스레 살림꽃에도 참여하게 됐다. 전임자의 권유로 올해부터는 나눔꽃 대표도 맡고 있다.
그가 오면서 나눔꽃과 살림꽃에 변화가 일었다. 나눔꽃에선 한달에 300벌의 옷이 순환될 정도로 교류가 활발하지만, 물건 당 1000원~2000원에 판매하다 보니 수익이 미미하다. 월 30만 원 정도를 가지고 자원봉사자에게 나눠주는 정도다. 온빛 역시 삼선재단에서 지역 청년활동에게 지원하는 소정의 활동비를 받으며 생활한다.
누군가 입던 옷, 쓰던 물건이라는 인식이 강한 것도 나눔꽃 확장에 걸림돌이 된다. 누군가 다시 입거나 쓸 수 있는 깨끗한 상태로 보내야 하지만 가끔 더럽거나 망가진 채로 오기도 한다. 좋은 가치를 추구하는 일을 넘어 수익·이미지의 개선이 필요했다. 지역 시민단체인 지리산작은변화지원센터 지원사업에 응모해 사연 인터뷰와 전시회를 열고 나눔꽃이 얼마나 지역에 중요한 자산인지 알렸다.
들어온 물건의 장점과 사연도 페이스북을 통해 열심히 홍보 중이다. 한번은 아이 옷 사진 게시물에 달린 한 주민의 댓글이 화제기 됐다. "이거 10년 전 제가 냈던 건데... 우리 아이가 어렸을 때 입던 게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으니 신기하네요." 아이들 장화 옆에는 신었던 아이들의 이름이 줄지어 적혀 있다. 온빛과 동료들의 노력을 아는 마을 주민들은 고마움을 표한다. "그런 걸 보면 재밌고 뿌듯해 나눔꽃 활동을 더 잘하고 싶어진다"고.
▲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자원순환가게 '나눔꽃' 내부 ⓒ 김혜리
▲ 전북 남원시 산내면 살림꽃 협동조합 펼침막 ⓒ 김혜리
살림꽃 역시 지금의 협동조합이 된 건 올해 4월부터다. 이전까지는 그저 마을 여성들의 바느질 공간이었다. 업사이클링 활동의 가치를 오래, 더 널리 지속하고 싶어 온빛과 구성원들이 남원시 농촌 신활력플러스사업에 지원해 새활용 마을공방으로 재탄생시켰다. 이제는 수익이 생기면 조합원들이 나눠가지는 구조다.
살림꽃에서 새활용한 제품은 가방, 수납 바구니, 필통, 책꽃이, 물병 주머니 등. 지난여름에는 쓸모를 다한 청바지와 안 입는 유아 원피스로 '힙한' 버킷햇을 만들어 판매했는데 온·오프라인에서 인기가 좋았다.
"좋은 공익활동이니까 친구들에게 같이하자고 제안하고 싶은데 말을 못해요. 급여를 줄 만큼 수익이 안 나니까요. 어떻게 구조를 바꿀 수 있을까 고민 중이에요. 단 한 명이라도 인건비를 받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싶어요. 사업적 관점이 필요한 것 같아요. 내년엔 브랜딩·마케팅 측면에서 집중해보려고요. 가치를 계속 잘 전달하다 보면 수익적으로도 활로가 생기지 않을까요."
올해 들어 '에코페미니즘'을 삶의 방향으로 정한 온빛은, 적어도 이곳만큼은 모두에게 불평등하지 않길 바라며 새로운 상상을 한다. 비건(완전채식)을 실천하게 된 온빛은 올해 친구들과 '오이밥(오 이런 밥상이)'이라는 채식 모임을 만들어 함께 요리하고, '쑥덕쑥덕 채식 수다회'를 열어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밖에도 지리산 산악열차 반대,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사건 피켓팅 등 친구들과 함께 마을에서 꾸준히 목소리를 내오고 있다. 최근엔 '성폭력 근절을 위한 지리산여성회의'에 참여해 지역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에 대응하고 성폭력 근절을 위한 워크숍을 함께 기획한다.
"도시 활동가 중에서 산내에 놀러왔다가 살게 된 친구들이 꽤 있거든요. 앞으로도 산내를 누구에게나 안전한 공간, 살고 싶은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요. 안전함을 느끼도록 해주는 좋은 친구와 어른들이 있으니 언제든 오세요. 환영입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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