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렸던 군인의 눈, 견고했던 국민의 행동’
‘45년 동안 시나브로 쌓인 민주주의라는 희망’

폭행 사건이라 했을 때 판사보다 빠르게 피의자의 범죄혐의를 식별할 수 있는 건 피해자와 목격자들이다. 이번 ‘12·3계엄사태’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 피해자이며, 당시 국회로 달려온 시민, 보좌관, 기자 모두가 목격자였다.

이를 두고 아직도 ‘내란 혐의 해석 여지’를 운운하는 국민의힘을,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이라면 내란동조집단으로 확신할 수밖에 없다. 추후 증언들로 드러난 내막은, ‘내가 45년 전 오늘 대공분실에 끌려갔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다행히 그런 비극은 우리 안에 내재한 민주주의로 막을 수 있었다. 위헌적 상황에서 군인의 눈은 흔들렸고, 국민의 행동은 견고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4일 새벽 서울 영등포구 국회 정문 앞에서 시민들이 윤석열 대통령 퇴진 촉구 구호를 외치고 있다. ⓒ 뉴시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4일 새벽 서울 영등포구 국회 정문 앞에서 시민들이 윤석열 대통령 퇴진 촉구 구호를 외치고 있다. ⓒ 뉴시스

12월 3일 22:28

술을 마시던 중 기사를 보고 알았다. ‘[속보] 尹대통령 “비상 계엄 선포”’ 눈을 의심했다. 곧바로 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대책을 논의했다. 국회 출입을 하던 내가 먼저 택시를 타고 국회로 출발했다. 

이미 어느 정도 인파가 몰려있었다. 가장 먼저 눈으로 확인한 건 경찰이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는 모습이었다. 국회의원도, 보좌관도, 기자도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상황을 기록했다. 

앞에서 “의원님은 들여 보내줘야 할 거 아냐!” 고성이 들렸다.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니, 시각장애인인 서미화 의원이 경찰에 막혀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아니다”란 생각에 순간 화가 치밀었다. 

계엄이 선포된 상황에서 당장 가장 시급한 건 의원들의 본청 진입이다. 취재를 잊고 본능적으로 경찰과 몸싸움을 시작했다. 기자도 계엄은 막아야 했다. 계엄사의 언론 통제는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계엄사령부는 4일 보도처를 설치해 언론을 통제할 생각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비상식적인 상황에 경찰과 몸싸움을 이어가던 중, 서미화 의원이 더듬거리는 손으로 정문을 잡더니 담을 넘기 시작했다. 너무 위태로워 보였다. “앞에서 받아달라”고 소리쳤다. 다행히 건너편에 있던 직원이 서 의원을 안전히 받아줬고, 본청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했다.

대부분 국회의원이 정문으로는 오지도 않았다는 걸 나중에 들었다. 어차피 경찰이 막고 있으니 비교적 인파가 없는 다른 곳에서 담을 넘어 들어간 거다. 평소 자신들의 의정활동 홍보에 열을 내는 모습과 대조됐다. 당시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의원들에게 홍보는 사치였다. 

내가 현장에서 본 서 의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항의하거나 고성을 지르지도 않고 경찰에 의해 가로막혔단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더듬거리는 손으로 문을 잡고 촉각에만 의지한 채 담을 넘었다.

잠시 후 정문이 뚫렸다. 기자와 보좌진들은 어서 들어가라는 소리를 듣고 서둘러 들어갔다. 고민정 의원, 조국 의원도 이때 들어갔다. 서둘러 본청으로 가던 중, 머리 위에서 헬기 소리가 들렸다. 내 눈으로 확인한 헬기만 5대였다. 

11시 40분경, 이윽고 총을 멘 군인들이 본청에 나타났다. 순간 내가 교과서에서, TV에서나 봤던 5·18 관련 사진, 영상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갔다. “설마 나 오늘 총 맞나?” 생각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몸싸움 중에도 서로 자극하지 않으려는 군과 보좌관들 ⓒ 김준 기자
몸싸움 중에도 서로 자극하지 않으려는 군과 보좌관들 ⓒ 김준 기자

군인들은 본청으로 진입하려 했다. “남성 직원들 도와달라”는 소리를 듣고, 난 한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상황을 기록하면서도 함께 군의 진입을 막았다. 

 

앞뒤에서 가해지는 압박에 숨을 쉬기 힘들었다. 그 와중에도 군인과 보좌관들은 서로에게 ‘다친다’며 ‘회전문 사이에 손가락이 끼지 않게 유의하라’고 당부했다. 몸싸움을 벌이는 상황에서도 서로 자극하지 않으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본청 진입이 녹록지 않자, 군인들이 뒤로 빠졌다. 처음에는 돌아가는 듯했으나, 측면에서 창문을 깨고 진입하려던 거다. 군이 들어간 걸 확인하고 급하게 국회 본청으로 들어갔다. 본회의장 앞에는 보좌관들이 팔짱을 끼고, 대오를 유지하고 있었다.

본청 유리를 깨고 안으로 진입하는 군 ⓒ 김준 기자
서로 팔짱을 끼고 본회의장 입구를 막고 있는 보좌진들 ⓒ 김준 기자
서로 팔짱을 끼고 본회의장 입구를 막고 있는 보좌진들 ⓒ 김준 기자

본청 안에서도 군인과 대치는 이어졌다. 보좌진들은 소화전과 소화기를 동원해 저항했다. 군은 군화를 신은 발로 수차례 문을 가격했고, 그 문은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파손된 채 방치돼있다. 

소화기 분말로 숨이 탁 막혔다. 몇 년 동안 고여있던 소화전 물이 튀어 옷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국회 직원들은 나에게 휴지와 마스크를 건네줬다.

ⓒ 김준 기자
군인의 군화발로 부서진 문 ⓒ 김준 기자

1시경, 대치가 이어지던 가운데, 계엄령 해지안이 의결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환호하는 보좌진들 사이에서 나도 한숨 돌렸단 생각에 계단에 앉았다. 군인들도 계엄이 해제되자 얼마 안 돼 헬기로 돌아갔다.

윤석열은 약 세 시간 반이 지난 4시 30분에야 계엄해제안을 의결했다. 군인이 빠진 뒤에도 안심을 놓지 못하던 사람들은 그제야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몇몇 직원은 의총장에서, 남는 회의실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다. 나도 국회 밖에 있던 동료들과 상황을 정리하고 귀가할 수 있었다. 

계엄해제안이 의결되자, 직원들이 쉬고 있다. ⓒ 김준 기자
계엄해제안이 의결되자, 직원들이 쉬고 있다. ⓒ 김준 기자

내란죄 피의자 윤석열은, 내란 동조 여당의 비호 아래 아직도 2차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는 자리에 있다. 계엄이 끝나지 않았단 생각에, 언제 또 2차 계엄령이 선포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지금까지도 완전히 마음 놓고 자지 못한다.

1차 계엄령 선포 당시만 해도 윤석열이 ‘술김에’, 혹은 ‘대통령 권한 다 써보고 싶어서’란 우스갯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최근에 한둘씩 밝혀지는 전모는 45년 전 오늘, 12·12 사태를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우리 안에 견고히 자리 잡은 민주주의라는 힘으로 최악을 막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거다. 우리는 “세상이 후퇴하고 있다”며 한탄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 지나간 역사에서 시나브로 쌓인 우리 안에 민주주의라는 당위는 언제든 최악을 막는 보루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 앞세대가 피로 세운 민주주의, 거리에서의 울부짖음, 숨어 지내야 했던 불안과 고통, 그리고 이뤄냈다는 희열. 온전히 다 느낄 수 없더라도 그 역사가 우리 안에 DNA로 새겨졌다는 점.

역사의 후퇴에 잠시 회의할 수 있더라도, 45년 동안 우리 안에 새겨진 희망은 언제든 남아있다는 것이다.

나는 운 좋게도 그 희망이 보였던 현장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