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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죽지 않았다"... 할머니들의 손으로 그려낸 증언들

‘기억을 걷는 시간여행’은 인권·평화·민주주의 가치를 담은 작은 박물관들을 따라 기억과 실천을 기록하는 연재입니다.

지난 7월 22일 불볕더위를 뚫고 서울 마포구 성산동의 조용한 골목을 찾았다. 낮은 담장을 따라 걷다 보면, 콘크리트 벽돌로 단정하게 지은 작은 기념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름은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규모는 작지만, 이곳에 담긴 기억과 증언은 결코 작지 않다.

어둠 속에서 살아난 기억

이곳의 전시는 입장과 동시에 시작된다. 관람자는 입장권을 통해 한 분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와 '짝꿍'을 맺는다. 짧은 생애사가 적힌 이 티켓은 그날의 전시를 함께 걸어갈 안내자이자 동행이다. 내가 만난 이름은 강덕경 할머니. 열여섯 나이에 공장에 끌려갔다가 일본군에게 강간 당한 뒤 위안소로 넘겨져 1년여를 살아냈다. 해방 후에도 삶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그림으로 기억을 증언했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증언자로 살았다.

복도 끝 벽면, 거대한 영상이 흐른다. 폭력과 차별의 벽을 뚫고 나비가 날아오르는 이 장면은, 관람객을 기억의 시작으로 이끈다.

▲김순덕 할머니의 그림 <끌려감>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순덕 할머니가 그린 작품으로, 군인의 손에 이끌려 끌려가는 순간의 공포와 절망을 표현하고 있다. 푸른 배경과 벌어진 눈, 뻗은 팔은 당시 상황의 긴박함과 무력감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억울함과 고통을 안고 살아온 피해자의 기억이 그림 속에서 증언처럼 되살아난다. ⓒ 박수정

좁은 문을 지나자, 바닥에 자갈이 깔린 통로가 이어진다. 한쪽 벽면에는 군인의 총에 끌려가는 소녀들의 그림자 행렬이, 맞은편엔 나이든 할머니들의 얼굴과 손바닥 부조가 나란히 놓여 있다. 전시장으로 내려가는 계단 벽에는 피해자들이 직접 남긴 그림이 걸려 있다.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고통, 그들이 손으로 그려낸 증언이다.

지하 전시장에 들어서면, 앞서 만난 짝꿍 할머니의 영상이 기다리고 있다. 담담한 육성과 함께 피해 당시의 신체검사서, 위안소 요금표, 제도적 장치 등이 어둡고 좁은 공간에 전시되어 있다. 낮은 조도, 침묵에 가까운 음향, 벽면을 채운 기록들은 단순한 과거가 아닌 현재의 질문으로 관람자를 끌어당긴다.

지하에서 계단을 따라 다시 올라가면 '호소의 벽'이 이어진다.

"책임을 인정하라!"

"이런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피해자들이 남긴 목소리는 벽면을 따라, 언어와 사진으로 살아나며 관람자의 발걸음을 붙든다. 위로 갈수록 공간은 점점 밝아지고, 침묵은 목소리로 바뀌어간다. 이곳에서 기억은 단지 과거가 아니라, 지금을 바꾸기 위한 실천의 언어로 거듭난다.

▲테라스 추모공간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2층 테라스에 마련된 추모공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이름과 사진이 새겨진 벽이 길게 이어지고, 천장에서는 수많은 노란 나비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른다. 조용한 빛 아래, 관람객들은 이곳에 꽃을 놓고 잠시 머문다. 나비는 평화를 향한 기억의 상징이자,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있는 증언을 뜻한다. ⓒ 박수정

말할 수 없던 사람들의 이름을 되찾는 일

전시의 마지막, 유리문을 열면 테라스로 이어지는 추모 공간이 펼쳐진다. 회색 벽돌 틈마다 박힌 사진과 이름. 김복동, 이용수, 박필연, 김학순… 그들 모두가 여전히 이 공간 안에서 숨 쉬고 있었다. 누군가는 뜨개질한 나비를 꽂아두었고, 누군가는 꽃 한 송이를 놓고 갔다. 천장 위로는 나비들이 조용히 매달려 날고 있다. 그들이 남긴 말들이 이 공간을 떠받치고 있다.

"우리는 죽지 않았습니다."

"죽기 전에 하루라도 떳떳이 살아보고 싶었어."

"전쟁의 피해자는 잊히는 이름이 아닙니다."

2층 전시실 안쪽, 조용히 마련된 김복동 할머니의 추모 공간은 그 말을 온전히 되새기게 한다. 생전에 입었던 원피스, 마이크를 들고 연단에 선 모습, 그리고 평화를 향한 그림 한 장. 한쪽 거울 옆에는 관람자들이 직접 남길 수 있는 메시지 공간도 놓여 있었다. 이곳은 죽음을 기리는 공간이 아니다. 여전히 싸우고 있는 이들의 공간이다.

전시를 마치고 돌아나오는 길, 다시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전태일. 평화시장 거리에서 "사람답게 살 권리"를 외치며 분신했던 청년. 누구도 기억하지 않던 노동자들의 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그가 먼저 쓰러졌던 순간.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역시 그 연장선에 서 있다. 말할 수 없던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되찾고, 외면 당했던 기억이 증언으로 살아나는 공간. 피해자들이 증인이 되었고, 이제는 우리 각자가 행동하는 기억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전태일이 꿈꿨던 '변화의 출발점'과 닮아 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수요일마다 이어지는 외침, 끝나지 않은 싸움, 살아 있는 증언. 우리는 여전히, 그 가장 긴 수요일 위를 걷고 있다.

생존자 단 6명, 사라지는 기억을 우리가 말해야 하는 이유

오는 14일은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이다. 1991년 8월 14일, 고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한 날을 기억하기 위해 제정된 이 날은, 침묵을 깨고 용기로 맞선 모든 피해자들의 삶과 증언을 기리는 날이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났다. 피해자들과 시민들은 매주 수요일,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촉구하며 연대의 외침을 이어왔으며 지난 6일 기준 현재 수요시위는 1712회째를 맞았다. "끝나지 않은 전쟁", "가장 긴 수요일"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현재 대한민국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40명 중 생존자는 단 6명뿐이다. 모두 90세를 넘긴 고령이다. 시간이 갈수록 이들의 목소리는 사라질 수 있지만, 우리가 그 기억을 듣고 말하고, 기록한다면 역사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기억은 우리의 의무이며, 실천은 연대이다. 이 가장 긴 수요일이 끝나는 날까지, 우리의 기억과 행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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