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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오염 전광판은 ‘좋음’인데 왜 숨쉬기가 힘들까

김정욱 2016. 08. 17
조회수 661 추천수 0
 
미세먼지·이산화질소 세계 꼴찌 수준, 전광판은 연평균기준과 비교해 '좋음'
서울시민은 발표농도보다 3배 나쁜, 도로변이나 지하상가는 7배 나쁜 공기 호흡
 
05552047.jpg» 미세먼지와 황사로 뿌옇게 흐린 서울의 하늘. 미세먼지를 많이 내뿜는 디젤차과 자동차로 출퇴근하는 비중이 선진국 대도시보다 높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올해 미국 예일 대학과 컬럼비아 대학이 세계경제포럼과 공동으로 발표한 환경성과지수(Environmental Performance Index 2016)를 보면, 우리나라의 미세먼지 오염도는 평가 대상인 180개국 가운데 173위였고 이산화질소 오염도는 꼴찌였다.
 
이들의 농도는 위성사진으로도 발표되었는데 과연 우리나라 하늘의 오염이 심하다는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이런 결과가 당연하다고밖에 볼 수 없는 이유가, 우리나라의 발전소 밀도, 수도권의 자동차 통행 밀도, 온실가스 배출 밀도가 다 세계에서 단연 선두를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epi_2016.jpg» 2016년도 환경성과지수를 지도로 표시했다. 우리나라는 전체적으로 80위였지만 대기오염 분야는 꼴치 수준으로 나타났다.
 
이런 대기오염으로 인하여 수도권에서만 해마다 80만 명가량이 호흡기 질환을 앓고 그중 2만 명가량이 사망하며 이로 인한 경제적인 손실은 12조 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서울의 도심 가운데에 설치된 대기오염 전광판을 들여다보면 거의 매일 공기가 좋다고 나와 있다. 올해 7월27일 오전 11시경 서울시청 앞에 설치된 대기오염전광판을 보니, 이산화질소 현재 오염도 0.029 ppm, 환경기준 0.100 ppm, 상태 ‘좋음’이라고 나타나 있었다. 
 
관심을 가지고 이 전광판을 들여다본 시민은 거의 매일 공기 ‘좋음’이라는 표시를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대기오염도가 세계에서 꼴찌를 달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air1.jpg» 지난 7월27일 오전 11시께 서울 시청 앞 대기오염 전광판은 이산화질소 오염 0.029ppm이 '좋음'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그 시각 시청 앞의 이산화질소 오염도 0.029 ppm은 환경기준 0.100 ppm에 견줘 분명히 훨씬 낮다. 그러나 문제는 이 비교의 잣대가 올바르지 않다는 데 있다. 
 
우리나라의 이산화질소 환경기준에는 세 가지가 있다. 연간 평균치 기준은 0.03 ppm이고, 24시간 평균치는 0.06 ppm, 1시간 평균치는 0.1ppm이다. 
 
연간 평균치는 만성 호흡기 질환 피해를 고려하여 정한 기준치로서 말 그대로 오염도의 1년 동안의 산술평균치가 이를 초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24시간 평균치와 1시간 평균치의 기준은 24시간 혹은 한 시간 동안만 이런 공기를 마셔도 병약자들이 위급한 상황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급성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정한 기준치로서 최악의 경우에도 이를 초과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정해진 기준치이다. 
 
전광판은 당연히 그 시간대의 오염도를 알려줘야 한다. 그러나 비교해야 할 기준은 급성피해를 막기 위해서 정해진 1시간 평균치 기준이 아니라 연평균 기준치와 비교를 해야 공기가 좋고 나쁨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정부가 ‘좋은 공기’라고 주장하는 0.029ppm의 공기를 1년 365일 마실 경우, 이는 연평균 환경 기준치에 육박하는 공기이다. 세계보건기구는 이산화질소의 권고기준을 연평균 0.021ppm(40 μg/m3)로 정하고 있어서 이는 분명히 인체 건강상 좋지 않은 ‘나쁜 공기’이다.   
 
air2.jpg» 같은 시각 초미세먼지의 전광판. '좋음'이라 표기돼 있지만 세계보건기구의 기준과 견주면 안참 나쁜 상태이다.
  
마찬가지로 그 시각 시청 앞의 초미세먼지 농도는 27μg/m3로 나타났고 이를 1시간 기준치 50μg/m3와 비교를 하였는데, 이것도 연평균 기준치인 25μg/m3과 비교해야 마땅하다. 세계보건기구의 권고기준은 10μg/m3인데 이와 비교하면 분명히 한참 ‘나쁜 공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름 10μm 이하의 먼지(PM10)를 ‘미세먼지’, 직경 2.5μm 이하의 먼지(PM2.5)를 ‘초미세먼지’라고 부른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용어는, PM10을 호흡기에서 걸러지지 않고 체내로 흡입되는 먼지(respirable particle)라고 부르고, 그중에서 특히 인체 건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먼지(PM2.5)를 미세먼지(fine particle)이라 부르는데 주로 PM2.5를 가지고 공기의 질을 평가한다. 우리나라의 미세먼지 오염도가 180개국 중에서 173위를 했다고 보도된 것도 우리나라의 용어로는 ‘초미세먼지’이다.) 
    
우리나라의 대기 환경기준은 대도시나 공업단지에 사는 사람들의 인체 건강피해를 고려하고 또 현실을 고려하여 만든 최소한의 기준이기 때문에 이 기준을 달성한다고 해서 좋은 공기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환경 정책을 잘하는 나라들에서는 국가 기준이 있지만 각 지역의 특성에 따라서 지역 환경기준을 설정하되, 총량규제를 엄격히 시행하여 현재의 오염 상태보다 더 나빠지는 사업은 대개 승인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도 경기도와 제주도가 지역 환경기준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 국가의 환경기준을 잘못 적용하고 있어서 마치 이 기준만 달성하면 좋은 공기가 보장되는 듯이 말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우리나라의 헌법 제35조에는 환경권이 명시되어 있어,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와 국민은 환경보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라고 되어 있는데 이 법이 실제로는 전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개발업자들에게 환경기준까지는 얼마든지 더 오염시킬 수 있는 권한을 주고 있는 형편이다. 
 
05590923_P_0.JPG» 미세먼지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뜻으로 방독면을 쓴 서울환경연합 활동가들이 지난 6월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친환경자동차법에 포함된 클린디젤자동차 조항 삭제'와 '석탄화력발전소 폐쇄'를 요구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우리나라의 대기 환경기준은 대도시나 산업도시에 적용되어야지 농어촌이나 관광휴양지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 최근에 인천에 있던 주물공업단지가 충청남도 예산의 농촌 마을에 들어오려고 환경영향평가를 했는데, 공장이 들어서더라도 환경기준은 달성할 수 있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그 보고서 내용은 엉터리지만 우리나라 법원은 서류가 참말인지 거짓말인지는 판단하지 않고 절차를 중요하게 본다고 예전에 석궁을 맞은 판사가 말한 적이 있다). 
 
주민들이 소송을 걸었고 대법원까지 가서 주민들이 패소했다. 주민들은 쾌적한 환경에서 살다가 공업단지 수준의 환경에서 살도록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이는 분명히 농촌 주민들의 환경권을 무시했고 헌법을 위반한 판결이다. 인권이 존중되는 나라에서는 환경권이 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아도 이 정도의 인권은 존중된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과연 우리나라의 대기오염 측정소에서 측정한 오염도가 국민이 숨 쉬는 공기를 대표하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에 서울을 대표하는 지점의 공기를 측정하려면 어디가 가장 적합하냐고 물어본다면 대부분의 시민은 사대문 안 도심이라든지, 강남의 번잡한 도로변 지역을 꼽겠지만 대기오염 측정소는 그런 곳에 있지 않다. 
 
많은 측정소가 녹지나 녹지와 인접한 지역에 붙어 있다. 예를 들면 한남동 측정소는 남산에, 불광동 측정소는 북한산에, 신림동 측정소는 관악산 자락에 붙어 있다. 
 
서울시민들은 그런 녹지 인근에서 숨을 쉬는 것이 아니다. 전철과 버스를 탔다가, 찻길을 걷다가, 지하 주차장이나 지하상가에도 들리고, 직장에서 일하다, 집에서 잠을 자기 때문에 대기오염 측정소에서 측정한 공기를 마실 시간이 없다. 
 
air3.jpg» 서울시민들이 숨 쉬는 공기 오염도(이산화질소) 직업과 생활공간에 따라 대기측정망의 오염도보다 1.5배 내지 3배 더 높다. (출처: 조재현, 직업별 생활공간, 시간에 따른 이산화질소의 피폭량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2)
 
서울시민들이 실제로 숨 쉬는 공기의 오염도를 평가한 바에 의하면 정부에서 발표하는 대기오염도를 숨 쉬는 시민은 찾기 어렵다. 대개가 정부가 발표한 대기오염도의 1.5배 내지 3배 정도 더 오염된 공기를 숨 쉬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길바닥이나 지하상가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숨 쉬는 공기가 가장 나빴다. 도로변에 가거나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에 오염도가 많이 올라간다. 나흘 동안 서울의 마을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이산화질소 오염도를 측정해 보았더니, 정부에서 발표한 서울시의 대기오염도보다 적게는 2.3배, 많게는 7.4배나 더 높았다. 
 
air4.jpg» 서울 시내버스로 이동 중 측정한 대기오염도. 대기오염측정망에서 측정한 오염도보다 2.3배 내지 7.4배 정도 더 높다.
  
우리나라의 공기가 나쁜 원인 중에는 분명히 중국에서 날아오는 오염도 있다. 그러나 서울의 도로변 오염도가 특히 높은 것은 분명히 서울의 교통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서울만큼 자동차 교통이 많은 도시는 찾기가 쉽지 않다. 서울은 자동차 교통이 45% 정도를 차지하는 데 반하여 도쿄와 빈은 자동차가 15%, 도보와 자전거가 25%를 차지한다. 
 
■ 세계 대도시의 교통 분담률
    
서울은 자동차 교통이 47%를 차지하는 데 비하여 도쿄는 자동차 교통이 16%, 자전거와 도보가 25%를 차지하고. 빈은 자동차 13%, 자전거와 도보가 25%를 차지한다.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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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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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대도시는 출퇴근 시간대에 80% 이상이 전철로 출퇴근하는데 비하여 서울에서는 40% 이상이 자동차로 출퇴근을 한다. 서울은 세계 어느 도시보다도 전철과 버스 교통 체계가 잘 만들어져 있는 도시로 평가받는다. 
 
그런데도 자동차로 다니는 것이 더 편한 것이 또한 서울이다. 자동차로 다니면 전철을 이용하는 것보다 에너지는 9배가량 많이 들고, 이산화질소는 200배 이상, 먼지는 15배 이상 더 많이 나온다.
 
air8.jpg» 수송수단별 연료 사용량. 자동차는 기차의 거의 9배의 에너지가 들어간다.
 
air9.jpg» 수송수단별 대기오염 배출량 (승객 30인을 1㎞ 수송할 때의 오염배출량). 자동차는 기차보다 질소산화물 220배, 먼지 16배, 탄화수소 42,000배를 배출한다.
  
대기오염 중에서도 인체 건강에 가장 큰 피해를 주는 것은 단연 미세먼지이다. 미세먼지라고 해서 모든 미세먼지가 똑같은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다. 어떤 성분의 미세먼지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흙먼지나 고등어를 구울 때 나는 먼지는 자동차의 배기가스나 석탄을 태운 매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것은 누구라도 숨을 한번 들여 마셔보면 그 차이를 금방 알 수가 있다. 
 
자동차 중에서도 디젤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인체에 특히 유해하다. 미국 캘리포니아(South Coast Air Quality Management District)에서 2015년에 발표한 바에 의하면, 대기오염으로 인한 암 발병 중에서 디젤 자동차 배기가스의 미세먼지가 68%의 책임이 있고 나머지도 자동차의 책임이 크다고 하였다. 
 
미국에서 디젤 자동차의 점유율은 3% 정도밖에 안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디젤 차량이 절반을 넘어섰기 때문에 디젤 자동차로 인한 건강피해가 엄청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흡연이 줄었는데도 폐암 사망률이 다른 모든 암을 압도하며 많이 늘어난 이유도 이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제주도가 2030년까지 모든 자동차를 전기 자동차로 바꾸겠다는 등, 전기 자동차가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늘 한번 쳐다보고 숨만 쉬어 보면 다 공기가 나쁜 줄 아는데 그래도 계속 ‘공기 좋음’을 외치는 대한민국. 제발 자기 최면에서 빠져나와라. 그래서 진짜 공기 좋고 물 좋고 살기 좋은 나라 한번 만들어 보자.
 
김정욱/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환경과 공해연구회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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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로 60억 매출 올린 두 청년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6/08/18 08:37
  • 수정일
    2016/08/18 08:37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농업에서 길찾는 청년들 ①] 꼬마감자로 500억 원 매출 꿈꾸는 기업가, 록야 박영민 대표

16.08.17 21:27l최종 업데이트 16.08.17 21:27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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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마감자'팀으로 창업대회에 참가 중인 록야 2015 농식품창업콘테스트 <나는 농부다> 대회 기간 중 만난 박영민 대표와 권민수 대표
ⓒ 남재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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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들에게 이야기합니다. '향후 10, 20년 안에 젊은이들이 가장 빠르게 성공할 수 있는 분야는 농업이다'라고. 그 과정이 녹록지는 않지만, 취업에 쏟는 열정의 일부를 농업을 이해하는 데 할애한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지난 7월 27일, 강원도창조경제혁신센터 입주기업 공간에서 만난 '록야'의 박영민 대표(33)는 자신감이 넘쳤다. 목소리에서는 젊은이의 힘과 열정이 느껴졌다. 그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노고가 헛되지 않을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록야(綠野)는 2011년 창업한 농업회사법인으로 감자를 유통해서 지난해 63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2015년에는 "농식품창업콘테스트 - 나는 농부다"에서 우승한 벤처기업으로 세상에 알려졌지만 감자 재배농가와 식품업계에서는 활기차고 일 잘하는 청춘들의 기업으로 이미 유명했다.

꽃청춘, 농업에 뛰어들다

 

여느 벤처기업가들과 마찬가지로 처음 시작은 막막했다. 농업이라고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씨감자 기술을 전수했던 경험이 전부였던 박영민 대표는 국내에 돌아와 백수가 되었다. 함께하는 권민수 대표 역시 다니던 농업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실업자가 되었다. 

두 사람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농업의 고질적인 문제인 판로에 관심이 많았다. 제스프리, 선키스트처럼 단일 작목으로 성공한 기업을 만들고 싶었다. 그들은 감자에게 미래를 걸어 보기로 하고 창업을 했다. 강원도에서 자란 것도 영향이 있었지만, 다른 작물은 잘 몰라도 감자는 충분히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할 일이 없었죠. 불안한 감도 없지 않았어요. 그래도 그 시절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정말 많은 일들을 상상하고 계획했습니다. 감자 종서 생산부터, 농가들과 연대, 감자 가공식품까지 우리가 만든 브랜드로 생산자부터 소비자까지 감자의 새로운 가치를 만들자는 원대한 꿈을 꿨죠. 벼 육묘장에서 꼬마감자를 만들자는 계획도 그때 세웠습니다."

10년쯤은 걸리겠지 했던 그들의 꿈은 불과 5년 만에 현실이 되었다. 양구에서 종서를 생산하고, 제주부터 대관령까지 전국에 있는 감자 재배 농가들이 그들의 고객이 되었다. 꼬마감자 아이디어는 5년 후에 창업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그리고 올해 처음으로 회사의 자산도 가지게 되었다. 원주에 곧 완공될 예정인 록야의 사옥이다. 여느 청춘들처럼 젊은 패기 하나로 출발한 그들은 황량한 대지 위에 그들의 꿈을 쌓았다.

창업한 후 처음 3년 동안 집에 월급을 가져간 게 일 년에 서너 달에 불과했다. 한번 집을 나가면 두세 달은 농촌에서 감자를 재배하는 농민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란 사실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십 년 정도면 농업에도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창업한 지 5년 만에 이 정도까지 왔으니 오히려 좀 당황스럽습니다."

박영민 대표와 권민수 대표가 창업대회에 들고나온 아이템은 '꼬마감자'였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판매하는 작은 감자구이나 감자조림처럼 한입에 먹기 좋은 감자 시장을 목표로 하는 사업모델이었다. 꼬마감자를 찾는 기업의 수요는 늘어났지만 전문적으로 재배하는 농가들이 없어 항상 공급이 달리는 품목이었다. 

두 사람은 '육묘장'에 주목했다. 육묘장은 벼의 모를 기르는 온실로 벼농사를 짓는 곳이면 어느 곳에나 있는 시설이었다. 내부에는 여러 층의 선반이 있어서 모판을 층층이 쌓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벼농사의 특성상 1년에 한 달 정도만 사용하고 나머지 기간은 비어 있는 데, 여기에 재배 상자를 이용해서 감자를 키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노지에서는 감자의 일부가 꼬마감자 크기로 생산되지만 토심이 얕은 재배 상자에서는 꼬마감자만 생산된다.

아이디어는 단순하지만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발상의 전환이었다. 큰 감자만 인정받던 시장에서 작은 것만을 생산한다는 아이디어는 단번에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젊은이들의 창업이라면 으레 ICT나 빅데이터 같은 트렌디한 아이템이 들어가 줘야 할 것 같다는 편견도 함께 깨뜨렸다. 젊은이들에게 영향력 있는 창업멘토인 씨엔티테크의 전화성 대표가 <스타트업 교과서>에서 강조한 것처럼 그들은 시장의 문제를 명확하게 정의했고, 그들만의 독창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1억 원의 상금은 제대로 주인을 찾아갔다.

따뜻한 마음도 비즈니스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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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자를 수확 중인 농민들 수확 현장에는 항상 록야의 직원들이 함께 한다.
ⓒ 박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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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표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씨감자 기술을 전수하는 일을 했다. 권 대표도 감자 회사에서 일했다. 둘 다 처절하게 실패했지만 감자가 충분히 매력적인 시장이라는 걸 확인했다. 그들은 현장부터 시작했다. 그때까지 감자 시장을 주름잡는 기득권은 대부분 60대였다. 반면에 그들은 젊었다. 현장 경험은 부족했지만 자신들이 가진 장점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 뛰어들 때는 대기업 구매 담당자를 편하게 하면 되겠다 싶었죠. 대기업 직원들은 문서작업에서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서를 잘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현장에서의 대응도 당연히 빨랐죠. 우린 젊었으니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패기 하나로 기존의 공고한 시장에 끼어들긴 쉽지는 않았다. 거래처를 찾아가면 문전박대당하기 일쑤였고, 농민들은 '애들이 뭘 하겠냐'며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때 그들은 '농민들이 돈을 벌게 하면 우리에게도 마음을 열겠지'라며 들판에서 함께 막걸리를 마시며 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마음 주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마음을 열면 그만큼 따뜻한 분들이 없다는 걸 그들은 이미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들은 그 약속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만 평, 이만 평 하는 농가들은 돈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농가들은 대개 천 평, 이천 평 정도 농사를 짓습니다. 이 농가들은 우리에게 물건을 다 넘기면 정말 돈이 안 됩니다."

그들은 농민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우리는 농가와 계약할 때 재배면적의 70%만 합니다. 이게 우리의 성공 비결인데요, 왕특 크기의 감자는 시장 가격이 높아 수익이 좋습니다. 농민들이 그 크기의 감자는 전부 골라서 시장에 팔게 합니다. 시장에서 가격이 나오지 않는 작은 사이즈만 골라서 계약재배 물량으로 우리가 가져갑니다."

청년 기업가는 자신들의 이익보다는 농가의 이익을 우선했다. 전체 수확량 중 30% 정도는 크고 품질이 좋은 감자가 생산된다. 이 왕특 감자는 시장에서 kg당 천 원 정도를 받는다. 반면에 그보다 작은 크기의 감자는 600~700원에 불과하다. 상인들은 전체를 가져간 후 큰 크기의 감자를 팔아서 수익을 남긴다. 그런데 이 수익을 농민들에게 넘긴 것이다.

"우리는 당장의 수익보다는 농가들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감자만 팔겠다고 한다면 기존의 중간상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했겠지만, 우리에겐 더 큰 꿈이 있습니다."

그들의 사업은 농사의 근간인 씨앗부터 시작한다. 양구에서 생산한 종서를 농가들에게 공급한다. 그뿐만 아니다. 그들은 감자 산업 가치사슬 전반으로 사업영역을 넓혀갈 계획이다.

"우리는 농민들이 정말 농사를 편하게 짓게 하고 싶습니다. 농사에만 전념해서 좋은 감자를 생산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좋은 농가를 얼마나 많이 확보하고 있느냐에서 사업의 성패가 결정됩니다. 그래서 좋은 종자를 공급하고, 또 농자재를 공동으로 구매해서 싸게 공급하는 역할도 합니다. 지역마다 상황이 달라서 모든 자재를 공급하기는 어렵지만 비닐과 같이 모든 농가가 사용하는 자재부터 차근차근 시작하고 있습니다. 농민들과 우리는 운명공동체라고 느낍니다."

록야는 계약재배를 통해 농민들이 판로 걱정 없이 생산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농업서비스 업체로 진화하고 있다. 최종 수요처인 식품기업에게는 믿을 수 있는 품질과 안정적인 물량을 공급하는 청년사업가로 신뢰를 쌓아가고 있다.

"우리는 감자를 전문으로 하는 기업입니다. 그런데 농민들은 감자만 재배하지 않습니다. 감자를 수확한 후에는 벼, 콩, 단무지용 무를 또 심습니다. 감자에서는 1년 치 농비를 뽑고, 후작물에서 수익을 얻을 수 있도록 자문합니다. 그런데 후작물이 판로가 없어서 어려움을 겪을 때도 우리가 도와드립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남을 돕다 보니 또 다른 사업 기회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박 대표는 농민들이 돈을 벌 수 있도록 돕다 보니 자신과 같은 후발 주자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보이더라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이익을 극대화하여 사업을 조기에 안정화시키기보다는 지속 가능한 사업기반을 만드는 데 더 큰 관심이 있는 듯했다. 젊어서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에 부러움도 들었다. 

농업이 청춘들의 미래가 될 수 있을까?

우리의 이야기는 농업의 미래라는 주제로 방향을 틀었다. 젊은이답게 그가 바라보는 농업은 내가 서 있는 농업과는 또 달랐다.

"국민들에게 농업은 떼쓰는 사람들, 고령화, 시대에 뒤떨어진 산업이라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이런 이미지가 남아 있는 데 젊은이들이 올까요.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젊은 사람들이 농업에 뛰어들면 뉴스가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관심 있게 들어준다는 것은 엄청난 기회입니다."

그는 후배들에게 이야기한다. 향후 10년 안에 흙수저 청춘들이 가장 빠르게 성공할 수 있는 분야가 농업이라고. 취업에 쏟는 열정의 일부만 쏟아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려면 농업의 본질에 대해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 농업을 이끌고 가는 기업들은 농업의 현장을 건드리지 않고 마케팅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현장을 놓치면 지구력이 많이 떨어집니다. 젊은 사람들도 농업에 들어오면 유통만 하겠다고 합니다. 홈페이지를 만들고 SNS를 하면 팔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마찬가지로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더 큰 판을 생각합니다."

록야도 처음 사업을 시작했을 때는 유통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유통을 알아갈수록 어설프게 준비해서 낄 수 있는 판이 아니란 걸 느꼈다. 

"진짜 유통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아, 하는 순간에 망할 수 있다는 공포를 느꼈습니다. 매출액에 취하다 보니 빈껍데기만 남더라고요. 처음 하는 사람들은 홈페이지에 올려놓고 소비자들이 사주면 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박 대표는 처음에는 자신들이 얼마나 무모했는지를 생각하면서 몸서리쳤다. 수업료는 컸다. 처음 1년 동안 1억 원 정도의 손해를 보았다. 비싼 수업료를 내면서 유통은 원가관리라는 것을 몸으로 배웠다.

"일반 산업이랑 농업이랑 메커니즘 자체가 다르다는 걸 배웠습니다. 현장에서 돌아가는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다 까먹고 가는 게 농산물 유통이란 걸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함께하는 농업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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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어스(Grower's) 첫 모임 스타트업과 농민들과 소통을 만들어 가는 그로어스 창립 행사
ⓒ 박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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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표는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청년들에게 농업에 대한 이해를 돕고, 더 많은 스타트업이 농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그로어스(Grower's)라는 커뮤니티 모임을 조직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모임은 모두 남이 만든 판이었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중심이 되는 그런 모임을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 젊은 사람들이 농업에 뛰어드는 데 꼭 성공하도록 돕고 싶습니다. 만약 실패하면 농업에 대한 인식이 너무 나빠질 것 같습니다. 길잡이 역할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스타트업들에게 농업의 본질에 대해 보여주길 원하는 것 같았다. 그들이 현장에서 구르며 체득한 것을 나누고 싶어 했다. 그로어스에서는 농민과 스타트업을 같은 비율로 섞어 놓았다. 서로에 대해 이해하고자 마음을 여는 것, 분야는 다르지만 서로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 그곳에서부터 출발하고자 했다.

"우리 또래의 청춘들에게 농사지으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농업에만 빠지지 말고 농업 전후방을 두루 살펴보고 무엇이 농업에 더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 고민해보라고 이야기합니다."

박 대표의 말처럼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농업이 있다. 배경과 배움이 다른 청춘들에게 그들 나름대로 농업을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둔다. 농업에 대한 깊은 이해와 타산업 분야에서 배운 지식이 결합하면 어떤 '케미'를 만들어 낼지 벌써 가슴 설레인다. 그런 면에서 농업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다. 농업의 미래를 어둡게 보고 돈으로 해결하려는 기성세대들이 농업의 미래를 더 어둡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나 역시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

꼬마감자에 승부를 걸다

"우리는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마흔 살이 되면 500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를 만들자고 결심을 했습니다. 지금 추세를 보면 그보다는 더 빨리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그들의 포부가 그리 무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최근에 록야는 아산시에 소재한 들녘경영체와 함께 벼 육묘장에서 꼬마감자를 생산하겠다는 계획을 현실화시키고 있다. 감자 가공공장은 아산시에서 설치하고 운영은 록야가 맡게 된다. 록야는 땅과 시설에 돈이 묶이지 않아서 좋고, 지자체는 그 지역에서 생산한 감자를 판매할 수 있어서 좋다. 록야는 그들이 꿈꿔왔던 감자 전문 브랜드를 이번 기회를 통해 출범시키게 될 것이다. 

이 사업모델이 성공한다면 록야와 함께 우리나라 감자 재배는 또 한 번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의 성공은 젊은이들에게 우리 농업에 뛰어들어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심어주는 것이라서 더욱 반갑다. 그들은 농업이 낙후되었다고 외면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새로운 기회의 땅을 찾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가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s://brunch.co.kr/@ecotown)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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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를 쩌렁쩌렁 울린 사드반대, ‘통일로GO' 함성

준비위, 북과 해외의 청년학생들에게 ‘남북해외 청년학생통일문화한마당’ 제안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청년학생본부 
기사입력: 2016/08/17 [01:41]  최종편집: ⓒ 자주시보
 
 
▲ 2016‘광복 71주년 8.15청년학생통일문화한마당’     © 청년학생본부

 

▲ 2016 광복 71주년 8.15청년학생통일문화한마당’     © 청년학생본부

 

▲ 2016‘광복 71주년 8.15청년학생통일문화한마당’노래패 우리나라와 청년들의 뜨거운 합동무대     © 청년학생본부

 

▲ 2016 '광복 71주년 8.15청년학생통일문화한마당’6.15남측위원회 청년학생본부 전준호 상임대표의 대회사, 이 행사에서 북과 해외의 청년학생들에게 ‘남북해외 청년학생통일문화한마당’을 제안하였다.     © 청년학생본부

 

광복 71주년을 맞아 14일 늦은 밤부터 15일 새벽 동이 틀때까지 서울시청광장에서 ‘광복 71주년 8.15청년학생통일문화한마당’이 개최되었다.

 

8.15청년학생통일문화한마당 준비위원회(이하 통문한준비위)가 주최한 이번 행사는 6.15남측위원회 청년학생본부 전준호 상임대표의 대회사와 통일선봉대·통일대행진단 환영식, 청년학생통일문화한마당, 통일무도회 등이 이어졌다.

 

특히 이 행사에서 북과 해외의 청년학생들에게 ‘남북해외 청년학생통일문화한마당’을 제안하였다.

 

통문한준비위가 주최, 주관하는 8.15청년학생통일문화한마당(이하 통문한)은 통문한준비위 참여단체들의 율동 및 노래공연과 노래패 '우리나라' 등이 무대에 올라 청년학생과 시민들의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냈다.

 

▲ 2016‘광복 71주년 8.15청년학생통일문화한마당’     © 청년학생본부

 

통문한준비위에는 6.15남측위 청년학생본부 소속단체인 대한불교청년회, 민주주의자주통일대학생협의회, 원불교청년회, 천도교청년회, 통일맞이청년위원회 늘봄, 한국기독청년협의회,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한국대학생문화연대,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한국청년연대, 21세기한국대학생연합 외에 대안대학 청춘의 지성, 대학생겨레하나, 동행실천단, 사이다실천단, 평화나비, 흙수저당이 참가했다.

 

통문한준비위는 ‘남북해외 청년학생통일문화한마당 제안문’을 통해 “정부의 개성공단 가동 중단 조치로 민족경제와 평화의 상징이었던 개성공단이 폐쇄되고, 최근에는 우리 국민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미국의 이익만을 위한 사드가 배치된다고 발표되며 한반도 긴장이 더욱 고조되고 있다”며 “민간차원의 교류와 협력까지 전면적으로 차단되어 남북관계는 역대 최악의 상황이며, 한반도에는 또다시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 조성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북측의 평화와 자주통일을 위한 정부, 정당, 단체, 개별인사들의 연석회의 제안에 대해 “북측과 해외측에서는 연석회의를 위한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으나 남측 정부의 대결정책으로 인해 815에 즈음한 연석회의는 성사가 불가능해졌다”며 “남측 정부는 외세와 손을 잡고 대북대결정책을 벌일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이익을 위한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나아가 “당면한 한반도의 위기상황의 해법은 외세와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통일로 가는데 있다”고 제언했다.

 

▲ 2016‘광복 71주년 8.15청년학생통일문화한마당’     © 청년학생본부

 

통문한준비위는 “우리 청년학생들은 조국이 분단된 이래로 평화와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행동해왔다”며 “우리 남측의 청년학생들은 남북해외 청년학생통일문화한마당을 통해 통일세대로서 우리 청년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대단결의 장을 마련하길 기원한다. 그를 위한 실무접촉을 빠르게 진행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통문한준비위가 주최·주관한 이날 행사는 전국에서 모인 약 1000여명의 청년학생과 시민들이 함께하며 통일을 향한 뜨거운 열기로 새벽까지 이어졌다.

 

▲ 2016‘광복 71주년 8.15청년학생통일문화한마당’     © 청년학생본부

 

 

 다음은 남북해외 청년학생통일문화한만당 공개 제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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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과 해외 청년학생들에게 드리는 공개제안문]

 

한반도 평화와 자주통일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담아 남북해외 청년학생통일문화한마당을 제안합니다.

 

오늘 우리는 광복 71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광복 71주년을 맞이하고 있는 오늘, 이 땅의 긴장은 날로 고조되고 있고 조성된 정세는 엄중합니다. 
정부의 개성공단 가동 중단 조치로 민족경제와 평화의 상징이었던 개성공단이 폐쇄되고, 최근에는 우리 국민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미국의 이익만을 위한 사드가 배치된다고 발표되며 한반도 긴장이 더욱 고조되고 있습니다. 사드배치에 대해 북은 물론이거니와 중국과 러시아까지 강력하게 반발하고 상황입니다. 
거기에 더해 민간차원의 교류와 협력까지 전면적으로 차단되어 남북관계는 역대 최악의 상황이며, 한반도에는 또다시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8월 말 한미합동군사훈련인 을지프리덤가디언 훈련(UFG)을 앞두고 한반도 긴장은 더욱 고조되고 있습니다. 8월 22일부터 26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훈련을 두고 한미 당국은 연례적인 훈련이라 말하지만, 을지프리덤가디언 훈련은 북의 핵관련 시설을 비롯한 주요기관을 타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연습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북미, 남북간의 모든 대화 채널이 단절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조그만한 충돌이라도 발생한다면 전쟁으로 번지는 것은 필연일 수밖에 없습니다. 참으로 위험천만한 상황입니다. 

 

최근 북에서는 광복 71주년 8.15에 즈음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자주통일을 위한 정부, 정당, 단체, 개별인사들의 연석회의를 제안했습니다. 남측의 많은 단체들과 인사들은 북측의 이번 제안이 경색, 파탄난 남북관계를 개선하는데 있어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입장을 밝힌 바 있습니다. 이미 북측과 해외측에서는 연석회의를 위한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다. 하지만 남측 정부의 대결정책으로 인해 815에 즈음한 연석회의는 성사가 불가능해졌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남측 정부는 외세와 손을 잡고 대북대결정책을 벌일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이익을 위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이 땅의 현재 세대이자, 미래를 책임질 주역인 우리 청년학생들은 당면하여 조성되어 있는 한반도의 위기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수 없습니다. 
당면한 한반도의 위기상황의 해법은 외세와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통일로 가는데 있습니다.

 

만나야 통일입니다. 
오늘 광복 71주년을 맞아 8.15청년학생통일문화한마당에 모인 우리 남측의 청년학생들은 북측과 해외측의 청년학생들에게 한반도의 평화와 자주통일을 위해 남북해외청년학생통일한마당을 제안합니다.

 

우리 청년학생들은 조국이 분단된 이래로 평화와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행동해왔습니다. 남북해외 3자가 만나는 공동행사를 성사시키기 위해 감옥행을 마다하지 않고 북녘으로 가기도 했으며, 6.15공동선언이 발표된 이후에는 어떤 세대와 계층보다 남북해외 청년학생들의 공동행사를 통해 평화, 통일의 분위기를 고취시키는데 청춘의 열정을 쏟아왔습니다.

 

오늘 우리 남측의 청년학생들은 남북해외 청년학생통일한마당을 통해 통일세대로서 우리 청년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대단결의 장을 마련하길 기원합니다.
그를 위한 실무접촉을 빠르게 진행했으면 합니다.

 

정의롭고, 애국의 열정이 가득한 북과 해외 청년학생들의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민족의 기둥이자 통일의 주축세대인 남북해외청년학생들이 평화통일을 위해 더욱 분연히 떨쳐나섭시다.

 

                                            2016년 8월 15일
                남북해외 청년학생 통일문화한마당을 염원하는 남측 청년학생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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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모저모]

 

▲ 2016‘광복 71주년 8.15청년학생통일문화한마당'     © 자주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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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반드시 사드에 대응할 것이다”

“중국은 반드시 사드에 대응할 것이다”

남문희 기자  |  bulgot@sisain.co.kr
 

 

 

사드 배치를 계기로 한반도는 전무후무한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냉전 해체 후 짧은 평화 시대가 끝나고 말로만 떠돌던 신냉전의 문턱에 갑자기 다가서게 된 것이다. <시사IN>은 전문가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한반도가 새롭게 진입하고 있는 미래를 예측하고 해법을 모색해보기로 했다. 그 첫 순서로 김흥규 아주대 정외과 교수 겸 중국정책연구소 소장의 진단과 처방을 소개한다.

사드 배치 선언 이후 나온 중국의 반응을 어떻게 보고 있나.

아직까지 특별히 큰 반응을 보인 것 같지는 않다. 국내 일각에서는, 중국이 대응 수단도 마땅치 않고 의지도 크지 않을 것이라 한다. 또 사전 연구 결과 보복 가능성이 적은 것으로 평가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중국의 정책 결정은 시간이 많이 걸린다. 각 부처가 상황을 파악하고 이해당사자 의견도 취합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응이 미흡하다고 해서, 중국이 소극적으로 대응하리라거나 대응 수단이 적을 거라고 판단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또한 중국은 사드를, 미국이 세계전략 차원에서 추진하는 재균형 정책과 대중국 압박정책의 일환으로 파악한다. (사드를) 미·중 간 전략 경쟁 차원에서 추진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대응할 것이다. 시진핑 주석이 지도자가 된 이후 한국에 대한 정책을 ‘친선혜용(親善惠容)’이라는 우호적 주변 외교정책 차원에서 추진했다. 전통적 사고를 고수하는 부류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한 편향 외교에서 한국에 우호적인 외교로 방향을 전환했는데, 중대한 좌절을 맞보게 됐다. 시 주석 차원의 대응도 불가피한 상황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조남진</font></div>김흥규 교수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미국 미시간 대학 박사(국제정치학). 현 아주대 정외과 교수 겸 중국정책연구소 소장. 청와대 국가안보실·외교부 등 정책 자문위원. 저서로 <시진핑 시기 중국 외교안보> 외 다수.  
ⓒ시사IN 조남진
김흥규 교수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미국 미시간 대학 박사(국제정치학). 현 아주대 정외과 교수 겸 중국정책연구소 소장. 청와대 국가안보실·외교부 등 정책 자문위원. 저서로 <시진핑 시기 중국 외교안보> 외 다수.

종합적 대응 방안이 나오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미 대구의 ‘치맥 행사’나 한류 스타 공연이 줄줄이 취소되는 등 인적·문화적 교류와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제재가 시작된 것 아닌가?

이번에 베이징 갔을 때 한반도 분야에서 상당히 고위급 정책 결정 라인에 있는 분으로부터 사드와 관련한 중국의 종합적 대응 리스트가 완성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국에 사드를 배치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시나리오와 조치에 대한 점검이 끝났다는 얘기다. 아직 한국 측의 구체적 행동이 다 나온 게 아니기 때문에 상황을 봐가면서 리스트대로 차근차근 대응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기 전에 이미 한국 방문객 규모를 축소하거나 자제시키는 조치는 취해지고 있다. 중국 여행사들에 한국 여행 자제 통지가 내려간 걸로 알고 있다. 중국 단체나 지방정부의 준자발적인 여행 자제 조치들도 산발적으로 있다고 한다. 한국인 입국자에 대한 검증도 강화하고 있다. 행정적으로 불편함을 느끼도록 하는 조치들이 이미 취해졌다. 한편 중국 측 비중 있는 인사들의 한국 방문을 자제시키거나 절차를 엄격하게 만드는 조치들도 취해지는 걸로 안다.

종합 리스트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나?

추후 중국이 고려할 수 있는 조치로는 인적 교류와 문화 교류에 대한 제한, 경제적인 측면에서 비관세 장벽 따위로, 스탠더드(기준)를 바꾸고 통관 절차를 까다롭게 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 것이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대기업들에 대한 조치도 있을 것이고, 특히 사드 제작사인 록히드마틴과 방산 협력으로 연결된 기업들이 집중 타깃이 될 것이다. 서해의 해상경계선과 관련해 그동안 한·중 어업협정에서 합의한 중간선을 묵시적으로 인정해온 관행도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 한국과 관련된 방공식별구역을 재설정하고, 가거초와 이어도의 해양과학기지를 폐쇄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이어도 해상에 대한 점유 시도도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군사적인 조치도 있을 것이다. 한국에 배치될 사드가 미일의 MD(미사일 방어) 체계의 일부라고 중국이 확신한다면 (유사시) 제1차 타격 대상이 될 것은 확실하다. MD 체계를 무력화하려는 또 다른 군비경쟁, 즉 중국의 또 다른 MD라든가 공격무기 배치, 이와 동시에 북한 카드의 활용에 대해서도 고민할 것이다. 현재 유엔 수준의 대북 제재는 계속한다는 방침이지만 (중국에 의한) 제재 효과는 크게 약화될 것이다. 북·중 관계 개선으로 우리가 피해를 볼 수도 있다.

중국 진출 대기업까지 타깃이 된다면 우리 경제에 혼란이 초래되지 않을까?

그것만이 아니다. 내년 만료되는 64조원(3600억 위안) 규모의 한·중 통화 스왑을 중국이 연장해주지 않으면 우리 경제의 취약성이 더욱 두드러지게 될 것 같다. 지금 우리 경제는 어느 순간이라도 외환위기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은데 그 위험성이 훨씬 높아지게 될 것이다. 중국은 이처럼 카드가 많다. 일본도 견뎌냈는데 한국은 왜 못 견디느냐는 말도 있는데 일본은 세계 3위 경제 규모에 이미 동남아 등지로 위험을 분산하는 등 대비해왔다. 일본의 대중 무역 의존도가 약 20%라 하지만 GDP 중 무역 비중이 낮아서 중국으로부터 받는 영향이 GDP의 4% 미만이다. 그런데 한국은 대중 무역 의존도가 25%(홍콩까지 치면 30%)다. 더욱이 GDP 가운데 무역에 의존하는 비중 역시 80%에서 110%(실질 GDP 기준으로 추산한 듯-편집자)에 달한다. GDP의 30% 가까이 중국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대중국 무역 의존도가 거의 90%라고 하지만, GDP 내 무역 비중은 20%밖에 안 된다. 중국이 북한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처럼 얘기들을 하는데, 중국에 대한 취약성이나 민감도는 한국이 훨씬 높다.

서해의 해상 경계와 관련해 기존의 중간선이 아니라면 중국이 제시할 새로운 기준선은 뭔가?

그동안 국제사회에서 중국은 역사적 연원이나 대륙의 크기, 대륙붕의 사이즈를 고려해 경계선 설정을 주장해왔다. 북한과 중국의 경우를 보면 신의주에서 직선으로 내려오는 선이 해상 경계의 기점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식으로 할 경우 대륙붕이 거의 목포 앞바다까지 오게 된다. 중국이 자신들 뜻을 관철하고자 한다면 충남이나 목포 앞바다에 수시로 중국 군함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 경우, 서로 자신이 주장하는 영해선을 관철하기 위해서인 만큼 힘이 있으면 밀어낼 수 있지만 주권 문제로 다루기가 쉽지 않다. 곤혹스러운 상황이 될 것이다.

어느 정도나 더 중국 쪽으로 가게 되나.

기존 중간선에서 우리 쪽으로 절반 정도 더 들어오고, 서해 전체로는 3분의 2 정도가 될 거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8월4일 주한 중국대사관 영사부 앞에 비자를 받으려는 시민들이 길게 줄지어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상용 복수비자를 받는 것이 전보다 어려워졌다.  
ⓒ연합뉴스
8월4일 주한 중국대사관 영사부 앞에 비자를 받으려는 시민들이 길게 줄지어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상용 복수비자를 받는 것이 전보다 어려워졌다.

국내 일부 논자는 한·중 간 경제관계가 부품 공급 등으로 얽혀 있고, 최근 남중국해를 둘러싼 국제사법재판소 판결 때문에 중국이 한국까지 적으로 삼기는 부담스러울 거라고 주장한다.

일견 타당성이 있다. 중국은 한·중 간의 상호 의존 관계를 통해 한·미 동맹을 약화시킬 수 있다. 이는 미국 중심 국제질서에 나름 상징성도 가진다. 따라서 한국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조치를 취해나가고 싶어 할 것이다. 문제는 지나치게 그런 걸 과신하고 한국이 앞장서서 한·미 동맹을 중국을 억제하는 지역동맹으로 전환시키려 한다는 인상을 중국이 받는다면 반드시 반응할 것이다. 또 한·중 경제 관계에서 과거엔 중국이 한국의 도움을 필요로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으며, 심지어 경쟁 관계이기도 하다. 중국은 (한국에 대한) 대체재가 있지만 한국은 중국 시장 외에 없다. 이미 중국은 한국이나 북한과의 관계를 동일하게 ‘강대국 대 약소국’ 관계로 보고 있다. 약소국이 강대국에 맞서면 대가를 치르게 해준다는 게 시진핑 주변의 전략적 사고이다.

지난 1월6일 북한 핵실험 이후 박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 통화가 불발된 것이 사드 배치 선언의 원인 중 하나라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대북 제재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할 바로 그 시점에 왜 하필 사드 문제를 이슈화한 건지,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생각한다. 한국 내 사드 배치 추진 그룹에게는 몇 가지 다른 우려가 있었을 것이다. 첫 번째, 미국 내에서 한·미 동맹의 전략적 가치가 점차 약화되는 추세다. 대선 국면의 신고립주의가 그렇고, 최근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는 미·일 동맹을 중심으로 동북아 군사력을 재편하자는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북한의 역량은 강화되는데 우리는 마땅한 대응 수단도 없고, 미국이 동맹에 대해 어떤 신뢰도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버림받기 싫은 측면이 있었던 것 같다. 아직 미국이 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자이고 또 공세를 강화할 것이기 때문에 제1강자 편에서 우리 생존과 안위를 추구하는 게 낫다는 외교안보 라인 일부 주류의 사고가 반영됐을 것이다. 두 번째, 일부 민족주의자 그룹에서는 추후 북핵 대응을 위해 미국의 전술 핵무기를 들여오기 위한 사전 신뢰 구축 차원에서 사고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현 상황을 역전시키거나 우리 안보를 담보할 수 있는 조치는 결국 한·미 동맹의 강화라는 것에 여러 그룹의 생각이 일치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정작 오바마 대통령은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다. 미국 내 한반도 전문가들 가운데 사드로 인한 대북 외교 실종에 비판적인 사람도 있다고 한다.

국무부나 특히 오바마 자신도 미·중 관계를 협력적으로 운영하면서 세계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는 게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2015년 말부터 미·중 관계가 협력보다는 경쟁 쪽으로 바뀐 것 같다. 중국이 급격히 떠오르자 미국 내 초조감이 강화되면서 지금이 중국을 밀어붙여야 할 시기라고 미국 주류들이 판단한 것 같다. 한반도 정책이나 북핵 문제도 이런 맥락에서 재조명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중국과 협력해 북핵 문제를 관리하는 등 협력적 미·중 관계로 가야 한다는 국무부 측 목소리가 약해지는 듯하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환구망 갈무리</font></div>중국 관영 매체인 <환구시보>(왼쪽)는 한반도 사드 배치를 비난하는 사설을 게재했다. 인터넷판인 <환구망>(위)에서는 배우 박보검이 중국을 모욕하는 광고를 찍었다며 온라인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환구망 갈무리
중국 관영 매체인 <환구시보>(왼쪽)는 한반도 사드 배치를 비난하는 사설을 게재했다. 인터넷판인 <환구망>(위)에서는 배우 박보검이 중국을 모욕하는 광고를 찍었다며 온라인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한반도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 이어 ‘제3의 전선’이 될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미국의 전략과 지정학을 놓고 보면 한·미 동맹을 북한의 핵 위협뿐 아니라 더욱 당면한 미국의 국가 이익인 대중국 관계에도 투입하고 싶어 할 것이다. 당연히 한·미 동맹을 지역동맹화하면서 반중국 동맹으로 활용하려고 할 것이다. 사드는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게 하는 중요한 매개체다. 중국은 그 함의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 지금 막 랜드 연구소에서 미국의 새로운 전쟁 계획에 대한 보고서가 나왔다. 상대방의 목표를 순식간에 타격하는 전쟁 방식은 미·중 간에 발생할 가능성은 없다고 한다. 대신 오래 지속되면서 간헐적으로 무력충돌이 일어나는 방식에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중국의 ‘반접근·영역거부(A2AD:Anti-Access and Area Denial) 전략’에 대한 대비를 해상뿐 아니라 육상에서도 해야 한다는 것인데, 바로 육상에서의 충돌과 사드 배치가 관련돼 있다고 본다. 즉 사드를 육상의 A2AD 견제용으로 만들어가려는 것 같다. 한국은 사드를 북한 대비용이라고 하지만, 중국은 앞으로 진행될 미·중 전략 경쟁에서 한국이 과연 독립적이고 자유로울 수 있을지 매우 회의적이다.

성주는 시작에 불과한 것 아닌가?

7월8일 발표 내용은 미국 전략가 시각에서는 불만스러울 것이다. 대북용으로 사드 한 포대를 미국 돈으로 배치하고 종말단계 레이더만 도입해 한 방향으로 고정시킨다고 합의했다. 미국이 결코 원치 않는 합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일단은 한국에 사드를 배치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앞으로는 기능과 운용 측면에서 유연성을 확보하려 노력하면서 추가 배치를 추진할 것이다. 기존 미·일 MD에 통합시키려는 노력과 함께, 비용도 한국이 대도록 할 것이다. 이번 합의는 시작에 불과하다.

그래도 내년 말 배치하는 것은 미국이 비용을 댄다는 것인데, 아직 예산 책정도 안 됐다고 한다.

미국도 곤혹스러울 거다. 원래는 올해 말쯤 사드 논의를 시작해 내년 초쯤 결정하고 내년 말에 한국으로 들여오는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국내 안보 전문가들도 9월4일 대통령의 방중 스케줄이 있고 그때 시진핑 주석도 만나게 돼 있어서, 그 후에나 (사드 관련 결정이) 되지 않을까 했는데 훨씬 앞당겨졌다. 그 배경엔, 4월 총선에서 야당이 승리하는 바람에 당초 시나리오대로 갈 경우 사드 배치가 물 건너갈지 모른다는 판단이 작용한 듯하다. 내년은 대선 국면과 맞물려 더욱 어려워지리라고 봤을 것이다. 그래서 사드 배치 추진파들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마침 북한의 무수단 미사일 발사 성공이 명분을 만들어줬다. 미국도 총선 결과를 보면서 한국 측이 주장하는 ‘사드의 한반도화’에 일단 타협했지만, 자신들의 의도를 관철하기 위한 노력은 차기 정부에서도 계속할 것이다. 이 지점이 한·중 관계를 푸는 접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성주는 너무 남쪽이어서 수도권은 물론이고 평택 미군기지조차 방어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레이더 기능이 사실 더 중요하다. 백두산 뒤쪽 중국 퉁화 시에 둥펑(DF) 계열 미사일 기지가 있다. 사드의 레이더 탐지거리가 600㎞이지만 조정하기에 따라서는 (퉁화 시 미사일 기지까지) 커버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이 더욱 우려하는 점은 성주에 배치될 사드보다 앞으로 미국이 중국의 A2AD를 차단하는 전략의 일부분으로 사드를 확대시켜 나가는 것이다. 또한 한·미 연합군의 전쟁 계획에 따르면, 유사시 미군을 어떤 형태로든 보호해서 다시 반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주 이남의 기지들은 유사시 증원 물자나 인원을 관리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또 성주 외 다른 미군기지들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앞으로 사드를 더 들여올 명분이 된다. 이 경우 한국의 안전을 위한 것이므로 한국이 비용을 대라고 할 것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조남진</font></div>7월13일 저녁 성주군청 광장에 군민 300여 명이 모여 사드 배치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7월13일 저녁 성주군청 광장에 군민 300여 명이 모여 사드 배치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미국 정찰위성이 이미 중국을 샅샅이 보고 있는데 중국이 사드에 이토록 민감한 이유는?

정찰위성으로 보고 있지만 만에 하나 놓치거나, 훨씬 가까이서 볼 수 있다면 더욱 정확성을 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핸드폰 기지국이 많을수록 잘 터지는 것과 같지 않을까? 그리고 중국이 우려하는 것은 사드의 기능 확대와 추가 배치로 베이징 뒤에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 기지가 노출되는 상황이다.

그동안 파격적인 친한(親韓) 행보를 보였던 시진핑 주석이 사드 배치로 타격을 받아 어려운 처지가 될 수도 있다고 했는데 이런 점이 중국의 대응에 영향을 미칠까?

분명 그런 측면이 있다. 중국 권력 구도가 대단히 미묘하고 민감하다. 시진핑 주석이 공청단 계열을 교체하고 세력 약화 조치를 취하는 중에 사드 문제가 터졌다. 그의 대(對)한반도 정책에 타격을 주고 권위와 정당성에 흠집을 낼 수 있어 국내 정치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치를 취하고자 할 것이다. 시진핑 자신이 이 문제에 너무 깊이 들어왔던 점도 그냥 넘어가기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수차례 반대 의사를 표명하며 설득하려 했는데, 한국 정부가 그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고 정면으로 거부하는 조치를 취한 셈이 돼 대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성주 군민의 저항, 중국의 반발 등으로 배치를 철회할 가능성은 없을까? 아니면 닥쳐올 재앙을 최소화할 방안은 뭐가 있을까?

철회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박근혜 대통령의 스타일 때문이다. 두 번째로 추진 그룹들은 이 시기를 놓치면 한·미 동맹이 중요한 타격을 입고 또다시 붙들 기회도 많지 않다고 우려할 것이다. 현재의 정부 정책 결정 과정과 권력 구조 아래서는 뒤집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현재 합의한 것은 사드의 한반도화라는 점이다. 이것을 어떻게 잘 유지할 수 있는가, 그것을 변경하려는 시도에 대해 제도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사드 추가 배치의 경우, 비용이 엄청나게 들기 때문에 반드시 국회 비준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절차를 제도적으로 합의하고 지킬 수 있는 세력을 형성할 수 있다면, 중국이나 러시아에도 사드가 대(對)북한 용도라고 주장할 명분이 된다. 또 미국에 대해서도 주한미군을 보호하기 위해 나름 성의를 보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접점이 될 것이다. 한·중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의 기초는 경제적 협력의 굳건함에 있다. 그것이 약해지면 중국에도 도움이 안 된다. 한국 경제가 약화되면 미국이 필요로 하는 시설이나 무기들을 사줄 수 없기 때문에 한·미 동맹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중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접점을 찾아내는 게 한·미 동맹에도 좋고, 한·중 관계에도 도움이 된다.

녹취 도움·김연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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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역사 쓰고 있는 성주 ‘사드반대 투쟁’


[현장취재]‘사드배치’ 발표 한 달여… ‘투쟁’이 ‘일상’이 된 성주군민들
▲ 8.15광복절에 성주군에선 사드배치에 반대하는 군민들 '815인 삭발식'이 진행됐다.

“어디 간다꼬? 이거 달고 가야지. 좋은 거이니끼네.”

성주군청으로 가는 길, 낯선 남자에게 파란 나비리본을 스스럼없이 달아준다. “나도 쫌 이따가 가게 문 닫고 가 볼끼라.” 카톡방 ‘1318+’에서 아이디 ‘주형맘’이 달아주었다. 가슴에 리본하나 달았을 뿐인데 취재 온 기자가 아니라, 성주군민들 집회에 함께하러 온 ‘외부인’ 같은 묘한 이 기분은 뭘까. 군민들은 이렇게 성주를 찾는 모든 이를 사드반대 투쟁에 참가시키고 있었다.

▲ 성주 '유림'에서 5명과 여성 신청자 9명이 삭발을 한채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삭발 결심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머라 카노? 삭발 이기 머라꼬. 삭발 아이라 내 목이라도 내놀끼다.” 사드반대 ‘815인 삭발식’에 참여한 홍영옥(64) 주민은 걱정이 돼 건넨 질문에 버럭 화를 냈다. 어떤 결심으로 이 싸움에 임해 있는지 모르는 게 어이없단 표정이었다. 기자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지난 15일 성주읍 ‘성밖공원’에선 815인 삭발식이 진행됐다. 그런데 이날 실제 삭발을 한 성주군민은 모두 908명. 8.15광복절에 맞추기 위해 815명으로 제한했지만 접수를 시작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그보다 100명 가까이 더 신청한 것. 여성도 5명으로 한정했는데 11명이 접수했다.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니 불감훼상(不敢毁傷)이 효지시야(孝之始也)니라’ 효경에 나오는 공자의 가르침을 외우던 유림(儒林) 회원들도 5명이 접수했다. 908명의 삭발식은 예상과 달리 겨우 30여분 만에 끝났다. 대구경북 미용사협회 소속 70여명의 미용사가 자원봉사를 와준 덕이다.

‘단일장소 최다인원 동시 삭발’에도 도전한 이날 삭발식엔 한국기록원에서 공식 기록을 확인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 한국기록원에서 전국 동시 최다인원 삭발을 기록하기 위해 성주를 찾았다.

성주군민들의 ‘일상생활’이 돼버린 투쟁, 하지만… 

815인 삭발은 어떻게 기획하게 됐을까? “그냥. 8월엔 뭘 해볼까 하다가… 머리나 깎아 볼까? 815명이. 8.15광복절 때. 이렇게 하게 됐어요” 뭔가 특별한 기획 배경이 있지 않을까, 잔뜩 기대했지만 이번에도 빗나갔다. 파란나비 리본 때도 그랬다. 누군가 ‘사드가 들어오면 우리모두 죽게 되니 검은 리본을 달자’고 제안했고, ‘검은색은 좀 그러니, 평화를 상징하는 파란리본을 달자’는 참신한 수정 제안에 바로 삼삼오오 모여 리본을 제작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새누리당 장례식도 그랬다. “내일 새누리당 지도부들 온다는데 우리 장례나 확 치라뿌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룻만에 장례는 준비됐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그래서 성주군민들의 ‘일상생활’이 돼버린 투쟁. ‘위대하다’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그런 집체행위를 기자는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도 왜 하필 광복절에 이런 항의행동을 하기로 결정했는지가 궁금했다. “너무 닮지 않았어요?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난 광복절에 미국의 압력으로 설치되는 사드를 반대하고 있잖아요. 광복이 저절로 온 게 아니잖아요. 우리도 사드를 배치한 미군의 폭정에서 벗어나려면 싸워야죠. 목숨 걸고. 광복절은 우리 민족의 생명과 안전을 되찾은 날이죠? 이런 날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지키는 사드반대 투쟁을 하니 얼마나 뜻깊어요. 그렇죠?” 역시 ‘우문’에 ‘현답’이였다. 지난달 23일 청계광장에서 서울시민들에게 ‘성주군민들이 선거 때마다 1번만 찍어 죄송하다’고 말한 전영미 성주투쟁위 부위원장의 대답이었다.

▲ 사드 반대를 새긴 독특한 삭발을 한 주민도 있었다. [사진출처 성주투쟁위원회]

성주군이 생긴 이래 최다인원, 8천여 명이 모인 이날 삭발식에선 “성주가 대한민국이다”는 구호가 높이 울려 퍼졌다. “한번 결정된 성주에서 사드배치를 철회시키면, 대한민국 그 어디에 사드를 설치하겠어요? 그래서 5만 성주군민이 5천만 대한민국 국민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사드를 반드시 막아낼 겁니다!” 앰프를 진동하는 사회자의 목소리엔 자부심이 가득했다.

“내 땅에서 ‘난민’이 된 우리 일상을 찾아주십시오”

“7.21상경투쟁, 평화나비리본, 새누리당 장례식, 10만 백악관 청원, 815인 삭발”을 성주투쟁 5대 사건으로 꼽은 이재동 성주투쟁위 집행위원장은 승리를 확신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승리하는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외부세력’ 논란이 있을 때 (성주군민이)직접 상경해 우리 스스로 외부세력이 돼 논란을 잠재웠다. ‘님비’로 몰릴 때도 성주배치가 아니라 한국배치를 반대한다는 뜻으로 평화나비리본을 달았다. 새누리당의 오만함은 장례식으로 응징했다. 무엇보다 사드는 미국과 주한미군의 전쟁무기임을 알리기 위해 백악관에 청원서를 전달하는 뜻깊은 투쟁을 전개했다. 그리고 오늘 광복절 815인 삭발식으로 5만 성주의 결심이 5천만 대한민국의 평화의 날개가 됐다.”

“성주군민들의 일상을 찾아주십시오. 지난달 13일 날벼락처럼 성주 사드배치가 발표되고 한 달. 우리 성주 군민들은 일상을 잃어 버렸습니다. 여름 한철 마을 주민들끼리 관광버스를 타고 나들이 한번 가는 즐거움을 잃어 버렸고, 방학을 맞은 아이들 데리고 계곡으로 물놀이 가는 기회도 놓쳐 버렸습니다. 올림픽 경기도 눈에 안 들어오고, 저녁 먹고 촛불문화제에 가는 게 새로운 일상이 돼버렸습니다. 참외농사를 짓던 평화로운 고장 성주는 전쟁터가 되었고, 성주군민은 내 땅에서 난민이 돼버렸습니다.” 삭발을 한 어느 성주군민이 대통령께 띄운 호소문의 일부이다.

일상을 잃어버린 성주군민들. 한국민을 ‘대표’해 사드배치 반대투쟁을 한 달 넘게 벌이고 있는 이들의 호소를 먼저 귀담아 들어야 할 사람은 전국의 이웃사촌들 아닐까. 

성주= 강호석 기자  sonkang1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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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과 사드, 송로버섯 오찬과 전기료 폭탄

 
 
[칼럼] 문정왕후-윤원형, 박근혜-이정현에게 백성은 무엇인가?
 
임두만 | 2016-08-16 11:50:0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오늘(15일)은 광복 71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 대한민국 박근혜 대통령은 “정부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로부터 국가와 국민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국제사회와의 공조를 더욱 강화해 나가면서 필요하고 가능한 모든 조치를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광복 71주년 경축식 경축사를 통해서다.

▲독립유공자 초청 청와대 만찬을 주재한 박근혜 대통령, 이미지 출처 : 청와대 홈페이지

그는 또 “이 땅의 평화는 물론,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도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며 “진정한 광복은 8천만 민족 모두가 자유와 인권을 누리며, 더 이상 이산의 아픔과 고통이 없는 통일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 과업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한반도에서 핵과 미사일, 전쟁의 공포를 걷어내야만 한다”고 강조하고 “사드 배치 역시 북한의 무모한 도발로부터 우리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자위권적 조치였다”며 “저는 국민의 생명이 달려있는 이런 문제는 결코 정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만약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방법이 있다면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라고 말해 반대파들을 윽박질렀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이 같은 언급은 허공을 때리는 공허한 울림일 뿐이다. 지금 누구도 이러한 박 대통령의 ‘충정’을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충정’으로 보질 않는다. 특히 작금 터져 나온 ‘송로버섯 요릿상’ 이야기는 폭염에 찌든 서민들의 복장만 더 터지게 한다.

문화는 늘 시대를 이야기 한다. 문화가 말하는 시대 이야기는 미리 계획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놀랍도록 그 시대에 딱 맞는 드라마와 영화들이 등장, 시청자와 권력자를 함께 깨운다.

현재는 MBC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옥중화’가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이 드라마는 조선 명종시대 감옥을 바탕으로 당시 권력자와 서민들의 모든 삶을 상세하게 그리고 있다. 즉 ‘전옥서’라는 당시의 감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간 군상들의 작은 권력을 둔 이전투구와 불법비리, 여기에 당대의 권세가인 윤원형과 그의 부인 정난정의 권력과 금력을 향한 욕심과 패역, 더 나아가 권력 최상층인 명종이 모친 문정왕후와 최고 권력을 놓고 겨루는 권력쟁투까지 매우 심도 있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 이 드라마는 몇 주 전 윤원형의 부인 정난정의 생일잔치를 통해 상당한 메시지를 던졌다. 즉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고, 전옥서에 감금된 죄수들은 하루 멀건 죽 한 그릇도 못 먹이는 현실인데 정난정은 사흘간의 생일잔치를 벌이며 벼슬을 노리는 전국의 토호들에게 뇌물을 받기에 여념이 없다는 내용을 방송했다. 그리고 이 방송은 정난정의 최후를 미리 예감케 했다.

이뿐 아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명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으로 국가의 대사를 장악했던 문정왕후는 명종이 성장하여 친정체제로 넘겨준 뒤에도 실제 뒷전에서 모든 권력을 행사하려 한다. 이에 명종은 반발하며 어머니의 권력행사를 제어하려 하지만 문정왕후는 윤원형 등 조정을 장악한 소윤일파를 앞세워 왕의 친정을 방해한다.

이 과정에서 드라마는 대비의 봉은사 중건 사건을 놓고 또 하나의 메시지를 던진다. 즉 앞의 정난정 생일사건에서 그린 대로 것과 유사하다. 당시 흉년에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다. 이에 국고가 비어 있으므로 아무리 천하의 대비라도 대형국사를 진행할 수 없다. 그러자 대비는 정난정 등을 이용하여 불법적으로 뒷전에서 긁어모은 ‘불의한 돈’으로 봉은사 중건을 꾀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국가의 세금을 책임진 ‘평시서’를 통해 상인들을 쥐어짜는 모습도 그려낸다.

이 드라마는 이처럼 당대의 권력자들이 어떻게 망해가고 있는지를 착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권력이 어떤 과정을 통해 민심을 잃어가는지, 또 민심은 이미 떠났는데 이를 알지 못하는 불의한 권력자는 어떤 탐욕을 부리는지, 그리고 이에 호응하며 아부하는 세력들은 어떤 군상들인지 드라마 한편을 통해 많은 것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미 역사는 그들의 최후를 기록해놓고 있다.

문정왕후 사후 윤원형과 정난정은 자결했다. 그런데 그 자결과정이 전해지는 내용으로 보면 참 어이없다. 문정왕후 사후에 윤원형과 정난정은 탄핵을 받았고 명종은 이를 윤허하지 않았으나 하인의 금부도사가 온다는 기별 한마디에 정난정을 자결했다는 설, 그 설이 진위이든 지어 낸 이야기든 스스로의 죄업이 잡히면 ‘사형’임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드라마는 이처텀 불의한 권력의 최후를 미리 예견하며 그 사전 작업으로 정난정과 윤원형 문정왕후의 불의한 권력남용을 상세하게 그리고 있는 것이다.

2016년 8월, 전국은 가마솥 더위에 설설 끓고 있으며, 이에 국민들은 한전과 산업부에 가정용 전기료의 누진제 해결책을 요구하며 민심도 끓고 있다. 그런데 이 더운 여름에 청와대 ‘송로버섯 요리’ 오찬 소식은 끓는 국민들의 분노 게이지를 터지게 만들고 있다. 서민들은 생전 들어보지도 못했던 송로버섯이란 식재료, 알려지기론 지구상에서 가장 비싼 식재료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이 비싼 요리가 청와대에서 서민들 전기료 깎아주기 협의를 했다던 대통령과 여당 대표의 만찬에 나왔다고 한다.

현재 국민들이 공분을 느끼고 있는 송로버섯이 포함된 이른바 ‘박근혜 초청 청와대 초호화 오찬’의 얘기는 이렇다. 지난 11일 박근혜 대통령은 최근 치러진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대표로 당선된 이정현 대표와 신임 지도부를 청와대로 초청, 오찬을 가졌다. 이 오찬상은 송로버섯과 바닷가재, 훈제연어, 캐비아 샐러드, 샥스핀 찜, 한우갈비, 능성어 요리 등 최고의 메뉴들이 올라왔다고 한다.

이 가운데 특히 송로버섯은 국내에서는 구할 수조차 없는 식재료이며 이 외에도 바닷가제, 캐비아, 샥스핀 등도 서민들은 이름만 들어 본 요리재료들이다. 그런데 이런 요리들을 먹으면서 대통령은 “당정청이 하나가 돼서 오로지 국민만 보고 앞으로 나아갈 때, 국민의 삶도 지금보다 더 편해질 수 있고, 나라도 튼튼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으며, 이정현 대표는 이런 요리들을 대접받으며 대통령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이다. 그러므로 곧 이는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백성’ 운운한 것과 같다.

송로버섯은 땅속에서 자라나는 이유로 돼지를 이용해서 채취해야 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채취된 적이 없다고 한다. 때문에 전량 수입에 의존하며, 일부 최고급 호텔에서 송로버섯 스프를 특선요리로 내는 날에는 그 가격이 1천만 원대를 훌쩍 뛰어 넘는다고 한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나타나는 프랑스산 ‘냉동’ 송로버섯은 500g에 158만 원, 어떤 보도를 보면 유럽에서는 이따금 발견되어 1kg이상을 캐는 경우 수억 원대의 가격을 호가하는 땅속 로또로 알려져 있다. 청와대가 어떤 송로버섯을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서민전기료 운운하며 먹을 식재료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때문에 관련 기사에 이런 댓글도 달려있다.

“金樽美酒 千人血(금준미주 천인혈 : 금잔에 담긴 향기로운 술은 천백성의 피요) 玉盤佳肴 萬姓膏(옥반가효 만성고 : 옥쟁반에 담긴 맛난 요리 만백성에게 짜낸 고혈이라) 燭淚落時 民淚落(촉루락시 민루락 : 너희들 촛대에 촛농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歌聲高處 怨聲高(가성고처 원성고 : 노랫가락 높은 곳에 백성들 원성도 높아간다)”

이 시조는 판소리 춘향전에 나온다. 원작자는 성이성, 실제 춘향전의 이몽룡은 성이성이 주인공이다. 춘향전에 나오는 잔치연에서 이몽룡이 변학도를 질타하면서 읊은 시조는 성이성이 짓고, 읊었다. 이는 성이성의 4대손 성섭의 저서 <교와문고>와 그의 스승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에 기록되어 있다.

드라마 옥중화의 배경에서 서민들은 가뭄과 흉년으로 고통 속에 있다. 2015년 대한민국 여름은 온열증으로 사망자가 속출하고 병원을 찾은 환자 역시 수천 명에 이르고 있다. 그럼에도 서민들은 ‘징벌적 누진세 폭탄’이 무서워 에어컨을 비롯한 냉방기조차 마음 편히 가동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때에 오찬 참석자 모두가 긴팔 양복 정방에 넥타이까지 차려메고 대통령 또한 긴팔 상의를 입고 송로버섯 요리를 먹으면서 언필칭 서민을 말했다면 그것은 허위이며 거짓이다. 그들이 말하는 서민이 문정왕후와 정난정이 보는 백성과 하등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의 광복절 치사 또한 모두가 허언으로 들린다. 그가 사랑하는 나라와 백성이란 입에 발린 소리로 들린다.

▲전우용씨 트위터 캡쳐

송로버섯 요리 소식에 전우용 한양대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는 자신의 SNS 계정을 통해  “새누리당 신임 지도부 초청 청와대 오찬에 캐비어, 송로버섯 등 초호화 메뉴…. 저런 거 먹으면서 서민 가정 전기료 6천 원 깎아 주는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했다는 거군요. 고작 몇 천원 가지고 징징대는 서민들이 얼마나 찌질하게 보였을까”라고 개탄했다. 이게 민심이다.

그래서다. 박근혜와 이정현, 그리고 새누리당과 박근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윤원형과 정난정, 문정왕후와 변학도를 되새겨보기 바란다. 71주년 광복절이 쓰는 시일야방성대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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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 기업 일군 독립군 아들 "친일파 청산 포기할 수 없다"

 
[조호진 시인의 삶이 아름다운 당신 ②] 장병화 성남산업진흥재단 대표이사
 

16.08.16 20:36 | 글:조호진쪽지보내기|편집:김지현쪽지보내기

▲ 장병화 성남산업진흥재단 대표이사 ⓒ 장병화


장병화(69) 성남산업진흥재단(아래 성남재단) 대표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하지만 업무시간을 내주지는 않았다. 성남재단은 성남시가 중소기업 및 벤처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전국 지자체 중 최초로 설립한 기관이다.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기관장이 사적 인터뷰를 업무시간에 할 수 없다는 게 이유다. 공적 질문이 포함됐는데도 그는 원칙을 강조했다. 이런 까닭에 인터뷰는 지난 10일 저녁 퇴근 후에 서초구 자택에서 늦게까지 진행됐다. 

그는 독립군 아버지를 해방 조국에서 동족에게 잃었다. 지독한 가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무작정 상경해 밑바닥 생활을 했지만 국내 최초로 오디오 믹서기를 개발하는 등 음향전문 기술을 쌓으면서 연간 100억 원대 매출을 올리는 기업을 일궜다.

그는 인간 승리에서 멈추지 않았다. 민족문제연구소와 희망제작소 등에 깊숙이 참여하면서 역사의 승리를 도모하고 있다. 독립군의 아들도 독립군인 것이다. 그의 독립운동 목표는 친일파 청산과 민주사회 구현 그리고 남북통일이다. 

19세에 독립운동 뛰어든 장이호 선생... 이승만에 속고 인민군에 죽은 아버지
 

▲ 평북 신의주 출신 독립운동가 장이호(1916~1950) 선생. 붉은 원안의 인물이 장이호 선생이다. ⓒ 장병화


그의 부친 장이호(1916~1950) 선생은 평북 신의주 사람으로 열아홉에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망명했다. 선생은 중국군관학교 한청반(韓靑班)에서 4년간 간부훈련을 받은 뒤, 광복군 2지대에 투신해 일본군을 상대로 기밀탐지와 지하공작 등을 전개했다. 1944년 광복군 제3지대 분대장이 됐고, 그해 12월 동지들과 함께 초모공작(독립군 모집)을 전개하면서 고려대 총장을 지낸 김준엽과 <사상계>를 창간한 장준하 등의 학도병을 광복군에 편입시켰다.

김준엽은 1944년 3월 중국 강소성 서주(徐州)의 일본군 쓰까다부대를 탈출했고 장준하는 3개월 후에 같은 부대를 뒤따라 탈출해 중국 국민당 유격대에 들어갔다가 1945년 2월 광복군에 편입됐다. 장이호 선생은 해방 직전인 1945년엔 서주지구 일본군 부대에 배치된 조선인 학도병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한미합작 돌격작전 전략특수(OSS) 훈련을 받았는데 일제가 항복하면서 작전이 취소됐다.
 

▲ 1945년 8월 15일 광복기념사진. 붉은 원안의 인물이 장이호 선생이다. ⓒ 장병화

 

▲ 광복군 제3지대 분대장 장이호 선생. 아래 맨 우측이 장이호 선생. ⓒ 조호진


광복 후에는 서주지구 군사특파원단으로 파견돼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보호 임무를 수행하다 1946년 귀국해 1947년 나이 서른에 열 살 아래 송정숙씨와 결혼해 형제를 낳았다. 장병화 대표가 장남이다. 장이호 선생은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면서 일제 앞잡이였던 사찰계 형사들에게 시달렸다. 백범의 한국독립당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참극은 장 대표가 네 살이던 1950년 9월 25일 벌어졌다.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서 살 때였습니다. 6.25전쟁이 발발했는데도 아버님은 피난을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건 수도 서울을 지키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거짓 방송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쁜 대통령입니다. 서울이 수복된 것은 인천상륙작전에 의해서였습니다. 연합군의 파상 공세에 밀리기 시작한 인민군들은 북으로 후퇴하면서 억울한 사람들을 죽이고 달아났습니다. 

참극은 1950년 9월 25일 벌어졌습니다. 9.28 서울 수복을 나흘 앞두고 동네 빨갱이의 밀고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6.25 동이인 동생이 인민군에 끌려갔는데 그 직전에 죽음을 예견한 아버지가 저를 빼돌렸습니다. 대를 잇기 위해 저를 이웃집에 맡긴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 등에 업힌 갓난쟁이 동생이 하도 울어대니까 한 인민군이 어머니와 동생을 빼줘서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성북경찰서 뒤 돌산에서 총살당하고 말았습니다."

칡뿌리로 허기 달래던 어린 시절... 중학생 때, 도둑기차 타고 무작정 상경
 

▲ 해방된 조국에서 인민군에 의해 죽임 당한 장이호 선생 묘소. ⓒ 장병화


이승만에 속아 남편을 잃은 그의 어머니는 1.4 후퇴가 있기 전에 어린 형제를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 내려갔다가 친정인 강릉 주문진으로 거처를 옮겼다. 친정 도움으로 근근이 살면서 쑥과 칡뿌리로 허기를 달랬다. 장병화 대표는 그 시절의 배고픔을 잊지 못한다. 자신의 밥그릇만 유독 작게 느껴졌다. 돌아서면 배가 고팠다. 배부르게 밥 먹어 보는 게 소원이었다. 

학창시절, 그는 성적이 우수했다. 하지만 머릿속엔 돈 벌 궁리뿐이었다. 가난에 사무친 그의 귀에 일본이 잘산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일본에 가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빠졌다.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창문 밖 동해 바다 수평선 너머 일본을 헤엄처서라도 가고 싶었다. 가자, 일본에 가서 돈을 벌자! 중학교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서울행 기차를 탔다. 무작정 상경을 감행한 그는 도둑기차를 탔다. 

차표 검사가 시작되면 기차 난간에 매달리면서 피했다. 목숨까지 걸었지만 결국 걸렸다. 영주역에서 강제 하차당한 그는 다시 도둑기차를 타고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하지만 역무원에게 또 걸렸다. 학생복 덕분에 꿀밤 몇 대 맞고 풀려났다. 부산행 기차를 타기 위해 서울역까지 걸어갔다. 하지만 서울역은 강릉역처럼 감시가 허술하지 않았다. 무임승차를 포기한 그는 부산행 기차푯값을 마련하기 위해 일자리를 구하러 다녔다.  

가출 청소년에게 일자리는 없었다. 며칠 굶으며 노숙을 했더니 거지나 다름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는데 제기동의 한 공장에서 밥을 준다고 하기에 무조건 일했다. 정말 밥밖에 주지 않았다. 소년 노동자는 착취의 대상이었다. 옷은 입고 온 교복 한 벌뿐이었다. 외출복이자 작업복이었던 검정 교복이 땀에 절면서 붉어졌다. 부산행 차표를 사기 위해 다른 일터를 찾아 나섰다. 

월급 주는 곳에 취업하려면 보증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서울에 사는 외가 친척을 찾아갔다. 보증은커녕 어머니가 기다린다고, 고향으로 어서 내려가라고 했다. 주문진으로 돌아왔지만 머릿속엔 서울 생각뿐이었다. 다시 상경했다. 몇 달간은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막내 외삼촌 소개로 전축 만드는 공장(성일사)에 취업했다. 기술자가 되면 배는 곯지 않는다. 하지만 기술 밥은 눈물 밥이다. 혼나고 터지면서 익힌 기술을 거저 가르쳐주는 기술자는 없다. 

국내 최초로 오디오 믹서기 개발... 연매출 100억대 음향기기 전문기업 일궈
 

▲ 국내 최초로 오디오 믹서기를 개발한 장병화 대표. ⓒ 장병화


그는 가장 일찍 출근해 가장 늦게 퇴근했다. 선배들의 심부름과 공장 청소를 성실하게 감당했다. 눈이 내리면 사람들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동네 골목까지 쓸었다. 독립군 아버지는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못한 대신에 정직과 성실을 물려줬다. 그의 성실을 눈여겨 본 공장장이 야간에 기술학원 다니는 것을 허락해줘 종로2가 YMCA 옆 '한국TV기술학원'을 다녔다. 한창 놀기 좋은 열여덟 청춘이었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원을 다녔습니다. 제일가는 기술자였던 옥씨 성을 가진 공장장님과 선배 기술자들이 각별하게 챙겨주셨습니다. 어린 시절, 가난했지만 음악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어머님이 축음기를 통해 슈베르트의 세레나데와 슈만의 트로메라이 등 고전음악을 들려주셨습니다. 

어려서부터 시와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만지는 장롱처럼 큰 포마이카 전축 진공관 앰프에서 음악소리가 들리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음악소리가 너무 좋아서 밤새는 줄도 모르고 일했습니다. 주경야독으로 일하고 공부했더니 기술이 금세 늘었습니다. 제 손에서 안 고쳐지는 라디오와 전축이 없을 정도로 기술이 늘었으니까요."
 

▲ 장병화 대표가 맨손으로 일군 가락전자. ⓒ 장병화


3년간 기술을 배운 뒤 을지로 4가에서 유리 진열장 하나 놓고 노점을 시작했다. 라디오와 전축을 고치고 팔았는데 고객들이 늘면서 장사가 잘됐다. 그냥 기술자가 아니고 그냥 장사꾼이 아니라 기술과 정직을 갖춘 청년 사업가였다. 3년 만에 세운상가에 3평짜리 점포를 얻었는데 군대에 가야 했다. 점포를 친동생에게 맡기고 군대를 갔다 왔더니 문을 닫은 상태였다. 진열장 하나 놓고 노점을 다시 시작하며 재기의 발판을 다졌다. 

1970년대 한국의 음향 기술은 형편없었다. 선진 음향기술 도입을 물색했던 중에 일본 마쓰시다사(파나소닉의 모체)의 요청을 받고 해외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일본의 기술을 배우고 제품을 복제하면서 국내 최초로 오디오 믹서를 만들었다. 수입품 오디오 믹서는 제품은 좋지만 너무 비쌌다. 박원웅과 채은옥, 이장희 등 유명 디스크자키들을 비롯해 방송국 엔지니어 그리고 명동의 청자다방은 물론이고 전국의 음악다방들이 그가 만든 오디오 믹서를 사용했다. 제주도에까지 건너갔다. 그의 제품은 가격에 비해 성능이 좋았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1977년 음향기기 제조업체 '가락전자'(당시 업체명은 '경일엔터프라이즈')를 창업했다. 그는 38년간 경영하면서 기업을 키웠다. 음향기기 특허를 수십 개 가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품질을 인정받으면서 독일과 미국 등 25개국으로 수출했다. 기술과 성실에서 단연 앞선 그는 더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포기했다. 뇌물을 주고 접대를 해야 하는데 그런 짓을 도저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에선 정직과 신의보다 뇌물과 향응이 더 잘 통합니다. 저와 같은 기업인은 한국처럼 부패한 풍토에선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후회하진 않습니다. 부정부패로 성장한 기업은 언젠가 무너집니다. 다 허상입니다. 2만 달러를 성큼 넘어선 한국이 3만 달러 문턱에 걸린 것은 바로 부정부패 때문입니다."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창립, 11년째 회장 맡으며 임종국 상금 지원
 

▲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을 11년째 맡고 있는 장병화 대표는 임종국상 운영비와 상금을 후원하고 있다. ⓒ 장병화


독립군 아버지가 원망스럽다. 친일파들은 일제 시절의 악행을 감추기 위해 눈엣가시인 독립운동가와 그의 가족들을 모질게 탄압했다. 굶주림에다 탄압까지 당한 후손들은 이름까지 바꿔가며 독립운동의 흔적을 지워야 했다. 반면 어떤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은 친일파와 독재자에게 붙었다. 부역의 대가로 호가호위했다. 생존에 급급해 아버지를 잊고 살았던 장병화 대표는 아버지를 찾으면서 역사에 눈을 떴다.

"독립군의 아들이란 자부심보다는 굶주림 해결이 더 급했습니다. 기술을 배우고 돈을 벌게 되니 아버님이 생각났습니다. 광복군동지회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갔더니 아버님과 함께 독립 운동하던 어른들이 계셨습니다. 그분들이 동지의 아들은 동지라면서 이청천 장군과 함께 찍은 아버님 사진을 주셨습니다. 그 어른들 덕분에 아버님이 공적을 인정받고 훈장을 받게 되면서 독립군 아들로 살아야 한다는 정체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장이호 선생은 1977년 대한민국건국훈장에 추서됐다. 선생에게 훈장을 수여한 대통령은 '일왕'(천황)에게 혈서까지 쓰며 충성을 다짐한 황군장교 출신 박정희다. 청산 대상인 친일파가 단상(壇上)에서 단하(壇下)의 독립 운동가들에게 훈장을 수여한 것이다. 올해 71주년 광복절 경축식장에서도 아이러니 상황이 재현됐다. 아직은 독립군의 나라가 아니기에 어쩔 수 없다. 
 

▲ 장병화 대표가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에게 선물 받은 글을 읽고 있다. ⓒ 조호진


독립군의 아들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 그는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면서 독립운동단체와 독립운동가들을 찾아다녔는데 독립운동을 팔아먹는 사람들을 여럿 봤다. 어떤 후손은 부정부패에 연루돼 감옥에 갔다.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해야 활 광복회(회장 박유철)는 감투 싸움에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역사와 정의가 구정물 통에 빠지면서 이 지경이 됐다. 그의 타는 목마름은 민족문제연구소와 독립운동가 조문기(1927~2008) 선생을 만나면서 해갈됐다. 

독립군의 핏줄은 달랐다. 역사에 눈 뜬 그는 민족문제연구소 이사로 헌신하면서 2005년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를 만들고 임종국상을 제정했다. 임종국상은 선생의 친일청산과 역사정의 실현 그리고, 민족사 정립을 계승한 개인과 단체들을 대상으로 학술·문화와 사회·언론 분야로 나눠 시상한다. 상금과 운영 경비는 11년째 회장을 맡고 있는 장병화 대표가 후원하고 있다. 

칠순 앞둔 독립군 아들의 다짐 "선열 뜻 받들어 남북통일에 헌신"
 

▲ 겉은 온유하지만 속은 철두철미한 기업인이자 민족운동가 장병화 대표 ⓒ 조호진


그는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다. 겉은 부드럽지만 속은 꼿꼿하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했다면 민족운동과 시민운동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독할 정도의 원칙과 성실을 갖추지 못했다면 실패했을 지도 모른다. 운동 참여와 기업 운영을 병행한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가 재야 사학자와 시민운동가들로부터 입지전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것은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꼿꼿한 운동가이자 당당한 기업인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한 대학으로 공부하러 간 적이 있는데 학벌을 돈 주고 사라는 제안이 있었다. 그는 학벌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기술과 능력은 뛰어난데 학벌이 없다고 무시당했다. 솔깃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지독할 정도로 원칙주의자다. 성실함으론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학벌과 인맥 사회를 정직과 성실로 정면 돌파했다. 요즘에도 새벽 5시에 깨어 밤 11시까지 공부하며 일한다. 

칠순을 앞둔 독립군의 아들, 그는 역사에서 만큼은 청년보다 푸르고 열정은 독립군의 총구처럼 뜨겁다. 그는 '민족 반역자는 사라질 수 있으나 잊을 수는 없다'는 제목의 글에서 "민족정기는 도둑을 맡고 정의는 빛을 잃었다"고 탄식하면서 "민족 반역자를 처단하지 못한 비극을 후손에게 물려주어선 안 된다"며 독립 정신을 이어갈 것을 호소했다. 그러면서 남은 인생을 남북통일에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통일된 국가를 만드는 날이 하늘에 계신 독립선열들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은 목숨을 통일에 바치려고 합니다. 통일 독립군이 되려고 합니다. 하나 된 조국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제2의 독립운동이라 생각하며 통일이 되는 날까지 몸과 마음을 바치겠습니다."

아들에게 물려준 건 기업가의 책임... 성남재단에서 갑질 행정은 용납 안 해
 

▲ 성남산업진흥재단 8대 대표이사로 취임한 장병화 대표. ⓒ 장병화


이재명 성남시장은 성남산업진흥재단 대표를 공모하면서 청렴함과 경영능력을 갖춘 인물을 찾았다. 이 시장과 장 대표는 일면식이 없었다. 이 시장은 장 대표의 청렴함과 경영인으로 오랜 경험, 게다가 역사와 시대인식까지 갖춘 점을 높이 사면서 대표로 선임했다. 그런데 묘한 일이 벌어졌다. 장 대표가 2015년 7월 성남재단 대표로 취임한 뒤 셋째 아들에게 승계한 기업이 국세청 세무조사를 받았다. 

"공교롭게도 성남산업진흥재단 대표에 취임한 뒤 아들에게 승계한 기업(가락전자)이 국세청 세무조사를 받았는데 보복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5년도 10년도 아닌 15년 치 서류를 탈탈 털다시피 조사했습니다. 회사 돈의 일원도 사적으로 사용한 적이 없기 때문에 두려울 것도 없고 크게 걸릴 게 없습니다만, 이 시장 주변인물에 대한 보복 같아서 불쾌함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장 대표는 가락전자가 30주년을 맞은 2007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전문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겼는데 두 번 다 실패했다. 자수성가한 그는 부의 대물림을 반대한다. 자식들도 그렇게 키웠다. 2남 1여 모두 제 갈 길로 갔다. 큰아들은 자기 사업, 둘째 딸은 수의사, 셋째아들은 대기업을 다녔다. 그는 셋째아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부의 대물림이 아닌 '책임의 대물림'을 위해서였다. 기업이 망하면 그 피해는 노동자와 주주에게 돌아간다. 그래서 기업가의 경영책임과 사회적 책임이 무거운 것이다. 
 

▲ 셋째 아들(장성준)이 승계한 음향기기 전문기업 '가락전자'. 장병화 대표가 물려준 것은 부가 아니라 기업가의 책임이다. ⓒ 장병화


삼성전자에 다니던 셋째아들은 그의 요청에 부응했다. 그는 아들에게 경영을 바로 맡기지 않았다. 말단사원으로 채용했다. 셋째아들 장성준씨가 지난 2015년 6월 사장에 취임한 것은 5년에 걸친 경영훈련에서 통과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들이라고 해서 봐주는 아버지가 아니다. 그는 회사를 떠나면서 아들에게 백년 기업으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민족과 사회 앞에서 당당한 백년기업을 소원하고 있다. 

그에게 기업가의 덕목에 대해 물었다. 가장 중요한 덕목은 정직이라고 했다. 사장이 정직하면 직원도 정직해지고, 기업이 바르게 성장하면 사회가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사장 자리는 희생하는 자리라고 했다. 아들에게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이고 사장은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책임지고 희생하는 자리라는 것을 누누이 가르쳤다. 그가 아들에게 승계한 것은 부가 아니라 책임이었다. 그는 정직에 대해 이렇게 강조했다. 

"일제가 물러가면서 '조선은 100년이 지나도 정직하고 깨끗한 사회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를 퍼붓고 갔다는데, 우리 사회는 일제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제가 그렇게 장담한 것은 우리 민족에게 자학과 분열을 심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근면 성실하고 우수합니다. 부정부패를 타파하면 민족의 미래는 밝습니다. 자녀들에게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성공하라고 가르치지 말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해서 성공하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성남재단 선장인 장 대표의 키워드는 혁신과 투명이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혁신을 주도했다. 잦은 회의를 줄이고 종이문서를 없애면서 패드를 지급했고 '우문현답'(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현장에 답이 있다)과 '2현3무'(2일은 현장 3일은 사무실)를 도입하는 등 현장을 중시했다. 그의 혁신은 갑과 을의 전환이다. 성남재단은 을이 되고 기업은 갑이 되도록 위치를 바꿨다. 직원들이 갑질하거나 선물과 접대를 받거나 커미션(수수료)을 받으면 용납하지 않는다.  

"30년 넘게 기업하면서 갑질 행정의 폐해를 숱하게 경험했습니다. 갑질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몰래하다 적발된 직원 몇 명은 강등 조치했습니다. 성남재단의 목적은 중소기업을 돕는 것입니다. 기업이 살아야 지역경제도 살고 나라 경제도 삽니다. 대표가 된 지 1년이 지나면서 직원들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기업인들과 도시락을 먹으며 미팅할 정도로 현장을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혁신에 동참한 직원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골프 대신 고전음악 즐기는 기업인... "행복한 음악과 따뜻한 이웃이 필요하죠"
 

▲ 임종국상은 친일청산과 역사정의 실현 그리고, 민족사 정립을 계승한 개인과 단체에 수여한다. ⓒ 장병화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인가. 그렇다. 나라와 민족을 팔아서라도 호의호식하면 되는 이 땅에선 그렇다. 그래서 친일파와 후손들은 잘 살고 있다. 못 산다는 것은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처럼 사는 것이다.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과 재산을 바친 대가로 친일파에게 고문당하고 죽임당하고 그 후손들은 못 배우고 못 산다. 이 지경이 된 나라 대한민국에서 정의를 말할 수 있을까.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프랑스공화국은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는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알베르 카뮈의 말이다. 프랑스의 자유, 평등, 박애는 나치 부역자들을 철저하게 청산하면서 세운 정신이다. 관용은 무조건 봐주는 게 아니라 죄과를 청산한 후에 베푸는 정의다. 친일문제를 덮자고 하는 것은 관용과 화해가 아니다. 역사에 대한 반역이고 친일에 대한 부역행위다. 이 나라를 관용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선 친일파들을 끝끝내 심판해야 한다. 역사와 정의를 세우는 일에는 결코 시효가 있을 수 없다. 
 

▲ 고전음악 애호가인 장병화 선생. ⓒ 조호진


진정으로 잘 산다는 이런 것이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삶이다. 땀 흘려 일해 모은 재화를 이웃과 나누는 삶이다. 불의가 침범하면 정의로 맞서는 삶이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해서 기업을 일구고 일가를 이룬 장병화 대표는 잘 살았다 할 것이다. 역사 정의를 세우는 일과 민주사회를 구현하는 일에 가진 것을 나누었으니 독립군의 아들로서도 임무를 잘 수행한 것이다. 

이제 그만 쉬어도 될 것 같은데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아직은 쉴 때가 아니란다. 기업가로서 혁신과 역사의 진보를 고수하겠단다. 사람들은 그를 보면 그럴 것이다. 무슨 재미로 사나? 악기의 팽팽한 줄을 계속 조이면 현(絃)은 끊어진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취미가 고전음악 감상과 책읽기다. 이런 세상이 아니었다면 시인 혹은 음악가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는 고전음악 애호가다. 19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의 곡과 첼로 곡을 좋아한다. 돈이 생기면 클래식 음반을 사 모았는데 그렇게 모은 1000장 중에 200장을 골라냈다. 음악은 지친 몸과 영혼을 달래주는 좋은 친구다. 벤처협회 회장과 겸임교수 등을 역임한 그는 신식 경영인이지만 취미는 구식이다. 음악을 사랑하는 독립군의 아들이 꿈꾸는 세상은 이런 세상이다.

"음악은 옛날 음악이 진짜 음악입니다. 턴테이블에 음반을 올려놓으면 진공관 앰프에서 육신과 영혼을 위로하는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음악이 가슴에 와 닿을 때의 행복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디지털 기계는 그런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가상이 현실화되는 4차 산업혁명이 온다 해도 사람에겐 행복한 음악과 따뜻한 이웃이 필요합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상상합니다. 친일파와 부정부패가 청산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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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장의 이슬, 독립의 넋 비추고

8.15기념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에서 펼친 넋풀이 퍼포먼스

벽안(碧眼)의 예술인이 놋쇠바루를 치며 구음을 한다. 길고 하얀 넋전을 단 막대기를 두 손에 들고 허공으로 휘휘 저으며 사형장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입구로 돌아온 춤꾼은 형장의 이슬이 되기 전, 한번쯤 몸을 떨었을 넋들에게 절을 하듯 고개를 숙인다.

이어서 푸른 하늘과 붉은 벽돌이 마주치는 작은 사형장 마당을 하얀 종이인형의 휘날림에 따라 춤인 듯 절규인 듯 뛰어다닌다. 양혜경씨의 서대문형무소 사형수를 위한 넋풀이다.

넋전춤 공연은 광복 71돌을 맞아 서대문구청 주최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린 ‘서대문독립민주축제’와 함께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회장 김희선)가 마련한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한마당’의 한 프로그램이며 격벽장(수감자 운동장)에서 펼쳐지는 대규모 퍼포먼스 ‘왜놈대장 보거라! 우리의 자유를!’과 맞물려진 공연이다.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에서 이루어진 예술가의 첫 넋풀이공연이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지닌 이날 넋전춤 퍼포먼스는 관객을 위한 공연만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원혼들을 위한 진혼굿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싶다.

8월의 뙤약볕 아래에서 약 30분간 펼쳐진 ‘넋전춤 퍼포먼스’는 쿠바 출신 현대무용가 기에르모씨와 멜로디언 연주에 이대원씨, 첼로에 문지윤씨 등 4명의 예술인들이 함께 만들었다.

1인극 넋전춤 연희자인 양혜경씨는 이날 공연을 위해 아침 7시부터 이곳에 와서 흰종이로 넋전을 오렸다고 한다. 넋전을 오려가는 동안 묵직한 무거움이 종이로 묻어나오는 느낌이었고 그 기운으로 춤을 추고 끝나자마자 울음을 쏟아냈다.

26년간 넋전을 만지고 거기에 의식을 담고자 출가까지 했던 그에게 서대문형무소의 사형장은 조국 해방과 독립, 온전한 자유를 위해 당당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사람들이기에 그 어떤 원혼보다도 더 아팠으리라.

이날의 넋전춤은 그래서 행위자도 관객들도 눈물과 땀을 동시에 흘리는 공연이었다. 다만 기에르모씨의 지적처럼 공연 도중에 행위자 앞을 지나다니며 사형장의 아픔을 외면하고, 관광지 다니듯 한 일부 관람객들의 태도에 그 의미가 퇴색하는 것 같아 씁쓸했다.

기에르모씨는 이날 넋전춤을 “역사에 대한 가슴 깊이 울려나오는 울림이었고 사랑이었다”며 자신의 부모님도 2차 대전 당시 연합군으로 참전해 일본에 대항해서 싸웠기에 그 역사적 맥락을 충분히 안다고 공감을 표시했다.

매달 한 번씩 서울시립공원묘지 용미리에 있는 무연고자 묘를 찾아 넋전춤으로 원혼들의 넋을 위로한다는 양혜경씨는 광복 71돌을 맞은 8.15에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을 하다 형장의 이슬이 된 분들을 위한 넋전춤이 본인으로서도 뜻 깊다고 했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김희선 회장은 “억울하고 원통하게 가신 그분들의 통곡을 몸으로 나타낸 듯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편 이날 사형장에서의 넋전춤 퍼포먼스와 함께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 한마당‘을 총감독한 마임이스트 유진규씨는 역사관 격벽장에서 50명의 예술인들이 참여하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대규모 퍼포먼스 예술감독을 하면서 “유관순 정도만 기억하는 여성독립군에 대해 다시 고민하는 계기가 됐다”는 그는 “많은 여성들이 독립을 위해 온 몸을 던지고 죽음을 불살랐다”며 이번 퍼포먼스는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을 조명하고, 지금도 존재하는 일본 군국주의와 친일파들에 대한 고민을 동시에 해보는 공연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40명의 여성예술인이 포함된 50명의 예술가가 총 120분 동안 33개의 공연을 통해 일제로부터의 해방, 모든 권력과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수형자들의 체력단련 공간이었던 10개의 부채꼴모양 칸막이가 있는 격벽장에서 각자 개별적인 공연을 펼치는 퍼포먼스는 관객들과 예술인들이 어우러져 예술을 통한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만끽하는 난장으로 끝을 맺었다.

광복절을 맞아 마련된 이번 공연은 민족의 아픔이 담긴 서대문형무소를 공연무대로 활용, 식민지배로 인해 원통하게 떠난 원혼을 달래고 해방조국의 자유 아래 예술공간으로 거듭나고 치유예술의 힘을 보여준 또 하나의 예술적 문화였다.  

▲ 공연을 마친 뒤 한 관객을 잡고 오열하는 양혜경씨. 마치 원혼의 통곡처럼 느껴져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붉게 했다.
▲현대사를 조명해보는 전시회
▲ 서대문독립시민축제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군으로 분한 배우들

권미강 기자  kangmomo85@gmail.com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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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68주년을 말하는 자체가 이미 우리의 현대사를 부정하는 행위

‘하얼빈’ 정정했지만, 건국절은 고치지 않은 ‘청와대’
 
박 대통령이 건국 68주년을 말하는 자체가 이미 우리의 현대사를 부정하는 행위
 
임병도 | 2016-08-16 08:39:3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청와대는 박근혜 대통령이 잘못 말한 하얼빈 감옥을 뤼순 감옥으로 수정해서 올렸다. 그러나 건국절은 고치지 않았다. ⓒ청와대 홈페이지 캡처 ▲광복군 출신 독립유공자 김영관(92) 선생이 12일 박근혜 대통령 초청 독립유공자 및 유족과의 오찬에서 인사말을 통해 ‘건국절 논란은 역사 왜곡’이라고 비판했다. ⓒ오마이뉴스 캡처

 

청와대는 박근혜 대통령의 경축사 전문을 홈페이지에 올리면서 하얼빈 감옥을 ‘뤼순 감옥’으로 정정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제71주년 광복절이자 건국 68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날’이라는 건국절 호칭은 고치지 않았습니다.

뉴라이트 등이 주장하는 건국절은 분명 잘못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건국 68주년 주장은 헌법을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하얼빈을 ‘뤼순 감옥’으로 정정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지만, 청와대는 여전히 ‘건국 68주년’을 고치지 않고 있습니다.


‘불과 사흘 전, 92세 광복군 노병이 지적했던 건국절’

광복군노병돌직구건국절-min

 

 

뤼순 감옥을 하얼빈으로 착각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건국절 논란은 박 대통령이 착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광복절 기념식 사흘 전에 이미 건국절에 대한 지적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관련기사:92세 광복군 노병의 돌직구 박근혜 대통령은 동문서답)

8월 12일 청와대에서는 독립유공자 및 유족 초청 오찬 행사가 열렸습니다. 이날 광복군 출신 독립유공자 김영관 선생은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 출범했다고 이날을 건국절로 하자는 일부의 주장이 있다”며 “이는 역사를 외면하는 처사일 뿐 아니라, 헌법에 위배되고, 실증적 사실과도 부합되지 않고, 역사 왜곡이고, 역사의 단절을 초래할 뿐”이라고 당당하게 밝혔습니다.

청와대 오찬 행사에서 건국절 주장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광복군 노병이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불과 삼일 뒤에 ‘건국 68주년’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독립유공자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거나 잊었거나, 헌법을 끝까지 부정하겠다는 마음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스스로 부정하는 대통령’

박근혜현대사부정-min

박근혜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우리의 위대한 현대사를 부정하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신조어들이 확산되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건국 68주년을 말하는 자체가 이미 우리의 현대사를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1919년 4월 11일 각 지방 출신 대표자 27명이 모여 제1차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회의를 개최해 전문 10조의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통과시켰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의 시작이 되는 임시헌장에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부르고 정치 체제를 ‘민주 공화제’로 한다는 중요한 내용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1919년 9월 11일 통합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임시헌장은 ‘대한민국 임시헌법’으로 바뀌어 발표 됩니다. 대한민국임시헌법 전문을 보면 ‘우리 대한인민은 우리나라가 독립국임과 우리 민족이 자주민임을 선언하였다’는 말이 제일 먼저 나옵니다.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고 헌법까지 있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사람이 바로 우리의 위대한 현대사를 부정하는 사람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장소를 잘못 말해 논란이 됐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제71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안중근 의사께서는 차디찬 하얼빈의 감옥에서 ‘천국에 가서도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곳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숨진 곳은 중국의 뤼순 감옥이었습니다.


‘하얼빈을 뤼순 감옥으로 정정, 하지만 건국절은 그대로 놔둬’

박근혜 대통령이 경축사에서 ‘차디찬 하얼빈 감옥에서’라고 말하자 SNS에서는 이를 지적하는 글들이 올라왔습니다.

김광진 전 의원은 “하얼빈에서는 의거가 있으셨고 안 의사는 뤼순 감옥에서 서거하셨습니다’라며 ‘창조경제가 안되니 창조역사를 하시네요”라며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박근혜광복절경축사수정-min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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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필요한 '우리 시대의 변호인'의 활약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6/08/16 09:14
  • 수정일
    2016/08/16 09:1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3일만에 1억 모였다, 박준영 변호사를 응원하는 이유

[게릴라 칼럼] 이 시대에 필요한 '우리 시대의 변호인'의 활약16.08.15 20:16l최종 업데이트 16.08.15 20:16l글: 하성태(woodyh)편집: 김지현(diedie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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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스토리펀딩 <하나도 거룩하지 않은 '파산' 변호사> 메인 화면.
ⓒ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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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이야, 노무현. <변호인>!"

지난 4월 말,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의 김태윤 감독을 사석에서 만났다. 당시 그는 전북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재심>의 시나리오를 탈고한 상태였다. 그에게 영화의 취재를 위해 만났다던 박준영 변호사에 관해 묻자 그는 대뜸 저리 답했다. 박 변호사의 삶 자체가 영화 <변호인> 속 송우석 변호사의 인생 궤적을 닮았다는 뜻이리라. 김 감독 역시 박준영 변호사를 직접 만나 그간의 사정을 듣고 영화에 반영했다고 한다. 

꽤나 의미심장하면서도 직설적인 제목의 영화 <재심>은 지난 7월 크랭크인했다. 10년간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풀려난 현우는 배우 강하늘이 연기하고, 이 현우를 돕는 변호사 이준영은 배우 정우가 연기한다. 그리고, 한 변호사의 외롭고 긴 싸움을 정면으로 그리는 이 작품의 주인공  이름은 이준영이다. 아마도 영화(와 시나리오) 속 이준영은 현실 속 박준영 변호사의 모습을 꽤나 닮아 있을 것 같다. 

<재심>이 촬영에 한창인 8월 14일 오늘, 현실의 박준영 변호사는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14일 오후, 박준영 변호사가 포털 사이트 다음에 지난 11일 시작한 
<하나도 거룩하지 않은 '파산' 변호사>가 3일 만에 당초 목표였던 모금액 1억 원을 돌파한 것이다. 지난 14일 오후 5시까지 총 2613명 후원, 1억41만8000원으 후원금이 모였다. 그 만큼 박준영 변호사가 지켜내려는 사법적 '정의'에 공감하고 응원을 보내는 이들이 그 만큼 많다는 뜻이리라. 

'파산' 변호사에게 모인 1억 후원금,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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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능력이 있고, 나 혼자 잘 나서 변호사가 됐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 가족의 희생이 있었고, 사회적 관점으로 봤을 때 난 운이 좋았다. 내 가족을 돌봐야 하는 생각에 좋은 결혼과 좋은 직장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다행스럽게도, 내게 불운한 사람을 위해 일할 기회가 찾아왔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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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 변호사 박준영입니다. 11년 동안 변호사를 했는데요. 공익활동을 하지 않고 영리활동을 했다 하더라도 1억 원을 벌려면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을 겁니다. 이런 공익활동이 필요한 시점에 우리 변호사들이 저의 사례를 보고 좀 더 용기내서 이런 일에 뛰어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14일 오후, 박준영 변호사는 페이스북 라이브 영상으로 후원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재심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는 동반자 박상규 기자와 함께였다. 영상 속에서 "오늘 점심값을 저희가 샀다"라면서 웃던 박 변호사. 

작년 대한변호사협회가 선정한 '변호사공익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그였지만 최근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며 경기도 수원지법 앞에 마련했던 변호사 사무실을 빼야 할 상황이 여러 기사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3일 만에 모인 1억 원의 후원금은 가뭄 속 단비와도 같았을 터. 

"돈이 없다보니 박 기자도 힘들고 저도 힘든 상황인데, 다음을 기약하고 많은 일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목표액은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이 모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재심뿐만 아니라 억울한 사법피해자들이 길거리에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목소리를 들어줄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고, 그분들의 목소리를 공론화할 수 있는 언론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앞으로 체계적으로 사람을 모아서 일을 해볼 생각입니다. 일억이 아닌 그 열배도 기대하는 이유입니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지난해 5월 김신혜씨 사건 관련 특강과 뒷풀이에서 만난 박 변호사에게 "노무현을 닮았다"고 하자 그가 이내 손사레치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떤 특별함보다는 아내와 아이들의 하루하루를 걱정하면서도, 피해자들의 현재와 앞날을 더 근심하는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가장이자 변호사로서의 모습을 엿본 순간이기도 했다. 

'박준영 시민 변호사 만들기 프로젝트'를 응원하는 목소리

박상규 기자는 <하나도 거룩하지 않은 '파산' 변호사>의 아이템이 앞으로 20여 개 남아 있다고 밝혔다. 펀딩을 계속 진행하는 한편 이 내용을 묶어 책으로도 출간하고, 또 향후 박준영 변호사가 언급한 '공론화'와 같은 구체적인 상을 공개하겠다는 것이다. 이번과 같은 열띤 호응이라면 두 사람의 기대가 구체화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잘 알려진 대로, 두 사람은 2015년 11월 다음 뉴스펀딩(현 스토리펀딩)에서 연재한 무기수 김신혜씨의 이야기인 
<그녀는 정말 아버지를 죽였나>를 시작으로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을 다룬 <그들은 왜 살인범을 풀어줬나>,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치사사건을 진상을 파헤친 <가짜 살인범 '3인조'의 슬픔>에 이르는 '재심 3부작'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무료 변론에 나서는 박준영 변호사의 변호에 공감한 독자들의 후원금은 총 1억3000만 원 가까이 된다).

그러는 사이, 세 사건 모두 각각 광주지방법원 해남지원과 대법원, 전주지방법원으로부터 재심 결정을 이끌어 냈다. 김신혜 사건 이후 함께 하는 동료 변호사들도 늘었고, 약촌오거리 사건의 경우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황상만 전 군산경찰서 형사반장과 함께였다. 

억울한 약자의 편에 서서 사법제도의 모순점을 파헤치는 이 고졸 출신 '공익' 변호사의 활약이 사회를, 법조계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 지를 우리가 목도하고 있고, 또 누군가는 실시간으로 응원하고 있는 셈이다. 

그와 함께 박준영 변호사의 이력도 관심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고졸 출신 인권 변호사'로 알려진 그의 이력이 곳곳에서 "노무현을 닮았다"는 이야기를 듣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다(관련기사 : 박준영 변호사 인터뷰 ① "부잣집 딸 만나 삼성 입사가 꿈" 이랬던 변호사가 어쩌다 수억 빚이... 인터뷰 ② 절도와 싸움질에 무기정학까지 '노가다'하던 고졸, 변호사 되다). 

완도군 출신으로 파란만장한 학창시절을 보낸 뒤, 고졸 출신의 국선 변호사에서 재심 변호사로 거듭나기까지의 과정은 드라마틱한 영화 한 편으로 만들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그리고 그 박준영 변호사를 위한 '박준영 시민 변호사 만들기'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우리 시대의 변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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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준영 변호사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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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변호사의 노력으로 억울한 사람들은 누명 벗을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이제 박 변호사가 파산 위기에 처했다. 무료 변론으로 수입이 없어 임대료를 못 내 곧 사무실도 비워줘야 한다. 사무실 운영을 넘어 생활 자체가 어려운 상태다. 이 기획으로 박준영 변호사를 지원하려고 한다. 박 변호사가 계속 사회적 약자와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후원금을 쓸 예정이다. 

'박준영 시민 변호사 만들기'. 판사 출신 변호인이 100억 원대의 수임료를 받고, 현직 검사장이 친구 덕분에(?) 주식으로만 100억 원 넘는 수익을 올리는 시대. 박 변호사의 활동과 삶을 통해 변호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독자 여러분과 함께 고민하고 싶다."

글을 쓰는 박상규 기자가 <하나도 거룩하지 않은 '파산' 변호사> 소개 글의 막바지에 적은 내용이다. 박준영 변호사의 재심 프로젝트에 쏠린 관심은 이렇게 동시대의 사법적 '정의'를 관통한다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도덕 불감증에다 사적 이익만을 위해 법조계에서 승승장구했던 진경준 검사장과 같은 파렴치한들의 반대급부를 보고 싶다는 시민들의 간절한 열망 말이다. 

역시나 스토리펀딩을 통해 4억 원에 가까운 후원금을 모은 <뉴스타파> 최승호 PD의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에 쏠린 관심과 응원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국정원 간첩조작 사건의 민낯을 파헤치는 이 작품이 향후 멀티플렉스에 걸리고 수많은 관객들이 관람하는 장면. 지난 대선 당시 댓글 조작 사건을 벌인 당사자임에도 이 정부 들어 꿋꿋이 그 권력을 자랑하고 있는 그 국정원에 대한 비판과 울분이야말로 <자백>이 그려나갈 저 미래를 위한 응원으로 이어졌을 터다. 

'박준영 시민 변호사 만들기'는 훨씬 더 구체적이고 미시적일 수 있다. 박준영 변호사가 수시초 출연했던 SBS <그것이 알고싶다>가 경검을 비롯한 수사기관과 사법 기관의 무능력과 무책임을 줄곳 폭로하고 파헤쳐 왔다면, 박준영 변호사는 직접 그 피해자들을 위한 변론과 법정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피해자들의 얼굴을 잊지 못하겠다"고 종종 말하는 박준영 변호사에게 있어 역시나 근본은 '사람'일 테니까. 

스토리펀딩의 후원금은 그간 재심 비용과 피해자들의 생활지원, 취재비 등으로 쓰였다. 수천만 원의, 1억 원을 넘긴 후원금이라고 색안경을 낄 필요가 없단 얘기다. 더욱이 이번 프로젝트는 향후 '박준영 시민 변호사 만들기' 프로젝트를 위한 구체적인 비용으로 쓰일 예정이라고 한다. 박준영 변호사가 파헤치는 진실과 억울한 피해자들을 위한 종잣돈이 돼줄 것이다.

앞으로 후원금을 모으는 석 달 간, 1억을 너머  5억 원, 10억 원까지 도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준영 변호사와 그의 팀이 밟아 가는 족적이 넓으면 넓을수록 좋다. 재심 제도에 대해 더 넓게 환기될수록, 그들을 통해 구제받는 피해자들이 늘어날수록 우리 사법체계의 변화와 약자에 대한 공감은 늘어만 갈 테니까.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변호사 박주민이 있었듯, 또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더더욱 '우리 시대의 변호인'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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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복 “정부의 대북정책은 명백히 실패했다”

<추가2> 6.15남측위, 광복 71돌 8.15민족대회 개최..공동호소문 발표(전문)
김치관/이승현 기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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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8.15  11: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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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5남측위원회는 15일 대학로에서 8.15민족대회를 개최했다.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이 대회사를 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6.15공동선언실천 민족공동위원회는 올해 광복 71돌을 맞으며 서울에서 남북해외의 각계각층 대표들이 참가하여 진행하기로 하였던 민족공동행사가 비록 성사되지 못하였지만 해내외 각계각층의 접촉과 통일회합을 실현하기 위해 계속 앞장에서 노력해나갈 것이다.”

6.15남측위원회는 15일 오전 11시 서울 대학로에서 ‘광복 71돌, 한반도 평화와 자주통일을 위한 815 민족대회’를 개최하고 ‘6.15공동선언실천 민족공동위원회’(6.15민족공동위원회) 민족공동호소문을 발표했다.

호소문은 “만남과 대화가 없이는 평화도, 통일도 결코 실현될 수 없다”며 “민족공동행사들과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여성, 학술, 언론, 종교 등 계층별, 부문별 지역단체들 사이의 다방면의 접초고가 왕래를 적극 추진해 나가자”고 호소했다.

또한 “남과 북의 정당, 사회단체간 다양한 접촉과 전민족적인 통일대회합을 실현하기 위해 적극 노력해 나가자”면서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을 비롯하여 남과 북이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 함께 만든 통일의 길을 열어놓았던 경험과 성과들에 기초하여 오늘의 난관과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자”고 당부했다.

   
▲ 이정이 6.15부산본부 상임대표와 정종성 한국청년연대 공동대표가 공동호소문을 낭독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앞서, 남과 북, 해외의 연석회의 준비모임 대표들은 지난 11~12일 중국 선양(심양)에서 실무회의를 갖고 연석회의를 추진하기 위한 전민족적인 공동준비기구를 구성해나가기로 합의했다. 공동호소문의 ‘전민족적인 통일대회합’은 바로 이 연석회의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6.15남측위원회 관계자는 “심양 실무회의에서 공동호소문을 채택키로 합의했다”면서도 “충분한 내부 검토 과정을 거치지 못해 남북간 약간의 표현 차이 등이 있을 수 있다”고 전했다.

이창복 상임대표의장은 대회사에서 “최근 수년간 민족공동행사가 제대로 성사되지 못하고 있다”면서 서울 8.15민족공동행사와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가 정부의 민간교류 불허 조치로 무산됐음을 확인하고 “정부의 대북정책은 명백히 실패했다”고 선언했다.

   
▲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대학로에는 통일 원로들과 통일선봉대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창복 의장은 개성공단 폐쇄와 한일 ‘위안부’문제 합의와 사드 배치 등을 거론하며 “이 모든 것을 ‘북한 압박을 위해’했다고 말하지만, 동족을 말살하겠다며 외세를 끌어들이고, 나라의 주권과 평화를 내팽개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력 비판했다.

나아가 “한반도 전쟁을 끝내는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 적극 노력하자”면서 “사드를 배치할 것이 아니라 관계 정상화로 평화협정 체결로 나아가면 된다”고 강조했다.

특히 “6.15남측위원회는 앞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대화와 교류, 만남의 장을 복원하려 한다”며 지난 11일 중국 심양에서 남과 북 해외의 대표들이 회의를 갖고 연석회의를 비롯하여 통일회합과 접촉을 전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정부가 북한주민접촉 신청서의 수리를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전과 달리 6.15남측위원회가 지난 11~12 중국 선양에서 열린 실무회의 참여를 강행하고 회의 결과를 발표한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다.

   
▲ 왼쪽부터 김영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후지모토 야스나리 일본 포럼 환경인권평화 공동대표,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김영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교회협) 총무는 격려사에서 사드 배치의 대안을 제시하라고 국민들을 윽박지르는 정부 당국을 겨냥해 “대안은 평화이며, 방법도 과정도 평화이어야 하고 그 결과도 평화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어 “평화는 먼저 민주주의를 확립하고 정의를 세우는 일”이며, “정의를 세우는 일에 최우선은 소통이다. 그것은 일방적인 선언이 아니라 의견을 묻고 토의하며 설득하고 그래도 잘 안되면 포기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많은 국민들이 사드배치에 대해 반대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위정자들은 겸손하게 국민들의 뜻을 받들어 배치 결정을 포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 총무는 또 “평화의 첫걸음은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63년 동안 휴전상태에 있는 불행한 이 한반도 위에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일”이라며, 성과가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 일본에서 온 '코리아 국제평화 포럼' 참가단 23명이 평화통일대행진에 참가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일본에서 온 후지모토 야스나리 포럼 환경인권평화 공동대표는 연대사를 통해 “오랜 세월에 걸친 일제 식민지배와 그후 민족 분단의 역사에 대해 일본사람으로서 책임을 통감하며,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문을 열었다.

후지모토 대표는 일본 아베정권이 평화헌법 개악을 통해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유엔안보리 이사국과 같은 세계의 지도적 국가’가 되기 위해 획책하고 있으나 자민당 내에서도 강경파로 알려진 이나다 도모미를 방위상에 임명하는 등 본질적으로 시대착오적인 역사왜곡과 국가주의에 닿아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연설에 나선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는, 지난 25년간 진실규명을 요구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목소리를 외면하고 한국 정부가 10억 엔에 일본 정부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종결을 추진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윤 대표는 “정부는 화해와 치유라는 이름을 내걸고 재단을 만들었지만 100만원으로 재단을 설립한 후 일본 정부의 10억 엔이 들어올 날만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라며, “차라리 남은 임기 1년 반 동안 정부는 가만히 있으라”는 피해자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전했다.

또 “지난해 12월 28일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정부의 위안부 합의는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일본 기시다 외무상의 거래일 뿐”이라고 말했다.

윤 대표는 “위안부 강제동원을 전쟁범죄로 인정하고 공식 사죄하며, 법적 배상과 역사 교과서 수록, 추모비 및 추모관 건립, 그리고 책임자를 밝혀 처벌하라는 정당한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 국민들과 함께 싸워나가겠다”고 밝혔다.

   
▲ ‘8.15반전평화대회 준비위원회’는 대학로에서 종각까지 평화통일대행진을 진행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김은진 6.15남측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8.15민족대회는 이정이 6.15부산본부 상임대표와 정종성 한국청년연대 공동대표의 민족공동호소문 낭독으로 막을 내리고 이후 ‘8.15반전평화대회 준비위원회’ 주최로 평화통일대행진을 종각까지 진행했다.

참가자들은 풍물패와 기수단을 앞세우고 종로5가를 거쳐 종각 앞까지 편도 대로를 행진하며 ‘남북대화 재개하라’, ‘사드배치 철회하라’, ‘군사연습 중단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으며, 많은 시민들이 행진대열을 지켜봤다.

박석운 민중의힘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는 종각 앞에서 오후 1시 30분께 열린 정리집회에서 “어제와 오늘 1박 2일간의 범국민행동을 통해서 성주의 사드 철회 투쟁을 전국화시키는데 우리는 성공했다”고 자평하고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전쟁반도 평화실현 국민행동을 다시 모아 나가자”고 호소했다.

또한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들의 민중생존권 투쟁과 저 무도한 박근혜 정권의 민중방해 행위를 관통하는 민주수호투쟁을 모아서 11월 민중총궐기로 다시 한 번 서울에 집결하자”고 제안하고 “11월에 다시 만나자”며 함성을 유도했다.

   
▲ 8.15민족대회에 앞서 같은 장소에서 8.15전국노동자대회가 열렸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앞서, 8.15민족대회가 열린 같은 장소에서 민주노총 등은 ‘사드 한국배치 철회! 한반도 평화협정체결! 6.15 10.4 공동선언 이행! 8.15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했으며, 결의문을 채택 사드 배치 저지와 평화협정체결, 연석회의 성사, 친일 청산 등을 다짐했다.

(추가2, 14:46)
 

<공동호소문(전문)>

우리 민족이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은 역사의 그날로부터 어느덧 71년이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국권을 강탈당하고 유구한 역사와 넋이 깃든 정신문화적 재부와 자원을 깡그리 약탈당한 것은 물론, 우리말과 글까지 빼앗기고 식민지 노예의 삶을 강요당해 온 우리민족이다.
근 40년에 이르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시기 각계각층의 수백만 우리 동포들은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군수기업의 노예로,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가 목숨을 잃고 전대미문의 야만통치와 수탈에 신음해야 했다.
장기간의 굴함 없는 피어린 투쟁으로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기는 하였으나 우리 민족은 외세에 의해 둘로 갈라져 장장 70여 년 동안 민족분열의 고통을 겪고 있으며 조국통일을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광복 71년, 분단 71년이 되는 오늘 이 땅위에는 여전히 전쟁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 6.15가 열어 놓은 남북사이의 모든 통일대로가 끊어지고 접촉과 왕래, 대화와 만남조차 실현되지 못하고 있으며 전쟁과 분단구조를 공고히 하려는 책동은 계속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완전한 자주권이 실현되고 공고한 평화가 보장되며 부강번영하는 통일조국을 건설하는 여기에 민족의 밝은 미래가 있다.
6.15공동선언실천 민족공동위원회는 온 겨레의 이러한 통일염원을 앞장서 실현해 나갈 굳은 의지를 다시금 표명하면서 온 겨레에게 열렬히 호소한다.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해결해 나가자.
통일문제를 우리 민족의 힘으로 해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겨레의 주권과 평화를 실현할 수 있겠는가. 분열과 대결을 강요하는 온갖 책동을 물리치고 온 겨레의 단합을 실현해 나가자
상대방의 제도와 체제를 존중하는 기초 위에서 민족의 지혜와 힘을 합쳐 나가며 화해와 단합을 적극 추동해 나가자!

한반도에서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를 실현해 나가자!
평화를 실현하지 않고는 통일을 이룰 수 없고, 통일을 이루지 않고서는 평화를 영원히 지켜나갈 수 없다.
겨레의 삶의 터전이며 후손만대가 행복을 누려갈 삼천리 강토위에서 전쟁의 참화가 또다시 되풀이 되는 것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일체의 전쟁대결 책동을 중단시키고, 공고한 평화체제의 수립을 위해 적극 노력해 나가자!

해내외 각계각층의 다방면적인 접촉과 왕래, 대화와 통일회합을 복원하고 활성화하자!
만남과 대화가 없이는 평화도, 통일도 결코 실현될 수 없다. 서로 상대방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속에서는 수십년 동안 쌓인 불신과 대결의 잔재를 청산할 수도, 통일운동을 전진시켜 나갈 수도 없다.
6.15공동선언실천 민족공동위원회는 올해 광복 71돌을 맞으며 서울에서 남북해외의 각계각층 대표들이 참가하여 진행하기로 하였던 민족공동행사가 비록 성사되지 못하였지만 해내외 각계각층의 접촉과 통일회합을 실현하기 위해 계속 앞장에서 노력해 나갈 것이다.
민족공동행사들과 노동자,농민, 청년학생, 여성, 학술, 언론, 종교 등 계층별, 부문별, 지역단체들 사이의 다방면의 접촉과 왕래를 적극 추진해 나가자. 남과 북의 정당, 사회단체간 다양한 접촉과 전민족적인 통일대회합을 실현하기 위해 적극 노력해 나가자!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을 비롯하여 남과 북이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 함께 만든 통일과 평화번영의 결실들을 하루빨리 복원하고 바닷길, 땅길, 하늘길을 다시 열어 나가자!

8천만 동포들이여!
분열과 대결정책을 배격하고, 우리민족이 힘과 지혜를 합쳐 화해와 협력, 평화와 통일의 길을 열어놓았던 경험과 성과들에 기초하여 오늘의 난관과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자.
민족분열과 전쟁대결을 끝장내고 공고한 평화와 자주통일의 문을 활짝 열어나가자!

2016년 8월 15일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6.15공동선언실천 북측위원회
6.15공동선언실천 해외측위원회

 

   
▲ 불볕 더위에도 불구하고 8.15민족대회가 열린 대학로에는 3천여명이 모였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대회 참석자들이 행진에 앞서 한반도 평화와 자주통일을 위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예술창작소 상상&공감의 타악공연.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평화의 나무 합창단의 합창 공연.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종로3가 탑골공원 앞 인도에서 일부 노인들이 사드 배치 반대를 외치는 행진 대열을 향해 반대의사를 표시하기도 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종각 앞에서 행진을 마무리하는 정리집회가 간단히 열렸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종각 정리집회는 신나는 율동과 노래로 마무리됐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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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열교수 대담, 탈북자 가족처벌 주장은 극악한 모함

정기열교수 대담, 탈북자 가족처벌 주장은 극악한 모함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6/08/16 [02:0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집단탈북과 집단납치 논란이 일고 있는 북 류경식당 종업원 여성들 사진     ©

 

중국 북 식당 동포처녀들 집단탈북 의혹 사건이 총선 직전 터진지 5개월이 다 되어가고 있는데 박근혜 정부는 여전히 12명이나 되는 북 동포 처녀들을 꽁꽁 가두어놓고 목소리마저 들려주지 않고 있어 온 민족의 걱정이 더욱 커지고 있다.

 

주류언론에서도 이제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데 반북극우언론들만 민변에 보내온 위임장은 가짜 부모가 쓴 것이라는 둥, 처녀들의 부모들이 집단구금되어 정신교육을 받고 있다는 둥, 식당 안전책임자가 처형되었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마구 퍼트리고 있다.

 

한반도 사드배치 결정, 3대전략폭격기 괌 증강배치 등 미국의 대북 군사적 압박을 최고 수위로 끌어올리자 북도 사소한 미국의 움직임에도 핵선제타격으로 대답하겠다고 나서고 있고 중국은 아직은 미약한 수준이지만 남측에 경제보복조치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하여 전쟁이건 경제대란이건 무슨 사단이 곧 날 것 같다는 국민들의 우려가 터져나오고 있다.

 

이 전쟁위기와 경제위기를 동시에 극복할 유일한 길은 남북화해와 협력뿐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북 여성종업원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동포애적, 인도적 견지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리라는 것이 본지의 진단이다. 그렇게만 되면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

 

하여 민변에 북녘 부모들의 위임장을 전달해준 정기열 칭화대 교수와 긴급하게 서면대담을 진행하였다. 다음은 그 대담 전문이다.

 

▲ 정기열 교수     ©자주시보

 

 

1.정기열 교수님에 대한 간략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남녘에서 흔히 말하는 “71학번”입니다. 동국대 불교철학과에서 1년 수학한 뒤 73년 서울 감리교신학대학으로 적을 옮겨 다시 대학을 시작한 뒤 군복무까지 마치고 1980년 미국유학을 떠났습니다. 미국에서 대학원,  박사과정까지 모두 마치고 그곳에서 쭉 살며 일했습니다. 
그러다 2005년 모교 초청으로 서울에 돌아가 2학기를 가르친 뒤 우연한 기회에 2006년 봄에 중국사회과학원에 초빙되어 3년을 그곳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다 2009년부터는 칭화대학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로 일하게 되어 오늘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한편 2000년대 말부터는 일본대학들(게이오, 릿쿄, 교토, 리츠메이칸, 도시샤대학 등)에 초빙되어 자주 일본을 오가다 2011년부터는 동경 조선대학교에도 초빙되어 오늘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015년 3월에 뜻밖에 김일성종합대학 사회과학대학(사회과학부, 철학부, 국제관계학부 포함)에 초빙교수로 위촉되어 오늘은 북녘땅에서도 우리민족의 후대를 가르치게 되는 귀한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011년부터는 매학기 중국, 일본, 북녘조국을 오가며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학자이기 전에 평생 ‘통일운동가’입니다. 지난 시기 30년 넘게 그랬듯 앞으로도 해외동포로서 끊긴 조국의 허리를 다시 잇기 위한 자주평화통일운동에 남은 생애도 모두 바쳐 일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2. 정교수님께서 이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이 사건을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3. 탈북종업원 부모들이 민변변호사들에게 위임장을 작성해 보내주셨는데 부모들에게 위임장을 받게 된 경위는 어떠한가요?

 

 2, 3번 질문에 함께 답하겠습니다.
지금 기억에 아마도 5월 17일 오전일 것입니다. 다음 날 18일 종합대학 강의를 모두 마치고 19일 오전 출국 예정이었습니다. 당시 오래 아는 미국동포가 평양을 방문하였기에 저도 잠시 그분이 머물던 평양호텔로 숙소을 옮겨 그곳에 있었습니다. 한편 저는 2010년 9월 칭화대학 주선으로 국제영문인터넷매체 <The 4th Media>(제4언론)를 창간하게 되면서부터 오늘까지 편집인 및 책임주필로 언론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 덕에 2012년부터는 언론인 신분이 인정되어 북녘 어디서든 인터넷 사용을 허락 받아 체류 중에도 계속 언론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날 오전 호텔에서 언론작업 중 <자주시보>를 읽다 우연히 “12명 북녘종업원” 관련 기사를 접했습니다. 만약 “북녘가족들의 위임장을 구할 수 있다면 <국정원>에 의해 ‘감금상태’에 있는 12명 여성종업원 모두를 밖으로 데려 내올 수 있다”는 <민변>의 긴급호소문이 담긴 기사를 읽자마자 당시 저를 안내하던 최 선생에게 “내일(18일) 가족들을 만나는 것이 만약 허락되면 그분들에게 딸들을 구하기 위해 민변을 포함한 서울 여러 통일운동, 인권단체들의 구원대책 활동을 알려드리고 가족들로부터 받은 위임장을 19일 북경에 나가는 즉시 민변에 전달하겠다”는 뜻을 당국에 긴급히 문의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18일 아침 안내선생을 통해 북녘당국이 “적극 지원하겠다”는 소식을 듣고 같은 날 오후 3시 평양호텔 2층 면담실에서 12명 종업원 모두의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면담실에는 북녘당국에 부탁한 3명의 촬영기사들과 사진사 외에 아무도 동석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미 발표된 당시 찍은 동영상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듯 먼저 천금보다 귀중한 딸자식들과 졸지에 생이별을 하고 감당키 어려운 슬픔과 근심에 가득찬 가족들을 진심으로 위로, 격려하고 현재 서울에서 진행되는 구원활동을 말씀 드린 뒤 부모님들이 면담실 현장에서 직접 작성한 위임장 원본을 모두 넘겨 받았습니다. 당시 저는 12명 부모들이 위임장을 직접 작성한 사실이 논란이 되지 않도록 북녘 당국에 면담 과정과 위임장 작성 등 전 과정을 동영상과 사진으로 담아줄 것을 사전에 부탁했고 지원을 약속 받아 다음 날 19일 아침 약속대로 평양순안공항에서 모든 영상 및 사진자료들을 정확히 전달 받았습니다.

 

가. 정교수님은 북한에 가시는 것이 자유로운지와 북한 주민을 만나시는게 자유로운지 여부 및 그 이유는 무언인지요?
네, 자유롭습니다. 통일문제를 붙들고 30년 가까이 수도 없이 북녘을 찾았고 방문할 때마다 북녘동포들을 자유롭게 만나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1987년에 취득한 “미국시민권” 덕입니다. 미국시민권 관련 참고가 될까 싶어 한두 마디 덧붙이겠습니다. 기막힌 ‘아이러니’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시민권이 도대체 뭐길래 미국동포는 그것 하나 갖고 있다고 마음대로 북녘을 오갈 수 있다는 사실이 기가 막혀서 그렇습니다. 분단 시기 70년 내내 남녘동포들에게 북녘땅은 그 누구도 마음대로 오가지 못하는 “금단”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미국동포들은 시민권 하나 갖고 있다고 북녘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다는 분단현실이 어처구니없고 기가 막혀서 그렇습니다. 어처구니없는 분단현실이 정녕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남녘은 1945년 9월 8일 첫 시작부터 “미국오작품”(Made in USA)으로 70년 내내 “워싱턴의 ‘완벽한 지배’(Full Spectrum Dominance)를 받는 땅”이라는 세상의 오래된 지적이 틀리지 않다 생각합니다. 지역 농촌이라는 경북 성주군민들마저도 최근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사드사태가 온 세상 특히 가까운 이웃나라들(중국, 러시아)에게조차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실 곧 “남녘땅은 70년 내내 결국 미국식민지였구나!”라는 손가락질을 이젠 피하기 어렵게 된 것 같기 때문입니다.

 

미국시민권 관련 보탬이 될까 싶어 참고 삼아 좀 더 말씀드립니다. 
미국에 첫발을 디딘지 7년 뒤 미국시민권을 얻었습니다. 그때가 1987년입니다. ‘조국통일운동 차원에서 시민권 얻을 자격 있는 사람은 누구나 신청하자’고 결의한 대로 당시 <재미한청련> 회원들은 다수가 목적의식적으로 시민권을 취득했습니다. 통일운동 차원에서 금단의 땅이었던 북녘을 마음 먹은대로 방문하기 시작하게 됐던 배경입니다. 그때 농담으로 ‘로마시민권’이라 부르던 미국시민권 덕에 저희들은 박정희전두환군사독재정권 시절 재일동포들이 숱하게 경험한 끔찍스런 ‘조작간첩사건’ 같은 탄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습니다. 
1989년 7월 임수경 당시 전대협대표가 참가한 국제평화대행진(분단선돌파사건) 사업을 시작으로 이후 수십 차례 남북해외가 주축이 된 크고 작은 국제행사들을 조직하고 그 일들에 직간접으로 관계되었지만 아직 ‘조작간첩사건’에 엮이어 남녘땅 어딘가에 묶여있지 않은 채 오늘도 북녘조국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오늘 길게 말씀드리는 바로 그 미국시민권 덕입니다. 앞에서 미국시민권 덕에 북녘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는 70년의 분단현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외세가 우리민족에 강제한 분단선돌파”를 목적으로 남북해외통일운동역량과 국제연대운동을 접목시켜 “백두에서 한라, 한라에서 백두”라는 구호를 내걸고 분단 이후 처음 시도한 평화행진 사업을 북녘에 제안키 위해 평양을 처음 찾았던 1989년 3월 22일부터 오늘까지 북녘을 방문한 총 횟수는 벌써 이미 몇 해 전 100차례가 넘었다고 합니다. 횟수가 50차례 넘었던 어느 때부턴가 저는 횟수 세는 작업을 아예 포기했는데 작년 2015년 북녘 <해외동포사업국>에 계신 어느 분이 알려주어 그런 줄 알았습니다.
미국여권을 가진 덕에 남녘에서 감옥에 가는 대신 그러나 저는 모두 3차례 서울에서 ‘강제퇴거’ 되거나 ‘입국금지자’가 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얼마 전 신은미 선생이 서울에서 겪은 것과 같은 경험이었죠. 그 과정 오늘까지 저는 모두 3차례 도합 16년 남녘조국에는 못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강제퇴거’ ‘강제추방’ 첫 경험은 1988년 8월이었습니다. 당시 연세대에서 열린 <남북학생회담출정식>에 13명 국제반전평화인사들을 조직해 참가한 것이 문제가 되어 종로경찰서 외사과에서 안기부 ‘덕수궁 지하안가’로 넘겨져 “3일 내리 잠 안재우는” 일종의 ‘고문’이었던 ‘밤샘취조’ 뒤 당시 밖에서 모두 걱정했던 ‘조작간첩사건’ 대신 여권에 “5년 강제퇴거”란 낙인만 찍힌 채 ‘강제추방’ 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 뒤 두번 더 비슷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전쟁 시기 미국군대에 의해 희생된 수백 만 민간인학살만행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전 민족적 차원에서 조직된 <남북해외전민특위>가 2000년 5월 결성되었을 때 당시 저는 사무총장에 피선되면서 전민특위 첫 사업으로 다음 해 2001년 미국에서 국제민간법정을 설치할 것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1년 뒤인 2001년 6월 남과 북(비자발급이 거부되어 영상으로)에서 참가한 전쟁 시기 민간인학살만행 생존자들, 피해자 가족들 6-70명, 그분들을 지원하는 남녘과 해외의 수백 명 통일운동가들 그리고 케네디/존슨 행정부 시절 법무장관 역임 뒤 평생을 마치 죄를 씻듯 국제반전평화운동에 모든 것을 바친 램지 클라크 변호사(당시 재판에서 수석검사 역을 맡아 자신의 조국을 ‘전범국가’로 기소) 등 모두 26개 나라들에서 참가한 세계양심들과 함께 전민특위는 뉴욕, 워싱턴에서 전쟁 뒤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코리아국제전범재판’을 설치하게 되었습니다. 
전범재판 직후인 7월 초 저는 전민특위 사업 차 남녘에 들어가기 위해 서울에 갔으나 공항에서 뜻밖에 ‘입국금지자’가 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강제추방’된 뒤 이후 5년을 또 다시 남녘땅에 못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정확히 10년 뒤 저는 그와 똑같은 경험을 또 다시 또 하게 됩니다. 2010년 3월 26일 발생한 “천안함침몰사건’ 약 한달 뒤부터 <통일뉴스>에 사건 관련한 글을 연재하던 중 2010년 5월 “천안함 관련 글을 계속 쓰면 …”이란 단서가 붙은 일종의 통보성 위협을 북경 주재 국정원 참사로부터 전달 받은 뒤 그때로부터 또 다시 6년 남녘에 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입국여부도 확인할 겸 가족결혼식 참가를 위해 2013년 서울입국을 다시 시도했으나 예상대로 김포공항에서 ‘입국금지자라 들어갈 수 없다’는 통보를 받고 또 다시 ‘강제추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통일운동 관련 개인사의 일부를 소개한 이유가 있습니다. 태어나 자란 남녘땅에선 통일운동에 뛰어든 것이 “죄”가 되어 1984년부터 감시조사대상, 수배, 미행, 도청, 강제퇴거, 강제추방, 입국금지를 거듭하며 산지가 근 30년이 되는 반면 1989년 처음 방문했던 북녘에선 거꾸로 통일운동한 것이 “최고최상의 공로”가 되어 방문 때마다 진심으로 맞아주는 동포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만나는 모든 북녘동포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과 믿음, 존경을 끝없이 받아 안으면 산지가 근 30년이 됩니다. 
어디를 원망하자는 것이 아니라 통일문제 관련 남과 북의 차이가 극단적으로 다른 비극적 분단현실을 새삼 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북을 “자유롭게 오가며” 북녘동포들과 “자유롭게 만나” 대화도 하느냐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길게 개인사까지 더해서 말씀드린 이유입니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분단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 탈북종업원 부모들에게 위임장을 받는 과정에서 부모들과 어떻게 연락을 하게 되었는지요?
앞의 1, 2 질문에 대한 답에서 충분히 이야기했다고 생각합니다.

 

다. 탈북종업원 부모들은 어디에서 만나 위임장을 받으셨는지요?
역시 위 1, 2에서 충분히 소개했다고 생각합니다.

 

라. 위임장을 받기까지 몇 차례나 만나셨는지요?
12명 여성종업원들의 모든 부모들과 당시 탈출에 성공한 동료종업원 7명을 5월 3일 평양 국제기자회견장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을 직접 만난 것은 가족들 위임장을 민변에 보내기 위해 스스로 이 일에 뛰어 들었던 5월 18일 평양호텔 면담실에서였습니다.

 

마. 현재도 탈북종업원 부모들이나 가족들과 연락을 주고받으실 수 있는지요?
오늘 자주시보 서면질문에 답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저는 종합대학 강의 차 1주일 전부터 북녘에 와 있습니다. 이번 체류 기간에도 8월 22일 떠나기 전 12명 종업원들의 가족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뜻을 이미 이곳 당국에 문의하고 답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만나 뵙고 가게 되면 이후 상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바. 허강일(지배인)의 부모나 가족도 만나셨나요? 허강일은 신혼으로 부인이 있다고 알려져있는데 어떠한지요?
아닙니다. 허강일의 부모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허의 부모와 가족은 아마 평생 얼굴을 들고 살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떻게 얼굴을 살고 살 수 있겠습니까? 허는 아마 죽어서도 자신이 지은 죄를 씻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이 지은 죄가 얼마나 큰지를 그가 알기는 하는지 정녕 의심스럽습니다. 12명 나어린 딸들을 가족과 생이별시킨 천추에 용서못할 범죄를 그는 아마 평생 가도 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12명 ‘집단납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종업원 얼굴사진은 그들을 하루 빨리 구해내기 위해서인지 북녘당국이 먼저 나서 온 세상에 알리고 소개하는데 반해 허의 사진은 단 한번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이유, 무슨 배경에서 그리 된 것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한가지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가 비록 평생 씻지 못할 죄를 짓고 자기의 조국은 물론 제 아내마저 버리고 도망간 천하 몹쓸 인간이지만 그럼에도 그의 얼굴을 세상에 알리지 않는 이유가 혹 그에 대한 최소한의 인권을 지켜주고 존중해야 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의문입니다. 

 

▲ 법원이 요구한 대로 보완수정한 민변 위임장에 서명하고 날인을 하는 북 여 종업원 서경아 양의 부모, 지장을 찍는 부모의 표정을 보니 왜 이렇게 눈물이 솟는지, 세상에 저런 표정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 분노와 걱정에 사무친 저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을 하루라도 빨리 풀어주어야 사람이 아니겠는가. 적어도 죽었는지 살았는지라도 알려주어야 할 것 아닌가.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4. 위임장을 작성한 것은 부모들이 자발적인 의사에서 한 것인가요? 
물론입니다. 물어보나마나입니다. 남녘에서 흔히 듣는 이런 류의 질문은 그 자체가 사람의 도리가 뭔지도 모르는 기가 막힐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어불성설의 질문이지만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답하겠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저는 제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 가족들을 만났던 현장인 평양호텔 면담실에서 부모님들이 위임장을 직접 작성하여 저를 통해 민변에 보내줄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들이 국가조직에 의해 집단납치된 것이 불보듯 명확한 상황에서 가만히 주저 앉아 있겠습니까? 주로 미국(일본, 한국)에 의해 70년 극단적으로 ‘악마화’된 북녘사회를 세상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그곳은 “사람사는 곳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질문 뒤에 숨은 분단시대의 지극히 병적이고 비극적이며 슬픈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드린 말씀입니다. 
5월 17일 우연히 접한 <자주시보> 기사가 제겐 참으로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한편 국정원에 의해 집단납치된 것이 확실해보이는 12명 딸들이 북녘동포 어느 그 누구만의 딸자식이 아니라 제 자신의 딸자식과도 같다는 생각 또한 앞섰습니다. 동시에 제게 이번 사건은 많은 매체들이 이미 지적했듯 “권력위기에 처한 청와대가 총선결과를 염두에 두고 성급히 벌린 또 하나의 실패한 북풍사건”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이번 사건이 남녘 친미사대세력의 70년 계속되는 또 다른 하나의 대형분단범죄사건이었기에 그들을 구해내기 위한 남녘동포들의 투쟁에 그 어떤 주저함 없이 그들과 함께 하겠다는 각오로 뛰어 들었습니다.

 

가. 북한당국에서 부모들을 협박하여 위임장을 작성하게 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데 어떠한지요?
이 질문 또한 앞의 질문과 마찬가지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문제는 70년 분단시대 내내 끝없이 반복되는 문제입니다. 1945년 8월 해방된 우리민족에게 분단이 강제된 뒤 70년 내내 이번 사드배치 결정에서처럼 철두철미 미국지배를 받는 남녘땅에서 쓰는 북에 대한 보도 가운데 과연 어느 정도의 진실이 담길 수 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기획탈북사건’으로 흔히 불리는 이번 사건 같은 경우 국정원이 행동주체인 조건에서 물어보시는 대단히 악의적인 그런 류의 조작된 추측성 보도, 억측, 의혹들에 대해 길게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시간낭비라고 생각합니다.

 

나. 위임장을 작성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촬영하셨나요?
네, 위임장 작성과정을 모두 다 동영상으로 담아 이미 세상에 공개했습니다. 동영상 및 사진 원본은 모두 서울 민변에 인편과 우편으로 보냈습니다. 또 <자주시보>에도 다는 아니지만 관련 동영상과 사진들을 기사보도에 참고가 되시라고 역시 보내드렸습니다.

 

다. 위임장을 작성한 부모들이 실제 부모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데 부모들이 맞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하셨는지요?
이런 류의 의혹 역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에서 지난 8년 “이명박근혜시대”라고 불리는 최악의 남북관계시대 서울주류언론매체들이 북에 대해 쓰고 말하고 보도하는 거의 모든 자료들은 남녘과 세상이 북녘사회를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 100% 거꾸로 잘못 이해하도록 하여 기존의 70년 ‘북한악마화’를 더욱 심화시키는데 종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처럼 북녘을 수시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수많은 해외동포들과 세상사람들은 서울권력과 남녘의 주류언론매체들이 하루가 멀다고 악마화하는 북에 대한 내용이 얼마나 병적으로 악의적이고 거짓과 중상, 모략, 조작, 날조로 가득한 것인지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남녘동포들이 북녘사회의 진실에 접할 수 없도록 해서 남과 북의 형제가 끝없이 서로 갈등하다 불신에 빠진 채 서로 대결하도록 남북을 끝없이 갈라놓고 있는 미국의 우리나라에 대한 70년 분단지배정책을 하루 속히 극복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제가 만난 가족들이 실제 부모들이 아니다”는 류의 악의적인 질문 같지 않은 질문에 대해선 답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합니다. 


5. 탈북종업원들이 자발적으로 탈북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속아서 탈북한 것인지데 대해 알고 계시거나 이를 판단하게 할 수 있는 자료가 있는지요?
만약 12명 북녘종업원들의 소위 “탈북” 사건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때로부터 옹근 4개월이 훌쩍 넘도록 청와대, 국정원, 통일부가 주장하듯 그들이 “자발적으로 탈북한 것”이 사실이라면 왜 아직 단 한명도 세상에 내놓고 공개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서울 <민변>이 추진한 서울지방법원의 공개증언대에 국정원 주장이 사실이라면 왜 그들을 법정에 내보내 그들 말처럼 “자발적으로 서울에 온” 사실을 세상에 밝히지 못하는가입니다. “빨갱이”라 불리는 <민변> 변호사들은 둘째치고 유엔최고인권대표소 성원들이 국정원을 방문해 북녘여성들과의 접견을 요구해도 그들에게조차 접견을 허용치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까지 드러난 사건 관련 전후사정과 모든 정황은 청와대, 국정원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소위 ‘집단탈북’이라는 정부 주장과 달리 북녘여성들은 “자발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 반대로 백주대낮에 국정원 즉 국가조직에 의해 “집단으로 납치되어” 서울에 “강제로 끌려온”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웅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사건이 국가조직에 의한 일종의 국가테러행위사건으로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폭로될 경우 서울권력 자체가 공중분해될 수 있을 정도의 대단히 중대한 국가테러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저는 북녘종업원들이 ‘자발적으로 탈북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들 부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온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든 12명 북녘종업원들의 소위 “집단탈북” 사건은 당시 모든 상황, 조건, 앞뒤 사정이 그들이 자발적으로 탈북한 것이 아니라 집단으로 납치됐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 탈북종업원들이 중국에서 일을 할 당시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들이 있는지와 있다면 그 내용은 어떠하며 북의 부모들이 그것을 공개할 수 있는지요?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들과 사진들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5월 3일 기자회견 때도 그리고 ‘로동신문’과 ‘우리민족끼리’ 등 북녘매체들에서 계속 소개하고 있기에 그 질문에는 좀 더 확신을 갖고 답할 수 있습니다. 네, 있습니다. 민변의 법정투쟁과 자주시보 같은 언론들에 혹시라도 그런 자료들이 도움이 된다면 부모님들을 설득해 구해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번에 뵙게 되면 적극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민족끼리에는 주지하듯 그런 편지, 사진들이 틈틈이 소개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만약 민변으로부터 요구가 있을 경우 제 판단에 12명 딸들이 가족, ‘동무’(친구)들과 주고 받은 편지와 사진들을 소개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습니다.

 

▲ 윗 사진은 통일화보에 실린 사진을 통일뉴스에서 소개한 북의 유명 최삼숙 가수의 사진이고 아래는 납치된 딸 리은경 양의 접견과 석방에 관한 모든 일을 민변에 위임한다는 위임장을 작성하는 모습, 이 사진은 민변에서 인신구제신청을 할 때 법원에 제출되었다. 위 아래 얼굴이 같다.     ©자주시보

 

나. 탈북종업원들 및 그 가족들의 북한 내에서 생활수준이나 지위는 어떠한가요?
5월 3일 기자회견장에서 본 그리고 5월 18일 직접 만나본 12명 종업원들의 가족(부모)들은 거의 모두 평범한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소위 ‘높은 당간부의 자식들’이니 뭐니 하는 서울의 무책임한 보도처럼 그런 부모는 없었습니다. 100차례 넘게 북녘을 방문하고 있는 제 눈에 서울언론이 악의적으로 보도하는 그런 ‘높은 당간부’처럼 보인 부모는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제가 본 것이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가족들 중엔 이미 서울에 보도된 것처럼 북녘만 아니라 남녘에도 잘 알려진 남녘의 ‘국민가수’와도 같은 ‘인민배우’ 최삼숙 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만나본 그는 어느 다른 어머니들과 똑 같은 평범한 어머니였습니다. 세상에 알려지기론 그의 남편은 촬영기사라고 합니다. 사회주의국가인 북녘은 세상 대부분 나라들과 대단히 다른 사회입니다. 제 눈에 그분들 모두의 생활수준은 최소한 외관상 크게 차이가 없어 보였습니다. 북녘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들처럼 개인 재산규모에 따라 그들이 사는 집과 타고 다니는 차들 입는 옷들이 천지차이로 다른 그런 세상이 아닙니다.

북녘사회는 70년 가까이 매년 1년 12달 365일 미국으로부터 여전히 “핵침략전쟁위협”과 온갖 형태의 경제봉쇄, 금융제재를 받으며 사는 나라입니다. “세계유일초강국” 미국도 모자라 세계경제대국 일본, 분단된 남녘땅의 친미사대권력 나아가 워싱턴이 지배하는 유엔조직 포함 세상 거의 모든 것을 상대로 70년 여전히 가열찬 반제자주사회주의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북녘이 세상 거의 대부분 나라들과 참으로 많이 다른 이유일 것입니다.

 

6. 탈북종업원들이 한국에 입국한 이후 가족들에게 전화를 하거나 편지를 보낸 사실이 있는지요. 
제가 알기론 전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 제3자를 통하거나 외국을 통하는 등 간접적으로 연락을 받은 것은 있는지요? 
답: 알아보지 않았지만 제 판단엔 없는 것으로 압니다. 이곳에 물어보겠습니다.


나. 북녘가족들이 한국정부에 직접 연락을 취하거나 혹은 북녘이 남녘정부에 연락한 사실은 있는지요?
답: 전자는 없고 후자는 있되 직접 하지 않고 언론을 통해 한 것 같습니다.
 
7. 탈북종업원들이 인신구제청구 재판에 출석해서 자발적으로 왔다고 진술하면 북한 가족들이 위험에 빠진다는 것이 사실인지요?
세상에 그리도 뻔뻔하고 기상천외한 거짓이 또 다시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가족들이 직접 서울에 나가 딸들을 만나겠다는 제안은 북녘에서 맨 처음부터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남녘에는 국정원이 만들어내는 그런 류의 대단히 유치하고 저질스런 거짓과 허위정보, 조작정보들을 믿고 사는 마치 암흑세상에 사는 것과 같은 사람들이 여전히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가. 현재 탈북종업원 가족들의 신변의 안전상태는 어떠한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분들은 본래 당신들이 하던 직장생활도 여전히 계속하고 있고 생활에서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졸지에 딸자식들과 생이별을 하게 되면서 살아있어도 산 것 같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만약 자신들에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것이 달라진 것이라고 합니다. 기쁨과 웃음이 사라진 채 피눈물 흘리며 사는 오늘의 부모들 처지를 빼곤 오늘 생사를 알 수 없는 12명의 종업원 가족들에게 달라진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고 듣고 직접 대화 속에서 확인한 사안들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런 질문 자체가 미국지배 세상이 북에 대해 70년 반복하고 있는 끝없는 ‘악마화선전전’이 빚어내고 있는 분단현실의 한 비극적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북한당국이 가족들을 묘향산 교육시설에 집단 구금한 뒤 사상교육을 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는데 그러한 사실이 있었는지요?
‘집단구금’이란 말 자체가 참 재밌습니다. ‘집단납치’라는 말은 청와대 지시로 국정원이 저지른 이번 사건을 설명하는데 틀리지 않을 것 같은데 “부모들이 북녘당국에 의해 집단구금”되었다는 말 자체는 대단히 틀린 잘못된 설정 같습니다. 그런 류의 악의적인 낭설은 십중팔구 이번 사건으로 궁지에 빠진 국정원 주도의 날조된 악의적 허위정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알기로 그런 일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 확신합니다. 그런 발상 자체가 참으로 어이없습니다. 북녘사회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소치라고 생각합니다. 북녘사회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을 다시 만나면 직접 물어보긴 하겠지만 아마도 가족들 반응은 십중팔구 모두 “헛소리 하고 있다, 꿈에서 깨라”고 야단치실 것 같습니다. 남쪽세상이 주장하는 그런 류의 근거없는 유치한 주장들 가운데 오늘 물어보신 가족들이 이번 사건이 문제가 되어 “집단으로 사상교육 받고 있다”는 주장은 더욱 가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그런 이야기는 역시 금시초문입니다. 지나가던 소도 하도 기가 막혀 웃겠습니다. 
북녘동포들은 70년 누구나 매주 “토요학습”을 합니다. “집단학습”이라고 이해해서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북녘에선 누구나 매주 학습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만약 북녘동포들의 ‘매주집단학습’을 서울이 ‘사상교육’이라고 해석해서 그리 주장했다면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치도 이번 사건 때문에 특별히 문제가 되어 받는 일종의 ‘문책성 특별사상교육’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북녘동포들은 자신들이 속한 매 조직에서 누구나 크고 작은 집단학습을 평생하며 삽니다.

 

다. 만약 탈북종업원들이 자발적으로 탈북하여 한국에 입국한 것이라면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들은 어떻게 되는지요?
탈북자 가족들은 가족 중 누가 탈북했다고 해서 그들의 삶과 생활에 그 어떤 변화도 없이 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족 중 누군가 가족과 조국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사실 때문에 가족의 한 성원으로 도망간 그들이 세상에 부끄럽고 창피해서 수치스러워 얼굴 들고 살기가 어려울 수 있는 심정의 변화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녘정부와 일부 탈북자들이 남녘에 도망가서 주장하는 탈북자 가족들이 겪는다는 만화 같은 숱한 소설이야기들은 제가 알기론 사실과 한참 거리가 먼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12명 종업원들 가족 모두는 오늘 그대로 자신들의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거짓과 조작을 기본으로 하는 국정원조직이 자신들이 살기 위해 끝없이 조작해서 세상에 퍼트리는 즉 “탈북자 가족들이 잡혀가서 숙청되고 감옥에 간다” 류의 터무니없는 주장은 남쪽 표현처럼 정녕 “썰”에 속하는 악의적인 허위정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알기로 12명 종업원 가족들 모두는 오늘도 그대로 다 자신들의 본래 생활을 계속 영위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라. 탈북종업원 사건과 관련 책임자(안전교사 등) 6명이 5월 5일 평양 강건종합군관학교에서 공개처형되었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는데 사실인지요?
앞에 이야기한 것처럼 대답할 가치조차 없는 3류의 싸구려 만화 수준의 저질스런 질문입니다. 70년 계속되는 ‘북한악마화’에 언제나처럼 동원되는 판에 박힌 전형적인 노래 가사 같은 질문입니다. 세상은 특히 남녘동포들은 북녘사회를 정녕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평생을 속아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속아 살지 않기 위해 끝없이 만나 대화해야 하는데 미국이 이를 결코 허락하지 않지요. 결국 투쟁 외에 진정한 자유와 독립, 주권을 되찾을 길은 없는 것 같습니다. 


8. 탈북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지배인 허강일의 신상에 대해 알고 계신게 있는지요?


가. 허강일이나 그 아버지가 빚이 매우 많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어떠한지요?
허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실은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사회나 그런 일종의 돌연변이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북녘사회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유여하를 불문코 그는 이미 사람이기를 포기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자에게 공과 시간을 들여 무엇을 알고 파악해야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허와 중국에서 함께 일하다 탈출에 성공한 7명 여성종업원들에 의하면 그는 “중국에 나간 뒤 줄곧 허랑방탕한 생활을 한 것” 같습니다. 그는 특히 “도박과 방탕한 생활로 중국업주에게 빚까지 지게 되면서 결국엔 국정원 유혹과 매수에 넘어가 오늘과 같은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를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허와 몇년을 함께 일한 여성종업원들의 증언을 소개해드리는 것으로 답에 대신하겠습니다.

 

나. 허강일의 가족관계에 대해 알고 계신지요? 
모릅니다.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허 같이 완벽하게 망가진 인간을 더 이상 자세히 알 가치가 구태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 북한으로 돌아 간 다른 종업원들은 허강일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요?
5월 3일 국제기자회견장에서 4월 국정원납치사건 당시 탈출에 성공한 7명 종업원들은 일관되게 허에 대해 공개적으로 증언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가)에서 말한 것처럼 허랑방탕한 생활하다 결국에는 실패한 인간이 되고만 경우 같습니다. 남녘에서 태어나 자라 오늘 60대 중반이 되기까지 첫 30년 가까이는 남녘에서 그 뒤 25년은 미국에서 그리고 지난 10년은 주로 중국, 일본에서, 특히 1989년 30대 중반 나이에 첫 방북한 때로부터 오늘까지 근 30년 100여 차례 넘게 북을 방문하면서 언젠가부터 쓰기 시작한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남녘과 미국 같은 세상은 사람이 망가지기가 대단히 쉬운 반면, 북녘은 망가지기가 대단히 어려운 사회다. 한편 북녘은 사람의 도리를 지키고 사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운 반면 남녘과 미국 같은 세상은 그리 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사회다.” 이번 사건과 허강일을 생각하며 다시 되새겼던 생각입니다. 허처럼 완벽하게 망가진 자가 북녘에도 있구나 싶어서였습니다.

 

▲ 북에서 유괴되어 집단납치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중국 주재 북 류경식당 여 종업원 12명의 여성들     ©자주시보

 

9. 정교수님께서 가족의 위임장을 2차례나 받아 주시는 등 많은 관심을 가지고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계신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앞에서 이미 충분히 이야기했다고 생각합니다.

 

가. 이 사건이 남한과 북한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남북관계가 역대 최악으로 전락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분단현실의 비극적 실체가 온 세상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남녘이 오늘 어느 정도의 극한 위기로까지 내몰리고 있는지를 역시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만 추종하는 세력이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마치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경쟁이라도 하듯 완벽하게 망가진 추악한 사대매국세력의 모습을 세상천지에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 사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국정원이 주도한 “기획탈북” 사건으로 불리는 곧 국가권력기구에 의한 집단납치(테러) 행위에 다름없는 이번 사건과 2014년 세월호사건, 특히 가장 최근 발생한 2016년 7월 사드사태처럼 오늘 망가질대로 망가진 친미사대매국세력의 극단적 행태는 역설이지만 한편 세상을 일깨우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악의 사대망국시대’로 불리는 이명박근혜시대 8년은 역설이지만 “오래 잠자고 있던 일부 우매한” 민중까지 불러 일으켜 세우는 역할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012년 12월 대선 전 <통일뉴스>에 기고한 여러 편 글에서 이명박근혜시대는 “재앙시대”가 될 것이라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극심한 상상키 어려운 지난 몇년의 재앙시대가 오늘 역설적으로 나라와 역사에 거꾸로 공헌하고 있는 모습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4년 청와대가 보여준 극단적 형태의 “무능, 무식, 무지, 무통” 곧 “4무시대” 쯤으로 불러야 옳을 듯 싶은 이명박근혜암흑시대 8년은 분단시대 내내 역대 친미사대보수세력을 거의 기계적으로 줄곧 지지했던 경북 성주 같은 지역의 농촌 사람들조차 깨어 일어나도록 도울 정도로 주지하듯 오늘 완벽하게 망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완벽한 망가짐이 세상과 민중을 일깨우고 있는 역설적 현실에 웃을 수도 없도 그렇다고 웃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세상은 70년 남녘의 역대 분단권력 중 가장 완벽하게 망가진 역대 최악의 친미친일사대권력이 오늘 속수무책으로 어떻게 무너져내리고 있는지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12명 북녘종업원 기획탈북사건은 오늘 역대 최악의 사대분단권력이 무너져내리고 있음을 온 세상에 웅변으로 보여준 하나의 대표적인 역설적 반증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향후에도 이 사건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과 도움을 주실 생각이신지요?
물론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12명 북녘의 딸은 어느 누구 남의 자식만이 아니라 내 자식, 아니 우리 모두의 자식입니다. 저는 이런 자세가 진정한 인류애적 관심과 사랑,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그랬듯 이번 일은 그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 스스로 그들을 구해내는 일에 뛰어든 사건입니다. 이들을 하루 속히 구해내는 일은 평생 하고 있는 조국통일운동과 근본에서 같은 일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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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 메고 오끼나와와 괌으로 떠나는 북 정찰총국 특수전부대

[개벽예감 215] 배낭 메고 오끼나와와 괌으로 떠나는 북 정찰총국 특수전부대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6/08/15 [12:27]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아프가니스탄에 전설로 남은 전투헬기조종사 구출작전
2. 어이없게 실패로 끝난 ‘독수리발톱작전’ 
3. 평양 사동구역에 세워진 청와대 모형건물
4. 정찰총국 특수전부대의 청와대기습점령연습
5. 최전방 3중 철책과 경계망은 의외로 쉽게 뚫린다
6. 정찰총국 특수전부대 전투원들의 특수작전배낭

 

 

1. 아프가니스탄에 전설로 남은 전투헬기조종사 구출작전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2001년 10월 7일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침략전쟁을 도발하기 직전, 내전의 포화가 작열하던 아프가니스탄전선. 그 전선에서 한 편의 전쟁영화 같이 전개된 놀라운 전투경험이 오늘도 전해지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인민민주당이 아프가니스탄공화국을 창건한 때는 1978년이었는데, 당시 소련은 내전을 겪고 있었던 아프가니스탄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해 1979년 12월에 파병하였다. 소련군 파병부대는 115,000명에 이르렀다.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소련군은 무자헤딘(Mujahedin) 반란군을 진압하는 군사작전을 벌였으나, 11년 동안 작전실패를 거듭하며 14,453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1989년 2월에 철수하고 말았다.

 

▲ <사진 1> 1979년 12월 소련은 무자헤딘 반란군에게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던 아프가니스탄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은 11년 동안 작전실패를 거듭하며 14,453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1989년 2월에 철수하였다. 위의 사진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는 소련군 장갑차들이 국경하천의 다리를 건너가고 있는 장면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소련군이 떠난 뒤로 무자헤딘 반란군의 공세는 더욱 심해졌고, 아프가니스탄공화국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다.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넘겨준 무장장비들이 그 나라 군대에게 있었지만, 소련군이 사용하던 무장장비들을 사용할 줄 아는 훈련된 전투원이 턱없이 부족했고, 특히 산악지형이 발달한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 중요한 무장장비로 사용되는 전투헬기를 모는 조종사가 없어 안타까움을 더했다. 하지만 소련군이 철수한 아프가니스탄공화국의 붕괴가 임박한 상황에서 그 나라에 군사지원을 해주겠다고 나서는 나라는 없었다. <사진 1>

 

그런데 그처럼 군사지원을 애타게 기다리던 아프가니스탄공화국에게 선뜻 군사지원의 손길을 내민 동방의 어느 한 나라가 있었으니, 그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 국제주의 원칙을 견지해오는 조선은 사회주의나라를 지원해줄 때 외교적 손익계산 같은 것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지원해주기로 유명하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침략전쟁을 도발하기 직전인 1991년 봄 어느 날, 김일성 주석은 군사지원을 애타게 기다리던 아프가니스탄공화국을 도와주기 위해 조선인민군 전투헬기조종사 10명을 급파하였다. 평소에 고강도 전투비행훈련으로 단련된 그들 조종사 10명은 아프가니스탄에 도착하여 소련군이 남겨두고 떠난 전투헬기를 몰고 전선을 누비며 무자헤딘 반란군에게 로켓포 불벼락을 안겼다.

 

▲ <사진 2> 소련군이 철수하자 아프가니스탄공화국의 붕괴는 시간문제로 되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군에는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남긴 무장장비들을 사용할 줄 아는 훈련된 전투원이 없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헬기는 당시 소련군이 남기고 떠난, 매우 강력한 공격력을 가진 전투헬기 Mi-24인데, 그런 전투헬기들을 모는 조종사가 없어 녹슬고 있었다. 그런 위기상황에서 아프가니스탄공화국에게 군사지원의 손길을 선뜻 내민 나라가 있었으니, 그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 조선은 전투헬기 조종사 10명을 아프가니스탄에 급파하였다. 그들은 소련군이 남기고 떠난 전투헬기를 몰고 전선을 누비며 무자헤딘 반란군에게 로켓포 불벼락을 안겼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런데 조선인민군 조종사가 몰던 전투헬기 한 대가 무자헤딘 반란군 복병들이 난사한 총탄에 맞아 불시착하였고, 부상을 당한 조종사는 무자헤딘 반란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사진 2>

 

조선에서 금싸라기처럼 아끼는 전투헬기조종사가 부상을 입고 적들에게 포로로 붙잡혔다는 급보를 받은 김일성 주석은 그 조종사를 72시간 안에 무조건 구출해 조국으로 데려오라는 특별명령을 내렸다. 그 특별명령을 받은 부대가 바로 산악경보저격려단이다. 이 특수전부대는 평소에 고강도 산악전훈련을 단련하고 있었으니, 산악지형이 발달한 아프가니스탄전선에 파병하기에 제격이었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는 산악경보저격려단에서 선발한 2개의 최정예 분대를 아프가니스탄전선에 급파하게 되었다.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의 경우 1개 분대 병력은 12명이므로, 아프가니스탄전선으로 떠나는 산악경보저격려단 파병부대는 24명으로 편성되었다.  

 

▲ <사진 3> 아프가니스탄전선에서 작전임무를 수행 중이던 조선인민군 조종사가 모는 전투헬기 한 대가 무자헤딘 반란군 복병들이 난사한 총탄에 맞아 불시착하였고, 부상당한 조종사는 그들에게 붙잡혔다. 급보를 받은 김일성 주석은 전투헬기조종사를 72시간 안에 무조건 구출해 조국으로 데려오라는 특별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산악경보저격려단에서 선발된 2개의 최정예 분대가 아프가니스탄전선으로 떠났다. 산악경보저격려단 전투원 24명은 현지에서 작전을 벌이고 있던 조선인민군 전투헬기조종사들과 힘을 합쳐 무자헤딘 반란군의 은신처를 찾아냈고, 과감한 습격전을 벌인 끝에 은신처에 감금된 전투헬기조종사를 극적으로 구출하였다. 위의 사진은 조선인민군 전연부대 정찰대대 전투원들의 훈련장면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런데 조선에게 아프가니스탄은 너무 먼 나라였다. 평양에서 카불(Kabul)까지 직선거리로 5,000km다. 더욱이 조선에서는 무자헤딘 반란군이 부상당한 조선인민군 전투헬기조종사를 어디로 끌어갔는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72시간 안에 무조건 구출하라는 최고사령관의 특별명령을 받은 산악경보저격려단 전투원 24명은 최고사령관의 명령을 완수하기 전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결사의 각오를 다지며 수송기에 몸을 실었다. <사진 3>

 

아프가니스탄에 도착한 산악경보저격려단 전투원 24명은 현지에서 작전을 벌이고 있던 조선인민군 전투헬기조종사들과 힘을 합쳐 험준한 산악지대를 수색하여 마침내 무자헤딘 반란군의 은신처를 찾아냈고, 과감한 습격전을 벌인 끝에 은신처에 감금된 조선인민군 전투헬기조종사를 극적으로 구출하였다. 그 전투에 참가한 조선인민군 해외파병부대의 인명손실은 없었다. 72시간 만에 완료된 그 극적인 구출작전은 한 편의 전쟁영화를 방불케 하였다. 몇 가지 부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작성되었지만,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조선일보> 2001년 11월 1일부 기사가 그 구출작전을 간략하게 보도한 바 있다.

 

▲ <사진 4> 1979년 11월 4일 분노한 이란민중은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을 점거하고 그곳에 미국인 52명을 인질로 붙잡아두었다. 미국은 5개월 동안 인질구출작전을 준비하였고, 마침내 1980년 4월 24일 미육군 특수부대 전투원 132명을 이란에 침투시켰다. 위의 사진은 당시 '독수리발톱작전'이라는 작전명칭으로 불린 인질구출작전에 참가한 미육군 특수전부대 델타포스 전투원들이 수송기에서 내리고 있는 장면이다. 군복이 아니라 현지인과 비슷한 민간복장으로 위장하였다. 미국은 그 날의 인질구출작전에 항공모함 2척, 장거리수송기 7대, 전투헬기 8대, 근접지원공격기 2대 등 방대한 무력을 동원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2. 어이없게 실패로 끝난 ‘독수리발톱작전’

 

1979년 1월 16일 이란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으로 페르시아군주제의 마지막 왕조였던 팔라비왕조가 무너졌다. 그런데 정세를 오판한 미국은 이란민중의 적인 팔라비왕조를 옹호하며 지원하는 어리석은 꼴을 보였으니, 이란민중의 반미감정이 폭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노한 이란민중은 1979년 11월 4일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을 점거하고, 그곳에 미국인 52명을 인질로 붙잡아두었다. 그 사건으로 미국은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발칵 뒤집혔다.

 

다급해진 미국은 52명의 자국민 인질을 구출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서둘렀다. 5개월 동안 인질구출작전을 준비해온 미국은 마침내 1980년 4월 24일 미육군 특수전부대들인 델타부대(Delta Force)와 레인저부대(Rangers)에서 각각 선발한 최정예 전투원 132명을 이란에 침투시켰다. 당시 이란에 잠입하여 암약하던 미국 중앙정보국(CIA) 산하 특수활동사단(Special Activities Division) 소속 전투원들이 미육군 특수전부대의 인질구출작전을 측면에서 지원해주게 되었다. 인질구출작전명칭은 ‘독수리발톱작전(Operation Eagle Claw)’으로 정해졌다. <사진 4>


미국이 인질구출작전에 동원한 무력은 엄청났다. 미해군 항공모함 2척, 미공군 장거리수송기 7대, 미해군 전투헬기 8대, 근접지원공격기 2대 등이 인질구출작전에 동원되었으니, 가히 전면전을 벌일 만한 방대한 무력이 페르시아만에 속속 집결되었던 것이다.

 

페르시아만 상공에 어둠이 깃든 시각, 모든 조명등을 모두 끄고 이란 영공 깊숙이 침투한 전투헬기들과 수송기들이 타바스(Tabas)사막의 도로를 활주로로 삼아 작전거점에 착륙하였다. 테헤란으로부터 불과 84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점이었다. 그런데 미육군 특수전부대 전투원 132명과 현지어 통역자 15명이 분승한 전투헬기 8대가 테헤란으로 공중침투를 개시하려던 참에 갑자기 모래폭풍이 휘몰아쳤다. 모래폭풍 속에서 이륙하던 전투헬기 한 대가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수송기에 충돌하였다. 기체충돌로 일어난 화염이 항공연료를 가득 싣고 옆에서 대기 중이던 항공연료수송트럭에 옮겨 붙으며 대폭발이 일어났다. 그 폭발사고로 현장에서 8명이 즉사하고 4명이 부상당했다. 전면전을 벌일 만한 방대한 무력이 동원된 ‘독수리발톱작전’은 그처럼 어이없게도 총 한 방 쏴보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다. 

 

▲ <사진 5> 인질구출작전에 참가한 미국군 부대들이 전투헬기와 수송기를 타고 이란의 타바스사막에 착륙하였다. 미육군 특수전부대 전투원 132명과 현지어 통역자 15명이 분승한 전투헬기 8대가 사막을 떠나 테헤란으로 공중침투를 개시하려던 참에 갑자기 모래폭풍이 휘몰아쳤다. 이륙하던 전투헬기 한 대가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수송기에 충돌하였다. 기체충돌로 일어난 화염이 항공연료수송트럭에 옮겨붙으며 대폭발이 일어나, 현장에서 8명이 즉사하고 4명이 부상당했다. 방대한 무력이 동원된 '독수리발톱작전'은 총 한 방 쏴보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다. 위의 사진은 당시 폭발사고현장에 남은 전투헬기 잔해와 수송기 잔해를 촬영한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독수리발톱작전’이 그처럼 실패한 것은, ‘세계 최강의 군대’를 가졌다고 으쓱이던 미국에게 커다란 수치와 망신을 안겨주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Jimmy Carter)는 6개월 뒤에 진행된 대통령선거에 재선을 기대하며 출마하였으나, 인질구출작전의 실패로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고, 그로써 정권이 교체되었다. <사진 5>

 

조선인민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전개한 헬기조종사구출작전은 특수전부대 전투원을 24명만 동원하고서도 완벽하게 성공하였던 반면, 미국군이 이란에서 전개한 인질구출작전은 항공모함을 비롯한 방대한 무력을 동원하고서도 어이없게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극적인 대조는 조선인민군의 탄탄한 작전능력과 미국군의 허술한 작전능력을 말해주고 있다.

 

▲ <사진 6> 2015년 8월 27일 서울 용산구에 있는 전쟁기념관에서 안보학술토론회가 열렸다. 위의 사진은 그 현장을 촬영한 것이다. 그 자리에 연사로 출연한 현역 육군 중장인 조상호 국방부 군구조개혁추진관은 국방부가 '참수작전'을 검토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혔다. 한국군이 '참수작전'을 자기의 새로운 작전개념으로 수용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일촉즉발의 전쟁재발위험을 몰아온 '8월위기사태'와 맞물리며 큰 파란을 일으켰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3. 평양 사동구역에 세워진 청와대 모형건물
   
사건의 발단은 2015년 8월 27일에 일어났다. 그 날 서울 용산구에 있는 전쟁기념관에서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이 개최한 안보학술토론회가 열렸는데, 그 자리에 연사로 출연한 현역 육군 중장인 조상호 국방부 군구조개혁추진관이 충격적인 발언을 꺼내놓았다. 그는 한국군이 조선인민군보다 우세한 비대칭전략을 개발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면서, 국방부가 지금 검토하고 있는 비대칭전략들 가운데는 ‘참수작전’이라는 것도 있다고 말했다. 한국 언론매체들은 그가 말한 다른 내용들은 생략한 채 그가 언급한 ‘참수작전’를 크게 부각시켜 보도하면서, 국방부 관계자들의 부연설명을 곁들인 선정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이를테면, <연합뉴스>는 2015년 8월 27일부 보도기사에서 “유사시 적국이 핵무기를 사용하려는 징후가 보이면 핵무기승인권자를 제거해 핵무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 참수작전의 개념”이라는 국방부 관계자의 해설을 실었고, <조선일보>도 같은 날 보도기사에서 “북한 지도부는 도시가 핵무기로 공격받는 것보다 이러한 (참수작전) 보복을 더 위협적으로 생각할 것”이라는 부형욱 한국국방연구원 국방전략실장의 부연설명을 실었다. 이런 정황은 한국 국방부가 검토 중이라는 이른바 ‘참수작전’이 어느 군사지휘관의 개인적인 발상이 아니라, 이라크전쟁과 리비아전쟁 같은 침략전쟁에서 미국군이 수행한 ‘참수작전’을 한국군이 모방하여 자기의 새로운 작전개념으로 수용하였음을 말해준 것이다. <사진 6>

 

한국군이 ‘참수작전’을 자기의 새로운 작전개념으로 수용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일촉즉발의 전쟁재발위험을 몰아온 ‘8월위기사태’와 맞물리며 큰 파란을 일으켰다. 당시 ‘8월위기사태’로 초긴장한 상태에 있었던 조선인민군은 한국군이 ‘참수작전’을 거론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격분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의 격분이 예사롭지 않은 군사활동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그로부터 여덟 달이 지난 2016년 4월 27일 한국군 합참본부 관계자의 발언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언론에 보도된 한국군 합참본부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2016년 4월 초 한국의 다목적실용위성 ‘아리랑’이 평양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사동구역 대원리에 건설된 청와대 모형건물을 촬영하였다고 한다. 그 모형건물에 관한 좀 더 상세한 서술은 미국의 관영매체인 <미국의 소리>가 미국 상업위성이 촬영한 영상자료를 분석하여 2016년 7월 16일부 보도기사에 실어놓았다. 그 분석기사에 따르면, 모두 3개 동으로 이루어진 청와대 모형건물은 2015년 10월부터 2016년 5월까지 기간 중에 건설되었는데, 청와대를 2분의 1로 축소한 크기이고, 본관 모형건물의 지붕은 가로 35m, 세로 25m이며, 진입로에서 정원을 지나 본관 모형건물까지 거리는 약 90m라고 하였다. 청와대 모형건물 진입로는 남쪽이 아니라 북쪽으로 나 있었다.  
위에 인용한 보도기사에서 한국군 합참본부 관계자는 청와대 모형건물이 화력시험장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세워진 것을 주목하면서 조선인민군 포병부대들이 포사격연습표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청와대 모형건물을 건설하였으므로 그 모형건물을 표적으로 삼아 대규모 포사격연습을 곧 진행할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하였다.

 

▲ <사진 7> 2016년 4월 초 한국의 다목적실용위성 '아리랑'이 평양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사동구역 대원리에 건설된 청와대 모형건물을 촬영하였다. 위의 사진은 <미국의 소리>가 2016년 7월 16일 보도한, 미국 상업위성이 촬영한 위성사진이다. 왼쪽 사진은 청와대 모형건물을 촬영한 위성사진이고, 오른쪽 사진은 청와대 실물을 촬영한 위성사진이다. 청와대 모형건물은 청와대를 2분의 1로 축소한 크기로 건설되었는데, 모형건물의 진입로에서 정원을 지나 본관까지 이르는 거리는 약 90m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러나 그런 예측은 뭐가 뭔지 분별하지 못한 억측이었다. 아래에 서술하는 몇 가지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진 7>

 

첫째, 청와대 모형건물은 평양 중심부에서 약 10km 떨어진 곳에 세워졌지만, 그 모형건물이 서 있는 사동구역은 행정구역상 평양에 속한다. 다시 말해서, 조선인민군은 평양에 청와대 모형건물을 세워놓은 것이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조선의 협동농장들 가운데 최우수 모범단위로 개건된 장천남새전문협동농장이 바로 그 사동구역에 있다는 사실이다. 남새는 채소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장천남새전문협동농장에는 총부지면적이 446,281㎡에 이르는 현대식 남새온실 665개동이 들어섰는데, 각종 재배작물의 생장특성에 맞춰 온도, 습도, 햇빛비침도, 이산화탄소농도를 과학적으로 측정하고 조절하는 컴퓨터종합지령체계가 가동되고 있으며, 400여 세대 농장원들과 그 가족들이 입주한 연립주택들은 태양열물가열기와 태양빛전지판을 지붕마다 설치한 산뜻한 친환경주택으로 건설되었고, 도시사람들도 부러워할 문화회관, 과학기술보급실, 장천원, 상점 같은 현대적인 문화후생시설들이 들어섰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선진과학기술로 부흥하는 사회주의문명국의 문화농촌을 표상하는 본보기로 개건된 그 농장을 2015년 6월 9일과 6월 29일 두 차례나 현지지도하였으며, 6월 30일에는 개건공사 준공식이 현지에서 진행되었다.

 

▲ <사진 8> 위의 사진들은 평양 사동구역에 현대적으로 개건된 장천남새전문협동농장을 촬영한 것이다. 위쪽 사진은 665개동의 남새온실들이 줄이어 있는 모습이고, 아래쪽 사진은 그 협동농장 안에 건설된 현대적인 문화후생시설들 가운데 하나인 장천원의 수영장을 촬영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장천남새전문협동농장 옆에서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포사격연습을 진행할 것이라는 한국군 합참본부 관계자의 예측은 사리를 분별하지 못한 억측이다.     © 자주시보


그런데 그런 장천남새전문협동농장 옆에서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170mm 자행포와 300mm 방사포를 쏘는 포사격연습을 진행할 것이라는 한국군 합참본부 관계자의 예측은 사리를 분별하지 못한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사진 8>

 

둘째, 청와대 모형건물은 실물을 2분의 1로 축소하여 실물과 매우 흡사한 모습으로 건설되었다. 위성사진만 봐서는 그 건물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지만, 외형을 그처럼 실물과 흡사하게 만들었고, 정원과 진입로까지 흡사하게 만들어놓았으므로, 건물내부도 실제와 흡사하게 만들어놓은 것이 틀림없다. 만일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그 모형건물을 포사격연습표적으로 한 차례만 쓰고 파괴할 것이라면, 그처럼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을 들여 실물과 흡사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 원래 한 차례만 쓰이고 파괴되는 포사격연습표적은 위치와 크기만 표시하는 단순구조물로 세워놓는 법이다. 이런 사정을 헤아려보면, 평양 사동구역에 세워진 청와대 모형건물은 포사격연습표적이 아니라는 점이 자명해진다.

 


4. 정찰총국 특수전부대의 청와대기습점령연습

 

평양 사동구역에 세워진 청와대 모형건물은 포병부대가 포사격을 연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특수전부대가 기습점령을 연습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청와대 모형건물은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가 청와대기습점령을 실전전환경과 흡사한 모의환경에서 연습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가 청와대 모형건물을 세워놓고 청와대기습점령을 연습하는 것은, 한국군이 ‘참수작전’을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뒤에 나타난 새로운 군사동향이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 <사진 9> 2011년 2월 8일 주한미국군사령부 청사에서 한국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비공개 간담회에서 월터 샤프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은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의 총병력이 200,000명에 이른다고 밝힌 바 있다. 고강도훈련으로 단련된 최정예 특수전병력이 200,000명이라는 사실 하나만 봐도, 조선인민군이 얼마나 강한 군대인지 알 수 있다. 위의 사진은 2011년 11월 30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도 밑에 조선인민군 제630대련합부대가 종합전술훈련을 진행한 훈련장의 모습이다. 조선인민군 제630대련합부대는 '폭풍군단'으로 불리는 최정예 특수전부대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2011년 2월 8일 주한미국군사령부 청사에서 한국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비공개 간담회에서 월터 샤프(Walter L. Sharp)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은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의 총병력이 200,000명에 이른다고 밝힌 바 있다. 그가 언급한 것처럼, 지금 조선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특수전부대가 있다. 200,000명 병력은 다른 나라 군대의 총병력만큼 많은 것이다. 이를테면, 영국군은 250,000명, 스페인군은 233,000명, 스위스군은 220,000명인데, 고강도훈련으로 단련된 최정예 특수전병력만 200,000명이라는 사실 하나만 봐도 조선인민군이 얼마나 강한 군대인지 알 수 있다. 그래서 2011년 2월 8일 주한미국군사령부 청사에서 진행된 비공개 간담회에서 월터 샤프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은 “북한 특수부대가 매우 위협적인 만큼, 한미연합사 차원에서 대비책을 마련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무슨 대비책을 마련한다고 하면서 한국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을 안심시키려고 했지만,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에 대한 두려움은 감출 길이 없었다. <사진 9>

 

그렇다면 200,000명이나 되는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들 가운데 평양 사동구역에 청와대 모형건물을 세워놓고 청와대기습점령을 연습하는 특수전부대는 어느 부대일까?  평양 사동구역에 훈련소를 둔 부대는 정찰총국 특수전부대다. 한국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사동구역에 있는 그 훈련소는 정찰총국 제7국 198련락소라는 명칭으로 불린다고 한다. 조선인민군 각 전연군단 예하에도 정찰대대가 1개씩 있지만, 정찰총국과 전연군단 예하 정찰대대는 서로 다르다.

 

조선인민군 정찰총국은 지난날 정찰국이었는데, 2009년에 정찰총국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이것은 조선인민군 정찰작전능력이 2009년에 대폭 강화되었음을 말해준다. 기존 정찰국이 정찰총국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정찰작전능력이 대폭 강화된 시점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 혁명활동을 시작한 시점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10년 4월 25일 조선인민군 창건일을 맞아 그 전해에 확대, 개편된 정찰총국 지휘부를 시찰하였는데, 당시 후계자였던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그 시찰에 동행하였다.

 

한국군 정보당국의 자료를 인용한 <연합뉴스> 2011년 2월 13일 보도에 따르면, 정찰총국 특수전부대는 10,000여 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그들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고난도 훈련을 받는다”고 한다. 이를테면, 무게가 35kg나 되는 무거운 군장을 짊어지고 매일 20km씩 행군하며, 매주 토요일에는 밤 10시에 시작하여 다음날 정오까지 꼬박 12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고 40km에 이르는 산악행군을 한다는 것이다. 또한 <조선일보> 2011년 2월 8일 보도에 다르면, 그들은 “한 명이 적 3~15명을 상대로 싸워 이길 수 있는 훈련(격술훈련-옮긴이)을 하루 3시간 이상, 사격은 침투 전 3,000번 이상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뉴데일리> 2010년 11월 29일 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무술로 단련돼 맨손으로도 적군 몇 명쯤은 동시에 상대할 수 있으며, 저격소총을 가지면 15초 이내에 200m 밖에서 움직이는 표적 몇 개를 쓰러뜨릴 수 있다고 한다.” 한국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정찰총국 특수전부대는 “최고의 무술실력과 전투장비를 가진 부대”라고 한다.

 

▲ <사진 10>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들은 최고의 무술실력과 전투장비를 가진 부대로 알려졌다. 그런 전투력을 갖추기 위해 그들은 인간의 한계를 넘는 고강도훈련으로 단련된다. 위의 사진은 2013년 12월 27일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조선인민군 초병대회 참가자들 앞에서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 전투원들이 진행한 격술훈련의 한 장면이다. 평소에 격술로 단련된 그들은 싸움이 벌어지면 맨손으로도 몇 명을 쓰러뜨릴 수 있다고 한다.     © 자주시보

 

윤규식 육군종합행정학교 북한담당교수의 말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는 “유사시 대상표적에 사전침투했다가 전쟁과 동시에 행동을 개시하며, 부여받은 목표를 습격, 파괴하는 임무를 수행한다”고 한다. <중앙일보> 2011년 1월 15일부 보도기사에서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 출신이라는 익명의 탈북자는 자신이 조선에서 복무를 하였던 군부대의 작전임무가 전라남도를 해방하는 것이었는데, 전쟁이 일어나면 태백산 줄기를 타고 육상침투하여 지리산을 넘어 광주에 진입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사진 10>

 

위에 열거한 몇 가지 정보를 살펴보면, 2015년 가을 조선인민군 정찰총국 특수전부대가 평양 사동구역에 청와대 모형건물을 세워놓고, 청와대기습점령을 본격적으로 연습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국군이 ‘8월위기사태’ 와중에 ‘참수작전’까지 언급하면서 조선을 극도로 자극하였으므로, 그에 격분한 정찰총국 특수전부대가 청와대기습점령을 연습하기 시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5. 최전방 3중 철책과 경계망은 의외로 쉽게 뚫린다

 

한반도 군사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한국군 최전방부대가 군사분계선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데, 조선인민군 정찰총국 특수전부대가 설마 그런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청와대까지 갈 수 있겠는가 하고 의문을 품겠지만, 한국군 최전방부대가 지키는 경계망에는 구멍이 여기저기 숭숭 뚫려있어서 특수전부대 전투원들이 쉽게 침투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2012년 10월 2일 강원도 고성군에 주둔하는 한국군 제22사단 최전방 철책경계부대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연합뉴스> 2012년 10월 12일 보도에 따르면, 무장을 하지 않은 조선인민군 병사 한 사람이 그 날 밤 10시 30분경 군사분계선 철책을 지지하는 철주를 타고 올라가 3~4m 높이의 3중 철책을 넘어 남하하였다. 그가 두 번째 철책을 넘는데 52초가 걸렸고, 세 번째 철책을 넘는데 1분1초가 걸렸다고 한다. 군사복무 중에 잘못을 저지르고 처벌이 두려워 탈영한 일반병사가 군사분계선 3중 철책을 그처럼 쉽게 넘었다면, 고강도침투훈련으로 단련된 특수전부대 전투원에게 군사분계선 3중 철책은 있으나 마나 한 것이다.

 

▲ <사진 11> 2012년 10월 2일 강원도 고성군에 주둔하는 한국군 제22사단 최전방 철책경계부대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무장을 하지 않은 조선인민군 병사 한 사람이 그 날 밤 3중 철책을 넘어 남하한 것이다. 그는 한국군 경계초소의 문과 경비대 숙소의 문을 두드리며 다녔으나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고, 멀리 떨어진 일반전초로 가서 문을 두드린 끝에 한국군 병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한국군 최전방부대의 경계망이 너무 허술하다는 것을 드러냈다. 위의 사진은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조선인민군 병사 한 사람이 쉽게 넘어온 철책 앞에서 한국군 제22사단 사단장으로부터 설명을 듣는 장면이다. 최전방 경계망이 침투훈련도 받지 못한 병사에게 그처럼 쉽게 뚫렸으니, 고난도침투훈련으로 단련된 조선인민군 정찰총국 특수전부대 전투원들에게 3중 철책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이다.     © 자주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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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진짜 충격적인 사건은 월책 이후에 일어났다. 3중 철책을 간단히 넘은 그가 70~80m 떨어진 한국군 경계초소(GP)로 갔으나 그 초소는 텅 비어 있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250m 정도 떨어진 경비대 숙소까지 가서 출입문을 두드렸지만 2중 유리문 안쪽 상황실에 있던 한국군 경비대원들은 누가 문을 두드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는 하는 수 없이 30m 떨어진 일반전초(GOP)로 가서 유리창문을 두드렸는데, 그제야 소초장과 전투분대장이 나와 그의 신원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이런 경험이 말해주는 것처럼, 한국군 최전방부대의 경계망은 너무 허술해서 조선인민군 정찰총국 특수전부대는 그처럼 허술한 경계망을 뚫고 청와대까지 침투할 수 있을 것으로 우려된다. <사진 11>

 

1968년 1월 18일 밤,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 전투원 32명이 한반도 서부전선 군사분계선 철책을 뚫고 침투하였다. 당시 주한미국군 제2사단은 “특별히 많은 예산을 들여서 만든 최신식 철책”을 자기들이 지키는 서부전선 군사분계선에 설치해놓고 경계태세를 강화하고 있었지만, 그런 경계망은 고강도침투훈련으로 단련된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 전투원들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것이었다. 군사분계선 철책을 뚫고 침투한 그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초인간적인 산악행군을 다그쳐 산줄기를 타고 남하하였다. 1월 20일 그들은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북한산 비봉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비봉을 출발하여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 있는 군경검문소를 통과했으며, 북한산성 북문 일대에서 경찰병력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면서 청와대에서 불과 800m 떨어진 곳까지 다가갔다. 이것이 1.21청와대습격사건이다.

 

▲ <사진 12> 위의 사진은 북악산 탐방로의 어느 바위에 무수히 남아있는 총탄흔적을 촬영한 것이다. 이 총탄흔적은 1.21청와대습격사건 당시 치열한 교전이 남긴 것이다. 1.21청와대습격사건이란, 1968년 1월 21일 당시 주한미국군 제2사단이 지키고 있었던 서부전선 군사분계선 철책을 뚫고 침투한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 전투원 32명이 초인간적인 산악행군으로 산줄기를 타고 남하하여, 북한산성 북문 일대에서 경찰병력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며 청와대에서 불과 800m 떨어진 곳까지 다가갔던 사건을 말한다. 32명의 전투원들 가운데 27명은 교전 중에 사망하였고, 3명은 군경의 포위망과 추격전을 뚫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복귀했으며, 1명은 교전 중에 붙잡혔다. 그로부터 근 반세기가 지난 지금 조선인민군 정찰총국 특수전부대는 청와대 모형건물을 세워놓고 청와대기습점령을 연습하고 있다. 오늘의 군사상황은 1968년과 마찬가지로 초긴장상태에 있는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신동아> 2004년 2월호는 1.21청와대습격사건 당시 방첩부대 수사계장이었던 백동림 씨의 회고담이 실렸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32명의 특수전부대 전투원들 가운데 포로로 붙잡힌 김신조 씨를 제외하고 확인된 시신은 27구뿐이었으며, 다른 3명의 생사여부는 끝내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1.21청와대습격사건에 참가한 특수전부대 전투원 32명 가운데 3명이 군경의 포위망과 추격전을 뚫고 군사분계선을 다시 넘어 복귀하였음을 말해준다. <사진 12>

 

<뉴데일리> 2010년 11월 29일 보도에 따르면, 당시 군사분계선을 넘어 복귀한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한국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던 중에 총상을 입어 “창자가 배 밖으로 쏟아져 나왔지만 창자를 다시 밀어넣고 손으로 막은 채 북한까지 돌아갔다”고 한다. 미국의 관영선전매체 <자유아시아방송> 2015년 4월 30일 보도에 따르면, 1.21청와대습격사건 당시 한국 군경의 포위망과 추격전을 뚫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복귀한 특수전부대 전투원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현역 육군대장인 박재경 인민무력부 부부장이라고 한다.

 

한국 국방부가 2006년에 펴낸 ‘국방백서’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들은 “한반도 작전환경을 고려하여 야간전훈련, 산악전훈련, 시가전훈련을 강화하는 등 특수전수행능력을 집중적으로 향상시키고 있다”는 것이고, <내외통신> 1996년 자료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의 실전훈련 중에 약 80%는 야간전훈련이라고 한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조선인민군 정찰총국 특수전부대가 전개할 청와대기습점령작전은 박근혜 대통령이 침실에서 잠자고 있는 심야에 전개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이 소녀시절 청와대에서 겪었던 1월 21일의 악몽이 오늘 되살아나고 있는 것을 감지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참수작전’을 운운하면서 조선을 극도로 자극한 한국군에게 심각한 위기상황이 닥쳐온 것이 분명해 보인다.

 

▲ <사진 13> 조선인민군 정찰총국 특수부대원들은 평시에도 일본 오끼나와에 빈번히 침투하여 정찰임무를 수행한 뒤에 복귀한다고 한다. 그들이 오끼나와 정찰에 주력하는 까닭은, 전시에 한반도에 가장 먼저 출동하는 미해병대와 미공군의 주력부대들이 오끼나와에 집결해있기 때문이다. 위의 사진은 미공군이 오끼나와에서 운영하는 가데나공군기지를 촬영한 것이다. 매우 높은 차단벽을 세우고 경계태세를 강화한 것을 위의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차단벽은 고난도침투훈련으로 단련된 조선인민군 정찰총국 특수전부대 전투원들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것이다. 전시에 그들은 특수작전배낭을 메고 스텔스 잠수정에 탑승하여 오끼나와 해변에 상륙, 침투하고, 그 섬에 있는 미국군기지들에 접근하는 작전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6. 정찰총국 특수전부대 전투원들의 특수작전배낭


조선인민군 정찰총국 특수전병력 10,000여 명은 조선에서 말하는 ‘조국통일대전’이 일어나면, 적진에 가장 깊숙이 침투하게 되는데, 전시가 아닌 평시에도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정찰활동을 벌이고 있다. 조선인민군 정찰병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나라 군대의 정찰병도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정찰임무를 수행하는 법이다.

 

조선인민군 정찰총국 특수전부대가 적진에 가장 깊숙이 침투한다면, 과연 어디까지 침투하는 것일까? 제주도 서귀포 해안까지 침투할 것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작전범위는 한반도 영역을 훌쩍 뛰어넘는다. <뉴데일리> 2010년 11월 29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정찰부대들 가운데 해외정찰임무를 수행하는 정찰부대에 소속된 정찰병들은 전원이 영어와 일어를 할 수 있으며, 평시에 일본 오끼나와(沖繩)에 “빈번히” 침투하여 정찰활동을 벌인 뒤 복귀하는데, 전시에는 특수작전배낭을 메고 괌(Guam)과 오끼나와에 침투하는 작전임무를 수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진 13>

 

조선침공을 노리는 미해병대기지와 미공군기지가 집결된 오끼나와는 평양에서 직선거리로 1,420km 떨어져 있으며, 조선침공을 노리는 미공군기지와 미해군기지가 집결된 괌은 평양에서 직선거리로 3,400km 떨어져 있다. 
그런데 조선인민군 정찰총국 특수전부대는 평시에도 평양에서 1,420km 떨어진 오끼나와에 빈번히 침투하여 정찰활동을 벌인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수중소음을 내지 않는 스텔스 잠수정을 타고 오끼나와에 침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특수작전배낭을 멘 조선인민군 정찰총국 특수전부대 전투원들이 오끼나와와 괌에 각각 상륙, 침투하여 그 두 섬에 있는 미국군 군사전략거점들을 한꺼번에 날려보낼 장거리침투작전을 준비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장거리침투작전의 구체적인 내용은 <자유아시아방송> 2016년 4월 6일 보도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보도기사에 따르면, 전시에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 전투원들이 적진 깊숙이 침투할 때 메고 가는 배낭은 ‘위성’이라고 불리는 특수작전배낭인데, 미사일유도장치가 들어있는 배낭도 있고, 전파교란장치가 들어있는 배낭도 있다고 한다. 전시에 핵배낭을 메고 적진 깊숙이 침투하는 특수전부대는 정찰총국 특수전부대가 아니라 ‘폭풍군단’으로 불리는 제630대련합부대다. 

 

위성항법장치로 정밀타격기능을 발휘한다는 미사일이라고 해도, 비행거리가 1,000km 이상 넘으면 오차범위가 커질 수밖에 없으므로, 타격대상 인근에 은밀히 가져다놓은 미사일유도장치에서 송출되는 유도전파를 추적하여 타격대상을 정밀타격하는 것이 오늘날 현대전의 특징적인 전투양상으로 되었다. 예컨대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때, 미국군 특수전부대가 이라크군 군사전략거점 인근에 침투하여 미사일유도장치를 설치함으로써 미사일의 정밀타격도를 보장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세상에 알려진 바 있다.

 

▲ <사진 14> 위의 사진에 보이는 것은 미해병대가 메고 다니는 전투배낭이다. 어느 나라 군대나 전투배낭을 멘다. 하지만 조선인민군 정찰총국 특수전부대 전투원들은 전투배낭이 아니라 특수작전배낭을 메고 적진에 침투한다. 그 특수작전배낭은 '위성'이라고 불리는데, 미사일유도장치가 들어있는 배낭도 있고, 전파교란장치가 들어있는 배낭도 있다. 전시에 핵배낭을 메고 적진 깊숙이 침투하는 특수전부대는 정찰총국 특수전부대가 아니라 '폭풍군단'으로 불리는 제630대련합부대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런데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 전투원들에게는 미사일유도배낭만 있는 게 아니라 전파교란배낭도 있다. 전파교란장치에서 송출되는 전파는 공격대상에서 멀어질수록 약해져 교란효과가 감소되므로, 전파교란장치를 공격대상 가까이 접근시킬수록 유리하다. 그러므로 조선인민군이 평양에서 1,420km 떨어진 오끼나와나 3,400km 떨어진 괌의 미국군 군사전략거점들에게 전파교란공격을 가할 현실적인 작전방도는, 전파교란배낭을 멘 정찰총국 특수전부대 전투원들이 스텔스 잠수정 또는 스텔스 잠수함을 타고 오끼나와와 괌에 은밀히 침투하여 그 배낭을 공격대상 인근에 가져다놓고 강력한 교란전파를 송출하는 것이다. <사진 14>

 

정찰총국 특수전부대 전투원들이 그처럼 오끼나와와 괌에 상륙, 침투할 수 있다면, 그보다 훨씬 더 가까운 일본 본토에 상륙, 침투하여 거기에 있는 주일미국군기지들에 접근하는 것은 더 쉬운 일이다. 
배낭을 멘 여행객 차림으로 위장하고, 일본말을 하는 정찰총국 특수전부대 전투원들이 스텔스 잠수정을 타고 가서 오끼나와와 일본 본토의 어느 외딴 해변에 상륙, 침투한 뒤에 주일미국군기지들에 접근하는 것을 막을 방도는 없다. 배낭을 멘 여행객 차림으로 위장하고, 영어를 구사하는 정찰총국 특수전부대 전투원들이 스텔스 잠수함을 타고 가서 괌의 어느 외딴 해변에 상륙, 침투한 뒤에 미국군기지들에 접근하는 것을 막을 방도는 없다.

 

위에 인용한 <자유아시아방송> 보도기사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들은 특수작전배낭 ‘위성’의 사용법을 올해 2월부터 연습하고 있다고 한다.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들이 특수작전배낭 사용법을 연습하는 것은, 그들이 선제공격징후를 노출하지 않고 오끼나와, 괌, 일본 본토에 사전침투하여 ‘위성’을 작동시키면, 조선인민군 전략군이 탄도미사일 초정밀타격으로 그 지역들에 있는 미국군 군사전략거점들을 파괴할 엄청난 작전계획이 수립되었음을 말해준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조선침공을 노리는 미국의 전쟁수행력은 오끼나와, 괌, 일본 본토에 집결되어 있으므로, 그 지역의 군사전략거점들이 파괴되는 순간 미국은 전쟁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초정밀선제타격으로 ‘조국통일대전’을 끝내고 미국의 항복을 신속히 받아내려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작전구상을 엿볼 수 있으며, 그런 놀라운 작전구상이 실현될 ‘조국통일대전’이 임박하였음을 예고하는 조선의 암시적 표현들을 읽을 수 있다. 지금 미국은 전략폭격기들인 B-52, B-2, B-1B를 괌의 앤더슨공군기지에 집결시키고 조선에 대한 선제핵타격위협을 가중시키고 있지만, 미국이 조선을 자극할수록 조선은 ‘조국통일대전’의 날을 한층 더 앞당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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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인의 목소리 ‘평화통일’ 하나로


국민들의 민주적 통일논의 마당된 ‘1000인 원탁회의’

“1천명의 사람들이 광화문 한복판에 모여서 평화통일 토론을 한다는 것 자체가 가슴 뛰는 일이다. 이런 원탁회의가 남한에서도 열리고 북한의 평양에서도 열리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전국교육대학생연합 송민호 회장)

“이런 모임과 만남으로 소통을 해야 통일이 가능하고 그래서 이 자리에 온 것이 기쁘다. 이렇게 모인다는 게 희망이다.”(한국순교복자수녀회 권오희 수녀) 

▲ 남북대화 촉구, 한반도 평화를 위한 전국대표 1000인 원탁회의가 광화문광장에서 지난 14일 열렸다.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상임대표 이창복)가 주관하는 ‘남북대화 촉구, 한반도 평화를 위한 전국대표 1000인 원탁회의’가 민간 차원의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통일운동 방법으로서 또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광복 71돌 하루 전인 지난 1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1000명의 각계각층 인사들이 100개의 원탁에 둘러앉아 평화통일을 위한 토론마당을 펼쳤다. ‘남과 북은 하나다. 우리는 하나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평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작한 원탁회의는 전국은 물론, 해외 동포까지 1000인이 모여 원탁별 토론을 거치고, 그를 발표함으로써 평화통일의 중지를 모으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민간차원의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아래로부터’ 통일운동 

정치, 종교, 노동, 농민, 여성, 청년, 빈민, 학술, 언론, 민족, 법조, 학생 등 각 분야와 서울에서 제주까지 각 지역에서 한반도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모인 참석자들은 각자의 원탁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과제’, ‘남북이 함께 하는 통일운동’, ‘시민과 함께 하는 통일운동’ 등을 주제로 토론을 펼쳤으며 그 결과를 ‘한 문장’이나 ‘키워드’로 작성해 발표, 제출했다.

특히 한반도 평화통일 문제의 최대 이슈인 ‘사드배치’에 대해선 절대적으로 반대의견이 많았고, ‘한반도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남북연석회의를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상당했다. 이를 위해 ‘야당이 남북관계 개선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도록 촉구하자’는 의견과 ‘전쟁의 위기를 없애고 평화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남북 대화를 촉구하하는 의견도 다수를 이뤘다.

아울러 ‘평화협정 체결 등 일상적인 통일협상이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소파협정, 전시작전권 회수 논의를 시작하자’는 의견도 있었고 ‘통일운동이 자율적이고 활성화될 수 있도록 다양한 주민행사를 통해 밑에서부터 평화통일을 이뤄내자’는 의견도 나왔다.

이날 정당 인사들과 토론을 펼친 정의당 이정미 의원은 “사드배치 문제를 다룰 국회특위 구성을 다시 한 번 다짐했다“며 야당 내에는 당론과 상관없이 사드배치를 반대하는 의원들이 많은데 그분들과 함께 특위 구성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통일교육과 관련한 의견도 많았는데 ‘청소년들이 함께 하는 통일논의를 활성화하기 위한 다양한 교육의 필요성은 물론, 학생들이 스스로 평화통일을 이끌어갈 미래세대임을 인식할 수 있도록 평화통일에 대해 자유롭게 논의해나가겠다’고 했으며 ‘통일역량 강화 교육과 설명회, 간담회, 통일동아리 등등의 노력을 해나가겠다는 의견도 개진됐다.

용산미군기지와 DMZ을 둘러보고 왔다는 한 예비교사모임 회원은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다름에 대해 토론한다는 것을 보며 (통일의)미래가 밝구나 생각했다”며 “남과 북이 다른 것처럼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대화의 장을 만드는 토론문화와 교육을 더욱 활성화시키는데 앞장서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등 통일교육에 대한 요구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많이 공유됐다. 

농민들이 이끈 원탁에선 “통일은 농민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며 남북 농민이 공동으로 DMZ에 생명농장을 만들고, 여성농민들은 토종씨앗을 교류 지원하는 등 남북 농업교류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했다.

민주노총에서도 ‘노동과 통일을 접목해 통일 일자리와 통일경제 등의 정책방안을 준비하자’고 제안하면서 ‘만나야 통일이다, 연석회의 성사’를 함께 주장했다.

이밖에도 ‘강정과 성주, 밀양과 세월호는 하나다’, ‘해군기지 철폐', '11월20일 민중총궐기 성사에 노동자 농민, 민중의 삶이 달려있다’, ‘남북대화의 조속한 실현’, ‘정권 교체 반드시 하자’ 등 구호로서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만나야 통일이다, 연석회의 성사시키자”

이날 원탁회의에서 참석자들은 6.15남측위원회 이창복 상임대표의장의 “남북한 평화협정 체결문제가 거론되지 않는 상황에서 통일운동은 무척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런 만큼 민주적이고 자율적으로 아래로부터하는 통일운동, 그리고 그 주체로서 문제를 푸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는 대회사에 걸맞게 각자의 위치에 맞는 다양한 의견을 자유롭게 쏟아냈다.  

한편 이날 주제연설에 나선 6.15남측위 조성우 상임대표는 “평화의 기본은 ‘자존’이다. 서로 귀한 걸 인정하고 존중하면 그 평화가 시작된다. 나라와 나라간 평화가 유지되려면 서로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 주권 등 서로의 주권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하며 그것이 평화의 출발”이라고 강조했다.

또 “한반도 평화의 출발은 미일관계, 미국과 북한의 관계 정상화 등으로 핵을 현 수준에서 동결하고 평화협정 협상과 체결을 한 후 핵 감축 협상에 들어간다면 평화의 작은 출발이 될 것”이라고 평화협정 체결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두 번째 주제연설에 나선 6.15남측위 여성본부 권오희 상임대표는 “남북 화해와 통일만이 민족의 살 길”이라며 리우올림픽 현장에서 남북 선수들이 함께 웃는 모습과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전 세계인들에게 감동 주었던 남북 선수단의 공동 입장을 언급하면서 “만남은 저렇게 쉬운데, 만남은 저렇게 좋은 일인데 왜 우리는 이곳에서 만날 수 없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며 광복 71돌에도 남북이 함께 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권 대표는 또 남북화해와 협력의 상징이었던 개성공단이 폐쇄되고 금강산 길이 다시 열리지 않을까 우려하며, 이미 남북의 만남과 대화가 우리의 미움과 증오의 장벽을 허물고 남북 화해의 길을 여는 방법임을 경험한 만큼 대결과 긴장을 부르는 충돌과 전쟁으로 비화되기 전에 꼭 만나야 된다고 호소했다.

아울러 “7.4남북공동성명, 6.15남북공동선언, 10.4남북공동선언 남북이 합의한 선언들에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가장 현실적으로 합리적인 방법들이 담겨있다”며 "독재들과 권력유지자들, 전쟁무기상들은 더 많이 무기가 필요하다고 부추기고 자기들을 위해 대립을 부추기는 현실"을 지적하며, 평화로 가는 걸음을 걷는데 마음을 모으자고 남북대화를 강조했다.

▲ 한반도 평화통일을 반드시 이뤄야 한다고 강조하고 특히 재일 조선인들에 대한 반민족적 차별대우를 중단하라고 촉구하는 서승 교수
▲ 한반도 평화통일에 대해 각자의 원탁에서 논의한 결과들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호소문을 낭독하는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회 김순애 회장, 대한성공회정의평화사제단 이종성 요한 신부, 방용승 전북겨레하나 공동대표
▲ 원탁회의를 마치면서 옆사람과 손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통일을 염원했다.
▲ 원탁회의를 마치며 참석자들이 단일기를 들고 한반도 평화통일을 외치고 있다

원탁회의는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회 김순애 회장과 대한성공회정의평화사제단 이종성 요한 신부, 방용승 전북겨레하나 공동대표의 “광복 71돌을 맞아 치유되지 못한 분단의 상처 앞에서 위태로운 한반도 평화의 숨결을 되살리고 민족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한반도의 완전하고 영구적인 평화체제를 위해 노력하고 하루빨리 남북이 마주 앉을 수 있는 대화의 길을 열자”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호소문 낭독에 이어 참가자들이 단일기를 들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지난해 ‘평화통일서울시민 1000인 원탁회의’를 계기로 참가 대상을 전국으로 확대해 열린 이번 원탁회의는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통일에 대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민주적인 통일논의의 장으로서, 통일운동의 새 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 원탁회의가 끝난 뒤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원탁회의는 가장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통일논의 구조를 만드는데 좋은 모델을 제시했다. 사진은 의견을 모아 적은 글

 

▲ 평화통일 염원을 담아서
▲ 이번 원탁회의에서는 '사드배치'가 남북 평화통일을 가로막는다는 의견이 많았다.

권미강 기자  kangmomo85@gmail.com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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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없는 해방 71주년을 맞으며…

일제에 은혜를 입은 자들이 망언을 내뱉는 나라가 해방된 나라일까요?
 
김용택 | 2016-08-15 08:59:2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항복문서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서 시국을 수습코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15][16]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대저, 제국 신민의 강녕을 도모하고 만방공영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자 함은 황조황종(皇祖皇宗, 열성조)의 유범으로서 짐은 이를 삼가 제쳐두지 않았다. 일찍이 미영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것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본디 짐의 뜻이 아니다.

그런데 교전한 지 이미 4년이 지나 짐의 육해군 장병의 용전(勇戰, 분투), 짐의 백관유사(百官有司)의 여정(勵精, 노력), 짐의 일억 중서(衆庶, 국민)의 봉공(奉公, 국가를 받듦) 등 각각 최선을 다했음에도, 전국(戰局)이 호전된 것만은 아니었으며 세계의 대세 역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적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무고한 백성들을 거듭 살상하였으며 그 참해(慘害, 참상)가 미치는 바는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욱이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뿐더러, 나아가서는 인류의 문명도 파각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짐은 무엇으로 억조의 어린 백성[17]을 보전하고 황조황종의 신령에게 사죄할 수 있겠는가. 짐이 제국정부로 하여금 공동선언에 응하도록 한 것도 이런 이유다.

짐은 제국과 함께 시종 동아의 해방에 협력한 여러 맹방에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신민으로서 전진(戰陣)에서 죽고 직역(職域, 직무)에 순직했으며 비명(非命)에 스러진 자 및 그 유족을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찢어진다. 또한 전상(戰傷)을 입고 재화(災禍)를 입어 가업을 잃은 자들의 후생(厚生, 생계)에 이르러서는 짐의 우려하는 바 크다.

생각건대 금후 제국이 받아야 할 고난은 물론 심상치 않고, 너희 신민의 충정도 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짐은 시운이 흘러가는 바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 이로써 만세(萬世)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

이로써 짐은 국체(國體)를 수호할 수 있을 것이며, 너희 신민의 적성(赤誠, 정성과 노력)을 믿고 의지하며 항상 너희 신민과 함께 할 것이다. 만약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함부로 사단을 일으키거나 혹은 동포들끼리 서로 배척하여 시국을 어지럽게 함으로써 대도(大道)를 그르치고 세계에서 신의를 잃는다면 이는 짐이 가장 경계하는 일이다.

아무쪼록 거국일가(擧國一家) 자손이 서로 전하여 굳건히 신주(神州, 일본)의 불멸을 믿고, 책임은 무겁고 길은 멀다는 것을 생각하여 장래의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 도의(道義)를 두텁게 하고 지조를 굳게 하여 맹세코 국체의 정화(精華)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進運)에 뒤지지 않도록 하라.

너희 신민은 이러한 짐의 뜻을 명심하여 지키도록 하라.

- 일본왕의 항복문서 전문 -

일본왕의 항복육성 71년 전 라리오 방송 녹음자료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동시에 38선이 그어지고 미군과 소련군의 진주와 함께 미군과 소군정시대가 시작되었으며, 1948년 이승만 단독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후 3년간의 한국전쟁은 민족의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켰고, 분단은 외세에 의해 계속 지배됨으로써 자주권이 박탈된 또 다른 종속이 시작되었다. (김용택의 현대사사료집-전국역사교사모임)

【조선 주민에 대한 태평양 미육군 총사령관 포고문 제 1호】

조선 주민에 포고함.

태평양 미국 육군 최고 지휘관으로서 하기와 같이 포고함.

일본국 천황과 정부와 대본영을 대표하여 서명한 항복 문서의 조항에 의하여 본관 휘하의 전첩군은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지역을 점령함.

오랫동안 조선인의 노예화된 사실과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킬 결정을 고려한 결과 조선 점령의 목적이 항복 문서 조항 이행과 조선인의 인권 및 종교상의 권리를 보호함에 있음을 조선인은 인식할 줄로 확신하고 이 목적을 위하여 적극적 원조와 협력을 요구함.

본관은 본관에게 부여된 태평양 미국 육군 최고 지휘관의 권한을 자기고 일로부터 조선 북위 38도 이남의 지역과 둥지의 주민에 대하여 군정을 설립함. 따라서 점령에 관한 조건을 아래와 같이 포고함.

제 1조 조선 북위38도 이남의 지역과 동 주민에 대한 모든 행정권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하에서 시행함.

제 2조 정부, 공공단체 또는 기타의 명예 직원과 고용인 또는 공익사업 공중 위생을 포함한 공공 사업에 종사는 직원과 고용인은 유급 무급을 불문하고 또 기타 제반 중요한 직업에 종사하는 자는 별명있을 때까지 종래의 직무에 종사하고 또한 모든 기록과 재산의 보관에 임함.

제 3조 주민은 본관 및 본관의 권한하에서 발포한 명령에 즉속히 복종할 점령군에 대하여 반항 행동을 하거나 또는 질서 보안을 교란하는 행동을 하는 자는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함.

제 4조 주민의 소유권은 이를 존중함. 주민은 본관의 별명이 있을 때까지 일상의 업무에 종사할 일.

제 5조 군정기간 중 영어를 가지고 모든 목적에 사용하는 공용어로 함. 영어와 조선어 또는 일본어간에 해석 또는 정의가 불명 또는 부동이 발생한 때는 영어를 기본으로 함.

제 6조 이후 공포하게 되는 포고, 법령, 규약, 고시, 지시 및 조례는 본관 또는 본관의 권한하에서 발포하여 주민이 이행하여야 될 사항을 명기함.

위와 같이 포고함

1945년 9월 7일
횡빈에서
태평양 미국 육군 최고 지휘관
미국육군 대장 더글러스 맥아더

【치스챠코프 대장의 포고문】

제 25 조선점령군사령관 근위대대장 치스챠코프

조선 인민들에게!

조선 인민들이여! 붉은 연합국 군대들은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구축하였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신조선 역사의 첫 페이지가 될 뿐이다. 화려한 과수원은 사람의 노력과 고려의 결과이다.

이와 같이 조선의 행복도 조선 인민이 영웅적으로 투쟁하며 꾸준히 노력해야만 달성할 수 있다. 일제의 통치하에서 살던 고통의 시일을 추억하라! 담 위에 놓인 돌멩이까지도 괴로운 노력과 피땀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가? 당신들은 누구를 위하여 일하였는가?

왜놈들은 고대광실에서 호의호식하여 조선 사람들을 멸시하며 조선의 풍속과 문화를 모욕한 것을 당신들이 잘 안다.

이러한 노예적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진저리나는 악몽과 같은 그 과거는 영원히 없어져 버렸다.

조선 사람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당신들에게 달렸다.

붉은군대는 조선 인민이 자유롭게 창작적 노력에 착수할 만한 모든 조건을 지어 주었다.

조선 인민 자체가 반드시 자기의 행복을 창조하는 자로 되어야 할 것이다. 공장 제조소및 공작소 주인들과 상업가 또는 기업가들이여! 왜놈들이 파괴한 공장과 제조소를 회복시켜라! 새 생산 기업체를 담보하여 그 기업소들의 정상적 작업을 보장함에 백방으로 원조할 것이다.

조선 노동자들이여! 노력에서의 영웅심과 창작적 노력을 발휘하라! 조선 사람의 훌륭한 민족성 중 하나인 노력에 대한 애착심을 발휘하라! 진정한 사업으로써 조선의 경제적 및 문화적 발전에 대하여 고려하는 자라야만 모국 조선의 애국자가 되며 충실한 조선 사람이 된다.

해방된 조선 인민 만세!

붉은 군대는 무슨 목적으로 조선에 왔는가?

조선 인민들이여!

세계에는 두 개의 침략국이 있었나니 그는 즉 파시스트 독일과 제국주의적 일본이 그 것이다. 이 두 국가는 남의 영토를 점령하며 다른 나라 인민들을 정복할 목적으로 연합국들을 반대하여 전쟁하였다.

붉은 군대는 영미군들과 협력하여 히틀러 독일을 영영 격멸하였으며 항복시켰다.

히틀러 독일이 격패를 당하고 항복한 이후에 일본이 전쟁 계속을 그냥 주장하는 유일한 국가이었다. 전반적 평화의 회복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소련은 일본과의 전쟁에 들어섰다.

당시의 소련 정부가 설명하였으되 ‘자기의 정책이 평화를 가까이 오게 할 수 있으며 인민들을 앞으로 있을 희생에서와 고통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다.....’라고 하였다.

이 극동에 또는 전세계에 평화를 수립하기 위하여는 죄악과 억압 불행과 전쟁의 마지막 발원지인 일본 제국주의를 박멸하여야 할 것이다.

제국주의 일본은 중국과 소련을 반대하기 위한 전쟁을 오래 전부터 준비하였다.

1910년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여 자기의 식민지로 만들었으며 소련을 반대하는 전쟁을 위한 위력한 연병장을 조선내에 만들어 놓았다.

조선 인민들이여!

소련 인민은 조선 이민이 일본한테 압제를 받는 것과 조선 인민이 일본의 예속에서 해방되도록 그에게 방조를 주어야 할 것을 기억한다.

때문에 붉은 군대는 극동에서의 전쟁의 발원지를 없이하여 자기의 국가를 일본의 위하(威嚇)로부터 위험이 없도록 하며 압박 받는 조선 인민에게 자유와 독립을 찾아 주도록그를 방조하였다. 붉은 군대는 위대한 스탈린 대원수의 영솔하에서 이 과업을 영예롭게 실행하였다.

그는 조선 지역에 들어와서 일본 침략가들을 박멸하였다. 붉은 군대의 역량과 위력은 위대하다. 그러나 이 역량과 위력은 언제든지 다른 인민들을 정복하려는 데 사용하지 않았으며 또는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소련 인민의 위대한 수령 스탈린 대원수는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

“우리에게는 구라파의 인민들과 영토에 대하여서나 혹은 아세아 인민들과 영토에 대하여 말할 것 없이 남의 영토를 점령하려거나 또는 다른 나라 인민들을 정복하려는 그런 전쟁 목적이 없으며 또 있을 수 없다” 라고 하였다.

붉은 군대는 독일한테 정복되었던 구라파 국가들을 해방시켰다.

지금은 이 여러 나라의 인민들이 자기 생활을 제손으로 건설하였다. 위대한 스탈린 대원수는 그들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목적은 그 인민들의 해방 투쟁에 있어서 그들을 방조하며 다음에는 그들이 자기 소원대로 자기 땅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스탈린의 이 말씀은 구라파 여러 나라들에게 벌써 실천되었다. 이 말씀이 조선에 있어서도 원만하게 실천되고 있다.

조선 인민들이여!

1945년 8월은 조선 인민사에 새기원의 시초로 기입될 것이다.

1945년 8월에 붉은 군대는 조선 인민을 일본 침략가들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그에게 자유와 독립을 찾아 주었다.

그래서 조선 인민은 자기 땅에서 자기 소원대로 생활을 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받았다.

조선 인민은 자유의 태양을 다시 보고 있다.

전세계 피 압박 인민들의 해방군인 붉은 군대 만세!

조선의 자유와 독립 만세!

조선 남녀들이여!

35년 동안이나 전조선은 혹독한 놈들의 주권 하에서 신음을 하였습니다.

35년 동안이나 왜놈들은 조선 인민들을 압제하였고 조선 부원(富源)을 강탈하여 갔으며 조선 사람들의 언어 문화 및 모든 생활 제도를 능욕하여 왔습니다.

조선은 35년 동안이나 눈물과 주림의 나라로 있었습니다.

자기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 조선의 애국 열사들은 수많이 죽었습니다.

오직 자기의 조국을 사랑하였으며 그의 행복을 원한다고 용감스럽고 충직한 조선 사람들을 수많이도 왜놈들이 죽여 버렸습니다.

자유와 행복에 대한 갈망과 증오스러운 왜놈들을 구축하기를 기다리던 갈망은 조선 인민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조선 사람들이여!

이 선명한 갈망은 실현되었습니다.

당신들의 위력한 인접국인 소련 인민들이 조선 인민들을 조선 인민들을 후원하려고 왔습니다.

왜놈들은 조선에서 영영 구축되었습니다.

붉은 군대의 위력은 크고도 큽니다. 그러나 그는 이 위력을 어느 때든지 다른 나라 인민들을 정복함에 이용하지 않았으며 또는 이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소비에트 인민들의 위대한 수령인 스탈린 대원수가 무엇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들어 보십시요…“우리에게는 구라파 인민들과 영토에 대하여서나 혹은 아세아의 인민들과 영토에 대하여서나 말할 것 없이 남의 영토를 점령하려거나 또는 다른 나라 인민들을 정복하려는 그런 전쟁 목적이 없으며 또 있을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붉은 군대는 독일 약탈자들을 박멸하고 그놈들이 약탈하였던 소비에트 조국의 지역을 해방시킨 것뿐만 아니라 히틀러 강도배한테 압박 받던 구라파 모든 인민들에게도 해방을 가져 왔습니다.

붉은 군대는 독일에 정복되었던 구라파의 여러 나라들을 해방시키고 지금 이 나라 인민들은 자기로서 자국 생활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스탈린 대원수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습니다………“우리의 목적은 인민들의 해방 투쟁을 도와주며 그 다음에는 그들이 자기의 땅에서 자기 소원대로 자유스럽게 생활하도록 하려는 것이 그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스탈린 대원수의 이 말씀은 지금 실현되었습니다. 스탈린 대원수의 이 말씀은 다 조선에서도 역시 실현되고 있습니다.

붉은 군대는 조선 내에 있는 모든 반일적 민주주의적 당들과 단체들의 광범한 협동의 기본 위에서 자기 민주주의적 정부를 창조함에 조선 인민들에게 보조를 줍니다.

조선 사람들이여! 기억하십시오!
당신에게는 유력하고 정직한 친우인 소련이 있습니다.
당신들의 해방 군인 붉은 군대에 백방으로 방조하십시오.
도시와 농촌에서는 안전한 생활을 계속하며 붉은 군대가 들어오기 전에 하던 그 곳에서 그대로 사업을 계속하십시오.
지방 당국에서 사회적 질서를 유지함에 백방으로 후원하십시오
조선이 자유와 독립만세!

조선의 발흥을 담보하는 조선과 소련친선 만세!

민족의 의사와는 다르게 미국의 제안에 의해 그어진 38도선. 민족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된다. 남한의 점령군으로 나타난 미군과 북한의 해방군으로 나타난 소련군…  3년간의 미소군정이 끝난 후 대한민국의 헌법에 의거 남한에서 단독정부가.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 출범한다.


오늘은 일본의 항복으로 36년간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된 지 71주년을 맞는 날입니다. 일제가 물러난 지 7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대한민국은 일제가 할퀴고 간 상처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해방은 됐지만, 우리에게 해방은 오지 않았습니다. 독립군을 토벌하던 일본군 소위 오카모도 미노루가 대통령이 되고 그 딸이 다시 대통령을 하는 나라. 민족을 배신한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들이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고 일제시대 법관이, 경찰이, 군인이 해방된나라에 그들이 다시 권리를 계승한 나라가 진정한 해방이 된 나라일까요?

해방 71주년이 된 나라에서 국책기관의 책임자가 ‘친일파의 후손’이라고 공언하면서 ‘천황 폐하 만세’를 삼창(三唱)하는 나라입니다. 돌이켜 보면 ‘해방’이라는 말은 36년간 종살이하던 우리 선조들에게는 얼마나 가슴 떨리는 말이었을까요? 2차대전에 학도병으로 혹은 강제징집으로 혹은 보국대로 정신대로 끌려갔던 수많은 백성… 만주에서 혹은 간도에서 탄광에서 혹은 이름 모르는 곳곳에 끌려가 전쟁준비로 죽지 못해 살던 노예생활에서 ‘해방’이란 얼마나 학수고대했던 말이었을까요?

처자식을 두고 나라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독립군으로 싸우다 잡혀 참혹한 고문을 당하고 혹은 죽어간 애국선열들은 얼마나 이 말을 기다렸을까요? 그런데 해방은 왔지만 우리한반도는 동족상잔으로 나라가 두동강이 나고 서로가 철천지 원수가 되어 호시탐탐 전쟁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남은 북을 북은 남을 적으로 간주해 서로를 증오하고 죽이는 훈련, 무기경쟁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구상에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미지 출처 : 경향신문>

일제에 은혜를 입은 자들이 이런 망언을 마음대로 내뱉을 수 있는 나라가 해방된 나라일까요? 식민사관의 학자들이 해방된 나라에 교수가 되어 식민지근대화론을 가르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영역에서 말과 글 그리고 문화들이 왜색이 창연한데 이를 두고 해방된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요? 태극기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태극기를 많이 달면 애국심이 우러날까요? 입법사법행정의 주요인사들이 독립기념관에 찾아가 광복 몇 주년 기념행사를 하고 학생들을 모아 글짓기를 하면 민족정기가 살아 날까요? 해방이 아니라 건국절이라며 4.19혁명을 부정한 독재자가 건국대통령으로 추앙받는 나라가 진정 해방이 된 나라일까요?  

오죽하면 92세가 된 김영관 광복군동지회장인 대통령 면전에서 ‘건국절 제정론’에 대해 “역사왜곡”이라고 비판했을까요? ‘건국절’로 하자는 일부 주장은 “역사를 외면하는 처사일 뿐 아니라 헌법에 위배되고, 실증적 사실과도 부합되지 않고, 역사의 단절을 초래할 뿐”이라고 질타했을까요?

‘내가 죽거든 국립현충원에 안장하지 말라!, 국립현충원에는 친일파들이 묻혀 있어 함께할 수 없다’

만해 한용운 선생님의 유언입니다. 대한민국 국립묘지에는 한용운 선생님을 비롯해 이런 저런 이유로 국립묘지에 묻히지 못한 독립유공자가 4,500명이 넘습니다. 친일세력이 판치는 나라, 해방 71년이 지만 대한민국에 왜천황폐하만세를 부르고 일본이 왜 침략전쟁을 성전이라며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지 알만하지 않습니까?

광복 71돌을 맞아 경기도교육청이 일제 강점기 때의 교명 바꾸기 등 학교 안 일제 잔재 청산에 나서겠다고 합니다. 황국신민을 기른다는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반세기가 지난 1995년에 가서야 겨우 ‘초등학교’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는 ‘중 동·서·남·북 방위명과 중앙·제일…’ 등과 같은 일제식 이름이 버젓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학교 조회대, 애국조회, ‘전체 차렷·경례’ 등과 같은 일제식 문화며 ‘장학사’, ‘장학관’ 과 같은 일제식 행정용어도 그대로입니다.

언제쯤이면 진정한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이 주권을 누리는 ‘대한민국’이 될 수 있을까요? 40년 가까운 교직생활에서 가르치지 못한 해방을 위해 이런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태극기를 달지 못하겠습니다. 진정한 해방이 오면 그때 태극기를 달고 해방의 기쁨을 누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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