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사이, 그리고.

2007/05/25 11:48

 

 

(위 사진은  영화  'unloved'  )

 

 

어제밤에는 나자신에게 상을 줘도 될 듯 싶어 오랜만에 디비디방을 찾았다.

 

고른 것은 ' 냉정과 열정사이'    'unloved'   그리고 '  이터널 선샤인'  이었다.

 

이터널 선샤인은 이미 봤지만 다시 보고 싶기도 했다. 

 

unloved는 나카무라 토오루 아저씨도 나오는데다가 예전부터 보려고 했던 것 이었다.

 

그러나 왠지  차가운 듯 망설이며 가슴을 삭히는 관계를 그리는 모습은 어떨까 싶어서

 

냉정과 열정사이를 보기로 했다.

 

 

.....................

 

 

영화를 보면서, 다보고서의 느낌은 영화가 ' 그냥그렇다'   라는 것이었다.

 

약간 유치하다는 느낌도 있었고,  '차가운 듯 망설이며

 

가슴을 삭히는, 그러나 잊지못하는'  그런  느낌이 잘 살아나지를 못했다.

 

그러나 몇개의 인상적인 느낌들은 있었다.

 

남자주인공 준세이는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 나는 아오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와 함께 있을 수 없어.

 

 다시 볼 수 없다고 해도 영원히 아오이만을 사랑할 거야' 

 

라고 말했다.

 

'영원히 사랑한다'  라.... 다시 볼 수 없다고 해도...

 

그걸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

 

나는 그 사람을 다시 볼 수 없을 거라고 본다.

 

물론 살다가 한 번쯤 우연히 마주칠 수는 있겠지만

 

그건 만남이 아니다.

 

서로가 끈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며 서로를 망각하지 않은 채로 재회하는 일이 없을것

 

같다는 얘기다.

 

 

 

살아가는 반경이 다른데다가, 그냥 뭐라고 딱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 어떤 모습으로든

 

' 다시만나게'  될 것 같지 않다. 

 

애인으로서는 물론이고, 친구이건, 도와주는 사이이건, 무엇이건.

 

 

 

 

나는 이제껏 소중했던 그 누구와의 인연이 단절된다고 해도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될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영원히 만나지 않게 된다고 해도 함께 있는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되는

 

사람도 있다.

 

그게 친구든 애인이든 알던 사람들이건.

 

그렇게 믿고 있는 한 그들은 내 마음속에 있었고 그래서 나는 그들과 헤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이유는 그들과의 사이에 는 추억과 정, 그리움 또는 연대감등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난 며칠간 울었던 이유는 이 사람과 이제는 끝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선후배관계도 아니고, 오랜친구사이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사상과 신념을 같이하는

 

동지라고  보기에도 애매모호한.

 

오랜만에 만난 중학교 동창한명이 토로한 괴로움은   '자신을 절대 이성으로 봐주지 않는 친구를

 

6년째 사랑한다' 라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끔찍하다고 생각하면서 일면 그녀가

 

부럽기도 한 것이었다.

 

완전  ' 친구라도 될 걸 그랬어'   란 노래가 공감 되는 것이었다.

 

 

 

 냉정과 열정사이에서 준세이의 대사를 보고서 나는 이 사람을 영원히 사랑하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라고 생각했을때 그는 물리적으로는 내 옆에 있었지만 실상은

 

마음은 이미 확신이 없었고 나는 그걸 느끼며 이미 불안했기 때문에

 

그래서 사랑을 키우기 전에 이미 그 감정이 자라지 못하게 경계했다.

 

그래서 나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이런 관계에 쓰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무엇보다 서로를 이해하고 잘 알아야 하는데

 

그도 나도 그렇지 못했다.  

 

 

 

그렇지만,  점차 드는 생각은  세상에 ' 다른 것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그 무엇' 은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 널 만나기 위해 이제까지 수많은 이별을 했나봐~'  라는 말을 사랑하는 이에게

 

하고, 그 말이 어느정도 진실일수도 있지만,  사실 난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이다.

 

 

모든 관계는 그 관계 자체로 의미가 있고, 단지 시행착오나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연습'

 

의 과정으로만 정의 할 수는 없다.

 

 

 

내가 느끼는 것은 이 사람을 잊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연습의 단계'  ,  한 순간의 ' 어렸을때의 해프닝'

 

으로 여기고 싶지 않다.

 

예전의 그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지만은 않지만, 이번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뭐라고 해야될까

 

내가 그 사람에 대해서 정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계속 간직하고 마음에 두고 싶다.

지나간 어떤 만남보다도.

 

 

 

그 정열이라는 것이,  더 같이 옆에 있으면서 '  더러운 꼴 보기전' 에 일찌감치

 

관계를 접었기 때문에 남아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계속 내가 그 사람 옆에서 그의 냉담한 태도에 더 상처받았으면 혹은

 

좀더 오래 곁에 있으며 혹시라도, 그가 내가 생각한 것만큼 진실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일이 있었다면,  정열이 그냥 언제였는지도 모르게 사그라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사실 그렇게 멋있고 따뜻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기대하는 만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그라는 사람에 대해서 사랑하고 싶은 모습과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생각하면,  그 순간에는 고통도 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환희가

 

되기도 한다.

 

또한 그에게는 부끄러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그런 마음이 든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사실,  숭고한 의지나 다짐보다 사실 더 세상을 살아가고

 

싶게끔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건 제3자의 감정적 개입이 있었다는 사실이 상기될때마다 고통스럽다고해도

 

 부인할 수는 없는 큰 원동력이다.

 

 

 

 

 

아마 나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누군가를 다시 만나고 또 지금보다 더 행복하고 깊은

 

관계를 만들게 되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가 얼마쯤 희미해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 될거다.

 

그렇지만, 어떤 장소에 가면 그 시점의 나와 그리고 함께 있었던 이를 기억하며 그때의

 

향기를 다시 음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향기는 아무리 오랜세월이 지나도, 훨씬더 행복하게 채워주는 만남을

 

한다고 해도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아마 퇴보하는 식으로 많이 변하기보다는, 더 묵묵하게 외길을 걸으며 발전해

 

나가리라고 생각하지만.

 

혹시라도  홍상수 감독 영화에서처럼 살기위해서 유치한 술수도 아무렇지 않게쓰는  평범한

 

40대로, 그는  늙어가게 될지도 모른다.

 

세상이 워낙 험하고 특히 그가 살아갈 세계가 자본의 위협이 넘실대는 세계니까.

 

그리고 그 권태로운 모습을 혹시 오랜 시간후에 보게되면, 나는 중간 필름이  끊어져서 건너뛴

 

영화를보게 되는 셈이니 그것이 내게는 괴리로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까지도 사랑하고 이해하며 함께 늙어갈 이는 다른 이일 것이다.

 

미래의 누군지 모를 그녀 는 그가 변해가는 과정속에 함꼐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비록 실상의 관계는 끝났지만

 

나는 새롭게 사랑을 시작해보려고 한다.

 

나를 인내심있는 따뜻한 인간으로 달굴 수 있는 그런 사랑을.

 

비록 그 사랑이 현재진행형속의 그가 아니라 화석속의 그에게 치우쳐있다고 할지라도

 

one-side love에 끝나버린다고 해도.

 

나는 그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변해가는 그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며.

 

아직도 그가 누군가를 잊지 못하여 혼자있는 시간에 생각하는 사람은 그녀일지라도

 

앞으로 다른 누군가를 사귀거나 사랑하게 되는 일이 생긴다고 해도

 

그건 중요하지 않다.

 

(옆에 있어서 그를 추궁하여 괴롭히거나 그로 인해 상처받거나 하는 일도 없이 서로 편하니

 

이 얼마 좋은 일인가!-.-;;)

 

 

 

 

혹자는 그런 건 사랑이 아니라 혼자의 감정에 도취되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래 맞다. 그건 사실 그 상대를 사랑한다기보다는 그렇게 사랑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이다.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실상 몇번 보지도 않고서 평생 연모하였지.

 

것보단 옆에 있어서 지지고 볶으면서 함께 뭔가 희생을 감내하는게 더 진정성있겠지

 

( 내가 그러고 싶지 않아서 안그런 게 아니다.)

 

 

 

 

그렇지만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것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있을까.

 

물론, '함께 하는 행복한사랑' 이라면 일정하게 어떤 요소를 포함해야 하겠지만.

 

까짓 단테도  베아트리체 덕분에 '신곡' 을 쓰는등 예술혼을 불태웠는데 뭘.

 

나도 예술혼 불태우면 될거야냐.

 

 

 

 

 

 

 그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가 초반부에 나에게 조심스럽게 한 말이 있다.

  

비록 그는 그 말을 지키지 못하였지만

 

내가 이제 조심스럽게 그 말을 다시하고 싶다.

 

 

' 더욱 깊어질 것 같아.'

 

 

 

 

 

 

.................   끝이라고 눈물흘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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