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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 '낫' 들고 일어설 때 무슨 변명 하려나"

작년 이맘 때 우리나라를 찾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농민운동가 조제 보베를 인터뷰하려다 거부당한 사연을 '기자의 눈'으로 쓴 적이 있다. 조제 보베는 애초 밤 늦게 예정돼 있던 인터뷰를 거부하는 대신 우리나라 농민들과 '쌀시장 개방' 문제를 놓고 토론하는 것을 택해 기다리고 있던 기자를 당혹스럽게 했다.
  
  당시 그가 인터뷰를 거부하면서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한국에 와서 농부들의 사정을 들어보니 내 얘기를 하는 것보다 그들의 얘기를 듣고 토론하는 게 훨씬 더 시급한 일로 여겨졌다. 기자를 만나는 것보다 농업의 미래를 고민하는 이들과 만나는 게 나한테는 더 중요한 일이다." 사실 이 말을 듣고 부끄럽지 않을 '한국의 기자'들이 있을까? 기자 역시 부끄러웠다. '내가 언제 이 사람보다 우리 농업을 걱정한 적이 있던가.'
  
  언론에서 사라진 농업문제
  
  농업문제가 언론에서 사라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03년 추석연휴 기간에 농민운동가 이경해 씨가 멕시코 칸쿤에서 세계화에 항거하며 목숨을 끊은 후 국내 언론이 보여준 태도는 이와 관련해 아주 시사적이다. 당시 대부분의 국내 언론은 이를 사건기사로만 간단하게 취급했지 그의 자살이 갖는 의미를 심도 있게 다루지 않았다.
  
  이것은 외국의 반응과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고인의 고향을 찾아 그의 삶과 죽음을 통해 한국 농촌의 '절망적인 현실'을 조명했고, 영국의 <가디언>은 '눈물의 들판'이라는 르포 기사를 통해 한국 농촌의 비참한 모습을 담아냈다. 개인적으로 더 인상 깊었던 것은 얼마 후 번역ㆍ출간된 <굶주리는 세계>(허남혁 옮김, 창비, 2003)의 한국어판 서문이었다.
  
  'Food First'로 널리 알려진 미국 식량과발전정책연구소에서 펴낸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은 고인에 대한 추모사로 대체됐다. "오늘 이경해 씨는 영웅이며, 국제적으로 조직화된 농민운동의 순교자이다. 그의 정신은 굶주림을 종식시키려는 전 세계의 투쟁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우리는 이 한국어판 서문을 이 투쟁에 삼가 바치고자 한다."
  
  정작 고국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고인이 밖에서는 '농민운동의 순교자'로 주목받은 현실, 바로 천덕꾸러기가 된 우리나라 농업과 농민의 실상이었다.
  
  농업을 존중하는 마음이 사라진 사회
  
  이경해 씨가 세상을 뜬 지 벌써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농업의 미래는 암울하다. 정확히 말하면 '땅의 힘'을 믿으며 살아 온 소농들(한때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였던 이들)이 뿌리째 삶의 기반을 상실하고 있다. '소농의 몰락'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속도와 사회적 무관심에서 우리와 비교할 대상이 없다.
  
  최근 '중국산 납 김치' 논란이 일면서 일부 언론에 등장한 '금치'라는 표현은 농업과 농민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이 어떤 상황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4인가족 기준으로 김치 10포기를 담그는 데 6만 여 원이 드는 걸 가지고 '금치'라고 할 때 농업과 농민에 대한 존중심은 손톱만큼도 찾아 볼 수 없다.
  
  여름 내내 땡볕 더위 아래서 고생해 많아야 몇 십만 원을 손에 쥐었을 농민들이 이런 표현을 보고 느꼈을 참담함은 짐작하기조차 힘들다. 식량 자급률이 고작 20% 대에 불과한 나라에서 또 '먹을거리' 안전에 대한 불안감이 팽배해 있는 나라에서 이토록 농업과 농민에 대한 관심이 없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새로운 길' 찾아 땅 일구는 '거대한 소수'
  
  스스로 모순과 차별을 느끼는 자가 먼저 행동한다고 했다. 대다수 지식인과 언론이 사실상 '농업'과 '농민'을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을 때 '새로운 길'을 찾는 움직임은 농업 안에서 꿈틀대고 있다.
  
  그 중에는 농약과 화학비료에 의존하는 기존의 관행 농업에 한계를 느끼며 유기농업에서 대안을 모색하려는 이들도 있고, 삶의 구석으로 쫓겨 다시 '어머니 땅의 힘'에 기대고자 귀농을 선택한 이들도 있다.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농촌에서 찾은 이들도 있고, 농업에서 삶과 문명의 대안을 찾아보려는 이들도 있다. 아직 농촌에 삶의 터전을 두지는 못했으되 먼저 실천한 이들의 뒤를 좇는 사람들도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지금은 '소수'지만 우리나라를 또 세상을 바꿀 '꿈'을 갖고 있다. '산업화'라는 리바이어던이 곳곳에서 땅을 무참히 유린할 때 그들은 묵묵히 땅을 일군다. 그리고 하나둘 땀을 흘리면서 땅을 일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의 사연을 알고 싶다고? <프레시안>에서 5개월 동안 진행된 이야기는 바로 그들의 흔적을 기록한 것이다.
  
  절망을 싣고 서울로 오는 소달구지
  
  노무현 대통령은 13일 오후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농촌사랑 도농상생 한마당'에 참석해 "농촌이 살고 농민이 성공할 수 있는 길을 반드시 찾아나가겠다"면서 "개방은 피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개방의 파고를 이겨낼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지원은 다 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노무현 대통령의 입 발린 약속에 농민들은 '감동' 대신 '절망의 소달구지'를 안겼다. 13일 해남 땅끝 마을을 출발한 '농민의 절망'을 실은 소달구지는 순천, 진주, 대구, 대전, 홍성, 과천을 지나 오는 30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리는 집회에 합류할 예정이다.
  
  이날 오전 경실련, 전교조, 환경정의 등 7개 시민ㆍ사회단체로 구성된 '우리 쌀 본부'는 "우리 쌀과 우리 밀을 지키는 일은 곧 생명을 지키는 일"이라며 "쌀 개방을 국가적 위기"로 간주했다. 이정주 본부장의 절규가 귀에 생생하다. "추수를 준비해야 할 황금빛 10월에 논으로 가야 할 농민들이 소달구지에 절망을 싣고 국토를 걷고 있다. 농업에 희망이 없으면 우리 아이들의 미래도 또 우리나라의 미래도 확신할 수 없다."
  
  농민들 낫 들고 일어설 때 지식인-언론은 뭐라 변명할 것인가?
  
  꾹 참고 있던 농민들이 낫을 들고 일어설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농업을 살리자'는 목소리를 외면한 지식인, 언론들은 김남주의 시 '낫'을 기억해야 한다.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모가지를 베어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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