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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보다

이런 선거가 있었다. 정부에서 막대한 예산을 지원해서 한쪽 후보를 편들었다. 선거자금에 대한 법적 규제도 없어서 한쪽 후보가 돈을 엄청나게 사용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돈을 써도 나중에 다 메워주기로 약속도 되어 있었다.
  
  지방자치단체장은 삭발을 하면서 한쪽 편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공무원들이 동원되어서 한쪽 후보에 대해서만 홍보를 했다. 사전 선거운동에 대한 규제도 없어서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하기 몇 달 전부터 공무원들이 한쪽에 대해서만 홍보를 하고 다녔다. 마지막에는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발언들이 난무했다. 이장들이 동원돼 부재자투표 신고를 받았고, 공개투표 시비까지 있었다.
  
  이런 선거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당연히 상식으로 판단하면 부정선거, 불공정선거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선거는 법적인 문제를 떠나 당연히 무효다.
  
  과거 자유당 시절에 부정선거가 있었지만, 민주화된 지금 시대에 최소한 이런 선거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 왔다. 그런데 경주, 군산, 영덕, 포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앞에서 이야기한 모든 일들이 어제(11월 2일) 실시된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주민투표와 관련하여 일어났던 일들이다.
  
  자유당 시절 부정선거 뺨친 주민투표
  
  기본적으로 유권자들의 투표라는 행위가 있다는 점에서 선거와 주민투표는 다를 것이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선거는 후보나 정당에 대해 투표를 하는 것이고, 주민투표는 특정 사안(정책)에 대해 찬ㆍ반을 밝히는 투표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거든 주민투표든 그것이 유권자들의 의사를 정확하게 반영하기 위해서는 공정해야 한다. 공평하게 운동을 할 수 있게 해야 하고 공정한 룰이 적용돼야 한다. 그리고 금권이나 관권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원칙이 무너지면 선거나 투표는 민주적 절차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존재가 된다.
  
  그런데 어제(11월 2일) 있었던 방폐장 주민투표에서는 그런 최소한의 원칙이 무시됐다. 지자체의 예산이 찬성하는 쪽에만 지원되었다. 투표운동 자금에 대한 규제도 없어서 찬성하는 쪽에서는 지자체로부터 지원받은 돈을 마음대로 써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찬성률이 가장 높았다는 경주의 시장은 삭발 하면서 찬성을 호소했다.
  
  찬성률을 높이기 위해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말단 행정조직인 이장, 통ㆍ반장들이 동원됐다. 그 결과 부재자투표 신고율이 정상적인 선거보다 20배가 넘게 나왔다. 이번에 찬성률이 가장 높았던 경주의 경우 최종 투표율이 70.78%였다. 그런데 그 중 부재자 투표 신고율은 38.1%였다. 그런데 지난 10월 26일 치러진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부재자 투표 신고율은 1.6%에 불과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런 사상 초유의 부재자 투표율은 강력한 관권개입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부재자 투표에 대해서는 이미 상당수가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신고를 한 것으로 드러났고, 심지어 공개투표를 했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문제점을 안고 있는 주민투표에 대해 반대하는 주민들이나 환경ㆍ사회단체가 효력을 인정할 리 만무하다. 부정선거가 치러진 이후에 '그래도 선거를 했으니 무조건 따르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깨어 있는 시민이라면 당연히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민들의 저항에 의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발전해 왔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고준위 방폐장은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
  
  이런 문제가 발생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이번 주민투표는 정부가 그동안 굴업도, 안면도, 부안에서 방폐장 추진에 실패한 이후 새롭게 '유치지역 지원 특별법'을 제정하고 중ㆍ저준위 방폐장과 고준위(사용 후 핵연료 등) 방폐장을 분리하기로 한 이후에 치러진 것이다.
  
  그 이전과 바뀐 것은 '3000억 원+알파(α)'의 지원금과 한국수력원자력(주) 본사 이전이라는 혜택이 주어지고 위험도가 비교할 수 없이 높은 고준위 폐기물은 안 들어오고 중ㆍ저준위 폐기물만 들어온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당근을 키우고 고준위 폐기물은 들여오지 않음으로써 주민들의 저항감을 줄이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선 의문이 제기된다. 과연 고준위 폐기물 처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그 부지 선정은 어떻게 할 것인가? 중ㆍ저준위 폐기물에 3000억 원을 지원했다면 고준위 폐기물 처분장 부지에는 3000억 원의 10배, 100배를 지원할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 정부는 아무런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미뤄 두었을 뿐이다.
  
  사실 방사성 폐기물의 핵심은 고준위 폐기물이다. 고준위 폐기물은 1만 년이 지나도 위험하다는 폐기물이다. 현재 법률로써 중ㆍ저준위 방폐장에는 고준위 폐기물을 처분하지 않기로 했지만 사실 법률은 국회의원 과반수로 언제든지 개정이 가능하다. 고준위 방폐장에 대한 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중ㆍ저준위 방폐장 부지만 선정한 것은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밖에 없다.
  
  방사성폐기물 정책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안전성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정책의 기본방향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고 독립적 기구가 추진하고 관리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방사성 폐기물 관리법이 국회에 의원 발의돼 있지만 제대로 심의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그런 기본적인 틀도 없는 상태에서 정부는 돈과 관권으로 부지부터 선정하려고 하고 있다.
  
  한국 민주주의 현주소 보여준 방폐장 주민투표
  
  한편 이번 일로 주민투표 제도 자체의 문제점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우선 중앙정부가 국책사업에 대해 주민투표를 요구할 수 있게 한 조항은 폐지되어야 한다. 정부가 주민투표를 임의대로 실시할 수 있으면 주민투표는 정부정책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정부가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시점을 정해서 여론을 호도하고 자금도 뿌리고 관권도 동원해서 지역 민심을 유도한 후에 투표를 실시하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주민투표법에서 금권이나 관권 개입을 무제한 허용하고 있는 부분도 전면 보완되어야 한다. 현재 일반 선거에 적용되는 선거법상으로는 이장, 통ㆍ반장, 관변단체와 같이 관의 영향력 내에 있는 사람들은 선거운동을 못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주민투표법상으로는 이장, 통ㆍ반장, 관변단체 등이 찬반 운동을 하는 것이 허용되어 있다.
  
  또한 사전투표 운동에 대한 규제가 약하다보니 주민투표를 발의하기 전에는 공무원이 총동원돼 찬성 쪽만 홍보하고 다녀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선거법상으로는 선거자금에 대한 규제가 있는데 주민투표법에는 아무런 규제가 없다. 돈을 펑펑 써도 아무 문제가 안 된다. 그러다보니 경주시는 무려 15억 원을 예산편성해서 찬성운동에 사용하고, 찬성단체를 지원했다. 중립성, 공정성은 완전히 상실된 것이다. 따라서 주민투표에서 찬ㆍ반 양측이 사용하는 자금도 규제를 해야 하고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는 일체 자금지원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법 자체도 문제지만 법을 집행하는 기관들은 더 문제였다. 주민투표법상 공무원의 투표운동이 금지되어 있는데도 신분이 공무원인 경주시장은 삭발까지 하면서 찬성을 유도했다. 그렇지만 선거관리위원회는 직무를 방기했다. 부재자투표에서 엄청난 문제가 드러나도 선관위는 개별적인 확인 작업에 소극적이었다.
  
  결과적으로 방폐장 주민투표는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보여주었다. 관이 개입하고 주도해서 투표라는 형식으로만 포장하는 이런 방식의 주민투표는 풀뿌리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다. 다른 사안에 대해서도 이런 식의 주민투표가 실시될 수 있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그리고 '여론을 호도하고 돈과 조직을 동원해서 밀어붙이면 된다'라는 발상이 통용되게 한 노무현 정부는 한국 민주주의의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하승수/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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