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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12/27
    달려라, 아비 / 김애란(4)
    ninita
  2. 2005/12/22
    카스테라 / 박민규
    ninita
  3. 2005/12/22
    나의 미카엘 / 아모스 오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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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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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티 오브 갓 /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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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5/12/17
    새학기 증후군 + 양구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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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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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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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5/12/09
    거북이도 난다 / 바흐만 고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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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5/12/06
    fucking amal / lukas moodyso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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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 김애란

'진담의 세계이며, 凡人들의 세계에다가, 오해의 세계이기까지' 한 이 곳에 대한 명랑우울한 해석과 무한한 상상.

 

예전에 소설가란 세상의 환부를 잘 드러내는 사람들이란 생각을 했었다. 그 환부를 고치는 방법을 일러주기보다는, 이것 봐라, 이만큼 곪아터진 게 네가 발붙인 공간이다, 얼마간은 무책임하게, 얼마간은 답답하게, 체념한 듯.

 

그 때 난 어렸고, 소설가들은 어른이었다. 어른들은 그렇게 무책임하고 답답한 존재들이었다. 이제 난 어설픈 어른이 되었고, 나어린 80년생 소설가의 첫소설집을 들고 피식피식 웃고 있다.

 

쉴새없이 재재거리며 삶의 틈새를 부지런히 비집고 나오는 엉뚱한 환상이 즐겁다....... 이미지가 좀더 잡히는 이것은 소설이다. 엇비슷한 문화경험을 전면에 드러내니 그또한 정답다..... 이것은 추체험이다. 부모는 더이상 무겁고 크고 완벽한 존재라기 보다는, 회상 속에서도 현재도 불완전하게 나이 먹은 아이일 뿐이다. 화자가 10대이건 20대이건 그건 중요치 않다. 아비의 부재가 굳이 슬픈 트라우마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슬퍼하지 못 하게 한다. 슬퍼할라치면 차라리 웃기고 만다. 아비의 존재는 거추장스럽지만 그를 바라보는 눈이 냉정하지만은 않다. 차갑다가도 따뜻해지고 그러다가 우울하고. 이래저래, 맘에 드는 구석을 많이 발견했다. 시나리오를 읽듯 중성적이고 비교적 간명한 문장까지.

 

안녕하세요. 가늠할 수 없는 안부들을 여쭙니다. 잘 지내시는지요. 안녕 하고 물으면, 안녕 하고 대답하는 인사 뒤의 소소한 걱정들과 다시 안녕 하고 돌아선 뒤 묻지 못하는 안부 너머에 있는 안부들까지 모두, 안녕하시길 바랍니다. (p.180)

 

상처는 이내 꿈이 된다. 김애란의 세계에서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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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 / 박민규

= 아무튼 어디선가 와서 어디론가 가는 건데, 왜 사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한다는 건 참, 하하, 묘한 설정인 거 같아요. 그래서 저는, 그냥 살아요. 잘살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고. 내가 잘살면 다른 누군가가 못살 것이라는 느낌도 들어요.

 

- 이 세계에서 고통의 총량은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의미인가요?

 

= 예. 그래서 지금은 막연하게 특별히 아무것 안하고 그냥 있다가 가고 싶어요.

 

(씨네 21 김혜리 기자와 박민규 작가의 인터뷰 중에서)

 

막연하게, 특별히, 아무것 안하고, 가 그까이꺼 대충은 아닐 테지만, 나는 이미 보아뱀의 뱃속에 들어간 코끼리처럼, 그냥, 숨만 쉴래.

 

후후하하. 세 번쯤 웃었고, 총 열 편 가운데 세 편쯤 좋았다 - 작가는 대책없이 톡톡 튀어올랐지만 그의 대책없음에는 세상에 대한 나름의 통찰과 세상살이에 대한 연민이 있어 좋았다 - 유쾌한 모든 구절들을 뒤로 하고 갑을고시원 체류기의 마지막을 인용해 보자, 그럼 이해가 갈테니.

 

어쨌거나

그 특이한 이름의 고시원이

아직도 그 곳에 있었으면 좋겠다.

이 거대한 밀실 속에서

혹시 실패를 겪거나

쓰러지더라도

또 아무리 가진 것이 없어도

그 모두가 돌아와 잠들 수 있도록.

 

그것이 비록

웅크린 채라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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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카엘 / 아모스 오즈

'나의 미카엘'은 적요한 소설이었다 - 사랑하는 이에게서 낯설음을 느끼고도 결혼한 어떤 여자의 10년은, 온몸의 수분이 다 빠져나간 듯 퍼석거렸다 - 따뜻하고 예쁜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 잊는 것은 곧 죽는 거라고 생각했던 여자는, 하나씩 잊어가기 시작했다 - 

 

이 얘기도 기록해 두어야겠다.

미카엘과 내가 침대덮개를 털기 위해 마당으로 가고 있다. 잠시 후에 움직임을 맞춰서 함께 흔들어낸다. 먼지가 일어난다.

그러고는 침대덮개를 접는다. 미카엘이 갑자기 나를 안겠다고 생각한 것처럼 팔을 쭉 뻗은 채로 내 쪽으로 온다. 그가 쥐고 있는 두 귀퉁이를 내민다. 그는 뒷걸음질쳐서 새 귀퉁이를 다시 잡는다. 내게로 온다. 내민다. 뒷걸음질친다. 잡는다. 내게로 온다. 내민다.

 

- 됐어요, 미카엘. 다 끝났어요

- 그래, 한나

- 고마워요 미카엘

-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한나. 침대덮개는 우리 둘 다 쓰는 거잖아.

 

마당에 어둠이 내려앉는다. 저녁. 첫 별들. 희미하고 멀리서 들리는 울부짖음 - 비명을 지르는 여자 혹은 라디오의 소리. 춥다.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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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마 축구단 / 대니얼 고든

 

이 자료사진만 하더라도 몇 컷으로 나뉘어 북한팀과 상대팀의 명암을 드러내는데 위트있게 쓰였다. 인터뷰 내용과 적절하게 매칭되는 자료화면과 나레이션의 리듬이 전체적으로 영화를 살리고 있었고.. (문장으로 보면 참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는데, 어렵지..)



별다른 주장 따윈 담겨있지 않은 이 작품에 대해서.... 감독이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것이라고도, 외부자의 시선의 한계라고도 볼 수 있을 듯하다. 소재가 그러했을 수도 있고.. 이 작품은, 굳이 북한이 아니었다 해도 어떤 보편적으로 공감할 만한 주제를 가지고 있다. 정치적인 어떤 시대의 공기가 이성을 흐릴 때, 그로 인한 무지는 편견과 공포를 조장하기 마련.. 북한팀에 대한 초기 영국 언론의 반응은 그러한 것이었다. 외무성의 입장은 그것대로 냉전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고. 편견으로 덧칠된 미지의 북한팀이 미들스버러 시민들의 '홈팀'이 되고, 리버풀에서도 환대를 받는 동안, 편견은 탈색되고 그들 사이를 흐른 건 '우정의 노래'였다. 그렇게 전개되는 이야기의 흐름만으로도 그저 따뜻하게 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인 셈. 하지만 그들 사이에 생겨난 '우정'과 몇십 년이 지나 미소지으며 회상할 수 있는 따뜻한 '기억'은, 축구선수와 축구팬 사이의 인간적인-감성적인 무엇이지 체제에 대한 이해나 공존을 보장하기 위한 길로 나아갈 만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흥미롭고 재미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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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 오브 갓 /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1.

신이 떠난 신의 도시에는 생존을 위해 폭력을 내면화 해야 했던 신의 아이들이 있었다. 이 빈민가는 순진하고 어리숙한 시절을 거쳐 점차 스스로의 시스템을 만들어갔고, 이유가 있었던 아이들은 어느 덧 이유를 잃어버린 채 폭력 그 자체로 성장한다.

 

 

 



창백하게 빛나는 마천루가 바로 코앞에 들어선 후에도,

단층 짜리 누런 흙집의 미로 속에 아이들은, 여전히, 맨발로,

더러운 진창을 뛰어다닌다. 한 손에는 총을 든 채로.

 

 

2.

간만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본 영화다. 감각적인 촬영과 편집은 물론이고, 30년에 걸친 대서사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이야기를 구성해 내는데 그 많은 캐릭터가 저마다 생생하게 살아 있다. 공간의 매력, 인물의 매력, 적당한 유머와 적당한 음악.

 

이 영화의 스타일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고 한다. 감각적이다 못해 자극적이니까 그럴 만도 하다. 삶이 곧 죽음의 수렁인 이들의 현실을 그런 방식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냈을 때, 폭력은 단지 하나의 이미지적 쾌락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 열광한 것은 아닌가. 나는 그 중의 하나일 뿐인가.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그러한 위험요소를 다분히 포함하고 있지만, 아주 교묘하게 혹은 위태롭게 피해가고 있는 듯하다. 내부자이면서 외부로의 탈출을 간절히 꿈꾸는 소년의 입을 빌어 슬럼가의 생리를 성실하게 살피며, 그 역사를 섬세한 결까지 놓치지 않고 드러낸 점이 유효했던 것 같다.

 

3.

"문제를 아는 것과 그에 대한 감정이입이 해결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하는 페르난도 메어렐레스 감독의 지론에 나도 동의하는 편이다. 그러나 말그대로 이는 '첫걸음'일 뿐 부족하고 부족하다. 스타일도 마찬가지. 이것은 아직 여물지 않은 나의 고민.

 

4.

브라질 최대의 슬럼가라는 시티 오브 갓은, 60년대 초반 도시 빈민과 이주자들을 시야에서 없애기 위해 조성한 '계획' 빈민도시라고 한다. 영화에서 보여진 파국보다도 현실은 더욱 열악하다고 한다. 슬퍼졌다. 빼앗긴 자들은 극악한 자들로 변해 갔고, 그들을 그렇게 만든 자들은 원색의 삶을 즐기고 있다. 그 누군가의 안위를 위해 인간성마저 저당잡힌 이들은 서로를 죽이며 빈민가의 어두운 골목을 맴돌고 있을 뿐이라니.

 

5.

혁명이 일어나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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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학기 증후군 + 양구 여행

나에겐 새학기 증후군이 있다. 이제 대학을 졸업한 지도 몇 년이나 지났으니 새해 증후군이라고 고쳐 말해야 할까. 방학이 끝날 때마다 겪던 증상이지만, 이젠 세밑마다 겪으니 그리 말하는 게 옳겠다. 주요 증상은, 며칠 간은 잘 지내온 지난 날마저도 후회하며 우울해 하다가, 다음 며칠 간은 조금 붕 뜬 상태에서 빙싯거리며 잠 못 들 정도로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이요, 주요 행동양태는 조증일 때마다 근거없는 기대감에 부풀어 실행하지도 못할 계획들을 주~~~~~욱 늘어놓느라 컴퓨터 자판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이다.

 

한 이틀 새 우울함에 흐느적댔는데.. 오늘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하고픈 일들이 떠올라 결국 1시간 전에 껐던 불을 켜고 말다니, 영락없는 새해 증후군이다.

 

종종 찾아가는 꼬주 아저씨의 블로그를 보니 '과다의욕-의욕상실-과대망상-극도좌절'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간단다. 난 며칠 간격으로 몇 주간 지속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망상기와 좌절기에는 늘 허기가 진다. 한 3일 전부터 김치볶음밥을 2인분 씩 해 놓고, 끼니당 1인분 반씩 먹어치우고 있다. 그러니까 한 끼니에 1인 분 반을 먹고 반을 남겨두고, 다음 끼니에 양이 모자라 2인분을 다시 하고 1인분을 남기는 식이다. 무식하다.

 

잠도 안 오고, 일어난 김에 양구 여행 사진이나.. 지난 주에는 양구에 다녀왔다. 목적은



수동 카메라 시험만 하다 왔다. (멀찍이 앉아 있는 박수근 선생.)


 

 

미술관은 건물부터가 예술이다. 아래쪽에 창을 낸 센스. 회랑 가운데엔 커다란 유리를 해 달아 바깥 풍경을 볼 수가 있다. 잠수함에 들어온 느낌 같이.


 

소박한 양구군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박수근 미술관은, 시골풍경-강원도 사투리 쓰는 아주머니 직원-시종일관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처럼 뭔가 어울리지 않는, 생뚱맞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미술관 내 공간들만큼은 너무 멋지고 맘에 들어서 추운 날씨에도 방방대며 뛰어다녔다.


 

친구의 자동플래시가 터지는 바람에 옷이 하얗게 날아서 기괴한 사진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더 좋은.


 

이 사진의 포인트는 보일락말락한 저 달이다. 파란 하늘과 하얀 달점. 안녕, 벌써 그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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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꿈이 늘었다.

 

꿈 속에선 늘 바다가 무섭다.

언제 머리 끝까지 집어삼킬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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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태양 / 정재은

'비겁한 게 나빠?'

 

상업영화는 보통 90분에서 120분 사이의 러닝타임을 가진다. 그 중에 뇌리에 와서 콱 박히는 장면은 60분을 넘어야 하나 건질까말까 한다. 그 60분이 지루하지 않은 영화도 있겠으나, 대개는 첫 20분을 넘기지 못 하고 지루해진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첫 70분 정도를 정말 견디기 어렵다. 연기와 내러티브 모두 어설프므로. 그러나 삐걱거리면서도 인물을 구축하고 이야기를 구축해 나간다. 그렇게 감독이 밀고 나간대로 견디다 보면 어느 순간 팟! 하고 터지는 순간을 만난다. 그리고 그 만남 덕에 '한 번의 성공을 위해 수백번 넘어지는 친구들에게 바칩니다'라는 한 줄 뒤에 나오는 영화 메이킹이며 스케이터들의 자빠지고 엎어지고 고통을 참느라 말도 못 하는 장면 하나하나가 짠한 감동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청춘은 그랬다. 책임감을 있는대로 짊어지고서 비틀거리는 축이나 막무가내 자유로운 영혼인 듯 보이는 축이나 같은 방황 속에 헤맸다. 영 시시하게 살고 있는 나나, 화려한 너나, 아직 제 갈 길 못 찾고 비리비리하는 그 애나, 빛나건 그늘 속에 있건 승자가 어딨고 패자가 어딨을까.

 

자신도 없고 고집도 없고 지구력도 없고.

그래서 결국 '비겁한 게 나빠?'라고 시시하게 한 마디 던진다.

그냥 대충 해.. 재미없다..

 

더이상은 '정재은 감독이' 어쩌구 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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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도 난다 / 바흐만 고바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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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cking amal / lukas moodyson

 

이 귀여운 아이가 왕따라니. 아그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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