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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 - 야딩(15 - 꽁링쓰) - 길위에서 길을

044 - 야딩(15 - 꽁링스 貢岺寺) - 길위에서 길을

 

샹그릴라 향에 이르기 전에 검문소가 있었다.

이제는 머리를 숙일 필요가 없었다. 야딩 입장권을 보여주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만약 야딩 입장권이 없었다면 아마도 입장권(150위안)에 준하는 벌금을 물었을 것이다.

아마 그 벌금도 흥정이 가능 할지도 모르겠다.

 

 

샹그릴라 표지판 - 한글이 선명하다.

 

샹그릴라는 윈난의 쫑티엔이 있고 따오청의 옛 르와춘(日瓦村)이 이제는

샹그릴라향으로 바뀌었다.  명칭가지고 윈난과 사천 당국간에 논란도 있었다 한다.

 

하지만 어디 샹그릴라가 한 두구데 일까? 전혀 없을 수도 있구,

 

중국 여행을 하면서 유명하다는 관광지에는 많은 곳에 한국어 안내표지가 있다.

어지간히도 한국인이 많이 왔다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 일본어나 한국어는 두 나라밖에 사용안하는데도 두 나라의 관광객이

외국인 관광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서양의 대부분 나라는 영어를 사용 할 줄 아니,,,,

 

르와춘의 마을 풍경 - 어딘가 좀 어수선 하다.

 

 

 

 

르와춘은 여기저기서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것도 대규모로,

기사 왈  선전인지 상해인지(지금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의 사장 세명이 합작으로

대규모 호텔을 짓는다고 한다.

 

아마도 야딩도 곧 쓰촨의 주자거우(구채구)처럼 국민관광단지가 되려나 보다.

제발 개발하는 것도 좋은데

1. 자연경관을 해치지 말 것

2. 지역 주민의 삶에 보탬이 될 것

3. 지역 문화가 지켤 질 것

그래도 덜 훼손되기 전에 다녀온 여행자의 바램이다.

 

20여분을 달려 꽁링쓰가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운전기사는 이 곳이 자기 고향이란다.  현재 어머니가 살고 있다고 한다.

집에도 들릴겸 이전부터 약간문제가 있어보이는 차도 손볼겸 들렸다 가잔다.

불감청 고소원이다.

 

각자 산책하는 기분으로 마을 주변을 돌아보며 꽁링스에 갔다.

 

 

꽁링쓰는 황교사찰(게룩파)로 1170년에 지어졌다.

입구에 입장권 파는 곳이 있지만 먼지만 가득 쌓인지 오래였다.

 

 

 

 

절안은 한산 했다.

 

난 밖으로 나와 절 주위를 한바퀴 돌았다. 으례 라마불교사원에는 코라를 돌 수 있겠끔 길이 있다.

그런데 데이비드와 중국인 친구는 그냥 돌아갔나보다.

 

 

절 뒤편에 있는 백탑과 마니석 무더기

 

젊은이 한무리가 놀고 있었다.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갈것인지 뭐하며 노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노는 것은 분명했다. 자기들끼리 웃고 떠든다.

 

 

멀리 오래된 나무다리와 몇채의 집이 보였는데 그 규모가 비교적 크고 정갈했다.

 

 

강가에는 야크떼가 강을 건너려 하고 있었다.

 

 

리더로 보이는 야크 한마리가 강을 건너고 그것을 다른 야크들이 지켜보고 있다. 

무리를 이끄는 리더는 스스로 길을 개척해야만 한다.

 

 

세월에 무너진 담장이 손보지 않고 방치되있기도 했다.

 

 

당나귀인지 말인지 모르겠다.

 

마치 모델처럼 포즈를 취한다.

코라를 돌던 한 티벳 청년이 사진을 보자고 한다.

사진을 보더니 멋있다고 한다. 말이,,ㅎㅎㅎ

 

코라를 다 돌았을 무렵 전화가 왔다.

이제 떠난다고 한다.

 

가다가 한 사람을 태웠다.

오랜 노동으로 지친 농부였다. 야크를 키운다고 한다.

 

한참을 달려 자기집에 다 왔다고 내린다.

이곳은 6월이 되면 두견화(진달래꽃)가 장관이란다. 그때 꼭 와보란다.

기회가 되면 다시 오겠다고 했지만 그런 기회가 다시 올지는 모르겠다.

 

우리도 용변을 보기 위해 내렸다.

농부가 도착한지를 알았는지 저 멀리 집에서 가족들이 반기러 나왔다.

 

어릴쩍 할아버지는 5일장이 설때마다 장에 가시곤 했다.

꼭 물건을 사고자 함이 아니라 정해진 일과 비슷한 거였다.

그 때마다 술이 거나해서 돌아오시곤 했다.

때론 저녁이 되어도 돌아오시지 않으면 몇군데 길을 나누어서

아버지와 고모들이 마중을 나가곤 하였다.

 

주전부리 할 꺼리가 많지 않았던 시절,

나는 할아버지가 다른 건 몰라도 반드시 사가지고 오던 밥풀과자를 기다리다 잠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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