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생각하고 메모하고 글을 쓰다

2016/02/03

선언적인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선언이 필요하고 의미있는 지점.

어떤 문제를 우리가 먼저 문제지점을 파악해내고 문제인 것 자체를 선언하는 것 자체도 의미는 있지. 

하지만 그렇게 문제가 해결되어지지는 않는다. 

꼰대들의 서사도 알아야 하는데, 

왜라는 걸 어떻게 파악해야 하나. 선언하고 선긋는 것도 전선을 긋는 건 필요하지. 왜의 디테일이 필요하다. 해결을 해야 하니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젊음이 주는 느낌

젊음의 느낌. 젊음이 주는 반짝임이 있다는 생각을 처음 해봤다.

이번에 DB들으면서 느낀 그 거칠고, 반짝반짝임

악틱 초기랑 립스에서 느껴지던 그 느낌.

나는 나이가 어린데 반짝임을 가지나?

나이는 어린데 반짝임이 너무 부족한 거 아닌가?

전복과 위반의 반짝임

치기, 패기, 뭐 그런 거?

 

우리를 보고 인문학강좌를 요청할 것 같지 않음. 어리잖아. 너무. 인권 교육이라면 될 것 같은데 왠지 좀 그래.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5/10/23 책언니 메모

2015년 10월 23일 · 서울 · 

오랜만에 다녀온 자람의 메모ㅡ 글쓸때 참고해야지

2주만에 만난 책언니 애들이 나에게 "니가 오늘 오니까 남겨왔어~(사실은 자기가 이 빵을 싫어한다며 웃었지만 나를 생각해 챙겨준 건 맞았다.)"빵도 주고, 보고싶었다고도 해주고, 막 애정을 줬다. 실컷 놀고 왔다ㅡ 어른들만 보다 오랜만에 열살의 인간을 보니 새삼 참 작고 어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신기하고 예뻤다. (이러다 공격하고 괴롭히면 금새 이 맘을 잊겠지? 일희일비의 문제다) 커피믹스를 몰래 타서 방안으로 들고와 금기를 넘는 짜릿함을 만끽하는 표정으로 커피를 홀짝이며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너무 쓰다고 인상쓰는 사람, 키득키득 웃음을 못 참는 사람, 이런게 커피의 맛이지.. 하며 좀 마셔본, 인생의 비밀을 말하듯 하는 사람ㅡ ㅋㅋㅋ 

나에게 병아리야 병아리야 하며 놀아달라 잡아끄는 그들의 동생인 여덟살은 더 작다. 칠판에 누군가 적어둔 너는 돼지야 라는 말에 까르르 까르르 웃는다. 늘 심심하다고 놀아달라며 책언니가 진행되는 방 바깥으로 나올때마다 나에게 안기고 말을 거는 이들에게 미안하다 엉엉

늘 우리 책언니를 함께 하는 구성원은 우리를 홀대하듯 괴롭히다가도 바깥의 이들이 끼고 싶어하고 부러워할때는 자랑스러워 했다. 모임에 함께하지 않고 바깥에서 보는 사람들은 우리를 좋아했으며(!) 그들이 보이는 관심에 구성원들은 경계하며 강하게 내쫓곤 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5년, 집회에 대한 메모

1차 민중 총궐기


2015년 11월 14일 · 서울 · 

너무 많이 다치고 잡혀갔고 나는 집에 간다. 이게 뭔가

 

2015년 11월 14일 · 서울 · 

잘 모르겠다ㅡ 이제 집회에 오고 나면 늘 속이 너무 쓰리다

 

2015년 11월 15일 · 서울 · 

계속 화가 난다ㅡ

이 안전한 집이, 그 살벌하던 거리가 가진 거리만큼의

전화를 받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함께 있게 된 나래와 둘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우리를 위한 게 아닌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잘 하자며ㅡ 잠이 오질 않는다

 

2차 민중총궐기

 

2015년 12월 6일 · 서울 ·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마냥 

경찰이 허가한 집회를 하고 왔다. 

완전 재롱을 떨고 온 기분이다. 우리 이러케 법 잘지키지! 완전 준법하다구~ 

대체 집회는 무엇이고, 그 준법/평화시위에 왜 우리는 목을 메게 되었고, 공기의 글처럼 평화란 무엇이냔 말이다. 짜증난다. 저들이 원하는 평화와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가 다르지 않나.

이것 보시오 우리는 이토록 준법시위를 잘 마무리했습니다가 마치 어제의 슬로건이자 미션컴플리트!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병원 앞에서 마무리 집회를 할 때, 덜덜 떨던 덕분에 몸살만 났다. 백남기씨 가족의 발언과 술마시는 사람들과 병원 앞의 밤중 집회는 괜찮은걸까 하는 의구심과. 이러는 건 내가 운동적이지 못한 건가 싶음과.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였다면 그걸로 된건가 싶음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5/06/23 데이트 폭력에 대한 메모

2015. 12. 3 페이스북에 올렸음.

원고를 쓰며 메모장을 뒤적거리니 이런 게 나왔다. 데이트 폭력에 대한 논의가 한참 이뤄질 때 수수글을 보고 혼자 끄적거리고 차마 못 올리고 메모장에 고이 넣어뒀던 것 같다.


2015. 6. 23

"그 때의 나는 어렸고,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옴짝달싹 할 수 없게 좁은 곳에 갇힌 기분이었다. 데이트 성폭력이라는 말 조차 알지 못했고, 그 상황을 확실하게 정리하지 못한 채로 2년을 어영부영 보냈다. 

당시 너무 확연한 폭력의 상황을 겪고도 사실은 나의 잘못이 더 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라면 절대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줄 거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혹여나 내가 잘못했기 때문인 거면 다시 나의 문제로 돌아올 상황이 무서웠다. 내가 어리다는 사실도 어린게 벌써 발랑까져서라는 말로 돌아올 나의 약점인 것만 같았다. 동시에 이중적으로는 그 사람들이 성폭력의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여줄지를 알았기에 나 때문에 가해자가 사회적으로 매장될까봐 하는 마음에 그 사람을 보호하려고 했던 내 결정이 두고두고 후회스러웠다. 

그 후 어느 순간 나와 너무 근접한 곳에서 그가 지내기 시작했고, 나의 친구들이 이미 있는 그 공간이었기에 그사람과 아는 사람들을 마주치게 됐다. 심지어는 같은 이에게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도 만났다. 그 때마다 술을 마셨다. 분노와 두려움과 내가 잘 대응하지 못해 다른 피해자를 만들었다는 죄책감과 그 사람이 내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화. 그 후로 하자와 관련된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들을 늘 꺼려왔다. 혹여나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게 될까봐. 용기 내 그 사람과 친하게 지내게 된 나의 '남성'인 친구에게 그 사실을 고백했을 때는 더 이상 그렇게 연결되어 그 사람이 내 눈앞에 보이지 않길 바래서였다. 하지만 대답은 미지근했고, 참 별로였다.

 

이제는 7년이 넘은 이야기이며,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내자신을 더 이상 탓하지 않게 되었다. 이겨냈다고 생각하지만 마음 속에서 사라지진 못한다. 그토록 마주치고 싶지 않던 사람이 6년이 지난 시점에 뜬금없이 우리집 지하실에서 그 사람이 나와 나를 스쳐갔을 때, 더 이상 그 사람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지만 너무나 화가 났다. 왜 쟤는 죽지 않고 아직도 내 근처에 존재하는가. 나는 그 후로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 속에서 잘 살아왔지만, 그는 절대로 잘 살지 않길 바랬었다. 좋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애정과 관심을 받으며 사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는 마음이 있었다는 걸 확인했다.

가해자를 단순히 개새끼로 만들고 끝나게 되는 것이나 개인에 대한 처벌로 끝내는 방식이 아닌 재발을 막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른 노력들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 해왔지만, 그 후로 제 3자의 입장에서 내가 아는 두 사람간의 성폭력 사건을 맞닥뜨리게 됐을 때, 나는 화를 냈다. 제 3자의 일로 만들지 못하고 화를 냈다. 어쩌면 그 사람 대신 화풀이를 했던 기분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피해자로서의 분노와 사람을 내치기만 하는 것이 아닌 방식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마음, '성폭력'에 대한 총체적 접근 같이 복잡한 머릿속은 아직 정리되지 못했다. 최근 시작된 사람들의 폭로는 어른스러웠다. 나는 여전히 어른스럽지 못하다. 나는 아직도 성폭력 사건이 두렵다.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겠어서 더욱 두렵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삶의 비참함을 외면하는 학문은 얼마나 무기력한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출처 - <서늘한여름밤의 내가 느낀 심리학 썰> 페이스북 페이지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라온 글을 보고 괜히 맘이 복잡해져서 말이 많아졌다. 원문은 요기에서 볼 수 있다.)

 

"삶의 비참함을 외면하는 학문은 얼마나 무기력한가"
(임상심리와는 전혀 다르다고 했던 것 같지만) 어렸을 때부터 정신분석이 배우고 싶었다. 우선 재밌어보이니까!_! 사람을 읽는 작업이었고, 세상과 내 맘이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 가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처음 꿈 상징과 해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너무 충격을 받았다. 무의식 그거 대체 뭐야! 하는 느낌이랄까. 애초에 꿈을 (흔히 말하는 응축, 치환 이딴 게 전혀 없이)곧이 곧대로 꾸는 나는 내 속을 잘 아는 편이었다. 아, 난 뭐가 힘들구나. 이걸 배우고 싶던 이유는, 세상의 입김에서 내가 전-혀 자유롭지 않다는 걸 확실하게 설명해버려서. 세상을 설명하고, 내 삶을 설명하고, 사람을 설명해주는 것들에 늘 혹했다. 특히나 이건 나를,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랬다.

상담이 기만적이라고 느꼈던 순간은, 그 삶의 조건을 별개로 치부하고 상담을 통한 치료가 가능할까에 대한 의문때문이었다. 삶의 조건이 변하지 않는 상황에서 사람이 변한다는 게 개인의 노오오력일테고, 삶의 조건을 보지 않고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게 가능한 이야기일까.

어제 술을 마시다 뷰티인사이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사실 보진 않았지만) 외형이 아무리 바뀌어도 사람의 본질이 있고 어쩌고의 설정이 너무 구리다는 이야기였다. 어제는 술먹고 담배피다 오늘은 과자에 우유마시고, 어제는 생리하고 오늘은 몽정하는 인간이 대체 어떻게 제정신일 수 있냐는 말인가. (그래 영화니까, 뭐 넓은 아량을 발휘한다 해도) 옆사람이 그 사람을 계속 사랑하는 건 둘째 치고, 본인이 제정신일 수가 있을까. 나를 둘러싼 세상의 시선과 내가 처한 사회적 조건이 계속해서 달라지는데 그에 따른 내 움직임이나 사고나 태도가 일정할 수 있다고? 인간을 구성하는 것에 물질적 조건이 그토록 부수적이란 주장인가? 여튼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 만화 마지막의 문장에 문득 말이 많아지고 싶었다. 현실에서의 모습과 말이 동떨어진 입만 동동 뜬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세상을 보지 않으며, (혹은 세상의 비참함마저 내 장식으로 이용하며) 말만 번지르르한, 내 멋에 취해 사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다. (이런 말을 하는 건 아직도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의 모습에서 자유롭지 못하니까) 그래서. 언제나 내 입장에서 세상이 설명되지 않거나, (지적허영이나 권력자들을 위한 게 아닌)어떻게 써먹어야 할 지 모르겠는 건 배우고 싶은 맘이 전혀 없었다. 확실히 난 공부형 인간은 아니다. 학문적 호기심이 아니라 쓸모와 필요로 움직이는 것 같다.

삶의 비참함을 외면하는 학문은 무기력하지 않다. 그건 나쁜 거다 그냥. 삶의 비참함을 외면하는 학문은 삶의 비참함을 만들어내는, 조장하는 학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치달았다. 아 궁상맞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피노키오 준비


우리가 그 구조의 거짓말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그걸 꿰뚫지 못하면 거짓말을 하며 살아야 하지만 변하는 건 없다.
그 구조에 휘말릴 뿐이다. 구조가 거짓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한다.

거짓말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하는 거지 않냐.
우리가 거짓말을 한다고 하지만 이 동화도 거짓말이다.
세상에는 청소년들보다 어른들이 더 거짓말 많이 하고, 힘 센 사람들이 더 많이 한다.
구조가 갑이다. 사실 그 구조도 거짓말이다.

권력관계가 없다면 거짓말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려면 어떤 세상이어야하냐.
구조의 거짓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난 대학 안 가! 못 가! 가기 싫어! 상관 없어!

얼마 전 대학거부라는 것을 했다. 사실, 했다고 이야기 하기에는 무언가 많이 낯부끄럽다. 딱히 비장한 마음으로 준비한 대학 거부도 아닐 뿐더러 알바한다고 몸도 마음도 지쳐가는 와중에 그냥 지나가버린 일이 되었다. 그냥 갈 생각이 없어서 가려고 노력하지 않을 뿐이다. 심지어 주변사람들이 놀리는 것처럼 검정고시로 봤던 중졸이 최종학력인 나는 갈 수도 없다.

 

나에게 대학..?

 

살 면서 대학에 가고 싶다라고 느꼈던 순간들은 꽤나 분명하게 한 손에 꼽힌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때 좋아하는 주변 어른들 중에 성균관대를 졸업한 사람이 많으니까 나도 저기 가보고 싶어! 라고 떠올렸던 적이 있었다. 물론, 교원대와 교대가 같은 곳인 줄 알았던 시기였다. 중학교에 가면서 슬슬 너는 꿈이 뭐야? 라는 질문들이 주변에서 들려올 때에 소설책 읽는 걸 너무 좋아했으니까 작가가 되고 싶었다. 대학은 당연하게 가야 된다고 생각했기에 사람들에게 대학교 어느 과에 가야 하냐고 물어봤던 것 같다. 그리고는 문예창작과에 가겠다고 결심했던 시절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학교를 안다니고 알아서 생활해야하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고민은 오늘, 내일 뭘 할까? 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일지 찾아보는 것이었다. 이전에 대학에 대해 했던 고민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제는 대학에 안가겠다는 결심이 거의 굳어있는 상태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별로 생각을 안했던 것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우 리 엄마는 나를 대안학교에도 보냈었고, 학교를 안다니게도 했던 이 사회에선 나름 특이한 사람일 것이다.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에 종종 '니가 정말 가고 싶고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그 때 대학에 가라, 니가 돈벌어서 다녀라, 대충 당연하게 가야되니까 가서 놀다올 거면 지원할 수 없다'는 말을 했었다. 물론 니가 돈벌어서 다 다니라는 말은 농담이고 으름장이었을 거다. 하지만 그 말들과 내가 살아온 그 분위기가 나에게 꽤 영향을 주기는 했었나보다. 게다가 청소년 활동판과 일하고 있는 단체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는 대학이라는 것이 내 미래에 대한 고민과 구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없어졌다. 나에게는 대학같은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 하고 싶고 궁금한 일들이 사방에 깔려있는데 대학이 뭐 중요하겠는가! 아직 먼 얘기였고, 내 관심사는 대학과 그닥 상관이 없었으니까.

 

대학생이 되는 건 골드민증같은 사회가 주는 허가증인 거야?!

 

안 타깝게도 대학에 신경 쓸 겨를같은 건 금방 생겨버렸다. 하하. 어느덧 18살, 학교로 치면 고등학교 2학년 나이가 되었다. 이제는 정말 대학가긴 늦었다는 감이 오기 시작하면서 불안과 분노로 가득 찼던 시기였다. 슬슬 내가 알던 사람들이 대학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온갖 청소년 보호법에서 자유로운 골드민증마냥, 사회가 준 대학생이라는 명찰을 받아서 생기는 혜택들이 부럽고 또 부러웠다. 재학생만 들어갈 수 있는 대학도서관이라는 그 방대한 데이터베이스와 자료가, 마음껏 쓸 수 있는 그 공간이 부러웠다. 20대를 당연히 대학생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에서의 대학생 시기에는 실컷 놀기도 하는 거지~ 라며 놀 수 있게 주어지는 그 시기도 부러웠고, 다른 걱정없이 하고 싶은 걸 찾아다녀도 될 것만 같이 보여지는 게 부러웠다. 공부만 해도 괜찮은 시기인 게 부러웠다.




물 론 이제와 생각해보면 이것저것 다른 상황들이 떠오르긴 한다. 학비를 부모님이 대주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학에 갈 수 없는 사람들도 많을테고, 수업이 별로일 수도 있을 것이고 뭐 이런저런 우울한 대학생들의 반론들 같은 것. 하지만 저 때의 고민이 품고 있던 것은 물질적인 그 무언가가 아니었다. 말로 풀려니 잘 안되지만 간단하게 말해보면, "유예기간" 이라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대학을 가지 않는 이들은 20살이 되는 순간 사회생활을 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안정적이게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해나갈 시기가 없다. 하지만 1년에 1000만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지불한다면 사회는 대학생이라는 명찰을 붙여 안정적인 유예기간을 준다. 10대에게서 수능과 대학, 공부 이상의 것을 생각할 권리도 고민할 권리도 다 앗아가려는 이곳에서 대학을 가지 않는다는 선택을 할 때에는, 제대로 고민해볼 틈도 없이 냅다 내동댕이쳐지는 상황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비싼 응급실

 

대 학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들은 나를 너무나도 불안하게 만들었다. 난 뭘 해야하지? 잘 모른다면 대학에 가서 경험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어떻게 먹고살지? 알바도 대학생 우대하는 이 상황에서 내가 중졸로 살아남을 수 있는 거야? 지금도 불안하긴 매한가지다. 그 불안의 강도가 달라질 뿐 늘 내 안에 잠재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불안은 대학이 만들어내는 불안만은 아니고, 꼭 대학에 대해 고민을 하고 또 해야만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렇게 대학에 묶여서 사고하게되는 것 자체가 더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나 는 내가 현재 하고 싶은 것을 잘 모르겠고, 뭘 할지 잘 감이 오지 않을 때에 당연히 느낄 수밖에 없는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19살은 당연히 대학이라는 예제만을 끊임없이 보고 자라니까 대학이 불안해지는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안에 들어가서 내가 뭘 하고 싶은 지 찾아보겠어! 라고 대학에 무턱대고 들어간다는 건, 늦은 밤에 응급실에 들어가 훨씬 비싼 진료비를 내야 하는 상황만큼이나 돈도 아깝고, 입안도 쓸 따름이다. 그런 식의 응급처치로 대학에 갈 바에는 조금 막막하더라도 다른 길을 찾아보려고 한다. 18살의 분노와 부러움을 지나 19살이 된 지금은 전문적인 공부는 하려는 마음과 의지를 가지고 사람들을 찾아갔을 때에는 너무나도 반갑게 함께 공부해준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대학을 가지 않고도함께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보자며 시작했던 활기의 기억도 있다. 그리고, 알바한다고 열심히 결합하지 못하지만... '투명가방끈'도 내가 대학을 가지 않고도 하고싶은 걸 하면서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가능성의 실마리들이다.

 

그래서 우린 네트워크가 필요할꺼야

 

대 학입시거부토론회에 패널로 와주었던 지나가던 시민이 대학 진학률 80퍼센트의 이 나라에서는 곧 고졸들이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런 상황이 오지 않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이 함께 대학을 거부하고, 대학을 거부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던 그 말에 얼마 전 우연찮게 들어본 고졸 네트워크가 떠올랐다. 그리고 대학을 가지 않고, 불안해 할 수 많은 사람들에게 그 네트워크가 되어 줄 위안과 현실적 안정은 상상만으로도 너무 행복하다. 앞으로 그 행복한 상상이 정말 현실이 되게 하는 일들을 해야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도, 해야할 일이 어떤 것인지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에 대한 일은 내 마음 한구석에서 나를 종종 흔들어댈 것만 같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나중의 누군가가 대학을 쉽게 선택하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하고 싶은 일로 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청소년들의 어설프던 모난라디오, 그보다 잘나가서 얄미운 '아저씨들의 나꼼수'

청소년들의 어설프던 모난라디오, 그보다 잘나가서 얄미운 '아저씨들의 나꼼수'

 

2009 년 6월 1일 '우리 라디오나 해볼까?'라는 한마디로 시작된, '모난라디오'라는 팟캐스트 인터넷 라디오가 개국했다! 뭔가 재미난 활동을 해보자던 여성청소년활동가들이 모여 뉴스, 텔레비젼, 보호주의+여성주의, 학교, 고민상담 같은 코너들로 이루어진 청소년의 목소리로(그리고 청소년 인권활동을 하는 20대의 목소리로) 청소년의 이야기를 모나게 해보자던 라디오였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들어도 재미는 없었던 것 같다ㅋㅋ 그 시절 우리는 한주에 하나씩 각자 맡은 코너로 2시간 가량의 분량의 방송을 생산해야했고, 라디오라는 컨텐츠를 생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닌 우리의 방송은 '두시간동안 혼자서 말하는 라디오'라는 기염을 토해냈다. 나같은 경우는 부끄럽게도 대본을 짜면 더 안된다며 대본도 없이 전날 새벽에 밤새도록 목이 가라앉아 주절주절 '왜 청소년은 음반도 맘대로 못사게 만드냐!'고 흥분해가며 이야기를 했었던 기억이 난다.

 

모 난라디오는 (그 당시 표현으로는)블링블링한 여성청소년들의 색다른 활동으로 인터뷰 요청도 자주 받았고, 한 방송당 조회수가 1000건은 되던 나름대로 관심을 받던 라디오였다. 빠듯한 방송 생산과 매너리즘, 기획이 그 때에는 너무나 힘겹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재밌고 소중한 기억이다. 그리고 각자가 바빠지며 2010년 어느 시점에 유야무야 해산되었다.

 

그 리고 1년 쯤 뒤 '나는 꼼수다'가 나타나 2011년을 휩쓸었다. 난 기분이 별로였다. 사람들이 갑자기 나꼼수가 진보의 아이콘이라며 추앙하는 모양새도 싫었고, 그들의 그 마초적일 게 뻔히 예상되는 부분들도 싫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재미가 덜 할 수도 있고, 모양새는 좀 모났지만 우리가 먼저 했었는데! 하는 귀여운 억울함도 생겼다. 

 

12 월 강정마을에 가있던 도중 제주도에서 나꼼수 콘서트가 열렸다. 들으래도 안 듣던 그 나꼼수를 강정마을 홍보를 하러 갔다 직접 관람하게 되었고, 내가 나꼼수에 대해 예상했던 기분나쁨은 콘서트장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한국 아저씨들이 모여 여성비하적인 발언과 성적대상화, 그리고 가벼운 음담패설을 기본으로 내뱉는 그들의 '쇼'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고, 비키니시위 논란 때 원글의 게시판에 달리던 나꼼수 청취자들의 비슷한 정서는 너무 싫었다! 팬들의 나꼼수 진행자들 우상화에서도 2009년의 노무현 대통령 자살 당시 나타났던 우상화와 비슷한 맥락의 불편함을 느꼈다.

 

하 지만 정치적 표현을 할 수 있는 미디어 영역을 확장한 것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주류 미디어에서 볼 수 없는 현 정권을 비판하는 정보들을 접하고, 관심을 표현할 수 있도록 만든 점은 인정할 수 있었다. 아마 나꼼수의 주 청취층은 사회에 관심도 불만도 많지만 투표이외에는 할 수 있는 액션이 많지 않았던 2-30대 청년층(?)이다. 그들에게 나꼼수는 들어서 정보를 알게되고, 자신의 입장을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는 좋은 미디어였을 것이다.  뭐 촛불때 향수를 만끽하려 했던 386들도 꽤 많이 듣는 것 같지만, 역시나 '청소년'은 그 안에서 비율을 차지한다고 보기 어렵다.

 

결 국 소수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수단의 하나로 미디어의 영역이 확장되고, 다양해졌다지만 떠올려 보자면, 청소년의 이야기를 직접 하겠다고 만들었던 모난라디오의 청취층도 청소년활동가들과 운동판의 성인활동가들이 대부분을 차지했지, 학교를 다니는 청소년들은 거의 없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공부만 강요되는 상황에서 목소리를 내는 일과 정치에 대한 관심, 그 미디어를 활용할 여유는 '아직'이라는 말로 강탈당해있기 때문에 청소년들은 목소리를 낼 수단을 활용하기에 앞서 접하기조차 쉽지 않다는 이야기가 된다.

 

게 다가 나꼼수는 정말 얄밉고, 매우 부럽게도 프로페셔널한 컨텐츠 생산력과 기획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부분이 콘서트에서 가장 크게 인정하게 되었던 점이었다. 모난라디오는 아마추어리즘을 표방한다고 했지만 그들만한 능력 역시 없었다. 우리가 가진 능력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기에 모나고 어설펐지만 하려던 이야기 만큼은 나꼼수만큼, 혹은 보다 더 진심이었고 열정이 넘쳤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청소년들이 내던 까칠하고 모난 목소리들보다, 좀 더 커다란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능숙하고 아는 것 좀 있는 아저씨들이 하는 방송에 더 관심을 갖는다.

 

사 실, 아직 나꼼수 이후에는 나타나게 된 다른 것들은 보수진영에서 만든 '저격수다'라는 나꼼수보다 더 듣고싶지 않은 라디오 이외에는 딱히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지만 앞으로는 더 많은 목소리들이 더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을 하게 되는 시기가 올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렇다면 그 때는 세상의 더러운 마초+꼰대의 정서에 조금이라도 반기를 들며 파장을 일으킬 삐딱하고 불만많은 청소년들의 목소리가 당당히 나오게 되길 바라는 마음과, 그 목소리가 한국 사회에서 나꼼수만큼이나 열광받으며 지지받기를 바래본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낙태, '솔/까/말' 프로젝트 ------⑨ 여성청소년이 바라보는 낙태

 

슬럿워크 글을 보고 이 글을 찾아봤다.

되게 옛날에 썼던 글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소사카바나에 살기 전에. 한 2년전?

학교에 다니지 않았던 내가 써야했던 청소년 인권에 대한 글 보다도,

10대의 섹슈얼리티를 읽고 써야했던 서평보다도,

아무 생각 없이 알바만 하던 주제에 대학거부 글을 쓸 때 보다도,

학교 밖 청소년으로서 내 고민을 털어놓던 글보다도,

참 내 이야기였다. 할말도 하고싶은 말도 너무 많았던 이야기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이기에 지금 봐도 허술한 마지막 한 줄과 꼬인 문장 이외에는 부끄럽지가 않아. 그 마지막 한 줄 마저도 참 진심이었을꺼야 하는 생각이 들어. 내가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거니까.  

 

 

낙태, '솔/까/말' 프로젝트*** 낙태를 범죄화 하려는 움직임들에 반대하며, 낙태는 여성의 삶과 건강에 관한 문제라는 것을 솔직히 까놓고 말해보기 위한 릴레이 글쓰기 액숀~ 
연대 필진 환영! 무한 링크, 스크랩, 펌, 배포 권장! 
glocal.activism@gmail.com | http://www.glocalactivism.org
 

낙태, '솔/까/말' 프로젝트 ------⑨ 여성청소년이 바라보는 낙태

                                                                     쩡열(교육 공동체 나다)




                                                             (그림: 공기)

내 인생의 첫 임신공포

나는 낙태경험이 없는 여성청소년이다. 그러나 생리하기 전 낙태라는 단어를 머리 속에 달고 살고 있다. 낙태와 임신은 나에겐 거의 동의어로 존재하고 있으니까.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난 낙태라는 건 정말 소수의 사람들이 어쩌다 하는 무언가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버스와 전철의 성추행이 아닌 강간의 위협을 느꼈을 때에 피임과 낙태 임신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박히기 시작했다. 16살 때 즈음 혼자 배낭을 메고 한 달간 터키를 다녀오게 됐을 때에 엄마가 나에게 혹시 위험한 일(아마 강제적인 성폭력 상황)이 생기게 되면 내밀라며 콘돔을 챙겨가란 말을 할 때는 됐다고 뭐 그런 일이 있겠냐고 이야기하기 한 달 뒤의 이야기였다. 지금 생각하면 뭐 챙겨가지 그까이꺼 하겠지만, 그 때에는 콘돔이라는 건 뭔가 흉측스러운 물건이었으니까 싫었다. 그리고 그 삽입 직전의 강간상황에서 내가 깨달았던 건 저런 놈들이 콘돔을 내민다고, 아 그렇군.. 하며 흔쾌히 나의 제안을 받아들여 콘돔을 착용하고 나의 피임을 걱정해줄 놈들은 아니겠구나 정도? 그 이후 내 인생의 첫 연애에서는 섹스까지 갈 위험이 있는 스킨십을 절대적으로 차단했었고, 그리고 얼마 뒤 곧 첫경험도, 섹스도 자연스러운 일들이 되었다. 

왜 여성청소년들은 사회에게 남성에게 성적자기결정권을 빼앗긴 거지?

하지만 피임에 무지했던 건 확실하다. 비청소년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청소년들은 임신에 대한 두려움, 낙태에 대한 두려움이 크지만 피임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하다. 남자놈들이야 뭐 콘돔착용조차도 귀찮아하는 일이 태반이지만 여성청소년이 자기 손으로 할 수 있는 피임은 말 밖에 없다는 기분이 든다. ‘임신하면 안돼’ ‘콘돔 꼭 써줘’ ‘하지마’ 라는 말들. 

아직도 편의점에 가서 내 손으로 콘돔을 사는 일은 꺼림칙하다. 피임약을 사려고 약국에 가는 것도 차마 못하겠다. 피임약을 먹게 된다면 물어보고 싶은 것도 알아보고 싶은 것도 상담해보고 싶은 것도 많이 있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 성적자기결정권을 강탈당한 청소년이기 때문에 내가 부끄럽지 않아도 산부인과, 편의점, 약국 그 어느 곳에도 알리고 싶지도 묻고 싶지도 않다. 이 중 어떤 상황에서라도 그들이 나의 나이를 물어보고 민증을 요구하는 (물론 묻는 곳도 안 묻는 곳도 있겠지만 물어보았을 때의 나의 당황이 떠오른다.) 그 상황과 눈빛들이 끔찍하니까 아무리 임신을 걱정하고 낙태를 걱정해도 결국 우리들의 피임은 콘돔이 한계인 게 현실이다.

성욕은 청소년에게도 엄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연애도 존재하고 섹스도 존재한다. 인정할 걸 인정해서 덜 위험한 상황으로 만드는 게 맞지 무조건 막는다고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회에서 법으로 모든 시민의 섹스를 금지한다고 법을 만들고 돌을 던진다고 성욕이 존재하지 않아지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청소년들의 성적자기결정권 이야기에 그렇게까지 심하게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건 그쪽의 정신건강에도 좋지 않고, 청소년들의 현실에도 전혀 도움되지 않는다.

물론 청소년들의 섹스를 인정하고 성적자기결정권을 인정한다고 하면 위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날수도 있고, 더욱 자연스럽게 성폭력의 상황들이 일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권리를 강탈당한 현재도, 비청소년들의 세계에도 성폭력의 상황들은 충분히 많다. 그런 성폭력들이 두렵다면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남성중심주의라던지 성에 대한 비상식적인 시선들을 바꿀 수 있는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게 더 옳지 않을까?

누구 맘대로 누구한테 뭘 강요하는 거지?

한 공부모임에서 페미니즘을 이야기 할 때에 낙태가 주제였던 적이 있다. 난 그 때 처음으로 낙태를 경험한 여성이 정말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태아의 생명권을 근거로 낙태를 반대하는 이들과 여성의 신체의 권리를 근거로 하는 이야기 사이에서는 갈 곳을 못 찾았었다. 그러게… 생명을 쉽게 죽이는 건 나쁜 거 잖아… 하며 흔들거리는 내 머리를 진정시킨 건 다름아닌 ‘왜 그 아이를 낳아서 한 사람의 인생을 책임지게 될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은 아무도 해주는 않지?’ 였다. 

임신을 하게 되면 상대방 남성도 부담을 느낀다고 한다 (느껴야 한다 허허). 하지만 모를 것이다. 생리할 무렵이 되면 고작 하루 이틀 늦어지는 현상에 끊임없이 불안해 하며 피가 난자한 꿈을 꾸고, 꿈 속에서 피투성이의 작은 사람들이 시체에 붙어있는 장면을 보고 일어나서는 공포에 질려있는 것이 어떤 건지. 약국에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사서 당장이라도 근처 화장실에 가서 테스트를 하고 결과가 뜨기까지의 그 20초 가량의 시간 동안 머릿속에서는 몇 번씩 내가 아는 테스트기 사용방법을 점검하고, 두 줄이 임신인지 한 줄이 임신인지를 떠올리는지.

그들이 아 젠장, 어쩌지? 하고 있는 동안 뱃속에 아이를 갖게 된 한 청소년은 세상이 무너질 것이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을 것이고, 생리하기 전 내가 했던 섹스를 떠올리며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인생의 앞길까지 주욱 펼쳐지겠지. 세상은 그녀한테 말할 것이다. ‘어린 게 발랑 까져서’ ‘다 큰 년이 자기 몸하나 간수 못하고’ ‘키울 자신도 능력도 없는 게 섹스는 왜 해?’ 수 많은 말들을 들으며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자신을 원망하고, 부모에게도 말할 수 없고,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현실을 원망하지 않을까? 

낙태를 한 여성들. 그리고 내 또래의 여성 청소년들이 임신중지를 쉽게 선택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충분히 아팠을 거고, 충분히 죄책감에 짓눌려 힘들었을 거다. 아이를 낳았을 때의 사회적 위치도 환경도 경제도 아무것도 부담해주지 않는 사회에서 출산을 선택할 수 없었던 그들에게 범죄자라는 낙인은 너무 잔인하다. 경제활동이 금지된 청소년들, 인생의 거의 모든 선택을 자신의 손으로 할 수 없이 살아가고 있는 청소년들이 이미 문제가 일어난 그 상황에서 그 데미지를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문제에 대해 했던 선택을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마저 하지 못하게 막게 되었을 때에는, 요즘 많아진 영아유기라는 일까지 벌이게 되는 것에 대해 한 번쯤은 고민해봤으면.

덧붙이자면 불법이 되어버려 수술을 받기도 힘들고, 금액도 점점 오르면서 가장 고통 받을 건 청소년이든 저소득층이든 사회 아래쪽의 여성들이 될 거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 속상해지는 요즘이다.


솔직히, 당신도 하고픈 말 있잖아요~ 여자들의 목소리로 솔직히 말하기 시작한다면, 낙태를 둘러싼 지금의 혼란을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시도한 꿍꿍이였습니다. 어쩌면 생뚱맞을지도 모를 우리의 말걸기가 과연 화답을 불러낼 수 있을까, 머뭇거리기도 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 공감하고 또 함께 말하고 싶은 분들은 메일로 글을 보내주세요. 일기나 낙서면 어때요. 그림이나 사진, 영상, 음악 등 다양한 말하기를 환영합니다. 우리들의 말하기가 낙태에 대한 처벌과 낙인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함. 께. 말. 해. 요.

http://www.glocalactivism.org _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NGA)에서는 <2011년 글로컬 페미니즘 학교 수강생>을 모집 중입니다. 관심 있는 분의 많은 지원 바랍니다. 문의: 02-593-5910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