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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6 바르다 김선생 (혁명하는 여자들/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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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다 김선생

부제 : 당근이 너무 많아서 별로 맛은 없음.

부부제 : 혁명하는 여자들을 읽고

정주

 

바를 정(正)에 두루 주(周). 바른 것을 두루두루 널리 알려야 한다는 건지, 항상 바른 것들을 내 주위에 두루 두어야 한다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 처음 내 이름에 대한 이 풀이를 들었을 때, 둘 중 어느 쪽이든 상관없이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사람은 자기 이름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름 풀이를 들었을 때도 크게 내 삶에 의미부여를 하진 않았다. 누가 그러겠냐만은. 만약 내 이름이 빼어날 ‘정’에 술 ‘주’자였으며, 이름처럼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술에 빼어난 사람이 되려 했다면, 아마 내 얼굴은 언젠가 한 번쯤 터졌을 것이고, 간은 남아나질 않았을 것이다. 아마 이름을 지어준 할아버지를 평생 원망했겠지.

어찌어찌 하다 보니 의도치 않게도 이름대로 바르게 살아 왔습니다. 말해놓고 재수없지만 어쨌든 열여섯까지는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바른사람. 모나지 않고, 잘 순응하고, 잘 하고 뭐 그 정도의 의미를 가졌던 것 같다 내게 바른사람 이라는 건. 유치원 때 엄마는 내게 말했다. 넌 학교에 가면 정말 잘 할거라고. 선생님 말 잘 듣고 정말 잘 다닐거라고. 그래서 학교 안 다녔으면 좋겠다고. 이제 와서야 이해되는 말이었다. 착한아이 콤플렉스.

 

사실 모두가 아는 비밀이지만, 그 뻔한 비밀 한 가지를 얘기해 보자면 바른 아이도 삐딱한 상상을 해본다. 예를 들면 다니던 중학교에 가서 가장 꼰대였던 선생을 발로 차버리는 상상. 대들고, 죽이고, 도망치고,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상들. 가끔 나는 상상이 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누군가 성당에 있다. 그 사람은 울며 얘기한다. “하느님, 계시다면 시발 그새끼 좀 죽여주세요….” 라고. 하지만 신은 이미 그 일을 행하셨다. 바로 상상으로. 그 사람은 상상속에서 그새끼를 한 오조오억번은 죽였을 것이다. 죽이지 못하면 때렸거나, 아니면 어딘가로 치워버렸거나. 아무튼.

상상은 금기와 친하다.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작용하는 금기이던 간에 아무튼 내가 못하는 걸 상상께서는 들어주시니까. (이쯤되면 신과 악마는 절친이라는 말이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이 얘기를 왜 했냐면은. 음 그러니까. 내가 했던 잔인한 상상들은 누구에게도 말 못할 것들이 많았다. 그것들은 나를 옭아매고 있던 금기들과 연관이 있었고, 내가 생각했을 때 나는 바른사람이었고, 그렇기에 누군가 내게 “어떻게 그런 끔찍한 상상을 할 수가 있어?”라고 말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바르다 라는 건 뭘까. 사실 바르다 라는 건 특정한 기준에 맞춰지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내가 아무리 스스로를 바르다고 생각해도, 지나가던 어떤 어른이 “저 새끼는 왜 이렇게 삐딱해”라고 하면 난 삐딱한 사람이 되는 거였다. 이게 뭔 개소린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지금 좀 피곤하다). 그렇기 때문에 바르게 살아간다는 것은 굉장히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는 것이다. 어떤 편파적인 기준에 맞춰야 하니깐. 그렇기 때문에 상상해본다. 부시고, 도망치고, 소리치며, 느리고, 날아가는 상상을. 바른 사람이 하지 말아야 하는 상상들. 이렇게 상상해보다가는, 언젠가 현실이 되고, 그럼 난 바른사람이 아니게 되겠지. 너무 괜찮은데? 하는 상상들. 이쯤되면 대충 나온다. 세상이 원하는 어떤 상이 있고, 그 상을 연기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하는 상상들이 있다.

 상상은 그저 들어주는 것. 내 말을 들어주는 것. 나 이렇게 살기 싫어요. 내 삶이 이렇게 바뀌면 어떨까요. 여기서 더 끔찍한 삶이었다면 이랬을까요? 그저 들어준다. 때로는 상상에게 내가 했던 얘기들을 남들에게 보여주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래왔다. 어떤 상상은 너무 발칙해서 “아니 감히 어떻게 저런 생각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겠다. 그 상상이, 누군가를 옭아매는 금기와 관련이 있다면, 계속 상상했으면 좋겠다. 계속 상상하자! 문을 열고 이름도 모를 남자들을 죽이는 상상. 식물이 되는 상상. 젖가슴을 남편에게 주는 상상. 상상은 상상을 낳고, 그 상상은 또 상상을 낳을 것이다. 상상만으론 세상을 바꿀 수 없지만, 세상을 바꾸려면 상상정도는 있어야 한다. 세상이 말하는 바른 것부터 벗어나 보자. 내 작은 세상부터 바꿔보자. 난 오늘 내가 일하는 마트 점장의 머리에 꿀밤을 놔주었다. 물론 상상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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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6 나는 두렵다, 혁명도 상상도 언제나 두렵다 (혁명하는 여자들/쩡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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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렵다, 혁명도 상상도 언제나 두렵다

<혁명하는 여자들>, 조안나 러스 외, 아작 / 20181026 / 쩡열

1.

혁명하는 여자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두렵다. 혁명은 언제나 두려웠고, 혁명을 상상하는 것 역시 두려웠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완전히 뒤집히는 것. 그것이 혁명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혁명 이후를 상상할 수조차 없다. 지금의 것들이 너무나 당연하기에 대체 무엇이 바뀌게 될지, 바뀐다면 그 빈자리는 어떻게 될지 상상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도 견고하고 높은 벽처럼 느껴지기에 이것을 허무는 그 행위가 두렵다. 우린 과연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저것들을 무너트릴 수 있을까? 애초에 저 벽을 구성하고 있는 자들은 한치의 두려움과 걱정 없이 팔짱을 낀 채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뭐 애들 써보든지 하하’ 이런 마음가짐을 한 채.

SF는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묘사한다.
- 어슐러 k 르귄, ⟪어둠의 왼손⟫

르귄의 말에 따르면 이것들은 예언이 아닌 묘사다. 우리가 읽은 것은 미래가 아닌 과거의 묘사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현재이다. 각 단편이 쓰인 시기를 살펴보면 세상은 변했고, 페미니즘의 이야기도 변해왔지만, 또한 같다. 67년에도 순종하는 착한 여성으로서의 삶에 환멸을 느끼고 의문을 느낀다. 그리고 91년에도 그 이야기를 반복한다. 물론 남성에 대한 복수와 일탈을 포함하지만, 그녀들의 삶의 조건은 정말 변해왔을까? 나의 삶은 또 달라졌을까?

 

2. 

“내 말하건대 조,” 그가 문틀에 기댔다. “그렇게 다르진 않았어. 지금보단 좀 덜 각박하고, 어쩌면 더 조용했달까, 지금처럼 야비하지도 않았고, 하지만 아주 다르진 않았어. 언제나 남자들이 모든 걸 관리했지. 가끔은 그렇지 않기도 했지만 그래 봐야 모든 실제적인 권력은 남자들이 가지고 가끔 약간의 권력을 여자들에게 내주는 거였어, 그게 다야. 지금 우리는 더는 그럴 필요도 없지만.

- 파멜라 사전트, <공포> 

 

나는 한 남자의 선물인 내 작은 자유를 애지중지하며 내 집에, 내 감옥 안에 앉아 있다. 나같은 이들에게 주어졌던 자유는 언제나 그런 것이었고, 나는 과연 다른 가능성이 있었는지 다시금 의아해졌다.

- 파멜라 사전트, <공포> 

싸워온 사람들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하지만 간혹 이런 막막함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나는 묘사하고 은유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것은 나의 역할이 아니다. 나는 실천해야 하는 존재다. 내 삶을 살아가는 동시에 이 세상이 조금이나마 나아지길 바라며, 우리들이 조금 덜 불행하길 바라며 실천하고 말하는 사람이다. 우리 이렇게 살자고. 그것은 늘 나를 두렵게 한다. 상상은 힘이다. 인문학적 상상력을 말할 때의 상상력은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하고, 당연한 것들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사유의 시작이다. 하지만 나는 늘 두려웠다. 나에겐 상상력이 없어서, 그 상상의 힘을 내가 발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서. 내가 좋아하는 김중혁처럼, 박민규처럼, 커트 보네거트처럼 농담을 할 대범함 역시 없다. 그렇기에 저 이야기들이 새로운 상상력으로 읽히기보다는 두려운 것일까? 아니면 내가 저 책에 나오는 그 사람이기에 두려운 것일까.

 둘 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3.

사람들은 흔히 SF하면 외삽을 하는 소설이라 설명하고 심지어 그렇게 정의하기까지 한다. SF 소설가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경향이나 현상을 취해 극적 효과를 위해 그것들을 정제하고 강화시킨 다음 미래로 확장하는 사람들이라고 여긴다. “이렇게 하면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와 같은 예언이 나온다.그리고 그 방법과 결과는 과학자들이 소량의 식품첨가제를 오랫동안 먹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예측하기 위해 정제되고 농축된 식품 첨가제를 쥐들에게 대량으로 복용시키는 방법과, 또 그로부터 얻은 결과와 무척이나 닮아 있다. 결과는 거의 필연적으로 암으로 발전하는 듯하다. 외삽의 결과도 그러하다. 엄격한 외삽을 이용한 SF의 결과물은 대부분이 로마 클럽이 내린 결론과 비슷한 어딘가에 도달하게 된다. 즉, 인간 자유의 점진적인 소멸과 모든 지상 생물의 멸종 사이 어딘가에.

이는 SF를 읽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왜 그것을 ‘도피적’이라고 묘사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깊이 캐물으면 그런 사람들은 ‘그 내용이 너무나 우울하기’ 때문에 SF를 읽지 않는다고 시인한다.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이 논리적 극한에 이르게 되면 설사 암을 유발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우울한 상태에 닿게 마련이다.

다행히, 외삽은 SF의 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결코 그 본질은 아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합리주의적이고 단순하기 때문에 작가나 독자의 상상력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변수야 말로 인생에서 양념과도 같은 것이다.

- 어슐러 k 르귄, ⟪어둠의 왼손⟫ 서문

나는 늑대여자 속의 소녀였다. 하지만 그렇게 충실히 길들여지지 않았기에 오랫동안 사랑받지 못했던 것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사회적 인간에 가까워지기 위해, 사회적 여성에 가까워지란 언제나 힘들었고,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이성적인 태도, 논리적인 말하기, 때로는 자연스레 가면을 쓰는 법, 그리고 여성이 되는 법. 적어도 나는 행성도 식물도 되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유기동물 수용소로 가게 되는 건 아닐까? 아니면 곤충이 되어버릴까? 역시 두렵다.

 

4.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우리 목표는 관찰과 답사로 제한되었다. 우리는 조금 더 멀리 갈 수 있기를 희망했고, 가능하다면 조금 더 많은 걸 볼 수 있기를 바랐다. 그 외에 우리 목표는 그저 가서 보는 것이었다. 단순한 야망이었고, 기본적으로는 겸손한 야망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 어슐러 k. 르귄,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 

 

이처럼 정신 나간 할머니가 있다는 걸 약간 부끄럽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손주들이 이 비밀을 알게 된 걸 즐거워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문센 씨가 알도록 해서는 절대 안 될 일! 그는 끔찍스럽게 당황하고 실망할 것이다. 그나 가족 외부의 누군가가 알아야 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발자국조차 남겨놓지 않았다.

- 어슐러 k. 르귄,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 

어제의 나는, 종종 나는 곤충이다. 나는 식물이 되는 것보다 행성이 되는 것보다 곤충이 되는 것이 두렵다.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혁명을, 다른 세계를, 당연한 것들의 질서를 벗어날 상상력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나는 더 많은 상상으로 나를 돌아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제를 후회하면서 오늘을 살아가면서.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우나였고, ‘옐초’호의 선원이었고, 타이코였던 것 같다. 다시 한번 <두 늙은 여자>의 내용을 곱씹는다. 다행이다. 두렵지만 살아가는 것, 하지만 곤충이 되지 않고, 식물도 행성도 되지 않은 채 단단하고 강인한, 그리고 따뜻한 여성으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복수이자 최선의 싸움일 수 있을까? 누구도 여기에 상처받진 않을 것이다. 아마 모욕과 폭력은 나를 향해 올 것이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건 아주 작다. 삶이다. 영화 속의 안토니아처럼. 우리는 삶을 통해서, 함께 살아감을 통해서, 태도를 통해서 조금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돌아갈 것이고, 돌아갈 곳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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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4 뜨거운 피는 쓸 게 없다 (뜨거운 피, 어둠의 왼손/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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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피는 쓸 게 없다.

부제 : 그래서 어둠의 왼손 씀

부부제 : 사실 책 내용도 별로 없음

정주

언제는 엄마가 갑자기 내게 피아노를 배워 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왜냐고 물으니까 마치 부모님께 깜짝 서프라이즈를 준비한 어린아이의 얼굴로 내게 아이패드를 보여줬다. 어린아이의 뻔한 서프라이즈를 본 어른처럼 놀라는 시늉과 적절한 리액션을 했다. “정주야. 이거 피아노 가르쳐주는 앱인데 아까부터 해보니까 너무 재밌더라!! 진짜 생초보도 곧 노래를 칠 수 있을 것 같아! 나 때는 도.래.도.래 이거부터 시작했는데! 얼마나 지루했는데 요새는 이런게 잘 나온다. 키보드만 있으면 독학으로 해볼 수 있을 것 같아! 어때?” 그 자리에서 몇 번 쳐보았다. ‘오 이거 괜찮네’ 정도였지 사실 신기하지도 놀랍지도 않았다. 요새는 이런 걸 자주 접할 수 있으니까. 
엄마는 ‘나 때는’ 이란 말을 자주 쓴다. 우리 엄마가 꼰대라는 소린 아니다. 왜냐하면 엄마는 현재를 인정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저 자신과 현재와의 간격이 놀라운 사람일 것이다. 자주 무서운 세상이라고도 말했고, 놀라운 세상이라고도 말했다. 가장 크게 페미니즘이 그랬다. 언제 한 번 또 오해영을 보며 엄마랑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에릭이 서현진의 양 손목을 잡아놓고 강제로 키스를 하는 장면이었으며, 난 그걸 데이트폭력이라, 엄마는 사랑이라 말했다. 
엄마가 폭력이라 인정을 하게 된 건 몇 달 후의 일이다. 엄마가 어떤 성교육 강의에 갔는데 또 오해영에 대해 나와 했던 대화로 질문을 했고 이런 대답을 받았다고 했다. “우리는 질문하는 문화에 익숙하지 않다. 키스해도 돼? 손 잡아도 돼? 같은. 지금까지의 한국 사회가 그 장면을 로맨스라고 얘기해왔고 그렇게 만들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사실 그 말도 난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이 있었지만. 아무튼 엄마가 그 얘길 하며 내게 인정했다. 사실 엄마가 더 충격 받았던 건 아마 ‘예전에는’과 ‘요즘은’의 간격일 것이다. 

작년과 올해는 많은 게 다를 것이다. 사회도, 패션도, 나도, 엄마도. 그리고 어쩌다 변한 것도 아닐 것이다. 맞다. 어쩌다 이렇게 된 세상은 아닐 것이다. 또 오해영, 엄마가 보던 어떤 웹툰에 달린 댓글들, 미투운동 등의 현재를 보며 엄마는 자신이 알던 세상과 다른 세상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 자신이 알던 세상의 방식으로 이해하려 들지 않는 것. 그 과정에서 괴리감을 느끼며, 충돌하고, 받아들이고. 어둠의 왼손에 겐리 아이가 그랬던 것처럼. 좀 더 충돌하며 살아야겠다.

어둠의 왼손은 어렵고 어둡고 심오한 책이었다. 생각은 많이 하게 되지만 정작 어디부터 무엇을 생각해야 할 지 모르겠는 책. 음. 바깥은 여름은 매우매우 직관적인 책이었구나. 한다라 교인들을 만나보고 싶고, 그 중에서도 파세를 꼭 보고싶다.

 

“알려지지 않은 것, 예견되지 않은 것, 증명되지 않은 것, 삶이란 바로 그런 것 위에 서 있습니다. 무지는 사고의 기반입니다. 입증되지 않은 것은 행동의 기반입니다.
만약 신이 없다고 증명된다면, 신도 없고 종교도 없을 것입니다. 한다라도 없고, 요메시도 없고, 화로신들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또한 신이 있다고 증명되면 신이 있어도 종교는 없게 됩니다.
말해주십시오, 겐리.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무엇이 확실하며 무엇이 예견 가능하고 무엇을 피할 수 없습니까? 당신이 당신의 미래에 대해, 그리고 제 미래에 대해 알고 있는 가장 확실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는 죽는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대답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겐리.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인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영원히 우리를 괴롭히는 불확실성, 다음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무지’입니다.”

 

오늘도 마트에서 어떤 직원분이 꿈이 무어냐, 관련된 공부는 하고 있느냐 물었다. 대답하고 싶었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냥 산다! 의미 없는 삶도 삶이며, 꿈이 없는 나도 나다! 이야아아아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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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4 메모 (어둠의 왼손, 뜨거운 피/쩡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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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24/뜨거운 피, 김언수, 문학동네/쩡열

진도가 안 나간다. 허영과 거짓이 아닌, 정교한 인공물이 아닌, 날 것의 이야기 속에서 뜨거운 피를 지닌 것은 남성의 삶이고, 그 남성 화자의 세상 속 배치되어 있는 여성은 그저 대상일 수밖에 없나. 밑바닥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삶이 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좆과 창녀로만 가득한 말들. 창녀가 아닌 채로는 등장하지조차 않는 여성. 여성의 밑바닥 삶은 어디에 있나. 밑바닥을 묘사하기 위해 그려지는 처절하고 불쌍한 여자들의 모습, 닳고 닳은 여자들의 모습. 여자는 이렇게 사용되는 걸까. 그녀들의 서사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은 남자 작가가 할 일이 아닌 걸까.

 

181004/어둠의 왼손, 어슐러 k 르귄, 최용준, 시공사/쩡열

 

“동시에, 남자와 여자의 상대적 지위에 대한 질문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 질문들은 점차 흥미로워졌다. ‘노동 분담’이 진정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며, 왜 오직 일부 노동자만 급료를 받는가? 왜 종교, 정부, 군대, 대학과 같은. 커다란 기관들은 남성에 의해 세워지고 지배되는가? 우리 성에 따른 결과라고 여겨지는 행동들 가운데 사실은 우리 사회가 우리 성에 기대하는 결과로 인한 것은 얼마나 되는가? 등등. 흥미로운 질문들이었다. 나는 흥미가 일었다. 나는 그 질문들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내 정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생각의 형태, 즉 이야기를 통해 그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만약 내가 성이 없거나 또는 양성을 가진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사고 실험을 쓴다면 어떨까?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그런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그래서 나는 그런 사실들을 알아보기 위해 겐리 아이와 함께 게센에 갔다.” - 40주년 기념판에 부쳐

 

 

1. 성별

양성의 세계에 산다는 것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생각을 해봤다. 사실 상상이 가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을 두가지의 성으로 구분하는 세계에 산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성별의 생물학적 특성을 지니고 태어난다. 사람은 그저 사람일 수 없다. 우리는 사회적인 동물이니까. 어떤 사회에 어떤 역할로 구성원으로 살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규정되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없는 게센에서는 적어도 성별만큼은 누군가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누구나 임신을 할 수도 있는 세상. 섹스를 통해 일어나는 임신이라는 상황이 내 몸에 일어날 지 상대의 몸에 일어날 지 알 수 없는 것. 그렇다면 아마 우리는

누구나 임신을 할 수 있다.

이 사회가 양성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달라질까?
내가 가진 성별 특성, 내가 가장 강하게 가지고 있는 여성적 태도는 뭘까?

차이를 제거하고자 하는 페미니즘적 논의들?

 

2.  국가

국가, 전쟁, 근대에 대한 르귄의 고민. 60년대 후반.
간접, 내성, 명예, 우아, 전통 - 카르히데 - 자본, 개인주의 사회?
직접, 솔직, 편리, 효율, 일종의 천박 - 오르고레인 - 공산, 전체주의, 독재, 통제적 사회
연맹. 연합. 중앙집권 - 에큐멘 - UN, EU - 네트워크, 

“덜 원시적인 사회일수록 더 못된 특징이 있는 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3. 전쟁

 

4. 예언, 삶의 의미, 직감

 

5. 질문의 힘

 

6. 성

케메르 억제제를 투여했을 때, 거세된 존재. 수동성으로 인식
성적 에너지와 성적 매력, 성적 존재로서 인정받을 때의 만족과 안정

친구란 무엇일까. 케메르일때만 함께 하는 존재, 애인과 친구의 거리, 

 

7. 바깥

민주주의, 존재하는 인물, 바깥의 인물, 바깥은 에큐멘일까
세계를 변화시키는 힘은 다름과 마주하는 것, 바깥과 마주하는 것

“저 혼자서는 여러분을, 여러분의 세계를 바꿀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바뀔 수 있찌요. 혼자이기에, 저는 제 주장 을 펼침과 동시에 여러분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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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9 올해 여름은 너무 더웠다 (바깥은 여름/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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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름은 너무 더웠다.

부제 : 해도해도 너무했음

부부제 : 바깥은 여름을 읽고

정주


 소중한 것을 잃는 게 마음이 아플까. 소중한 것의 소중함을 잃는 게 더 마음이 아플까. 아님 누군가가 나의 소중함을 잃는 게 더 마음이 아플까. 음. 


내 할아버지는 지금 요양병원에 있다.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그렇듯 몸이 고장 나서. 요양원에 처음 들어가시고 며칠 동안 난리도 아니었단다. 집으로 가겠다며, 자기 부인에게 가겠다며. 직원 분들을 때리고 고함치고 아주 생 난리를 쳤단다. 두려움과 당황 이었겠지. 처음 요양원에 할아버지를 뵈러 간 날, 할아버지는 내게 2만원을 두고 가라 하셨다. 택시비든 비상금이든 아무튼 돈이 있으면 나갈 수 있겠다 생각했던 모양이다. 자신의 몸이 고장 난 두려움과, 할머니의 부재라는 당황 속에 내게 건네던 그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좋은 할아버지였다. 5살 때 달력 뒷장에 그림을 곧잘 그리던 손주생각에 15살까지 나는 달력과 펜을 명절 때 마다 선물로 받았다. 손주 얼굴 볼 때마다 천 원짜리 한 장에 동전을 40개씩 주는 한이 있어도 항상 꾸역꾸역 5천원을 채워 용돈을 주셨다. 할머니에게 욕 한바가지 먹어가며 동네 온 고물 장난감을 다 끌어다 모아 집안 한 곳에 전시 해 두던 것도 나 때문이었을 거다. 
그 때의 표정으로 내게 2만원을 달라 하셨다. 좋은 할아버지가 지을만한 표정으로. 집에. 할머니에게 가겠다며. 이미 어딘가 고장 나버린 할머니에게 가겠다며. 자신이 고장 낸 아들의 자식에게.


할아버지는 목수셨다. 낮에 무언가 만들고 고치면, 밤에 집에 들어와 집구석의 모든 걸 고장 내셨다. 그릇부터 상, 옷장, 의자부터 할머니, 아빠, 고모까지. 집이라는 삶과 가족이라는 삶을 그렇게 고장 내고 다음날 가족들이 깨기 전에 새벽부터 집에서 사라지셨다. 와중에도 자신과 고모는 털 끝 하나 건들지 않았다고 언젠가 아빠가 얘기 해줬다. “밖에 뭐 깨지는 소리에 엄마 비명 소리에, 새벽 내내 고모 붙잡고 울다가 일어나서 방 밖 나와보면 뭐 벽장부터 시작해가지고 온 집안이 풍비박살 나있는 거야. 창문으로 깨진 물건 다 밖으로 던지는데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아빠는 평생 할아버지를 미워했다. 증오했고 원망했다. 20년 전 대학생 때 아빠가 울면서 엄마를 찾아간 날은 살면서 처음으로 할아버지에게 저항했던 날이었다. 깨진 소주병을 들고. 자신을 고장 낸 삶을 똑바로 바라 보았다. 소리쳤다. 빼앗기기 싫은 자신의 삶을 처음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지켜냈다. 할아버지는 그 때 이후로 술을 끊으셨고, 더 이상 아무것도 고장 나지 않았다. 이미 고장 나버린 삶은 있었지만, 그래도 다행이라 여겼다.
“그랬던 아빠였어. 그렇게 울면서 나한테 온 날도, 지금 너처럼 얘기했어. 사람이 작아 보이더라. 참 간사하고, 비굴하고. 허무하고 슬프더라. 지금 자기 스스로도 엄청 괴로울 거야. 평생을 원망하던 삶을 방금 마주했으니까.”


내가 마주한 삶도 참 간사하고, 비굴했다. 이제 더 이상 무력함은 없지만, 무언가 몇 가지가 더 없었다. 그래도 어딘가 소중했던. 무언가 없을까 세고 있기엔, 나도 어딘가 고장 나있었다. 


 예전엔 아빠가 정말 좋았던 적이 있다. 그 때 내가 좋아했던 아빠의 모습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나에게 소중했던 아빠는 아직 그 자리에 있다. 소중했던 것은 아직 그 자리에 있다. 그 자리에 있는데. 음.
 

 소중한 무언가를 잃는 것. 바깥은 여름에서 누군가는 언어를, 애인을, 반려동물을, 자식을 잃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뭔가를 ‘잃었다’라는 감각이 단순히 무언가 형태를 잃거나 내 시야에 없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 흠. 소중한 사람의 소중함을 잃는 것? 그건 단순히 나와 소중한 사람의 둘만의 일이 아니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내가 묻지 못했던 그 사람 너머의 일들과, 그 사람이 묻지 못했던 내 너머의 일들이 있었겠지. 말로 정리 못 하겠는 건 책을 읽고 나서도 여전하다. 
어릴 때 죽어 떠난 반려묘, 멀어진 사람들, 아빠. 내겐 아직도 상처로 남아있다. 돌이킬 수 없었던 것들. 내 삶과 마주잡은 손을 놓고 어디론가 사라진 사람들. 아직 거기에 존재하지만, 이제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은 것들도.
당신의 안부, 우리의 예전 같은 모습, 당신과 나눴던 삶의 고장. 음. 아직은 아빠를 잃었다고 말 할 수는 없겠지만. 어딘가 돌이킬 수 없고, 당신의 예전은 이제 내게 없다.


사람은 상처로 성장한다고 누군가는 말한다. 그 말은 상처 뒤엔 항상 성장이 있다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마치 위안을 주듯. 무언가 사라지고 누군가를 잃어도 네게는 아직 이 만큼이 남아있다. 잃은 만큼 생겨날 것이다. 성장할 것이다. 나는 그 말이 아직 좀 아프다
나도, 누군가도. 어제 무언가 잃었을 것이고, 오늘도 무언가 돌이킬 수 없었을 것이다. 또 내일 무언가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아프고, 상처를 얻을 것이다. 무언가를 잃은 상처를 통해 무언가 얻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잃은 대신 얻는 건 고작 상처뿐이다. 이 책을 읽고, 나를 알고 느낀 점이다. 상처가 사람을 성장시킨 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상처는 그대로 상처로 남아있다. 나를 성장 시켰던 건 대부분 다정한 사람들 덕이었다. 겨울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따뜻함을 주었던 여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겨울은 여름이 되지 않는다. 하얀 눈이 흩날리는 겨울이 얼마나 크고 장대하던, 구 바깥은 언제나 여름일 것이다. 겨울은 겨울의 자리에, 여름은 여름의 자리에. 그 시차의 존재로 나는 오늘도 많이 아프지만, 나는 오늘도 무언가를 잃을 수 있다. 잃어도 괜찮을 수 있다. 잃어도 괜찮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잃고 나니 소중했던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게 작지 않았던 것들이다. 잃을 것을 각오하고 잃은 것도 있다. 중요한 무언가를 얻기 위해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 것들. 내가 원했던 원치 않았던 그 결과는 오롯이 내 것이지만, 나는 이미 늦었어도, 누군가는 손에 꼭 쥐고 있길 바라는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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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9 지나치지 못하는 시간 (바깥은 여름/쩡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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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지 못하는 시간

<바깥은 여름>, 김애란, 문학동네 / 20180929 / 쩡열

 
 

처음 펼치자마자 시작된 입동에서 멈칫하고 말았다. 아, 이건,

 

돌이킬 수 없는 일, 없던 것처럼 사라질 수 없는 일에 대해 생각해봤다. 사실 그게 무슨 일이라고 해도 그 전과 후는 같을 수 없다는 것은 단순한 사실이다. 우리는 변하는 시간 속에 사니까. 이미 일어난 일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 그렇게 믿고 살았다. 그것이 무슨 일이든 돌이킬 수는 없고, 그 일이 바로 지금의 나를 만든 일이라는 걸 믿었다. 아무리 힘들고 끔찍한 일이라도 이제 그 일을 돌아본다는 건 적어도 지나오긴 했다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니까, 끝난 일이라는 것이니까 그래도 다행이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잊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의 경험이 모두 단단한 기억이 될 수는 없다. 인간은 잊을 수 있기 때문에 살 수 있는 거라고 했다. 모든 기억을 다 붙들고 살 수는 없는 거니까. 하지만 모든 일이 잊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일도 있다. 내 몸에 마음에 단단히 자리잡는 그런 일. 이전의 내가 가진 중요한 것을 가져가고, 다른 것을 남겨놓는 그런 일. 그건 변화일 수도, 파괴일 수도 있다.

 

뒤늦게야 세월호의 고민이 건너왔다. 잊지 않겠습니다 라는 말을 우리는 수없이 되뇌어왔다. 잊어서는 안 되는 재난이었기에 그랬고, 이젠 좀 잊으라고 하는 말들이 많아서 그랬었다. 그런 거였다. 그 날의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다. 아침 뉴스를 본 고모의 전화를 받고 시작됐던 내 하루, 내 주변 사람들의 안위를 확인하고, 안전을 말하는 뉴스를 확인하고 웃고 떠들었던 그 하루. 돌이켜보면 부끄럽다. 안산에 사는 가족과 친구를 걱정한 뒤 나는 안도했다. 그래서 나는 그 시간을 기억하지만 지나올 수 있었다. 그랬는데 올 봄에 깨달았다. 나는 그 시간을 지나왔지만, 그 일이 내 안에선 새겨져있다는 걸 알았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사실 이건 이미 내 안에 단단히 흉이 져버린 생채기 같은 일인 것만 같았다.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내 안의 뭔가를 잃었고, 뭔가가 생겨났다. 내 안이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겪었다. 그럼 내가 잃어버린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하게는 ‘사회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안전에 대한 공포’를 얻었다. 늘 그렇다고 스스로를 이해했는데 4년이 지난 지금, 그것만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변화는 나에게만 있지 않았다. 이 사회를 사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겪었던 어떤 변화이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는 없던 일이 될 수 없고, 잊을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났고, ’용서’하지 못했고, ‘용서’해버렸던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돌아볼 수 없는 일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공동정범을 떠올렸다. 끝나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보기에는 끝난 일인데 나에게는 그 무엇도 끝나지 않았다면 그 시간은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쩌면 우리는 너무 쉽게 누군가의 시간을 정리해온 건 아닐까. 그 정리가 누군가에게는 다시 돌아볼 수 없는 일이 되게 만들었던 건 아닐까. 성폭력의 경험을 수면 위로 꺼낸 여성들이 떠오른다. 누군가 말했다. 나는 그 시간을 묻어뒀는데 떠오르고 나니 지나온 적이 없다고. 
그 일을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건 이해하지 못 함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거라고 했다. 너무나 슬프고 끔찍한 일이기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기 때문인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런 일들을 기억하지만 또한 받아들이고 살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받아들일 근거가 나에게, 이 상황에 아무것도 없으니까.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다면, 누구도 나에게 어떻게 이 상황을 이해하고 넘어갈지 알려주지도 도와주지도 않는다면.  우리는 그 시간에 멈춰 서 있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혹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무력하게 받아들인 채 덮어두고 살아가는 건지도 모른다.

 

잊혀지지 않는 일이라고 해서 지나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지나가야만 산다. 그 누구도 스노우볼안에서 영원한 겨울을 살도록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살아가야 하니까. 혹은 살아가고 있으니까. 멈춰선 채로 흐르는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지 않을까.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이 그저 시간이 자꾸만 흘러가버린다면 얼마나 두려울까. 나도 두려웠다. 내 시간이 멈춰선 채로 내 몸이 멈춰선 채로 시간이 흘러갔고, 사람들이 변해갔다. 손을 쥐었다 펼쳤을 때 텅 빈 손을 바라보는 그런 시간이 있었다. 그런 슬픈 시간을 누군가에게 보내도록 하는 건 가혹하지 않을까. 
우리가 겪으며 살아가는 일들을 잘 받아들이고 지나쳐보낼 수 있는 건, 결국 많은 이야기일 것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설명하고 생각하고 이해했을 때,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또한 지나칠 수 있지 않을까. 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기만 한다면, 그저 멍하게 모든 것들이 나를 스쳐지나가는 대신, 더 많은 말들이 나의 발을 뗄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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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Jan.2017 :: 아직 정산하지 못했는데, 새해가 왔다.

*

일기를 쓰고 싶다. 

사적인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블로그에 쓰기가 겁이 나기도 한다. 그치만 너무 힘들었다. 12월 3주 쯤에는 일주일동안 집에서 잠만 잤다. 밥 먹고 자고, 일어나서 밥 먹고 자고. 깨어있었던 시간이 기억나지 않는다. 많은 꿈을 꿨다. 나쁜 꿈도 꿨고, 꿈에 쫓기기도 했다. 

손가락을 크게 베인 게 안 그래도 좋지 않던 내 상태에 불을 지폈다. 병원에 가서 소독하고 붕대 감고 왔을 때 이미 지쳤고, 마음이 좋지 않았다. 마음이 좋지 않을 이유는 수도 없이 많다. 엄마와의 일이 가장 컸고, 나다의 일도 컸다. 너희가 그만둬도 괜찮아 내가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 잘 안되는 것만 같다. 애들에겐 따뜻하지 않은 폭력적인 태도를 가졌고, 하려고 한 일은 잘 해내지 못한 것 같다. 원망만 쌓였다. 원망만. 그래서 계속 잤다. 느닷없이 울었다. 

그리고 다 싫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고, 움직이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에너지를 쓸 힘이 없었다. 

집에서 혼자 밥을 차려먹고, 잠을 자고 있으니 좋았다. 밥은 엄청나게 차려먹었다. 나가고 싶지 않았다. 나가야 했던 날에 왠지 나가기 싫다고 혼자 울었다. 바보같다. 어린 애 같다. 나 근데 도망가고 싶다. 

과거형으로 적지만 지금도 그렇다. 다만,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게 싫은데 해야 한다. 하고 싶다. 하기 싫다. 잘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싫다. 그것도 싫다.

 

작년의 결산을 아직 못 했다. 심지어 31일이 30일인줄 알고 혼자 하루를 보냈다. 밤샘 야근할 계획으로 사무실로 출근했다. 미쳤지. ㅁㅋ언니랑 맥주 한 잔 하다가 언니가 알려줘서 그제야 알았다. 아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그런 글을 올렸구나. 그리고 ㅇㅁ가 전화왔구나. 그랬다. 그랬는데 퉁명스레 끊었다. 그 때 이후로 처음 한 통화였는데. 보고싶었는데 화가 났다. 그래서 그랬는데 그냥 다시 전화를 걸었다. 괜히 그랬다. 다시 폭발했다. 지금 통화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끊었다. 

전철에서 계속 울었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혼자 집 근처에 앉아서 3-40분을 있다 12시가 되기 전에 집으로 들어갔다. ㅎㅊ이 걱정했을텐데, 근데 잘 기억이 안 난다. 내가 뭘 했고, 무슨 생각으로 움직였고, 뭐 그런 거. 

11월 즈음에도 그랬었다. 책언니 가려고 짐 다 챙겨서 가다가 버스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너무 힘들고 머리가 마비된 것 같이 이성적 판단과 행동을 하지 못하는 그런 상태였다. 그래서 그냥 수업 취소하고 ㅂ네 집에 갔다. 

알콜중독자가 될 판이다. 매일 먹진 않지만, 좀 의지하는 것 같은 불안감이 슬 든다. 집에 자꾸 독한 술을 사들고 온다. 소주는 많이 먹어야 하니까, 적게 독한 술. 

 

*

어쨌거나 다시 작년의 결산으로 넘어와보자. 

이건 잠시 비워두고 시간이 날 때 하나하나 써보자. 그러다보면 기분이 좋아질 지도 모르잖아.

 

그런데 웃기게 새해의 다짐은 했다.

우선 책 읽기. 

한달에 소설, 이론서 각 3권 이상씩은 읽자는 작은 목표다.

영화도 한주에 1편은 보고.

더 욕심을 내보자면, 시사주간지랑 씨네21도 매주 읽고 싶다. 할 수 있을까? 

마지막 거는 돈이 필요하려나? 뭐 다른 것도 돈은 필요한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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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원, 『민주주의』, 책세상, 2014

* 수업 준비하려고 보니 학교를 안 다녀서 민주주의에 대한 흐름? 기본 개념? 역사 같은 걸 잘 몰라 짧은 요약본으로 하나 읽음. 

* ㅇㅊ이랑 세미나 계속 열심히 했으면 홉스 이후까지 잘 이해가 됐을텐데 아쉽다. 

* 다시 한 번 난 멍청하단 깨달음

 

201611/쩡열

이승원, 『민주주의』, 책세상,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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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 Democracy, 인민(dêmos)과 통치(krátos)의 합성어 dēmokratía 에서 유래. ‘인민에 의한’통치

 

<1장 아테네 민주주의 - 사회적 ‘공공선’과 정치적 ‘시민’의 탄생>

1. 비종교적인, 그래서 보편적인 정치사상이 된 민주주의

- 고대 정치사상중 제정일치(신의 대리자에 의한 통치)가 아닌 종류의 정치체 -> ‘공공선’이 모든 종교에 존재. 그 ‘공공선’을 지키는 주체가 신에게 복종하는 존재가 아닌 ‘시민’이라는 것이 중요.

 

2. 신민이 아닌 ‘시민’, 정치적 의사 결정권을 가진 자들

- 신민과 시민의 차이 : 정치적 의사 결정권의 소유 여부의 차이. 

- 신민의 유일한 정치적 태도는 복종이며, 얼마나 더 정확히 철저히 복종하는 가가 정치적 임무, 윤리이자 일상. 현명한 판단이 아닌, 신의 명령을 잘 아는 자가 지혜로운 신민.

- 시민에게 필요한 것은 시민 덕성(개인보다는 공동을 우선으로 생각하여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의식과 자세). ‘시민’이라면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을 통해 어떠한 내용도 합의 가능. 시민 교육을 통해 모두가 참여 가능한 조건을 만들고, 그 참여는 일상적으로 진행. 

 

3. 공공선, 민주적 공동체의 존재 이유

- 합의의 원칙은 ‘공공선’에 가까운가에 대한 설득력과 이해. 강제된 선이 아닌 토론을 통한 정의 추구. ‘공공선의 실현을 위해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시민 덕성을 발휘하고 행사하는 자율적인 정치적 의사 결정’ / ‘공공선’과 ‘시민’의 정의의 애매모호함 존재.

 

4. 솔론의 개혁, 공공선과 시민권을 잉태하다

- 귀족과 부자만의 정치 영역을 5계급으로의 분류와 함께 더 많은 시민에게 확장시킴.

 

5. 클레이스테네스와 페리클레스, 민주주의의 제도적 원형을 만들다

- 평의회의 구성원을 씨족에서 촌락공동체로 개편. 정치적 단위의 이동. 

- 추첨으로 선출된 공직자에게 공무 수당 지급. 부에 상관 없이 정치적 수행 가능하게 함.

- 모든 공직자 선출 이전에 자격 심사를 거치는 등 신분보다 시민 중심의 사회로 개혁.

- 독재에 대한 견제를 위한 도편추방제.

 

> 깊이읽기 -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비판자들

-  민주주의 쇠퇴에 맞서 귀족주의 복원을 지지한 소크라테스. 

-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정치체에 대한 불만, 철인정치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 :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 ‘자유’이며, 이 자유는 지배하는 사람이 다시 지배받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하며, 모두가 지배를 둘러싸고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바로 ‘평등’하기 때문. 민주주의에서의 평등은 개개인의 장점에 의한 평등이 아닌 수적인 평등, 다수의 결정이 곧 최종 결정으로 공공선을 재구성함. -> 소수인 부자, 귀족이 아닌 다수인 평민, 빈자가 지배권을 가짐으로 이들의 결정이 공동체의 결정이 되는 것이 문제.

=> 이러한 비판은 당시 아테네 민주정이 스스로 위기를 극복할 수 없었던 상황에 기인한 비판에 가까움. 모든 시민에게 수준 높은 시민 덕성을 함양하는 양질의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시민들이 자율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기본 생계 수단을 마련해줘야 하는 공동체의 의무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음. -> 저들의 비판은 일종의 자격론 혹은 무지의 지배. 그렇다면 교육은?

 

 

<2장 민주주의의 부활, 그리고 근대적 변신>

1. 근대 민주주의, 고대 로마 공화주의 전통과 함께 문을 열다

- 키케로 : 국가는 인민의 재산이다. 그러나 인민은 무작정 모인 사람들의 집합이 아니라, 정의와 공동선을 위한 협력에 대하여 동의한 다수의 사람들의 결사이다. 결사를 형성하는 최초의 원인은 개인의 약함이라기보다는 자연이 인간에게 심어준 어떤 종류의 사회성이다.(홉스와 닮음과 다름)

- 공화정 : 공동체 구성원의 투표로 최고 통치자, 통치 집단 선출됨.

- 로마에서 이탈리아로의 공화정 이어짐.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와 함께 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에 대한 관심이 사회 문화적으로 높아짐. 고대 그리스 로마의 철학과 전통에 대한 고전학에 기반.

- 마키아벨리의 등장 -> 시민덕성-비르투virtu 강조를 통해 통치자와 정치 공동체가 함께 시민 덕성을 키우고 함께 통지해가는 공화주의 추구. (군주론에서는 혼합군주국 주장->세습군주국을 공격해 세우는 신군주국!)

 

2. 종교개혁, ‘개인’의 선택과 구원을 전면에 내세우다

- 루터, 독일의 종교개혁과 함께 절대주의 등장. 종교적 권위를 약화시키고, 근대적 의미에서의 ‘개인’의 구원을 강조. 근대국가의 출현으로 국가가 종교적 권위에 종속되지 않음. -> 자유롭게 시장경제를 확산, 부를 축적. 

 

3. 영국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자유주의의 탄생과 공공선의 상실

- 마그나카르타, 모범의회의 탄생

: 1215년,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대헌장)에 국왕 서명. -> 과세, 봉건적 권리와 사법 분야에서의 왕의 권위에 대해 문서를 통해 처음으로 제한을 가했다는 점과, 왕의 부당하고 독단적인 행동을 제한하기 위한 관례의 힘을 재천명하였다. 본질적으로 왕은 법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법 안에서 통치를 해야 한다는 원칙을 수립한 것이 대헌장이었다. 

: 1295년, ‘모범의회’ 소집. 중산층을 대표하는 ‘하원Commons’이 만들어지며 의회정치 기틀.

: 마그나카르타 -> 영국 헌법의 위상을 가지며, 입헌군주제의 근거가 됨

 

- 청교도혁명

: 15세기, 인클로저 진행과 신흥 도시부자 계층의 탄생.

: 의회 해산과 의화파, 왕당파의 분리. 의회파의 청교도혁명 이후 크롬웰의 독재정치.

: 청교도혁명 -> ‘수평파Leveller’ 존재. 의회주의와 인권을 강조하고, 보통선거권, 인구비례 선거구 설치 등 정치적 평등을 강조한 ‘인민협정’ 제시. 크롬웰 집권 이후 대대적 탄압. => Diggers

=>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서 독재로 마무리 됨.

 

- 명예혁명/자유주의의 탄생

: 홉스, 자연상태의 인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공공선, 시민 덕성 불가능함. 주권자 필요, 주권을 갖는 것은 스스로의 힘이 아닌 자유로운 개인들의 평등한 사회계약을 통해서만 가능.

: 크롬웰 사망 2년 뒤, 제임스 2세를 의회에서 군대 동원해 끌어내림. 새로 추대된 윌리엄 3세 ‘권리장전’ 승인. -> 이 모든 과정은 사유재산권을 둘러싼 왕과 귀족, 시민 사이의 갈등이자 투쟁.

- 로크 등장. 자연 상태에서도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신의 자연법에 따라 사유재산을 만들고 지켜나갈 수 있다. 하지만 위반에 대한 피해 보상이 불가함으로 신탁trust에 기반을 둔 사회계약으로 정부를 구성하는 것. -> 시민사회의 중요성과 통치권에 대한 시민 저항권 포함, but 공공선과의 결별, 개인과 사적 소유권 중심으로 이동.

 

4. 미국과 프랑스, 혁명으로 근대 자유 민주주의의 절정을 이루다

- 18세기, 프랑스혁명. 절대왕정의 자본주의 산업화 과정과 자유주의 사상의 전개 -> 공화주의적 전통과 ‘인민에 의한 통치’ -> 영국 자유주의, 미국 독립선언, 프랑스 계몽사상 기반

- 미국 독립 역시 부르주아혁명과 마찬가지로 조세 저항. ‘사유재산’,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는 양도할 수 없는 일정한 권리를 인간에게 부여했으며, 생명권과 자유권과 행복 추구권은 이러한 권리에 속한다. 

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정부가 조직되었으며, 정당한 정부 권력은 피치자의 동의로부터 나온다. 어떤 형태의 정부라도 이러한 목적을 훼손하는 경우, 그러한 정부를 언제든지 변혁하고 해체하여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원칙에 입각하여, 권력을 갖춘 새로운 정부를 조직할 수 있는 권리가 바로 인민에게 있다”

- 몽테스키외 : 입법, 행정, 사법권을 한 집단이 장악하는 것은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 권력 분립의 현대 민주주의 기틀.

- 루소 : 자유주의적 사회계약론 반대. 자기 보존이 가능한 자연 상태를 깨뜨린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계약 제시. 선거에 한해서만 권력을 가지는 것이 아닌, 모든 시민이 공공선이 공적 공간에서 나타난 형태인 ‘일반 의지’를 따라야 하며, 주권은 양도될 수 없음. 인민주권 아래, 자유가 곧 평등이고, 평등이 곧 자유.(발리바르-프랑스 인권선언의 인민주권은 위계질서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닌 ‘평등한 주권’, ‘평등한 자유’ -> 평등자유)

 

5. 민주주의 혁명, 그 누구도 권력의 빈자리를 영원히 차지할 순 없다.

- 로베스피에르 ->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온건파에게 살해.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정 출현.

- 부르주아 자유주의 사상이 승리한 영국, 프랑스 모두 혁명 이후 부르주아의 권력 독점.

- 1838년, 영국의 노동자 계급의 선거권 획득, 참정권 등을 주장하는 차티스트 운동 전개.

- 루소의 인민주권으로 구체제에 저항, 로크의 자유주의 사상으로 가난한 인민의 요구에 대한 자신들의 탄압 정당화 -> 앙시앵 레짐(구체제)를 타도하기에 특권과 위계질서를 통해 권력 유지할 수 없음. 폭력적 진압의 비용적, 명분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정당,선거 제도를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들도록 설계함으로 도전과 저항의 힘을 완화, 무력화하려고 함.

- 클로드 르포르 : 근대 민주주의의 특징? 부르주아 혁명이 바꾼 권력의 새로운 본질 -> 어느 누구나 자유롭게 권력에 도전할 수 있고, 권력 자체의 본질에 따라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 민주적인 권력이라면 사회주의와 같은 급진적 사상과도 결합될 수 있지만, 전체주의에 빠지면 안됨.

‘누가 통치의 주체인가’, ‘어떠한 절차가 민주적인가’라는 전통적 문제의식에서 -> ‘어떤 권력인가’라는 권력의 성격에 주목. 

 

① 민주적 권력이란 절대군주 권력과 달리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절대적으로 소유하는 사유물이 아니다. 

② 민주적 제도란 어떤 정치사회적 세력이라도 모두 공적인 영역에서의 의사 결정 과정에 차명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기회를 갖게 하는 것이다. 

③ 근대 민주주의 이념은 인민은 누구나 정치권력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할 수 있도록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갖는다고 규정한다.

 

- 프랑스 혁명이라는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의 권력에 대한 인식 변화에 초점을 맞춤. 권력의 절대성이 부정되었고, 어떤 목적이라도 절대적 권력을 정당화 할 수 없고, 권위주의 세력에 맞서 다시 권력을 되찾아오는 정치적 원리로서의 민주주의. 

-> 현재의 민주주의는 권위주의를 옹호하고, 관제 선거를 통해 권위주의가 제도적으로 정당화되기도 함. 그럼에도 자유주의와 결합한 근대 민주주의 원칙은 모든 세력의 정치적 도전의 발판을 이념적으로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

 

6.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 노동자 계급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도전하다

- 1848년 혁명 이후 유럽 정치적 상황의 급변. 차티스트 운동, 참정권 확대, 국민의회 시도 등 민주적 발전 진행. 하지만 자유주의 세력, 부르주아 자본가 계급의 이해에 부합하는 수준까지의 발전.

- 노동자 계급의 사회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엘리트 중심의 대의제에 기초한 의회정치 강화.  (부르주아 엘리트 중심의 대의제 의회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타협의 산물이자 급진적 도전으로부터 두 가치를 지키기 위한 보루.) 

- 기존 ‘시민’의 선거, 의회정치에 머물러있던 민주주의를 정치적 평등, 임금 인상, 노동 조건 개선 및 노동조합 활동의 자유, 토지 국유화 및 공장의 공동 소유・경영과 같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로 재해석. 정치적 주체인 ‘시민’의 영역 역시 확장시켜나감. 

-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노동자 계급과 적대적일 수밖에 없고, 자본주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파리 코뮌 이후 PT독재 강조. 

-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 민주주의의 주체 ‘근대적 시민’을 부르주아의 품에서 해방. but ‘시민=계급=당=국가’로 보는 오류. 결국 자유로운 참여와 토론이 제한되며 쇠락. 사회주의적 이념 실현을 위한 변형 가능한 전술이자 담론적 도구로 전락되어버림.

 

> 깊이 읽기 -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정당정치의 한계

- 모든 갈등이 직접적인 대립이 아닌 정당의 중재적 역할로 환원될 경우 대표와 합의를 위해 흐르는 시간 속에서 필연적으로 ‘정당정치의 희생자’ 발생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기존 정당들이 합의한 갈등의 우선순위와 해결방법은 신뢰할 만한 것인가? 

- 갈등의 ‘사회화’를 오히려 정당정치가 방치하고 있으며, 정당이라는 틀에 담길 수 없는 수많은 정치적 갈등과 요구들을 그 틀에 가두려는 전체주의적 경향 염려해야 한다. 한국 정치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정당 개혁이 아닌 정당정치의 신학적 권리를 포기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 ‘공공선’이라는 게 가능한가? 이익이 대치되는 사람들이 있을 때 공공선은 중립이 아닐 수 있나? 혹은 누구를 위한 공공선인가? 

+ 로크는 정치에서 사적 영역을 삭제하고 공적 영역만을 분리해낸 것이다. (무슨 말이지?)

 

 

<3장 현대 민주주의>

1. 제국주의의 출현과 1차대전, 민주주의의 토양을 바꾸다

- 1차대전 이후 정부의 통치력이 강화되었고, 전시 정부의 사회 통제. 

- 성인 남성의 전쟁 동원과 여성의 노동시장 유입, 남은 남녀가 모두 노동자로 투입되며, 노동 계급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고 이후 여성 참정권 운동 등 전후 정치의 민주화 발단.

 

2. 파시즘과 냉전, 민주주의의 새로운 변형을 시작하다

- 1차대전 이후 전시 효과를 통한 민주주의 발전. 노동 계급의 수 증가와 함께 보통 선거가 실시되고 노동 계급 정당의 급부상. (1919년 독일, 오스트리아 1920년 미국 -> 모든 성인 / 1918년 영국, 21세 이상 남 30세 이상 여 보통 선거권 -> 1928년 21세 이상 모든 성인)

- 자본주의 경쟁 체제 속에서 유럽 국가들의 ‘자국 이기주의’ 팽배해짐.

 

- 파시즘 : 무솔리니 ‘이탈리아 전투 파쇼’ 조직에서 출발. 하나의 묶음을 뜻하는 ‘파쇼’. 학계에서는 파시즘을 정의 내리지 못함.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것의 의미를 달리 해석. 공통점이 있다면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전체주의, 군국주의, 폭력과 학살의 이미지. 

독재자의 강제와 대중의 욕망이 일치되는 지점. 독재자의 언술이 ‘민족’, ‘인종’으로 ‘우리’가 된 대중들 사이에서 ‘공공선’으로 받아들여질 때 파시즘이 시작되고, ‘고통’과 ‘적’의 필요.(아테네와 로마는 파시즘이 없었다)

- 독일 : 전시, 전후 사회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했으나 종전 이후 1933년 2월 ‘독일 국회의사당 화재 사건’을 계기로 3월, 히틀러의 ‘국가 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이 선거 압승. -> 패전국의 국민들은 사회주의자들의 ‘반애국적’ 활동을 패전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히틀러의 손을 들어줌. -> 1월 히틀러 총리 취임, 의회 해산 후 일당독재 체제 수립.

- 이탈리아 : 사회주의적 계급투쟁 분위기가 있었음에도 연합국의 참전국으로 이탈리아에게 이득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불만을 가진 보수적 중산층의 무솔리니 지지. 

- 스페인 : 1931년 군부에 의해 왕정 무너짐. 1936년 선거로 인민전선 정부 수립. -> 프랑코 군부 쿠데타 발생. 스페인 내전 승리 원인인 게르니카 폭격 독일과 이탈리아 적극 지원. 

- 소련이라는 사회주의 국가 출현에 대한 연합국의 견제. 소련의 대독항전 당시 연합국의 무시. 2차대전 이후 파시즘의 재발 가능성 없애기, 사회주의 세력 확장 봉쇄라는 과제 남김. 

- 승전국 : 파시즘의 독재정에 대립하는 의회, 선거제도 중심의 민주주의 제도화. ‘자본주의 = 자유 민주주의 = 의회/선거 민주주의(대의제적 엘리트 민주주의) = 반전체주의 = 반공주의 = 국가/공동체의 안보 = 평화’라는 이념적 사슬 설정. but ‘우리’, ‘공공선’을 강조하는 민주주의 또한 의회/선거를 통해 전체주의를 인정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함.

 

- 칼 포퍼 : 현대 민주주의의 관심이 ‘어떤 지도자’가 이끄는가에서 ‘어떤 제도’가 좋은 지도자를 뽑고, 책임을 지우고, 견제하게 하는가로 옮겨 가는데 큰 역할. 

국가의 기능을 축소해야 전체주의를 견제할 수 있다. 자유방임주의와의 차이 -> 사회경제적 약자를 위해서는 국가 개입이 필요, 경제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위해서도 정치적 개입 있어야 한다고 봄. -> 1960년대 이후 국가와 정부의 역할을 인정하면서 적극적으로 견제・감시하는 시민사회의 정치 참여라는 ‘참여 민주주의’에 대한 상상을 가능케 했다고 볼 수 있음.

 

3. 냉전에 갇힌 민주주의

- 2차대전 종전 후 냉전 시작.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진영이 안보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군사적 긴장 상태 돌입. -> 민주주의의 핵심인 공공선, 개인의 자유, 사적 소유권에 대한 모든 논의가 국가와 공동체의 ‘안보’ 제일주의 아래 갇히게 됨. 

- 정치적 혼란이나 경제적 위기를 민주적 토론과 합의 과정을 통해 해결하는 대신 ‘빨갱이 또는 반동분자로 낙인찍기’, ‘적의 제거・숙청’, ‘준전시적 국민 동원 및 통제’ 같은 전체주의적 통치에서 찾음. 양극단의 모든 국가가 파시즘적으로 굴러감. 선거와 투표에서 안보의 논의를 넘어서지 못하고, 민주적 장치를 통해 파시즘에 대한 불편감 지움. 

-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 지원, 미국은 반공을 위해 신생 국가들 정치 제도와 헌법 설계를 통해 공화정 구축 및 자본주의화 지원. -> 사회주의 국가는 공산당 일당독재의 권위적 통치로 인한 숙청의 정치, 자본주의 국가는 미국 중심의 경제 선진국에 의존하는 경제적 대외 종속 심화 및 반공주의에 의해 민주적 의제 및 정치활동 제약.

- 제 3세계는 식민주의 청산 못하고 민주주의에서 권위주의로 되돌아가는 현상. ex) 남미 관료적 권위주의, 한국 박정희 정권. -> 민주주의 역행에 저항하는 급진적 시도 등장. 쿠바, 베트남 등. 

 

4. 파시즘의 공포를 이기려는 자유주의의 시도

- 로버트 달 : 수많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대 사회에 적합한 민주적 질서 찾으려고 함. 대의 민주주의는 불가피, but 선거제를 이용한 독재자 혹은 엘리트 집단의 과두제가 장기적으로 유지되게 할 수 있다. 다양한 이익집단의 의견을 반여하며 독재, 과두제로 빠지지 않기 위해 ‘폴리아키Poliarchy(다두제)’ 제시. -> 7개 항목의 제도화 강조. ‘선거를 통한 정부 관료의 선출’, ‘자유 공정 선거’, ‘공직 선거 출마권’, ‘표현의 자유’, ‘시민의 정보 접근권’, ‘결사적 자율권’

-> ‘지도자를 선출하는 기제로서의 민주주의’, ‘절차 민주주의’ 라는 슘페터식 정의에서 출발. 현대 민주주의는 권력을 둘러싼 경쟁의 제도화 과정이라는 절차적 의미로 축소. ‘어떤 사람이 우리를 대표해야 하는가’, ‘어떤 사회가 만들어져야 하는가’ 등의 문제 사라지고 권력, 권위있는 자들의 지위를 정당화하는 실용적, 정치적 용도로 사용되고 있음에 대한 대안.

-> 슘페터, 달의 민주주의는 제도에 집중. 현실적이지만 현실의 문제를 드러내지 못한다는 한계.

 

- 존 롤스 : 칸트주의자. 자본주의 진영에서 공리주의 원칙에 따른 자유 민주주의가 다수를 동원하는 것으로 변질되었을 때, 자유주의 자체를 재해석하는 ‘정의’의 원칙 제시. ①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이득이 돌아가고(차등의 원칙) ② 모든 사람에게 기회 균등의 원칙이 적용될 때(기회 균등의 원칙) 정의로운 것이 될 수 있다. -> 민주적이고 공정한 사회적 계약을 위해 ‘원초적 입장’과 ‘무지의 베일’ 제시. -> 칸트주의의 전통적 비판에 대한 한계 및 불평등의 원인에 대해서 침묵한다. 시혜적 제도의 유지로 민주적 원칙과는 거리.

 

 

5. 민주주의의 역사를 바꾼 거대한 실패, ‘68혁명’과 ‘프라하의 봄’

- 자본주의 진영 : 68혁명. 권위주의와 전통적인 위계질서, 권력 관계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 냉전과 자본주의라는 이중 천장에 대한 반발. ‘모든 금지하는 것들을 금지하라!’ -> 당시 모든 권력 관계를 옹호하던 ‘민주주의’에 대한 반기. -> 전후 승리감에 도취된 자유주의에 대한 혐오와 의혹.

- 사회주의 진영 : 1956년, 스탈린주의에 대한 헝가리 시민들의 봉기. 너지의 개혁 정권에 대한 소련의 진압의 폭력성에 서구 지식인들 지지 철회. 트로츠키주의를 선택하거나 신좌파 구성. -> 스탈린 사후 프라하의 봄. 같은 해 8월 소련의 침공. -> 사회주의를 꿈꾸던 사람들 충공!

- 신좌파 : 노동운동 중심의 전통 사회주의 흔들림. ->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엘리트 중심 의회정치와 대량 소비 문화 확산 방지, 사회주의의 부패와 전체주의화 방지, 대안적인 세상을 ‘운영’하는 전략이자 생활양식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 내일을 위한 이념은 오늘의 삶의 변화와 일상을 훈련을 통해서 실현해야 한다.(일상의 혁명?) -> 보수측에서도 ‘신보수’ 등장! 신자유주의!

 

6. 신좌파의 상상력, 참여 민주주의와 급진 민주주의

- 양 진영 모두 정당성 상실. 냉전 유지의 정당성 사라지며 보류 상태 돌입. -> 자유주의자는 자유주의 재구성 -> 신좌파는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좌파와 자유주의 비판하며 의회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정치적 실천 시도. 신좌파의 정치적 화두 ‘민주주의’

- 신좌파는 현실의 대의제 민주주의가 가지는 비현실적인 부분(불평등의 현실) 지적하며 참여 민주주의 주장. 일상속 정치적 참여는 권력을 공유하고 평등하게 행사하는 것을 포함. -> 제3의 운동을 전제. ‘무엇을 위해 참여하는가’ 참여의 목적에 대한 운동 -> 중앙집권식 권위주의에 대한 견제.

- 자유주의자에게도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자본주의를 위해(복지국가 자본주의), 참여 민주주의는 정치 전술로 기능. 

- 소수자들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급진 민주주의와의 결합 필요. -> ‘급진’이란 당연한 것에 대해 질문하는 철학적 태도.

 

7. 민주주의 최대의 위기, 신자유주의와의 만남

- 자유주의, 신좌파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 극복을 위해 ‘분배적 정의’ 실현 필요 판단. 

- 자본가들에게 유리한 방법은 민주주의를 유지하며 공공선을 자유와 평등 대신 ‘개인적 소유권’, ‘시장’의 보호로 바꾸는 것. = 신자유주의

- 호황이 끝나고 복지를 추구하는 케인스식 경제 정책 철회. 민주화의 경제적 토대 잃게 됨. -> 영국 ‘대처리즘’, 미국 ‘레이거노믹스’ 채택. -> 복지 예산 삭감, 세금 인하, 민영화, 노조 규제 등.

 

- 신자유주의 : 자유무역, 노동시장 유연화 전면 주장. 신자유주의는 세계화를 통해 국가의 주권적 정책 결정권과 시민사회의 자율성 약화 시킴. -> 국내 상황을 고려한 정책 결정이 아닌 초국적기업을 위한 정책 결정! 세계화는 초국적 법인 기업을 위한 지구적 표준을 정책에 반영시키는 것을 목표로 함. 

- 신자유주의 국가는 시장의 자유화와 탈규제를 위해 국가의 영향력과 책임을 축소하는 ‘작은 정부’를 주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저항과 민주주의 위기를 관리하기 위해 억압적 국가기구들을 동원하는 ‘강한 국가’의 모습을 드러낸다. 즉 시장에는 약하고 시민에게는 단호한 정부가 바로 신자유주의 국가의 새로운 민주적 통치 모델인 것이다. 

-> 시민 중심성을 무너뜨리고 ‘자본’, ‘초국적 법인기업’을 중심에 놓는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시민적 가치’나 ‘삶의 질’이 아닌 ‘자본의 이윤’에 기여하는 것에 논점을 맞춘다. 

- 신자유주의 민주주의 국가의 딜레마 : 신자유주의 지구적 표준화에 맞추기 위해 제도와 헌법적 가치를 수정해야 한다. 하지만 국가의 주권적 권위를 위해서는 절차 민주주의 제도를 따라야 함. -> 자유 민주주의를 완전히 포기할 수 없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지구화 과정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 김대중 금융 위기 해법이 신자유주의! 노무현 FTA, 이명박의 작은 정부. 

-> 박근혜, 대선 당시 ‘경제민주화’, ‘복지 예산 증액’등 신자유주의에 반하는 정책 제시, but 당선 후 공약 폐기 민영화 추진. -> 자본에는 약하고 노동, 시민사회에 단호한 모습! 

 

> 깊이 읽기 - 기독교의 사회적 실천과 민주화 운동의 발전

- 민주화의 과정에서 민주주의가 공동체의 기존의 전통적 윤리로 받아들여진 종교적 가치에 부합한다면 더 빠른 민주화 가능. 가톨릭의 현대화와 함께 ‘사회적 구원’ 제시, 해방신학. 한국의 민중 신학 형성과 이에 기반을 둔 개신교와 민주화 운동의 결합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음.

 

+ 민주화의 경제적 토대는 뭔가? -> 정치 공동체가 경제 공동체와 맞닿아 있음. 경제 정책이 보수화 된다면 민주주의도 영향을 받는다? -> 민주주의의 위기란 사회적 불평등으로 정부,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 상실. 제도 약화(다큐프라임)

+ 국가의 기능과 필요는 무엇인가. 자국의 공공선을 위해 움직이는 국가는 정의롭나?

+ 올바른 제도는 필요한가? 제도 자체를 거부할 수 없다면, 좋은 제도를 찾아야 하나? 제도에 대한 신뢰가 높은 사회는 민주적인가? 의견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면 민주적인 것인가? 민주주의와 파시즘의 사이는 왜 가깝냐?ㅋ

 

 

<4장 한국, 민주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자들>

1. 해방 후 3년,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

- 한국과 서구 사회 민주화의 가장 큰 차이 -> 민주화 과정에서의 ‘철학적 사유의 전환’ 혹은 ‘반성’의 유무. -> 서구의 민주화 과정에서는 철학적 사고 전환 함께 진행. but 한국은 전통적 가치와 사회 내부의 문제와 갈등을 해결할 방법에 대해 깊이 고민할 기회가 없었음.

 

2. 사회적 합의, 그 붕괴의 현대사

- 의사 결정 자체보다 절차의 원칙에 합의하고 원칙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함. 결과의 정당성과 설득력이 절차에 달려 있기 때문.

- 대한민국 헌법 승인은 사회적 합의가 아닌 동원된 공포에 의해서 정해졌음.

- 박정희의 신화는 한국인들이 아무리 노력해서 사회적 합의를 이룬다 해도 강력한 지도자에 의해 쉽게 짓밟히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보다 차라리 내가 순종할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를 꿈꾸는 게 낫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화.

-> 어떤 세상, 어떤 민주주의를 만들 것인가가 아닌 어떤 지도자를 지지할까가 저잣거리의 정치 화두가 되어버림. 사회적 합의보다 자신들이 위임한 권력에 더 크게 의존하고, 원치 않는 제도들이 강제로 시행되어도 비판하거나 도전하기보다는 순종하고 적응하는데 익숙해지도록 길들여짐.

- 6공화국 헌법이 개헌 절차에 쉽게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6월 항쟁이라는 사회적 합의 과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법적 권위만이 아닌 사회 윤리적 권위로 받아들이기 때문.

 

3. 진동하는 민주주의, 구성과 전복 사이에 서

- 만주주의는 헌법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사회적 의사 결정의 질서를 구성하는 원리, 제도. 

-> 제도로서 민주주의는 ‘경계’를 가지고 있음. 참여 자격 적용 범위 등에 대한 기준을 이끌어 냄. 제도를 지키기 위해 공포, 신화 체계나 국가 폭력이 이용되기도 한다. ‘낡은 민주적 제도’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현재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힘’에 대한 도전이자 그 힘을 대체할 새로운 힘을 만들어야 함.

- 경계선 형성의 역사, 유지시키는 권력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영역과 시민권의 적용 범위를 확장시키는 일차적인 작업. -> 사회적 약자의 존엄성에 대한 고민.

- 민주주의는 ‘구성의 원리’이자 ‘전복의 원리’로 기능해야 하고, 현재의 제도가 개선에 대한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

- 민주주의의 지속을 위해서 결과물(법, 제도 등)을 유지하는 힘의 기원과 본질에 대해 민주적으로 탐구하고 질문을 제기하는 ‘급진적’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전체주의의 늪에 빠질 수 있다. 

-> ‘사회적 합의’라는 이유만으로 합의의 그늘과 문제에 대한 비판을 묵살, 비판자를 적으로 간주하거나 ‘구성의 원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며 나타나는 전체주의의 함정.

-> 민주주의가 제도를 넘어 생활양식으로 받아들여져야 제도를 감시할 수 있다.

- 전복의 원리가 구성의 원리를 지향하며 진동해야 하며, 그 진동성이 민주주의를 민주적으로 만드는 본질.

- 민주주의의 판단의 최소한의 기준 ① 생명을 보호하는 사회 구성의 원리로서 기능하는가 ② 전체주의의 폭력에 빠져 변해가고 있는가 ->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반민주’가 아닌 ‘전체주의 이며, 그 싸움은 ‘적’과의 싸움이 아니라 어떤 것이든 ‘적’으로 만드는 ‘우리’ 자신과의 싸움일 것이다.

 

> 깊이 읽기 - 연대, 민주주의으 영원한 동반자

- 연대solidarité는 민주주의가 제도를 넘어 생활양식으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가치이자 실천.

- 공동체의 구성원이 경험하는 고통을 유기적으로 함께 느끼고 공동으로 대처하는 생활방식.

- 연대는 현재의 지배 언어가 약자의 존재를 가리거나 문제 제기를 막는 것에 저항하는 것을 포함한다. 새로운 언어를 생산하는 실천이기도 하며, 진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 

- 어떤 절대적 특권도 인정하지 않는 연대는 현대판 앙시앵 레짐을 전복시킬 수 있는 현대판 민주주의 혁명(그러나 적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적을 친구로 만드는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 유신 체제와 유신헌법 : 1972년 10월 박정희가 비상계엄 선포 후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 활동 중지 단행 후 3권을 대통령에게 집중. 대선을 간접선거로 바꿈, 유신헌법 제정 후 체제 확립, 국회의원 3분의 1을 선거 없이 임명할 수 있는 1인 독재 체제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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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다시 광장에 서다" 교육공동체 나다 2017 겨울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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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별 소개
 

 

1. 초대말씀

 

 2016년 말 대한민국의 주말은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운 수많은 촛불들로 뜨겁습니다. 촛불을 든 사람들은 정권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로 무너진 민주주의를 시민의 힘으로 다시 일으켜야 한다고 소리칩니다. 이미 몇 십 년 전, 독재를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얻어냈다고 말했건만 21세기에 또다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퍼져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쩌면 민주주의가 당연한 상식으로 여겨지는 세상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정권이 저지른 이 어이없는 비리에 더 분노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특히나 청소년들에게 그리 민주적인 곳은 아니었습니다. 학교는 민주주의의 형식만을 암기시킬 뿐 어떻게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을지는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민주적인 시민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하지만, 어른들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청소년의 권리를 통제하고 입을 막으려고 합니다.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침묵하는 것이 익숙한 세상이라면 민주주의의 가치가 무너지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라요.

침묵하고 순응하고 기다리는 것만으로 변화는 잃어나지 않으며, 민주주의에 동참할 자격이 생겨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이대로도 우리는 민주주의를 겪고 배우며 살아갈 힘이 충분히 있습니다. 다만 함께 할 기회를 빼앗겼을 뿐이지요. 빼앗겼던 목소리를 되찾으려는 시도가 어쩌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올겨울 딱딱한 교과서 속 민주주의를 내 삶의 흥미진진한 일상으로 실현시키는 떠들썩한 정치 수다판에서 여러분과 그 출발을 함께해 보려 합니다.

 


2. 개설 강좌

 

초등부 철학

생각하는 자람이 (5강)
★ 몸만 자라는 아이가 되지 않기 위한 세상에 대한 질문들
△ 참가자 12~13세 △ 일시 1월 9~13일, 오전 10시 

 

“생각하는 자람이”는 아이들의 생활 속에서 건져 올린 생생한 철학 이야기입니다. 자람이 또래의 초등학생들이 쉽고 재미있게 철학의 주제들을 접해볼 수 있도록 고민해서 쓴 소설을 만화로 다시 구성했어요.

아무리 만화라고 한들, 어른들에게도 어렵고 지겨운 철학을 과연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요? 철학이 어렵게만 여겨지는 것은 아이들이(어른들 역시!) 접해 온 ‘철학’이라는 것이 철학의 탈을 쓴 또 다른 암기, 혹은 삶과 완전히 동떨어진 죽어있는 고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철학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각하고 판단하고 반성하는 능력이 있다면 누구라도 너무나 당연하게 철학을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과 연관된 현실적인 것으로 고민할 수 있을 때, 추상적인 것이 쉽고 재미있게 설명될 때 아이들은 개념에 흥미롭게 접근합니다. 아이들을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여러 장치들도 필요합니다. 이렇게 되면 암기로서의 혹은 자신의 삶과 동떨어진 철학이 아닌 자신의 삶 속에서의 철학을 고민할 수 있게 됩니다.

 

1강_ 나를 잃어버린 날 : 내가 알고 있는 나, 그게 정말 나일까?
2강_ 옛 친구 새 친구 : 기억나지 않는 그 녀석, 옛 친구일까 새 친구일까?
3강_ 진실은 어느 곳에 : 왜 서로의 진실이 어긋나게 되는 걸까?
4강_ 진짜 세상, 가짜 세상 : 게임 속의 나는 어디에 살고 있을까?
5강_ 좋은 아이 착한 아이 : 착하게 살 것인가 독하게 살 것인가?

 


중등부 철학

10대, 페미니스트 되기 딱 좋은 나이 (5강) 
★ 우리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입문

△ 참가자 14~16세 △ 일시 1월 9~13일, 오후 1시 

 

나는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다는 것, 더구나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삭제된 역사를 알게 되는 것은, 무지로 인해 보호받아 온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 사회에 대한 분노, 소통의 절망 때문에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 여성주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더욱이 편안할 수는 없다. 다른 렌즈를 착용했을 때 눈의 이물감은 어쩔 수 없다. 여성주의뿐만 아니라 기존의 지배 규범, ‘상식’에 도전하는 모든 새로운 언어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지지해준다. 여성주의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의문을 갖게 하고,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대안적 행복, 즐거움 같은 것이다.

 -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중에서

 
1강_ #나는_잠재적_가해자입니다 : 남성들의 선의를 경계하라
2강_ 여자에서 사람으로, 사람에서 여자로 : 성별에 따른 역할은 자연스러울까?
3강_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 메갈리아, 페미니즘인가 남성혐오인가
4강_ 우리 엄마를 위한 페미니즘 : 여성과 청소년의 연대를 위하여
5강_ 꽃도 신도 아닌 여자들의 마을 :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것

 


중등부 문화

 우리는 잘 자랄 수 있을까 (5강)
★ 성장영화를 통해 보는 뻔하지 않은 10대의 삶
△ 참가자 14~16세 △ 일시 1월 9~13일, 오후 3시 30분

 

흐르는 시간 속에서 몸이 자라고, 경험이 생기고, 생각이 쌓이며, 드러나는 모습이 달라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청소년들에게 ‘성장’하라고 주문할 때는 ‘변화’라기 보다는 ‘더 나아지’라는, 또는 ‘무언가가 되’라는 주문이 포함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청소년기가 정해진 결과를 얻기 위한 과정이 될 때 성장은 부담이 되고 맙니다. 우리도 잘 자라고 싶은데 말예요.

우리가 함께 보려는 영화 속 청소년들 또한 비현실적인 상황에 놓여있다 해도 현실 속의 누군가와 꼭 닮아 있습니다. 철없다고,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구박받기가 일쑤입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잘 자라기 위한 시간을 나눠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 속 그들이 고생과 슬픔을 잘 헤쳐 나가기를 바라는 동안, 우리는 영화 밖에서 우리가 잘 자라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좀 따져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강_ 『완득이』, 이한 감독 : 세상이 원하는 청소년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2강_ 『파수꾼』, 윤성현 감독 : 폭력의 세계에서 놓쳐버린 소통의 방법
3강_ 『주노』,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 :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일을 처리하는 법 
4강_ 『걷기왕』, 백승화 감독 : 열심히 살고 싶지 않은데 어쩌라고! 
5강_ 『억셉티드』, 스티브 핑크 감독 : 꼴통들의 상상이 현실이 되다

 

 

중등부 토론

민주주의는  ▭다 : 청소년 썰전 (5강)
★ 청소년의 삶에 민주주의를 가져오기 위한 수다 한판!
△ 참가자 14~16세 △ 일시 1월 16~20일, 오전 10시 

 

2016년 말 대한민국의 주말은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운 수많은 촛불들로 뜨겁습니다. 촛불을 든 사람들은 정권에 대한 분노를 목소리를 담아 무너진 민주주의를 시민의 힘으로 다시 일으켜야 한다고 소리칩니다. 이미 몇십 년 전, 독재를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얻어냈다고 말했건만 21세기에 또다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퍼져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쩌면 민주주의가 당연한 상식으로 여겨지는 세상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정권이 저지른 이 어이없는 비리에 더 분노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특히나 청소년들에게 그리 민주적인 곳은 아니었습니다. 학교는 민주주의의 형식만을 암기시킬 뿐, 어떻게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을지는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민주적인 시민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하지만, 어른들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청소년의 권리를 통제하고 입을 막으려고 합니다.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침묵하는 것이 익숙한 세상이라면 민주주의의 가치가 무너지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라요.

 

1강_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민주가 뭐길래, 공화국이 뭐길래
2강_ 다수의 정의롭지 못한 결정도 받아들여야 할까? : 다수결은 민주적인가 vs 아닌가
3강_ 청소년도 투표할 자격이 있을까? : 중학생도 투표할 수 있다 vs 없다
4강_ 5천만 가지의 주장이 나오면 결정은 언제 해? : 반장은 필요하다 vs 불필요하다
5강_ 청소년, 다시 광장에 서다 : 정치적 힘을 가진 존재가 된다는 것

 

 

중고등부 인문학 입문

인문학, 세계를 보는 창 (5강)
★ 나다의 인문학 강좌가 처음인 청소년들을 초대합니다
△ 참가자 14~19세 △ 일시 1월 16~20일, 오후 1시

 

인문학적 사고는 나로부터 대상으로부터 세계로부터의 ‘거리두기’의 연속입니다. 인문학적 사고가 어떤 공부든 기본이 되어야하는 이유는 세계에 대한 기존의 판단에 대해 끊임없이 거리를 두는 태도 없이는 학문적인 성취와 발전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공부에, 특히 중고등학교 공부에 ‘거리두기’라는 것이 존재할까요? 그 대답은 아마 다들 아실 겁니다. 인문학적 사고가 실종된 공부의 과정은 공부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울 뿐더러 그 속에 토론을 밀어 넣는다는 것은 거의 절망적인 수준입니다. 그렇다고 인문학적 사고 따지지 말고 토론만 어떻게 안 되겠니, 말하는 것도 어불성설입니다.

“인문학, 세계를 보는 창(窓)”이라고 제목 붙은 이 프로그램은 나다에서 인문학 강좌를 처음 접한 청소년들을 위해서 준비된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인문학적으로 세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연습인 셈입니다. 그 연습의 결과가 여러분들을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만들었으면 하는 것이 강좌를 준비하는 입장에서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불편함을 극복하기 위한 소통과 싸움의 흔적이 강좌를 마친 자리와 강좌에 참가한 모두의 마음에 고스란히 남아있었으면 합니다.

 

1강_ 우리는 왜 꿈꾸지 않는가? : 인문학적 상상력을 위하여
2강_ 은유, 거리두기, 그리고 인문학
3강_ 대중문화, 가린 것을 벗기고 숨긴 것을 드러내다
4강_ 광고, 자본주의의 전도사
5강_ 이상한 나라의 네오, 매트릭스에서 길을 잃다

 


고등부 철학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은 자유 (5강)
★ 조금 더 자유롭기 위해 우선 알아야 할 자유, 그리고 평등
△ 참가자 17~19세 △ 일시 1월 16~20일, 오후 3시 30분

 

한국 사회에 살아가고 있는 청소년들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일 것만 같습니다. 돼지고기나 소고기도 아닌데 몇 등급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성적으로만 품질을 결정 받는 그런 세상에서 자유는 오히려 불량품의 조건인 것처럼 보입니다. ‘나중에 더 자유롭게 살려면 지금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자유보다 먼저 학생으로서 책임(공부)을 다해라’. 이런 충고들 속에 자유는 청소년의 인생에서 미뤄지고 지워집니다. 심지어 어떤 어른은 맘껏 공부할 수 있는 그 때가 가장 자유로운 시기라고 말합니다.

정말 자유라는 가치는 시험 성적의 가치보다 못한 것일까요? 성적을 올리기 위해 ‘자유’롭게 경쟁하는 그 자유가 정말 우리가 원하는 자유일까요?

자유롭기 위해서, 자유를 향해 질문을 던져봅니다. 자유란 도대체 무엇인가요? 왜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살면서 자유롭다고 느끼지 못하는 걸까요? 진정 자유로우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자유에 대한 질문을 할 자유도 없이 살아온 것인 지도 모릅니다.

 

1강_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는가
2강_ 죄와 벌 : 근대철학의 '자유' 논쟁
3강_ 당신의 이기심에 자유를 : 자유주의의 함정
4강_ 천국에는 자유가 없다 : 자유와 평등의 딜레마
5강_ 자유로부터의 도피 : 자유와 복종의 갈림길에서

 

 

※ 매회 강의시간은 두 시간입니다.

※ 더 상세한 소개는 http://nada.jinbo.net/vacation/179231 홈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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