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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한 건 쳤다.

국회에 가면 꼭 국회 앞도 간다. 그냥 읽으면 좀 이상한 문장이지만  사실 그대로를 쓴 거다. 왜냐면 국회 앞, 정확히 말하면 구 한나라당사 앞이나 국민은행 앞은 이런 저런 농성 천막들이 많기 떄문에 국회 갈 일이 있으면 항상 일타쌍피로 농성 천막도 다녀오곤 한단 말인게다.

 

오늘도 마찬가지. 며칠전 강제 철거된 국보법, 장애인 이동권, 사학법 관련 천막들이 보란 듯이 다시 국민은행 앞에 쳐져 있었고 농성자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제 자리들을 지키고 있었다. 나도 혹 아는 얼굴 있나 확인해서 아는 체 하고 그러려니 했지.

 

그. 런. 데 길 건너편 구 한나라당 당사 앞에는 한터 여성들이 천막을 치고 농성을 하고 있었다. '차라리 우리를 이 자리에서 죽여라'는 펼침막 아래서. 덥지도 않은 날씨인데 무에가 그리 답답한지 전부 다 천막 밖으로 나와있더라. 열 남짓한 여성들은 마스크와 선글래스를 착용하고 있었지만 꼭꼭 얼굴을 싸매고 있었던 건 아니고 서넛 정도는 맨 얼굴로 천막 앞에 잎을 꾹 다문채 앉아 있더라.

 

평소의 나 라면 아니 다른 천막이라면 넉살 좋게 다가가서 이렇게 저렇게 말 붙여 보고 예상 답변들을  두 세수 정도 앞서 계산해서 질문을 던지곤 했을텐데 못 그러겠더라. 왜 였을까?

 

호기심, 증오감, 열패감, 분노, 답답함 등이 뒤섞여 나를 쏘아보던 그녀들의 눈빛이 따가와서였을까?

 

늦은 오후 나절 기자실에서 기사 쓰다가 담배 한 대 피러 나왔는데 비가 꽤 오더라. 걱정 되더라. 아스팔트 바닥이 그리 낯설지 않아 솜씨 좋게 쳐진 국민은행 앞 농성 천막들에 비해 구 한나라당 앞 천막은 너무 허접했었거든.

 

다음 주에도 국회 일정은 없을 것이라는 한나라당 남경필 의원의 간단하고도 단호한 브리핑을 듣고 일간지 기자의 차에 편승해 국회를 나왔다. '진보매체' 기자인 내게 '개혁적 신문사'의 기자가 성매매 특별법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물론 난 쿨하고도 진보적인 모범 답변을 거리낌 없이 내놓았다. 돌아오는 답변은 '아 그게 그런거군요'

 

오늘 사기 한 건 쳤다.   

 

며칠 후 다시 국회 갈 때 까지 그 천막이 있으면 가서 담배라도 나눠 펴야 겠다. 듣는 것이 먼저 아니겠나? 쓰는 것은 나중일이고.  일단 들어 볼란다.

 

그런데 과연 그 한발을 내디딜수 있을지 나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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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감사, 겹눈으로 바라보기(외부 기고글)

노동자의 힘 기관지 이번 호에 실린 글입니다. 국정감사가 끝나기 일주전 주말이 마감이라 그 때 상황까지 보고 쓴 글인데 국감 전체에 대한 조망글로 봐도 별 무리는 없을 듯 하네요. 미뎌 참세상에도 정리 글 한 번 썼어야 됐는데 어, 어, 하다가 그냥 때 놓쳐버렸네--;; 맨날 이런단 말야 ㅠ.ㅠ

 

국정감사, 겹눈으로 바라보기


17대 국회 첫 국정감사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사실 그 동안의 국정감사라는 것이 그들만의 리그인데다가 공무원 불러다 놓고 삿대질 하며 고래고래 고함치다가 제 풀에 심드렁해지기 일쑤인 짜고 치는 고스톱인지라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 번 국정감사도 마찬가지인 것이 고등학교 교과서가 친북이니 성매매금지법안 때문에 청춘 남성들이 성욕을 풀 기회를 잃어 버렸다는니 하는 황당한 이야기들이 보수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환경노동위원회를 필두로 재정경제위원회, 교육위원회 등에서 주목할 만한 감사들이 진행되고 있다. 의회전술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깔아놓은 멍석을 본체만체 한다는 것은 현명한 자세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현장의 노동자들은 국정감사를 활용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중이다. 예상 질의 내용을 뽑아 엄청난 양의 답변 자료 준비로 방어하는 관료들 보다 자신들의 싸움을 의회공간에 까지 확장시키려는 노동자들의 노력과 준비는 더욱 성실했다.


국정감사가 시작된 10월 4일 리베라, 풀무원, 성람, 효성 등 20여개 장기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은 상경투쟁을 시작했다. 2박 3일의 상경투쟁을 마치고 10월 6일 해단식을 가졌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10월 7일 서울, 대전, 경인 노동청에 대한 국감을 앞둔 서울지방노동청 앞에서 국감을 시작하기 한 참 전부터 장기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의 집회가 있었다. 지난 10월 7일 환노위 국감장에는 성람재단 이사장, 리베라 호텔의 사주인 신안그룹 회장과 더불어 노조 위원장들이 증인으로 나란히 출석했다.


국정감사를 앞둔 장기투쟁 사업장들의 준비는 철저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우리의 비참한 상황을 굽어 살펴달라’ 는 식의 의원나리에 대한 읍소 전략으로 나선 것이 아니라 투쟁의 전술로서 의회공간을 적극 활용해 냈다는 점이다. 신안그룹 박순석 회장의 “국회는 깡패집단” “야마가 돌아” 발언으로 화제가 된 10월 7일 국감에서 박순석 회장을 몰아붙인 것은 단병호 의원이지만 박순석을 궁지에 몰게 만든 자료는 전부가 리베라 호텔 노조에서 준비해서 제공 한 것이었다. 박순석 회장이나 대전지방노동청장이 어떤 발뺌을 할지라도 노조가 준비한 자료(박순석 회장의 노조 불허 발언 녹취록, 기 합의된 사항을 손바닥 뒤집듯 한 증거자료)를 벗어날 수 는 없었다. 이는 경기지역이 대표적 장기투쟁 사업장인 성람재단도 마찬가지였다.

 

현대자동차의 불법파견 실태가 노동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된 직후 벌어진 10월 13일 국정감사도 마찬가지였다. 이 날 국정감사에서는 현대중공업에 대한 불법파견과 산업재해에 대한 문제들이 적극적으로 다뤄졌다. 울산지역 하청사업장 노조들의 꼼꼼히 취합한 자료 앞에서 현대중공업 대표이사나 부산지방노동청장, 울산지방노동사무소장의 변명은 별 효과를 보이지 못했다. 특히 노동부가 내놓은 비정규 개악안에 대한 투쟁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현행 법규 아래서도 온갖 불법, 탈법적 파견과 노동탄압이 벌어지고 있음이 의회 공간 내에서 폭로된 것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환경노동위원회 내에서는 심지어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 의원들 조차 현행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을 수긍하는 분위기였고 두고 봐야 알겠지만 최소한 노동부의 원안이 환경노동위원회를 통과하기는 그리 쉽지 않아 보인다.


이번 국정감사에서는 ‘일등 기업 삼성’ 도 도마 위에 올랐다. 16대 까지는 의회에서 삼성의 ‘삼’ 자는 물론이고 그보다 한 끝발 낮은 이건희의 ‘이’자도 국회 속기록에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국정감사는 달랐다. 휴대폰을 이용한 불법적 위치추적 문제로 삼성 SDI임원을 증인으로 채택하자는 단병호 의원의 제안이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야합에 의해 무산되었을 때만해도 ‘역시 삼성은 삼성이다’라는 중평들이었지만 국정감사 첫날 삼성측이 총력을 다해 대비하고 있던 환경노동위가 아니라 재정경제위에서부터 삼성에 대한 공격이 시작됐다. 삼성그룹 계열사 간 출자의 핵심 고리 역할을 하는 삼성에버랜드와 삼성생명에 대한 과세 문제에 대한 지적은 이건희, 이재용 부자의 탈법적 증여와 상속 여부로 까지 확장됐다. 법제사법위 국정감사에서는 삼성의 무노조 정책이 위헌이 아니냐는 추궁에 대해 “헌법이 노동권을 보장하고 있고,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행위는 처벌 대상이라는 사실” 이라는 서울지검 지검장의 답변이 나오기도 했다.

 

이번 국감을 통해 삼성 저격수로 성가를 높이고 있는 사람은 의외로 열린우리당 우원식 의원이다. 우원식 의원은 10월 5일 노동부 국감에서 삼성 SDI의 근로기준법 위반과 삼성 SDI 만의 특이한 근무시간 산정을 폭로해 최초로 삼성그룹 계열사에 대한 노동부 차원의 특별근로감독을 이끌어냈다. 연이어 7일에는 삼성전자의 부당노동행위와 위장하도급을 문제를 제기해 경인지방노동청의 특별조사를 이끌어냈다. 물론 삼성의 노동탄압은 널리 알려진데다가 여러 경로를 통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하지만 삼성일반노조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삼성 내부에 운동주체가 제대로 서있지 못하고 노동운동진영 내에서는 삼성 문제가 소홀히 다뤄진 것은 사실이다.

 

오히려 시민단체나 인권단체 쪽이 삼성 문제에 대해 더 공을 들여온 느낌까지 든다. 물론 투쟁의 단초들이 삼성재벌과 그를 비호하는 공권력에 의해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삼성전자를 필두로 삼성 그룹이나 이건희가 한국사회에서 신화화까지 되고 있는 현실이나 전경련이 아닌 삼경련으로 불리는 현실, 해외 순방을 다녀온 노무현 대통령이 삼성재벌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는 현실에서 총자본의 상징인 삼성에 대한 공격은 매우 중요하다. 2세 경영을 넘어 3세 이재용에게로 원활한 상속을 위한 여론 정지를 위한 이미지 메이킹에 삼성이 온 힘을 쏟고 있는 현 상황에서 실체 폭로를 통한 여론화 작업이 필수적일 것이고 의회는 중요한 경로임에 분명하다. 이 지점에 대한 운동진영의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실 진보정당의 의회진출도 처음이고 국감도 처음이라 도대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예측하기가 쉽지 않았다. 국회의원 개개인이 헌법기관이긴 하지만 지난 수개월간 의회 내에서 민주노동당이 정국 방향타에 대해 유의미한 역할을 했다고 보긴 힘들었다. 물론 그나마 국정감사는 당의 힘보다는 개별 의원실의 역량이 발휘되기가 용이한 장이긴 하다. 그러나 국감 자체의 한계(부산, 울산, 대구광역시와 경남 경북을 포괄하는 지방 노동청 감사에 할애된 시간이 세시간 반에 불과하다)와 그 동안 잘 드러나지 않았던 민주노동당 10개 의원실의 역량 차이가 여실하게 드러났다. 또한 수많은 장기투쟁 사업장이나 불법파견을 비롯한 비정규 사업장들이 자신의 이름을 국회 속기록에라도 올리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깝고 실질적 사주의 어이없는 망발로 모든 미디어에 오르내린 리베라 호텔 노조는 천운을 얻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또한 국정감사에서 지적되고 폭로된 문제들이 모두 해결될 리도 만무하다. 국감장에서 공무원들은 ‘시정하겠습니다.’ ‘서면으로 답변하겠습니다.’ ‘검토하겠습니다.’ 란 세 가지를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었다. 노동탄압이 폭로된 사업장의 업주들도 증인으로 출석해선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개선 하겠습니다’ ‘사실과 다릅니다’ 이 세 가지 답변을 적절히 섞어가며 대응했다. 개별 의원실의 의지와 역량을 아주 높게 쳐준다손 치더라도 관료집단과 자본가를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사후 확인 한다는 것은 공상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국감장에서 언급이라도 되는 것 자체를 두려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의회를 통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의회로 모든 요구안을 집중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진보정당’ 의원이 국회에 없다고 해서 의회 공간을 활용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깔린 멍석을 못 본 체 하는 것도 그 만큼이나 멍청한 짓 이다. 이제 첫 국감이 마감되려고 하는 시점에서 운동진영이 의회 아니 좁혀서 말하자면 국정감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정확한 안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게다. 그러나 철저한 준비를 한 단위는 국정감사를 통해 소기의 성과를 끌어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이미 지난 2001년 한국통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국회본회의장에 펼침막을 들고 요구안을 외쳤던 선례가 있다.


개별 운동주체들이 국정감사 이후 의회를 지렛대로 어떻게 전술을 펼쳐야 나갈지 제시할 능력이 내겐 없다. 그러나 몇마디 제언을 덧붙여 본다. 물론 개별 투쟁 단위들의 철저한 준비는 기본이다. 그러나 여러 사안들이 개별 의원실로 취합되는 경로가 명확하지 않다. 개별 단위들이 알아서 찾아가 직거래 하는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오히려 과도한 의회주의, 대리주의로 수렴되기도 쉽다. 노동자 출신 의원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장기투쟁 사업장 노동자의 마음이 이해가 안가는 바는 아니지만 언제까지 그럴 순 없는 것 아닌가?

 

개별 사업장이나 개별 투쟁단위가 개개의 의원실과 손발을 맞추다 보면 당연히 무게 중심도 의원실로 쏠릴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좀 더 조직적인 경로를 통해 의원실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배타적 지지가 현실인 상황에서(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민주노총 중앙의 역할이 좀 더 필요하다.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에 대한 중앙위원 지분이나 최고위원 지분을 가지고 있는 것과 별개로 의회에 연락관을 파견해 상주시킬 것을 제안한다.  경제부처 관리들과 재벌들은 이미 조직 내 핵심인자들을 서로 교환 근무시키고 있다.  의회 투쟁은 민원이 아니다. 대등한 위치라는 것을 자각해야 하고 또 그 자각과 실천을 위해선 그 만큼의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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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익, 김주익, 김주익

김주익 열사 추모제에 다녀와서 몇 꼭지나 되는 관련 기사를 썼고 한 참 지나버렸지만 어떻게든 정리를 해놓고 넘어가야 되겠다 싶더라. 사실 그 동안 몇 번이나 썼다가 지워버리곤 했다.

 

1주기 추모제가 벌어지기 이틀 전 총연맹 부산본부 갔다가 자료집 한 권을 얻었다. '85호 크레인'

김진숙 지도위원의 절절했던 추모사, 아이들이 아버지에게 보냈던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일기들, 김주익 지회장의 유서, 관련 자료들을 일년만에 다시 읽었고 또 김지회장에 대한 정은임의 멘트들 까지 다시 찾아 읽었다. 집에서 눈물 좀 미리 빼고 그 다음날 한진중 노조 사무실에 갔더랬다.

 

거기서 정말 멋진 형님 한 분을 만났다.( 바로 박성호 한진중 열사정신계승 사업회 회장 http://media.jinbo.net/news/view.php?board=news&id=31178&page=2&category1=1) 예전엔 현장 마다 멋진 형님들이 참 많았었는데 요즘은 참 멋진 형님을 만나기 힘든 시절이다. 최근에 국회에서 다시 만난 옛날 형님으로는 배일도 행님이 있다 --;; (엊그제 성폭력예방교육 받고 멋진 형님 찾는 나도 구제불능이지만..뭐 어때? 멋진 누나는 멋진 누나고 멋진 형님은 멋진 형님이지..) 벅찼던 과거, 슬픈 이야기, 힘든 현실과 헤쳐낼 각오들을 비장하게 풀어내는 사람들은 꽤 많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을 웃으면서, 칼날을 솜에 숨긴 채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박성호 회장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국감 땡땡이 치고 참석한 심상정 의원도 멋진 누님이었다. 박성호, 김주익, 심상정, 노무현 이 네 사람은 박창수 열사를 매개로 밀접한 관계를 맺었었더랬다. 박창수 열사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을 때 박성호 회장은 노조 교선부장이다가 해고 당하고 열사 대책위 간사 활동을 했다. 그리고 또 구속당하고...김주익 열사는 문체부장이었는데 겨우 해고를 피했단다. 그리고 심상정은 박창수 비대위 상황실장을 맡았었고 '인권변호사' 노무현은 박창수 진상규명단장을 맡았더랬다.

 

작년에 심상정은 한진중 상급연맹인 금속 연맹 교섭 대표를 지냈다(9월 30일까지) 심상정이 금속에서 임기를 마친 후 17일만에 사고가 났고...인터뷰 때 이 누나가 '국회에서도 가끔 김주익 지회장이랑 이야기 하곤 해요' 라고 하더라. 첨엔 뭔 말을 하는가 싶었지...그리고 작년 김주익 지회장이 제 몸을 달아맸을때 노무현 대통령은 '아니 아직도 한국에 이런 일이 있냐' 고 탄식했다고 열우 모 의원께서 이야기 해주더라. 노무현 대통령이 통치하는 한국에 그런 일은 참 많다. 김주익 열사의 일주기가 되던 날 법원은 효성 노동자들에게 또 손배 칠십억을 때렸다.

 

추모제 당일 아침 일찍 한진중에 나갔더랬다. 눈에 들어오는건 바로 85호 크레인, 햇빛 때문에 제대로 올려다보기도 힘든 운전실.

 

 

사실 나는 열사라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근데 35 미터 높이에 있는 저 무쇠방을 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더라.  천이백명의 조합원을 남겨두고 혼자서 저 위로 기어올라가 문을 잠궈버리고 백스물 아홉날의 여름밤을 지켜낸  그 마음을 , 비닐 봉지에 담긴 밥을 밧줄로 매달아 올려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넘기던 그 마음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여름밤에 휴대 전화기가 울리기라도 하면 얼마나 반가웠을까? 통화가 막친 후 더 고고해졌을 적막은 어찌 견뎠을까? 천이백 파업 대오가 칠십으로 줄어 자기 몸뚱아리를 매달땐 솥발산에 먼저 누워있는 박창수 선배가 생각났을까?

 

파업에 참가하면 무급이지만 그냥 결근해버리면 70퍼센트 임금 준다는 회사 앞에서, 생활비 때문에 그리고 고등학교 다니는 딸래미가 눈에 밟혀 몸이 안좋다는 핑계로 여남믄 날 동안 파업 대오에서 빠지다가 결국 후배의 죽음을 맞이한 곽재규 열사의 죄책감의 무게는 얼마였을까?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으면 85호 크레인 아래 4호 도크로 제 몸을 던져서 피로 유서를 써내려갔을까? 그들이 짊어졌을 짐의 무게를 난 짐작조차 못하겠더라.

 

추모식 날 광장을 가득 메운 작업복의 물결들, 참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었다. 한마디로 뽀다구 나더라.

 

 

조합원들이 유급 참여를 보장 받은 이 시간에 사내 하청 노동자들과 이주 노동자들은 조선소 여기저기에 두더쥐들처럼 박혀 일했다. 물론 그건 한진중 조합원의 책임이나 잘못이 아니다. 노조에서 비정규직의 비 짜만 꺼내도 사측이 어떻게 대응하는진 나도 잘 알고 있다.  차해도 한진중 지회장의  안타까워 하던 모습이 악어의 눈물이 아니란 것도 잘 안다. 한진중 조합원들이 얼마나 힘든 싸움을 치워냈는지도 안다. 그리고 그들더러 이제 또 당신들이 앞장 서시오 하고 명령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없다.  하지만 추모식이 끝난 후 함께 선 밥줄에서 이런 위원장, 저런 위원장, 노동운동가 출신 국회의원을 훔쳐 보던 하청 노동자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들을.

 

남한 노동 운동의 위대한 전사  현대 중공업이 올해 금속연맹에서 제명당했다. 94년 파업 이후 그들은 십년 무쟁의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그래 쟁의 안 할 수도 있지 뭐. 하지만  '현장파' 출신 탁학수 집행부는 자본과 손을 잡고 해고자들을, 비정규직을 몰아내는데 집중했다. 지금 현중 집행부는 심지어 해고자들의 아침 선전전에 가끔 참여하는 현중 해고자 울산 동구청장 이갑용을 직무유기로 고발하기도 했다. 근데 아직도 현중노조원들은 '영원하라 현중노조' 노래를 부를까? '칠천만의 해방을 위해 영원하라 현중노조'라는 부분을 부를땐 좀 간지럽지 않을까?

 

육해공군 상륙작전 전쟁 선포에 맞섰던 현중이, 그리고 이갑용,이영현, 조돈희의 현중이, '동지들 새해 복 많이 쟁취하시라'는 시로 백무산이 노래했던 그 현중이, 전노협의 상징이었던 '골리앗의 그림자'라는 투쟁가가 헌정되었던 그 현중이, 영국에서 만난 칠십 먹은 노동당원 할아부지까지 투쟁 비디오를 봐서 알고 있던 현중노조가 특별히 나쁜 놈들로  이루어져 이 모양 이 꼴이 난건 아닐게다. 

 

추모식에 참석한 여러 장기 투쟁 사업장과 금속연맹내 비정규직 조합원들. 뿐만 아니라 리베라 노조, 성람재단, 풀무원 아저씨 아줌마 조합원들...이들이 모두 김주익이다, 그리고 곽재규다. 비정규 노동자 앞에 내놓은 노무현 정부의은 비정규직 개악 법안은 바로 21년차 노동자 김주익이 받아들었던 13,5000짜리 가압류된 월금 명세서다. 한진중은 '귀하의 노고에 감사합니다' 고 말하며 저 명세표를 내밀었고 노무현 정권은 비정규직 보호하겠노라며 개악안을 들이밀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내몰리고 있는 거리가 바로 85호 크레인이다. 우리는 김주익을 추모하지만 되살릴 순 없다. 이제 또 다른 누군가를 추모하진 말자. 열사란 말 난 정말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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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국감 출장 이야기

간만에 취재 뒷다마를 쓴다. 사실 그동안 쓸거리가 많았는데 부산 출장건을 어떻게 정리하고 넘어가야 하나 싶어 다른 이야기들도 못썼다. 지난 주에 부산엘 다녀왔다. 국감 취재 건이랑 김주익 열사 일주기 추모행사 건으로...

 

기사를 통해 하고 싶은 말들 거진 다했지만 가슴 짠한 일들이 많았다.

 

먼저 국감때 문성현 만난 것, 한달 전 즈음에 매일노동뉴스 인터뷰를 보고 '아 이 양반이 아직 살아있구나 ' 싶었는데 막상 보니까 참 안 됐더라. (이런걸 보면 나도 마음이 좀 여린가 보다--;;) 호강할려고, 대접 받으려고 그 사람이 운동한 것도 아니었겠지만 알아보는 사람도 드문 '문전투'(내가 알아보니 참 반가워 하더군--;;)를 단병호 의원이 불러내 소개시키고 각종 행사에서 내빈의 말석을 지키는 그 양반을 보니 참...게다가 당 운동의 막차를 탔는데 그것도 그리 길이 넓어보이진 않고..하여튼 내가 궁금해서 그 양반 인터뷰 했는데 왜 갑자기 문성현이냐며 뜬금없다는 소리를 꽤 많이 들었다ㅠㅠ 에이 그래도 기사 거리는 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가슴 한 구석에서 사라지진 않는다--;;

 

부산에서벌어진 국감은 부산, 울산, 대구, 경남, 경북이라는 광대한 지역의 노동문제를 커버하는 국감이었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은 달랑 세시간 반 정도--;; 서부 경남의 끝자락 의령에서 버스를 타고 와 국감장 앞마당에서 집회를 했는데도 자기들 이야기 한마디 안나온게 한이 맺혀 의원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가겠노라던 풀무원 의령 공장 아줌마, 아저씨들 생각하면 아직도 짠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 주름 패인 얼굴, 얼굴들...일요일은 쉬게 해달라며 외치다가 '노동자 출신 국회의원 '손을 막상 잡고 나니까 그 당당하던 구호도 못외치고 목메어 울던 그 모습. 양귀자 소설 중에 '슬픔도 힘이 된다' 란 중편(단편이던가?) 가 있었다. 불법화 시기의 전교조 이야기 였는데 풀무원 아저씨, 아줌마들에게도 슬픔도 힘이 될까? 국감 마치고 구내 식당에서 들렸던 진주 지방노동사무소장 목소리가 기억 난다. '풀무원 사측에선 의령공장 접겠다던데?' 의령공장은 7월 1일 주5일제 실시를 앞두고 십수개로 쪼개져 버린 풀무원 사업장 중의 하나다. 주5일제 법안 실시를 앞두고 천명이 넘던 풀무원 생산 라인은 7, 80명의 작은 회사 십수개로 쪼개졌다.  태백산맥 보면 '지주가 빨갱이 만든다요' 라는 구절이 나온다. 정말 세상이 투사 만드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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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오비츄어리, 발리바르 추모사

며칠전 자끄 데리다가 운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사 하나를 썼다. 데리다의 개인 이력을 검색해서 확인했고 내가 그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들을 녹일려고 했는데 참 힘들더라. 일단 내가 무식한 탓에... 예전에 봤던 맑스의 유령들에 대해서만 썼다. 해체주의에 대한 언급은 하지도 못한채. 그러고 나니 요즘 참 '책'을 안 읽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오비츄어리는 처음 써보는거지만 '오늘은' 에서 죽은 사람들을 몇번 정리 해봤던게 큰 도움이 됐다. 안타까운 것은 데리다의 이론과 실천 작업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된 기고를 받아 올리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거다. 우리 바운더리가 좁아서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몸을 사려선진 모르겠지만 몇몇 기고청탁 시도들이 실패로 돌아갔다. 초라한 내 기사 하나는 너무 부족했다는 생각이 아직도 든다.

 

간만에 여기 저기 서핑을 하다가 에띠앤 발리바르가 뤼마니떼(프랑스 공산당 기관지, 지금은 그냥 좌파계 일간신문)에 기고한 추모사를 발견했다.문장들이 좀 씹히긴 하지만  잘 정리된 글이란 생각이 든다.  최원이 자기 홈페이지에 번역한 것을 몇몇 문구만 수정해서 다시 올린다.  근데 꼽아보니 발리바르도 환갑을 넘긴지가 몇 년 된 것 같다. 참 다들 늙어가는구나.

 

 

곧 만납시다, 자끄 데리다.

 

철학자 에띠엔 발리바르

 

자크 데리다가 사라진지 몇 시간이 안된 지금 나는 그의 작업을 몇 마디 말로 규정하려고 시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그것을 하나의 명칭안에 가두어두고 싶진 않습니다. 단지 학생으로, 동료로, 친구로 만날 수 있었던 삶과 생각의 몇몇 순간들을 회상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저는 그가 고등사범학교에 도착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교수자격시험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데리다는 우리에게 '프랑스의 뛰어난 현상학자' 라는 그의 명성에 앞서, 무엇보다도 후설의 <기하학의 기원>에 관한 눈부신 에세이의 저자였습니다. 거기서 그는 역사성과 진리으 질문을 사회학주의와 심리학주의 사이의 논쟁으로 부터 빼앗아 왔습니다. 그는 곧바로 가장 어려운 곳으로 갔습니다. 증명 가능성의 조건들이라는 질문-이를 형식적 보증이라는 문제로부터 시간 속에서의 재생산이라는 문제('흔적' 이라는 그의 위대한 테마를 예상하는)로 이행하게 만들면서- 이나 기록/글쓰기의 활동과 사고와 물질성 간의 연결이라는  질문 말입니다. 그의 강의들은 웅변적이었지만, 무엇보다 개념들의 성립과 텍스트 읽기에 있어 엄격했습니다. (이 강의들의 엄격성을 증명하는 것은 <우정의 정치>를 읽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수년 후 저는, 그의 해석의 힘과 명쾌함 덕에 제가 강의들의 모든 전개를 기억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었습니다.

 

위대한 가르침의 이러한 실천에 저는 더욱 일반적인 교훈을 관련시키고 싶습니다. 세계적으로 상당한 미디어적인 인물이 된 데리다는 대학에서 작업하길 결코 멈추지 않았고 철학적 활동의 근본적인 장소를 대학 안에서 보길 멈추지 않았습니다(비록 대학은 그를 단지 초라하게만 인정해 주었을 뿐이며 자기 나라의 대학은 그나마 인색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1979년 철학의회 혹은 1983년 국제철학학교의 창설 같은 이니셔티브를 통해 그는 대학이 자신의 위계제적인 굴레와 분과들 사이의 배타주의와 민족주의(이는, 프랑스에서처럼, 스스로 “보편적” 가치들을 담지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민족주의이기 때문에 더더욱 [대학을] 불모로 만드는 민족주의입니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시도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대학이 그가 1998년 스탠포드 컨퍼런스에서 조건 없는 대학이라고 부른 것이라는 점은 사실입니다. 권력의 경계선들과 통제들을 넘어 인간의 모든 노동들을 다시 사고하고 기계화와 세계화의 시대에 가능한 것을 (그리고 심지어 불가능한 것을) 발언하는 과제를 떠맡는 대학 말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이후 “해체”라고 부를 이 새로운 방법론에 관한 세 가지 선언인 <목소리와 현상>, <기록학에 관하여>, <기록과 차이>의 1967년 출판 및 이들의 철학과 문학 사이에서의 미묘한 교차들을 기억합니다. 저는 [그가 행한] 루소의 독해에 관한 레비-스트로스와의 논쟁, 데카르트에 관한 푸코와의 논쟁 같은 대논쟁들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이를 오늘 다시 그만큼의 철학적 구조주의의 근본적인 논쟁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 철학적 구조주의는 형이상학과 자신의 구별을 행하고, 따라서 이미 자신을 “후기-구조주의”로 전화시킬 잠재성, 즉 자신을 구조라는 관념(특히 구조가 “총체성”들을 표상한다는 주장/오만)의 내적인 비판으로 전화시킬 잠재성을 유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휴머니즘의 관점이나 주체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행해지지 않고 인간에 관한(따라서 “인간의 목적들”과 권리들에 관한) 우리의 관념을 복잡하게 만들고 그것의 양가성(의식과 무의식, 육체와 정신,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과 중성적인 것))을 강조하는 차이들이라는 관점에서 행해집니다. 왜냐하면, 차이들은 모두 이원론적 대립들로 환원할 수 없는 초과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의미의 이 같은 초과(데리다가 “기원적 보충-대체”라고 부르는)는 해석의 재개와 증식 뿐 아니라 동일성의 기계주의의 폭력과 세계 전유의 전술들로 향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데리다의 성숙기의 위대한 테마들, 특히 계산 불가능한 “도래할 것”으로서의 사건이라는 인식의 맹아를 봅니다—이 사건이라는 인식 안에서는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책임성이 극단화되는데, 이는 우리가 우리의 행위와 발언의 결과들을 “수행적으로” 지배/제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와 발언이 무한히 권리와 정의라는 문제의 재활성화 및 재정식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우리가, 참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소속이 없는 지성인들로서, 그가 “새로운 국제주의”라고 불렀던 것의 출현에 기여하고자 시도했던 그 모든 상황들(얀 후스 연대의 한복판에서의 체코슬로바키아의 “반역적” 지성인들에 대한 원조에서 시작해서, “외국인들”에 대한 공안정치와 낙인에 반대하여 유럽에서 피신권을 방어한 일을 지나, 그리고 팔레스타인 인민의 권리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에서 적대자들의 화해를 위한 입장을 표명한 일에 이르기까지, 확실히 저는 이에 관해선 대충 지나가고 있습니다)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항상 분석과 역사적 참조에 있어 전적으로 동의했던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여기 또 다른 많은 분들과 함께, 종종 데리다의 주도로, 우리는, 대중의 폭력을 야기하고 그것을 되받아 배양하는 국가와 시장 주권들의 지배력에 대한 다형적이고 다극적인 저항을 구성함에 있어 지성인들과 예술가들이 고유한 역할을 갖는다는 확신을 공유했던 것입니다. 이는 자신들의 담론들의 해체와, 그리고 자신들의 적들/경쟁자들 사이의 건설적인 대화를 통과합니다(데리다는 얼마전에 테러리즘과 “불량배 국가들”에 대한 항구적 전쟁을 선동하는 기계를 분해하기 위해 자신의 오래된 “적”인 하버마스와 힘을 합침으로써, 여기에 실례를 제공했습니다)

대학의 도래 혹은 “도래할” 철학, 지성인들의 책임, 지구적 교통의 세계 안에서 그들의 자리의 문제인 이 모든 것은 데리다의 기여 없이는 반성하기 한층 어려운 것입니다만, 이 모든 것은 그의 모범과 글 안에서 사유의 원천들을 구하길 그리 빨리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잘 가요 자끄. 아니 차라리, 곧 만납시다.

 

À bientôt, Jacques Derrida

par Étienne Balibar
philosphe.

Quelques heures après la disparition de Jacques Derrida, je ne veux pas tenter de caractériser son oeuvre en quelques mots. Je veux encore moins l’enfermer dans une étiquette. Seulement me remémorer quelques moments d’une vie et d’une pensée que j’ai eu la chance de rencontrer comme élève, collègue et ami.

Je me souviens de son arrivée à l’École normale supérieure, où nous préparions l’agrégation. Précédé de sa réputation de « meilleur phénoménologue de France », Derrida était surtout, pour nous, l’auteur d’un essai éblouissant sur l’origine de la géométrie de Husserl, dans lequel la question de l’historicité de la vérité était arrachée aux débats entre le sociologisme et le psychologisme. Il y allait d’emblée au plus difficile : la question des conditions de possibilité de la démonstration, en la faisant passer d’un problème de garantie formelle à un problème de reproduction dans le temps, anticipant sa grande thématique de la « trace », ou de la connexion entre l’activité de la pensée et la matérialité de l’écriture. Ses cours étaient - éloquents, mais surtout rigoureux dans l’établissement des concepts et la lecture des textes (comme ils le resteront toujours, il suffit de lire Politiques de l’amitié). Je découvris des années plus tard que j’en avais mémorisé des développements entiers grâce à la clarté et à la force de ses interprétations.

À cette pratique de grand enseignant, je veux rattacher une leçon plus générale. Derrida qui, dans le monde entier, est devenu une figure très médiatique, n’a jamais cessé de travailler dans l’université et d’y voir le lieu fondamental de l’activité philosophique (même si, dans son pays du moins, elle ne lui a concédé que chichement la reconnaissance). Par des initiatives telles que les états généraux de la philosophie de 1979, ou la création du Collège international de philosophie en 1983, il a tenté de l’aider à sortir de son carcan hiérarchique, de son exclusivisme disciplinaire et de son nationalisme (d’autant plus stérilisant lorsque, comme en France, il se croit assuré de porter les valeurs « universelles »). Il est vrai que l’université dont il s’agit là est ce que, dans une conférence à Stanford de 1998, il appelle une université sans condition, s’assignant par-delà les frontières et les contrôles du pouvoir, la tâche de repenser tous les travaux humains et d’énoncer le possible (et même l’impossible) à l’époque de la mécanisation et de la mondialisation.

Je me souviens de la publication en 1967 des trois manifestes de cette nouvelle méthode qu’on appellerait plus tard la « déconstruction » : la Voix et le Phénomène, De la grammatologie,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et de leurs subtils croisements entre philosophie et littérature. Je me souviens des grandes controverses avec Lévi-Strauss sur la lecture de Rousseau, avec Foucault sur celle de Descartes, qu’on peut relire aujourd’hui comme autant de « querelles » fondatrices du structuralisme philosophique, où se joue sa démarcation avec la métaphysique et, déjà, la virtualité de sa transformation en un « post-structuralisme ». C’est-à-dire en une critique interne de l’idée de structure (en particulier de sa prétention à représenter des « totalités »). Cette critique, toutefois, ne se fait pas du point de vue de l’humanisme ou de la liberté du sujet, mais du point de vue des différences qui compliquent notre idée de l’homme (donc des « fins de l’homme » et de ses droits), et en soulignent l’ambivalence : la conscience et l’inconscient, le corps et la lettre, le masculin et le féminin (et le neutre). Car, elles comportent toutes un excédent irréductible aux oppositions binaires, formelles. Un tel excédent de sens (qu’il appelle le « supplément d’origine ») ouvre aussi bien à la violence des mécanismes identitaires et des stratégies d’appropriation du monde qu’au recommencement et à la multiplication des interprétations. On trouvera là le germe des grands thèmes de sa maturité, en particulier sa conception de l’événement comme un « à venir » incalculable, dans lequel la responsabilité individuelle ou collective est portée à l’extrême, non parce que nous serions capables de maîtriser « performativement » les conséquences de nos actes et de nos paroles, mais parce que nous savons déjà qu’ils entraîneront à l’infini la relance et la reformulation du problème du droit et de la justice.

Enfin je me souviens de toutes les circonstances dans lesquelles - depuis le secours aux intellectuels « dissidents » de Tchécoslovaquie au sein de l’association Jan Hus jusqu’aux prises de position pour les droits du peuple palestinien et la réconciliation entre les adversaires dans le conflit israélo-palestinien, en passant par la défense du droit d’asile en Europe contre les politiques sécuritaires et la stigmatisation des « étrangers », j’en passe évidemment - nous avons tenté de contribuer, en tant qu’intellectuels sans attaches sinon sans engagements, à l’émergence de ce qu’il a appelé un « nouvel internationalisme ». Non pas que nous ayons toujours été entièrement d’accord dans nos analyses et dans nos références historiques. Mais, là encore avec beaucoup d’autres, et souvent à son initiative, nous avons partagé la conviction que les intellectuels et les artistes ont un rôle propre à jouer dans la constitution d’une résistance multiforme et multipolaire à l’emprise des souverainetés d’État ou de marché qui engendrent la violence de masse et s’en nourrissent en retour. Ce qui passe par la déconstruction de leurs discours et par le dialogue constructif entre leurs adversaires (comme il venait d’en donner l’exemple en joignant ses forces avec celles de son vieil « ennemi » Habermas pour démonter la machine de propagande de la guerre sans fin contre le terrorisme et les « États voyous »).

Tout cela, qu’il s’agisse de l’avenir de l’université ou de la philosophie de l’« à venir », de la responsabilité des intellectuels et de leur place dans le monde des communications globales, est plus difficile à réfléchir sans sa contribution, mais ne cessera pas de sitôt de chercher des ressources de pensée dans son exemple et ses écrits. Adieu, cher Jacques, ou plutôt à de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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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하다!

재경위 국감 보도자료에서...

 

'작년 한 해 우리 국민은 29억병의 소주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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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다난 했던 목요일 환노위 국감

 목요일 환노위 국정감사는 정말 다사다난했다. 그리고 온라인 매체 기자로서 간만에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 뿌듯함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해보자면...

 

요즘 열우-한나라 간의 되지도 않은 이념 논쟁이 국감의 이슈아닌 이슈인지라 환노위 국감 그 중에서도 서울지방노동청 국감에 취재 나온 '메이저' 기자들은 하나도 없었다. 국감장 앞에서 장기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이 집회도 했었지만 이건 뭐 온라인 기자들도 별 관심이 없었던 터라 나 혼자 취재 했었고--;;

 

하여튼 환노위 국감장에서 대형 사고가 터졌다. 본인의 기사를 참조하시라^^  '박순석 회장, 월급 타묵고 회사 일 안하니까 문제다' http://media.jinbo.net/news/view.php?board=news&id=31133

 

연합뉴스 조차도 그 다음 날 뒷북 기사를 날렸고 여러 메이저 언론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허나 미디어 참세상을 비롯한 프로메테우스 , 매일 노동뉴스가 이미 그 소식을 전했던게지..이 세군데만 전하는 소식이 한두가지가 아니자만--;; 이 세군데에서 먼저 터뜨린 뉴스들을 보수 언론사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받아 안는 경우는 참 드문데 이번이 그 드문 경우 중의 하나인게다.

 

좀 아쉬운 것은 박순석 회장의 '국회가 깡패집단' 이냐가 일반적 휘발성이 더 강할 것은 짐작했지만 그래도 환노위 국감이고 장기투쟁 사업장에 대한 기사 인지라 난 박회장의 노조에 대한 발언을 미다시로 뽑았는데 역시나 다를까 딴 데는 전부 '깡패'를 미다시로 뽑았다는 점.

 

하여튼 이 날 있었던 이야깃 거리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이런건 술 먹으면서 추임새를 곁들여 이야기 해줘야 재밌는건데^^

 

먼저 단병호 의원 질의 직전에 정전이 된 것. 지각한 주제에 한나라당 모의원은 국회 탄압이냐는 신소리를 웃으면서 해댔으나 별 호응이 없었다--;; 단병호 의원 질의 와중에 박순석 회장이 빡내며 핏대 올리고 '깡패' '노가다 십장' 운운 한 것은 이미 쫙 기사화가 됐고...근데 박순석 이 사람은 정말 너무 하더라. 일반적으로 재벌 정도 되면 속내야 어떻든 간에 매너나 가오는 어느정도 갖추기 마련인데...역시 전사가 있어서 그런가? '국감 깜짝 스타 박순석 회장은 누구? ' http://media.jinbo.net/news/view.php?board=news&id=31134

 

그 날 박순석은 완전히 제 무덤 자기가 팠었다. 그냥 입 다물고 있으면 될 텐데 계속 헛소리 하다가 열우당은 물론이고 한나라당 의원들 한테도 딱아 세움을 당했다. (가장 압권이었던 한나라당 배일도 의원의 발언- 그런 식으로 노조를 인정치 않은면 본의원은 몰론이고 우리 한나라당이 묵과하지 않을 것이요.ㅋㅋㅋ 배일도 아자씨는 어떻게 인상 하나 안변하고 그런 말 하는지 몰라^^)

 

이 날 날씨는 더운데다가 배는 고프지요. 기자 휴게실에 놓아둔 모나카, 에이스 크래커 이런거 내가 우적우적 다 먹었다--;; 비타 오백 이런것도 몇개나 마시고...^^ 남들은 먹는둥 마는둥 하는데 사흘 굶은 넘 처럼 굴다보니 나중엔 좀 쪽팔릴라 그랬는데 그래도 그냥 계속 먹었다. 노동부 직원한테 모나카 더 없냐고 묻기 까지 했다....글구 프로메테우스 최모 기자가 현장 기사를 열라게 자기네 사무실로 노트북 컴퓨터로 전송하는걸 보고선 얼마나 질투가 나고 내 노트북--이 어찌나 미워 보이던지. 기자실에 있는 랜선을 다 잘라버리고 싶을 정도였다ㅠㅠ

 

아 참 증인 휴게실에 가서 박순석 회장 인상 찌그리고 있던거 사진 찍다가 보디가드 넘이랑 시비 붙기도 했다. '여기서 내가 한 대라도 맞으면 대 특종이 되노라'는 불타는 기자정신으로--;; 계속 나도 티껍게 나갔지만 그 넘이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하는 표정으로 피해버려서 충돌은 싱겁게 끝났다.

 

그리고 인터뷰 덕택인지 이목희, 배일도 의원은 반갑게 아는 척을 하더라. 그 양반들이 먼저 인사 하는거 답례하면서 영 뻘줌했다. 나이든 사람을 만나면 먼저 반갑게 인사하라시던 어린시절 할머니 가르치힘이 생각나기도 하고.... 게다가 정책과는 별개로 싹싹하고 성격 좋은 탓에 꼭 누나 같은 느낌이 드는 배일도 의원실 모 보좌관이 'Peyo기자님 오전 노동위에는 안 나오셨었죠. 여기 보도 자료 있어요' 하면서 주길래 하나도 안 고맙고 관심도 없었지만 '아 예 고맙습니다. 수고 많으시죠' 하고 받았다가  잠시 후 그 보도자료는 버렸다. 근데 그걸 그 보좌관한테 들키고 말았던 것이다--;; 아햏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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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적이었던 국회 토론회

국회에 있는 덩어리 큰 건물은 본회의장, 의원회관, 도서관, 헌정 기념관이다. 그 중에 헌정 기념관이 제일 조용하고 드나드는 사람들 숫자도 드물다. 뭐랄까 한국 현실 정치의 무덤 같은 느낌이 드는 건물이다. 오늘 오후 그곳에서 민노총 주최 토론회가 있었다. 감동의 물결이 넘친 나머지 참가자들은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발제자 중에도 조는 사람이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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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당의원 양대노총 위원장 연쇄 인터뷰

정말 오랜만에 이 디렉토리에 글 써보네^^

 

열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어디있겠으며 자식은 다 똑같은 자식일진데 블로그에서 너무 편애를 하지 않았나 싶어 마음이 아프다--;;

 

사실상 아무꺼나나 취재뒷다마 혹은 라 마시께따에다가 재밌고 맘 편하게 글 쓸려고 만든건데 이건 '오늘은' 때문에 너무 허덕거리니 나 원 참, 참 나 원, 혹은 원 나 참.

 

하여튼 골때리는 열린우리당 인권위원장 이후로 여기다간 처음인데..그 후에 무슨 기사들을 썼더라? 이경해 열사 일주기 집회 스케치 기사 썼고...연속 인터뷰 했고 뭐 그 정도지 싶다. 이경해 열사 일주기 때는 너무 힘들었다. 비가 많이 오는데다가 사진 찍으러 앞뒤로 뛰어다니느라 그 비 흠뻑 맞았고..그나마 인도네시아 출신 비아 깜뻬시냐 여성 활동가랑 인터뷰 한게 기억에 남네...

 

그 집회  끝나고 며칠 후 노동부에서 대형사고 하나 터뜨렸다. 파견법, 기간제법 개악안 발표~ 두둥

 

그 발표 이후에 연속 인터뷰 기획안을 잡았다. 사실 그 때는 4인 연속 인터뷰였는데 단병호 의원이 한노총 이용득 위원장도 꼭 하라고 권유해서(초기 단계에 이용득 위원장도 포함시킬까 했다가 약 10초간 고민한 후 접었었는데--;;) 5인 연속 인터뷰로 바뀌었다.

 

시간도 촉박한데다가 일이십분 인터뷰 하는 것도 아닌지라 스케쥴 잡는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약간의 뻥을 적절히 활용한 덕에 하여튼 열우 이목희, 한나라 배일도, 민주노동 단병호, 민노총 이수호, 한노총 이용득이라는 라인업으로 연속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인터뷰 진행할 때는 그냥 정신없이 했는데 돌이켜 보니 너무 빡셌다ㅠㅠ 스케줄 잡기,인터뷰이의 최근 발언들과 행적 체크하며 질문지 작성하기, 한자락 혹은 두자락씩 깔고 인터뷰 하기(비위 맞추기와 살살 약올리기를 병행하는 괴로움이란...), 돌아와서 테잎 확인 하며 빠진 부분 메우기, 초벌 원고 가지고 말 안되는 부분 고치며 원고 정리하기...흑흑 이걸 하루에 나 혼자 다 한다는건 참 힘들더라.

 

다음에는 여유를 가지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골백번도 더 들었다.

 

참 이 다섯명 가운데 정식 공문을 보내 인터뷰 요청 하라고 한 측은 두군데다. 이목희 의원실이랑 민노총 교선실--;;

 

배일도 아자씨 인터뷰 할때는 그와 나 사이의 과거의 끈끈한 인연을 상기시켜 줄까 하다가 말았는데^^(그 인연을 공유하고 있는 모 기자는 한나라당사에서 배일도 의원 만났을때 그 기억을 상기시켜줬다더라, 엄청 반가와 했다나 머라나ㅋㅋ) 인터뷰 끝나고 나니까 자신의 명저(?) '공존의 꿈'을 선물로 주더라.

 

연쇄 인터뷰 동안 나름대로 특종도 몇가지 있었다. 이목희 의원이 이 법안의 문제점들에 대해 최초로 공식적으로 인정을 했으며 민노총 각급 조직의 투쟁체 전환이나 구체적 로드맵이 공개된것도 이 인터뷰가 최초다. 게다가 한국노총으 정확한 입장도 우리가 최초로 밝혔고...

 

근데 아무 반향도 일으키지 못했다--;; 이 인터뷰 받아서 기사 쓰는 넘들 하나도 없더라ㅠㅠ 남들 보라고 기사 쓰는건 아니지만(아니지 남들 보라고 쓰는거 맞지 나 혼자 볼려면 왜 쓰나?) 이럴 땐 참 맥 빠진다.

 

첨언: 보자마자 나한테 턱하니 말 놓은 사람은 단병호 의원이 유일하다. 근데 기분이 하나도 안 나쁘더라. 딴 사람들 인터뷰할 땐 잔머리 굴리면서 바둑두는 기분으로 포석 깔면서 질문했는데 단의원 인터뷰 할 땐 그냥 궁금한 거 솔직하게 묻고 답변 들었다. 제일 편한 인터뷰 아니었나 싶다.  이수호 위원장 인터뷰할땐 좀 공세적으로 나가볼까도 싶었는데 그 양반 얼굴도 말이 아닌데다가 나름의 고충을 듣곤 마음이 약해졌더랬다. 이용득 위원장은 젤 화끈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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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때리는 열린우리당 인권위원장.

 며칠전에 국보법 관련 국회 취재를 나갔다. 민가협 하고 열우 인권위원장 조성래 의원 면담 자리였는데 사실 별 기대를 안하고 갔다. 열우당에도 국보철폐론자들이 꽤 많은 상황이니 인권위원장이면 당연하게 폐지론자겠거니 하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게 왠일 이람!! 자칭 인권변호사 출신 조성래는 강력한 폐지 반대론자 였던 것이다. 카메라가 없었기 떄문인지 조성래 의원은 황당한 발언들을 민가협 회원들 앞에서 계속 쏟아내더라. 기사화 한게 대부분인데 빠진 몇가지를 들어보자면...'우리한테 표를 주고 말고를 떠나서 국보법 폐지 반대라는 내 생각엔 변함이 없다' '우리는 화해와 관용 정신을 가져야 한다.'(이건 국보찬성론자들을 관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웩) '나에게 강요하지 마라'(국보철을)

 

민가협 엄마들은 뒤집어 지기 시작했고 한나라당이랑 다를바가 없다는 발언들을 했다. 조성래 왈 '부산 가서 물어보세요.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항상 낮은 곳으로 임하는 사람입니다'

 

머 열우 내의 관료출신 어떤 의원이 이런식으로 말한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소위 인권변호사 출신의 인권위원장의 뚫린 입에서 저런 버라이어티한 발언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니까 참 황당터라.

 

조성래가 누군가? 초선의원이지만 노무현 직계 부산사단의 좌장으로 불리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난 조성래가 그냥 나오는 데로 말한게 아니라 어떤 노림수가 있는건 아닐까 하는 속셈이 든다. 그날 아침에 이미 조성래는 열우 전략회의인지 나발인지에서도 그런 말을 한 모양인데...여권이 국보철 하겠다는 생각이 있는건지 없는건지 심히 우려스럽다. 이 쉐이들이 안 나서면 사실 안 되는것 아닌가?

 

조성래의 황당한 발언들을 듣고 노회찬 의원실에 가서 일러주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멘트 딸라고...

 

첨에 노회찬의원은 안 믿더라. 황당해하면서...그래서 설마 내가 지어냈겠냐고? 진짜라고 몇번이나 강조하니까 믿더라--;; 기사화 하지 않은 노회찬의 말 한마디 '인권 변호사는 무슨 인권변호사 먹고 살라고 변호한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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