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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중동지를 면회하고

김득중동지 (당시 조직실장) 면회 후기 (1월 25일)

 

- 김득중동지의 부인을 두번째 만난것은 1월 18일 22명에 대한 결심공판 때 였다.

 이날은 아들과 함께였다.

 " 몇학년이냐? "

 " 5학년이요!" 아빠를 닮아서인지 키도 크고 눈이 선하다. 긴 재판정이 지루한지 몸을 뒤척이고, 싱글벙글 장난기 넘치는 표정이다.

 

이날 재판정은 입추의 여지없이 꽉들어 찼다. 

재판에 관여한 한사람 한사람의 발언을 들을려고 법원관계자가 주의를 주지않더라도 숨죽이며 조용.

재판에 관여한 사람이라니 ! 높은 좌석의 판사, 좌에 검사, 우에 변호사와 피고인, 등짝을 보이고 증인을 말한다. 

이 배석과 높낮이는 아마도 1910년 한일합방때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4각형의 가운데 앉아서 토끼처럼 똥그랗게 뜨고 기록하는 서기는 100년 전에도 저런 초점없는 눈을 하고 있었을것이다. 자신이 타자기로 치고 있는 한자한자가 모두 억압과 저항의 역사적 기록임을 알고는 있는걸까?  

 

재판에 관여할 수 없는 관객(?)들의 맨 앞좌석에는 피고인들의 부모들로 보이는 노인들이 앉아계신다. 

자식들의 뒷모습일망정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자식을 보고픈 욕심때문 이리라.

당신이 낳고 기른 자식이 무엇을 잘못했길래 지금 저자리에 앉아 검사로부터 구형 5년을 받고 있단 말인가?

법없이도 잘 살았던 자식이 왜 감옥에 갇혀있는가?

 

동지들의 최후진술이 시작되었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울음소리 !    

늙은 어머니는 내새끼를 감옥에 가두어 놓은 죄로 울었고

부인은 남편을 품에서 빼앗겨 서러워 우는듯 보였다.

눈치빠른 어린 자식은 아빠의 소리를 듣고 우는 엄마를 따라 울었다.  

 

- 김득중 동지네는 특히 서럽게 울었다.

  김득중 동지가 서럽게 울었기 때문이다.

 

" 잊지 못할 것이 있습니다.

 동료의 아내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있던 날 회사는 오필승 코리아를 계속 틀었습니다.

당신들이 10년 20년 함께 생활했던 동료로 왔다 라면 제발 하루만이라도 시간을 갖자고 했습니다.

그러던 저희들한테 폭도로 규정했습니다.

경찰과 수사대가 침투하기 시작했고 옥상에 있는 저에게 수많은 조합원들의 급한 무전기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옥상위로 날아오는 볼트 너트를 피해서 조합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헬기에서 수없이 떨어지는 최루액을 피해서 뛰어다니는

조합원도 보았습니다. 물대포를 온몸으로 막는 조합원도 보았습니다. 밤마다 경찰들이 고성을 지르면서 잠을 못 재웠습니다.

며칠 밤을 못 잤는지 모릅니다.

단전 단수 가스 차단 주먹밥으로 한 달 가까이 끼니를 때웠습니다. 진물이 나고 발이 썩어 들어가는 조합원을 봐도 치료조차

못 받았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비참한 현실에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때마다 정문 앞에 연두색 옷을 입은 가족들이 보였습니다. 당당한 아빠로 기억되고 싶었습니다.

저와 조합원들은 공장을 포기 할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 품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진짜 두렵고 무서웠지만 물러서지 않고 버텼습니다."

 

- 살이 오르고 건강한 모습이다.

" 편지해 !"

" 재판중이라서  ! 여기는 걱정말고 밖의 동지들이 잘 했으면 해요! " 

 

내가 알고있는 김득중 동지는 자신의 이해보다는 전체의 이익을 우선시했다.

자신의 말을 앞세우기보다는 상대말을 듣는 것을 중시했다. 

비관적이기보다는 부족한점을 메우려 했고, 매사에 웃는 얼굴 이었다.  

남들의 비판을 달게 받아들였으며, 자신의 부족한점에 대해서는 부끄러워 할줄 알았다.

결정된 일을 이러저러한 이유로 방기하지 않았으며, 늘 자신이 앞장서서 성사를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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