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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Asia Cultural Studies, Volume 11, Number 4, 2010에 실린 진광흥과 백낙청 선생의 인터뷰 “Intellectual engagement under the conditions of the division system: an interview with Paik Nak-chung”, 그리고 영어로 번역된 진광흥의 “Paik Nak-chung’s theory of overcoming ‘division system’”을 읽어봤다. 이번 주는 봄방학인데, 내일 수업은 그래서 보너스 수업이라 할 수 있고, 백낙청 선생에 대한 소개를 하게 된다. 진광흥과 백낙청의 이론적 프레임의 유사성을 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백낙청 선생의 논의가 생각보다는 간단치 않지만, 내가 보는 맥락에서는 역시 "외인론"의 계보에 놓일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먼저 인터뷰에서 백낙청 선생(이하 존칭 생략)은 기존의 사회과학의 선입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어디에서든지 분단체제 극복 운동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분단의 제약이 사회 각 영역에 삼투해 있다는 의미인데, 이는 앞서 asia as Method에서 언급한 바 있는 진광흥의 지배심급과 유사한 성격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현실에서는 완전히 같지는 않은 것 같지만. 진광흥은 식민지에서 지배심급은 식민체제라고 했고, 이를 비판적 혼합이라는 주체성의 윤리 원칙과 결합시키고자 했다. 만약 분단체제와 식민체제가 모두 인과성의 원리에 따른 결정적 심급이 아니라, 오히려 각 심급을 관통하며 총괄적으로 매개하는 관계적 심급이라면, 백낙청과 진광흥의 이론적 친화성이 매우 분명해진다. 문득 사카이 나오키가 예전에 맥주를 마시며 같은 이야기를 했던 일이 떠올랐다. 나오키는 이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어도 한국어도 모르는 나오키는 이를 어떻게 벌써 알았을까? 그때는 아직 백낙청 특집 영문판이 나오지 않았던 때인데…
지배심급으로서 ‘분단 체제’는 분단 하의 민중들을 포괄한다. 다시 말해서, 분단의 제약과 영향 아래 있지 않은 민중은 없다. 그렇지만, 분단 극복의 주체와 여러 심급의 피억압 민중은 일치하지 않거나 적대적일 수 있다. 예를 들면, 김대중 정권에서 화해 노선(햇볕 정책)과 같은 분단극복 주체의 정권이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민중에 억압적이었던 것과 같다. 이는 지배 심급으로서의 분단체제가 관계적 심급이 아니라 주체를 갖는 운동의 심급이 될 경우, 탈식민/탈제국에 대립하는 국가주의로 나아갈 위험이 있음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이렇게 말해 볼 수 있다. ‘민족’ 운동(‘식민분단체제극복’을 포함)은 주체를 갖는 운동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 심급에서 민중이 비판적 공통인식(역사적 민족주체성)을 갖기 위한 자각 운동인 것이다. 노신의 ‘국민성’ 비판과 개조도 이런 맥락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국가주의로 나아가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물론 ‘민중’적 관점이 불가결하다. 그런데, 분단 체제로 인해 남한 사회를 기본 분석 단위로 볼 수 없다는 백낙청의 논리에서 묘사될 수 있는 민중은 분단 체제 하의 민중일 뿐이다. 이는 사실상 남한과 북한 내부의 모순과 무관하게 도출된 민중이며, 기본적으로 계급적 사회적대를 고려하지 않는 민중이다. 따라서 백낙청의 논리에서 민중은 대체적으로 ‘수사’에 불과하게 된다.
진광흥은 “Paik Nak-chung’s theory of overcoming ‘division system’”에서 기본적으로 백낙청의 논의를 재구성하면서, 남한에서 창비 그룹이 ‘민족주의 좌파’로 평가되는 것에 대해 정당하지 못하다고 반박한다. 물론 내가 보기에 실제로 백낙청의 논의에 민족주의 대한 성찰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런 효과까지 없음을 단정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제는 ‘좌파’라는 말을 붙이기도 민망하다. 스스로도 ‘중도’를 슬로건으로 내걸지 않았던가. 심지어 진광흥은 백낙청의 민족주의 비판과 서구화 비판의 입장이 노신과 유사하다고 감탄할 정도이다. 진광흥은 백낙청의 독특한 지적 입장이 서구에서 이식된 이론으로 무장한 다른 사회과학자들과의 지적 배경의 차이 때문이라고 본다. 진광흥은 백낙청의 사상적 자원으로 ‘세계체계론’, ‘문학적 훈련으로서 제3세계 문학’, ‘식민 역사 경험’을 들고 있다. 진광흥은 특히 80년대의 사회구성체논쟁에서의 분기를 언급하는데, 1986년 “민족문학이 민중문학이다”라는 언급에서 계급운동에 예술이 희생될 수 없다는 주장을 인용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박현채와 백낙청의 분기를 통해서 보면, 당시의 논점은 예술의 희생이라기 보다는(조사가 필요하겠지만 없지는 않았을 것 같다), 오히려 역사적 변화에 따라 사실주의적 문학이 무엇을 다룰 것인가의 문제였다. 다시 말해서,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되던 남한 사회에서 민중문학이 역사적 변화에 조응하는 사회적 인식을 가져야만 더욱 민족적이고 민중적인 문학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역사적 변화에 대한 인식 없이 “민족 문학이 곧 민중문학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역사적 ‘민족’에 현실적 ‘민중’을 환원하는 반지성주의적 논리가 될 수 있다. 진광흥이 여기에서 백낙청의 논리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사실상 당시의 논쟁을 탈맥락화하는 것이다. 진광흥은 백낙청의 논의를 거들면서, “소작농이 지배적인 사회가 직접 마르크스주의를 채택함으로써 분석될 수 있겠느냐?”라는 표현을 덧붙이는데, 80년대 남한이 이미 고도의 산업화 사회로 전환된 맥락과 이 논쟁의 관련성을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이어 또 다른 탈맥락화가 다시 출현하는 듯 하다. 진광흥은 백낙청과 한국의 사회과학계의 분기를 일방적으로 수입된 서구이론에 식민화된 사회과학자의 몰이해로 해석한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과학자 가운데에는 박현채와 같은 서구이론이라기 보다는 체화된 제3세계적 비판 이론으로 무장한 이론가도 있었고, 그 역시 백낙청과 분기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회구성체논쟁 2기로 넘어가면, 진광흥이나 백낙청의 비판이 일정하게 유효할 지도 모르겠다.
백낙청은 분단체제를 외적 모순으로 상호 작용하는 각각의 내적 모순과 한반도 전체에 대한 외적 모순에 의해 재생산되는 시스템으로 이해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분단체제’ 극복을 논의하면서, 분단의 원인에 대한 설명이 소략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극복’을 논하려면, 그 문제 상황을 빚은 역사적 원인을 먼저 살피는 것이 올바른데 그 순서를 밟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분단 체제의 재생산을 통해서 그 주체를 소묘하는데, 자세히 보면 그 주체는 궁극적으로 ‘민족’을 경유한 ‘국가’이다. 모순은 남한/북한 사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한과 북한의 사이 그리고 한반도와 그 외부 사이에 있을 뿐이다. 결국 나중에 백낙청은 분단의 주요원인이 바로 ‘외세의 개입’이었다고 고백한다. 물론 외세의 개입이 없었다면 분단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역사를 민중의 주체적 시각에서 내재적으로 본다면 외세가 개입할 수 있는 조건은 우리 안에 있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역사의 주체에 대한 고민이 부재하기 때문에 “결혼한 커플”이라는 비유를 쓸 수 밖에 없게 된다. 이는 본래 분단의 양 측의 국가를 커플에 비유하는 것인데, 도대체 분단 이전에는 이 커플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는 식민과 분단을 분리하는 역사관, 다시 말해 탈역사화이다. 결국 이렇게 국가를 중심으로 한 분단극복과 통일은 국가 자체를 변혁하는 과정 없이 분단 체제만을 변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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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 올린 중국어의 한국어 원문]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도시 철거민 투쟁은 기본적으로 '생존권' 투쟁이다. 즉 재개발로 인해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한 세입자 또는 거주민(대체로 도시 빈민)이 그 투쟁의 주체들이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저소득으로 인해 빈곤한 지역에 저렴한 주거 비용으로 거주하는 자들로서 재개발로 인한 보상금으로는 자신의 직장 및 생활권에서 안정적인 거처을 구할 수 없어 더욱 먼 곳 내지 더욱 열악한 곳으로 이주해야 하기 때문에 종종 '목숨'을 걸고 투쟁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삶의 조건이 심각하게 열악해지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에서 내가 흥미롭게 느껴지는 지점은 '왕가'가 그러한 의미의 철거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거권' 등의 권리 담론 하에 상당수의 학생 및 지식인 등이 결집해서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아마도 '주거권'을 폭넓게 해석해서 '현대화' 자체에 대한 비판과 결부 지을 수도 있겠지만, 이는 내가 보기엔 대중과 유리된 ‘지식인 중심적’ 담론이기 쉽다. 왜냐하면 ‘현대화’는 성찰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추구의 대상이기도 하며, 거기에서 물질문명 자체에 대한 거부의 논리를 직접 끌어낼 수는 없고, 이는 일반적 상황에서 대중의 요구도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도시의 발전 과정에서 일부 낙후된 지역은 재개발을 통한 주민들의 삶의 조건 향상이 매우 절실하다. 이는 ‘반현대화’가 아니고, 도시 발전에서 재분배를 실현하는 ‘현대적’ 방식이다. 만약 지식인들이 문화적 유적이기 때문에 보존해야 한다고 해도, 개발을 통한 낙후된 주거 환경 개선의 실익이 더 크다는 공동체의 대중적 합의가 있다면 개발 자체를 반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도시 재개발에서 주거권 보장은 철거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의 명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유사한 수준의 주거 환경이 보상 등의 방식으로 보장되는지의 문제이다. 왕가의 경우는 그래서 주거권의 차원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물론 이에 앞서 도시 재개발이 올바른 방향으로 계획되었는지에 대한 내용 및 절차적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왕가 사건을 통해서 이 문제가 이슈화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일반적 상황에서 도시 재개발은 낙후 지역을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주민들을 몰아내 다시 게토 및 슬럼 등의 거주환경이 열악한 도시 빈민지역을 형성한다. 그래서 ‘주거권’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다. 만약 대만의 상황도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그러한 약소자의 피해를 해결하는 집단적 참여의 과정 속에서 그들이 운동의 주체가 되도록 하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왕가 사건의 경우 사건 자체가 그런 방식으로 이슈화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나는 도시 빈민의 주거권 문제라는 대중적인 의제가 지식인 중심적이고 탈계급적인 ‘반현대성’의 의제로 치환된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운동의 주체가 모호해지는 것은 아닌지 질문하게 된다. 사회의 진보와 변화는 지식인을 매개로 한 대중들의 각성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지식인과 활동가의 실천은 철저하게 대중들의 인식수준에 제약 받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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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용산, 두리반, 마리로 이어졌던 일련의 사태와 관련해서, 대만의 사례도 흥미로운 점이 있네요. 한국의 경우는, 최근 사회적으로 주목 받는 사례들은 (도시 하층의) '주거권'이 논의의 중심에 서기 보다는 도심재개발로 인한 '재산권'을 중심으로 전선이 형성되는 것 같은데요...그러니깐 정당한 보상 말이지요. (또 이런말하면 돌 맞을지 모르지만) 한국도 마찬가지로, 다분히 중간계층의 위기를 반영한 성격이 보이기도 하고요. 믈론, 도심재개발과 관련된 국가와 자본의 '탈취'와 각종 유무형의 폭력도 중요하지만요. 문제는 무슨 재산권이나 주거권이나 이러한 논의를 재기하거나 보다 충분히 논의를 진전시키지도 못하고, 일부에 미디어와 지식인, 학생, 활동가 등에 의해 투쟁 '쇼핑'으로 전유되는 것 같은데, 본격적으로 이를 다루는 단위도 거의 없고요. 사실, 뉴타운 열풍이 불었을 때도 이를 제대로 다루지도 못했던 것 같고요.관리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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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저도 두리반 등의 사례가 머리에 떠올랐습니다만, 전후 맥락을 자세히 모르고 있어서 언급을 안했는데, 비슷한 측면이 있는가보군요. 나름 정리가 필요한 사안인 듯 합니다.관리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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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공간이 공과 사가 어우러져서 예측 불가능한 그 어디론가 향하는, 예컨대 혁명으로 향하는 궤도에 오를 수 있는 공간이라면 도시재개발이, 젠트리피케이션을 통한 공과 사의 엄격하고 적대적인 구분으로, 도시공간을 자본의 논리에 종속시키는 면에 주목하고 싶네요. 이런 맥락에서 주거권의 사회주의적 [재]해석이 필요하지 않나 하구요.관리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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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락된 이야기를 첨언합니다. ‚슈트트가르트 21’이라는 독일 바덴 뷔르템베르크 주 슈트트가르트시 중앙역 개조사업에 저항하는 시민운동이 있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자세히 분석하지는 못했지만 이 시민운동을 계기로 하여 녹색당이 처음으로 주차원에서 정권을 창출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 시민운동은 주거권문제보다는 도시공간이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어서는 안된다는 시민의 예민한 감각이 폭발한 운동이 아닌가 합니다.재밌는 것은 ‚슈트트가르트 21’ 이 2011.11.27 국민투표에서58.8% (반대 41.2%)의 지지를 받았지만 행정법원의 판결로 사업 일부를 진행할 수 없게 된 상황입니다. 지하수방출과 종보호법(Artenschutzgesetz)에 걸려서 그리 되었습니다. 중앙역 앞 공원의 나무에서 사는 딱정벌레류인 Juchtenkäfer를 보호해야 한다는 이야기죠. 공사를 진행하려면 나무를 다 베어야 하는데 벌목이 금지된 상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