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주여 이제는 여기에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메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고향도 없다네 지쳐 몸 눕힐 무덤도 없이
겨울 한 복판 버림받았네 버림받았네
 

 
아 거리여 외로운 거리여
거절당한 손길들의 아 캄캄한 저 곤욕의 거리
어디에 있을까 천국은 어디에
죽음 저 편 푸른 숲에 아 거기에 있을까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가리라 죽어 그리로 가리라

고된 삶을 버리고 죽어 그리 가리라

끝없는 겨울 밑 모를 어둠

못 견디겠네 이 서러운 세월

못 견디겠네 이 기나긴 가난

못 견디겠네 차디찬 이 세상

더는 못 견디겠네

어디 계실까 주님은 어디

우리 구원하실 그분

어디 계실까 어디 계실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대만 도시 재개발

http://www.flickr.com/photos/coolloud/sets/72157629396219902/with/6907702026/

 

대만 사회운동에 대해서는 그다지 직접 관계하지 않은 지 좀 되었다. 박사반 들어와서는 공부에 전념해야 했던 사정도 있었고, 대만 사회운동 문화에 대한 답답함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답답함은 나의 지적 무능력을 증명하는 것이다. 내가 지난 5년 경험하고 관찰한 결과 대만은 진보적 운동의 주체가 일부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어떤 건강한 대중 조직으로 발전하는 사례가 거의 없다. 극소수의 예외적 사례로 들 수 있는게, 결혼이주여성 운동과 성노동자운동 정도가 아닐까 싶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나는 많은 한계를 느끼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를 대만적인 운동의 문화라고 보고 있는데, 이를 해명하기가 쉽지는 않다.

 

근래에 대만에서 나의 이 답답함을 다시 일깨워주는 사건이 있었다. 대북(台北)의 왕(王)씨  성을 가진 사람의 집이 도시 재개발에 의해 강제로 철거를 당하게 된 것이다. 지난 3월 28일 철거가 되면서 그 후 지금까지도사회운동, 야당인 민진당, 학계 및 문화예술계까지 현장으로 집결하여 여론을 형성하고 있다. 내 경험으로는 몇년 전 낙생원(한센병 환자 주거지 강제철거) 이후 처음 보는 경찰과 학생들의 충돌이었다. 우선 관련 기사들을 종합해본 결과, 개발지구에 15층 규모의 주택을 건설할 예정이고, 지난 여름에 이미 다른 주민들로부터 동의를 받아 철거를 준비해왔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개발상이 왕씨에게 9천 6백만 ntd(우리돈으로 약 35억)까지 보상금액을 제시했으나, 왕씨는 몇 대에 걸쳐 오랜동안 살아온 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이주를 거부해왔다고 한다. 왕씨를 도운 이들은 대만 <도시재개발 피해자 모임>이라는 단체이다. 이 단체에는 내가 잘 아는 열정적인 친구도 있는데, 왕씨와 함께 그리고 사회운동과의 연대를 통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에는 개발상의 이익과 왕씨의 이익이 표면적로 충돌하고 있다. 물론 그 배후에는 도시 재개발을 둘러싼 자본과 민중의 충돌도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공권력의 강제철거는 분명 개발상의 이윤 확보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강제철거에 반대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도시 재개발을 친민중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운동단체들은 왕씨의 '주거권' 또는 '사유재산권'을 옹호하고, 정부는 법적 승인을 거친 개발상의 '개발권'을 옹호하는 형국이다. 문제는 이러한 운동 내부에서 먼저 검토되었어야 할 정부의 도시계획과 재개발 정책의 문제에 대한 분석과 대안은 거의 부재하다는 것이다(이는 활동가/지식인의 역할이다). 그리고 그 운동의 주체와 성격이 매우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나는 대만에서 왜 그렇게 많은 학생들이 이례적으로 모여 경찰과 충돌하고 왕씨의 주거권을 지키고자 했는지 궁금해졌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거의 부재하다시피한 대만에서 이러한 충돌은 일종의 예외적 사건이다.  그래서일까? 그토록 상업주의적인 대만 언론은 열심히 카메라에 이 학생들을 담는다.  본질적으로 신자유주의적 노선을 걸어왔던 야당 민진당과 기타 여러 부류의 사회운동의 활동가들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대만의 사회운동의 주체성의 문제를 다시 고민하게 된다.

 

포퓰리즘적 대리주의적 운동... 특히 지식인과 학생은 그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경찰에 붙잡혀가는 그릇된 정의감이 주는 쾌감 때문일까? 학생들은 그렇다치고, 연구자들이나 교수들도 유사한 행동을 하고 있는데 그들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낙생원과 마찬가지로 지금 철거된 왕씨 집은 학생들과 연구자들 및 예술가들의 축제의 장이 되어 가고 있다. 그곳은 그들에게 오랜만에 '정의로운 나'를 확인하는 장소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모르겠다. 이번 철거가 있기 전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철거'의 희생자가 되었을텐데, 그들은 다 어디로 가고 왕씨만 남았을까? 그리고 왕씨는 진정한 운동의 주체일까? 낙생원 운동에 대한 여러 비판들이 많았는데, 그에 대한 반성은 대만 사회운동 안에서 다시 망각된 것일까? 시간이 지나면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결국 자기자리로 돌아갈 뿐이다. 그리고 남는 것은 무엇인가?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을 남기는가가 아닐까?

 

지식인의 역할은 그것이 활동가이든 비판적 지식인이든 대중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입을 통해 대중의 주체화라는 소임을 다하면서 자연스러게 사라지는 것일테다. 그러한 반복적 개입과 소멸이 바로 지식인의 역할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대만의 작금의 상황이 다시 한번 지식인들이 사회운동의 의제를 독점하거나 치환하여 자기 욕망의 필요에 따라 소비하고 궁극적으로 대중의 주체화를 지연시키는 대만 문화의 연속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닐까 우려된다. 이 끈질긴 연속성은 어디서 오는가? 내가 보기에 아마 지식인 문화에서 오는 것이지 싶다. 이는 대중들이 지식인을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인 것 같다. 대중은 지식인 보다 아래에 있어 도움을 구하지만, 궁극적으로 지식인을 신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계급적 본질이 다름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만의 노동조합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한계를 극복한 경험이 없었던 대만의 사회운동은 유/무의식중에 사실 자유주의에 복무하는 사회운동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식인의 급진적 주장도 그것이 대중과 결합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저 자기만족적인 것이고, 오히려 대중과 지식인의 지적 위계(나아가 계급적 위계)를 재생산하는 반동적 주장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댓글 목록

분단체제론과 진광흥의 해석에 관한 논평

藝術人生님의 [] 에 관련된 글.

 


**
Inter-Asia Cultural Studies, Volume 11, Number 4, 2010에 실린 진광흥과 백낙청 선생의 인터뷰 “Intellectual engagement under the conditions of the division system: an interview with Paik Nak-chung”, 그리고 영어로 번역된 진광흥의 “Paik Nak-chung’s theory of overcoming ‘division system’”을 읽어봤다. 이번 주는 봄방학인데, 내일 수업은 그래서 보너스 수업이라 할 수 있고, 백낙청 선생에 대한 소개를 하게 된다. 진광흥과 백낙청의 이론적 프레임의 유사성을 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백낙청 선생의 논의가 생각보다는 간단치 않지만, 내가 보는 맥락에서는 역시 "외인론"의 계보에 놓일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먼저 인터뷰에서 백낙청 선생(이하 존칭 생략)은 기존의 사회과학의 선입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어디에서든지 분단체제 극복 운동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분단의 제약이 사회 각 영역에 삼투해 있다는 의미인데, 이는 앞서 asia as Method에서 언급한 바 있는 진광흥의 지배심급과 유사한 성격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현실에서는 완전히 같지는 않은 것 같지만. 진광흥은 식민지에서 지배심급은 식민체제라고 했고, 이를 비판적 혼합이라는 주체성의 윤리 원칙과 결합시키고자 했다. 만약 분단체제와 식민체제가 모두 인과성의 원리에 따른 결정적 심급이 아니라, 오히려 각 심급을 관통하며 총괄적으로 매개하는 관계적 심급이라면, 백낙청과 진광흥의 이론적 친화성이 매우 분명해진다. 문득 사카이 나오키가 예전에 맥주를 마시며 같은 이야기를 했던 일이 떠올랐다. 나오키는 이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어도 한국어도 모르는 나오키는 이를 어떻게 벌써 알았을까? 그때는 아직 백낙청 특집 영문판이 나오지 않았던 때인데…

 

지배심급으로서 ‘분단 체제’는 분단 하의 민중들을 포괄한다. 다시 말해서, 분단의 제약과 영향 아래 있지 않은 민중은 없다. 그렇지만, 분단 극복의 주체와 여러 심급의 피억압 민중은 일치하지 않거나 적대적일 수 있다. 예를 들면, 김대중 정권에서 화해 노선(햇볕 정책)과 같은 분단극복 주체의 정권이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민중에 억압적이었던 것과 같다. 이는 지배 심급으로서의 분단체제가 관계적 심급이 아니라 주체를 갖는 운동의 심급이 될 경우, 탈식민/탈제국에 대립하는 국가주의로 나아갈 위험이 있음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이렇게 말해 볼 수 있다. ‘민족’ 운동(‘식민분단체제극복’을 포함)은 주체를 갖는 운동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 심급에서 민중이 비판적 공통인식(역사적 민족주체성)을 갖기 위한 자각 운동인 것이다. 노신의 ‘국민성’ 비판과 개조도 이런 맥락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국가주의로 나아가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물론 ‘민중’적 관점이 불가결하다. 그런데, 분단 체제로 인해 남한 사회를 기본 분석 단위로 볼 수 없다는 백낙청의 논리에서 묘사될 수 있는 민중은 분단 체제 하의 민중일 뿐이다. 이는 사실상 남한과 북한 내부의 모순과 무관하게 도출된 민중이며, 기본적으로 계급적 사회적대를 고려하지 않는 민중이다. 따라서 백낙청의 논리에서 민중은 대체적으로 ‘수사’에 불과하게 된다.

 

진광흥은 “Paik Nak-chung’s theory of overcoming ‘division system’”에서 기본적으로 백낙청의 논의를 재구성하면서, 남한에서 창비 그룹이 ‘민족주의 좌파’로 평가되는 것에 대해 정당하지 못하다고 반박한다. 물론 내가 보기에 실제로 백낙청의 논의에 민족주의 대한 성찰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런 효과까지 없음을 단정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제는 ‘좌파’라는 말을 붙이기도 민망하다. 스스로도 ‘중도’를 슬로건으로 내걸지 않았던가. 심지어 진광흥은 백낙청의 민족주의 비판과 서구화 비판의 입장이 노신과 유사하다고 감탄할 정도이다. 진광흥은 백낙청의 독특한 지적 입장이 서구에서 이식된 이론으로 무장한 다른 사회과학자들과의 지적 배경의 차이 때문이라고 본다. 진광흥은 백낙청의 사상적 자원으로 ‘세계체계론’, ‘문학적 훈련으로서 제3세계 문학’, ‘식민 역사 경험’을 들고 있다. 진광흥은 특히 80년대의 사회구성체논쟁에서의 분기를 언급하는데, 1986년 “민족문학이 민중문학이다”라는 언급에서 계급운동에 예술이 희생될 수 없다는 주장을 인용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박현채와 백낙청의 분기를 통해서 보면, 당시의 논점은 예술의 희생이라기 보다는(조사가 필요하겠지만 없지는 않았을 것 같다), 오히려 역사적 변화에 따라 사실주의적 문학이 무엇을 다룰 것인가의 문제였다. 다시 말해서,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되던 남한 사회에서 민중문학이 역사적 변화에 조응하는 사회적 인식을 가져야만 더욱 민족적이고 민중적인 문학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역사적 변화에 대한 인식 없이 “민족 문학이 곧 민중문학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역사적 ‘민족’에 현실적 ‘민중’을 환원하는 반지성주의적 논리가 될 수 있다. 진광흥이 여기에서 백낙청의 논리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사실상 당시의 논쟁을 탈맥락화하는 것이다. 진광흥은 백낙청의 논의를 거들면서, “소작농이 지배적인 사회가 직접 마르크스주의를 채택함으로써 분석될 수 있겠느냐?”라는 표현을 덧붙이는데, 80년대 남한이 이미 고도의 산업화 사회로 전환된 맥락과 이 논쟁의 관련성을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이어 또 다른 탈맥락화가 다시 출현하는 듯 하다. 진광흥은 백낙청과 한국의 사회과학계의 분기를 일방적으로 수입된 서구이론에 식민화된 사회과학자의 몰이해로 해석한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과학자 가운데에는 박현채와 같은 서구이론이라기 보다는 체화된 제3세계적 비판 이론으로 무장한 이론가도 있었고, 그 역시 백낙청과 분기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회구성체논쟁 2기로 넘어가면, 진광흥이나 백낙청의 비판이 일정하게 유효할 지도 모르겠다.

 

백낙청은 분단체제를 외적 모순으로 상호 작용하는 각각의 내적 모순과 한반도 전체에 대한 외적 모순에 의해 재생산되는 시스템으로 이해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분단체제’ 극복을 논의하면서, 분단의 원인에 대한 설명이 소략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극복’을 논하려면, 그 문제 상황을 빚은 역사적 원인을 먼저 살피는 것이 올바른데 그 순서를 밟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분단 체제의 재생산을 통해서 그 주체를 소묘하는데, 자세히 보면 그 주체는 궁극적으로 ‘민족’을 경유한 ‘국가’이다. 모순은 남한/북한 사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한과 북한의 사이 그리고 한반도와 그 외부 사이에 있을 뿐이다. 결국 나중에 백낙청은 분단의 주요원인이 바로 ‘외세의 개입’이었다고 고백한다. 물론 외세의 개입이 없었다면 분단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역사를 민중의 주체적 시각에서 내재적으로 본다면 외세가 개입할 수 있는 조건은 우리 안에 있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역사의 주체에 대한 고민이 부재하기 때문에 “결혼한 커플”이라는 비유를 쓸 수 밖에 없게 된다. 이는 본래 분단의 양 측의 국가를 커플에 비유하는 것인데, 도대체 분단 이전에는 이 커플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는 식민과 분단을 분리하는 역사관, 다시 말해 탈역사화이다. 결국 이렇게 국가를 중심으로 한 분단극복과 통일은 국가 자체를 변혁하는 과정 없이 분단 체제만을 변혁할 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