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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태원 선생의 '민족'론

"어떤 상상의 공동체? 민족, 국민 그리고 그 너머"

 

이런 제목으로 진태원 선생님이 글을 한편 쓴 것을 오늘 읽었다. 요지는 발리바르를 따라 '민족'과 '국민'의 용어법을 다시 정리하자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nation을 국민으로 번역하고, nationalism도 국민주의로 번역하는 것이 nation state의 보편적 측면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남한 또는 한반도 나아가 아시아를 이해하는데, '보편적인 것'으로 충분한가? 나는 ethnie와 '민족'의 등가성을 도출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민족'을 ethnie의 의미로 쓰이는 용법이 없지 않지만, 꼭 그것에 일대일대응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민족해방'과 같은 경우, 이게 ethnic liberation인가? '민족해방'에는 '국가'를 형성하지 않은 '전현대적' '공동체'의 반제국주의적 표상이 담겨져 있다. '전현대성'은 유럽적 현대성에 미달한다는 의미 보다는 아직 그러한 현대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성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민족'의 이러한 역사적 성격에 주목하는 이유는 '민족'이 '국민'으로 전환되는 역사과정을 통해, 오히려 그 개별 '국민'과 '국가'를 잘 이해할 수 있고, 그로부터 현재의 '국민' 국가의 변혁의 내재적 자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역사는 '무'에서 와서 '무'로 가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전환을 설명하는데 그러한 '무'차별적인 보편주의적 인식은 변혁적 전망을 내부에서 찾을 수 없게 할 것이다. 이러한 학문은 일정하게 '이론'적 자원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사상'적 자원으로 승화되지 않는다.

 

한반도에서 '한민족'과 같이 '민족'이라는 표현이 매우 '좁은' 의미, 이른바 '종족적 민족주의'로 쓰이는 사례가 적지 않다. 그렇지만 그러한 '포퓰리즘'적 개념규정에 따라서, 민족의 의미를 유럽어의 ethnie에 가두는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학문적 식민성의 발현이다. 제3세계에서 '민족'은 국민에도 갇히지 않고, 종족에도 갇히지 않는 역사적 '고유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고유성으로부터 출발해야만 우리의 주체적 인식이 가능할 것인데, 진태원 선생은 ethnie를 '민족'으로 번역하지 않고, '종족'으로 번역할 경우, "서양 학계의 이론적 진전을 몰이해하게 될 소지가 있다"고 걱정한다. 기존에 우리의 '민족'이 어떤 역사적 맥락을 가졌는지, 그러학 역사적 자원이 망각되고 제거되는 것은 상관 없다는 것이다. 이를 좀더 밀고 나가면, 우리의 모든 개념의 용법은 서구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시 배열되고 조정되어야 한다.

 

서구 이론에 대한 참조가 의미 없지 않지만, 서구 이론가들이 원하는 비서구 이론가들의 작업도 이런 것은 아닐 것이다. 서구 이론이 곧 보편 이론이고, 곧 남한과 한반도를 설명할 수 있다는 도도한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이는 학문인가? 내가 보기엔 이런 방식에는 '주체성'이 없다. 학문적 생산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고유성에 기반해서 보편-특수의 변증법에 참여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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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휘 선생님의 '신노동자'

藝術人生님의 [박희래와 왕휘] 에 관련된 글.

 

왕휘, “나는 자신의 이름이 있다”

http://wen.org.cn/modules/article/view.article.php?3243#jtss-fb

 

오늘은 왕휘 선생님이 쓴 려도(吕途) <중국 신노동자-실종과 굴기>의 서문을 검토해 보았다.

 

여기서 주로 논의하는 '신노동자'는 농민공이 아니며, 신노동'계급'도 아니라고 한다.

 

참고로 농민공을 세대별로 구분하면,

1세대 농민공은 1978~1988년 (70년대 이전 출생)

2세대 농민공은 1989~2002년. “농민공”이라 불리기 시작. 1억 2천만명.(80년대 이후 출생)

3세대 농민공은 2002년이후,(90년대 이후 도시에서 출생). 농촌 경험 없음.

 

3세대가 논의의 주요 대상이다. 왕휘가 보기에 이러한 ‘신노동자’는 노동자 계급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은 '계급의식'이 부재하고 정치적으로 침묵한다. 도시의 주변에 위치하고, 소비사회 속에 살아가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전통 노동계급(국유기업 노동자)과 비교할 때, 정치적 의식이 약하고, 물론 전혀 다른 사회경제적 지위를 갖는다.

 

국가는 이러한 노동자들과 자본의 충돌을 해결하기 위해 법률적인 기제를 꾸준히 확충해오고 있다. 이러한 법률적 해결은 이중적인 측면이 있다. 법 안에 갇히는 측면과 이를 정치적으로 끌어올기는 매개가 되는 측면...

 

왕휘는 “1949년 이후, 매우 명확한 정치의식을 갖는 노동자 계급의 존재가 중국 정치생활의 기본적 요소였다”고 파악한다. 그러나 계급언어의 소실, 전통 노동계급의 소멸, 신노동자의 출현은 이러한 헌법적 규정이 공동화됨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는 왕휘의 역사 인식의 핵심이다. 모택동 시대는 기본적으로 긍정된다.

  

왕휘는 본래 국가가 자본과 노동에 대해 “이중 대리인 역할”을 했다고 본다. 그러나 자본과 권력이 밀접해지면서 노동자 권리에 대한 국가의 ‘대리’가 나날이 공동화되었다고 본다. 여기에서 왕휘는 ‘정당의 국가화’의 문제를 제기한다. 본래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던 계급 정당이 ‘인민’이라는 보편 이익을 대변하는 국가정당이 되면서, 노동과 국가의 대립을 낳고 있다고 본다. 이 부분은 왕휘의 '국가관'의 핵심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우선 부르주아 법이데올로기적 맹목이 있다. 현대 국민국가의 형성은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적 이념에 입각한 형식적 대의제도와 실질적 착취 및 자본축적 보장이 결합되어 있는 셈인데, 왕휘는 ‘원시축적’이라는 현대 민족국가의 근원적 정당성의 문제를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본래적인 국가의 모순을 사후적으로 변질된 것으로 파악하는 오류를 범한다. 이러한 논의를 현존사회주의 국가에서 구체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역사적 고찰이 필요하다. 중국에서 사회주의적 원시축적과 도농이원화, 노동자 계급의 형성과 지위 및 국가자본주의적 성격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 전리군에 따르면 1957년을 전후로 단위체제 속에서 노동자들이 일정한 보장을 받았지만, 대다수 인구를 차지한 농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고, 공장 내부에서도 관료화와 노동자 내부의 차별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문혁의 배경이기도 했다. 이러한 혁명 초기 노동자 계급의 존재로부터 왕휘가 찾아내는 ‘적극적’의미는 냉정하게 다시 평가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과거의 노동자’의 해체와 ‘신 노동자’의 형성이 함께 진행되면서 지금의 중국의 노동자 계급이 형성되었는데, 과연 ‘과거의 노동자’의 정치의식과 계급의식은 어떤 가능성과 한계를 갖는다. 그 계급의식은 그 계급의 해체를 낳은 당의 국가화와 이론적으로 내재적 관련을 갖지 않는가? 즉,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한 계급 정당의 노선은 궁극적으로 노동계급에 적대적인 관료적이고 국가자본주의적인 당/국가로 귀결되지 않았는가? 왜 그렇게 되었나? 이를 근본적으로 성찰하지 않고, 편의적으로 해석된 모택동 시기의 '우월성'을 다시 취하는 것은 오류를 반복할 위험이 높거나, 심지어 현 체제를 옹호하는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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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래와 왕휘

홍콩에서 발표하려고 쓰던 작은 논문이 끝나고, 미루었던 왕휘 선생의 박희래 사건 관련 글을 읽어봤다.

http://www.coolloud.org.tw/node/68547

 

為了回應這些問題,中共中央委員會(Central Committee)已經以「更加注重保障和改善民生,促進社會公平正義」取代1990年代「效率優先,兼顧公平」。然而,現在新一代國家領導人代表胡錦濤和溫家寶的權力已經鞏固,卻一再擱置政治改革,國家結構更是持續加速地官療化。

 

핵심은 이 단락에 있는데, 새롭다기 보다는 바로 기존의 관점을 확인해주고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 중공 중앙위원회는 이미 "민생을 보장 개선하고, 사회 공평 정의를 촉진하는데 더욱 집중하자"로 1990년대의 "효율을 우선하며, 공평도 함께 고려하자"를 대체했다. 그런데 지금 새로운 국가 지도부의 대표인 호금도와 온가보의 권력이 이미 공고해졌고, 거듭 정치개혁을 방치하며, 국가 구조가 더욱 지속적으로 과료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그래서 호금도/온가보의 신자유주의에 맞선 모종의 '코포라티즘'을 긍정하지만, 관료화로 인해 그들이 다시 흔들리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박희래 사건을 그런 가운데 발생한 것으로 해석한다.

 

왕휘 선생은 역시 '국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거나, 어쩌면 전혀 다른 국가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전자는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편협하게 해석하는데서 확인할 수 있고, 후자라면 아마도 그것은 그가 중국적 장기지속에 빠진 채 특수주의적 논리로 현실의 권력을 옹호하는데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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