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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 번역

나는 번역을 직업으로 하는 번역가도 아니고 전문적인 번역 비평의 자질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해 말 대략 한글 1200쪽 정도 분량의 책을 번역해서 출판사에 보내둔 예비 번역자이긴 하다. 예상하지 못한 일로 인해 출판이 안된다면 몰라도...

 

그렇지만 번역 비평의 자질이나 자격이 처음부터 주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중국어 번역 비평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은 한국사회에서 이렇게 개인적인 공간에서나마 조금씩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번역 비평을 위한 기초를 놓는 개인적 출발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중국어와 관련해서도 번역 비평의 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동안 한국에서 중국어와 관련한 번역 논쟁은 거의 부재했던 것 같은데, 올해로 한중 수교 20주년이 되면서 중국에 대한 소개와 이해에서 번역이 차지하는 의미와 관련한 쟁점을 논의할 필요도 있을 것 같다. 이제 중국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역사 등에 대한 직접적 이해에 근거한 제대로 된 비평의 문화를 만들어갈 기초가 우리에게 어느정도 형성되어 있지 않은가 싶다.

 

특히 당대의 중국 사회, 문화, 정치, 역사 등에 대한 이해는 단순히 중국이라는 대상에 대한 이해를 넘어 우리 자신의 주체성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과정이 된다. 이는 중국에 대한 재인식을 통해 우리의 기존 인식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경계할 것은 번역이 새로운 앎의 생성과정이 되지 않고, 기존의 앎에 대상을 꿰맞추는 반복에 머무르면서 대상을 타자화하는 번역 행위이다. 우리는 때로는 중국어와 한국어가 다르기 때문에 한국의 독자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이러한 행위를 해왔다. 아울러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알기 쉽게 번역했다는 이야기도 많다. 게다가 중국어의 각종 고유명사를 발음대로 옮겨 적음으로써 궁극적으로 한자와 분리시키는 것이 한글 세대의 독자들에게 적합하고 이해하기 쉬운 번역 행위라는 주장이 제도화되기도 했다. 우리의 주체성에 대한 천박한 이해는 이와 같이 우리의 언어생활에 대한 몰이해를 낳는다. 그러한 상황에서 중국어 번역이 새로운 앎을 형성하기는 어렵다. 번역은 대상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주체성을 재인식하는, 아니 나아가 대상을 더이상 대상이 아닌 주체 내부로 끌어들이는 작업이다.

 

20세기 유명한 번역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노신은 <硬譯과 문학의 계급성>에서 자신의 난해하고 '딱딱한 번역'에 대한 양실추梁實秋의 비판에 대해 반박하면서, 번역 윤리의 핵심 가운데 하나를 제시한다. 번역은 독자의 '기분이 상쾌'해지도록, 다시 말해 쉽게 읽힐 수 있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번역은 오히려 독자가 한줄 한줄 읽어나가면서 의미를 조합하는 노력을 들여 더욱 확장된 이해를 가질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번역은 마치 알튀세르가 재정의했던 '철학'과 같은 비판적 행위이고, 궁극적으로 대중과의 지식 공유를 위해 개입하면서 궁극적으로 그 완성과 함께 소멸할 운명을 가지는 것이다. 자유주의 지식인의 포퓰리즘적 번역은 오히려 지식인과 대중의 위계를 재생산할 뿐이다. 노신의 <硬譯과 문학의 계급성>은 자유주의 지식인의 계급성 몰인식과 그들의 지식 위계의 재생산이 어떻게 관련되는지 잘 드러내주고 있다.

 

나 자신도 노신의 번역 윤리를 지켜나갈 수 있을지 두렵다. 그렇지만 노신의 존재는 긴장을 늦추지 않을 버팀목이 되어주는 듯 하다.

 

2012년 4월, <硬譯과 문학의 계급성>을 다시 읽으며 '번역 윤리'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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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을 거부하라』와 『내 정신의 자서전』 한글 번역판 목차 검토

이 블로그를 통해서 정보를 접하는 사람들이 얼마 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중국어로 원서를 읽을 정도의 유창한 원어 실력을 갖추지 못한 독자들에게 번역서의 출판은 그 자체로 얼마간의 결함을 가진다고 해도 지식의 공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공헌을 하는 것임을 밝히고 글을 시작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직 번역서의 내용을 검토하지는 못했지만, 전리군 선생의 스타일이 문장을 어렵게 쓰는 경우는 아니기 때문에 몇 가지 표현의 문제를 바로 잡는다면 이번에 소개된 책들은 모두 충분히 구매하고 소장해서 읽을만한 책이라 예상한다.

 

내가 여기에서 번역서를 검토하는 것은 물론 아직 전문가로서 자격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전리군 선생의 강의를 수강한 바 있고, 관련 저작들을 비교적 많이 소장하고 읽고 있으며,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1949~2009): 또 하나의 역사서사>를 번역하여 출판사에서 편집 중인 상황에 있기 때문에, 일부 문제들을 검토하여 독자들의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조만간 번역서를 입수하면 다시 전체적인 검토를 하고, 우선은 목차에서 보이는 몇 가지 문제를 먼저 검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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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리군 선생의 책이 번역되어 출판됨에 따라 올해 관련된 논의가 여러 방면에서 진행될 것 같다. 우선은 번역 자체에 대해서 중국정치/사상/문화/문학 전공자들 사이에서 일정한 논의가 필요할 것 같다. 번역본을 아직 받아보지는 못했지만, 알라딘에서 제공하는 미리보기 서비스를 통해서 간단히 목차를 원문과 대조하여 검토해 보았다. 이하의 내용은 알라딘 미리보기 서비스에 근거하기 때문에 실제 출판에서 있었을 수 있는 변경은 감안하지 못했다.

 

<망각을 거부하라>는 중문판으로 500여 쪽 되는데, 800쪽으로 완역되어 출판되었고, <내 정신의 자서전>은 본래 중국 대륙판에 대만판을 참고하여 약 218쪽(대만판 기준)정도의 부분을 번역하여 한글판 370쪽 정도의 분량으로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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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을 거부하라>는 <또 하나의 역사서사>와 중복되는 부분이 적지 않아서 매우 관심을 갖고 기다리던 번역본인데, 실제로 목차만 검토했음에도 여러 표현들을 참고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용에도 중복되는 부분이 있어서 앞으로 원고 편집 과정에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목차에서 발견된 몇 가지 의문이 있는데, 대체로 내가 선택한 역어와 차이가 나는 부분들을 주목하게 된 듯 싶다. 내가 보기에 오역이나 누락으로 보이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1) 戰略部署

"전략 부서"로 번역하였는데, '부서'라는 표현의 의미가 한국어에서 전혀 다르게 쓰이기 때문에, 이를 '전략적 포석(조치)'로 옮기는 것이 좋지 않은가 싶다.

 

2) 一個人的命運及其背後的社會體制的整體運動

"한 사람의 운명과 그 배후의 사회 체제" 뒤의 “전체의 운동”이 누락됨

 

그리고 번역에 있어서 논의할 만한 몇 가지 부분이 있다.

 

1) 群眾專政

중국어에서 大眾, 群眾의 용법이 한국과 좀 다르고, 또 중국어 내에서도 아직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상황인데, 상당수의 용례에서 群眾은 우리말의 '대중'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일괄적으로 '대중'으로 번역할 것인지의 문제에 직면한다. "군중전제정치"라고 번역되었는데, 나는 "대중독재"라고 번역하고 싶다.

 

2) 領袖/領導

'영도자/지도자'로 번역하였는데, 領袖는 정치 집단의 최고지도자를 표현하는 우리말의 ‘영수’ 표현을 그대로 살리는 것이 낳을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싶다. 예) 영수 회담. 領導는 나 역시 '지도자'로 번역하였다.

 

3) 史前期

‘역사 이전 시기’라고 번역되었는데, 본래 이 단어는 '선사시대'의 의미를 가지며, 顧準의 문맥에서 궁극적으로 마르크스가 비판한 자본주의의 원시축적에 비유하여 사회주의 ‘원시’ 축적의 야만성을 비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원시기’라고 하는 것은 어떤가 생각한다.

 

<망각을 거부하라>는 방대한 분량이기도 하고, 문학적 표현도 많고 분위기도 학술논문과 달라서, 번역의 유연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고 보이는데, 그러면서도 일부 개념들은 앞으로 국내에서의 정착을 위해서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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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신의 자서전>의 목차에서도 몇 가지 오역으로 보이는 부분이 발견되었다. 우선 비교적 확실한 오역이나 누락으로 보이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1) 有缺陷的價值

"결손의 가치"라고 번역을 하였는데, 이는 "결손"이 가치를 갖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본래 뜻은 "결함을 갖는 가치"라고 판단된다.

 

2) 소제목 누락

在處理知識分子與人民關係問題上所發生的迷誤

“지식인과 인민의 관계 문제를 처리하는데 발생한 오해”

 

3) 知識分子在體制中扮演了什麼角色?

"맡아야 하는가?"라고 번역되었는데, "맡았는가?"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4) 學術新貴

"학계의 새로운 권력자"라고 번역되었는데, 新貴에 권력자의 의미는 없으며, "학술 신귀족"으로 번역해야 한다.

 

5) 拒絕遺忘

"망각을 거절하다"라고 번역되었는데, "망각을 거부하다"이다. 중국어의 拒絕에는 우리말의 '거절'과 '거부'가 모두 들어 있는데, 우리 말의 '거절'은 우리 말의 '거부'와 구분되는 표현이다. 물론 여기에서는 '거부'의 의미로 쓰였다.

 

6) 革命意識形態

"혁명의식 형태"로 번역하였는데, 意識形態는 본래 "이데올로기"의 중국어 번역이다. '이데올로기'로 번역해야 한다.

 

7) 還思想予思想者

‘사상환원주의’라고 번역하였는데, 비판성이 생명인 사상이 체제 유지에 동원되어 지식인의 독립성 상실의 문제를 낳음을 지적하면서, '사상'을 '사상가'에게 되돌릴 것을 주장하는 대목이다. "사상을 사상가에게 (돌려주기)" 정도의 의미로 번역해야 한다. 이를 '환원주의'(reductionalism)로 번역해야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사상의 자율성과 완결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사상과 사상가의 체제 의존성을 비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외에 몇 가지 다르게 번역할 수 있는 부분들도 있을 것 같다.

 

1) 迷誤

"오류"라고 번역되었는데, "오해, misunderstading" 또는 "오인, misrecognition"의 뜻에 가까워 보인다. 이는 주관적 이해의 측면에서 발생한 착오를 의미하는 것인데, '오류'는 논리적으로 검증된 객관적 착오에 가깝지 않은가 싶다.

 

2) 心靈

"심령"으로 그대로 옮겼는데, "영혼"이 더 낫지 않은가 싶다.

 

3)學霸

"학계의 보스"라고 옮겼는데, "학술패권"이 나을 것 같다.

 

4)為何寫作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가?"라고 옮겼는데, 본래 "為何"는 분해해서 해석하면 그런 의미를 갖지만, 이미 굳어진 표현으로 읽으면 "왜"의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為什麼와 같은 뜻이다. 나는 為什麼를 "무엇을 위해"라고 번역하지 않듯이, 為何 역시 그렇게 번역하지 않는다. 특별한 다른 이유가 없다면 "왜 글을 쓰는가?"로 번역하는 것이 나았을 것 같다.

 

4) 內心的疑慮,以至恐懼

"내면의 의심이 공포에 이르다"라고 옮겼는데, "내면의 의심 그리고 (나아가) 공포" 정도로 옮겨도 무방하다. 以至를 풀어내면 "이르다"라는 의미를 끄집어 낼 수 없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심화되는 병렬 관계를 이어주는 용법이기 때문이다.

 

5) 志願者 

"자원봉사자"로 옮겼는데, 틀린 번역은 아니지만, 우리 말에서 '자원봉사자'가 매우 탈정치적으로 쓰이기 때문에, 다른 역어를 고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전리군 선생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志願者에는 우리 말의 '자원봉사자'에 해당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를 넘어서는 민간 사회운동가들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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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지난 3월 24/25일 <인터아시아 문화연구의 미래>라는 국제회의가 열려서 방청을 했고, 한국에서 오신 선생님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관심이 가는 연구 주제의 친근성으로 인해서 주로 성공회대에서 오신 중국 연구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물론 우리는 모두 중국 연구자이면서 동시에 동아시아적 맥락을 중시하는 한국 연구자이기도 하다.

 

백원담 선생의 발표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90년대 남한에서의 동아시아론과 문화연구의 부상 배경에 대한 비판적 언급이었다. 국가주의와 이론주의에 대한 비판인데, 이는 내가 고민해온 정치성의 기본적 전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시 도입된 동아시아 문화연구(즉, 인터아시아 문화연구)는 궁극적으로 분단이라는 특수성을 갖는 한반도 및 남한의 모순을 국민국가의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으며, 따라서 더 넓은 '동아시아'의 시각이 필요했다는 것이고,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문화적 실천의 장을 통해서 발굴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예로 들었던, 한진중공업의 국제적 맥락(자본의 세계화)과 투쟁 속에서의 문화적 실천으로서의 희망버스의 결합, 구럼비 투쟁에서의 미제국주의의 군사전략과 삼성카드 반대운동의 결합 등은 적절한 예인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내 문제의 답을 얻을 수는 없었는데, 그것은 이러한 분석 속에서 과연 본래 남한의 특수성을 해명할 수 있는 식민과 분단 및 민족 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아시아'와 '문화'라는 새로운 범주의 도입의 대상이 되는 국민국가 자체는 무차별적으로 전제된다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역시 매우 보편주의적 서사에 갇히는 위험이 있다고 보인다. 다시 말해서 이런 분석틀은 다른 국민국가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고, 분단이라는 특수성을 가진 한반도에 이런 보편적 분석틀이 적용될 경우 결국 보편적 서사에 특수성이 환원되지 않는가라는 문제이다. 아마도 해결의 실마리는 동아시아를 당대의 초국적 맥락을 포함하기 위한 것으로 규정하기 보다는, 당대와 긴장을 유지하면서 한반도 및 남한의 민족적 현실을 역사적으로 규정지은 요인들의 독특한 결합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이해의 장으로 규정하는 데 있을 것 같다.

 

지난 수요일에 연구소에서 전체회의가 열렸다. 교수와 석박사생 모두 참석하는 회의였는데, 안건은 학업 관련 규정을 개정하는 것이었다. 매 학기 초에 학생들마다 학업 진도를 발표하는 행사를 마련해서, 학생들간의 상호 교류를 도모하고 개별 학생들도 스스로 좀 더 계획적으로 학업 진도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이 배경에는 우리 연구소 석박사생들의 졸업이 너무 늦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2003년부터 입학한 박사생들 가운데 현재 졸업생은 단 1명에 불과하다. 게다가 근래 몇몇 학생들의 정신질환 및 자살시도 등의 문제가 이와 연관되어 이해되고 있다. 대만에 와서 공부하는 사람들을 주변에 많이 두고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주변에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이 적지 않다. 내 느낌에 대만 사람들을 상당수가 약을 복용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 같고, 한국 사람들은 술을 통해서 해결하는 것 같다. 그런 맥락에서 술와 약은 대체가능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의 토론은 사실 학과적 규범을 갖지 못하는 문화연구 자체가 제도 영역에 도입되었을 때 갖는 모순에 집중되었다. 문화연구는 비판적 시각을 제공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학위 논문이 되려면, 어떤 정박점이 필요한데, 그것은 일정한 규범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화연구는 그러한 규범성을 거부한다. 이는 문화연구와 사회과학 또는 인문학의 관계설정의 문제이기도 하다.  

 

전리군 선생과 관련해서 정리된 자료에 대한 1차 분석을 마쳤고, 우선 관련한 50여권의 단독저작을 먼저 수집하고 있다. 본래 가지고 있었던 25권 외에 도서관과 인터넷 등에서 15권을 다시 수집하였고, 진광흥 선생으로부터 5권 정도 희귀 자료를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머지 몇 권은 중국의 친구들을 통해서 구해보아야 할 것 같다. 4월이 시작되었으니 이제 2달 안에 이 저작들을 개괄적으로 독파해야할 것이고, 초벌적인 분석을 끌어내야 하는 상황이다. 다행히 한국에서 최근 두 권의 저작이 출판되었는데, 그 반응들을 종합해서 6월 홍콩 회의에 가져가야겠다. 그리고 전리군 선생의 저작이 한국에 소개되는 맥락에 대해서 나름대로 구도를 그려보고 있었는데, 이번에 <나의 정신자서전>의 부분 번역본이 나오면서 한 가지 흐름이 더 추가되지 않나 싶다. 번역본을 받으면 번역 내용을 검토해서 일차적으로 번역상의 오류가 있는지 검토해보고, 나아가 중요한 개념의 함의에 대해서도 의견을 표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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