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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얼거림님의 ["일 안해도 빵 먹을 권리 있다" - 한겨레] 에 관련된 글.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라는 말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동의.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 없는 세상이라는 것도 동의.
부를 나누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에도 동의.
그렇지만, '노동과 소득을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사실 '부를 나누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은 새로운 얘기가 아니며, 특별히 진보적이거나 좌파적인 사고라고 보기는 어렵다.
대기업의 불우이웃돕기도 정확히 '노동과 소득이 분리'된 '부를 나누는 새로운 방법'이다.
'노동과 소득의 분리'가 '마을이나 종교 공동체의 시혜 대상에 머물렀던 빈민층'의 재탄생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아도, 아무런 사회적 기여를 하지 않아도, 사회가 우리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넌 사회에 아무런 쓸모가 없지만, 먹고는 살아라. (저항하지 말고.)"
이것만큼 비참한 것도 없다.
노동과 소득이 분리되는 순간, 노동은 없어진다. 소득이 없는 노동은 노동이 아닌 것이 자본주의기 때문이다. '노동과 소득의 분리'는 노동이 필요 없음을, 실업자가 쓸모 없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소득은 시혜에 불과하며 시혜는 강탈의 다른 얼굴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쓸모가 있음을 인정받는 것이다. 아니 각자의 쓸모를 서로서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칸트식으로 말하자면, "타자를 단지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이건 가라타니 고진에게 얼마전에 배웠다.)
다시 말해, '임노동'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활동들이,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노동'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득은 정확히 그러한 노동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물론 이 때의 노동은 임노동과는 다르며, 사회는 자본주의사회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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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얼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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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임노동'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활동들이,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노동'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전체는 아니지만, 제가 펏던 기사에도 (고다르 감독의 인용문을 포함해서) 상당부분 포함된 내용 아닌가요... 개인들의 사회적 생산에 대한 기여를 그들의 개인적 노동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 사회적 연관 속에 있는 한 모든 이는 어떤 형태로든 사회적 생산에 기여하고 있다는, 즉 사회적 생산에 대한 어떤 보편적 분배에 참여할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사고 말입니다.
덧붙여, 저는 '활동 일반'과 분리된 특정화된 '노동'의 범주 자체가 궁극적으로 잉여를 목적으로 하는 산-노동/일하는 인간에 대한 강제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은 어디까지나 노동, 즉 '직접적으로 타인의 욕망을 위한 활동'입니다. 그것이 개개인에게 단순한 생존의 필요부분 이상을 넘어 활동의, 생애의 보편적 형태, 지배적 형태로 존재하게 만드는 것은 그 사회가 잉여의 추출에 지배되는 사회일 때 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와는 진짜로 다른, 특히 좋은 방식으로 다른 어떤 사회에서는 분명 자본주의에서 '임노동/지불받을 수 있는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많은 활동들이 유의미한 것으로 인정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 그것을 굳이 노동이라고 불러주지는 않을 겁니다. 그것은 그것을 행하는 주체들의 의지와 욕망에서 단절된 그 무엇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저 '일'이나 '활동'으로 불려야 옳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그 자체에 대해 별다른 댓가를 받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쨋거나 그런 사회에서라면 저나 당신은 사회적 연관 속에 태어나고 살아간다는 한가지 이유만으로 인생수당 정도는 보장받을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블로거들의 활동 없는 네트워크는 썰렁할 뿐이라는 원리를 소득계산에도 활용하는 것이, 꼭 블로그 게시물 하나당 얼마를 쳐서 받는 방식이 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블로그질 정도는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생활이 보장된 것이라면 말입니다. 임노동으로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하는 활동들의 생산적 기여를 논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 활동들에 모두 얼마씩 급여항목을 신설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활동의 자율적 주체로서 사회적 연관 속의 개개인들에게 보편적인 생활의 권리, 사회적 소득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문장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각인은 능력에 따라 어쩌고 필요에 따라 또 어쩐다는 문장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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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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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런 장문의 답글을 ^^ 답글에 대한 답글은 저도 좀 생각을 한 다음에 달게요. 아무튼 감사합니당.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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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활동 일반'과 분리된 특정화된 '노동'의 범주 자체가 궁극적으로 잉여를 목적으로 하는 산-노동/일하는 인간에 대한 강제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
라는 데에 동의. 그래서 지음과 웅얼거림의 이야기는 닿아있는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인 듯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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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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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셋이 모여서 세미나라도 한 번 했으면 좋겠네요. ^^ 사실 정확한 의미와 차이가 잘 파악이 안돼요. ㅠ.ㅠ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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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게요. 같이 만나서 얘기하는 거랑 덧글을 주고받는 건 너무 다르죠?제가 이해하기에는
지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득을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은 노동이 아니기 때문에
**그/녀들의 소득을 노동의 기여에 따라 제공되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오히려 그/녀들의 노동을 의미있는 노동으로 인정받도록 해야 하지 않느냐
는 주장인 것 같구
웅얼거림은
**소득의 원천으로서의 노동을 강조할 수록 자본주의의 임노동을 강화하는 경향이 되기도 하니 오히려 노동과 소득을 분리해야 한다는
의견인 것 같아요.
그래서 둘(셋? ^^;;) 모두 자본주의 사회가 특정한 노동에 대해서만 기여를 인정해 대가를 지불하는-그것도 위계적으로- 것에 반대하는데
이런 질서에 대한 저항을 어떤 방향으로 할 것인지에 대한 차이인 것 같아요. 오해인가? ^^;;
쨌든 고민되는 문제인데 둘 모두 우리의 전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정도에서 저는 정리했더라는...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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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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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연계복지'(다른 말로 생산적 복지라고도)는 말 그대로 '노동과 복지를 연결하는 것'인데...이에 저항하고 다른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서 노동과 복지를 분리시켜야 한다는 논의도 있지요. 그리고 그걸 매개하는 핵심 개념으로 '권리'라는 말을 출발로 삼아야 한다...재밌네요...^.^부가 정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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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류/ 아. 고맙고 멋진 정리입니다.newtimes/ 갈수록 재밌어지는군요. 복지... 권리...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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