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은 적도 없지만 꺼낼 일도 없었던 이야기. 대학 다니는 동안 학생회관에서 몇 달 지낸 적이 있다. 수배 생활이라고 하기엔 체포영장을 확인해본 적 없으니, 도피생활 정도겠다. 함께 활동하던 선배들 여럿이 구속되고 그들의 영장에 자주 언급되는 사람들은 당분간 집에 가지 않기로 했다. 여자는 나 혼자였던가, 기억이 또렷하지는 않다.
또렷이 기억에 남아있는 건 하나다. 구속됐던 한 선배가 나와 환영회를 하던 날, 그가 전해준 말. “조사 받는데 너네 집엔 왜 그리 남자들이 많이 드나드냐고 묻더라.” 아마 그나 나나 웃으며 넘긴 것 같다. 하지만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말이 그것이고 보면, 아무렇지 않지가 않았나 보다. 국가보안법은 내게, 조직사건을 만들어내는 법이자 가부장의 시선으로 감시하는 법이었다.
조직사건은 드물지 않았다. 누군가 구속되었다는 대자보가 붙고 누군가 석방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길 반복했다. 감옥에서 풀려나온 이들은 괜찮다고 했다. 조금 씁쓸한 표정이었거나 조금 호탕한 웃음이었거나, 괜찮다니 괜찮은 줄 알았다. 괜찮다던 이들이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았을 때, 찾아 묻기는 어려웠다. 그가 겪은 시간을 짐작할 수 없었으니, 아쉬운 마음이 쌓일 뿐이었다.
지금 와 생각해보니, 괜찮지 않았던 사람들은 내가 만나지 못했던 것이었겠다. 괜찮다고 했던 이들은 ‘괜찮아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던 것이었겠다. 말해질 수 없어 기억되지 못한 이야기들,을 홀로 품은 채 흩어진 사람들,을 떠올리며 기억을 다시 세워본다. ‘여성서사로 본 국가보안법’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책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 덕분이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경력이 되었다. 국가보안법 위반 기록이 있는 국회의원이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역사는 모두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엄마는 왜 저런 사람들처럼 되지 못했어?” “그러면, 할 얘기가 없어요.” 학생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기는 민망해 “후루룩 결혼을 하고”, 지역에서 사회운동을 시작했지만 “부부가 같이 일할 게 못 되더라”는 걸 느껴야 했던 자리.(구술 양은영) 숙고를 거듭하며 한총련 탈퇴서를 쓴 다음날 “뭔가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구나 하는 느낌”에 압도당한 채 “부끄러워서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게 되어버린 자리.(구술 유해정) 여성이 말하기 시작하자 역사도 다르게 쓰이기 시작한다.
이것은 법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 법을 장전한 체제에 대한 이야기다. 한쪽에서는 국가보안법이 사라지면 나라가 무너질 것처럼 겁박을 하는 정당이, 다른 한쪽에서는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충분히 가졌으니 더는 급할 게 없는(그리고 여전히 ‘허락’될 수 없는 사상이 있다고 여기는) 정당이 지우고 있는 역사에 대한 이야기다. 2000년대 중후반을 지나며 급격히 늘어난 조작간첩 피해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포함해, ‘반통일 악법’이라거나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법이라는 평가에 멈춰 수많은 역사를 놓치고 있는 운동에 대한 이야기다.
“국가보안법으로 봐서는 피해자인 게 맞는데, 그런 내가 아이한테는 가해자인 거잖아요?”(구술 고애순) 만삭으로 수감생활을 하다가 사산한 여성에게, 아니라고, 국가가 가해자라고, 용서를 구한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국정원이 만들어낸 오해 때문에 다투다 헤어진 남편이, 투병하다가 죽음을 맞아 이제 화해할 기회를 잃어버린 이에게(구술 배지윤), 되돌릴 수 없는 후회의 몫은 국가가 지겠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탈퇴서를 강요한 국가가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
지워진 역사를 새기는 일은 운동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겠다. 책은 그 전망까지 자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성주의를 경유하지 않고 국가보안법 폐지가 불가능하다는 점만은 모른 척 넘길 수 없게 한다. 자식이 수배 중이면 방에서 잠을 자지 않았다는 이에게 ‘어머니’라는 이름밖에 내어주지 못하는, 남편 뒷바라지에 밀려 자신의 운동을 만들어갈 기회를 놓쳤던 여성들에게 자리를 내어줄 줄 모르는 운동은, 어떻게 스스로를 갱신할 수 있을까.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이 풀려나 민주주의의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한다.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이 풀려나
주간미류
2020/08/24 20:50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aumilieu/trackback/109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