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집. 타원형의 바랜 붉은색 고무 통 여남은 개에는 쌀과 쌀과 쌀과, 보리나 콩 같은 곡식들이 담겨있었다. 서로 다른 통에 담긴 쌀알을 집어 만져보고 쳐다보면서 엄마는 가격을 물었다. 쌀집 주인은 가격만 말하지 않았다. 그건 어디서 난 어떤 쌀이고, 이번에 들어온 무슨 잡곡이 맛있고, 올해 쌀농사가 어떻고… 어릴 적 얘기다. 나는 그렇게 쌀을 사본 적이 없다. 쌀은 이제 인터넷 상품평을 보며 주문하는 상품이 되었다. 누가 쌀알 몇 개를 미리 보여준들, 윤기가 흐르는 건지, 투명한 건지, 모양은 괜찮은지, 봐도 모른다. 책방에 대한 기억을 더듬다가 쌀집이 떠올랐다.
나는 책이 좋다. 누군가의 이야기나 생각들이, 시작과 맺음이 있는 종이묶음에 담겨, 누군가의 손에 닿고 대화가 시작되는 모든 과정이 황홀하다. (시작된 모든 대화가 황홀하지는 않다는 건 비밀.) 책에 실린 말들만큼 표지 디자인, 내지의 질감, 글씨체와 여백 같은 것에도 일희일비한다. 책방에서 책을 집어들고 펼쳐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훑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운 좋게도 꽤 오랜 시간 책방이 가까이 있었다. 서울 와 살게 된 동네에는 인문사회과학서점이 있어 책만큼 사람도 많이 만났다. 그간 사고 읽은 책들이 일일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책방과 함께 자란 시간만은 내 몸에 고스란히 쌓여있다. 예전처럼 들르고 머물 책방이 주위에 없다는 결핍감이, 그래서 더 강렬하다.
책을 온라인으로 주문한 지 오래됐지만 책방이 늘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인터넷서점은 이용하지 않는다. 인문사회과학서점 한 곳에서 온라인 주문을 받아 책을 배송해주는 덕분이다. 책방 하나라도 지키고 싶은 마음인데, 책을 정가로 사는 자존심을 책방이 지켜주는 셈에 가까울 것이다.
물론 책값은 싸면 좋겠다. 소득 1분위 수준에서 지탱하는 자존심의 지속가능성은 늘 불안하고, 쌀이 그렇듯 누구든 책을 사고 싶을 때 경제적 장벽에 부딪치지 않기를 원한다. 그러나 동시에, 쌀이 그렇듯 책을 키우고 만드는 사람들이 경제적 곤경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귀한 경험과 생각들을 책에 담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들, 글과 그림과 사진이 손에 쥘 수 있는 책이 되도록 편집하고 디자인하고 인쇄를 하는 사람들, 그게 누군가의 손에 닿을 때 좋은 친구를 소개해준 것처럼 마냥 흐뭇한 사람들이, 보람을 대가로 과로나 부채에 시달리지 않기를 바란다. 경제적 장벽을 낮춘다며 경제적 곤경을 키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귀한 것은 비싸고 비싼 것만 귀히 여기는 세상이다. 그러나 비싼 걸 감당하고 수고로움을 감수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닿기에, 쌀이 그렇듯 책도 너무 귀하다. 누구든 돈과 시간을 걱정하지 않고 귀한 것을 만날 수 있는 세계로 가야 할 텐데, 너무 막막하다. 결국 주어진 책의 시장에서 책을 고르고 읽고 웃고 후회하다 행복하기를 반복할 한 명의 독자일 뿐인 내게, 그 세계로 가는 길은 너무 막연하다. 그래서 나는 도서정가제를 지지한다. 동네책방에 기대려는 심산이다.
동네책방이라면 싸거나 비싼 것들의 세계가 아닌 귀한 것들의 세계로 길 내기를 멈추지 않을 테니. 책 내서 돈 벌지 못하니 돈 버는 사람만 책 낼 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책 팔아 돈 벌기 어려우니 돈 벌리는 방식으로만 책 파는 세상도 막아줄 것이다. 책값이 너무 싸면 책 만드는 노동자들과 지구 어딘가에서 베어냈을 나무들까지 걱정할 테고, 책값이 너무 비싸면 독자들을 가장 먼저 걱정해줄 것도 동네책방이다. 그런 동네책방들이 지금 더없이 불안한 목소리로 해시태그를 제안하고 있다. #도서정가제가_사라지면_동네책방도_사라집니다
도서정가제는 책값에 관한 정책이 아니다. 책의 유통구조를 장악한 인터넷서점과 대형(체인)서점들이 할인을 무기로 휘두르며 동네책방과 작은 출판사들을 곤경에 빠뜨리지 못하도록 막는, 출판산업구조에 관한 정책이다. 2014년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 동네책방과 신생 출판사들이 더디지만 늘고 있다는 소식에 반가워할 새도 없이 폐지되도록 둘 수는 없다.
책값이 얼마면 적당한지 말하기 위해서라도 도서정가제는 유지되어야 한다. 책의 값을 돈에만 두지 않을 귀한 것들의 세계로 나아가려면 더더욱 그렇다. 동네의 귀한 책방들을 지키고 싶다.
동네의 귀한 책방들을
주간미류
2020/09/09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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