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된 년, 잘가라

뭐라고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번주가 가기 전에 편지라도 한 장 띄워야겠다 생각만 하다가 손을 들었다. 49재가 이 세상을 아주 떠나는 날이라고, 다른 세상에서 새 몸을 얻어 태어나는 날이라고, 스님이 친절하게도 설명까지 해주시더라만 그런 줄 알면서도 별로 준비를 못했단다. 괜히 날짜 헤아린다고 투덜대보기도 했는데 그래도 왠지 이번주에는 뭐라도 해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들더구나. 재판이 3일째가 되니 오늘은 조금 여유가 생긴 듯도 하고.



훌쩍 가놓고서는 뭐가 아쉽다고 며칠씩이나 못살게 굴다니. 덕분에 많이도 아팠다. 오래전에 처음 사랑니 뺄 때 남주가 그러더라. 사랑을 못해본 사람한테 사랑의 아픔을 느껴보라고 사랑니가 나는 거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야, 이렇게 아프기만 하고 걸리적거리는 걸 왜하냐. 그러니까 사랑을 안하는 거야. 그러고 나서 사랑니를 확 뽑아버렸지. 하나 뽑고 나서 다시 오라는 걸 안 가고 뒀더니 이제 네가 찾아오더구나. 보름이나 됐나? 처음에는 그냥 염증이 좀 있나보다 했던 게 49재가 가까워질수록 자꾸 네 생각이 나는 거야. 이상하지? 그냥, 그냥 네 생각이 나는 거야. 어떤, 어떤 생각이 나는 것도 아니고 너, 생각나더라. 나, 아직도 사랑을 모르는가 보다 싶으면서 너, 생각나더라. 너를 참 좋아했고 아꼈고 오래오래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랬는데 그게 다 거짓말이었나보지? 잘못한 것 있으면 얘기나 해주고 가지, 못된 년. 그러고서는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가니? 베란다에서 혼자 산사춘 홀짝거리면서 담배피우던 그날까지도, 그렇게 아프게 하더니. 편하게 간 거니? 너 생각하면서 울지 않겠다던 다짐, 잘 지켰는데 그래서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간 거니? 네 동생이랑 네 흉보면서 크게 한번 선심쓰겠다고 보내줬더니. 이제 정말 간 거지?

사실, 나 요즘 정신이 하나도 없어. 네 생각 많이 하지도 못했지. 내게 남아있을 너의 흔적들이라도 주욱 모아놓고 정리했어야 하는 건데. 나중에라도 불쑥 널 만나게 되면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어느 사진 구석에서, 혹은 오래된 책장 사이에서, 나도 모를 그 어느 곳에서든. 온전히 잊는 것도, 온전히 기억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그냥 오며가며 문득 떠오르는 기억들을 반갑게 건져올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조금은 두려워.

그러고보니 너랑 마지막으로 얘기했던 것들이 전범민중재판이더라. 기억하니? 발기인 하라구 신청서 내밀었을 때 네가 그랬잖아.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어요. 내가 무척 놀라고 당혹스러워했던 것도 기억하지? 정말! 훕... 병원생활로 바빠서 그런가보다, 나중에 따로 만나서 천천히 얘기해야겠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요즘 그 생각이 다시 나더라. 네가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했던 건 아닐까 하는. 나는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풀리지 않는 고민들은 뒤로 제쳐두기도 하면서 달려왔던 건데 이제 뭘 어떻게-정말 잘!-해야 하나 하는 고민을 미룰 수 없는 때가 되어서야 그 생각이 나더라구. 어떻게 파병을 막을 꺼예요? 어떻게 전쟁을 끝낼 꺼예요? 이런 질문들을 네가 그때 던졌던 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그렇지. 평화, 이거 나랑 별로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한데 넌 오래전부터 욕심도 있었고 아마 나보다 훨씬 잘했을 텐데. 그래서 정말 같이 하고 싶었고 그만큼 아쉬웠던 건데.

옥상에서 전화기 붙들고 울었던 것도 생각난다. 푸히. 그것도 너였구나! 계좌번호 잘못 알려준 것 때문에 속상해하던 참에 네가 바쁜 시간 쪼개서 은행 갔다가 계좌이체 못했다고 문자 보냈던 날. 주책이었지. 에구, 아무리 생각해도 너 붙잡고 무슨 짓 한 건지, 우습기만 하다. 나, 그렇게 너 못살게만 굴었던 건 아닌지. 빚진 것만 잔뜩이고. 못된 년, 계산도 안하고 그냥 가버리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니?

편지 쓰면서 눈물 한 개도 안 나온다. 에~롱. 훌륭하거나 매몰차거나, 둘 중의 하나겠지. 아니, 후자겠지, 뭐. 난 그런가보다. 못된 후배, 울면서 보내주기엔 배가 너무 고프다. 차라리 눈물이 들어와, 말라버린 웅덩이 채워주고나 가면 좋겠다.

 

잘가라. 그래도... 편안히 가라. 아니, 이제는 다른 몸으로, 더 재밌게 살아라. 난, 보란듯이 잘 살 준비가 되어있으니 너도 부디 행복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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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09 13:12 2004/12/09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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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anjang_gongjang 2004/12/09 22:4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친구를 떠나보내셨군요.
    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요.
    그래서 글에서 아주 멀리 떠난다는 것을 암시하였나 봐요.
    그러나 미류님이 기억하면 그 친구는 살아 있답니다.
    저는 후배를 떠나보내면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 내 후배는 나와 함께 한다고 보이지만 않을 뿐 만나고 싶을 때 못만날뿐이라구요.
    못된 것이 아니라 아픈 것이 겠지요.
    글 읽고 흔적남기고 갑니다.

  2. aumilieu 2004/12/10 10:3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고마워요, 오타맨. 근데 전 아직 잘 모르겠어요. 기억을 지울 수는 없는 거지만 그래도 저는 아프게 기억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후배 생각하면서 속상하거나 아쉬워하지는 않고 싶어요. 그냥, "아, 여기는 **가 첫월급 탔다고 나 밥사준 데다~ ^^; ", "와, 이 책 **랑 같이 읽었던 건데 **가 그 때 이런 얘기했었던 거 생각난다~" , 뭐 이렇게 그냥 지나치듯이, 과거로도 미래로도 열린 기억을 얻고 싶어요.

  3. aumilieu 2004/12/10 10:3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근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이제 잘 기억할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생각하기 시작하면, 아니 떠오르는 것들을 모두 건져올리다 보면 잘 못 보낼 것 같아서. 가는 길 발목잡는 선배는 되고 싶지 않아서...

  4. kanjang_gongjang 2004/12/10 19:4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누군가 문듯 보고 싶거나 기억날 때 저밀어 오는 그리움이 있을거에요.
    시간의 지남과 동시에... 그리고 내가 기쁠때 떠오르는 사람... 그리고 문듯 기억날때 가슴 한켠이 뭉글할때 간혹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기억되는 사람입니다.
    저도 잊고자 하지만 문듯 기억이 날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하늘을 보았는데 누군가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보고 싶더군요.
    아마 기억저편 묻어두었다 꺼내보는 것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기억이 간혹 납니다. 시간이 지나면 미류님 또한 그럴거에요.

  5. nodame 2004/12/10 22:3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49재날이 되던 새벽 우연히 꺼낸 소화기학 책 안에서 불쑥 튀어나온 빡힘의 사진을 보고 참 어이가 없더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언젠가 동아리 방을 돌아다니던 그 사진에 나온 두 사람이 너무 이뻐서 몰래 훔치듯 끼워놓고 잊었던 것이었어요. 그 때는 매일 보는 그 얼굴들이 뭐가 그리 좋았는지-모르겠지만. 덕분에 난 힘 언니 사진 큰걸로 하나 얻었답니다.
    잊기에는 너무 못해주고 힘들었고 고생시킨 기억만 나는 나쁜 후배라서 영 정리가 안되네요.-_-

  6. 어깨꿈 2004/12/11 10:47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떠나는 사람에게 적절한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떠난 사람에게 남은 자는 무엇일까 생각도 해보고 ... 누군가의 삶을 기억하는 누군가가 있는 것으로 차암 위로와 힘이 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시간은 그 기억마저 .... 처음 마음으로 살아가는 의미마저 퇴색되게 만드는 구려 ...^^ 히 . 그대의 적절한 조언에 언제나 탱크하고 있슴.

  7. 미류 2004/12/11 12:4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오타맨, 님에게 소중한 그 기억들이, 늘 반가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nodame, 빨랑 착한 후배 되라~ 내가 정리시켜줄 테니 ^^;;
    정리하려고 마음먹는다고 정리되는 것도 아니고, 아마 **은 49일 머무르는 동안 좋은 기억들만 챙겨서 갔을 테니, 속상해하지 마라. **이 죽음을 긍정하던 그 순간을, 살아있는 이들이 되려 억울하고 속상하게 만들면 안되겠지...

  8. 미류 2004/12/11 12:4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어깨꿈, 탱크하는 게 뭐예요? ㅡ.ㅡ 어제는 친구분 잘 만나고 돌아오셨는지요? 제가 경황이 없을 때 전화를 받아서, 궁금하셨던 것에 잘 답해드린 건지 모르겠네요. 잘 모르는 분이지만, 남은 날들을 채워가기보다는, 하루하루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샘이 도와주실 꺼라 믿어요. ^^;

  9. 어깨꿈 2004/12/11 17:0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아 . 탱크가 아니라 탱큐.. Thank you! ... 만나고 돌아오면서 한잔 하고 싶었는데 일만 쌓여서 .. 뜻을 못이루고 .. 세월은 나도몰래 이만치 와있군요.. 너무 빨리

  10. jaya 2004/12/12 11:2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49'재'였군요!! 이런 스펠링도 모르는 무식한 후배같으니;;; 열린 기억이라는거.. 저도 그걸 바라는거 같아요- 언니, 토닥.

  11. 미류 2004/12/12 16:33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어깨꿈, 저야말로 늘 고마운 마음만 가득합니다. 앞으로도 많이 배우겠습니다. 그리고! 건강 좀 챙기세요, 샘도!!!
    jaya, 나두 그게 왜 '재'인지 모르겠다만 그런갑더라. 셤 끝나믄 한번 집에 놀러와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