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이 불편하다

할머니들이 "허벌나게 좋다"를 연신 내지르고 아이들은 개다리춤을 춘다. 마을회관 안에서 족구를 하는 중년의 남성들과 화장실이 좋다고 어쩔 줄 몰라하는 중년의 여성들...

이런 장면을 보면서 왜 불편한지, 괜히 화나는지 조금만 생각해보기.



<6시 내고향>이라는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밥먹는 동안 본 부분은 일종의 기획인 백년가약맺기인데 해남의 와룡리라는 마을과 서울영동농협이 백년가약을 맺었다. 농수산물 직거래가 이루어지고 방송사에서 후원(했겠지?)하여 마을회관을 개조했다. 백 개의 마을을 선정해 마을과 기업의 백년가약을 맺는 기획을 시작한 후 서른여섯번째 마을이라고 한다.

 

개조한 마을회관은 깔끔하게 마감되었다. 그 건물이 마을에 얼마나 어울리게 들어앉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농활을 가서 보았던 몇 군데 마을회관과 비교해보면 시원하게 크고 반들반들 윤이 나는 것은 사실이다.

카메라는 마을회관을 보면서 환호하고 들썩거리는 주민들을 보여주고 현관문으로 물밀듯이 들어오는 아이들과 어른들을 보여준다. 노인정에서 옷을 벗어던지며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들과 흰 타일로 마감해 반짝거리는 부엌에 감탄사를 그치지 못하는 여인들을 비춘다. 화장실에서는 문을 열고 들어가 양변기에 앉아보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계단 아래 수납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는 조그만 공간에서 볼에 립스틱 자국이 묻은 한 남성과 씩씩하게 생긴 한 여성이 뛰쳐나오는 장면을 잡고 2층으로 올라가 컴퓨터 몇 대에 아이들이 환호하는 모습, 어머니들과 아이들이 함께 개다리춤을 추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시 1층으로 내려가보니 중년 남성들이 방이 넓다고 족구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회자는 "그래도 건물 안인데 공을 차면 되겠어요?" 하며 점잖은 발언을 한다. 뭐, 이런 장면들의 연속.

 

같은 장면들을 농활가서, 혹은 내가 사는 마을에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고 계신 시골에서 보았다면 불편할 일도, 화날 일도 없는 장면들인지도 모르겠다. 직거래 판로가 개척된 것은 분명 그 마을에 큰 경사라 할 만하고 곰팡내가 푹푹 나던 마을회관이 새단장을 한 것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게 그리도 좋아 카메라 앞에서 굽신거려야 할 만한 일일까. 카메라의 시선, 정확히 말하면 카메라가 의도한 연극의 허술함 때문일 수도 있다. 마을회관이나 직거래 등을 대가로 "촌스러운"-어떤 사람들은 '순박한'이라고 하겠지- 시골 사람들의 모습을 강요했다는 것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굴이나 꼬막이나 한철이다. 직거래를 해서 와룡리 주민들의 삶이 여유로워질 수도 있겠지만 농협도 마찬가지, 돈 버는 거 아닌가. 마을회관이 어떻게 사용되는가는 어떻게 단장했는가와 또 다른 문제다. 흙과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하얗게 윤이 나는 부엌이 정말 유용한 것일지는 모를 일이다.

 

싱싱하다고 한마디씩 하며 농협직판장에서 굴을 사가는 여인들은 '촌스럽게'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직거래로 들여온 배추를 파는 점원 역시 '촌스럽지' 않다. (자신들이 '봉사'를 한다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당췌 모르겠다.) 마을회관을 설계한 건축가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새로운 문명을 소개하는 선교사의 모습이다.

 

'도움'의 미덕은 주는 자에 의해 평가된다. 도움을 '받은/받는/받을' 사람들의 '열등함'이 그것을 보장한다. 그 '열등함'을 확인함으로써 도움을 주는 사람들은 보람을 느낀다.

직거래가 경사스러운 일이 되는 것은 그만큼 중간유통업자들의 횡포가 심하기 때문이다. 방송사의 기획은 그것의 부당함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농산물 유통구조의 문제를 지적하면 와룡리 주민들의 '열등함'은 드러날 수 없고 방송은 그/녀들을 도울 수 없다. 

 

재판정에 서는 성폭력 피해자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언제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야 하지. 집이 없어 떠도는 사람들에게 카메라가 잠시 시간을 내줄 때는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못 배웠거나 사기를 당했거나.

 

굳이 '도움'이라는 말을 살리고 싶은 건 아니지만 누군가를 돕는다는 말이 불편하고 화나는 건 속상한 일이다. 좀더 분명히 말하면, 소중한 마음들이 미디어에 의해 소모되는 것이 화가 나는 이유다.

그래, 이유가 있다. 하지만 화가 쌓이다보니 편향이 생기는 듯도 하다. 주의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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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01 12:29 2005/02/01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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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머프 2005/02/01 23:4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끝의 개인감정만을 빼면 이글은 참으로 객관성을 띤 좋은(?)글 인것 같아요. 공감 하는 부분이 많으며 특히 남을 돕는다는 말에 대해 저역시 별로 좋지 않은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돕는다는 말은 곧, 시혜나 동정이 포함된 말이 분명하거든요. 미류가 말한 열등함을 확인하는 순간 자신은 곧 어떤 우월한 입장에 서게 되며 그것은 모두가 동등하게 누려야하는 '평등한 삶'의 가장 기초를 갉아 먹는 일이기도 하지요. 못살고, 못먹고, 아프고, 힘들고..이 모든 문제는 결코 개인 스스로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면서 말입니다.

  2. 미류 2005/02/02 15:2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머프 말처럼 '도움'이라는 말이 평등을 전제로 성립될 수 없는 것이 현실인 지도 모르겠어요. 근데 저한테는 어떤 편향이 생기는 것 같냐면, 예를 들어 동남아 쓰나미 이후에 '도우러 가자'고 하면 마음이 일단 닫힌다는 거예요.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게 돕는것이든, 함께 싸우는 것이든, 미리부터 언어에 발목잡힐 필요가 없는 듯한데 자꾸 그래요. 뭐랄까, 경계심 비슷한 것이 먼저 드는 거죠. 저에게나, 타인에게나...수양이 부족한 겐가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