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류님의 [순과의 여행] 에 관련된 글.
# 공항에서 동서울터미널로 갈까, 아니면 청주나 원주가는 버스를 타서 거기서 갈아타고 갈까, 단양으로 갈까, 아니면 충주나 제천으로 내려가서 시작할까 등의 질문을 던지는 건 나. 순은 그냥 그때그때 보면서 가자, 가보고 버스시간 맞는 데로 가자며 질문을 무색하게 했다. 여행을 떠날 때 어느 정도 시간표를 맞추고 행선지를 정하는 편이더군, 내가, 웁스. 어쨌든 공항에서 한 시간 기다려 원주로 갔고 20분쯤 기다려 단양으로 갔다. 시간표를 맞추나 그냥 다니나 크게 차이는 없다.
# 노동동굴을 갔다. 고수동굴이나 천동동굴에 큰 감흥이 없었던 터라 별 기대 안하고 들어섰는데 어느 순간 수직으로 뻗어내려간 길을 만났고 멍해졌다. 다시 올라가면서 내려다본 동굴의 깊이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힘이 있어. 동굴이 정말 좋았던 건지, 같이 걷는 이가 좋았던 건지, 혹은 같이 걷는 이를 의식했던 건지.
# 석문 같은 곳은 사진 한 장에 담기는 풍경이지만 사진으로는 대신할 수 없는 풍경이었고 상선암이나 중선암, 하선암 같은 곳은 사진으로 대신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사인암도 약간, 하지만 한창 공사 중이라 충분히 보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 저녁에 영주로 넘어갈까, 소백산을 넘어 풍기로 갈까 자꾸 물은 것 역시 나. 순은 이렇다 저렇다 결정을 하지 않는다. 나는 그냥 영주 가서 잠이나 푹 잘까 싶기도 하다. 순에게도 소백산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걱정도 된다. 그런데 몸이 힘들고 마음이 지쳐 가라앉을수록 소백산을 오래오래 걷고 싶다는 욕심이 밑바닥에서 꿈틀거려...
# 천동지구로 가서 민박을 했다. 민박집 주인이 마침 동네 친구들을 불러모아 고기를 구워먹고 있었다. 멧돼지라며 먹고 가란다. 엄마랑 몇 점 집어먹으며 이런저런 얘기 들었다. 돼지고기보다 구수하고 진한 맛이 있었다. 식용으로 팔려고 동물을 기르는 것보다는 저홀로 자란 동물을 잡아서 먹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예전부터 했지만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아니더라. 일단 총을 써서 잡는 건 치사한 거다. 으...
# 천동계곡으로 비로봉까지 가는 길은 약간 경사진 산책길이라 해도 괜찮을 만큼 편안하고 정겨운 길. 정상에는 안개가 자욱해 10m 앞을 살펴볼 수 없을 정도. 눈이 내리면 장관이라는 소문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의 안락한 능선. 연화봉으로 가는 길엔 철쭉나무가 다가올 봄을 준비하며 씩씩하게 서있었고 철쭉이 피면 장관이라는 소문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군락을 이루었다. 연화봉으로 넘어가는 중간쯤에서 안개가 잠깐 걷혔고 비로봉까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아득한 길. 순은 힘든 내색 없이 곧잘 걸었다. 빨리 걷지는 못하지만 중간에 그만둔 적은 없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건네듯 내뱉었다. 하지만 희방사로 내려오는 길은 꽤나 가파르고 험해, 차라리 올라가는 것이 낫겠다 싶었고 순 역시 힘든 기색을 내비친다. 어찌저찌 산을 나왔고 해가 마침 저물었다. 오늘 쌓인 피로는 오늘 풀어야 한다며 풍기온천을 끌고가 푸욱 몸을 담갔다.
# 대략 10년 만에 다시 찾은 부석사 입구는 꽤 큰 시장이 됐더라. 사람들은 또 어찌나 많은지. 휴우. 청국장은 맛있었는데. 소수서원에서는 박물관 좋아하는 순과 그닥 들르고 싶지 않은 내가 살짝 틀어질 뻔도 했으나... 헤헤.
# 떠나는 것이 목적인 여행이라면 상관없지만 다른 공간을 만나는 것이 목적인 여행에서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 여행의 밀도를 좌우하겠더라. 하냥 빌딩 속에만 갇혀살던 나야 어디로 떠나도 그 자체가 남기는 설레임과 시원함이 있다. 하지만 어디로 떠나도 적당한 들판과 오르락내리락 능선과 바닷가 짭쪼름한 냄새와 맑고 찬 물 흘러내리는 계곡을 만날 뿐, 딱 그만큼이다. 그런데 순은 달랐다. 제주도에는 없는 널따란 바위, 구멍 숭숭 뚫리지 않은 희끄무레한 바위, 제주에는 없는 노각나무, 제주에만 있을 줄 알았는데 여기에도 있는 풀, 제주에는 없는 노란물봉선, 제주에는 작게 자라는데 여기서는 높게 자라는 꽃향유, 이런 말들이 끊이지 않는다. 순에게 다른 공간을 만나는 것의 감동은 내가 짐작하기 어려운 밀도일 것. 부럽고, 음, 쫌 매력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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