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권 시절,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들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문재인의 5.18기념식 연설을 글로 읽으며, 천사도 디테일에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봤다. 세상이 천사와 악마로 이뤄진 것이 아니니, 디테일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나, 디테일은 무언가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디테일에도 머무를 필요가 있다.
인상적인 구절 중 하나는, "오월의 죽음과 광주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세상에 알리려 했던 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을 함께 기리고 싶다며 네 분 열사의 이름을 말하는 대목이었다. 박래전 열사의 형인 박래군이 울컥하는 마음은 미처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일 듯하다. 내게는 조금 다른 사람들이 떠올랐다. 래군의 짝꿍인 종숙 언니, 조성만 열사의 이야기를 어디서든 빼놓지 않았던 문정현 신부님... 이렇게 누군가의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살아왔던 수많은 사람들 말이다.
어제 저녁에는 이내창열사기념사업회와 4.9통일평화재단에서 주최한 과거청산 강좌를 들었다. 진태원 교수가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를 몇 구절을 인용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이다." 혁명은 패배하고 누군가는 죽는다. 그러나 죽은 이들에 대한 기억을 제 것으로 삼으며 과거가 요구하는 힘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패배한 세대들의 이름으로 해방의 과업을 마지막까지 수행하는" 사람들. 물론 벤야민의 테제는 '노동자계급'과 무관하게 읽히면 안되겠지만, '해방의 과업'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모두 '이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데 나만 하더라도 5.18민중항쟁으로부터 시작된 죽음을 내 것으로 기억하지는 못한다. 책으로 먼저 만난 역사였다. 아마 다시 수십 년이 흘러 사회가 크게 바뀌었을 때, "약한 메시아적 힘"으로 '해방의 과업을 마지막까지 수행'한 사람들은 4.16세월호참사의 죽음을 제 것으로 기억하지 않을까. 그래야 한다는 내 다짐이기도 하다. 그러니 5.18과 4.16의 유사함만큼이나 그 차이가 간증하는 시대의 본질을 더욱 유심히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문재인은 연설에서 "국민의 생명을 짓밟은 국가와 국민의 생명을 지키지 못한 국가"라고 차이를 짚었다. 내가 주목하는 차이는 조금 다르다. 생명에 대한 권리를 침해했다는 점에서 둘은 유사하다. 그러나 생명과 존엄을 지킬 줄 아는 국가를 만들기 위한 과제는 그때와 달라졌다. 그리고 누구와 어떻게 만들 것인가...도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동시에 떠올렸던 사람은 최강서 열사였다. 박근혜 당선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한진중공업 노동자. 박근혜 당선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박근혜 당선이 결정적이었을, 어떤 절망감과 박탈감을 다시 헤아려봤다. 우리는 왜 그렇게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했을까. 그때 문재인이 당선됐더라면 최강서는 지금 살아있을 것만 같은데, 그렇게 확신할 수만은 없는 마음. 정치적 사건으로 계열화되지 못하여 역사적 현재가 되지 못하는 수많은 죽음들은, 누가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과거는 우리에게 어떤 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인가. 누구나 환영하고 감격할 때 박탈감을 느껴야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다시, 누구와 어떻게 세상을 바꿀 것인가...
이런 질문들을 던져준 연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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