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마르크스에게 말 걸기', 백승욱, <생각하는 마르크스>를 읽고
1.
'인문, 마르크스에게 말 걸기'에서 백승욱은 마르크스의 불귀의 점을 넘어 인문과 윤리에 관해 대화하려고 한다. 저자는 인문을 '비판적 사유'로 설명하며, '내가 타인의 해방을 위한 조건이 되며, 타인의 존재가 나의 해방을 위한 조건이 되는 관계'를 만들기 위한 윤리의 기반을 찾으려고 한다. 마르크스를 떠올리며, 저자는 인문이나 윤리의 질문을 '관계'로부터 시작한다.
2.
<포이어바흐 테제>에서 마르크스가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이라는 말로 지적했던 것,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 정치경제 비판을 시도했던 것, 완결된 것은 아니나 이데올로기 비판의 길을 열어놓은 것 등 책의 앞부분에서 다뤄온 핵심을 복기하며 저자는 마르크스 이후 우리의 사유는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을 떠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때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자기분열하는 '개념'이 필요하다며 헤겔을 인용하기도 한다. 스스로 운동하면서 동시에 한계를 갖는 '개념'을 통해 우리는 관계를 전화시킬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이 '비판'이다.
3.
그러나 우리가 문제를 사회적 관계 속에서 파악했더라도, 윤리에 대한 질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살 것인가 답을 찾기 어렵다. 마르크스가 윤리의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지만 노동계급의 해방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그 자체로 윤리의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노동자계급 스스로에 의해 전취되어야 한다. (...)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모든 인간을 위해서도, 인간과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고 주장한다." '계급'이라는 쟁점을 잠시 뒤로 미루고 이 문장을 보면 '나'에게 건네는 윤리의 질문을 만날 수 있다.
4.
억압받는 자들의 존엄은 가능한가. 억압은 구체적인 힘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억압받는다는 것은 이미 존엄이 훼손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일자리'와 '자존심'을 구분하며 존엄/위엄을 설명하려고 하는데 사실 두 가지는 실제로 구분되지 않는다. '일자리'를 박탈당했다는 것, 사실은 이미 그 전부터 '일자리'가 '타인에 의해 제공된, 그래서 언제나 회수 가능한' 것이었다는 점이야말로 '자존심'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저자의 질문은 중요하다. 다만 자기 파멸적 분노에 휘감기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로서 인간을 이해할 때, 그 앙상블을 살아가는 '나'에게서 관계의 전화 가능성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세계의 변혁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5.
저자는 책의 앞부분에서 '개인적 소유'를 설명하며 짚은 바 있던 '대체 불가능한 존재 되기'를 제시하고 억압자를 긍휼히 여길 수 있겠는가(그들이 나를 짓밟지만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것을 짓밟을 수는 없어!) 질문한다. 여기까지 나아가기 전에(여기서 멈춘다면 자기 도피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머물 것이다) 힘의 관계에서 열위에 있는 억압받는 자들이 우위에 서게 되는 순간, 혹은 그 가능성을 더 세밀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 <밀양을 살다> 서문을 쓰면서, 밀양 할매들은 이미 이겼기 때문에 싸울 수 있었다는 뜻의 문장을 썼다. 오독의 소지가 있다는 의견들이 있어 결국 삭제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 세계에서 누군가 저항하는 것은 이미 이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존 버거의 문장(<벤투의 스케치북>)을 잠시 빌려온다.
"깊이있는 정치적 저항은 부재하는 정의에 호소하는 것이고, 미래에는 그 정의가 세워질 거라는 희망과 함께한다. 하지만 이 희망이 저항이 이루어지는 첫번째 이유는 아니다. 누군가 저항을 하는 것은 저항을 하지 않으면 너무나 모욕적이고, 너무 왜소해지고,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저항을 하는 것(바리케이드를 세우고, 팔을 들고, 단식투쟁에 들어가고, 인간 사슬을 만들고, 소리치고, 글을 쓰는 것)은 미래가 무엇을 품고 있든 상관없이, 지금 이 순간을 지키기 위해서다.
저항은 영으로, 강요된 침묵으로 떨어지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저항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 만약 이루어진다면, 작은 승리가 있다. 그 순간은, 다른 순간들처럼 지나가겠지만, 지울 수 없는 가치를 얻는다. 그 순간은 지나가지만, 이미 출력이 되었다. 저항의 본령은 어떤 대안, 좀 더 공정한 미래를 위한 희생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아주 사소한 구원이다. 문제는 이 사소한이라는 형용사를 안고 어떻게 시간을, 다시 살아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가 세계 속에서, 세계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멈추지 않으면서도 ‘승리’를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소한’ 것일 수밖에 없다. 루쉰이 절망을 절망하며, 절망의 밑바닥까지 분석하고 성찰하려고 했다고 저자가 불러들일 때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질문은 “이 사소한이라는 형용사를 안고 어떻게 시간을, 다시 살아갈 것인가”로 나아가야 한다.
6.
쌍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투쟁… 이 싸움의 한가운데 해고 노동자, 할매들, 자식 잃은 부모들이 있었다. 미래에의 희망이 이들을 움직인 것은 아니다. 분노이기도 한 억울함들이 이들을 저항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억울하거나 분노한 모든 이들이 저항에 나서게 되지는 않는다. “너무나 모욕적이고, 너무 왜소해지고,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에 저항을 하지만, ‘더불어 벗할 사람’, ‘자기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497)이 없다면 저항은 불가능해진다. 억압받는 자들의 존엄은 타인과의 결속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7.
우리가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을 살아간다는 것은 ‘나’에게 특정한 관계들이 강요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계급관계뿐만 아니라 여러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나’는 힘을 주고받는다. 저항은 강요되는 관계를 벗어나는 것과 다르다. 억압받는 자들의 존엄은 강요되는 관계를 서로의 ‘기여자’(나를 일으켜 세워주는 사람)가 되는 관계로 전화할 때 가능해진다. 정리해고가 있기 전의 노동자들, 송전탑 계획이 있기 전의 주민들, 참사를 겪기 전의 학부모들. 같은 집단이지만 다른 관계로 구성될 때 저항이 시작된다. 어쩌면 남남이기도 했을 이들이 ‘동’의 조건으로 내몰린 것은 억압/폭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을 통해 규합되는 관계, 즉 이해관계의 일치가 결속의 조건이 될 때 저항은 또다른 계약이거나 구속이 되기 십상이다. ‘동’의 조건 속에서 차이를 부인하지 않으며 ‘함께’ 싸운다는 것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을 때(군자는 화하되 동하지 않으며, 소인은 동하되 화하지 않는다. 493) 서로의 ‘기여자’가 된다. 저항하는 이들이 한결같이 하는 얘기는, 함께 싸우면서야 서로를 알게 됐다는 얘기다. ‘알게 됐다’는 것은 서로의 대체불가능성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구성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동’의 조건-자본주의 생산양식 아래에서의 피억압자-을 계몽하는 것으로 저항은 불가능할 것이다.
8.
백승욱은 ‘부끄러움’이 비판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하며 ‘부채의식’과 비교한다. 나는 ‘미안함’을 떠올렸다.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어른’들이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안하다’는 말은 내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분명하게 알 때에만 사과의 말이 될 수 있다. 잘못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을 때 ‘미안하다’는 말은 내가 당신에게 힘을 가할 수 있는 관계의 우위에 있음을 재현할 뿐이다. 이런 세상을 물려줘서 미안하다는 말처럼. 백승욱이 말하는 ‘부끄러움’은 타인을 경유하되 스스로에게 가지는 감정이다. 이것은 자신이 무엇을 더 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세월호 참사는 분명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책임감’을 느끼게 했다. 어쩌면 지금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행동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책임을 발견하기 위해 저항하는 중일 것이다. 책임은 관계를 전화하겠다는 의지의 다른 이름이다. ‘나’의 책임은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에 아주 사소한 영향밖에 미치지 않겠지만 ‘아주 사소한 구원’의 시간에 가담하겠다는 의지.
9.
저자는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를 빌어 이 장을 마무리한다. 벤야민은 이 글의 뒷부분에서 독일의 사회민주주의를 비판한다. “그들은 노동자 계급에게 미래 세대들의 구원자 역할을 부여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들은 그로써 노동자 계급이 지닌 가장 강력한 힘에서 그 힘줄을 잘라버리고 있다. 노동자 계급은 이 훈련 과정에서 증오와 희생정신을 모두 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 둘은 해방된 자손의 이상에서가 아니라 억압받은 선조의 이미지에서 그 자양을 취하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를 보여주며 과거를 통한 구원의 길을 제시한 이유다. 벤야민을 조금 더 인용해보면, “자신의 시대가 과거의 특정한 시대와 함께 등장하는 성좌구조를 포착”하며 “메시아적 시간의 파편들이 박혀 있는 ‘지금 시간’으로서의 현재의 개념을 정립”할 때(‘시간이 멈춰서 정지해버린 현재’) 우리는 해방될 수 있다. 백승욱은 벤야민으로 시작하여 ‘바리케이드에 서기’, ‘벼랑이 되기’를 제안한다. 물러서지 말자는 일반적인 레토릭에 그치지 않으려면, ‘저항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 즉 ‘작은 승리’로 이미 출력된 그 순간을 재생산의 시간성 속에서 사유하자는 제안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10.
다시, 억압받는 자들의 존엄은 어떻게 가능한가. ‘억압’이 인식되는 순간은 이미 저항의 선택이 문제가 되는 순간이다. 억압을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을 통해 올바로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세계에 대한 인식을 마친 후 저항이 시작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억압을 통해서만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억압받는 자들의 곁에 설 때, 억압받는 나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희망을 통해서가 아니라 억압을 통해서, 타인의 존재가 나의 해방을 위한 조건이 되며 나의 존재가 타인의 해방을 위한 조건이 될 수 있다. ‘자기 결정에는 외부 세력이 필요하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말과 활> 3호) “자기 안에 있는 외부들을 통해 삶을 결정해가는 것”, “이미 정해진 조건으로부터, 다른 조건으로 옮겨가기 위해 기꺼이 서로의 외부세력이 되어주는 것”이 그 방법일 것이다. “앙상블이 아름다우려면, 속 깊은 외부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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