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기엔 4월이 적당하겠지만 내게는 7월의 기억이 각별하다.
7월 12일 유가족들이 국회 본청 앞 점거농성을 시작했다. 끝을 알 수 없었으니 '점거농성'이라는 말은 필요치 않았으나, 끝을 알지 못하면서도 자리를 지키기로 했으니 진정한 의미에서의 점거농성이기도 할 것이다. 같은 날 청계광장에서는 가족대책위가 집회를 주최했다. 최초였다. 5월부터 특별법 제정을 호소하고 전국을 돌며 직접 서명을 받기도 하던 가족들이 청계광장에 모였고 함께 싸우자고 제안했다. 국회나 정부가 제대로 하기를 기다리지만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제대로 하도록 우리 손으로 만들자는 제안이었다. 이제 와 세월호 참사에 대한 국가 책임이 분명해졌다면 그것은 이날 시작된 움직임 덕분일 것이다.
이틀 후인 월요일, 단식이 시작되었다. 국회에서 열 명, 광화문에서 다섯 명의 유가족이 단식을 시작했다. 광화문 농성이 시작된 날이다. 12일과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이날 광화문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덕분에 시민들이 참사 대응의 주체로 초대받을 수 있었다. 국회는 통행이 쉽지 않고 시민들과의 만남을 전면적으로 이루기에는 쉽지 않은 공간이었다. 천막 하나 없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광화문은 4.16세월호 참사의 상징적 공간이 되어 갔다. 그곳은 연대하면서 서로를 위로하고 일으켜세우는 공간이 되었다. 끝내 박근혜를 끌어내린 촛불의 공간이 광화문이었던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다.
다시 이틀 지난 16일. 3년 전 7월 16일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많이 기억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날,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탈출한 단원고 학생들이 안산에서부터 도보 행진을 해 국회로 찾아왔다. '생존학생'들과 '유가족'이 만나는 자리에 어색한 긴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부모들 마음이 다같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세월호 참사의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같은 피해자로 퉁 쳐질 수 없는 서로 다른 고통이 있다. 그러나 서로에게 힘겨운 숙제를 이들은 마다하지 않았다. 나는 이날을 피해자와 피해자가 만난 날로 기억한다.
지난주 금요일 있었던 광화문농성 3주년 문화제도 의미 있었지만, 어제 다녀온 토크 콘서트 <누가 청년의 눈을 멀게 했나>에서 만난 4.16합창단의 공연은 더 오래동안 기억에 남을 듯하다. 4.16합창단이 결성된 지는 오래되었지만 공연의 의미는 점차 변화해왔다. 초기에 사람들은 합창을 들으며 세월호 유가족들의 아픔을 되새겼다. 점차 4.16합창단의 공연은 누군가에게 위로와 용기를 건네는 손길이 되었다. 어제 메탄올 실명 피해자들 역시 위로를 얻고 용기를 낼 수 있는 시간이었을 것이라고 감히 짐작해본다.
어떤 사건의 피해자가 또다른 사건의 피해자에게 공감하는 건 당연하게 여겨질 지 모르지만 더욱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서러운 만큼 더 야속하기도 하고, 당한 만큼 더 두렵기도 하고, 외로운 만큼 더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의 맞잡은 손은 그만큼 강할 수밖에 없다. 쉽게 내밀었다가 거두는 손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는 4월의 일이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의 다른 사회로 우리를 이끄는 힘들은 2014년 7월에 시작되었다. 저절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누군가의 힘겨운 용기에 기대고 있었음을 더욱 많은 이들이 기억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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