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간이 끝나면 어떤 삶을 살고 싶으세요?” 황상기 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ㅈ이 물었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끝나고 나서도 내게는 이 질문이 계속 맴돌았다.
이 시간, 이런 삶……. 황상기 님이 벤젠이라는 물질과 그것의 허용기준 등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할 때부터 내 머릿속에는 너무나 많은 풍경들이 스쳐지나갔다. 탈핵 전문가가 되어버린 밀양의 할매, 선박 전문가가 되어버린 세월호의 부모들. 그렇게까지 되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현실 또한 선명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어.” 딸의 죽음에 대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들이 없었다. 삼성이 그럴 리가 있느냐,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 삼성을 건드려서 어쩌려고 그러냐, 억울해도 참고 살아라… 딸의 목숨값으로 얼마나 받으려고 그러느냐는 비아냥까지, 세월호 가족들이 들어보지 못한 말이 없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이야기들을 전하기 위해 찾고 찾아낸 말들이 쌓여 어느새 전문가가 되어 있는 사람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숨기고 숨기는 이야기들을 찾아내면서 이야기가 전해지기 시작하면 또 얼마나 모진 탄압들이 이어졌던가. 1인 시위를 하면 경비원들이 둘러싸고 버스로 막아버리는 것처럼 차벽과 최루액, 경찰의 스크럼 같은 것들에 차라리 익숙해져버렸던 시간들. 황상기 님이 그랬듯 “힘들다고 느끼지도 못했던” 시간들이 기약 없이 이어진다. 황상기 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형제자매들은 부모님들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부모님께 묻고 싶었던 질문들을 황상기 님에게 꺼냈는지도 모른다. 황상기 님은 다른 거 없다며 그냥 택시 운전을 하실 거라고 했다. 하지만 궁금하고 두려운 건 ‘끝’을 언제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밀양 희망버스를 제안하면서 편지를 쓴 적이 있다. 바드리마을에 사는, 내가 만난 주민의 중학생 아들을 떠올리며 이렇게 썼다. “그래서 어머니와 친구처럼 지낸다는 당신은, 그녀를 말리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싸워야 할지, 어떻게 싸워야 할지, 싸우다 보면 풀릴 문제이기는 한 건지, 앞을 내다보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안개에 쌓인 듯 외로운 시간을 꾹꾹 밟아가며 살아내는 그녀를 보는 것이 너무 괴롭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그만두라는 말이 그녀의 한 세계를 포기하라는 말인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아무 말도 못하고 끙끙 앓는지도 모르겠어요. 물론 당신은 누구보다 든든하게 그녀를 지지하고 격려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당신은 그녀가 살아내는 삶이 무엇이든 그것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일 테니까요.”
엄마한테 묻고 싶지만 차마 묻지 못했다는 ㅈ의 마음이 그랬던 것 아닐까. ㅈ의 이야기를 들으며 형제자매들도 모두 비슷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짐작해봤다. ‘끝’을 바라지만 그게 언제쯤일지 막막하고, 그래서 ‘끝’을 말하는 것이 혹시 그만두라는 말처럼 들리진 않을까 걱정되고, 하지만 쫓기듯 살아내야 하는 시간으로부터 다른 시간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같은 것…….
그래서 내게는 ‘차마 묻지 못하는 마음’이 소중하게 다가왔다. 이야기들 자체보다 어떤 이야기들을 차마 묻지 못하거나 아직 묻지 못하는 마음들. 물론 우리에게는 대화가 필요하고 더욱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힘들 때는 어떻게 견뎠는지 물어보는 질문에 황상기 님은 “같이 얘기하면 스트레스가 좀 풀렸다”고 하셨고,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상당히 많아져서” 요즘은 힘들지 않다고 말했다. 뒤풀이 자리에서 이 말을 떠올린 형제자매들이 많았던 이유도 대화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ㅇ은 친구들과 얘기하면서 풀 수 있었다고 했고 ㄱ은 친구들과 거의 말하지 못했다고 씁쓸해했다. 하지만 이런 시간을 보내며 우리에게는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누군가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시간을 기다려주는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 기다림이 ‘차마 묻지 못하는 마음’들이지 않을까.
여행을 준비하는 회의에서 ㅅ과 ㄴ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찾던 기억도 떠올랐다. 간담회를 다니며 불편하거나 힘들었던 경험들을 털어놓으며 황상기 님에게 어떤 질문을 어떻게 건네야 할지 고민하던 모습들. 대화에서 중요한 건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찾는 것뿐만 아니라 상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일지 찾는 것이기도 하다는 감각이 우리에게 있었다. 그렇게 ‘듣는 귀’들이 많아질 때 우리는 또 더욱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
묻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시간은 아프고 힘겹다. 그러나 서두른다고 풀리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서두른 위로가 비수가 되기도 하고 섣부른 말에 후회가 더 아프기도 하다. 쉬운 질문에 쉬운 대답은 여백을 남기지 않는다. 머뭇거리는 질문과 입에서 맴도는 대답들 속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야말로 대화의 소중한 선물이지 않을까.
묻고 말하는 데에 서로 곁눈질할 사람이 우리 곁에 있다는 걸 기억하면 좋겠다. 부모님에게 묻고 싶은 이야기를 곁눈질할 수 있었던 황상기 님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묻고 싶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곁눈질할 수 있는 친구들이 많다. 황상기 님은 형제자매들에게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뉴스를 보며 소식을 듣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소식들을 겪는 사람들을 짐작해보고 헤아려보는 것이 관심이지 않을까.
세상이 어떻게 잘못됐는지, 악한 권력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세상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를 깨달을 때 세상이 달라진다. 누군가 살아내는 기약 없는 시간의 외로움과 막막함을 눈치챌 때 함께 바꿀 수 있는 것들이 보인다. 우리에게는 이미 우리가 보낸 시간들 속에서 눈치챌 수 있는 것들이 참 많다. 곁눈질 할 수 있는 사람들도 많아서 우리가 품을 수 있는 세계가 참 넓다. 그러고 보면 ‘이 시간’은 부모님들의 시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들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들에게도 질문을 건네보면 어떨까. “이 시간과 함께 어떻게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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