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보다 배운 것도 많고 생각할 거리도 가득했던 시간. 20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도 인상적. ㄱ 역시 어떤 현상인지 궁금해했다. 여러 맥락이 있겠지만, 최근 수 년 동안 '일본군 위안부' 관련 운동이 재점화한 것과 깊은 연관이 있을 듯하다. 가해국의 사과를 요구하는 피해국의 국민으로서, 사과를 해야 할 가해국 국민의 위치를 자각하는 데에 이르지만, 국가와 개인 사이를 가르는 수많은 쟁점들 또한 확인되었으므로. 발표와 토론을 들으며 끄적였던 메모들. 

 

# '가해자'로서 말하는 것이 결백으로의 도피가 되지 않으려면, '가해자의 말하기'는 가해자라는 정체성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녀의 말하기를 가해자의 말하기로 들을 귀를 가졌을 때 가능하다는 점이 중요하다.

피해자의 말하기는 피해의 증언이 아니라 존엄의 선언. 내가 어떤 일을 당해서 얼마나 힘든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렇게 당해도 되는 사람 아니라고, 죽어도 되는 사람 아니고, 부서져도 되는 사람 아니라고 말하는 것. 피해자가 피해를 입은 사람이기 이전에 권리를 가진 주체임을 이해해야 한다. (이걸 놓칠 때 중귀련이 중국을 맹목적으로 옹호하는 경향 같은 것이 생기게 된다.)

피해자의 말하기는 피해자로서의 말하기에 그치지 않는다. 미투에서 말하지 못하거나 말하지 않아왔던 순간들을 고백하는 것은, 침묵하며 구조를 강화시킬 수도 있는 가해자 위치에서의 말하기와도 연결된다. 정체성의 선택보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발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며, 사회가 그 행동을 이해하는 것이 더더욱 중요하다.

비슷하게, 후지이 다케시가 발표했던 '가해자의 말하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해를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을 깨달을 수 있으며 내가 져야 할 책임이 무엇인지 알게 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그런 점에서 미투의 가해자들은 아직 가해자로서의 말하기를 시작하지 았았고 피의자로서만 말하고 있다. (중귀련의 사례는, 시베리아-자유시간-고봉밥-학습-말하기와 듣기의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것은 미투의 가해자들이 가해자로서 말하기를 시작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시사한다. 미투의 가해자들을 말하게 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시베리아다. 인간으로서(공인으로서가 아니라) 해서는 안 될 짓을 했고 인간으로 취급당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하는, 반성의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추락의 경험 말이다.)

3부 심아정의 발표에서 '가해자를 고통의 광장에 세운' 괴로움은 한편으로는 우리가 어떤 광장을 준비할 수 있는지로 질문을 전환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의미 깊었다. 가해자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가해자를 말하게 할 수 있는 사회의 역량이 문제가 된다는 것. 

 

# 무엇에 대해 '가해자'의 자리에 선다는 것일까. 전쟁범죄와 전쟁을 구분해서 접근할 필요가 있어보인다. 민간인학살이라는 전쟁범죄는 구체적인 행위이며 책임을 져야 할 가해자나 피해를 입은 피해자가 분명할 수 있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이라는 '구조' 또는 '역사'는 가해와 피해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부적절하다.

베트남정부는 미국에 맞서 승리한 해방전쟁으로 베트남전쟁을 규정한다. 그러한 역사 해석은 피해자들의 피해 주장을 어렵게 만드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박근혜 정부의 한일합의에서도, 한국 정부가 피해자를 억압하는 또다른 가해자였던 것은 분명. 그러나 이것을 '가해자'라는 프레임으로 접근하는 것은, 가해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는 운동에서 논점을 흐리는 효과도 낳는다.

우리가 저마다의 위치를 이해하는 데에도 구분이 필요하다. 학살에 대한 나의 위치와 베트남전쟁에 대한 나의 위치는 다를 수밖에. 2부 토론에서 '우리는 모두 이미 참전 중.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참전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라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는데, 이걸 더 밀고 나가면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개회사를 했던 베트남의 하민홍 교수가 스스로 참전군인이기도 했다고 소개했듯이 참전 중이라는 것은 가해자라는 위치와 동일할 수 없다. 나는 무엇에 맞서 어떻게 싸우고 있는가가 중요해지는 것.

전쟁범죄에 주목하는 것이 베트남전쟁의 정치적 성격에 대한 판단을 우회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 3부의 마지막에 참전군인으로 자신을 소개한 분이 '우리는 한 민족의 독립을 망쳤던 것'이라는 성찰을 강조한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참전 자체가 아니라 민족해방과 독립을 억압한 편에 있었다는 점 말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전쟁에 대한 고민으로도 이어진다.)

전쟁범죄의 진실을 밝히는 것과 전쟁을 기억하는 것은 다르다. 학살에 대해 국가가 사과하는 것과 전쟁에 대해 베트남 민중의 고통을 소비한 점을 사과하는 것도 다르다. 문재인의 현충일 연설과 베트남 방문 연설 사이의 괴리는 사실상 괴리가 아니라 여전히 책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동일한 한계.  

 

# 여성은 남성과 다르게 전쟁을 겪는다. 그러나 여성이기 전에 사람으로서 전쟁을 겪는다. 문제는 여성의 전쟁경험 재현이 '비남성'으로서만 이루어진다는 것. 이것은 여성의 전쟁경험을 남성적으로도(전사와 영웅으로서) 재현한다고 해서 해소되지 않는다. 기억의 역사화에 대한 토론이 있었고, 공통기억을 만들어야 한다, 차이의 기억이 더 필요하다, 공통기억은 불가능하며 기억을 말할 공통의 장만 가능하다, 공통기억을 만들려는 도전 속에서 차이의 기억이 의미있게 된다는등의 주장들이 있었다. 어떤 방향이든, 베트남전쟁에 대해서는 역사투쟁이 이제 시작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싶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8/04/21 18:27 2018/04/21 18:27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aumilieu/trackback/979

댓글을 달아 주세요